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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라멜팝콘 Mar 21. 2017

18.<핵소 고지>

나에게는 지키고픈, 지켜야 할 신념이 있는가?

오늘은 참 좋은 영화를 하나 들고 왔습니다. 과장되서 얘기하자면 반해버린 영화라고나 할까요?

멜 깁슨 감독, 앤드류 가필드 주연 영화 <핵소 고지> 입니다.


포스터만 봤을 땐 단순한 전쟁영화겠거니 생각했었죠.

2차 대전 '핵소'라는 고지에서 펼쳐지는 전투에서 뜨거운 전우애를 느끼게 하고 애국심을 고양시키고 자칭 세계평화의 선봉에 선 미국의 위대함을 새삼 일깨우는 뻔한 할리우드의 팍스 아메리카나식 전쟁영화.


신념 vs 편견

처음 20분 동안은 큰 재미도, 감동도 없는 너무 잔잔한 드라마라 살짝 지루함이 느껴졌지만, 주인공인 데스몬드 도스(앤드류 가필드)가 입대하고 나서부터 영화의 분위기는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합니다.

영화의 배경은 오키나와 핵소 고지에서의 미국과 일본의 전투이지만 영화가 다루는 것은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 아닌, 한 인간의 신념 대 세상의 편견 사이의 치열한 갈등이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철학적 내용

이 영화는 핵소 고지에서 75명을 구한 의무병 데스몬드 T.도스 이병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 진 영화이므로 사실 내용은 뻔하며 어떠한반전(反轉)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무섭고도 잔혹하리만치 철저하게 고증한 전쟁장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반전(反戰)의 메세지는 충분히 전달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아무 생각없이 보다 보면 도스에게 몰입하게 되고, 도스로부터 원론적이면서 철학적인(또는 종교적인) 거대한 질문을 건네 받게 될 것입니다. 여전히 상영중인 영화이므로 내용보다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단순한 종교영화는 아니다

도스는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를 아버지로 두고 있지만, 그 때의 전쟁후유증으로 인해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에 폭력도 서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스와 동생은 무척 바르게 잘 자랐죠. 아마도 그건 도스가 독실한 교회신자였기 때문일겁니다.

도스는 제7일안식일교회를 다녔는데, 이 교단은 한국에선 이단으로 되어있지만 미국에서는 개신교의 한 교단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삼육재단이 바로 이 제7일안식일교를 말하구요. 이 교회가 이단이든 아니든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나라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이 부분이 한국에서는 영화의 흥행여부와도 직결될 수 있고, 좋은 영화가 빛을 보지 못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안식일교회의 정통성 여부가 아닙니다. 실제로 영화를 연출한 멜 깁슨 감독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명작 종교영화로 손꼽히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연출하기도 했었죠. 적어도 멜 깁슨은 '교리주의'를 초월해 그리스도, 나아가 하나님(God)의 존재와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전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양심적 집총 거부

지금도 그렇지만 2차 대전 당시의 미국 역시 모병제였기 때문에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단어보다는 '양심적 집총 거부'라는 단어가 훨씬 적합합니다. 영화 안에서도 대부분의 인물들이 '집총=병역' 이라고 생각해 도스와 갈등이 일어나죠. 한 명의 싸울 줄 아는 군인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시기라 총을 들지 않는 군인은 사실상 생각하기 힘들었을겁니다.

하지만 도스는 처음부터 지원한 의무병으로서 굳이 자신이 총을 들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전쟁과 군대에 무지했다고 볼 수도 있고, 어찌보면 그만큼 순수했다고도 할 수 있겠죠.


총을 들지 않는 겁쟁이

명령불복종으로 군사재판까지 받게 된 도스는 약혼녀인 도로시와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도스: 시키는 건 다 했는데, 사람을 못 죽인다고 범죄자 취급했어.

도로시: 그냥 총을 잡는 시늉만 하면 되잖아.

도스: 할 수 없어.

