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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온건개화파 김홍집이 한일...
비공개 조회수 2,675 작성일2019.03.27
온건개화파 김홍집이 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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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유명세와 악재를 동시에 가져다 준 [조선책략]>
김홍집이 본격적으로 조정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고종 17) 3월 예조참의 시절 제2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일본을 방문하면서부터다. 이때 그가 해결할 가장 큰 현안은 인천 개항과 관세 징수 교섭이었다.

그는 58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7월 초 도쿄에 도착, 일본 외무성의 이노우에 외상과 만나 현안 타결을 시도했으나, 일본 정부는 겉으로만 환대할 뿐 재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본국으로 돌아왔다.

임무 수행엔 실패했지만 일본에 머무는 동안 김홍집은 개화 이후 빠르게 발전한 일본의 신문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울러 일본 체류 기간 중에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과 그의 참찬관 황준헌(黃遵憲)과 자주 만났고, 돌아오는 길에 황준헌으로부터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 한 권을 받아 왔다.

이 책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비해 조선, 일본, 청나라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향후 정치ㆍ외교적 파문을 예고했다.

김홍집은 귀국 후 고종에게 일본에서 가져온 [조선책략]을 바쳤다. 책을 받아든 고종은 여러 중신들에게 건네며 검토하게 했는데, 아마도 궁지에 몰린 국제 관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묘책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비록 수신사 임무는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김홍집의 처지는 [조선책략] 한권으로 상당한 신망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한편으로 위정척사파들로부터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급진개화파들은 [조선책략]의 내용을 적극 지지하고 나선 반면, 위정척사파들은 이를 계기로 더욱 극렬하게 개화운동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신망과 함께 비난의 화살이 날아오는 혼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김홍집이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만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조선책략] 내용 중에 ‘천주와 야소가 우리 주자ㆍ육상산과 같다’는 구절은 위정척사파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영남 유생들은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통해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유포되는 것을 보고 저절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쓸개가 흔들리며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며 울분을 토했다. 이 일의 파장으로 김홍집은 수차례 사직 의사를 표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천 개항을 연기시킨 공로에도 불구하고 탄핵 상소가 너무 자주 올라오자 김홍집은 한동안 관직에서 물러나 있어야 했다. 1881년 발발한 위정척사운동이 큰 악재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홍집은 [조선책략]을 가지고 와 정부가 서양 세력을 끌어들이게 한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김홍집은 청나라의 통리아문을 모방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외교통상 업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시급한 외교 실무를 담당할 적임자가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통리기무아문은 1880년에 설치된 관청으로, 개항 후의 대외 통상에 대응해 국가의 외교와 군사제도 등을 근대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업무를 관장하던 관청이다. 김홍집은 1882년 봄 조선이 미국, 영국, 독일 등과 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맺을 때 전권대신들의 부관으로 협상의 실무를 담당했다. 이로써 흥선대원군의 집권 기간 내내 단단히 잠겨 있던 조선 개화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자의든 타의든 김홍집은 개화의 선봉에 서 있었는데, 외교관으로서 그만한 역량과 경륜을 갖춘 인물이 드물었던 탓이 크다.

<2.개화기의 혼란과 정치외교가로서의 활약>
1882년 6월에 발발한 임오군란(壬午軍亂)부터 1884년 12월 갑신정변(甲申政變) 전후까지 폭풍 같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김홍집은 사건 수습의 중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당시 임오군란을 주도한 세력은 명성황후 즉, 민씨 정권의 주요 인사들을 처단하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는데, 정작 개화 세력의 핵심인 명성황후와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를 붙잡는 데 실패했다.

고종은 할 수 없이 흥선대원군을 불러 사태를 수습시켰지만,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흥선대원군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고 있었다.

당장 일본으로 피신했던 하나부사 공사가 강화도로 군함을 이끌고와서 임오군란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했고, 어쩔 수 없이 흥선대원군은 외교 실무 경험이 풍부한 김홍집을 불러 협상을 주도하게 했다.

그 사이 청나라는 군대를 출동시켜 대원군을 잡아가고 이에 민씨 정권은 다시 부활했다. 대원군과 명성황후 간의 정치적 다툼 속에 김홍집은 전권대신 이유원의 부관 자격으로 일본과의 협상에 임해 굴욕적인 제물포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 혼란한 시기에 김홍집은 중국 톈진으로 가 흥선대원군의 석방을 교섭하는 활약으로 경기관찰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협판통리아문사무가 되었다.

갑신정변의 뒤처리도 김홍집의 몫이었다. 청나라는 임오군란을 제압한 후에도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내정간섭과 함께 개화파들을 탄압했다. 결국 불만을 품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이 주축이 된 급진개화파들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김홍집은 개화 외교의 실력자였지만 정변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개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조정을 대표해 열강과의 대외 교섭에 앞장섰지만, 정권 쟁탈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개화파의 3일천하는 끝났고 김홍집은 다시 한 번 그 뒷수습을 맡았다. 갑신정변은 청과 일본의 간섭만 심해지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이를 해결할 적임자는 김홍집밖에 없었다. 김홍집의 주가는 상승하여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승진했고 외무독판직까지 겸직했다.

일본은 갑신정변의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협상자로 전권대신 이노우에를 내세웠고 이에 맞서 김홍집이 나섰지만, 굴욕적인 한성조약을 체결하는 우를 범했다. 한성조약의 결과에 책임을 통감한 김홍집은 좌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다.

<3.내각의 수반으로서 개혁을 이끌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군은 조선의 내정 개혁을 주장했다. 민씨 정권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일본은 당시 동학농민군의 지지를 받고 있던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여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세력을 몰아냈다.

1894년 7월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김홍집이 영의정으로 임명되었는데,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 된 김홍집은 박정양, 김윤식, 유길준 등과 함께 개혁 작업에 착수했고 이것이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김홍집은 갑오개혁으로 개편된 관제에 따라 영의정에서 최초의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제1차 김홍집 내각의 수반으로 개혁 작업을 추진해 나갔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의도대로 잘 따라 주지 않자 그를 다시 실각시켰다. 이때 김홍집은 흥선대원군의 편이 되어 옹호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본은 군국기무처를 해산하고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 등을 귀국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제2차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들 연립내각은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홍범 14조>를 발표하는 등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지만, 김홍집은 박영효와의 갈등을 빚어 사임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의 실각 후 다시 정권을 잡을 기회를 노리던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세력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은 후 3국 간섭을 이끌어내 일본을 압박했다. 3국 간섭이란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요동 반도를 점령한 일본에게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철수를 요구한 사건을 말한다. 3국 간섭으로 친러파가 기용된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섰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일본은 1895년 10월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일본은 친러파를 몰아내고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는데, 이때 김홍집은 내각의 수반 자리를 거절했다. 그렇지만 고종이 눈물을 흘리며 부탁하자 어쩔수 없이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고종은 김홍집 몰래 친러 세력과 함께 거처를 옮기는 이른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뒤늦게 사실을 안 김홍집이 고종을 만나기 위해 급히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지만, 현실은 고종이 내린 체포 명령이었다.

