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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6. 조선 선비의 사표… 면암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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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6. 조선 선비의 사표… 면암 최익현

“굴욕적 개항은 일본 탐욕만 채워주는 희생양 전락”

보물1510호 최익현 초상. 문화재청 제공 / ‘만절필동 재조번방’ 선조의 어필
보물1510호 최익현 초상. 문화재청 제공 / ‘만절필동 재조번방’ 선조의 어필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1906)은 조선을 대표하는 선비다. 면암은 동아시아의 질서가 재편되고 국가의 명운이 경각에 달린 격동의 시기에 살았다. 그 신호탄은 1840년 서양 제국주의 세력 영국과 동양의 맹주 청나라가 충돌한 아편전쟁이었다. 조선은 동양의 맹주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미 사라진 명나라의 정신적인 적통은 조선이라고 자부했다. 조선은 소중화(小中華)였다. 명나라가 망한 지 40여년이 지난 1684년 이제두, 허격 등은 우암 송시열의 부탁으로 심심산골 가평 조종천변 바위에 만절필동(萬折必東: 만 번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 재조번방(再造藩邦: 명나라가 도와서 나라를 되찾음)이라고 새기고 조종암(朝宗巖)이라고 불렀다. 조선중화사상과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성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면암은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1868)의 제자이다. 그는 중암 김평묵(重菴 金平默, 1819~1891), 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敎, 1831~1893) 등 화서학파 문도들과 함께 조종암에서 중화(中華)의 도(道)를 수호하겠다고 굳은 결기를 다지곤 했다. 그들은 사문(斯文)의 수호자로 자처했다. 사문을 수호하는 전쟁터는 조선이었다. 조선은 사문난적(斯文亂賊)들을 가차 없이 처단했다. 그러나 전선은 두 곳에서 발발하고 있었다. 대내적으로는 대원군이 만동묘와 서원을 철폐하는 조치를 취했고, 대외적으로는 양이(洋夷)들과 일본의 침략이었다. 프랑스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빌미로 강화도에 침입하다 패배한다. 1866년 병인양요다. 미국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침범하나 치열한 싸움 끝에 물러난다. 1871년 신미양요다. 조선에게 이들은 서양 오랑캐(洋夷)일 뿐이었다. 조선은 오랑캐들에게 결코 문을 열어줄 수 없어 쇄국(鎖國)정책으로 일관했다. 오히려 양이가 침범해도 싸우지 않으면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전국 방방곡곡에 척화비를 세우기에 이른다. 대원군은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선유대원 임명
선유대원 임명

면암은 백성들에게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는 토목공사를 중지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1868, 丙寅疏)에 이어 ‘옛날 법을 변경하고(政變舊章), 그칠 새 없이 받아내는 각종 세금 때문에 백성들은 어육이 되어 떳떳한 의리와 윤리는 파괴되었다’(賦斂不息 生民魚肉 彛倫喪)는 상소(1873년 10월 25일)를 올린다. 면암은 성리학적 의리와 명분에 입각하여 대원군에게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정국을 강타했다. 대신과 신료들은 면암을 규탄하며 몰아세웠다. 이에 면암은 보다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요구한다. 면암은 “지금 나라의 일들을 보면 폐단이 없는 곳이 없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불순하여 고치지 않으면 끝이 날 것”이라고 경고한다. 면암은 “만동묘를 없애버리니 임금과 신하 사이의 윤리가 썩게 되었고, 서원을 혁파하니 스승과 생도간의 의리가 끊어졌다”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의 가장 급선무는 만동묘를 복구하는 것과 서원을 흥기시키는 것”(1873년 11월 3일 상소) 이라고 주장한다. 이 상소는 결국 대원군의 탄핵상소가 되어 대원군은 실각하고 만다. 고종은 “사리를 모르는 시골 사람이 분수를 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신문하지 말 것을 지시한다.”(고종 10년 11월 9일) 고종의 두둔에도 불구하고 면암은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된다.

일제는 1868년 명치유신에 성공한 후 동아시아의 신흥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며 강화도 연무당에서 불평등조약 강화도조약(1876년 12월 3일)을 체결한다. 면암은 도끼를 들고 “임금이 행차하는 길 옆에 엎드려서”(고종 13년 1월 23일) 개항은 절대 안 된다며 척화소(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를 올린다. 우리나라 역사상 국가적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도끼를 들고 임금한테 나아가 이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거든 차라리 내 목을 치라고 격하게 상소를 올린 경우는 고려의 우탁과 조선시대 중봉 조헌과 면암 최익현 세 사람뿐이다. 그만큼 면암의 척화소는 역사상 유례가 드물 정도로 격렬했다. 조야에 큰 파문을 일으켰음은 물론이다. 그가 개항을 반대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개항하면 나라가 망하기 때문이었다.(고종실록 13권, 고종 13년 1월 23일)

첫째, 화친이 상대편의 구걸에서 나오고 우리에게 힘이 있어 능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어야 그 화친은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겁나서 화친을 요구한다면 지금 당장은 좀 숨을 돌릴 수 있겠지만, 이후 그들의 끝없는 욕심을 무엇으로 채워주겠는가?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첫째 이유이다.

