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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홍천의 아름다운 곳
gs07**** 조회수 7,801 작성일2011.07.27

제 방학숙젠 댐요.  쬠만 도와 주셉여!!!!!!!!!!!!   ㅋㄷㅋㄷㅋㄷㅋㄷㅋㄷㅋㄷ   우잉 혼잔 헴드어옄ㅋㅋㅋㅋㅋ

" 홍천의 아름다운 곳 조사하기" 와 "우리나라의 위인 10명 조사하기" 여 잘 부탁드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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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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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의 아름다운 곳으로는 홍천9경이 있습니다.

 

(홍천의 아름다운 곳 - 홍천 9경)

제1경  팔봉산

위  치   서면 팔봉리  
   
한국의 100대 명산으로 해발 327.4m의 나지막한 산으로 여덟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어서 팔봉산이라 하며, 봄/가을은 등산객들이, 여름철은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여덟 봉우리마다의 비경과 기암괴석이 산허리를 감싸고 흐르는 맑고 깨끗한 홍천강 물이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어우려져 한폭의 그림 같은 절경을 간직한 곳이다.

 

산이 낮아서 가족단위 산행에 적합하고 백사장이 있어 야영하기에 좋으며, 메기ㆍ쏘가리 등 민물고기를 낚을 수 있고, 관광지 내 풋살경기장이 있어 단체 관광객이 체육행사도 할 수 있다.

 
 
제2경  가리산

위  치   두촌면 천현리 134-1번지 
   
해발 1,051m의 가리산은 산 정상에 서면 탁트인 시야와 발 아래로 펼쳐진 소양호의 풍경이 등산객들의 발을 묶는 곳이다. 또한 이 산의 1봉 남쪽 정상아래 바위벽면사이에서 샘물이 솟아나와 400리 홍천강으로 흐르는 작은 석간수는 목마름에 지친 등산객들에게 청량감을 더해주는 가리산의 특색 있는 자랑거리이기도하다.

산자락 밑에 위치한 조그마한 폭포의 물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주며, 이곳에서부터 계곡과 능선을 따라 등산이 시작된다.

 

또한 가리산 정상에서 마주보이는 샘재마을에서 로또복권 사상 1등 최고액과 2등이 몇 주 사이에 당첨된바 있어 명당터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 일대를 홍천군에서 자연 휴양림 지역으로 조성, 95년 7월 홍천군이 개장한 가리산자연휴양림이 있어 통나무집, 야영장, 체육 시설을 이용하는 가족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제3경  미약골

위  치   서석면 생곡리  
   
미약골은 높은산과 깊은 계곡으로 둘러싸여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다.

 

옛날 이곳을 지나던 풍수가가 지세를 둘러보고 삼정승 6판서가 나올 명당자리가 있어 학이 울고 촛대바위가 아름답게 치솟았으며 선녀가 하강하여 목욕을 했다는 암석폭포 등 바위들이 각기 아름다운 형상을 이루고 있어 미암동 또는 미약골이라 이름 지었다 하며, 원시림의 자연생태계의 보고로서 맑고 깨끗한 용천수가 샘솟아 400리를 흘러 북한강 청평댐으로 유입되는 홍천강의 발원지이다.

  

제4경  금학산

위  치   남면 / 북방면 
   
해발 652m의 정상에 오르면 태극문양의 노일마을을 조망할수 있는 명산으로, 백두대간에서 오대산을 거쳐 영서내륙 한강변까지 깊숙이 뻗어 내린 한강기맥의 끝자락 장락산맥이 한눈에 들어온다.

 

낮은 산이지만 산정으로 오르는 등산코스가 다양하고 400리 홍천강변 최고의 절경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서 유명하다.
 