고종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김홍집은 광화문에 이르러 성난 군중에게 둘러싸였다. 명성황후의 시해와 친일 내각이 주도한 단발령 등으로 민심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는 상태였다.

겁을 먹은 수행원들이 일본 군대가 있는 곳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지만, 김홍집은 이를 사양했다.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다른 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조선 백성의 손에 죽는 것이 떳떳하다. 그것이 천명이다.”

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김홍집은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2019.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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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

김홍집은 2차수신사로 서양에 다녀왔으며 거기서 서양문물을 보고
온건개화파를 주도했습니다.

김홍집이 가져온 책인 '조선책략' 이걸로 많은 사건이 발생했죠.

온건개화파 인물들에 대해 아래에 자세히 다뤘으니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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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신

아래는 당시 시대상

그림1

그림2

그림3

그림4

그림5

명례궁 수입의 88%를 당오전으로 충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출은 수입 291만 량을 훨씬 초과하는 444만 량이었다. 식료비는 354만 량 이며 총지출의 79%에 달하였다.

1855년부터 조선왕조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農業生産(농업생산)이 급속하게 감소하고, 物價(물가)가 지속적으로 치솟고, 市場(시장)이 분열하였다(李榮薰 2007). 이 위기의 기간에 명례궁의 수입은 <표1>에서 보듯이 1853-1854년 32,954량에서 1892-1893년 2,916,290량으로 무려 88배나 팽창하였다. 동기간 물가도 급하게 치솟았다. 예컨대 米(쌀) 1석의 가격은 6량에서 138량으로 23배나 올랐다. 이를 감안하면 명례궁의 실질 수입은 동기간 3.8배 증가하였다.

위기의 시대를 반영하여 宮房田(궁방전)으로부터의 실질 수입은 감소하였다. 액면으로는 8,742량에서 184,824량으로 21배 증가하였지만, 물가가 23배나 올랐기 때문이다. 정부의 공상도 액면으로 8.5배 증가하였지만 물가의 상승폭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위기의 시대에 정부재정의 형편도 악화되었기 때문이다.(*5) 그런 가운데 명례궁의 실질 수입을 3.8배나 끌어올린 것은 왕실로부터의 內下(내하)였다. 내하가 1892-1893년에 연평균 257만 량을 초과한 가운데 총수입의 88.2%를 차지하였다.

명례궁에 대한 왕실의 내하는 이전에도 있긴 했지만 비정기적이었다. 대개 銀(은)으로 내려졌는데, 때때로 다른 현물일 수도 있었다. 받자책에 의하면 錢(전)의 형태로 내하가 매년 행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1882년부터이다. 이후 1894년까지 內下(내하)의 추이를 제시하면 [그림2]와 같다. 이에서 보듯이 내하는 1882년 38,100량에 불과하였는데 1887-1888년에 연간 50만 량을 넘었으며, 1891년 이후 급증하여 1894년에는 270만 량 이상의 거액에 달하였다.

[그림1] 明禮宮(명례궁)으로의 內下(내하)의 추이: 1882-1894  (단위: 兩(양))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자료 : 『明禮宮捧上冊 (명례궁봉상책)』

(奎章閣圖書 19003-1, 21, 20, 19, 18, 17, 16, 7, 43, 42, 6, 5, 4)

이 내하금이 1882년부터 발행된 當五錢(당오전)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바로 그 해부터 錢(전) 형태의 내하가 연례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오전의 발행은 閔妃(민비/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閔氏(민씨) 政權(정권)의 유력한 재정수단이자 민씨 일족의 致富(치부) 方策이었다. 당오전의 발행은 물가를 급하게 끌어올리는 등,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다. 그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당오전은 1885년부터 한동안 발행이 자제되다가 1889년부터 1894년 폐지되기까지 품목에 못 미치는 惡貨(악화)의 형태로 대량 발행되었다(吳斗煥 1991: 61-81). 그러한 당오전의 역사와 [그림2]의 추이는 연도별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개 일치하고 있다. 이 역시 내하의 수단이 다름 아닌 당오전이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요컨대 민비(명성황후)는 1892-1893년 명례궁 수입의 88.2%를 당오전으로 충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기간 명례궁의 지출은 <표2>에서 보듯이 수입 291만 량을 훨씬 초과하는 444만 량에 달하였다. 이 시기 명례궁 재정은 거대한 적자 구조였다. 동시기 명례궁의 會計冊(회계책)은 이 적자가 ‘加用(가용)’, 곧 借入(차입)으로 매워졌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림3]은 1855-1892년의 회계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米와 錢(전)의 연말 시재의 추이이다.

[그림2] 명례궁의 年末 時在의 추이: 1853-1892  (단위: 兩(양))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자료 : 『明禮宮會計冊 (명례궁회계책)』

명례궁의 연말 시재는 1863년 高宗(고종)의 시대가 열리면서 차입 구조로 들어섰다. 1873년에는 일시 차입 구조를 벗어났다가 1883년까지 조금씩 累積借入(누적차입)을 늘려갔다. 그러다가 그림에서 보듯이 1884년 이후 가파르게 누적 차입이 증대하기 시작하여 1892년에는 66만 량의 거액에 달하였다. 동기간 민비(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하는 민씨 일족의 집권은 확고하였다. 借入先(차입선)이 어딘지, 정부재정인지 市中(시중)의 商人(상인)인지는 회계책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의 정부재정이 매우 困乏(곤핍)했음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후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명례궁은 1884년 이후 급속하게 지출규모를 팽창시키면서 당오전의 내하로 그 상당 부분을 충당하였을 뿐 아니라, 그래도 부족한 수입을 시중 상인들로부터의 차입으로 충당하였던 것이다.(*6)

그 위기의 시대에 민비(명성황후)는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나 過濫(과람)하게 명례궁의 재정을 확장하였던가. <표2>에 보듯이 1893년 명례궁은 354만 량 이상의 食料費(식료비)를 지출하였다. 총지출에서 식료비의 비중이 79.6%에 달하였다. 식료비가 그렇게 크게 늘어난 것은 무척 잦아진 告祀(고사)ㆍ茶禮(차례)와 宴會(연회) 때문이었다. 차하책에 의하면 1893년 한 해에 모두 29회의 고사와 다례가 행해졌다. 민비(명성황후)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궁중에 神堂(신당)을 짓고 巫堂(무당)과 중을 불러들여 고사와 다례를 행하였다. 모두 성리학의 나라가 오랫동안 祖宗之法(조종지법)으로 금지해 온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1893년 한 해에 도합 37회의 연회를 베풀었다. 왕의 誕日(탄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궁중의 後苑(후원)에서 임시로 내외의 賓客(빈객)을 맞아 왕실의 위엄과 은혜를 과시하기 위해 베푼 연회들이었다. 1894년 2월의 받자책의 한 구절은 220만 량의 거액을 내하하면서 ‘誕日熟設條(탄일숙설조)’라고 하였다.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를 풍족하게 열 용도라는 뜻이다. 연회가 끝나면 빈객들을 대상으로 한 ‘賜饌(사찬)’이 이루어졌다. 일본에서 수입한 쟁반에 음식을 가득 담아 褓(보)에 싸서 지게꾼에 지워 빈객들의 집으로 운반하였다. 아울러 소주방, 생물방, 생과방에 소속된 熟手(숙수)들에게 工錢(공전)이 풍성하게 베풀어졌다. <표2>에서 보듯이 식료비만이 아니라 공업비와 임료가 크게 증가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1893년의 차하책에서 고사ㆍ다례와 연회에 관련된 식재료, 공업비, 임료를 모두 합하니 당년의 총지출 444만 량의 절반을 넘는 247만 량이나 되었다.