둘째, 그들의 물건은 모두 지나치게 사치한 것과 괴상한 노리갯감들이지만, 우리의 물건은 백성들의 목숨이 걸린 것들이므로 통상한 지 몇 년 되지 않아서 더는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나라도 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셋째, 그들이 비록 왜인(倭人)이라고 핑계대지만 실제로는 서양 도적들이니, 화친이 일단 이루어지면 사학(邪學)이 전파되어 온 나라에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세 번째 이유이다.

넷째, 그들이 뭍에 올라와 왕래하고 집을 짓고 살게 된다면 재물과 부녀들을 제 마음대로 취할 것이니,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네 번째 이유이다.

다섯째, 저들은 재물과 여자만 알고 사람의 도리라고는 전혀 모르는데, 그들과 화친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다섯째 이유이다.

면암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야욕을 속속들이 간파하고 있다. 개항하면 국가경제는 파탄지경에 빠질 것이고 일제에 철저하게 예속될 것이다. 유교의 윤리 도덕적 질서 역시 붕괴되어 백성들은 짐승으로 추락할 것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개항은 인간으로 남느냐 짐승으로 전락하느냐 하는 긴박한 국가적 도학적 사태였다. 하지만 도끼 들고 척화소를 올린 바로 다음 날 면암은 의금부에 투옥된다. 이번에는 흑산도에 위리안치 된다.

삼충단
삼충단

청일전쟁(1894)에서 이긴 일제는 친러 경향을 띠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1895)을 일으킨다. 3개월 후 고종은 단발령을 공포한다. 유림과 백성들의 분노는 부글부글 끓었다. 제천의병(유인석), 안동의병(권세연) 등 전국에서 의병이 일시에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면암은 “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격분했다. 고종은 면암에게 의병을 해산시키는 선유대원(宣諭大員)으로 임명한다. 면암은 “김홍집과 정병하, 조희연과 유길준보다 더 큰 역적이 없으니 설사 만 토막을 내고 그의 십족을 도륙하더라도 귀신과 사람들의 분노를 씻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왜적을 토벌하지 않고는 원수를 갚을 수 없다”(고종 33년 2월 25일)며 선유대원을 완강히 거부한다.

1900년 면암은 눈발을 헤치며 68세의 노구를 이끌며 조종암과 대통묘(大統廟: 명나라 황제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를 방문하여 춘추대의(春秋大義)와 명분을 새롭게 다잡는다.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국권이 상실될 위기에 직면하자 면암은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선포한다. “이적의 화가 어느 나라엔들 없을까마는 그 어느 것이 오늘날의 왜놈과 같겠는가? 바로 의병을 일으켜야 할 것이요, 많은 말이 필요없다.”(면암집) 면암은 임실군수를 역임한 임병찬 등과 함께 태인, 정읍에서 군수물자 등을 확보하여 순창에서 왜군과 싸우다 관군의 공격을 받아 중군장 정시해(鄭時海)가 전사하자 민족상잔의 참변은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의병을 해산하고 만다. 면암은 임병찬 등 13명과 함께 서울로 압송된 후 대마도에 투옥된다. 그는 고종에게 “원수를 능히 없애지 못하고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며...4천년 화하의 정도(正道)가 흙탕에 빠지는 것을 붙들지 못하고 선왕의 백성이 어육이 되는 것을 구하지 못하였으니...”라는 유소(遺疏)를 남기고 일제의 것이라면 쌀 한 톨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겠다며 곡기를 끊고 순국하고야 말았다.

조선은 외국으로 유학 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오직 조선 땅에서만 세상을 진단하고 대응하려 했다. 면암은 소중화의 도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였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이 보편화 되는 그런 시대였다. 면암은 “공법(公法)은 세계 만국이 다 같이 지키는 것이나 우리나라만이 행하지 못한다”(면암집)고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민족의 자존, 국권 회복, 백성 구원 등을 오직 춘추대의만을 고집했다. 조선 선비의 한계였다.

 

대마도 귀양 장면
대마도 귀양 장면

권행완(정치학박사다산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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