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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 암살한 육...
minj**** 조회수 9,577 작성일2019.05.09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 암살한 육하원칙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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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봉
수호신
2019 생활 분야 지식인 곤충류, 거미류 5위, 생태학 9위, 청소, 수리 13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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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께서 1905년에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쏴서 죽였다

이유는 우리나라를 침탈한 원흉이기 때문이다

2019.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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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신
 안중근과 이토의 이야기를 적어드립니다.
저는 우리 한국인들이 역사적 객관적으로 알기 바랍니다.
실체가 없는 반일종족주의 버리고 세계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직 한국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조선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추가로 당시 이야기와 시대별 링크를 해드립니다.
많은 논문과 자료가 있으니 추가로 알고 싶을시
첨부해 드립니다.
.

일본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조선 병합에 반대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독자적인 문화를 1천년 이상 갖는 민족을 식민지로 병합한다면 일본으로서는 큰 후환'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입장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스스로 부국 강병해지게끔 이끌어서 대한제국을 일본과 협조적인 세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토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적도 있다. 

“나는 한국 국민과 일본국민을 화해시키고 양자간에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이끌어내야할 입장에 서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토는 1905년 한국의 재정고문으로 파견된 메가다를 일본으로 쫓아버린 사건도 있었다. 메가다가 일본의 화폐개혁과 재정개혁을 단행한 이후 곧바로 토지조사 사업을 시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토는 그것을 막았고 그래도 메가다가 말을 듣지 않자 결국 그를 일본본토로 보내버렸다. 이처럼 이토는 조선에 대한 식민사업을 하는 것이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보았던 것이고, 나름대로 상황을 관찰하면서 다른 길을 모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토는 일본 뿐만 아니라 세계각국에서 '현자'로써 존경받던 위대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조선에서조차 이토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다음은 해외의 저명한 인사들이 이토를 논평한 것이다.

“이토히로부미공은 일본의 가장 위대하고, 유명한 정치가이다. 그의 한국 부임은 대단한 자기희생이었다. 이토공이 한국의 체계를 개선시키기 위한 계획안건들을 내놓았을 때 나의 마음은 요동쳤다. 거기에는 개혁, 공정, 알선이 있었다. 그것은 조선이 범한 모든 잘못된 체계들을 구제 시킬 것 같았다.”
캐나다인 져널리스트 흘레데릭·아서·막켄지 (1906년 런던·디일리 메일지) 

“고결한 정치와 도덕을 중요시했던 진보적이고도 원만한 이토 총감에 의하여 한국인은 암흑 시대에서 벗어나 광명세계에 들어섰다. 그들은 과거의 오래 된 악정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의 생명 재산이 확실히 보호되는 등, 모든 면에 있어서 3년간에 2배의 진보를 이루어냈다.”
선교사 랏드 박사 


위대한 이토의 죽음은 세계각국의 저명한 인사들에게 엄청난 비통함을 안겨줬다. 심지어 '조선에게까지' 그러한 감정을 유발시켰다. 다음은 이토의 죽음을 애도한 해외 인사들과 대한제국 황제의 논평이다.

----------이토히로부미공 암살에 대한 독일인의 논조 
“한국인이 공을 암살한 것은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특별히 슬퍼해야 할 사건이다. 공은 한국인의 가장 좋은친구였기 때문이다.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강경적인 태도로 한국에 임하자마자 일본은 의외의 반항을 만났다. 한국인들이 참혹하게 일본 거류민들을 살상했기 때문이다. 그 때 일본의 무단파 및 언론기관은 그 끔찍한 사건을 벌인 이들을 발복색원하자고 목청을 드높였지만 오직 공만이 온화방침을 고집해여 그 강경책이 벌어지지 않았다.”

