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토마스모어의 생애에 관해 알려주세요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19,598 작성일2005.12.07

유토피아라는 책을 쓴 토마스모어에 대해 알려주세요

유토피아 책에 관한 내용은 많이 나와있는데

토마스모어에 관한 내용은 없어요.;;

토마스모어의 생애, 사상, 업적 등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

알려주세요 ㅠㅠ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3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ns****
영웅
번역, 통역, 윈도우, 유틸리티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Sir Thomas More

Saint Thomas More라고도 함.

1477. 2. 7 런던~1535. 7. 6 런던.

영국의 인문주의자·정치가·대법관(1529~32).

헨리 8세영국국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에 반대하여 참수형에 처해졌으나 1935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인반열에 올랐다 (→ 색인 : 휴머니즘).

초년기

토머스 모어는 법률가로서 기사작위를 수여받고 고등법원 왕좌부(王座部) 판사가 된 존 모어 경의 장자로 태어났다. 스레드니들가(街)의 명문 세인트앤소니 학교에서 공부한 뒤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대법관인 존 모턴경의 가인(家人)이 되었는데, 대주교는 특유의 통찰력을 바탕으로 "이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시동(侍童)은 언젠가 위대한 인물로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모턴의 관심은 소년을 옥스퍼드에 진학시켰고 어린 모어는 라틴어와 형식논리를 공부하며 2년을 보냈다. 1494년경 모어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런던에서 코먼 로(보통법)를 공부했다. 1496년 2월에는 법률가 지망생들을 위한 링컨 법학원에 들어갔으며 1501년 일반 법정변호사가 됨으로써 정식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끊이지 않는 호기심과 비정상적이라 할 만큼의 사무처리 능력에 힘입어 모어는 법률연구 외에도 문학에의 열정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독서광이었던 그는 성서·교부철학·고전문학뿐 아니라 손에 잡히는 모든 장르를 섭렵해나갔다. 모어는 법률가로서 대성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결정을 존중했지만 신의 뜻에 순명하기 위하여 의절마저도 각오하고 있었다. 사제직에 대한 자신의 소명을 시험해보기 위해 약 4년 동안 링컨 법학원 부설 카르투지오 수도회에 머물렀고 가능한 한 온전히 수사들의 생활을 체험해보려고 노력했다. 특히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깊이 매료되기도 했으나 평신도로 남는 것이 신과 인간 모두에게 봉사하는 최선의 길임을 깨달았다.

1504년말에서 1505년초 사이에 토머스 모어는 에식스 출신 지주의 영애(令愛)인 제인 콜트와 결혼했다. 아직 어린데다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던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라틴어와 음악을 지도받았고 외국의 방문객들을 맞이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의 교양과 품위를 갖추게 되었다. 템스 강가의 올드 바지에 있던 모어의 저택은 결혼 후 20년 동안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바로 이곳에서 〈우신예찬 Morioe encomium〉의 집필을 마쳤다. 모어는 조기조침과 기도생활, 거친 모직 셔츠에 절제된 식사 등 영·육의 청빈함을 잃지 않았다. 신이 그의 삶 한가운데 자리했던 것이다. 그무렵 모어는 생계유지와 인문주의적 욕구의 충족을 위하여 사회생활에 보다 치중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1509년 런던의 상사와 안트웨르펜 상인 대표들 간의 협상과정을 통하여 통상문제 전반에 관한 역량을 인정받았다. 1510년 9월부터 1518년 7월까지는 법률·무역 관계 업무를 청산하고 런던의 민선행정관 대리로 일했으며 공평무사한 판관이자 빈민의 보호자로서 런던 시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1511년 여름 제인이 출산중에 죽음으로써 모어의 목가적인 가정생활은 잔혹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마거릿·엘리자베스·세실리·존의 네 자녀를 남겨둔 채 제인은 '토머스 모어의 어린 반려자'(uxorcula Thomae Mori)로서 묘비명에 새겨졌다. 이로부터 수주일이 되었을 때 모어는 런던 직물상의 미망인인 앨리스 미들턴과 재혼했다. 그의 표현으로 "미인도 아니고 훌륭한 교육을 받은 여자도 아니지만 좋은 아내"였던 앨리스는 양녀와 피보호자들이 딸린 대가족의 여주인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모어의 가정은 가정교사들이 다양한 주제를 교육하고 젊은이들은 묻고 배우기에 여념이 없는 그리스도교 윤리와 지성의 산실이라 할 만했다.

