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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백범 김구 선생이 김원웅 의원을 만들었다??
비공개 조회수 2,689 작성일2007.06.07

이번 열린 우리당에서 대통령 출마 선언한 국회 통일 외교 통상 위원장 김원웅 의원 있잖아요.

 

얼마 전 경의선 남북철도 연결식에서는 한복을 입고 나오시기도 하고 하신 분이요.

 

 

 

예전에 백범 기념관에서 자기 홈그라운드니 뭐니 하시더라구요.

 

부모님이 모두 예전에 독립운동 하신 분이시라 친일파 청산에 앞장서고 간도 되찾기도 하고 의정 활동 많이 하시기는 한데....

 

백범 김구 선생이 자기를 만들었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단순히 백범 김구 선생의 사상과 정신을 이어 받는다는 뜻인지 뭔지 여튼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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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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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강제합병을 당했던 우리 민족은 굴하지 않고 독립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1919년에는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기도 합니다.

 

최초에 중국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제의 반격과 중일전쟁(1937)으로 상해(1919) → 항주〔杭州, 1932〕→ 진강〔鎭江, 1935〕→ 장사〔長沙, 1937〕→ 광동〔廣東, 1938〕→ 류주〔柳州, 1938〕→ 중경〔重慶, 1940〕으로 이동하게 된답니다.

 

 

 

 

김원웅 의원님은 1944년도...

 

그러니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중경에 있을 적에 태어나셨답니다.

 

당시 백범 김구 선생님은 광복군이셨던 김근수 지사(작고)와 여성으로서는 드문 광복군이셨던 전월선(생존) 지사를 서로 중매하셨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중매로 두 분이 결혼 하시고 1944년 3월 8일에 태어나셨답니다.

 

 

 

김원웅 의원님은 한 분도 아니시고 아버님과 어머님이 모두 항일 독립운동을 하신 독립군의 아드님이시죠.

 

그리고 나서 나중에 광복후에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귀국을 하시게 된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미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아서 개인 자격으로 입국을 하셔야 했다는 거지요.

 

 

 

 

 

 

2007.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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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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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에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초기 사경회의 초점이 성경학습을 통한 기독교 기본교리의 전파와 함께 새로 입교한 신자에게 지도자훈련을 시키는 데 있었기 때문에, 다른 많은 사람들의 경우처럼 그가 사경회에 참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초기 입교자들은 사경회에 참가하여, 지방과 마을에 돌아가서 어떻게 전도하고 가르쳐야 하는가를 배웠다.3)
 
  성경공부에 대한 열성과 적극적인 전도활동은 한국 교회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꼽힌다.4) 한국에 처음 온 캐나다 선교부 스콧(W. Scott) 목사가 〈한국에 처음 온 저로서는 모든 기독교 가정에서 손때 묻은 성경을 보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충격적이었습니다〉5)하고 보고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특성을 여실히 말해 준다. 그리하여 성경은 〈조선교회의 설립과 성장에 가장 기여를 많이 한 단일기구〉6)였으며, 그러한 이유 때문에 흔히 한국기독교를 가리켜 「성경 기독교(Bible Christianity)」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7)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마펫(S. A. Moffett) 목사는 성경과 성경학습이 한국교회의 발전에 미친 역할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물론 성경 그 자체가 모든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복음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요소이다. 그러나 한국의 성경은 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해 온 것이 분명하다. … 성경공부와 성경공부반은 한국교회의 발전에서 가장 독특하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들 속에서 신앙과 지식의 기초를 놓아 왔다.〉8)
 
  특히 기독교 수용 초기에 한국기독교인들의 성경 공부에 대한 열성은 폭발적인 것이었는데, 그러한 열성은 사경회 모임을 통하여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사경회는 1890년에 언더우드 목사가 7명의 교인을 대상으로 사랑방 성경공부를 시작한 것이 효시였다. 이듬해에 선교회 본부가 성경공부의 원칙을 제정하면서 사경회는 선교지구별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1904년도의 선교회 보고서에 따르면, 이 무렵의 한국기독교인 가운데에서 60%에 이르는 교인들이 사경회에 참석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사경회는 한국교회의 전통이 되어 일본 점령기에도 계속되었다. 1910년 이후 1929년까지 약 20년 동안에 129만2000명이 사경회에 참석했다.9)
 
  사경회는 흔히 선교 거점지역의 교회나 학교에서 2, 3주일 동안의 단기과정으로 개최되었다. 주로 농한기나 겨울철에 열렸는데, 참가비용은 자비로 부담해야 했다. 이 때문에 멀리서 참가하는 사람들은 쌀이나 돈과 함께 자취할 도구를 준비해 와서 합숙을 하거나 친지들의 집에 묵기도 했다.
 
