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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5.18민주 항쟁
whdm**** 조회수 512 작성일2013.12.16

 5.18 민주 항쟁에대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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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째 답변

.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남 및 광주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벌인 민주화운동입니다. 광주민중항쟁,광주민주항쟁,광주항쟁,광주민주화운동,5.18광주민주화운동 등으로도 불립니다.

[5.18이 발생한 이유] 
박정희 대통령이 같은 경북 구미 출신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살해 된 후 국민들은 당연히 다음 정권은 민주화 된 정권이 들어설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전두환,노태우,정호용 등 당시 신군부 일당이 12.12군사반란과 5.17쿠데타 등을 일으켜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고 김대중,김영삼,김종필과 야당 정치인들을 영장 없이 불법적으로 체포 혹은 연금하고, 국회를 폐쇄하고 기능을 정지시키는 등 민주화와는 거리가 먼 불법적인 권력이 등장하려하자 전국 여러 지역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5.18민주화운동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5.18민주화운동은 6·25전쟁 이래 최대의 희생자를 낸 사건입니다.

[5.18 평가]
- 박근혜: 민주화운동이다.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

- 이명박: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숨져간 민주영령들 앞에 온국민과 함께 고개 숙여 명복을 빈다. 역사의 고비마다 정의와 진실을 위해 앞장서온 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여러분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5·18민주화운동은 크나큰 아픔으로 남았지만, 우리가 지금과 같은 민주화사회를 이루는 데 큰초석이 되었다.

- 김영삼: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다.. 그 비극을 국민들이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 인간으로서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국 국민을 그렇게 수 백명을 죽일 수 있나. 우리 역사에 길이 길이 크게 기록돼야 한다.

- 조갑제: 자신이 직접 5·18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상황과 정황에 따른 논리적 판단을 토대로 5·18을 ‘반공민주화운동’이라 평가 했고, 일부 우파에서 제기한 북한인민군 개입설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이러한 주장이 결국 좌파들을 돕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대한민국 대부분의 언론사와 방송국은 5·18은 ‘민주화운동’과 ‘민중항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5.18은 반공 민주화운동입니다. 5.18 당시 현장에는 '북괴는 오판 말라'는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우파 언론인의 주장]
2007년 3월 우파 언론인이며 조선일보 원로 기자인 조갑제는 5·18 당시 현장을 취재 했었다. 조갑제는 자신이 직접 5·18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상황과 정황에 따른 논리적 판단을 토대로 5·18을 ‘반공민주화운동’이라 평가 했고, 일부 우파에서 제기한 북한인민군 개입설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이러한 주장이 결국 좌파들을 돕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에 대해 북한인민군 개입설을 주장한 탈북자 단체 및 이에 동조하는 우파 세력이 조갑제를 비난하는 등의 일이 빚어지기도 했다. 조갑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어 애국단체들이 북한군 개입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 광주시민 수십만 명과 진압군이 목격자이고, 기자 수백 명들이 취재한 목격자가 많은 사건이다. 5·18을 취재했던 어느 기자도 북한군 부대가 개입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전투를 벌였을 당시 진압군(계엄군)의 장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북한군의 출현에 대해서 보고하거나 주장한 사람이 없었다.
- 전국 비상계엄령으로 해안과 항만이 철저히 봉쇄됐다.
- 전두환 정권 하에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단서가 나오면 확인했을 것이다.
- 대대 규모 북한군이 개입했다면 무장시민에 의한 국군 사망자가 7명에 그쳤을리 없다.
- 탈북자 증언은 전언에 불과하며, '내가 광주에 내려왔었다'고 나서도 믿기 힘든 판에 '카더라'란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 김일성이 5월 18일 광주 상황 보고를 받고 특수부대를 투입했다고 해도 광주 부근에 나타나려면 빨라도 5월 20일 이후일 것인데, 5월 20일부터 광주가 철통같이 포위됐다.