과학 및 문학사상 모어가 남긴 업적들은 모두 공직에 취임하기 이전에 이루어졌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De civitate Dei〉에 대한 강의록은 통례와는 달리 철학적·역사적 방법으로 교부학의 유토피아 국가론을 해석한 것이며 1510년에는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인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전기를 영역했다. 미란돌라는 여러 면에서 모어의 삶에 본보기가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513~18년 토머스 모어는 〈리처드 3세전 History of King Richard Ⅲ〉을 집필해 역사기술상 신기원을 열었다. 〈리처드 3세전〉은 끝내 미완성인 채로 남았지만 후대 역사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모어의 해석을 바탕으로 〈리처드 3세 Richard Ⅲ〉를 극화했다.

유토피아

모어는 1515년 5월 영국-플랑드르 통상조약의 개정을 위한 협상대표로 임명되었다. 브뤼주에서 열린 통상회의가 휴회기간이 길어지자 플랑드르(지금의 벨기에)의 여러 도시들을 방문하고 많은 사람들과 만나 사귀게 되었는데 주로 문화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인문주의자들이었다. 북해 연안의 저지대에서 이 시기에 착수되어 런던에 돌아온 직후 완성을 본 이 책은 1516년 2월 에라스무스의 도움을 받아 루뱅에서 최초로 출간된 이후 인문주의자와 고위공직자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권두시에 처음 등장하는 ' 유토피아'는 그리스어 'ou'와 'topos'를 조합하여 창출해낸 합성어로서 '아무 데도 없는 곳'을 뜻했는데, '좋은 곳'이라는 뜻의 'eu-topos'의 동음이의어이기도 했다 (→ 색인 : 유토피아 문학). 제1부는 안트웨르펜에서 신세계를 여행하고 막 돌아온 라파엘 히슬로데이를 소개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히슬로데이는 영국의 사회상황과 법률을 특히 절도죄와 연관지어 비평했다. 영국은 빈번하고 무익한 전쟁이 끝난 뒤 제대 군인들로 넘치고 있으며 새로운 지주들은 토지세를 인상하고 목장을 설치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잠식하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도둑질을 해야 했고 법은 그들을 교수대로 보냈다. 이 모든 현실이 도둑질을 야기시키고 죄과에 비해 가혹한 처벌이 수반되었다. 모어는 히슬로데이에게 정치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으나 히슬로데이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그는 주민의 복지를 외면하고 영토확장과 통치에만 급급한 제후들이 재산의 공유를 주장하는 자신의 개선책에 귀를 기울일 턱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모어가 개선책에 대하여 회의를 표명하자 히슬로데이는 그것이 여행중에 찾아갔던 섬 '유토피아'에서 실제로 시행되고 있다고 대답한다.

제2부는 유토피아의 삶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유토피아는 사유재산과 돈이 없기 때문에 악이 번성하지 않으며 빈곤을 모르는 이상적인 국가이다. 농업이 주산업이며 누구나가 일한다. 행정관들은 선출되고 식사는 30세대가 함께 즐긴다. 여행은 행정장관의 허가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전쟁은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지만 자기방어를 위해서 수행되며, 실력행사보다는 계책에 의해 정복하는 것이 더 확실한 승리로 받아들여진다. 전쟁포로와 범죄자는 노예가 되며 종교에 대해서는 제한없는 관용을 베푼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공산주의적 도시국가를 의미했다. 그는 당시의 실제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참된 공동체적 인간관계를 예시함으로써 자신의 시대에 하나의 유익한 소책자를 헌정하고자 했다. 모어의 국가소설은 과거 역사에 대한 직접적인 반성임과 동시에 그 대안으로써 최선의 국가유형을 펼쳐 보이려는 대담한 시도였으며, 이론적인 면에서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저작들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착취와 계급적 이해의 갈등이 해소되려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완전히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공동의 것이다"라는 플라톤의 선언이 지배 엘리트를 지향한 것인 반면에 유토피아의 근본 명제는 모든 사람들의 공산주의적 재산공동체를 그 핵심으로 한다. 토머스 모어의 출발점은 경제적 대립을 제거할 때 비로소 개별적 이해관계와 사회적 이해관계의 일치가 가능하리라는 것, 바꾸어 말하면 진정한 공동체적 관계가 이기적인 개개인의 이해를 배제하리라는 신념에 있었다. 유토피아는 "최선의 국가일 뿐 아니라 정당하게 공동체임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였다. 비록 그리스도교적 이상을 깊이 간직하고 있기는 했지만 성직자와 정치지도자들 간의 결탁에 반기를 든 모어는 관용과 각 개인의 종교적 자유를 이상국가의 정신적인 토대로 선언했고 이는 곧 신앙과 철학의 조화를 의미했다. 유토피아 주민들의 최고의 덕은 이웃의 불행을 덜어주는 선행이며 이성의 명령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삶이었다.