  사경회에서는 주기도문, 네 복음서, 예수의 생애, 교리문답, 십계명, 사도신경 등 신앙을 위한 기초학습과 함께 천문지리학, 농사법, 아동교육, 건강위생법, 새생활운동 등 일반상식과 실생활에 필요한 내용도 가르쳤다. 하루의 일과는 새벽기도, 오전 성경공부, 오후 일반상식 과목을 공부했으며, 그 다음에는 개인 전도 방법을 익히게 하여 호별방문 전도와 길거리 전도를 실시했고, 저녁에는 전도강연 중심의 집회를 열었다.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
 
  평양의 사경회 열기는 다른 지방의 열기를 압도했다.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던 평양은 관서지방의 기독교인들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다녀오기를 동경하는 곳이었다.10) 평양은 1893년에 장로교 선교가 시작된 뒤로 교세가 급속하게 늘어나 한국 최대의 기독교 도시로 성장했다. 1899∼1900년의 통계에 따르면, 평양의 장로교 교인은 2230명으로서 전국 교인 3690명의 60.4%를 차지했으며,11) 예배당 수도 1901년의 경우 185개 처로서 전체 237개 처의 78.1%나 되었다.12)
 
  평양의 어느 예배당이나 금강산 어느 기도원에서 사경회가 있다고 하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902년 1월에 개최된 한 사경회에는 400여 명이 모였는데, 이들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에서뿐만 아니라와 서울과 멀리 전라남도 무안과 목포에서까지 먹을 양식을 짊어지고 찾아온 사람들이었다.13) 감리교에서 발간한 「대한크리스도인회보」는 金龜가 참석하기 이태 전에 평양에서 열린 한 사경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우리 교회에 유익한 것은 성경을 공부 함이라. 이럼으로 지난 해 음력 십이월 이십일 위시하여 사경회를 실시하였는데, 각처 교우들과 본교회 형제 자매 중 공부를 힘쓰는 사람 사십여 인이 목사집에 모여 제제히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아침 아홉 시로 열한 시까지는 「로마인서」를 공부하고, 오후 두 시로 네 시까지는 「요한」 일이삼서와 「디도서」와 「아가서」를 공부하여, 한 달 동안에 하나님의 묵우(默祐:말없이 도움)하신 은혜와 목사의 성실히 가르침으로 형제와 자매들이 마음이 더욱 굳건케 하였사오니 감사하옵니다〉14)
 
  사경회에 한번 다녀오면 성경지식은 말할 나위도 없고 교회에 대한 일반상식을 얻고 신앙이 성장했기 때문에 어느 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리게 되면 너나할 것 없이 참가하여 일종의 유행처럼 되었다.15)
 
  평양 사경회의 그러한 성경학습 분위기 속에서 金龜 역시 얼마나 열성적으로 성경을 공부했을 것인지는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백범일지」 친필본에는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대목이 있다.
 
  〈…그리하여 耶蘇聖書에 肉體는 魔鬼를 服從하고 靈魂은 上帝를 服從한다는 것을 더욱 意味깊게 생각하고…〉16)
 
  이 구절은 「로마서」 7장 25절의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서, 「백범일지」 전체를 통하여 유일한 성경 인용이다. 金龜는 이 성경구절을 감옥에서 모진 고난을 당하던 때를 회상하는 대목에서 인용했는데, 친필본의 원고에는 지우는 줄이 그어져 있어서 그 뒤의 필사본이나 국사원본에서는 삭제되었다. 성경 구절을 썼다가 지운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金龜가 기독교에 입교한 초기에는 종교를 단순한 교육운동의 수단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17)
 