도로시: 할 수 있어. 그건 자존심이야. 자존심이고 고집이야. 하나님의뜻을 헷갈리지마.

도스:  .... 자존심?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내 믿음(신념)을 버리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그런 나랑 같이 살 수 있어? 난 널사랑하는 남자가 되고 싶어.

도로시: 자기를 사랑하게 된 건 남들과 달라서야. 신념이 있었으니까.


도스는 믿음, 신념, 가치관을 목숨과 같은 것으로 여깁니다. 신념을 버리는 인간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죠. 도스의 신념이 무엇인지, 그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개인차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토록 강하게 지키고자 하는 신념이 있는가, 이토록 옳다고 믿는 신념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저를 비롯해 선뜻 답하기 어려운 분들이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맞닥뜨린 충격적인 현실

우여곡절 끝에 도스는 무기를 들지 않은 채 의무병으로 오키나와 전선에 투입됩니다. 대부부 부대원들이 신병들이었기 때문에 전선 투입 하루만에 군인들은 거의 반패닉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불과 몇 시간전까지만 해도 옆에 함께 했던 전우들이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이죠.

영화는 전쟁의 참혹함을 매우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간혹 보기에 흉측한 장면들도 있고, 당시 기울어가는 전세를 뒤집고자 하는 광기어린 일본군, 어떻게든 살아서 집에 돌아가고 싶은 미군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해가 뜨자마자 일본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미군은 함대의 포격으로 일본군을 간신히 저지하며 급히 후퇴하기에 이릅니다. 쓰러지고 죽고 다친 수많은 병사들 사이로 비무장군인 도스는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을 찾기 위해 종횡무진 합니다.

그리고 부대 안에서 자신과 가장 큰 갈등을 일으켰고, 전날밤 함께 참호에서 경계근무를 서면서 자신을 이해해주기 시작한 부대 내 가장 용맹한 전우 스미디가 큰 부상을 입은 채 쓰러진 걸 발견하죠. 그렇게 늠름하고 용감하던 스미디가 나지막이 말합니다.

"나 너무 무서워..."

도스가 급히 스미디를 후송하려고 하지만 스미디는 결국 숨을 거두고, 남은 미군은 고지 아래로 전부 철수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죽어버린 스미디를 품에 안은 도스. 전장에는 부상을 당했지만 아직도 살아있는 많은 전우들이 있습니다.


신에게 신념을 구하다

이 영화 최고의 하이라이트, 명장면은 바로 이 지점인 것 같습니다. 도스(앤드류 가필드)는 울분에 가득 찬 얼굴로 관객들을 쳐다보며 묻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실 원하십니까? 헤아릴 수 없어요. 들리지도 않아요."

고지 아래로 미군은 다 철수했지만 도스는 "All right" 을 내뱉고는 포화가 쏟아지는 전장 속으로 혈혈단신 들어갑니다. 일본군을 피해 부상자를 찾아 계속 밑으로 내립니다. 그런 중에 부상당한 일본군에게도 응급치료를 해주기도 하죠.

도스의 신념은 국가를 초월한 전인류적 사랑이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돋았던 소름은 이 영화를 봐야지만 공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살인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에는 살인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도스의 신념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 것이었고, 총은 살인을 위한 도구였기때문에 도스는 들지 않았던 것이죠.

도스는 밤새 75명의 전우들을 구해냅니다. 총을 들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용감하게 전장을 뛰어 다녔습니다. 도스의 영웅적인 의무병 활동이 부대에도 도스가 함께 하면 살 수 있다는 새로운 동기부여가 되었고, 누구도 도스의 신념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한 명이라도 더 죽여야 이길 수 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한 명이라도 더 살리면 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Please Give me One more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생명을 주셨다.

이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의 기본 교리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사람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죄를 벌하고 악인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도 더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은 한 사람의 영혼 구원이었죠.