모어는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기보다 어떠한 지향점으로서 또한 현실사회를 바로잡는 시금석으로서 유토피아를 받아들였으며 악을 징계하기보다는 완화시키려는 정도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유토피아〉에는 동떨어진 섬의 공동체적 생활양식이 그려져 있을 뿐 현실을 이상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이라든가 유토피아의 삶이 외부세계로 확산되어가는 적극성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히슬로데이를 향한 모어의 다음과 같은 충고에는 논란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당신이 선하게 만들 수 없는 것을 완전히 사악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말라. 모든 사람이 선해지지 않는 한 모든 일이 만족스럽게 되어지기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생각들은 상당한 세월이 지난 뒤에도 실현되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국왕의 충실한 종복

1517년 5월 1일 런던의 시민들이 체류 외국인들을 공격했다. '5월의 재난'을 진정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모어의 모습은 셰익스피어의 뇌리에 강한 인상으로 남았고, 엘리자베스 시대의 콤포지트식(式) 희곡인 〈토머스 모어 경 The Book of Sir Thomas More〉 속에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프랑스와의 전쟁 이후 제기된 소송들이 칼레와 불로뉴의 어려운 협상들(1517. 9~12)을 통하여 성공적인 타결점에 이르게 되었을 때, 공직을 달가워하지 않던 모어의 입장은 더욱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공직취임은 평화와 개혁을 위해 보다 유리한 기회가 되었고 이제 토머스 울지대법관도 인문주의적 정치이론에 얼마만큼의 기대를 걸고 있었다.

1515~20년 에라스무스가 성서와 교부철학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신학을 역설하고 이를 위한 주요수단으로서 그리스 고전의 연구를 장려하자(예컨대 성서의 그리스어 및 라틴어 번역사업), 모어는 시와 공개서한을 통하여 열렬한 환영의사를 표시했다. 에라스무스는 울리히폰 후텐, 르맹 드 브리, 기욤 뷔데등 저명한 동료 인문주의자들에게 보낸 서신 속에서 런던에 있는 연하의 친구를 유럽 지성의 본보기로서 소개하고 있다. 모어는 칼레 근교 '황금의 천' 들판에서의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의 회동을 동반했을 당시에(1520. 6) 이미 기욤 뷔데를 만난 적이 있었다.

에라스무스의 기술에 따르면 모어는 유난히 흰 피부에 짙푸른 회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간소함이 식생활과 의생활을 관통하고 있었고 순수한 기쁨이 된다면 육체적인 것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저음과 놀라운 기억력으로 즉흥적인 응수에 능란했으며 가장 지루하고 재미없는 사물로부터도 끊임없이 즐거움을 끌어낼줄 아는 사교의 명사였다. 모어의 가정에는 다사로움과 더불어 절제와 겸손이 머물고 있었다. 집주인은 늘 그리고 기꺼이 넘쳐 흐르도록 사랑을 베풀었다. 이국의 풍물들이 저택을 장식하고 먼 나라에서 온 진기한 동물들이 정원에 가득했다. 격심한 공무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기도시간을 엄수했고 아이들을 살피는 일에 게으름이 없었다. 모어가의 소녀들은 최고의 고전적·그리스도교적 수양을 쌓았다.

토머스 모어는 1520~21년 칼레와 브뤼주에서 카를 5세및 한자동맹과의 협상에 참여한 뒤 재무차관으로 승진했고 기사작위를 수여받았다. 그가 종교개혁 논쟁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바로 이무렵의 일이었다. 국왕 헨리 8세는 거의 모어의 도움으로 루터의 〈바빌론 유수(幽囚)에 관하여 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에 응수했고, 〈7성사(七聖事)의 옹호 Assertio septem sacramentorum〉(1521)를 내놓았다 (→ 색인 : 루터). 루터가 격렬한 반론을 제기한 뒤 모어는 다시 〈반(反)루터론 Responsio ad Lutherum〉(1523)을 집필했다. 그의 논조는 대단히 학구적인 것이었지만 품격을 갖추지는 않았다.