[5.18의 의의]
오랫동안 독재 정치에 시달리던 한국 사람들은 5.18을 통해, 일정 계층에서만 외쳐왔던 민주,자주,인권,통일이라는 기치를 자연스럽게 가슴에 새기게 되었으며, 민주주의나 인권사상이 일반국민에 비로소 합류하는 시민민주주의를 획득하게 되었다.
학교 교과서를 통해서는 몇 십년 걸려도 깨닫기 어려운 진정한 인권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부당한 권력에는 저항권이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를 깨달았고 민주주의는 남이 지켜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키고 창조한다는 진리를 알게 되었다.
지난 어두운 시절을 뒤로하고 이제 5.18은 항쟁의 대명사로서만이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제3세계의 민중, 인권운동에 강력한 변혁의지를 심어 주었다.
5·18민주화운동은 부당한 권력에 대한 시민저항으로 출발, 정의를 위한 자기희생과 반인륜적 학살에 저항하는 세계적 인권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5.18 이후 조치]
5.18민주화운동을 잔인하게 진압하고 정권을 잡았던 신군부정권(제5공화국)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 폄하했으나 6공화국 때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되었으며, 민주화된 정부인 김영삼 대통령 문민정부 시절에, 12.12군사반란을 일으키고 5.18민주화운동을 잔인하게 진압한 전두환,노태우,정호용 등 신군부 일당은 재판에 넘겨져 무기징역 등의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희생된 군인이나 민간인들에 대한 명예회복이나 보상이 이루어졌으며, 매년 518일은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정부주관 기념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역사 교과서에도 ‘5·18민주화운동’이라는 정식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2011년 5월에는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되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민주화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당시 전두환 등 신군부의 행적]
1979년 11월초 전두환은 노태우를 불러 모종의 계획을 세웠다. 1979년 11월 중순부터, 전두환은 하나회 동기와 후배들을 규합하여 군사반란을 일으킬 모의를 했다. 같은 해 12월 6일 최규하는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노태우,정호용,유학성,황영시 등이 주도하는 비밀 군내 친목단체 하나회의 육사 11기 출신장교들을 주축으로하여 신군부를 형성했고, 일부 선후배 기수들을 끌어 들였다. 이를 배경으로 전두환은 신군부가 12·12군사반란을 일으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전두환은 노태우,최세창 등 동지들의 부대에 병력출동 준비를 명령했다. 또 총리공관 경비의 무장을 해제시켜 최규하를 완전히 포위 했다. 당시 청와대가 내부 수리 중이어서 최규하는 총리공관에 살았다. 이번에는 전두환 뿐만아니라 유학성 등 여럿이 함께 쳐들어 갔다. 드러내 놓고 위협했다. 전두환은 즉시 명령을 내려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여, 국방장관 노재현을 잡아 오라'하였다. 상관을 체포하라는 전두환의 명령은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이 집행 되었다. 치밀하게 계획했고 군의 주요 병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보안사령부의 도청으로 모든 움직임을 샅샅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휴전선을 지키는 최전방의 병력 마저 서슴 없이 동원하는 대범함도 보였다. 12월 13일 새벽 1시 30분께 행주대교를 건넌 1공수여단은 새벽 3시 50분께 지하벙커에 있던 노재헌 국방장관을 연행한다..

1980년 2월 무렵 전두환은 자신이 왜 집권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물론 공식 석상과 뒷자리에서 보이는 전두환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공식 석상에서 그는 집권욕이 없는 우직한 군인이었다. 그러나 뒷자리에서는 이미 무력을 틀어 쥐고 대권만을 생각하는 정치가였다. 5월 17일 전두환은 노태우,정호용 등에게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찬성 의견을 주도하도록 했고,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의 의견을 내세워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계엄확대,비상기구설치 등을 실시하도록 강요했다. 같은 날 중앙청과 국회가 군으로 포위 되고 외부와의 통신이 차단 된 상태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가 실시 됐다. 518일 0시에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 되면서, 전두환은 사전 연행 계획에 따라 김대중,김종필 등을 영장 없이 불법적으로 체포하고, 김영삼 등 다른 야당인사들도 연금, 국회를 폐쇄하고 기능을 정지시켰다. 전두환은 노태우,정호용 등과 함께 5·18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지휘 체계의 실질적인 주요 핵심 책임자 및 조력자로 여겨지고 있다. 1995년 검찰 수사 결과, 전두환이 정식 지휘 계통에 불법 개입해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강경 진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조선일보,동아일보를 비롯하여 대다수 보수 세력은 신군부의 집권 과정 중 일어난 12·12군사반란,5·17쿠데타를 비롯한 불법적인 집권과정, 5.18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과 전두환 대통령이 세운 제5공화국정권의 민주주의 및 인권탄압에 대해서 만큼은 매우 비판적이다.