제5경 가령폭포

위  치   내촌면 와야리  
   
가령폭포는 자연속에 숨겨진 오지의 백암산(1,099m) 서남쪽 기슭에 숨어 있으며 개령폭포라고도 불리운다. 가령폭포는 최근 생태체험 등산 동호인들이 찾으면서 알려지기 시작한 백암산과 더불어 우렁찬 굉음을 토하며 수십미터(50여m)의 낭떠러지를 뒤흔들며 내려꽃는 자태가 웅장하다. 주위에는 수많은 종류의 산나물과 약초, 야생화가 자생하고 있어 산새들의 낙원이기도 하다.

 

해발 950m 어사리덕 작은 산골샘(약용샘물이 나오는 샘)에서 솟은 청정수가 400리 홍천강으로 발원하는 비레올 계곡의 무명담소와 가령 폭포가 시원함을 더해준다.

 

가령폭포는 숲에 가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폭포로 알려져 있다. 폭포 주변에는 인적이 드물어, 아직도 깨끗한 폭포수와 자연스런 멋을 간직하고 있는 폭포 중의 하나이다.

 
 
제6경 공작산 수타사

위  치   동면 덕치리  
   
공작산은 해발 887m로 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홍천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며, 산세가 공작이 날개를 펼친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홍천읍에서 바라보면 거인이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봄에는 철쭉, 가을에는 단풍이 매우 아름다우며, 기암절벽과 분재모양의 노송군락, 눈 덮인 겨울산도 일품이다.

 

수타사에서 동면 노천리까지 약12km에 이르는 수타사 계곡에는 넓은 암반과 큼직큼직한 소들이 비경을 이루고 있고 계곡 양쪽으로는 기암절벽과 빽빽히 우거진 숲이 호위하고 있어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보면 비경삼매에 빠져들기 일쑤이다.

 

또한 한국 100대명산 공작산 끝자락에 자리한 천년고찰 수타사는 신라 33대 성덕왕 7년(서기 708년)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대적광전 팔작지붕과 1364년 만든 동종, 3층석탑이 보존되어 있고 보물 제745호 월인석보를 비롯한 대적광전, 범종, 후불탱화, 홍우당부도 등 수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영서내륙 최고 고찰이다.
 

제7경 용소계곡

위  치   두촌면 천현리  
   
내촌면 광암리에서 발원하여 두촌면 괘석리를 거쳐 천현리에 이르는 10km의 계곡으로 맑은 물과 기암괴석이 조화롭게 펼쳐져 있는 곳이다.

 

우거진 숲과 곳곳에 펼쳐지는 소와 너래바위들이 어우러져 비경을 자랑하는 곳으로 내설악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계곡이다.

 

봄에는 철쭉이 가을에는 아름다운 단풍이 갈대와 어우러지고, 여름철에는 시원함을 주는 이 계곡에는 옛날 절터와 삼층석탑이 아직 남아 있으며, 이 삼층석탑을 옮기려 할 때 호랑이가 나타나는 바람에 옮기지 못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용소계곡은 가족단위의 등산이나 산림욕 코스로 적당하며 당일 산행으로 알맞은 곳이다  
 

제8경 살둔계곡

위  치   내면 율전 2리 
   
계방천과 자운천이 어우러져 만든 살둔계곡은 원시의 비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으로 입구부터 하늘을 가린 원시림에 둘러싸여 있는 별천지다. 한자로는 생둔이라고 하며 삶둔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단종 복위를 꾀하던 이들이 숨어들면서 마을이 최초로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예언서인 정감록에도 일곱 군데의 피난처인 삼둔사가리 중 한곳으로 전하고 있다. 난리를 피하고 화를 면할 수 있는 곳 삼둔사가리가 모두 살둔을 중심으로 인근에 있다.

 

살둔계곡의 물은 천연기념물인 어름치와 열목어가 서식하는 1급수를 자랑하고 있다. 봄에는 기암괴석과 철쭉과의 조화로 경관이 수려하며, 물가 주변에는 바위들이 많아 한낮의 즐거운 피서를 도와 가족단위의 휴양지로 적당하다.
 