그는 재무부에서의 일과 외에도 외국사절단을 영접하고 조약을 기초하며 국왕과 대법관 사이의 공문서를 읽고 국왕 명의로 답변서를 발송하는 등 헨리의 충실한 조신(朝臣)으로서 맡은 바 사명을 다했다. 1523년 4월 서민원(하원) 의장으로 선출된 토머스 모어는 정부의 이해를 그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의회를 진정한 토론의 장(場)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옥스퍼드대학교(1524)와 케임브리지대학교(1525)의 대학 재판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1524년이 되자 모어는 런던에서 첼시로 이주했다. 첼시에 축조된 대저택에는 그의 철학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고 미술관·예배당·도서관 모두가 학구적이고 신앙심깊은 인문주의자의 취향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1525년 랭커스터 공령(公領)의 상서(尙書)에 오른 모어는 북부지방의 대부분을 관할하게 되었다. 1527년 여름 모어가 대사직을 마치고 프랑스에서 귀환하자 헨리 8세는 성서를 그의 앞에 펼쳐보이며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결혼은 후사를 얻지 못한 까닭에 무효이며 더구나 캐서린은 죽은 형 아서와 결혼했던 여자이므로 근친상간의 추악한 죄를 범한 죄인이라고 주장했다. 모어는 국왕의 주장에 따라 일말의 타당성이라도 찾아내기 위하여 오랜 기간을 두고 숙고와 숙고를 거듭했지만 캐서린이 진정한 영국의 왕후임을 확인하게 될 뿐이었다. 이듬해 3월 턴스톨 런던 주교는 속어로 씌어진 항간의 모든 이단문서를 검토하여 몽매한 시민들의 신앙을 바로잡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단에 관하여 Dyaloge Concerning Herecies〉는 1529~33년 씌어진 7개 반론의 첫부분에 해당한다.

대법관시절

1529년 턴스톨과 모어는 울지 추기경의 불성실로 인한 국왕의 분노를 누그러뜨렸고 영국은 캉브레 조약을 받아들였다. 울지가 더이상 국새(國璽)를 남용할 수 없게 된 10월 19일로부터 6일이 지났을 때 토머스 모어는 불안감 속에서 대법관직에 올랐다. 그는 국왕의 대변자로서 의회개원연설을 통하여 울지를 기소했고 캐서린과의 이혼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학계의 공식입장을 공포하기도 했지만(1531), 1530년 귀족과 성직자들이 바티칸에 이혼청구서를 제출하려 했을 때는 이에 대한 서명을 거부했다. 1531년 "그리스도의 계율이 허락하는 한……"이라는 단서를 빌미로 헨리 8세가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되고 영국 교회가 '국교회'라는 명칭으로 로마 가톨릭과의 결별을 선언하기에 이르자 신임 대법관은 사퇴의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교회의 본질규명에 초점이 맞추어진 〈반(反)틴들론 The Cfutacyon of Tyndals Answere〉(2권, 1532, 1533)을 집필하느라 몇 시간씩 원고에 매달렸던 토머스에게 협심증 증세가 나타났다. 모어는 1532년 5월 16일 국사의 짐을 덜도록 해달라고 헨리에게 간청했는데, 이날은 바로 캔터베리 대주교 회의가 국왕의 동의 없이는 법률제정이나 회의소집을 하지 않겠다는 공문을 발송한, 즉 헨리 8세를 영국 교회 전체의 영적 지도자로 맞아들이게 되는 날이었다.

예전처럼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가정으로 돌아온 모어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안정을 취하며 모처럼의 한가한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우선 자신과 아내가 묻힐 무덤을 마련했으며 〈변론 Apology〉·〈정복 Debellacyon〉등의 저술을 통하여 반이교법을 옹호하고 이단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모어는 탐욕스러운 작태라는 틴들의 비난에 웃음을 보냈고 고위성직자들이 생계보조금으로 희사한 5,000파운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명목상의 자선일 뿐 자신의 입을 막아보려는 속셈에서 나온 계략임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최후의 날들

1533년 헨리 8세는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을 왕비로 책봉했다. 앤 불린의 즉위식에 참석하지 않은 모어는 자연히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지만 정작 곤경에 처하게 된 쪽은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된 적대자들이었다. 1534년 2월 모어는 마침내 사권(私權) 박탈자 명부에 오르게 되었다. 날조된 그의 죄상은 헨리의 이혼과 관련하여 해괴한 예언을 유포하고 다니던 성처녀 엘리자베스 바턴과 공범 관계에 있다는 것이었다 (→ 색인 : 바턴). 사실 그는 국사에 간여하지 말라는 충고의 서한을 그녀에게 보냈었다. 4월 13일 왕실은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앤 불린의 소생에게 왕위계승권을 부여하는 이른바 '계승률'을 강요했다. 앤 불린을 성별(聖別)된 왕비로 인정하고 계승률에 대한 서약을 이행하려고 생각했던 모어는 서약의 내용이 로마 교황의 권위를 부인하는 것임을 알고 곧 마음을 바꾸었다. 1534년 4월 17일 토머스 모어는 런던 탑에 유폐되었고 기꺼이 감옥생활을 받아들였다. 서약을 하고 아버지를 면회온 마거릿에게 말했던 것처럼 가족들만 아니라면 그보다 더한 고통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런던 탑에서 집필된 〈시련과 위안 A dialoge of comfort against tribulacion〉은 그리스도교 지혜문학의 정수로 손꼽히고 있다.