“당시 한국의 정치는 철두철미하게 부패하고 있었다. 공은 올바른 개혁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일본 통치하에 있는 것이 오히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자발적으로 깨닫게 해주려고 60세를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통감이라고하는 다난의 일자리를 맡았다.”
독일인 엘윈·belts 박사 

----------이토공암살에 대한 러시아인의 논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한심한 사건이다. 공과 같은 대위인의 서거는, 일본의 손실 뿐만이 아니라, 우리 러시아의 손실이며, 한국의 대손실을 낳게 할것이 자명하다.”
토우신 철도 장관 호르왓트 소장 <하얼빈·웨스트니트크지>

----------이토공암살에 대한 한국 황제의 논조
“이토를 잃음으로 인해, 동양의 인걸이 없어졌다. 공은 우리 나라에 충실과 정의를 세우기위해 장백산에 뼈를 묻을 각오로써 한국의 문명발달에 힘쓰며 양언하고 있었다. 비록 이토가 일본의 정치가라고 해도 그처럼 동양의 평화를 기원한 사람은 없다. 실로 이토는 우리 나라의 자부이다. 그 자부에 위해를 주는 사람(안중근)이 있다고 하면, 사물의 이사를 풀지 않는 유랑인일 것이다. 이토를 잃은 것은, 우리 나라와 일본 뿐만 아니라, 동양의 불행이다.”
10월 27일 대한제국 황제(고종) 


이토의 암살로 인해 비통해한 것은 조선의 왕실뿐 만 아니었다. 수많은 조선의 관민들은 그것에 경악하여 이토에게 사죄·추도의 뜻을 보냈다. 11월 4일 이토의 국장에는 한국의 칙사 초정부 대표자등이 다수 참례했다. 같은 날 서울의 장충단에서는 이완용 수상의 주최로 조선의 관민1만명이 참례해 추도회가도가 개최되어 추도회는 전국 각지로 퍼졌다. 

1개월 후 11월 26일에는 한성부 민회, 그 다음날은 대한 상무국 총회, 12월 13일에는 영도우지가 각각 추도식을 주최했다. 조선의 관민들은 이토의 죽음에 대해 '추도에 그치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은 안중근의 그 범죄에 대한 것을 '대신 사죄'하기 위해 전국의 13도 곳에 호소해 「도일 사죄 13 도인민 대표 임시 회의소」를 건립하기도 했다. 또 이토공을 민 제묘와 같이 신으로서 모시는 운동이나 그의 동상이나 송덕비를 건립하는 운동까지 일어났다.

이처럼 당시 조선의 관민들은 자발적으로 이토히로부미를 '동양의 영웅' '조선의 대생불'로 존칭하며 숭배를 했다. 반면 당시 , 뤼순 감옥에 투옥되었던 안중근에게 면회가는 조선인은 단 한명도 없었다. 충분히 면회갈 여건이 가능했는데도 말이다.

출처 :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



1909년에 조선인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저격한 사건은 잘 알려져 있는데,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어 쉽게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재미있는 해석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살해함으로써 일본의 고질병인 번벌정치가 마무리되어 20세기 초반 일본이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이 의견은 이토 공이 명치 유신 이후 일본에서 사쓰마-죠슈 독재를 유지해 온 중심인물이었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이토 공이 암살된 이후 1910년대 말 사쓰마 조슈 지역의 권력독점 시대가 마무리되어 이후 상당한 수준의 국민 대통합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는데, 1920년대 반 사쓰마 조슈 연합의 주도로 일본에서는 국가 표준말 정책이 강화되는 한편 국민 내부의 지역차별 행위가 소멸했고 이는 결국 분열되어 있던 열도의 다양한 지역과 인종간에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장은수, 20세기는 독일, 일본 21세기에는 한국이 세계를 주도한다, 1995) 이같은 해석은 장은수씨가 오늘날 한국의 고질적인 경상도 독재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과 독일의 사례를 연구하면서 제시한 것인데, 특이하고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필자의 해석인데, 이토 암살사건은 일한합병을 20년 정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와 조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스스로 을사년 신협약의 체결을 주도하고 조선의 초대 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는 정치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일본에 부담이 되는 조선 합병을 결코 원하지 않았으며 이는 다만 일진회 등 조선의 혁명세력이 청원하던 바였으나, 안중근의 이토 살해사건으로 인해 일본의 여론은 급속히 합병으로 기울게 되었으니 안중근은 그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애국을 한 셈이 되었다. (김완섭, 친일파를 위한 변명, 2002, 춘추사) 

물론 안중근 본인은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이같은 결과들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한데, 그는 이등박문을 제거하게 되면 조선이 다시 독립할 수 있고 동양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어떠한 중요한 사건을 만들어낸 사람의 의도와 그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것 역시 역사를 평가하는 일을 힘들게 만드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된다. 