제9경 가칠봉 삼봉약수

위  치   내면 광원리 삼봉약수터 
   
가칠봉은 백두대간 제 27구간 갈전곡봉에서 남서로 뻗은 능선상 2.5km지점의 첫 번째 봉으로 태고의 원시림속에 숨겨진 오지의 산으로 전나무와 활엽수가 어우러진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산자락에 있는 삼봉약수로 더 유명한 산이다.

 

삼봉약수는 조선시대 실론약수라 불렸으며 주위에 가칠봉, 사삼봉, 응복산의 세 봉우리 가운데 위치한다하여 삼봉약수라 불린다. 전국에서도 드물게 수질이 우수하여 한국의 명수 100선에 선정되었으며, 15가지 약수성분이 함유된 명천으로서 빈혈, 당뇨병, 신경통, 위장병에 특히 효험이 있다고 하여 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92년에 산림청에서 이 일대를 자연휴양림 지역으로 개발하여 각종 편의시설을 설치하였으며, 풍광이 수려하고 숲이 울창하여 요양하기에도 적합하며, 여름엔 약수터 옆 키큰이깔나무 숲 그늘이 시원하고 가을엔 주위의 깊은 숲에 오색 단풍이 운치를 더한다. 

 

(우리나라의 위인)

 

1.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

 

안중근 대한제국의 교육가, 독립운동가, 대한의병 참모중장이다.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하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 러시아의 재무상 코코브쵸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된 것을 기회로 삼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곧바로 체포되어 일본 정부에 넘겨져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다. 

 

2.안창호(安昌浩, 1878년 11월 9일 ~ 1938년 3월 10일)

 

안창호는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우리민족에 긍지를 알리는데 힘썼고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의 농장이나 오랜지농장들을 만들어 한국인들에게 미국에서 잘살수있도록 도와주었다. 1907년에는 비밀조직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안창호선생은 대성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평양에 세운것으로 청년들에게 고등교육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그는 언론활동도 했다. 신민회에서 운영하는 대한매일신보를 발간하였다. 당시 영국인 베델이 운영하는 이 신문은 발행인이 영국인으로 인해 더많은 민족기사를 쓸수있었다. 그는 청년학우회를 새워 청년들을 키우는데 힘썼고 한일 합방이후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국무총리등을 맡아 열심히 일했으며, 한국 독립당을 창당했지만 적발되어 그후 감옥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보내다가 돌아가셨다. 

 

3.김좌진( 1889~1930, 충남 홍성 출생)

 

김좌진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대한 광복단 가입, 북간도로 이동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이 되고, 사관 양성소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1920년 10월, 다른 독립군 부대와 힘을 합쳐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청산리 대첩' 이다. 만 4일간 10차례의 전투의 결과는 일본군 사망자 2천여명, 독립군 희생자는 1백여명 이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독립 운동을 한 김좌진의 애국심은 본받을 만 하다.

 

 

4.김구 (1876~1949)

 

김구는 을사조약 체결에 저항하여 이준, 이동녕과 함께 상소를 올리고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10년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년에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았으나 감형되어 1914년에 출옥되었다. 3·1운동 후에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가 충청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했으며, 한국광복이 되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반탁했다. 그 후, 1945년 8·15 광복을 맏아 귀국하여 반탁운동을 지휘,민주의원 부의장 , 민족통일 본부 부총재를 지냈다. 1948년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라는 유엔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 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안, 평양에 가서 정치회담을 했으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김구는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노력하다가 반대파의 안두희에게 암살되었습니다.

 

 

5.이봉창(1900~1932)

 

이봉창은 1931년 중국 상하이 로 건너가 한인 애국단에 가입, 임시정부 국무 위원 김구의 지시를 받고 일본 왕 히로히토를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에는 양이섭과 이춘태도 연루되어 있었다. 1932년 1월 8일 일본 왕이 만주국 푸이와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쿠라다문에서 히로히토를 향하여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된 그는 조사과정에서 배후인물인 김구의 신원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가공의 인물 백정선으로 둘러댔다. 그는  그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게 되었다.