모어의 공판은 1575년 7월 1일 시행되었다. 실권자인 올리버 크롬웰의 심복이었던 리처드 리치 법무차관은 피고인이 자신 앞에서 국교회 수장 헨리 8세의 권위를 부인했다고 증언했다. 모어는 법무차관의 위증을 통렬하게 반박했지만 배심원들의 평결은 예외없이 유죄였다. "내 자신의 양심에 충실하기 위해…"라고 서두를 꺼낸 최후의 진술에서 모어는 자신이 감수하는 수난의 첫째 목표는 교회의 분열을 막아보려는 것이며, 속인이 영적인 세계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또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려는 진정한 이유는 떳떳하지 못한 앤 불린과의 결혼 때문인데, 이 결혼으로 말미암아 가톨릭 교회는 숱한 비난을 듣게 되었다고 피력했다. 재판관들 가운데에는 새 왕비의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삼촌이 끼어 있었다.

선고된 형벌은 반역자의 죽음(창자를 빼낸 뒤 교살하고 사지를 찢음)이었지만 헨리의 형벌변경 조치가 내려짐에 따라 참수형으로 결정되었다. 5일의 유예기간 동안 모어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한 묵상과 함께 몇 편의 아름다운 시와 작별의 편지들을 남겼다. 타워 힐의 단두대로 다가선 토머스는 동행한 교도관에게 스스로 의식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줄 것과 눈가리개의 사용을 허락해줄 것을 부탁했다. 런던 탑의 언덕 위에는 여기저기 구경꾼들이 모여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저는 이제 가톨릭 교회의 믿음 속에서 가톨릭 교회의 믿음을 위하여 죽습니다. 국왕 폐하의 신실한 종복임을 자처하지만 그 이전에 순명하는 주님의 종인 까닭입니다" 라고 말했다. 모어의 죽음은 유럽을 경악시켰고 신교 국가들에서조차 의구심의 대상이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다음과 같이 자랑스러웠던 연하의 친구를 애도했다. "토머스 모어는 눈보다도 순결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영국은 과거에도 그리고 이후로도 그와 같은 천재성을 다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평가

1886년의 정부문서 공개로 모어의 행적들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남에 따라 시복(諡福)의 여론이 일기 시작했으며 이는 사후 400년 만인 1935년 5월 20일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하여 결실을 거두었다. 위대한 인격과 그 인격의 정점을 이루는 순교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모어의 명성은 주로 황금빛의 작은 책 〈유토피아〉에 한정되어 있다. 모어의 별칭인 '사계절(四季節)의 사나이'는 원래 에라스무스가 붙인 'omnium horarum homo'에서 유래한 것으로 1960년 로버트 볼트가 발표한 동명의 희곡이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널리 유포되었다. 영국의 가톨릭 옹호자 G. K. 체스터턴이 표현한 대로 토머스 모어 경은 영국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축일은 7월 9일이며 최근 웨스트민스터 홀과 런던 탑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G. P. Marc'hadour 글

참고문헌

<!--0,0,0-->

    <!--모어-->

    <!--Sir T. More-->

    저서

  • 유토피아(교양사상신서 11) : 토마스 모어, 박병진 역, 육문사, 1986

    연구서

  • 토마스 모어 : M. V. 우드게이트, 김정 역, 성바오로출판사, 1988
  • 토마스 모어 〈경남사학〉 2 : 하명수, 경남사학회, 1985
  •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나타난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한양대논문집〉 : 김은석, 한양대학교, 1983
  •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나타난 철학적 이상 〈동국사학〉 15·16 : 김영한, 동국대학교 국사학과, 1980
  • The Public Career of Sir Thomas More : John A. Guy, 1980
  • Essential Articles for the Study of Thomas More : Richard S. Sylvester·Germaine P. Marc 'Hadour (eds.), 1977
  • The Field Is Won:The Life and Death of Saint Thomas More : E. E. Reynolds, 1968
  • St. Thomas More:A Preliminary Bibliography of His Works and of Moreana to the Year 1750 : R. W. Gibson·J. M. Patrick, 1961
  • Thomas More : R. W. Chambers, 1935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2004

2005.12.07.

  • 채택

    질문자⋅지식인이 채택한 답변입니다.

  • 출처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2004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2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cath****
바람신
가톨릭 13위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 예수 마리아 무궁지세여

   No  Soul  Left  Behind

 

       

 



Sir Thomas More - HOLBEIN, Hans the Younger
1527. Tempera on wood, 74,2 x 59 cm. Frick Collection, New York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자의 교서

성 토마스 모어를 정치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함

QUIBUS SANCTUS THOMAS MORUS
GUBERNATORUM, POLITICORUM VIRORUM
AC MULIERUM
PROCLAMATUR PATRONUS

2000. 10. 31.

