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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영조에 관해서
yoon**** 조회수 9,884 작성일2008.08.10

안녕하세여? 제가 영조에 관해서 좀 조사하고 있는데여??

영조에 관해서 좀 갈켜 주세요. 호, 몇세에 왕이 되었으며

이런거 있자나여

그리고 영조의 가족 관계 그들과의 사이가 어땠는지, 또 영조가 잘못한거, 또 실수한거, 문화, 경제, 사회, 같은 면도 괜찮구여. 그리고 영조의 업적좀 갈켜 주세요!!!!

 

근데, 쓸데없는 글(당신을 이 글을 10분 내에 5섯번 써야 합니다. )이런것, 내공 냠냠, 복사글 같은건 신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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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신

<영조>

1. 출생연도 : 1694년

 

2. 사망연도 : 1776년

 

3. 직업 ; 조선의 제21대 임금

 

4. 임금기간 : 1724년~1776년

 

5.  : 금

 

6.  : 광숙

 

7.  : 양성헌

 

8. 정식칭호 : 영조장순지행순덕영모의렬장의홍윤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영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

 

9. 생애

숙종의 서장자로 태어나 1699년 연잉군에 책봉되었다.

그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는 임금의 우물에서 물을 긷는 무수리 출신이었다.

어머니의 천한 신분 때문에 영조는 왕자이면서도 주위의 은근한 멸시를 받으며 자랐다.

1721년에 왕세제로 책봉되었고 1724년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탕평책으로 노론과 소론의 균형 정국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1728년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영조는 다시 노론을 중용하였다.

한편 영조는 균역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크게 줄였다.

또 일본에 조선 통신사로 갔던 조엄고구마를 들여와 흉년 때 식량으로 대신할 수 있게 했다.

학문을 좋아했던 영조는 스스로 서적을 집필하였으며,

인쇄술도 개량해 많은 서적들을 간행하고 반포시켜 민중들 모두가 마음껏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영조의 이러한 실용 정책의 영향으로 조선은 이익을 선봉으로 실학이 자라기 시작했으며,

정조 때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만큼 크게 성장하게 된다.

1776년 영조는 83살의 나이로 죽어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 중 최장 재위 기간(52년)을 가진 임금으로 기록되었다.

 

10. 영조의 가계도 


 

출처 : http://www.coreaking.com/3sub/king1.htm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C%98%81%EC%A1%B0

201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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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英祖, 1694년 ~ 1776년)는 조선의 제21대 임금(재위, 1724년~1776년)이다. 휘는 금(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정식 칭호는 영조장순지행순덕영모의렬장의홍윤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영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 숙종(肅宗)의 차남이자 서장자로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의 소생이다.


1. 생애

숙종의 서장자로 태어나 1699년 연잉군(延礽君)에 책봉되었다. 그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는 임금의 우물에서 물을 긷는 무수리 출신이었다. 당시 무수리는 궁중 하인 중에서도 그 직급이 가장 낮아서 흔히 “궁녀의 하인”으로 불렸다. 어머니의 천한 신분 때문에 영조는 같은 왕자이면서도 이복 형이었던 왕세자와는 전혀 다르게 주위의 은근한 멸시를 받으며 자랐다.

왕세자는 14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한 것을 본 후 병을 얻어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숙종은 경종의 대를 연잉군이 잇게 하라고 좌의정 이이명에게 명하였다. 이로 인해 왕세자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 간의 권력 다툼이 치열해졌다. 1720년에 왕세자가 왕위에 올라 경종이 된 후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자는 건의가 들어왔으나 연잉군은 왕세제 직위를 몇 번이고 사양했다. 그러다가 결국 1721년에 왕세제로 책봉되었고 1724년 8월에 병약하던 경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치열한 당쟁 속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던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소론을 몰아내고 노론을 등용하되 점차 탕평책(蕩平策)으로 노론과 소론의 균형 정국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임금으로 즉위한 지 4년 만인 1728년에 경종의 죽음으로 정치적인 기반을 위협받게 된 이인좌(李麟佐), 이유익 등이 소현세자의 증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무력으로 영조와 노론을 몰아 내려 하였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영조는 다시 정견을 같이 하는 노론을 중용하였다.