 

 

6.유관순(1902~1920)

 

유관순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학교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1일 아오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헌병에 의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 당하고 유관순은 주모자로 잡혀 고된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굴하지 않았다.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이에 불복,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 항의하고, 일제법률에 의하여 일제법관에게 재판받음이 부당함을 역설하다가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틈만 있으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악형을 받았다.  불굴의 투혼으로 계속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1920년 17세의 나이로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7.홍범도(1868~1943)

 
홍범도는 의병전쟁 및 항일독립전쟁기의 대표적 장군으로 봉오동(鳳梧洞)·청산리(靑山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민족주의와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하는 철저한 무장투쟁노선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1927년 정식으로 러시아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공화국으로 옮겨져 연금으로 생활했다. 1943년 10월 크슬오르다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8.윤봉길(1908~1932)

 

윤봉길은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김구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김구로부터 지시를 받고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및 상하이 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 공원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 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주중일본공사 시게마쓰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9.신채호(1880년 12월 8일 ~ 1936년 2월 21일)
 
신채호는 독립운동가로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모든 수단을 강구한 민족주의자로, 국사 연구와 교육을 중시하였다. 기존의 왕과 영웅 중심의 전근대적인 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사학을 내세웠다. 그의 민족사관은 일제에 의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근대적, 주체적 역사관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저서《조선상고사》에서 특히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보았다. 1930년 5월 대련법정에서 유가증권위조 및 동행사, 치안유지법위반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았고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뇌일혈로 옥사하였다.
 
10.황현(1855.12.11~1910.9.10)
 
황현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우국지사이다.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국권이 강탈되자 '문변삼수'라는 시를 지어 을사 5적의 매국적 행위를 규탄하는 한편, '오애시'를 지어 민영환,조병세 등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한 애국지사를 애도하고 우국충정을 기렸다. 황현 선생은 1910 8월 일제에 의해 한일합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국록을 먹은 적은 없지만 선비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1910 9 10일 절명시 4수와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1.이순신(1545~1598)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난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 또 당포해전, 1차 당항포해전, 한산도대첩,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에서 승리하였다. 1597년 명랑대첩에서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3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고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2.태종 무열왕 (604~661)

 

신라의 2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654~661년입니다.

이름은 김춘추로, 인품이 높고 외교력이 뛰어나 선덕 여왕 때는 당나라와 외교를 해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654년 진덕 여왕이 병으로 숨을 거두자, 당시 상대등 알천의 추대를 받아 진골 출신으로는 최초로 왕위에 오른 뒤 법률을 새로 만들고, 군사력을 기르는 등 나라의 힘을 키워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660년에는 태자 법민(훗날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만 명의 군사로 하여금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13.문익점 (1329~1398)

 

고려 말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호는 삼우당입니다.

1363년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간 문익점은 목화밭을 구경하고 목화의 씨에서 실을 뽑아 무명 옷감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문익점은 귀국할 때 원나라의 엄한 감시를 피해 목화 몇 송이를 따서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따랐다는 이유로 벼슬에서 물로나 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목화씨를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14.세종대왕 (1397~1450)

 

조선의 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418년~1450년입니다.

태종의 셋째 아들로 1420년 집현전을 설치하여 활자를 새로 만들고 인쇄술을 발전시켜 월인천강지곡, 고려사, 삼강행실 등의 책을 펴냈습니다.

1443년엔 우리 민족의 빛나는 문화 유산 가운데 하나인 훈민정음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장영실을 시켜,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고, 해시계(앙부일구), 물시계(자격루) 등의 천문 과학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농업과 의학 분야의 책도 많이 펴냈으며, 박연에게 명해 국악을 발달시켰습니다.