 
  평양 사경회에서 吳舜炯 만나
 
  金龜는 이때의 사경회에서 성경공부와 교육자로서의 기초과정을 익혔는데, 특히 평양에 모인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교육 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신교육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데 매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이 겨울사경회에서 長連(장련) 출신의 숭실학교 학생 吳舜炯(오순형)을 만났다. 오순형은 장련의 갑부 吳寅炯(오인형) 진사의 막내동생으로서 1903년 10월에 숭실학교에 입학했었다. 그는 공부는 잘했으나 입학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무렵의 숭실학교는 전교생 70여 명이 모두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기독교적인 교풍이 강했다. 그리하여 오순형도 자연스럽게 기독교에 입교했고 평양 시내에 나가서 거리 전도를 할 만큼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18) 1903년의 겨울 사경회에는 황해도 신자들이 많이 참가했기 때문에 오순형도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이 사경회에 참가했던 것 같다. 오인형과 친교를 맺고 있던 金龜는 오순형과 함께 사경회에 참가하면서 그와도 친숙해졌을 것이다. 두 사람은 사경회가 끝나고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군이 평양으로 진군하자 장련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金龜는 곧바로 장련의 社稷洞으로 이사했다. 1904년 2월의 일이다.19)
 
  장련은 고려시대의 長命鎭(장명진)과 連豊莊(연풍장)이 합쳐져 생긴 지명으로서 1895년에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郡으로 승격되었다가 1909년에 殷栗郡에 통합되었다.20) 장련은 황해도 북부의 조그마한 소읍이나 文廟(문묘)가 두 개나 있을 만큼 유교적 전통이 강한 고장이다. 그러나 강을 사이에 두고 평안도 삼화군 및 진남포와 인접해 있어서 海州보다도 평양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왔다. 그리하여 기독교를 비롯한 西洋文化의 수용도 쉽게 이루어졌다.
 
  장련에는 金龜의 재종조부가 살고 있었다. 金龜는 어린 시절 순영 내외가 순영의 병치료를 위해서 각지를 떠돌아다닐 때에 잠시 장련 재종조부의 누이 집에 맡겨진 적이 있었다. 이때에 金龜는 그 집 주인과 함께 구월산에 가서 나뭇짐을 해오곤했다. 그리고 동학농민전쟁 때에 해주성 공략에 실패한 金龜가 농민군을 이끌고 구월산에 은거하면서 만났던 禹鍾瑞, 宋宗鎬, 許坤 등은 장련 출신이거나 장련 가까이에 살고 있었다.
 
 
  吳진사네 사랑에 예배당과 學校 개설
 
  金龜가 장련으로 이사한 계기는 오인형 진사의 호의에 따른 것이었다. 신교육운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오인형은 金龜가 경제적인 걱정없이 교육사업에 전념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사직동에 새로 산 집과 그 집에 딸린 산림과 과수와 20여 마지기의 전답을 金龜에게 내어 주었다. 그리고 농사에 부릴 소도 한마리 사 주었다. 金龜는 곧 해주 고향에서 사촌형 泰洙 내외를 이사오게 하여 농삿일과 집안일을 맡기고 자신은 교회일과 교육활동에 전력했다.21)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군자금을 대는 등으로 농민군 토벌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22) 오인형이 동학농민군 대장이었던 金龜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오인형이 金龜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한 데에는 오순형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金龜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오순형은 맏형을 설득하여 그의 집 사랑에 예배당을 개설했다. 오순형과 김구는 전도에 열성을 기울였다. 그들은 장터에 나가서 전도했고, 농부들이 일하다가 쉬는 들판에서도 전도했다. 그리하여 곧 40명이 모여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다.23) 이때의 일을 베어드 목사는 그의 개인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황해도에서 온 학생 오씨는 작년 가을에 초신자로 입학했다. 그는 지방의 부유한 양반집 자제이다. 그는 학교의 일반적인 영향과 가르침에 의해 기독교가 진리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집으로 돌아간 뒤에 고향의 이웃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열심히 전도했다. 러·일전쟁으로 학교에 돌아올 수 없게 되자, 집에 남아서 사랑방에서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길에 나가 장날에 모인 군중들에게 전도했다. 그 결과 한 무리의 신자가 모여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24)
 
  金龜는 오순형과 상의하여 오진사의 큰 사랑에 학교를 열었다. 사실 이 교육사업이야말로 金龜가 일찍부터 꿈꾸어 온,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소규모로나마 실천해 온 사업이었다. 우선 오진사의 큰딸 信愛와 아들 基秀, 吳鳳炯의 두 아들과 吳勉炯의 자녀, 오순형의 두 딸을 학생으로 삼고, 학교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자녀 몇 명을 더 모집했다. 金龜는 방 한가운데를 칸막이로 막고 남녀의 자리를 구별하여 앉혔다. 이 학교가 光進學校였다.
 