영원히 기념하여

 

   

1. 성 토마스 모어의 삶과 순교는 인간 양심의 양도할 수 없는 존엄을 수세기에 걸쳐 모든 지역의 사람들에게 말해 주는 메시지의 원천이 되어 왔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우리에게, 인간의 양심이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Gaudium et Spes], 16항) 하고 상기시켜 줍니다. 인간이 진리의 외침에 귀 기울일 때마다 양심은 그들의 행동을 확실하게 선으로 이끌어 줍니다. 성 토마스 모어는 진리가 권력에 우선한다는 것을 목숨을 바쳐서까지 증언하였기 때문에 도덕적 고결함의 영원한 본보기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 밖에서까지, 특히 민족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인간에 대한 봉사를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정치 제도를 위한 영감의 원천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최근에 몇몇 국가와 정부의 수반, 많은 정치 인사들, 일부 주교회의와 주교들이 저에게 성 토마스 모어를 정치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도록 요청해 왔습니다. 서로 다른 정치, 문화, 종교에 충실한 사람들도 이러한 청원에 동조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뛰어난 정치인의 사고와 활동에 대한 깊고 광범한 관심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2. 토마스 모어는 그의 모국에서 탁월한 정치 경력을 쌓았습니다. 1478년 런던의 한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 캔터베리 대주교이며 영국의 대법관인 존 모턴을 도왔습니다. 나중에 옥스퍼드와 런던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면서 문화와 신학, 고전 문학 분야에 대한 관심도 넓혔습니다. 그는 그리스어에 능통하였고, 로테르담의 데지데리우스 에라스무스를 비롯하여 르네상스 문화의 주요 인물들과 교제하며 친분을 맺었습니다.    

 

그는 순수한 신앙심을 가지고 열심히 고행을 실천함으로써 덕을 쌓았습니다. 그리니치에 있는 프란치스코 탁발 수도회의 원시회칙파 수도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키워 나갔고, 한때는 런던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에서 살았습니다. 이 두 곳은 영국에서 종교적 열정이 넘치는 주요 중심지였습니다. 혼인을 하여 가정 생활을 하고 평신도로 헌신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느낀 그는 1505년에 제인 콜트와 혼인을 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제인은 1511년에 세상을 떠났고, 토마스는 딸 하나를 둔 미망인인 앨리스 미들턴과 재혼을 하였습니다. 그는 평생토록 다정하고 성실한 남편이고 아버지였으며, 자녀들의 종교, 도덕, 지적 교육에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그의 집은 자녀들의 배우자와 손주들이 마음대로 드나들었고, 진리나 인생의 소명을 찾는 많은 젊은 친구들에게도 언제나 열려 있었습니다. 가정 생활은 또한 그에게 만족스럽고 건전한 휴식뿐 아니라 공동 기도와 영적 독서를 위한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토마스는 본당의 매일 미사에 참례하였으며, 그가 실천한 엄격한 고행에 대해서는 가까운 가족들만이 알고 있었습니다.

 

   

3. 그는 1504년 헨리 7세 치하에서 처음으로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헨리 7세의 후계자인 헨리 8세는 1510년에 그에게 위임을 갱신하였고, 그를 런던의 사정 장관보(司政 長官補)로 임명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관직에서 탁월한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뒤이어 10년 동안 국왕은 그에게 여러 차례 외교와 통상 임무를 맡겨 플랑드르와 오늘날의 프랑스 영토에 보냈습니다. 그는 칙선 법정 변호사단의 일원으로 중요한 법정의 재판을 주재하였고, 왕실 회계국 부장관과 주(州) 선출 대의원을 지냈으며, 1523년에는 하원 의장이 되었습니다.

   

변함 없는 도덕적 고결함, 영민한 정신, 개방적이고 재치 있는 성격, 출중한 학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큰 존경을 받고 있던 그는 영국이 정치, 경제 위기를 겪고 있던 1529년에 국왕을 통하여 대법관직에 임명되었습니다. 평신도로서는 처음으로 이 직위에 오른 토마스는 이 어려운 시기를 맞아 국왕과 국가에 봉사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원칙에 충실하면서, 힘 없는 사람들을 희생시켜 자기 이익만 챙기려 하는 사람들의 해악을 막고 정의를 증진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1532년, 영국 교회를 지배하려는 헨리 8세의 계획을 지지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대법관직을 사임하였습니다. 그는 공직 생활에서 물러나, 가족들과 함께 가난을 견디었으며, 시련의 때에 거짓 친구들임이 드러난 많은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양심을 더럽히는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그의 강직함과 단호함을 확인한 국왕은 1534년 그를 런던탑에 가두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온갖 심리적 압력을 받았습니다. 토마스 모어는 흔들리지 않았고 그에게 강요된 선서를 거부하였습니다. 그것은 제어할 수 없는 전제 정치의 길을 여는 정치적, 교회적 타협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입니다. 재판정에서 그는 혼인의 불가해소성, 그리스도교 문명의 법률적 세습 자산에 대한 마땅한 존중, 국가와 맺는 관계에서 교회가 누려야 할 자유에 대한 신념을 열렬히 변호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몇 세기가 지나자 교회에 대한 차별이 줄어들었습니다. 1850년에는 영국 가톨릭 교계 제도가 재확립되었습니다. 이로써 많은 순교자들의 시성 추진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모어는 존 피셔 주교를 비롯하여 53명의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1886년에 교황 레오 13세 성하를 통하여 시복되었습니다. 또한 순교 400년이 되는 1935년에는 교황 비오 11세 성하를 통하여 존 피셔 주교와 함께 시성되었습니다.