민비(명성황후) 이전의 宮主(궁주)들이 이렇게 풍성한 연회를 베푼 적은 없었다. 大院君(대원군)의 통치와 개항 이후 몇 차례의 政變(정변)을 겪는 과정에서 왕실의 살림살이를 유교적 公의 명분으로 규제하던 정치세력들이 모두 소거되고 말았다. 그 나머지 왕실은 1884년 이후 千年王國(천년왕국)의 宴樂(연락)을 누렸다. 지극히 공적으로 취급되어 온 銅錢(동전)을 남발하여 연회로 낭비하는 일은 18세기의 근엄했던 朝廷(조정)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7) 그 좋았던 시절이 1894년의 淸日戰爭(청일전쟁)으로 끝이 났다. 왕실을 비호하던 淸帝國(청제국)이 조선에서 물러났다. 일본의 지원으로 성립한 內閣(내각)은 왕실을 立憲君主制(립헌군주제)의 굴레로 묶으려는 정치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시련의 계절이 왕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례궁 재정은 명성황후가 살아 활동한 1893-1894년이 절정기였다. 명성황후는 궁주로서 번다한 고사와 연회를 주관하였을 뿐 아니라 1903년에는 죽은 궁주로서 번다한 상식과 다례를 받아먹었다. 1903년의 지출 용도를 보면 식료비가 77% 의 비중을 차지하였다.

명례궁 재정은 1894-1895년의 甲午更張(갑오경장)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우선 無土(무토) 궁방전이 폐지되었다. 갑오경장은 宮房田(궁방전)과 衙門屯土(아문둔토)에 부여해 온 免稅(면세)의 특권을 폐지하였다(甲午陞總/갑오승총). 그에 따라 民有地(민유지)로서 해당 結稅(결세)를 궁방에 상납하던 무토 궁방전이 폐지되었다. 또한 무토가 폐지되는 과정에서 有土(유토)의 일부도 함께 폐지되었다. 유토 가운데는 무토와의 경계가 애매한 것들이 있었다. 사실상의 민유지로서 아주 낮은 수준의 賭地(도지)를 궁방에 바쳐 온 유토였다. 이런 부류의 유토를 갑오경장 당시에 第2種有土(제2종유토)라 하였다(李榮薰 1988: 135-6). 실은 갑오경장 이전에 이미 12처의 제2종유토가 명례궁의 수취 대상에서 이탈하였다. 18세기말 이래의 일이었다. 그 같은 추세의 연장에서 갑오경장으로 무토가 폐지되자 13처의 제2종유토가 더불어 폐지되었다. 전술하였듯이 18세기말 명례궁의 유토는 전국적으로 41처에 분포하였다. 그러했던 유토가 갑오경장 이후는 22처에 불과하게 되었다.(*8) 궁방전의 수입원으로서의 가치는 현저히 감소하였다.

갑오경장이 명례궁 재정에 가한 가장 심각한 타격은 當五錢(당오전)의 폐지였다. 그에 따라 1892 -1893년 총수입의 88.2%나 차지했던 王室(왕실)로부터의 內下(내하)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1895년에는 궁주인 閔妃(민비/명성황후)가 일본의 자객들에 의해 시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乙未事變/을미사변). 명례궁은 가장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를 상실하였다.

갑오경장으로 성립한 내각은 日本貨幣(일본화폐)와 동일 稱量(칭량)의 新式貨幣(신식화폐)를 발행하였다. 신식화폐 1元은 舊 常平通寶(구 상평통보) 5兩(양)에 해당하였다. 명례궁의 차하책은 1895년 정월부터 지출 수단을 구 상평통보에서 신식화폐 白銅貨(백동화)로 바꾸었다. 그 때부터 제반 물가가 일률적으로 1/5로 切下(절하)되었다. 그런데 화폐의 단위만큼은 이후에도 여전히 구래의 兩(양)을 고집하고 있었다. 명례궁의 받자책은 1895년 8월까지 구 상평통보로 수입을 기재하다가 이후 신식화폐로 바꾸었다. 여기서도 화폐의 단위는 여전히 구래의 兩(양)으로 표기되었다.

[그림4] 1894-1904년 명례궁의 수입과 지출의 추이이다. 1894년의 수입과 지출은 구 화폐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비교의 편의를 위해 1/5로 절하하였다. 동기간 화폐의 단위는 받자책과 차하책에서 여전히 兩(양)이었지만 독자들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元으로 표기하였다.

[그림3] 명례궁의 수입과 지출: 1894-1904  (단위: 元)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자료 : 『明禮宮捧上冊 (명례궁봉상책)』 『明禮宮上下冊 (명례궁상하책)』

(奎章閣圖書 19003-4, 41, 40, 39, 38, 37, 36, 35, 34, 33, 32)

(奎章閣圖書 19001-68, 73, 67, 57, 6, 64, 16, 61, 63, 9, 74)

명례궁의 수입은 갑오경장의 충격을 받아 1894년 69만여 元에서 1896년까지 10만여 원으로 크게 줄었다. 이후 1897년 大韓帝國(대한제국)의 성립을 맞아 1899년까지 48만여 원으로 회복되었으며 그 수준에서 1902년까지 정체하였다. 연후 1903-1904년에 148만여 원 이상으로 급증하였다. 이 같은 각 연도의 수입에 있어서 80% 또는 90% 이상은 內下(내하)였다. 1903년에 수입이 크게 증가한 것은 내하가 전년의 33만여 원에서 127만여 원으로 크게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받자책은 그 중의 100만 원에 대해 ‘未下條(미하조)’라고 용도를 밝혔다. 즉 각종 재화를 구입하고서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들을 상환할 목적이었다. 실제로 그림에서 보듯이 1894년 이후 지출은 언제나 수입을 초과하였다. 명례궁 재정은 1894년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후에도 변함없이 借入(차입)에 의해 꾸려졌다. 그것을 상환하기 위해 1903, 1904년에 대량의 내하가 이루어져 흑자재정으로 돌아섰지만, 누적되어 온 차입이 얼마나 상환되었는지는 의문이다. 1903년의 흑자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을 뿐 아니라 1904년에는 지출이 증가하여 거의 收支(수지)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림4. 표3>명례궁의 수입 내역과 지출 용도: 1903-1904  (단위: 元)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자료 : 『明禮宮捧上冊 (명례궁봉상책)』 (奎章閣圖書 19003-33, 32),

『明禮宮上下冊 (명례궁상하책)』 (奎章閣圖書 19001-9)

1903-1904년의 수지 상황을 보다 자세히 제시하면 <표3>과 같다. 兩(양)年의 평균 수입 151만여 원은 거의 대부분 내하로 이루어졌다. 내하의 비중이 무려 96.3%나 되었다. 2.0%의 供上은 宮內府(궁내부)로부터의 지급을 말하는데, 갑오승총으로 폐지된 무토의 수입을 보전하기 위해 1897년부터 행해진 지급과 역대 국왕의 肖像(초상)을 모신 眞殿(진전)에서의 享需(향수)를 충당하기 위한 지급 등을 말한다. 宮房田(궁방전)은 전술한대로 수입원으로서의 가치를 잃어 그 비중이 1.6%에 불과하였다.