또한 김종서로 하여금 4군 6진을 설치하게 하고, 이종무로 하여금 쓰시마 섬을 정벌하게 하는 등 국방에도 힘썼습니다.

 

15.성삼문 (1418~1456)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입니다.

1447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와 수찬을 거쳤습니다.

그 후 정음청에서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개 등과 함께 한글을 만들기 위해 명나라를 13번이나 오가면서 연구를 계속하여 1443년 훈민정음을 만들어냈습니다.

1455년 수양 대군(훗날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을 다시 왕으로 세우려고 계획했으나 김질의 배반으로 거사가 실패하여 붙잡혀 죽었습니다.

 

 

16.강감찬 (948~1031)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가 되어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흥화진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위에 쫓겨가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의 호를 받았다.
그 이듬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특진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에 봉해졌다. 현종 묘정에 배향,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 《구선집》 등이 있다

 

17.신사임당 (1504~1551)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는 조선중기 여류 서화가.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 작품이 전해진다. 화풍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본관은 평산이고, 호는 사임당·시임당·임사재이다.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히고 문장·침공·자수에 능했으며, 특히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 작품이 전해진다. 또한 안견의 영향을 받은 화풍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산수·포도·풀·벌레 등을 잘 그렸다.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18.허준 (1546~1615)

 

1546년 3월 5일에 태어난 허준은 1569년 홍담, 유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 의관으로서 출사하였습니다.

 

이후 자신만의 뛰어난 의술로 왕실의 갖가지 병을 고쳐 내의로서의 명성을 높입니다.

 

1575년 선조의 중병을 고쳐 신망을 얻게 되어 어의로 임명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여 그의 건강을 돌보게 됩니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사망하자 책임 추궁을 당한 끝에 결국 파직당하고 의주로 문외출송되었습니다.

 

1610년 당시의 모든 의학 지식을 망라한 임상의학 백과사전인 동의보감을 편술을 완료하였습니다.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친 이후 그해 음력 11월 22일 귀양이 풀리고 내의원에 복직 되었고, 그 뒤 허준은 후진 양성과 의서 편찬 및 의서 수리 등을 맡다가, 1615년 음력 8월 17일에 사망하였습니다.

 

 

19.원효 (617~686)

 

신라의 승려로, 648년 황룡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불도를 닦았으며 661년 승려 의상과 함께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던 길에 당항성의 한 무덤에서 해골바가지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뒤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 공주와 혼인하여 설총을 낳았으며,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불교의 사상을 노래로 만들어 퍼뜨렸습니다.

또한 원효 대시는 금강삼매경을 쉽게 풀이한 금강삼매경론을 펴내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책을 펴냈습니다.

 

20.광개토대왕 (375~413)

 

12세 때인 386년 태자로 책봉되고 17세 때에 왕위에 올랐다. 391년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영락'이라 함으로써 중국과 대등함을 보였다. 392년에는 백제 북쪽의 석현(지금의 재령 부근) 등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켜 한강 북쪽의 많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396년에는 친히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무너뜨리고 왕의 동생과 그의 대신 10여 명을 볼모로 잡아왔다. 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동쪽 땅을 완전히 차지하였다.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 명의 원군을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연나라의 모용희를 반격하여 신성.남소 등 두성 700여리의 땅을 갖게 되었다. 405~406년에 모용의 두 번의 침략을 받았으나 요동성. 목저성에서 모두 물리쳤다.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복하고, 이어서 북부여를 무릎꿇게 하였다. 그리하여, 랴오허강 동쪽으로부터 중국 동북부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 하였다. 왕이 된 후 하루도 궁궐에서 편히 쉬지 못하고 전쟁터를 달려 배달 민족의 영웅으로서 높이 존경받고 있다. 그의 능은 자세하지 않으나, 414년에 장수왕이 만주 봉천 지안현 퉁커우에 세운 광개토 대왕의 능비에 그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묘호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이다.

201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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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홍천군청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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