 

   

4. 토마스 모어를 정치인과 공직자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는 이유는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정치계와 행정계에서 느끼는 믿음직한 역할의 모범에 대한 필요성입니다. 힘든 도전과 중대한 책무가 늘어나는 역사적 시기에는 진리의 길을 가리킬 수 있는 본보기가 필요합니다. 오늘날은 실제로 매우 혁신적인 경제 세력이 사회 구조를 재형성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생물 공학 분야의 과학적 성취는 모든 단계의 인간 생명을 수호하여야 할 필요성을 분명히 나타내 줍니다. 반면, 혼란스러워하는 여론에 성공적으로 제시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은 가정과 젊은이들, 노인과 소외된 이들을 위한 명확한 정치적 결정을 절박하게 요구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 토마스 모어의 모범을 살펴본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는 바로 권력이 아니라 정의라는 숭고한 이상에 봉사하려는 의향을 가지고 합법적 권위와 제도에 변함 없이 충실하였던 것으로 유명하였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정치란 무엇보다도 덕의 실천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러한 엄격한 도덕적 태도를 견지하였던 이 영국 정치인은 공직 활동을 통하여 사람들, 특히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공평성에 대한 뛰어난 감각으로 사회적 논쟁을 다루었으며, 가정을 옹호하고 수호하는 데에 힘을 다 바쳤고, 또한 젊은이들의 전인 교육을 지지하였습니다. 명예와 부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청렴하고 기꺼운 겸손, 인간의 본성과 성공의 무상함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 신앙에 뿌리박은 판단에 대한 확신, 이 모든 것은 그에게 역경과 죽음에 직면하여서도 그를 지탱해 준 확신에 찬 내적 힘을 주었습니다. 그의 성덕은 순교로 빛났지만,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헌신으로 일관된 전 생애에 걸쳐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Christifideles Laici)에서, 그와 같이 신앙과 행동을 완전하게 조화시킨 예를 들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평신도들의 생활의 일치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평신도들은 참으로 일상의 직업 생활과 사회 생활 안에서 성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소명에 응답하고자, 평신도들은 하느님께 일치하여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로 인도하는 기회로서 일상 생활을 인식하여야 합니다”(17항).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이 같은 조화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위대한 영국 정치인의 인품을 특징짓는 요소일 것입니다. 그의 열정적인 공직 생활은 사형 집행을 당하는 순간까지도 유머를 잃지 않는 소박한 겸손으로 일관되었습니다.

   

그는 진리에 대한 열정에 이끌려 이러한 높이에 이른 것입니다. 그의 양심을 밝혀 주었던 것은, 인간이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정치도 도덕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의식이었습니다. 제가 이미 다른 기회에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창조되었기에 인간의 권리는 하느님께 그 기원을 두며, 창조 계획을 바탕으로 하고, 구원 계획의 일부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권리는 하느님의 권리이기도 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1998년 4월 7일 연설).

   

토마스 모어의 모범이 밝게 빛을 발하였던 것은 바로 양심의 권리를 옹호할 때였습니다. 이단자들에 대한 행동에서 그가 비록 그 시대의 문화적 한계를 반영하기는 하였지만, 그는 도덕적 양심의 가치를 독특한 방식으로 입증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심은 하느님 자신의 증인입니다. 하느님의 목소리와 판단은 인간의 영혼 깊숙이 파고듭니다”(회칙 「진리의 광채」[Veritatis Splendor], 58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은 오늘날의 세계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합니다. 오늘날에는 “인간이 지닌 고귀한 존엄성에 대한 의식이 커지고 있다. 인간은 만물에 앞서고 또 인간의 권리와 의무는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26항). 성 토마스 모어의 생애는 정치 윤리에 대한 근본 진리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국가의 부당한 간섭에서 교회의 자유를 수호하는 것은 최고의 양심의 이름으로 정치 권력에 맞서 개인의 자유를 수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는 모든 사회 질서의 기본 원리를 발견합니다.