한국인들에게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조사를 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세종대왕, 이순신 제독, 김구, 안중근 등이 인물들이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 세종과 이순신은 국제적인 기준으로 보아도 한국의 영웅으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들인데, 세종은 한글 창제 등 수많은 업적으로 조선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성군이었으며 이순신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낸 훌륭한 제독이었기 때문이다. 세종과 이순신은 한국인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사람들도 인정하고 존경하고 있으므로, 한국이 낳은 국보급 인물들이라고 하겠다. 

여기에 비하면 김구나 안중근 같은 인물들은 비교적 최근의 역사에서 일본에 저항해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인데, 사실 인물 자체로는 어떤 점이 훌륭하다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즉 이같은 인물들은 한국의 비정상적인 반일교육이 만들어낸 가짜 위인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비하면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일본의 이등박문이나 메이지 천황은 서구의 아시아 침략이 절정에 달해있을 때 일본의 부국강병을 이끌었던 위대한 지도자들로서, 일본이 세계에 자랑할만한 국보급 위인들이라고 하겠다. 실제로도 오늘날 세계 역사학계에서 메이지 천황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비슷한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이등박문 역시 당시 독일의 비스마르크, 청의 이홍장과 함께 세계 3대 정치가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에 비해 김구나 안중근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만약 누군가 미국이나 유럽의 역사학자들에게 안중근과 김구를 아느냐고 물어보고 돌아다닌다면 매우 실망스런 결과를 얻게 될 것이 분명하다. 

김구와 안중근은 조선의 혁명기에 낡은 왕조에 충성하면서 변화에 극렬하게 저항했던 보수반동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김구는 1896년 조선의 황해도에서 스치다 士田라는 나가사키 현 출신의 상인을 아무런 이유 없이 살해한 뒤, 관헌의 체포를 피해 중국으로 도망친 殺人鬼인데,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그 왜놈을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질했다. 아직 2월 날씨라 마당은 빙판이었는데, 피가 샘솟듯 넘쳐서 마당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왜놈의 피를 움켜 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발랐다. 

김구는 당시 객주에서 우연히 신분을 숨기고 있던 스치다를 발견했는데, 단지 일본인으로 생각되었고 閔后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아서 복수심에 불타 이처럼 처참한 살인을 행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유교 교육을 받은 無知莫知한 조선인이라지만 추정만으로 이런 잔인한 짓을 저지른다는 타고난 살인마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인물이 이후 관헌을 피해 중국으로 달아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것을 만들어 소위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었으니 그 운동의 수준이 어떠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894년 이후의 조선 정세는 친일 혁명세력과 반일 수구세력의 전쟁터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선의 내전은 1895년의 단발령과 1907년의 군대해산이라는 두 가지 사건을 계기로 격화되었다.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조선 유교사회와 완전히 결별을 각오해야만 하는 상징적인 조치로서, 당시 조선의 혁명가들은 궁궐 앞에 대포를 설치해놓고 국왕의 頭髮을 잘랐다. 국왕의 단발에 성공한 혁명세력은 
전국에서 강제로 단발을 실시했는데, 이 때 김구와 같은 수구세력들이 군대를 일으켜 저항했으므로 그 과정에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겨우 머리카락 때문에 라고 파악해서는 안 되는데, 당시는 頭髮을 자르는 문제가 혁명세력과 수구세력이 충돌하는 戰線이었기 때문이다. 

1907년 조선의 혁명세력은 수구세력의 首魁인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뒤 군대를 해산했다. 이 때 해산된 군인들은 조선왕조에 충성하는 수구파들과 연합하여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 때의 내전은 2년간 지속되었다. 안중근은 이 2차 내전에 참가한 수구반동파였으며 이토 공은 그 와중에서 희생된 것이다. 안중근은 이토 공을 살해한 뒤 일본제국의 법정에서 자신은 대한제국의 군인이며 한국과 일본은 전쟁 중이므로 포로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하였는데, 내전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그의 주장은 어느 정도 수긍할만한 점이 없지 않다. 따라서 안중근의 죄는 살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역을 했다는 데 있는 것이다. 

