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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갑오개혁 김홍집
비공개 조회수 1,099 작성일2018.09.19
갑오개혁을 배우고 있는데요. 3차는 친러파 등용해서 일본 간섭 벗어나자는 개혁이었고 4차 을미개혁은 일본이 김홍집 데려다가 내각 성립하잖아요. 근데 김홍집은 친일파인건가요 친러파인건가요?? 1.2.3.4차 개혁에 어떻게 김홍집이 다 들어가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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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수
1894년 4월 말,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입성에 따라 민씨정권은 청국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이에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서 일본군이 출병하여 불법으로 경복궁을 점령합니다. 이 때 청나라의 세력을 끌어들인 민씨척족 정권은 무너지고, 대원군을 앞세운 김홍집 친일내각이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개혁하면서, 대원군이 실각한 2차 갑오개혁까지도 주도합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요동반도를 할양하려다가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의 삼국간섭으로 포기하게되어 일본의 팽창을 러시아가 막고 있는 국제정세로 바뀌자 3차 김홍집 내각에는 왕비척촉세력이 재등장하고 '정동파' 관료세력이 성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태수습을 일본은 왕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4차 김홍집 내각으로 재편합니다.

이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은 참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황을 살펴보면 김홍집은 친일적 성향을 보이며, 국내외 정세변화에 따라 친일적 권력을 보여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내부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으나, 정권유지에만 급급하여 외부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침탈의 계기를 제공하여 근대사회로의 전환을 일본을 비롯한 열강세력의 이권침탈과 내정간섭으로 얼룩진 혼란한 정국이 펼쳐집니다.

위에 정황을 살펴보시고 다시한번 갑오개혁의 전개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제1차 김홍집 내각(친일) : 대원군 섭정(군국기무처 중심)

◎ 제2차 김홍집 내각(친일) : 홍범14조

◎ 제3차 김홍집 내각(친러) : 삼국간섭

◎ 제4차 김홍집 내각(친일) : 을미 사변 이후

2018.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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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김홍집내각은김홍집,김윤식,김가진등친일세력이주도했고

2차내각구성은김홍집과박영효연립내각형태를구성한것입니다

3차내각은  박정양내부대신이1896년아관파천이일어나김홍집이살해되자

총리대신서리와궁내부대신서리를겸임했습니다  친러내각 


김홍집이 가장 친일파였기때문입니다  일본이 내세운것입니다 


이때만든 기구는 

궁내부(宮內府)

조선 말기인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 신설되어 왕실 업무를 총괄한 관청을  말합니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18941차 갑오개혁 때 만들어진 관청

군국기무처에는 초정부적인 회의기구이자 일종의 평의회로서 행정권과 입법권을 동시에 가지고 국정 전반을 심의 의결하는 기구였다. 논의 안건은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표결처리방식


 

1차 김홍집 내각 조각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 일본 세력의 침투가 표면화되자 그 힘을 빌어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해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자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군을 끌어들였고, 조선에의 침투를 바라던 일본군은 청일 전쟁을 일으키기 며칠 전인 음력 621(양력 723)에 경복궁을 습격하고 무기고를 탈취하는 등 김홍집 일파를 지원하였다. 한편 김홍집은 일본 조정과 친하다는 이유로 음력 6월 말부터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고 총리대신이 되어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1차 김홍집내각은 김홍집, 김윤식, 김가진 등 17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라는 임시 합의기관을 설치


총리대신으로 그는 악습을 폐지하고 과거제 폐지, 은본위제의 신식화폐제도 채택, 의정부와 궁내부의 관제 시행, 도량형제도의 채택 등의 개혁을 단행했다.

 


2차 내각 조직과 개혁 활동

청일 전쟁의 결과 일본이 득세하자 강력한 친일파가 입각한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으며, 이때 홍범 14조를 다시 발표하는 등 개혁을 재개하였다. 2차 내각에서 그는 1차 내각때부터 작성한 초안을 완성, 새로운 법령인 홍범 14(洪範十四條)를 직접 수립하여 제정, 발표하며 새로운 국가의 체계를 수립하였다. 이어 신분제도의 철폐 여론을 주도하고, 단발령을 추진하고 양복을 도입하여 권장하였다. 


그러나 재정난과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과의 대립, 유길준 등의 소극적 협력 등으로 지원 세력이 없어 내각은 곧 와해되고 박정양 내각이 탄생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총리대신으로서 정권을 도맡아 친일 내각을 조직하고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 圭介)의 지휘를 받으면서 조선 왕조를 강탈하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업무를 시작했다.


 

 

 

2018.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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