1903년의 지출 용도를 보면 食料費(식료비)가 77.7%의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그 점에서 1893년과 거의 마찬가지이다. 그 원인을 살피면 景孝殿(경효전)에서 행해진 78회의 上食(상식)과 茶禮(차례)가 가장 중요하였다. 경효전은 1895년에 시해된 閔妃(민비/명성황후)의 魂殿(혼전)이다. 민비(명성황후)는 1893년에는 살아 있는 궁주로서 번다한 고사와 연회를 주관하였을 뿐 아니라 1903년에는 죽은 궁주로서 번다한 상식과 다례를 받아먹었다. 그 외에 1903년 한 해에 황제에게 進御床(진어상)이 28회나 바쳐졌다. 그 중의 9회에는 賜饌床(사찬상)까지 베풀어졌다. 1902년 나이 50에 耆老所(기로소)에 들어 노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 황제는 尊體(존체)를 보전하기 위해 수시로 그의 내탕으로 하여금 珍羞盛饌(진수성찬)의 床(상)을 올리게 하였다. 게다가 1903년은 그의 즉위 40주년이었다. 정부는 성대한 연회를 준비하였으며, 명례궁도 그 비용의 일부를 부담하였다. 식재료에 이어 인건비가 16.6%의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명례궁에 속한 궁속들이 110명으로 늘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5 명례궁의 실질 수입과 지출: 1894-1904  (단위: 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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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듯이 대한제국기에 典圜局(전환국)이 다량의 백동화를 발행하여 심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였다. 차하책이 전하는 각종 재화의 가격은 1894-1904년에 평균 3.4배나 상승하였다. 동기간의 연도별 物價指數(물가지수)를 작성하여(*9) 각 연도의 실질 수입과 지출을 제시하면 [그림5]와 같다. 여기서 보듯이 1904년의 실질 수입과 지출은 1894년의 절반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요컨대 명례궁 재정은 閔妃(민비/명성황후)가 살아 활동한 1893-1894년이 絶頂期(절정기)였다. 갑오경장과 을미사변으로 명례궁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에도 왕실의 내하가 이루어졌고 그 금액이 1903 -1904년에는 145만여 원의 거액에 달했지만 재정의 실질규모는 절정기의 절반에 불과하였다. 그 사이 公的規範(공적규범)에서 이탈한 황실의 살림살이가 虛禮(허례)와 浪費(낭비)의 극을 달렸다는 점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當五錢(당오전)에 이어 그 허례와 낭비를 지탱한 내하의 출처는 어디였던가.

명성황후 시해사건

민비의 본관은 여흥이고 성이야 당연히 민씨. 경기도 여주에서 증조할아버지가 영의정을 지낸 굉장한 집안에서 태어나 세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빌빌대다가 9살 때 고아가 되어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자랐다. 13살 어린 나이에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에 의해 왕비에 간택되어 궁중으로 들어갔으나 마마보이에 파파보이였던 병신머저리 고종과는 스타일이 안 맞아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같이 섹스 할 기회가 없으니 당연히 애를 못 낳을 수밖에. 그러다 고종이 친하게 지내던 궁녀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를 기뻐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불만과 질투가 폭발하여 나중에 흥선대원군 반대파를 규합, 민씨들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착실히 다져 나갔다.

고종은 나이가 들면서 미인의 관점이 성숙해지자 민비에게 점차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 즈음 민비도 장안의 섹시 미남들을 불러다들여 은밀히 동서고금의 온갖 방중술을 익힌 덕분에 고종을 밤마다 뿅 가게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점차 고종의 애정을 독점하여, 1871년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원자(왕의 첫째부인이 아들을 부르는 명칭)를 낳았으나 그만 5일 만에 깨골락 죽어 버렸다. 나중에 이 사건이 흥선대원군이 가져다준 산삼 때문임을 알게 된 민비는 더욱 대원군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게 되었다.

1873년 일본에 이 기회에 조선을 먹어버리자는 정한론이 대두되어 내외정세가 긴박해지고, 경복궁 건축사업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는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이 계속되자,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민비는 대원군을 몰아내기 위해 유림의 거두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발탁한다. 그 결과 흥선대원군 일파의 반대 상소와 모든 주장을 배척하고, 고종에게 친정을 선포하도록 만들어 드디어 민씨의 외척정권이 수립되었다. 결국 대원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민비는 쇄국정책을 마감하고 1876년 일본과 수교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궁궐을 탈출, 경기도 충청도 지방을 전전하며 피신생활을 하던 중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전의 국상이 선포된 것을 알고 고종에게 몰래 사람을 보내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는 한편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되자 민비는 청나라 군대에게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 가도록 한 다음 민씨 정권을 재수립하였다. 이후 민비는 유랑생활 중 한층 업그레이드한 섹스 테크닉으로 고종을 뿅가게 만들어 놓고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며 대원군 일파에 대한 복수에 열중하고, 무당을 궁궐에 끌어들여 굿을 하거나 명산대천을 찾아 치성한다는 명목으로 국고를 탕진하는 등 민씨 일족의 부패상은 극도에 달하였다. 1884년 일본과 결탁한 개화파들이 쿠데타를 일으켜(갑신정변) 잠시 정권을 잃었으나 다시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후 일본세력의 집요한 침투로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성립되고 1894년 청나라에서 돌아온 흥선대원군에 의해 본격적인 체제 개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공사 미우라고로는 1894년 8월 2일 일본 깡패를 궁중에 침입시켜 민비를 죽인 뒤 시체를 궁궐 밖으로 운반 소각하였다.

이상이 간략한 민비의 일대기인데, 조선말 긴박한 시기에 정치의 전면에 나서 처음엔 일본에 붙었다가 나중엔 청나라에 붙었고 마지막엔 러시아에 붙는 등 주로 외세에 빌붙어 나라를 팔아먹고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악질반동 매국노임을 알 수 있다. 민비의 결정적인 악행은 권력을 유지하려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이용해 치부를 하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개혁에 극렬하게 저항했다는 것이다.

