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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단재 신채호선생의 배울점 혹은 본받을점?
juli**** 조회수 6,218 작성일2003.08.04
독립 운동가이자 역사 학자인 단재 신채호선생의 배울점이나

본받을 점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방/숙 인데 빨랑해야 되거든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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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 申采浩 , 1880.11.7~1936.2.1 ]
본관 고령(高靈). 필명 금협산인(錦頰山人)·호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1880년 11월 7일 대전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논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활약하였으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등에 가입·참가하고, 이듬해 순 한글
《가정잡지》를 편집·발행하였다.

민족사관을 정립한 사학자이며 언론인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평생을 일제에 대항하여
싸우다 1929년 체포되어 1936년 2월 21일 중국의 뤼순[旅順]감옥에서 옥사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主筆)로
활약하면서 민족혼을 지키기 위해 힘썼습니다.
일제에 침략당한 우리국민들의 애국심을 일깨우고 민족의식 앙양에 힘쓴것 입니다.
투철한 애국심은 우리모두 본받아야할 것입니다.

200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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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도덕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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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 申采浩 , 1880.11.7~1936.2.1 ]

본관 고령(高靈). 필명 금협산인(錦頰山人)·호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1880년 11월 7일 대전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논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활약하였으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등에 가입·참가하고, 이듬해 순 한글
《가정잡지》를 편집·발행하였다.

또한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 또는 《기호흥학회보(畿湖興學會報)》 등에 논설을 발표하고 1909년 일진회(一進會) 성토에 앞장섰다. 1910년 4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중국 칭다오[靑島]로 망명, 그곳에서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권업신문(勸業新聞)》에서 활동하다가, 1914년 이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그 해 남북 만주와 백두산 등 한국 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하였다. 1915년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한청년회(新韓靑年會) 조직에 참가하고, 박달학원(博達學院)의 설립 운영에도 힘썼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 의정원(議政院)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한성임정(漢城臨政)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을 내세워 공직을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과 맞서기도 하였다. 그 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단장, 신대한청년동맹(新大韓靑年同盟) 부단주(副團主) 등에 피선되었다. 1923년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의 쟁취를 부르짖고 임시정부 창조파(創造派)의 주동역할을 하다가 다시 베이징[北京]으로 쫓겨가 다물단(多勿團)을 조직 지도했으며, 중국과 본국의 신문에 논설과 역사논문을 발표하였다.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1927년 신간회(新幹會) 발기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東方同盟)에 가입,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基隆港]에서 피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旅順] 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옥사했다. 적과 타협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 이와 같은 견해가 곧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고조선(古朝鮮)과 묘청(妙淸)의 난(亂)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고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近代史學)의 기초를 확립했다.

저서에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 《조선사론(朝鮮史論)》 《이탈리아 건국삼걸전(建國三傑傳)》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이순신전(李舜臣傳)》 《동국거걸(東國巨傑)》 《최도통전(崔都統傳)》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단재 신채호는 1925년 동아일보에 게재한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이라는 글에서 묘청이 일으킨 서경 천도 운동의 이면에는 낭·불·유(郎佛儒) 3가의 쟁투가 감추어져 있었으며, 이는 곧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다툼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낭·불 양가는 패퇴하고, 유가가 집권하여 민족의 진취적인 기상이 소멸되었다고 보았으며, 「삼국사기」를 그 산물이라고 보았다. 신채호는 신라의 국선(國仙)이 고구려의 선인(先人→仙人)과 통한다고 생각하고, 화랑은 본래 상고 시대 소도 제단(蘇塗祭壇)의 무사로서 당시에 '선비' 라고 일컬어지던 자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仙)을 도교의 선(仙)으로 오인해서는 안 되며, 우리의 전통적인 선 사상을 낭가 사상이라 함이 옳다고 하였다.

이러한 낭가 사상(郎家思想)은 고려 시기까지 면면히 이어지다가 윤언이와묘청, 정지상 등이 주장한 칭제북벌론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나, 시의에 맞지 않는 묘청의 경거망동으로 말미암아 중국 사상에 휩쓸린 김부식 무리에 의해 타도되니,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위치를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낭가의 독립 사상이 설 자리를 잃고 사대주의가 판을 치게 되었으니, 이 사건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이라 할 만하다 하였다.

2003.08.06.

  •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신채호 역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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