역사의 올바른 전진을 가로막고 과거로 회귀하려는 관성집단을 우리는 흔히 수구반동 세력이라 칭하는데, 이 같은 반역의 무리들이 그 뜻을 행동으로 옮기고 그 과정에서 살인을 저질렀다면 백번 죽어 마땅한 것이다. 또한 역사의 전진을 위해 반역의 무리들을 처단하는 살인은 정당한 것이니, 살인 자체는 범죄가 아니되 어떤 뜻으로 어떤 상황에서 살인을 했는가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현대의 태평성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든 살인을 죄악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많은데, 지나간 시대의 혁명기를 평가할 때에는 살인에 대해서도 보다 능동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옳다. 즉 혁명의 과정에서 더욱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살인이 불가피하다면 이는 주저 없이 행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안중근은 1879년 조선의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선의 양반계급이었으며, 안중근은 어린 시절부터 글 읽기보다 무술에 열중했던 무인 기질의 인물이었다. 안중근의 아버지는 1894년 동학에 의해 전쟁이 일어나자 군대를 조직해 동학군을 진압했는데, 안중근도 이 때 부친을 따라 전투에 참가하였다. 조선왕조의 지배계급으로서 안중근의 수구반동적인 성향은 이때부터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후 안중근은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에 입교하였고 프랑스 신부로부터 신학문과 프랑스어를 배웠다. 안중근은 1907년 고종의 축출과 군대해산으로 조선에서 2차 내전이 발생하자 수구파에 가담해 싸웠다. 그는 오늘날 블라디보스톡 근처인 연해주로 가서 반란군을 조직, 주로 일본군의 부대를 기습하는 게릴라전을 펼쳤다. 1908년에는 함경북도 경흥까지 쳐들어와 혁명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는 1894년에 부친과 함께 동학 혁명군을 토벌했던 반동적인 성향을 되풀이한 것이다. 

당시 안중근이 소속되어 있던 朝鮮 傀儡軍은 연해주 일대의 100명도 안되는 소규모 부대로서, 1908년 함경북도 회령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참패한 뒤에는 흔적도 없이 해산되어버렸다. 이는 연해주 일대에 이주한 조선인들이 이같은 흉악무도한 수구파들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릴라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안중근은 1909년 3월 몇몇 과격분자들을 모아 단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조직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손가락을 잘랐다. 그 해 10월 伊藤博文 공이 러시아 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 행동에 나섰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假裝, 하얼빈 驛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고 환영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이토 공에게 권총을 발사하여 3발을 명중시켰다. 

이토 공의 얼굴을 모르던 안중근은 처음 기차에서 내리던 이토의 수행원에게 총을 쏘았고, 이어 이토에게도 사격을 가했다. 역에서 총성이 울리자 역을 경비하던 러시아 병사들과 환영군중들은 일제히 총소리가 나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안중근은 현장에서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었고, 이토 공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그는 숨지기 전 자신을 저격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朝鮮 義烈團의 안중근이라는 답변을 듣고 ‘바보 같은 놈’ 이라고 크게 탄식한 뒤 숨을 거두었다. 
처음 안중근의 신병을 확보했던 러시아는 이 사건의 정치적인 중요성을 감안, 곧바로 범인을 일본 총영사관으로 넘겼다. 일본 정부는 곧 안중근을 뤼순으로 이송하여 뤼순감옥에 수감하였다. 
그 해 겨울 재판이 시작되었는데, 안중근은 자신이 조선의병의 참모중장이라고 주장하였고, 일본과 조선은 전쟁 중이며 자신은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조선군대의 장성으로서 전쟁행위를 수행한 것이라 주장했다. 즉 대한의용군 사령관으로서 대한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교란자인 이토 공을 총살했으니 포로 대우를 해달라는 것인데, 한국의용병 참모중장이라느니 대한의용군 사령관이라느니 하는 것은 스스로 아무렇게나 지어 붙인 거짓 직함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당시 신속한 조선혁명의 진전에 불만을 품은 몇몇 수구파들과 당을 지어 인민의 생지옥인 조선왕조를 재건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안중근은 뤼순의 일본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10년 3월26일 처형되었다. 만약 일본이 아니었다면 즉 조선이나 청국, 혹은 러시아였다면 그는 간단한 절차를 거친 뒤 즉결처분되었을 것이 분명한데, 안중근은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의문이다. 