조선말기 운요호 사건 이후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먼저 먹는 놈이 임자인 주인 없는 땅이었다. 사실상 조선의 보호국이던 청나라는 내우외환이 겹쳐 망해가고 있는 중이었고 조선의 지배층은 개항 이후에도 권력다툼에 여념이 없어 사실상 현대식 무기를 가진 군대는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이 시기 조선반도 점령에 실질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나라는 일본과 청, 러시아였다. 나머지 서구열강들은 교역과 세력확장을 위한 교두보와 경제적인 이권 정도를 탐했을 뿐 조선의 점령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청나라는 물론 전통적인 속국이었던 조선을 계속해서 영향력아래 두거나 이 기회에 아예 청나라 영토로 편입하기를 원하였고 러시아는 전 역사를 통해 숙원이었던 부동항을 얻기 위해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남하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조선반도 점령에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일본이 조선반도를 원하던 이유는 임진왜란 때와 같았다. 그들에게는 대륙진출을 위해 조선반도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이 3 나라 가운데 일본이 가장 빠르게 발전해 국력을 키웠고 적극적이었던 일본이 결국 조선반도의 주인이 되었는데, 일본은 20세기가 시작되자마자 청나라와 러시아가 거의 동시에 내부혁명으로 인해 붕괴되고 있던 시기에 힘의 공백을 틈타 조선을 일본영토로 합병할 수 있었다.

청 조선 일본 3개국은 19세기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오랜 기간동안 쇄국정책을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다가 비슷한 시기에 굴욕적인 강제개항을 하게 된다. 청나라는 아편전쟁에 패하면서 1842년 국제사회에 문호를 개방하였고 일본은 1854년 조선은 1876년에 각각 개항하게 된다. 이 가운데 일본만이 14년이라는 과도기를 거친 끝에 급진개혁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에도 막부시대를 종식한 뒤 아시아 최초로 근대적인 헌법을 도입하고 서구식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메이지유신) 개항시기 일본의 천왕은 지금처럼 상징적인 존재였을 뿐 모든 권력은 도쿠가와 막부에게 있었는데 이것이 격변기에 개혁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이 시기 청나라와 조선에도 나름대로 개혁세력이 존재했으나 왕실의 권력이 강했던 탓에 일본과 같은 신속한 개혁에는 실패하였다.

조선의 개화파는 1870년 경 조선후기 실학사상을 이어받은 박규수, 유홍기 등 중인계층이 중심이 된 개화 1세대가 생겨났고 나중에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양반가문의 엘리트들을 포섭함으로써 1880년대에는 실질적인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대부분 친일파였던 이들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에 빌붙어 정권을 재장악한 민비에 의해 탄압을 당하자 향후 노선을 두고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어졌다. 이는 비슷한 시기 러시아의 혁명세력이 온건 멘셰비키와 급진 볼셰비키로 나뉘어진 것과 비슷한 일이다.

김홍집이 이끈 온건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민씨 일파와 타협 아래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서양의 근대과학기술문명만을 받아들여, 개혁을 점진적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고 청과는 종래의 사대외교를 계속 유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온건개화파의 이러한 개혁정책은 기본적으로 청에서 실시하고 있던 양무 개혁파와 비슷하였다. 이에 반해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한국 근대화의 모델로 삼고 서양의 과학기술뿐 아니라 근대적인 정치제도까지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수구파인 민씨 정권을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고, 근대적인 외교관계의 수립을 위해서도 청에 대한 사대관계를 종식시켜 조선의 독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실상 급진파만이 실질적인 개혁세력이었고 이후 이들은 개화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개화당은 임오군란 이후 사이비 개혁파와 민씨 일파, 청나라의 연합공격을 받고 위기에 몰리게 되는데 1884년 5월 청과 프랑스가 베트남 문제로 충돌해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 가운데 1,500여 명이 철수하고 8월에 청불 전쟁에서 청이 패배하자 이를 기회로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그 동안 자신들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일본이 태도를 갑자기 바꾸어 정변과 이후 개혁작업에 필요한 군대와 차관문제에 호의를 보이자, 마침내 1984년 음력 10월 17일 이른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쿠데타 정권은 청군의 공격과 일본의 배신으로 인해 3일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개화당 수뇌부가 청군에게 사살되었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9명은 간신히 일본으로 망명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갑신정변을 배후조종했다는 국제적인 비난을 회피하려는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환영하지 않았고 그는 일본에서 10년을 전전하다 청나라로 건너가 1894년 3월 민비가 보낸 자객에 의해 상하이에서 살해되었다. 개화당은 1895년 민씨 정권이 몰락하고 친일갑오정권이 들어서면서 사면을 받고 관직도 회복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돌아온 박영효는 갑오정권에 참여하여 을미개혁을 주도하였고,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만들어 개화당의 맥을 계속 이어갔다.

조선말기 개화파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왜 봉건제도 아래의 일본만이 자체적으로 서양식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개항 이후 일본의 개혁파들은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중심으로 일어나 막부에 대항했는데 이 당시 일본의 각 번은 독자적인 군주와 영토, 군대를 가진 작은 국가였다. 따라서 일본의 존왕파 개화당은 스스로 무력을 가지고 뜻을 관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모든 군사력과 행정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있던 조선과 청나라의 개혁운동은 앞선 지식과 사상을 지닌 엘리트 개혁세력과 무력에 의존한 하층 계급의 폭동이라는 양 갈래로 분리되어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말기 애국 개화당에게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그들이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모델이었고 이들은 조선을 일본의 선례에 따라 개조해 부강한 자주독립국을 만들고자 했지만 사실상 이는 당시 국제정세에 비추어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조선의 왕족은 사실상 나라가 망한 시점에서도 대한제국이라는 것을 만들어 정권을 연명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발버둥이었다. 갑오농민전쟁은 위대한 혁명운동이었지만 시기가 너무 늦었고 그들의 종교 이념상 중앙의 엘리트 개화당과 연계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실패가 불기피한 운동이었다.

[ 갑오개혁과 민비시해사건 ]

동학농민운동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 침략 공세를 펴던 일제는 갑오개혁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명성황후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다. 명성황후는 일제의 야심을 간파하고 일제를 배후로 한 개혁세력에 대항하였다. 삼국간섭으로 대륙을 침략하려던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조선 정계의 친러 경향은 더욱 굳어졌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일제의 한반도 침략정책의 장애물인 명성황후와 친러세력을 일소하고자 일부 친일 정객과 짜고, 1895년 8월에 일본군대와 정치 낭인들을 동원하여 왕궁을 습격한 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체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국사, p337)

1894년 5월, 동학농민군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국 군대가 조선에 출병하자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 정부도 즉각 대응 출병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청국과 조선정부에 시정개혁과 조선의 독립을 제안하였으나, 청국과 조선정부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조선의 왕궁을 기습, 점령한 뒤 정부를 개혁파로 교체한 뒤 무력으로 조선의 개혁을 실시하였다. 이를 갑오개혁이라고 하는데, 조선 최초의 근대개혁이자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조선에 이식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군대가 독일을 점령한 뒤 시행한 개혁과 완전히 같은 것으로서, 당시 일본군이 동아시아 지역의 혁명군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조선의 수도를 장악하고 혁명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한 일본은 곧이어 평양성 전투에서 이홍장의 정예군을 궤멸하고 요동반도에서 청국의 해군을 격파한 뒤, 파죽지세로 만주와 산동반도 등으로 진격하였다. 곧 북경 함락이 불가피한 상황에 이르자 청국은 항복하였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대만과 조선, 만주 지역을 넘겨받게 되었다.