[5.18 재판 결과(전두환)]
죄수번호 3124번 전두환:
1심: 전두환 사형
2심: 전두환 무기징역, 추징금 2205억원
3심(대법원): 전두환 무기징역, 추징금 2205억원

대법원에서 확정된 전두환의 죄목:
1. 반란수괴
2. 반란모의참여
3. 반란중요임무종사
4. 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5. 상관살해
6. 상관살해미수
7. 초병살해
8. 내란수괴
9. 내란모의참여
10. 내란중요임무종사
11. 내란목적살인
12.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5.18에 대한 백과사전들의 설명:

 

1). 시사상식사전:
5.18 민주화운동(광주민중항쟁)은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남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벌인 민주화운동.

2). 두산백과: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全斗煥) 퇴진, 김대중(金大中) 석방 등을 요구하여 벌인 민주화운동.

3). 한국근현대사사전:
5·17비상계엄 확대 조치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투입된 공수특전단의 초강경 유혈진압에 맞서 5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들이 전개한 민주화항쟁. 한국 현대사 최대의 사건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광주사태·광주민중항쟁·광주민중봉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으나, 88년 이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화 되었다.

4). 21세기 정치학대사전:
1980년 5월 18~27일까지 광주(光州)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전두환(全斗換) 및 12ㆍ12사태의 주도세력의 퇴진과 계엄령 철폐,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며 펼친 민주화운동.

5). 위키 백과:
1980년 5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12·12군사반란과 5·17쿠데타를 주도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이다. 당시 광주시민은 신군부 세력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실행한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로 인해 발생한 헌정파괴·민주화역행에 항거했으며, 신군부는 사전에 시위 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수많은 시민이 희생 되었다.

6). 사회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사회질문사전:
전두환,노태우 등 하나회 소속 신군부가 쿠데타(12·12사태)를 일으켜 정권 장악을 시도하자 신군부의 퇴진과 자유민주주의 헌정 체제 회복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됩니다. 이에 신군부는 시위가 절정에 달한 전라도 광주에 공수부대를 동원해 강경 진압을 하고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게 됩니다. 쿠데타의 주체가 정권을 잡은 후...

7). 사건으로 보는 한국의 정치변동:
1979~1980년은 마이너스 경제성장과 박정희의 갑작스런 피살에 따른 사회적 불안·위기 의식이 조성 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물리력과 언론 통제를 확보한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포고령 10호를 통해 국회와 대학 폐쇄, 모든 정치활동금지,언론검열강화,파업금지 등을 발표하였다...1980년 5월 광주항쟁은 바로 신군부의 권력 장악 시나리오에 반대하면서 그 자체의 역동성과 민중적 활력을 추동 시켜나간 민주항쟁이었다.

 

* 왜 광주에서만 일어났는가?(1)

전두환이 주도하는 신군부는 12.12쿠데타(군사반란)를 일으켜서 군부를 장악했습니다. 4월에는 중앙정보부장서리와 보안사령관 자리를 겸직한 전두환은 시위 대비를 위해 서울 광주 대전 대구 전주 등 주요 도시에 계엄군을 배치 시켰습니다.
광주에서만 시위가 격렬해진 직접적 이유로는,
첫번째로 전남대 앞에서 공수부대와 학생 간의 충돌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광주에 배치된 계엄군은 공수부대가 주를 이뤘는데, 비상계엄 이후 내려진 휴교령에 따라 공수부대가 전남대학교 교문을 봉쇄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등교를 저지 당한채  전남대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가운데, 공수부대가 예비 검속을 실시하느라  학교 안에 있는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때리고 무릎 꿇리고 있었습니다. 학교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학생들은 분노해서 공수부대와 충돌을 했죠.
둘째로, 광주에서는 5.18 이전부터 대학생들이 비상계엄과 휴교령이 내려지면 도심에 모여서 시위를 하자고 약속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서울에서도 비상계엄 이후 대학생 몇 명이 간헐적으로 시위를 벌이기는 했지만, 조직적으로 시위가 일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광주는 다른 도시와 달리 대학생 수 백명이 모여 조직적으로 시위를 벌일 수 있었죠.
셋째로, 오랜 유신 독재로 지쳤던 광주시민이 민주화를 열망했다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영남을 우대하고 호남지역 발전에 소홀히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까지 선포하면서 영구집권하자 지역균형발전을 할 의지가 있는 대통령을 뽑을 방법이 사라졌죠. 점차 정치적으로 불만이 쌓이다가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죽자, 민주화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쌓였는데 전두환이 영남 출신 군인들을 이끌고 등장하니 민주화가 될 거란 희망이 좌절 됐죠..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분노가 쌓인 많은 시민이 시위 현장에 나온 것이였고요..