일국의 최고 정치가를 암살한 범인에게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기소와 변론, 최후진술을 거쳐 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또한 범인의 주장을 충분히 경청하며 자서전을 출판하도록 배려하는 등의 관대한 제도는 당시의 세계 각국의 야만적인 정치 행태를 감안할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초 담당검사는 이 같은 안중근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여 무기징역을 구형하려 하였으나, 극형을 구형하라는 본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어쩔 수없이 사형을 구형하였다고 한다. 즉 당시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안중근은 이후에도 살아남아 자신의 터무니없는 논리를 선전하고 다녔을 것이라는 얘기인데, 이는 다른 민족의 입장을 십분 배려하는 일본인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친 처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안중근은 이듬해인 1910년 2월 사형 집행일이 다가오자 독실한 천주교인으로서 조선대교구의 뮈텔 주교에게 마지막 고해성사를 부탁했다. 그러나 뮈텔 주교는 안중근을 심하게 비난했다. 뮈텔 주교는 당시 일기에서, “천주교인으로서 살인을 저지른 안중근의 행위는 어떠한 이유로도 용서받지 못할 일이며, 이토 공은 그동안 조선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조선인들은 그를 은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단지 침략의 원흉으로만 생각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조선인들이 이토의 죽음에 환호하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라고 적고 있다. 뮈텔 주교가 끝내 執典을 거부하자 안중근의 세례를 담당했던 다른 조선인 신부가 뤼순으로 가서 안중근의 최후 안식미사를 집전했다. 

이 같은 흉악범 안중근에 대한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평가는 어떠한가. 놀랍게도 거의 일치하고 있다. 안중근은 조선민족의 영웅이며 이등박문은 침략자라는 것이다. 한국의 거리에는 태극기와 함께 안중근의 손도장이 찍힌 大韓國人이라는 휘호를 붙인 차량들을 흔히 발견할 수 있는데, 이처럼 안중근은 한국인들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만고의 애국자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은 전 국민에게 조선혁명의 완성이었던 일한합병을 전면 부정하고 미개한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인정하도록 반일 세뇌교육을 강요하고 있는데, 이 같은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는 그다지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마저도 이 같은 시각에 동조하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일본에 오기 전까지는 일본 사회의 이 같은 시각에 대해 알지 못했다. 한국에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이후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사형 당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이등박문은 일본을 위해 일하다 순국한 애국자로 인정받고 있으며 안중근 또한 한국에서 대표적인 애국자로 추앙 받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일본인에게 안중근은 현대 일본의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로, 한국인에게 이등박문은 조선을 침탈한 원수로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은 한일관계의 비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그러나 이것은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을 뿐, 일본에서 안중근을 ‘현대 일본의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로 생각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일본인들은 이등박문을 일본의 국부로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안중근을 일본의 원수로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다. 

심지어 오늘날 일본의 역사 바로잡기 운동에서 중심에 서 있는 ‘만드는 모임’에서도 안중근은 한국의 영웅이다, 안중근을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있다는 발언이 나오고 있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등박문은 일본의 위대한 인물이다. 타고난 강골에 건강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사망할 당시 68세였으니 100년 전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장수한 편에 속한다. 이 때문에 이토 공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러·일 전쟁 당시 旅順 공략전을 지휘한 노기 대장은 “실로 죽을 장소를 잘 얻은 사람이다”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근대 일본의 아시아 해방전쟁을 지휘하던 노혁명가가 만주에서 조선인 수구반동에게 살해당했으니 이는 군인이 전장에서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영광스러운 죽음이라는 의미이다. 