이처럼 일본이 조선의 보호국이던 청을 격퇴하고 동아시아 최대의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자 조선은 300년 만에 청으로부터 완전독립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일본군의 후원으로 시정개혁조치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조선은 일본의 뒤를 이어 동아시아 두번째의 근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뿐, 신조선과 일본의 앞에는 더 큰 적 러시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전략은 만주와 조선, 일본을 점령해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해 3국간섭을 자행하였는데, 이는 만주와 산동반도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러독프 연합군과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는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당시 국력으로 이들 강대국과 맞설 수 없었던 일본은 눈물을 머금고 만주와 산동반도에서 철수했던 것이다.

일본이 러시아에 굴복하고 조선반도에서도 철수하게 되자 민비와 조선의 수구세력은 러시아를 등에 업고 다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민비는 김홍집과 박영효가 이끌고 있는 혁명정부를 점차 압박해 들어가며 갑오개혁의 성과들을 하나둘씩 원점으로 돌려놓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의 정계에서는 점점 친러파의 입김이 세어졌고, 몇 달 후 김홍집은 총리직에서 실각했으며 1894년의 혁명정부를 설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일본공사 이노우에도 퇴조하는 일본 세력과 함께 동경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같은 정세가 지속되면서 1895년 8월이 되자 조선 내각에는 개혁세력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민비의 사주를 받은 친러파들만 남게 되었다. 민비가 주도하는 친러파들은 시정개혁의 중심이던 군국기무처를 해산하고 혁명정부가 이룩해놓은 모든 개혁의 성과들을 원점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의 개혁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일본이 빠진 조선의 개혁세력은 너무나도 힘이 약했던 것이다. 이에 당시 조선 혁명세력을 이끌고 있던 박영효는 수구파의 수괴인 민비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박영효의 음모 -박영효가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개화 이후, 고종은 밖으로 일본의 견제를 받고 안으로는 우리 정부(군국기무처를 말함)가 독주하여 무슨 일을 처리하려 할 때 한 건도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궁(민비를 말함)은 이를 매우 분통히 여기고 점차 고종의 복권을 꾀하여 러시아와 내통하고 있었다. 이때 박영효는 중궁의 행위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었으나 그는 중궁의 권위를 두려워하여 중궁을 살해하지 않으면 그 화근을 제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날짜를 정하여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는 일본으로 병력을 요청했다. 그는 유길준이 자기와 친한 사이여서 자기의 뜻을 내통하였으나 유길준은 그 사실을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이때 박영효는 자기의 음모가 누설된 것을 알고 양복으로 변장한 후 일병에게 호위를 요청하여 용산으로 가서 기선을 타고 도주하였다. 그의 일당 申應熙, 李圭完 등도 그와 함께 도주하였다.(敎文社, 梅泉野錄, 1994, p347)

박영효는 조선의 왕족으로서 1884년 조선의 쿠데타를 주도한 혁명가이다. 당시 쿠데타는 성공했으나 민비가 청국의 군대를 끌어들이고 일본군-조선혁명군으로 구성된 혁명수비대가 청군과의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3일만에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일청전쟁 이후 귀국하여 2차 조선혁명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개화인사인 유길준을 동지로 생각해 민비 살해를 논의했으나 유길준은 그 사실을 고종에게 밀고해버린 것이다.

이때 일본으로 도주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박영효는 이후 러일전쟁이 끝난 1905년까지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니 이것은 1884년에 이어 그의 두 번째 망명이 되었다. 항상 일본군과 함께 조선혁명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이 패퇴할 때마다 일본에 망명해야만 했던 박영효의 정치역정은 당시 다른 모든 아시아 혁명가들의 운명을 대변해주고 있다. 일본은 당시 동아시아 지역에서 유일한 혁명의 기지였던 것이다.

일본에 망명한 뒤에도 박영효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 정계의 실력자들을 면담하고 조선에 남아있는 동지들과 대원군 등에게 밀사를 보내 민비 제거의 당위성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이들은 대원군이 거사의 정치적인 방패막이가 되어 여론을 관리하고 일본 측은 군사행동을 맡기로 각각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다. 많은 조선의 혁명가들이 일본군 행동대에 참여하였다.

1895년 8월 20일 새벽, 혁명군은 경복궁을 기습하였다. 당시 경복궁은 미국의 퇴역 육군소장 윌리엄 다이 장군이 이끄는 500여명의 경비대가 지키고 있었으나, 치밀하게 준비된 혁명군은 몇 시간의 전투 끝에 다이 장군의 수비군을 격퇴하고 경복궁을 장악할 수 있었다. 혁명군에 의해 경복궁이 포위되자 민비 체포조가 신속하게 궁궐을 수색했다. 곧 궁녀들 틈에 변장을 하고 숨어있던 민비가 발각되었으며, 평소 민비와 교분이 있던 일본 여인이 그를 확인해주었다. 민비는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였으나 혁명군은 그녀의 목을 자른 뒤 시체를 불태워버렸다.

이날 새벽 혁명군의 경복궁 공격과 때를 맞추어 대원군은 서울 시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격문을 붙였다.

“최근 민비를 중심으로 한 소인배들이 어진 사람을 배척하고 간사한 무리를 기용하여 유신의 대업을 중도에 폐지함으로 인해 5백년 종사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니, 나는 종친으로서 이를 좌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 입궐하여 대군주를 보위하고 사악한 무리들을 쫓아내 유신의 대업을 이루고 5백년 종사를 지키려하니 너희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을 지킬 것이며, 섣불리 경거망동하지 말라. 만일 너희 백성과 군사 가운데 나의 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이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니 너희들은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을미사변은 1894년에 이은 제2차 경복궁 쿠데타였으며, 개혁파의 입장에서는 위기에 빠진 조선 혁명을 구해내려는 필사적인 시도였다. 이 2차 혁명이 성공함으로 인해 조-일 연합의 혁명세력은 민비와 친러파들을 제거하고 혁명정부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조-일 혁명세력은 조선을 방패막이로 삼아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할 수 있었고, 일본은 보다 국력을 키워 러시아를 견제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조선이 민비 등 친러 수구파에 의해 장악당하게 되면 일본의 운명도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처지로 변했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건설하는 데 총력을 투입하고 있었는데, 이 철도는 의심할 바 없이 러시아의 동아시아 침략군 수송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규군으로 러시아 등 3국 연합에 맞설 수 없었던 조-일 연합은 조선혁명의 교두보를 지켜내기 위해 소규모 게릴라전을 통해 흉적을 제거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이후 실각했던 김홍집은 다시 총리대신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고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등 개혁세력들이 속속 입각해 중단되었던 개혁조치를 다시 진행해 나갔다. 이 기간동안 고종은 혁명군의 인질이 되어 일본군 훈련대가 수비하는 경복궁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시 6개월이 흐른 1896년 2월, 미국공사 앨런과 러시아공사 웨베르 등은 어느 날 새벽 고종을 경복궁에서 몰래 빼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 러시아 공사관으로 조정을 천도함)이라 한다. 이후 고종은 러시아군의 경호 아래 러시아 공사관에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김홍집, 유길준 등 혁명정부의 각료들을 모조리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종이 경복궁을 탈출한 날 아침, 파천 소식을 접하고 고종을 알현하기 위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향하던 총리대신 김홍집은 광화문 앞에서 무장한 경찰에게 체포되어 폭도들에게 둘러싸인 채 처참하게 맞아 죽었다. 폭도들은 김홍집을 때려죽인 뒤 그의 시체를 손발이 묶인 채로 발길질하며 광화문에서 종로까지 개처럼 끌고 가 종각에 팽개쳐버렸다. 공식적으로 조선반도에서 철수한 일본은 이같은 조선 혁명의 실패를 좌시할 수밖에 없었다.