 

* 왜 광주에서만 일어났는가?(2)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겸 합수본부장은 이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을 제거하고 이희성 장군을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으 로임명(?), 권력의 정점에 서있었습니다. 물론 국정 최고책임자 최규하 대통령이 있었지만 이미 허수아비 대통령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17일 전 국민의 여망을 뒤집고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경상도 맹주격인 김영삼을 가택연금. 김종필 충청도 맹주.전라도의 맹주 김대중을 구금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전두환의 지시대로 된 것입니다. 후에 재판석상에서 자신은 이때 그런 계엄령확대를 명령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강변합니다만 누가 봐도 전두환의 막후조정이였습니다.
그런데 이전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에서는 김영삼 의원직 제명과 민주당총재직 직무정지 사태로 1979년 10월 15일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여 부산지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 되고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주동자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습니다. 이 부마 민주화운동으로 1980년 5월17일 계엄령과 김영삼 연금으로 들고 일어나야 할 부산지역에서는 시위를 벌일만한 사람들이 대부분 구금되어 시위를 벌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광주지역은 그때까지 시위를 벌이지 않고 있다가 1980년 5월 17일 계엄령 전국 확대가 계기가 된 것입니다. 광주 시위는 전두환 신군부의 과잉진압에 책임이 큽니다. 이전 부마사건을 공수부대를 출동시켜 초기에 강력 진압한 것을 신군부는 시위에 적절하게 대처했다는 성공사례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광주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지자 초기에 진압하려고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시위 학생들을 곤봉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계엄군에 쫒겨 도망하다가 민가에 숨은 학생까지 민가에 들어가 끌어내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때리는 무자비한 과잉진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과잉진압을 본 시민들이 분노해서 봉기로 이어진 것이구요. 그러니까 5 18민주화운동은 처음부터 계획한 것이 아니라 계엄군의 무자비한 과잉진압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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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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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를 찬찬히 살펴보세요

완벽한 엉터리 입니다.

 

김영삼의 국면전환을 위해

이용된 역사 왜곡일 뿐이지요

 

5.18은 폭동입니다.

201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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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원인, 장소,시간

원인

당시 시위구호

1. 최규하 정권 물러가라 ->시위로 정부를 전복시켜 김대중에 의한 과도 정부 수립하겠다는 의도 김대중도 사건 전 5월 16일 최규하 정권 물러가라는 협박성 성명발표하였음

2. 신현확 물러가라 -> 최규하 정권의 실세이므로 신현확 총리 물러가라고 하였음.

3. 전두환 물러가라 -> 당시 정보의 수장이고 정보부 수장이 당시로써는 가장 큰 실세라 봤음.

4. 계엄령 철회하라 -> 최규하 대통령, 신현확 총리는 5.18전 부터 계엄령은 사회 혼란이 잠잠해 지면 철회 한다고 약속하였음 그런데도 김대중과 시위 대학생은 폭력시위로 사회 혼란을 더욱 부추겼으며 이런 혼란때문에 계엄령 철회 할수 없으니 제발 자제 해달라며 신현확 총리가 야당, 여당, 재야인사들을 만났으나 이에 아랑곳하지않고 계속 시위를 하여 사회혼란을 야기 하였음.

이는 계엄령 철회하라는 말만 하였지 실질적으로 계엄령 철회 할 수 없게 만든 장본인들임.

5. 김대중 석방하라. 이건 말할가치도 없음.

  

 

2.발발

1980년 5월 18일 아침 휴교령으로 계엄군은 전국 각 주요시설, 주요대학으로 배치

대학생 시위대는 정치적 의도로 시위를 하였으며 처음부터 폭력시위를 자행하여 군인 사상자가 다수 발생 이에 격분하여 계엄군이 강력시위진압. 

 

3.전개 과정

첫 시위에서 대학생 시위자가 먼저 폭력을 행사하여 계엄군의 강력진압하여 학교앞 시위는 마무리 되었지만.