1841년 현재의 山口縣인 죠슈에서 태어난 이등박문은 20대인 1860년대 봉건 막부를 타도하는 혁명전쟁에 참여해 수없이 많은 사선을 넘나들었던 혁명가였다. 메이지 혁명이 성공하자 스스로 정권에 참여하게 된 이토는 1870년대 이노우에와 함께 영국에 유학하면서 메이지 혁명의 기치인 존왕양이尊王攘夷 중 양이攘夷 노선을 포기하게 된다. 애국심에 불타던 대일본제국의 청년 이토의 눈에 유럽인들은 단지 침략자로서만 비쳐졌으나, 막상 스스로 유럽을 견학하게 되자 유럽이 근대 문명의 발상지이자 산업혁명의 기지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후 이토와 이노우에는 일본이 유럽에 너무도 뒤떨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하는 노선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토와 이노우에는 당시 서구 문물을 체계적으로 학습한 일본 신세대의 대표격인 인물들이다. 스스로 혁명에 참여해 봉건체제를 타도한 혁명가들이 선진국에 유학해 근대국가 건설에 꼭 필요한 각종 지식을 습득해 왔으며, 또한 이들의 지식이 그대로 신국가 건설에 반영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일본이 당시 얼마나 축복받은 나라였는가를 보여준다. 이같은 일이 각 단계별로 모두 힘들고 희귀한 일이기 때문에 근대일본의 부상은 세계사에서 하나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사상을 지닌 청년집단은 어느 나라에나 나타나게 마련이다. 조선에는 김옥균과 박영효로 대표되는 전투적인 개화당이 있었으며 청에는 이홍장과 원세개가 있었다. 당시 이들은 모두 권력의 중심에 있었으나 위에 말한 일본의 과정 중 조선의 개화당은 봉건체제를 타도하는 첫단계부터 실패하고 말았으며, 청의 신진세력들은 아예 혁명을 시도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나약하게 구체제와 타협하고 말았던 것이다. 근대 일본의 건설에서 이처럼 기적과 같은 과정이 순탄하게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은 역시 막부시대 축적된 일본의 발전된 봉건제도가 뒷받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가 지휘한 독일의 통일과 부국강병책이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은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독일에서 낡은 체제가 파괴되고 혁명의 기운이 자라났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없었다면 비스마르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오랜 쇄국정책으로 이같은 외부의 혁명이 유입될 수 없었던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독일과 같은 수준의 부국강병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등박문은 비스마르크보다 운이 더 좋았다. 프로이센의 총리였던 비스마르크는 당시 35개 군주국과 4개 자유도시로 분열되어 있던 게르만민족을 통일시키기 위해 수없이 많은 정치협상과 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오스트리아의 방해공작으로 대게르만주의에서 소게르만주의로 후퇴한 이후에도 비스마르크의 독일연방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서 헤아릴 수 없는 생존의 위험에 직면했던 것이다. 반면 일본은 느슨하기는 했지만 오랜동안 막부정권에 의해 통일국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존왕제 혁명이 성공한 뒤에도 섬나라이며 아시아의 동쪽끝이라는 이유로 열강에 의해 거의 방해받지 않고 순조롭게 신국가건설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홍장과 비스마르크, 이등박문을 비교해 볼 때 중국의 신진세대들이 왜 서태후를 죽이고 일본이나 독일처럼 입헌군주제로 발전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나는데, 이는 역시 중국에 봉건제도가 없었다는 사실로 귀착되는 것이다. 즉 이토와 이홍장의 차이가 당시 일본과 중국의 차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일본과 독일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입헌군주제의 통일국가를 건설했고, 결국 부국강병에 성공해 산업혁명의 본거지인 영국보다 더 강력한 산업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독일연방의 탄생은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이 주도했고, 대일본제국의 탄생과정에는 이토의 죠슈-사쓰마 연합이 주도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이처럼 이등박문과 같은 자질있는 지식인 혁명가가 스스로 성장해가면서 시종일관 격변기의 일본을 이끌었다는 것은 일본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즉 이등박문이라는 인물은 일본에게 주어진 신의 선물과 같은 존재였다고 생각된다. 이등박문은 원래 하야시 도시스케 林利助 라는 이름을 가진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으나 하급무사의 집안인 이토 家의 양자로 들어가 무사의 신분을 가질 수 있었다. 청년기 이등박문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에서 수학했는데, 이 또한 천운을 만난 것이다. 요시다 쇼인은 아무런 외국 견학이 없이 스스로 눈을 뜬 일본의 개화1세대로서 이 송하촌숙으로부터 일본의 근대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1854년 페리제독의 함대에 몰래 올라타 미국에 밀항을 시도한 사건으로 유명한 요시다 쇼인은 1830년 하기의 하급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난 개화지식인이다. 페리 함대에 의한 불평등조약에 불만을 품고 막부에 저항하다 30살의 나이에 막부 독재자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송하촌숙에서 기도 다카요시, 다카스기 신사쿠 高衫晋作, 이토 히로부미 등 90여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을 계기로 삼아 더더욱 막부타도 운동에 헌신했고, 결국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주역이 되었다. 그를 신으로 모시는 쇼인 신사와 그가 강의하던 쇼카손주쿠는 오늘날에도 야마구치현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남아있다. 