향후 일한관계에서 민비 살해사건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만약 한국 측에서 주장하는 대로 ‘108년 전 일본 공사가 깡패들을 동원하여 조선의 궁궐에 난입, 국모를 죽이고 강간한 사건’이라면 일본은 한국과 북조선에 대해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게다가 뮤지컬 <명성황후>에서 그려지고 있는 바 그 왕비가 외세에 대항하여 힘겹게 조선의 자주독립을 이끌어가던 구국의 희망이었다면 그 죄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반일교육과 반일 미디어로 인해 이와 같은 인식을 지니게 되었고 그런 잔혹한 범죄에 대해 사죄하지 않는 일본을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민비라는 인물이 일신의 영달을 위해 조선의 개혁과 발전을 가로막고 있던 흉적이었으며, 일본에 앞서 조선의 개혁세력 자체에서도 끊임없이 민비 살해를 기도하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것만이 조선을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면 일본은 조선의 개혁과 발전을 위해 희생한 벗이요 은인이 되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이처럼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다면 일본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찾게 될 것이다. 따라서 108년 전 조선의 수도에서 발생한 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고찰해보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아니라, 일한관계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지난 2001년 한국에서는 반일감정을 상업화하는 소설이 한 권 등장했다. 이른바 <황태자비 납치사건>이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한국인 2명이 동경에 잠입, 일본의 황태자비를 납치해간다는 스토리로 시작된다. 이 책을 쓴 김진명은 10년 전 남북한이 일본과 전쟁을 벌이고 결국은 일본에 핵무기를 발사한다는 내용의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이 책은 대단히 유치하지만 당시 한국에서 200만부 이상 판매되었고 나중에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2001년의 <황태자비 납치사건>도 50만부 이상 판매된 성공작이었다. 반일감정을 돈벌이에 이용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가장 수지맞는 사업이다.

한국인들이 황태자비를 납치해간 것은 그를 인질로 해서 일본정부로부터 과거 민비살해 사건의 결정적인 증거를 입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435호 문서'라고 불리는 증거인데, 민비시해 사건의 전말이 일본군에 의해 자세하게 기록된 문서이다. 이 문서는 일본 정부가 보관하고 있었으나 언제부턴가 사라져버린 것인데, 한국인들은 이것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사람들이다. 일본의 다나카 형사는 435호 문서를 제공하지 않으면 황태자비를 살해하겠다는 범인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나카 형사는 매우 힘들여 그 문서를 입수하였고 이를 범인들에게 전달하였다.

이후 역사 교과서 문제를 둘러싼 마지막 재판이 열렸다. 한국측 변호사는 근거 자료가 없어 더 이상 밀고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일본측은 의기양양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두 범인과 황태자비가 법정에 나타난다. 납치되어 있던 동안 범인들은 황태자비를 잘 보호해 주었고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황태자비는 435호 문서를 읽고 스스로 범인들에게 협조할 것을 결심한다. 황태자비는 한국측 증인으로 일본측과 대항하여 진실을 가려내고자 했다. 그녀는 435호 문서를 일본인 앞에 대항하듯 읽어내려갔고, 황태자비라는 칭호를 포기한 채 그릇된 역사를 바로잡는 현명한 세계인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이 책의 줄거리이다.

즉 일본인들이 직접 기록한 극비문서에는 일본 낭인들이 민비를 살해한 뒤 시체를 돌아가면서 강간했다는 증언이 있고, 이것이 일본의 역사왜곡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책의 목적은 스토리의 재미보다는 민비의 처참한 죽음을 屍姦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묘사함으로써 한국인들의 분노를 자극하려는 데 있다고 하겠다. 국모가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가다니 얼마나 억울한가, 그에 반해 일본의 황태자비는 얼마나 영민하고 용기가 있는가, 민비도 만약에 살아있었다면 일본의 황태자비와 같았을 것이다, 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단순하게 한국인의 원초적인 분노를 자극하는 시도는 매우 효과적인 반면, 당시 조선 사회를 이해함으로써 진실에 접근하는 일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짐이 임어한지 32년이 지나도록 치화가 미흡한 것은 왕후 민씨가 친척을 끌어들여 그들을 좌우에 두어 짐의 이목을 옹폐하고 인명을 박해하였으며, 정령을 탁란케 하고 관직을 매매하였기 때문이다. 민비의 학대는 하늘까지 치솟아 사방에서 도둑이 일어나고 종사는 위태롭게 기울어 조석을 보존할 수 없었다. 짐이 민비의 극악무도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벌을 내리지 못한 것은 짐이 불명한 데도 이유가 있지만 그의 일당이 두려워 그렇게 하였다.(중략) 민비의 죄악은 실로 천지에 가득하여 다시는 종묘를 계승할 수 없기에 우리 왕가의 고사에 의하여 그를 서인으로 폐하는 바이다.”

이것은 민비가 죽은 며칠 뒤 조선 국왕이 발표한 칙서이다. 전호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민비 살해사건은 사실상 조선혁명세력의 제2차 쿠데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후 고종은 혁명세력의 인질이 되어 경복궁에 연금당한 신세였기 때문에 이 칙서는 당시 개혁파의 뜻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 역사가인 황현은 “이 조서가 비록 고종의 의견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때 사람들은 실상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라고 적고 있다. 즉 비록 이 조서가 고종이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 내용은 당시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는 뜻이다. 이는 민비 살해가 조선 내에서도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정당한 거사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사실 민비는 그 정치적인 성향에서 개혁에 극렬하게 저항했던 반역자였기에 죽어 마땅하지만, 개인적으로도 그다지 긍정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민비는 중전이 된 이후 고종의 애첩들을 모조리 잡아다 고문하거나 죽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조선 궁중의 권력은 왕비가 관장하는 내명부와 왕이 관장하는 외명부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왕이라 할지라도 내명부의 일은 간여할 수가 없었다. 내명부란 궁중의 여성 세계를 말한다. 따라서 왕후에게는 왕과 동침한 궁녀들을 고문하거나 죽일 권한이 있었던 것이다. 민비는 고종의 애첩들에게 성기를 불로 지지는 궁형을 가하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으나 간혹은 고종의 애원에 따라 죽음을 면하고 궁궐을 쫓겨난 궁녀도 있었다. 민비는 고종의 애첩들을 학대함으로써 고종을 장악했던 것이다.