도스는 예수님께서 몸소 행하신 그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한 명을 구해 고지 밑으로 내려보내고 나서 도스는 매번 한 명만 더 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도스가 종교적인 신념으로 움직였다고 해서 이 영화를 단순히 종교영화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핵소 고지>는 종교인, 비종교인 모두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니까요.

전쟁에서 도스처럼 알려지지 않았지만, 또 도스처럼 종교가 없었지만 자신의 신념에 따라 전우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우 또는 적군일지라도 한 명을 구했든 수십명을 구했든 사람을 구해낸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도스나 멜 깁슨이 종교를 가지지 않고 이런 영화가 만들어졌다면 이 영화를 '종교쟁이를 영웅화 한 영화'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요?

비종교인이 양심적 집총 거부를 하고 수많은 전우를 구하면 영웅이 되고, 종교적 신념에 따라 그같은 행동을 하면 종교에 미친 사람이 되어버리는 걸까요?


전쟁의 참상으로 평화를 말하다

멜 깁슨은 <브레이브 하트>에서 불의에 맞서 싸우는 혁명적 인물을 훌륭하게 연기해냈고,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 <핵소 고지>에서 한 인물의 심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습니다. 거기다 이번 영화를 보면서 전쟁은 국가와 국가의 격돌이지만 그것을 수행하는 것은 평범한 인간들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도스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이 가져야 할 올바른 신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전쟁을 통해서는 국가의 그릇된 가치관, 이념, 욕망이 한 사람의 인격과 신념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도 보여주고 있다는 거죠. 일본군이 할복 자살을 하고 자살 폭탄을 던지는 장면은 국가의 잘못된 이데올로기가 개인에게 투영된 것입니다. 참전한 모든 일본군이 '미군은 반드시 세상에서 없어져야 하고, 일본이 승리해서 세계 초강대국으로 거듭나야 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다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훈련과 교육을 받고 전쟁을 치르면서자연스럽게 국가의 신념에 동화되고 또 세뇌되는 것이죠.


전쟁이라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이 영화는 반전의 ㅂ도 꺼내지 않았지만 철저히 고증된 전투장면들을 통해서 충분히 평화의 중요성과 전쟁의 참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념이란 내가 살아가는 이유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무엇때문에 살아가나요?

도스의 신념은 단지 살인하지 않는다가 아닌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도스를 보면서 많은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제게 다가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죽을 때까지 내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무엇'이 과연 있는가?"

"그것이 있다면 나는 과연 그 '무엇'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사실 영화에서 도스의 신념에 대해 가타부타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과거 가정사가 포함되어 있어 마치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장면이 들어가 있다고 해서 도스의 신념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그 장면이 없다고 해서 도스의 신념에 대한 설득력이 크게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만큼 개인의 신념이란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것이겠죠.

세상은 수많은 신념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고 그로 인해 돌아갑니다.

도스의 신념만이 옳은 것이기 때문에 수많은 생명을 구하고 미국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를 지키기 위한 수많은 신념들이 있었기에 미군이 핵소 고지에 오를 수 있었고, 거기에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달랐던 어떤 한 사람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핵소 고지 아래로 내려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나에게는 가족과 친구를 위해 전선에 나갈 신념이 있는가

전우를 구해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빌 신념이 있는가

인생을 후회하지 않고 살아가게 하는 신념이 있는가


종교를 떠나 철학적인 질문에 대해 고민하게 한 영화였습니다.

(+앤드류 가필드는 연기를 참 잘하고, 테레사 팔머는 참 이쁘다)


<핵소 고지>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로서 ★★★★☆ 4.5/5

(5개: 재미+작품성=어머, 이건 꼭 봐야해!)

(4개: 작품성or재미=딱히 싫어하는 취향이 아니라면 보면 좋을 영화)

(3개: 무난하게 볼 수 있는 킬링타임용)

(2개: 취향을 심하게 타거나 굳이 안 봐도 될...)

(1개: 왜 만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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