조선에도 비슷한 시기 유대치라는 선각자가 나타나 양반과 왕족인 김옥균, 박영효 등을 교육시켜 개화당을 결성했으니 유대치-김옥균의 관계는 요시다 쇼인-이등박문의 관계와 놀랄만큼 비슷하다. 만약에 조선에서 개화당이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고 이들이 일본과 협조하여 조선 혁명을 이끌었다면 아마도 조선은 뒤늦게나마 일본과 함께 아시아 해방의 중심국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이 불가능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역시 아시아에서 일본만이 그 같은 신속한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발전된 사회 경제구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등박문은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뒤 다시 1870년에는 화폐제도와 은행제도를 조사하기 위해 미국에 파견되었다. 이등박문의 영국 유학과 미국 유학은 모두 정부 관료의 자격으로 공식적인 견학이었으며 그가 습득해 온 선진국의 지식과 자료들은 모두 그대로 근대 일본제국을 건설하는 데 이용되었으니, 조선이나 청국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등박문이 일본 정계의 1인자로 부상한 것은 1880년대 초였다. 당시 일본은 사이고가 주동한 세이난 전쟁이 진압된 이후 다시 자유민권운동, 즉 급진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이 때 정부 내 급진파들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즉시 1882년에 헌법을 제정하고 1883년에 영국식 의회와 정당을 창설하고자 했는데, 이는 인기에 영합하는 전형적인 대중추수주의적인 행태였다. 이에 분노한 이등박문은 정부 내 동지들을 규합하여 북해도 개척에 관련된 비리 스캔들을 문제 삼아 급진파들을 축출하고 실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등박문의 입장은 헌법제정과 의회창설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요한 문제이므로 충분히 각국의 제도를 연구한 다음 1889년에 제헌, 1990년에 의회개설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이등박문은 선진국의 헌법을 조사하기 위해 다시 유럽으로 떠나 연구에 착수했다. 이후 1885년 일본최초로 내각이 창설되어 이등박문은 초대 내각총리에 부임하였으며, 1889년 일본 최초의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이 때 이후 근대 일본은 이등박문의 지휘 아래 일청전쟁, 일러 전쟁 등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에 승리에 명실 공히 열강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으니, 역사가들이 이등박문을 일컬어 세계에 발을 내디딘 일본 그 자체와 같다고 평한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닌 것이다. 즉 근대 일본의 기적은 이등박문의 지휘로 인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니, 이 같은 출중한 정치가는 아마도 동양 역사상 다시 등장하기 힘들 것이다. 

이처럼 일본 정계의 실권을 장악한 이등박문이 러일전쟁 이후 조선을 통치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정치와 관료제도, 화폐, 교육, 치안 등이 신속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당시 조선과 만주는 임자 없는 불모지로서, 청과 러시아, 일본이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고 결국 두 차례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과 만주를 통치하는 것은 순리에 따른 정당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 조선과 청의 수구파들은 이등박문이 이 지역에 대한 침략을 선도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생각일 뿐 누구도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수구파의 대표인 안중근은 이등박문을 살해한 뒤 이등박문의 죄상을 다음과 같이 15개 항목으로 주장한 바 있다. 

1.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 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15.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약간이라도 역사에 대해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같은 안중근의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억지스러운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폐사용과 교육정책은 이등박문이 조선 통감으로 재직하던 4년 동안의 대표적인 치적이었는데, 안중근은 이를 죄악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경제학에 무지한 조선 왕실과 관료들에게는 현대적인 화폐정책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수백년동안 동전만이 유통되어 왔다. 게다가 돈이 부족할 때마다 조선 정부에서는 當五錢,(상평통보 5개에 해당하는 액면가를 가진 동전) 當百錢 등을 발행해 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켰고, 이 동전들은 실제 통용되는 가치와 액면가치가 달라 많은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동전은 보관과 운반이 불편하였으나 현대적인 중앙은행 제도와 화폐정책이 없는 조선으로서는 지폐를 사용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이등박문이 부임하면서 일본의 제일은행권을 조선에서도 사용하게 하였으니, 이는 조선의 화폐가 일본의 화폐정책에 연동 고정된 것을 의미한다. 이는 조선의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외 민황후를 시해했다거나 정권을 강제로 빼앗았다거나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다는 등의 죄목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등박문에게 터무니없는 혐의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또한 이등박문이 천황을 속였다거나 천황의 아버지를 죽였다거나 하는 주장은 사실도 아니려니와 마치 안중근 자신이 일본국민인 것처럼 남의 나라 걱정을 해주고 있는 것이어서 실소를 불러 일으킨다. 이처럼 안중근의 주장은 일관성도 없고 진실성도 없으며 한국인과 일본인의 정체성이 오락가락하고 있어서 그가 얼마나 무지한 자인가를 알게 해주고 있다. 이 주장들을 보면 안중근은 그의 개인적인 불만을 모두 이등박문의 탓으로 돌리고 그를 죽임으로써 스스로 분풀이를 한 것이다. 

