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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신돌석장군의 업적과 년도
잡초 조회수 9,979 작성일2012.11.28

 신돌석의 업적과 년도 좀부탁드립니당

답변 빨리 안올라오면 검색해야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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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
우주신
철학, 심리철학 5위, 사회, 도덕 7위, 국어, 한문 5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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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말기의 평민출신 항일의병장. 본관 평산(平山), 본명 태호(泰浩).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의 명성황후 살해사건과 단발령으로 국민들의 대일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 결과 전국에서 의병항쟁이 발발하였다. 이때 신돌석은 19세의 젊은 나이로 1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상북도 영해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1896). 1905년에는 국가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또다시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발발하였다. 이 때 신돌석도 평민의 신분으로 의병을 모아 애국적 의분을 대일항쟁으로 쏟았다.

 

처음에는 의병 100명을 모아 영릉의병장의 이름으로 출발하였다(1906). 4월에는 울진 장흥관에서 일본군선 9척을 파괴하고, 6월에는 원주에서 일본군들을 습격하였다. 이어서 삼척, 강릉, 양양, 간성 등지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그들이 전선을 가설하는 작업을 공격하여 방해하기도 하였다. 1907년에는 울진 수동으로 돌아와 다시 의병을 증모하였고 그 병력으로 영덕의 관공서를 습격하였다. 또한 일본군이 청송에 집결해있을 때 이를 공격하기 위해 의병을 가까운 청부역으로 진군시켰다. 이 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의병을 자청하여 약 3,000여명이 증가하였다. 일본군이 강력한 의병소식에 영양의 주곡으로 퇴각하자 이를 공격하여 격퇴시켰다. 진보의 삼위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경주 대산성에서 연일 전투를 벌였고 청하로부터 조현에 이르러서도 이겼다. 그리고 소항을 지나 대동으로 진출하였다. 10월에는 영해경무서를 습격하였다.

 

전국의 의병은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이인영을 중심으로 13도 의병이 연합하여 양주에 집결하였다(1907. 12). 신돌석도 경상도를 대표하여 의병 1,000여명을 모아 양주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의병 재편과정에서 신돌석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당시 의병은 양반이나 유생 출신이 주로 지휘하였기 때문이었다. 전국 의병연합은 계획과 지도력의 미흡으로 서울공격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신돌석은 경상도 영해로 돌아와 평해 독곡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1908.1). 1908년 3월에는 수비로 돌아와 안동, 울진, 삼척, 강릉 등지의 의병과 결합하여 의병세력을 강화하고 춘양, 황지, 소봉동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 후에도 평해 한곡에서(7월), 희암(9월)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10월까지 진지를 이동하면서 활약한 후, 겨울이 되어 다음해에 다시 기병하기로 하고 의병들을 귀가시키고 부하 김상열의 집에 칩거하고 있었는데, 이들 형제가 모의하여 신돌석을 타살하고 말았다(1908).

 

의병은 사회적 지도계급인 유생 양반출신이 대부분이어서 평민이 의병을 지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돌석은 지도력이 훌륭하고 농민들과의 대화가 잘되었으며 민폐를 끼치지 않아 호응하는 자가 많았다. 또한 전술이 뛰어나 일본군을 여러 방법으로 공격하여 피해를 많이 주어 전과를 많이 올렸다.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평민출신 의병장으로서 국가의 위기를 구하려는 큰 활약을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신분차별의식 때문에 의병의 연합전선 형성과정에서 화합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201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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