이 시위대는 어디서 거짓말이 나왔는지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이 죽었다는 유언비어가 최초로 나옴 이에 격분하여 시내 경찰서 기물를 파손하고 경찰차를 전복하여 방화하였으며 폭력시위를 미리 계획하였던 인면 살상용 시위도구인 화염병투척, 보도블럭파손하여 투척하는등 폭동을 이르킴.

18일(1980년 5월 18일) 광주지역에는,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칼로 유방을 도려내   
어 죽였다, 성산부를 대검으로 찔러 태아를 꺼내 길에 뿌렸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는 둥 출처를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었음.

(유언비어는 무슨 말인줄 아시죠 거짓말이란 말입니다.

이런 거짓말을 하여 광주 시민을 시위에 참석하게 하였습니다.

광주 시민은 정치적으로 시위를 한것이 아니라 저런 거짓말에 계엄군이 살상이 너무 잔인하고 젊은 사람을 죽인다는 말에 함께 동참한것이지 다른 정치적 이유가 없었습니다.)

18일에는 일반시민은 시위참석한적이 없음 아니 5월 18일까지 많은 시위중에 일반시민은 시민참석한 기록자체가 없음 이말은 당시 시민은 사회가 안정되기를 바랬다는 것이고 광주시민도 또한 사회안정을 위해 시위를 하지 않았지만 계엄군의 강력진압에 저런 거짓말이 보태져 정치적 목적이 아닌 계엄군에 대한 반감으로 시위를 하였음

 

이후 방송국, 경찰서, 소방소, 도청등에 방화를 하였으면 길가는 일부 시민 차량에도 방화를 하였으며 무기고 38개를 털고, 도청에 다이너 마이트를 설치하여 유사시 자폭하여 광주시민들과 함께 죽으러 하였으며, 반공포로 200여명, 일바죄수 2000명정도 있는 교도소를 6차례나 습격 하였으며 

21일 이후 광주는 저들이 통치하에 모든 행정, 질서등을 자체적으로 독립국이 되었으며 

21일 계엄군 철수하자 일반 시민또한 시위 불참하였고 대학교수등으로 구성된 지도부에의해 총기회수실시하였으나 강경파에 의해 무산되었음.

27일 새벽에 계엄군에 의해 선멸됨.

   

 

4.결과

1980년대는 폭동이라 하였고 그 이후 민주화 운동이라 말함

이는 정치적 목적으로 민주화 운동이라 하는것이지 실 내용은 모두다 폭동또는 반란임.

북한은 대한민국에는 없는 5.18영웅이 탄생하였으며 매년 5.18이면 대대적인 행사를 하며 무언가 특별한 일에는 항상 5.18의 영웅어쩌고 하며 기림.

대한민국도 전라도 광주에서 매년행사를 하고 영웅은 없지만 유공자로 5000 여명 이 있음 

 

5.의의

국가 비상사태일때 시위하면 국가유공자가 되면 반국가 운동을 하면 국가 유공자가 되며 총을 들고 군인과 싸우면 국가유공자가 되며 방송국, 경찰서, 소방소등에 방화를 하면 국가유공자가 되며 교도소를 털어도 국가 유공자가 되며(만약 진짜로 털었으면 영웅이겠지), 도청에 다이너 마이트 설치하여 국가에 협박을 하면 국가유공자가 되며 시위하지 않는 시민에게 거짓말을 하여 시위를 하면 국가유공자가 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이런 짓거리가 민주화 운동이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전 저런 짓거리 폭동, 반란이라 봅니다.

201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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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인:전두환 대통령의 무력정권으로인한 결과

 

장소:광주

 

시간:1980年8月18日

 

전개과정:광주에서 일어난 시민군의 무력시위.

전두환대통령의 무력정권으로 인해 시민군이 일어나 싸웠지만

결국 광주시청에서 제압되고말았다.

 

결과:시민군의 제압과 전두환세력으로인한 언론장악

 

의의:국민들의 힘으로 민주주의(자본주의)를 지키려는 의지가

나타나있다. 

201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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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수

원인 : 대외 의존적 경제 - 원조경제

          재벌 중심 - 독점 자본

          국가 독점 자본주의 체제

          지역 불균형

          80년대 경제 불황

 

의의 : 반 제국주의 - 반미, 신군부의 실체를 들어냄.

          반 독점

          민족 민주운동

 

전개 과정 : 처음엔 대학생들의 시위였다가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에 시민들이 분노하여 시위에 동참하므로써 시위가 점점 확산되고 격화되는 모습으로 전개되었습니다.

 

 

201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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