영조는 탕평책의 한 방법으로 “쌍거호대”를 실시했다. 즉, 주요 자리마다 노론과 소론의 인물을 같이 등용하여 서로를 견제하도록 함으로써 정권을 독점할 수 없게 했다. 그리고 1772년에는 같은 당파에 속한 집안끼리는 결혼을 금지시켰다. 또 사형을 시킬 때는 반드시 3심을 거쳐 시행하도록 하는 삼복제도를 다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사대부 집안에서 임의로 형벌을 내리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와 같은 구도는 끝내 1762년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1749년에 사도세자가 영조의 건강 때문에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사도세자와 영조를 이간질하는 노론과 정순왕후에 의해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게 되었다. 영조는 후에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사도세자의 아들(후일의 정조)을 왕세손으로 삼았으며, 자신이 생존할 때 이미 손자에게 정치를 하게 하여 노론에게 견제당하는 일을 사전에 방지하였다.

한편 영조는 백성들이 국방의 의무를 대신하여 세금으로 내던 포목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크게 줄였으며, 신분에 따라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달리 부담하게 하였다. 또 일본에 조선 통신사로 갔던 조엄이 고구마를 들여와 흉년 때 식량으로 대신할 수 있게 했다.

학문을 좋아했던 영조는 스스로 서적을 집필하였으며, 인쇄술도 개량해 많은 서적들을 간행하고 반포시켜 민중들 모두가 마음껏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여사서(女四書)》·《소학훈의(小學訓義)》·《속오례의(續五禮儀)》·《속대전》·《무원록(無寃錄)》·《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누주통의(漏籌通義)》·《해동악장(海東樂章)》·《여지도서(輿地圖書)》·《동국문헌비고》 등 많은 서적들을 편찬했으며, 《어제경세문답(御製警世問答》·《위장필람(爲將必覽)》은 영조의 자서이다.

영조의 이러한 실용 정책의 영향으로 조선은 이익을 선봉으로 실학이 자라기 시작했으며, 정조 때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만큼 크게 성장하게 된다.

1776년 영조는 83살의 나이로 죽어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 중 최장 재위 기간(52년)을 가진 임금으로 기록되었다. 능은 원릉(元陵)이다.


2. 가족 관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년 – 1757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년 – 1805년), 김한구의 딸
정빈 이씨(靖嬪 李氏)
진종(眞宗, 효장세자, 1719년–1728년)
옹주(翁主) - 일찍 죽음
화순옹주(和順翁主) -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金漢藎, 1708년 - 1758년)과 결혼.
영빈 이씨(暎嬪 李氏)
장조(莊祖, 사도세자, 1735년 - 1762년) ― 홍봉한의 딸,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홍씨, 1735년 - 1815년)와 결혼.
의소세자(懿昭世子, 1750년 ~ 1752년)
정조(正祖, 1752년 - 1800년)
화평옹주(和平翁主) - 예조참판 박사정(朴師正)의 아들,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1725년~1790년)에게 하가.
화협옹주(和協翁主) - 영의정 신만(申晚)의 아들,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綬)에게 하가.
화완옹주(和緩翁主) - 이조판서 정우량(鄭羽良)의 아들,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 ? ~ 1757년)에게 하가.
귀인 조씨
화유옹주(和柔翁主) - 호조참판 황자(黃梓)의 아들,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 ? ~ 1802년)에게 하가.
폐숙의 문씨
화령옹주(和寧翁主) - 증영의정 심정(沈鼎之)의 아들, 청성위(靑城尉) 심능건(沈能建, ? ~ 1817년)에게 하가.
화길옹주(和吉翁主) - 좌포장, 의금부판사 등을 역임한 구선행(具善行)의 손자, 능성위(綾城尉) 구민화(具敏和)에게 하가.

 

3. 영조를 연기한 배우들


김성겸 - 1987년 (하늘아 하늘아) KBS 드라마
김성원 - 1988년 (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 MBC 드라마
박근형 - 1998년 (대왕의 길) MBC 드라마
최불암 - 2001년 (홍국영) MBC 드라마
조민기 - 2002년 (어사 박문수) MBC 드라마
이순재 - 2007년 (이산) MBC 드라마
김성겸 - 2007년 (정조암살미스테리8일) CGV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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