또한 민비는 무식하며 탐욕스럽고 극단적으로 이기적이었다. 그는 모든 근심을 미신에 의지해 해결하려 했다. 일찍이 민비는 두 살 난 자신의 아들(후에 순종, 조선의 마지막 임금)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청나라의 이홍장에게 은 20만냥이라는 엄청난 뇌물을 바쳤다. 아들이 청국으로부터 세자 책봉을 받은 뒤에는 금강산 1만2천 봉우리마다 각각 돈 1천냥과 쌀 한섬, 비단 한필씩을 바쳐 세자의 무병장수를 빌었다고 한다. 국고 1천2백만냥을 미신에 탕진한 것이다. 당시 쌀 1석이 1냥, 황소 한 마리가 20냥이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금액인지 알 수 있다. 또한 언제나 궁중에 무당들을 불러들여 굿판과 치성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용한 점쟁이에게는 즉석에서 비단 1백필과 돈 1만냥씩을 건네주는 등, 나랏돈을 물쓰듯이 했다.

민비가 정권을 장악한 뒤 이런 식으로 4년이 흐르자 조선의 국고는 바닥나고 모든 공무원에게 봉급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후 5년간 조선의 문무백관들은 정부에서 한 푼의 급료도 받지 못하였다. 녹봉이 나오지 않자 관료들은 이권브로커가 되어 돈을 긁어모았고, 인민의 삶은 날로 피폐해졌다. 민비 뿐만이 아니었다. 민비가 조선의 국정을 농단한 22년 동안 민비의 종친인 여흥민씨들은 조선의 모든 요직을 독차지하고 백성의 고혈을 빨았다. 민비 집권기간 중 공직을 맡은 여흥민씨는 2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 조선의 서태후 ]

즉 민비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염원했던 구국의 희망이 아니라 조선을 망친 망국의 원흉인 것이다. 민비는 결코 조선의 쟌다르크가 아니며 차라리 중국의 서태후에 비견할만한 인물이다. 서태후는 청나라 말기 중국을 48년 동안이나 통치하면서 중국의 개혁을 가로막았던 여걸(?)이다.

1898년 중국에서는 광서제가 이끄는 개혁파들에 의해 戊戌變法이라고 하는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변법은 103일만에 서태후에 의해 진압되었고 거사에 가담한 개혁파는 모조리 살해되거나 외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광서황제는 가택연금을 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광서황제가 갇혀 있던 곳은 여름에는 이화원의 옥판당이었고 겨울에는 중남해의 영대였다. 이후 광서제는 10년간 감금당해 있다가 1908년 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 서태후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서태후는 극히 타락한 생활을 하였는데 한 끼 식사는 주식이 60가지 점심이 30가지 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였다. 서태후의 하루 식사비로만 은 3kg이 들었는데 그 당시 이 돈으로 5000kg(약60석)의 쌀을 살 수 있었으며 만 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 옷만 해도 3000여 상자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 입었다. 또한 서태후는 중국의 궁궐에 전화 설치를 막았는데 그 이유는 전화하는 사람이 무릎 꿇고 있는지 앉아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태후는 아주 잔혹했는데 한 내시의 일기에 의하면 한번은 늙은 내시가 실수를 범했다 해서 인분을 억지로 먹이기도 했다. 이런 악독하고 이상한 여자가 통치하는 국가가 정상적으로 굴러간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만약 중국의 광서제와 개혁파들이 1898년에 서태후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면 중국의 운명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19세기말 유럽제국주의의 침략이 절정에 달했던 시절, 당시 세계 조류에서 뒤쳐져있던 조선과 중국, 하와이는 공통적으로 여성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조선의 민비와 중국의 서태후, 하와이의 릴리오칼리니 여왕은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던 중요한 시대에 개혁을 가로막고 사리사욕을 채운 부정적인 인물이다. 하와이는 1893년 혁명이 일어나 개혁에 저항하던 릴리오칼리니 여왕을 축출하고 이후 1897년 미국과 합병함으로써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에서도 역시 1895년 개혁파들이 민비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러시아와 고종의 방해로 개혁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일본이 전쟁을 통해 러시아를 물리친 뒤에야 일본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인 근대화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이후 일본과 합병한 조선은 번영을 구가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중요한 시기 서태후를 제거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이후 오랜 혼란기를 거쳐야 했고 오늘날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뒤떨어진 지역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하와이와 조선의 사례는 스스로 발전할 수 없을 때에는 이웃의 유력한 블럭에 합병함으로써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 당시 약소국들의 차선책이었음을 보여준다.

[ 조선 노비사회 ]

어쨌거나 사망 당시만 해도 모든 조선인들에게 저주의 대상이었던 민비가 오늘날 자주독립의 순교자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 현상은 한국인들이 처해 있는 정체성의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조선 왕조를 그리워하고 마치 일본의 통치를 받지 않고 조선왕조가 계속되었다면 오늘날 더 나은 처지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시 조선의 실태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깨끗한 거리와 집, 단정한 옷, 점잖은 말씨 등으로 묘사되는 TV의 사극을 보면서 조선도 나름대로 훌륭한 사회였으며 외세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조용하고 평화로운 국가로 유지되었을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오기 전 조선은 너무나도 미개하고 비참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조선은 전형적인 노예사회였다. 전 인구의 30% 이상이 노비였으며 수도인 한성의 경우는 인구의 70% 이상이 노비나 천민이었다. 노예들은 물건처럼 매매되었으며 평생을 주인을 위해 봉사해야 했다. 평민이나 중인 계급은 노비에 비해 약간의 자유가 있었으나 귀족이나 관리들에게 약탈당하는 신세는 마찬가지였다. 양반이라고 불리는 귀족들은 무위도식하면서 하위 계급에 대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어느 학자는 이같은 조선을 20%의 거머리가 나머지 80%의 피를 빨아먹는 구조로 비유하기도 했다.

관직은 공공연하게 매매되었으며 관리들은 전혀 일을 하지 않았다. 1894년의 개혁 이후에도 수도인 한성 부윤은 평균 3개월마다 한번씩 교체되었으며, 1년 예산의 절반이 부윤의 연봉으로 지출되었다고 한다. 관직이 자주 교체되는 것은 단 하루라도 관직에 오르면 퇴임한 뒤에도 그 지위가 평생 유지되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은 사소한 권한이라도 생기게 되면 이를 최대한 이용해 축재를 했다.

한 예로 조선의 장성한 남자에게는 병역의 의무가 있었는데, 현역복무를 하지 않는 한 매년 베를 납부해야 했다. 이를 군포라 한다. 관원들은 막 태어난 갓난아이에게도 군포를 징수했고, 심지어 아직 뱃속에 들어있는 아이에게도 군포를 징수했다. 전라도 강진의 한 가난한 농부는 사내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군포를 징수하러 온 관원들에게 군포대신 황소를 빼앗겼다. 이 농부는 해마다 군포를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칼로 아들의 성기를 모두 잘라버렸다. 그런 다음 더 이상 사내아이가 아니므로 군포를 납부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조선인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가를 잘 말해주는 사례이다.

우선 이전에 쓴글 적으니 많은 사람들이 관점을 바꾸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군요

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501&docId=327861765&qb=7JyE7JWI67aA&enc=utf8§ion=kin&rank=4&search_sort=2&spq=0

2019.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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