이처럼 억지주장과 이유 없는 원한으로 가득 차 동양이 낳은 위대한 정치가를 살해한 수구반동을 한국에서는 다시없는 애국자이며 위인이나 되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으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미래에 언젠가 한국인들이 역사에 대해 올바른 안목을 가지게 된다면 이등박문은 조선과 일본을 통틀어 근대화의 아버지로 칭송을 받게 될 것이며, 안중근의 행동은 부질없는 수구 민족주의로서 비난받게 될 것이다. 
그동안 한국인들은 이등박문에 대해 조선을 침략한 악의 상징으로, 안중근은 정의의 상징으로 일방적인 시각을 주입받아왔다. 일본에서는 이토에 관한 전기와 평전, 소설 등이 수십 종이나 출판되었지만 한국에서는 그에 관한 전문가가 단 한명도 없고, 단행본 한권 없었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역사인식이 얼마나 천박했는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반면 안중근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고, 일본 천주교인들은 안중근에 대한 연구회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다. 

최근 2000년에 한국에서는 최초로 이등박문의 평전 한권이 번역 출판되었다.(이등박문, 도서출판 中心) 이 책에는 이등박문이 조선통감 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그는 한국 황태자인 영친왕의 태사(太師)<소사(少師)는 총리대신이던 이완용>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토가 안중근에게 살해당한 뒤 조선8도의 유림 대표들은 한군데 모여 이토의 치적을 기리는 집회를 열고 동상을 건립했으며, 각 도별로 謝罪團을 구성해 회초리를 싸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매를 자청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 황실은 이등박문이 사망한 뒤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를 추모했다는 사실도 언급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당시 천주교 조선대교구의 뮈텔 신부가 일기에서 이등박문의 치적을 칭송하면서 끝내 안중근의 고백(告白)종부(終傅)성사(聖事)를 거부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당시 조선인들의 이등박문에 대한 정서가 오늘날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러일전쟁이 끝난 뒤 이등박문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조선에서는 모든 정치가와 관료들이 환영단을 구성해 인천항까지 마중 나갔으며, 인천에서 경성에 이르는 연도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기를 흔들며 이등박문을 환영했을 만큼 그는 조선에서도 인기 있는 정치가였다. 

최근 한국의 한 신문에는, 기자가 동경의 거리에서 몇몇 고교생들에게 이등박문에 대한 인지도를 취재한 기사가 실렸다. 기자의 질문에 대해 고교생들은 “이등박문이 누구야? 너 들어봤냐?”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혹시 천황 아니었나?” 라고 말했다는 내용을 보았다. 현대 일본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이끌었던 위대한 지도자에 대해 일본 국민들이 이처럼 무지하다는 것은 그 교육의 내용이 잘못되어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일본인들도 이제는 자신의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교육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인식이 바로잡혀야만 한국의 인식도 바로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목록에 가시면 시대별 잘정리되어있습니다 

거짓말정치 https://youtu.be/M8fDYHfDiiE

일제식민방식 https://youtu.be/hAVYYxrLxRY

수탈 https://youtu.be/LaL9qqqjB-A

토지개혁 https://youtu.be/zUNYbfDoLlQ

청구권1https://youtu.be/LKjze4jgLAE

청구권2https://youtu.be/AYzAyCXzU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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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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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열심답변자 eXpert
사회문화 6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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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원인 배경 동기 등은 이미 알고있는것이고

단지 할빈 역에서 거사 모의단계 부터 저격 수감까지만 정리 합니다

이스토리 맘에 들면 답변 채택하고 질문자 메일주세요 파일 보내드리지

총 몇발 쏘앗나 7발중 이또외 저격당한 놈들의신상 과 기타 이야기까지

싫음 그냥 패스 하시고

2019.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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