  그런데 이 학교의 설립과정에 참여한 白南薰은 이때의 일을 「백범일지」의 술회와는 다르게 회고하고 있다. 학교를 개설한 시기도 1년의 차이가 있으나 구체적인 상황설명은 백남훈의 기록이 훨씬 자세하다.
 
  〈가르쳐야 하겠다는 생각은 간절했으나 건물도 없고 유지할 基金도 없어서 매일과 같이 모여서는 空論과 같은 의논을 거듭한 결과, 예배당(오씨의 사랑)을 교사로 하여 교인의 자녀만이라도 가르치기로 하는 동시에 교회에서 損補(연보:헌금)하기로 결정하고, 4월 어느 주일예배 후에 이에 관한 설명과 동시에 연보를 청하였던 바 300량 가까이 損出(연출)되어 일동은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1905년 9월1일에 장련 예수교회가 설립한 광진학교는 예배당에서 개교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당일에 모인 아동은 10여명에 불과하여 대단히 영성한 느낌이 있었으나 이는 처음부터 예상했던 바이매 시일의 경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교과서는 이때까지도 없는 형편이어서 국문 가르치는 것을 주로 하고 「심상소학」, 「유년필독」, 「동국역사」, 「성경」, 「산술」 등이었다. 金洛現(孫泳坤)씨가 교장이고 내가 교원격이었다.〉25)
 
  광진학교 시절에 金龜와 백남훈이 교사로서 함께 학동들과 같이 찍은 사진이 보존되고 있어서 이때의 사정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사진은 1906년의 것으로서, 현존하는 金龜의 사진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사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학교 교원들인 金龜, 백남훈, 손영곤, 崔商崙(최상륜)의 개성 있는 차림이다. 백남훈은 중절모에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었고, 손영곤 역시 중절모에 양복을 입고 수염을 길렀다. 이들 두 사람은 코흘리개 시골아이들의 선생으로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세련된 멋쟁이 모습이다. 반면에 김구는 짧게 깎은 머리에 물들인 바지저고리를 입고 광대뼈가 불거져 나온 투박스러운, 그러면서도 퍽으나 순박해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최상륜은 망건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차려 입었는데, 그는 원래 열렬한 천주교인이었다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장련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26)
 
 
  머리 깎기 때문에 아이들을 학교 안 보내
 
  학교를 개설하고 나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학생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金龜는 적령기의 아이가 있는 집을 찾아다녔다. 학생모집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머리를 깎는 것이었다. 학부모들은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머리를 깎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金龜는 『아이들의 머리는 깎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아이들을 모아야 했다.
 
  이미 10년 전에 단발령이 선포되었으나 제대로 시행된 것은 아니어서 시골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깎지 않고 있었다. 이무렵 기독교에 입교하여 머리를 깎았던 백남훈의 회고에 따르면, 장련에는 단발한 사람은 두세 사람밖에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단발한 사람을 일종의 정신이상자로 생각했다고 한다. 누가 머리를 깎으면 『집안이 망했다』고 하여 문중 전체가 심한 비난을 하기도 했다. 기독교에 입교한 사람들은 그 표시로 단발을 행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여간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 가면 머리를 깎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金龜는 단발의 필요성을 설득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했다. 아이들 가운데에는 부모들이 머리를 자주 빗겨주지 않아서 머리에 이와 서캐가 가득 낀 아이들도 있었다. 金龜는 얼레빗과 참빗을 사다두고 매일 몇 시간씩 아이들의 머리를 빗겼다. 점차 학생 수가 늘어나자 수업하는 시간보다 머리 빗기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이렇게 하여 학생들이 확보된 뒤에는 부모들을 설득하여 아이들의 머리를 깎으려 했다.
 
  그러나 그 일은 좀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김구는 사직동에서 이태 가량 살다가 장연읍으로 이사하여 鳳養學校에서 근무했는데, 이때의 일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孫斗煥에 관한 에피소드를 「백범일지」에 적고 있다. 손두환은 뒷날 臨時政府의 의정원 의원을 역임하는 등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다.

2007.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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