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대한제국수립 설명과 결과...
비공개 조회수 3,651 작성일2017.06.04
대한제국수립 설명과 결과 자세하게 답변좀요. 내공30 (급함;;)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1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314
중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조선 왕조, 대한 제국으로 거듭나다
1897년 2월, 고종은 아관 파천 1년 만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러시아나 일본 어느 한쪽도 일방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운 정세였고,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고종이 환궁하자 전직 관료나 유생 들이 독립 의지를 높이기 위해서 왕의 칭호를 황제로 높이자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갑오개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던 고종도 이에 적극적이었다.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바꾸었으며, 황제 즉위식을 거행할 환구단을 쌓도록 하였다. 그리고 삼한을 아우른다는 뜻의 '대한'을 새 나라 이름으로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조선 왕국을 대신하여 대한 제국이 성립된 것이다.(1897) 반일 감정이 누그러지길 원했던 일본이 가장 먼저 대한 제국을 승인하였고, 다른 나라의 승인도 잇달았다. 1899년에는 대한 제국 황제가 청 황제와 동등한 자격으로 한·청 통상 조약에 서명하였다.
이미지 갤러리 가기
환구단과 황궁우
1897년, 고종은 황제 즉위식을 치르기 위해 환구단을 조성하였다. 1913년에 일본은 단을 허물고 그 자리에 호텔을 세웠다. 현재 환구단 자리에는 1899년에 지은 황궁우(천신과 지신을 모신 곳)와 1902년에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돌로 된 북만 남아 있다. 아래는 현재 서울 소공동에 있는 황궁우이다.
입헌 군주제냐, 전제 군주제냐
왕권 강화를 꾀한 고종과 달리, 왕권을 제한하고 나아가 의회를 만들어 입헌 군주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독립 협회 안에서는 생각이 갈렸다. 정부의 현직 고위 관리들은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으나, 서재필 같은 재야 개화파 인사들은 왕권 강화에 분명하게 반대하였다.
1897년 11월에 독립문이 완공된 이후 정부 관리들은 거의 독립 협회에서 손을 뗐다. 독립 협회는 신교육을 받은 학생이나 개명 유학자, 상인 등이 참여하는 정치 사회 단체로 탈바꿈하였는데, 이때부터 민권을 확대하자는 주장이 높아졌다. 또한, 중추원을 개편하여 외국의 민회(의회)처럼 운영하자고 하였다.
만약에 외국의 예를 들어서 말씀드린다면, 현재 많은 곳에 민회가 있어 정부 대신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이를 전국에 널리 알리고 사람들을 모아 질문하고 논쟁을 벌이며 탄핵함으로써, 민중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은 하지 않게 되는데…….
- 정교, 《대한계년사》
그러나 의회를 운영하면 정책 결정을 둘러싸고 국론이 분열될 뿐만 아니라, 외세가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올 수 있다고 걱정하는 이도 많았다. 홍종우 등은 외세를 자주 독립의 가장 큰 장애물로 보았는데, 외세에 맞서기 위해서는 황제를 중심으로 온 국민이 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들은 황국 협회를 조직하여 독립 협회의 중추원 개편 운동에 맞섰다. 독립 협회는 중추원 개편(의회 설립)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고, 황국 협회는 반대 집회를 열었다. 정부가 독립 협회를 탄압하던 1898년에는 양자 간에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이미지 갤러리 가기
홍종우가 번역한 프랑스어 판 춘향전과 심청전
아래 사진은 1892년 프랑스에서 간행된 프랑스어 판 춘향전, 《향기로운 봄》과 그 책에 실린 삽화이고, 오른쪽 사진은 프랑스어 판 심청전, 《다시 꽃이 핀 마른 나무》이다.
이미지 갤러리 가기
홍종우
조선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프랑스에 유학하였으며, 우리 문학을 프랑스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서양 문물을 소개하는 데에 적극적이었고, 개혁을 자주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믿었다. 김옥균을 '조국을 외세에 판 역적'이라며 암살한 인물로, 고종에 의해 등용되어 대한 제국 경제 정책에 관여하였다.
대한 제국, 왕조 체제를 넘어서다
1898년 12월, 고종은 독립 협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후 고종은 군 지휘권을 장악하고 신식 군대를 육성하는 한편, 측근 세력을 등용하여 황제권을 강화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 제국은 자주 독립 국가이며, 만세 불변의 전제정치"로 시작하는 최초의 헌법인 대한국 국제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황제는 법적으로도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외교권, 군사 지휘권 등을 보장받는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대한 제국은 군주제란 점에서 조선 왕조와 정치 체제가 같지만, 갑오개혁 결과가 어느 정도 반영된 근대 국가의 특징을 지녔다. 무엇보다 군주권이 법의 형식을 띠고 행사되었으며, 신분제가 폐지되어 '법 앞에 평등'이란 정신이 자리 잡았다. 과거 제도가 폐지되면서 신교육이 확대되고 신분을 뛰어넘는 관리 등용이 이루어졌다.
대한 제국은 황제를 나라의 상징으로 세우고 '국민'이란 의식을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황제의 위엄과 권위를 높이기 위한 기념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나라의 상징인 태극기 사용을 확대하였다. "상제(上帝, 하느님)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로 시작되는 최초의 공식 국가도 만들었다. 이 모두가 전근대 왕조 체제와 분명히 구별되는 일이었다.

2017.06.04.

  • 채택

    질문자가 채택한 답변입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