 

   

5. 그러므로 저는 성 토마스 모어와 같이 특출한 인물을 정치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는 것은 사회의 선익에 이바지하리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교 제삼천년기로 데려다 주는 대희년의 정신과 완전히 일치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에게 보내 주신 청원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기꺼이 받아들여, 성 토마스 모어를 정치인들의 거룩한 수호 성인으로 정하여 선포하며, 법에 따라 이 범주의 수호 성인들에게 속하는 모든 전례적 영예와 특권을 그에게 부여하도록 명령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인간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성 베드로좌에서
교황 재위 제23년
2000년 10월 3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Sir Thomas More - HOLBEIN, Hans the Younger
1527-28. Black and coloured chalks on paper, 397 x 299 mm. Royal Collection, London

 

 

축일:6월22일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ST. THOMAS MORE
San Tommaso Moro Martire 

Born:1478 at London, England
Died:beheaded in 1535; head kept in the Roper Vault, Saint Dunstan's church, Canterbury, England;
body at Saint Peter ad Vincula, Tower of London, England
Canonized:1935 by Pope Pius XI
Tommaso = gemello, dall'ebraico

Ordo Franciscanus Saecularis

 

 

평신도 지도자는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관할권을 가질 수 없다고 한 토마스 모어는 자기 믿음의 대가로 생명을 바쳤다.


1535년 7월 6일, 런던탑에서 참수되어 순교한 토마스 모어는 헨리8세의 이혼과 재혼, 그리고 영국 교회의 창설을 끈질기게 부인했다.


"4계절의 사나이"라고 불린 모어는 문학자이며 뛰어난 법률가로서, 신사였으며 네 아이의 아버지로 영국의 수상이었다. 훌륭한 영적 인물이었던 그는 앤 볼레인과 결혼하기 위하여 아라곤의 카타리나와 이혼한 왕의 처사를 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로마 교회와 관계를 끊고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하는 헨리 8세를 영국 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로 인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반역죄로 재판을 기다리면서 런던탑에 갇혀 있었다. 그 반역죄란 계승 법령과 영국 왕이 영국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내용의 문서에 서약하지 않은 것이었다.


토마스 모어는 확신을 가지고 "나는 모든 그리스도교계의 공의회를 알고 있지만 자기 양심의 판단에 따르지 않은 것은 오직 한 나라의 공의회뿐"이라고 단언했다.

 

 

 

400년 후인 1935년에 토마스 모어는 하느님의 거룩한 인물인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몇몇 성인들은 20세기에 와서 더욱 두드러진다. 최고의 외교관이며 조언자였던 그는 왕을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윤리적 가치관과 타협하지는 않았다.


권위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것이 권위에 대한 진정한 충절은 아님을 알았던 것이다.


헨리8세 자신도 이것을 잘 알았다. 그는 토마스 모어란 인물이 신중한 사람이며 그의 인격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수상인 그를 자기 편에 두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헨리 8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두 가지 문제를 인정할 수 없었던 토마스가 수상직을 사임하자 헨리 8세는 그를 없애 버린 것이다.

 

사형 집행인이 토마스 모어에게 눈가리개를 하려고 하자 그는 자기 스스로 그것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처형대의 받침 위에서-그것은 단순한 나무토막이었다-자기 머리를 쳐들고 잠깐만 기다리라는 신호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 농담을 했다. 나무토막 위에 놓여 있는 자기 수염을 치우고 싶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것(수염)은 반역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거운 도끼가 천천히 들려 올라가서 잠깐 동안 공중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테오도르 메이나르, "영웅 인문주의자")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Study for the Family Portrait of Sir Thomas More-HOLBEIN, Hans the Younger
c. 1527. Pen and brush in black on top of chalk sketch, 38,9 x 52,4 cm
Kupferstichkabinett, Öffentliche Kunstsammlung, Basle


인간은 보통 선뜻 눈에 띄는 공훈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앞에는 초자연적 성덕만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자연과 초자연적인 것을 다 겸한 공적을 남긴 사람도 있으니, 그런 이는 물론 세인의 갈채와 아울러 하느님으로부터의 상급도 받게 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 말하려는 성 토마스 모어가 바로 이 같은 분이다.

 

그는 1480년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매우 강직한 성격으로 지방민의 신망이 두터운 판사였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토마스는 엄격한 아버지 슬하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그는 그 당시 재산의 중직에 있던 캔터베리의 대주교 요한 머턴 추기경의 슬하에서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솔직하고 담백한 그의 성품은 곧 추기경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유명한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대 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당시 문학을 한다는 이들은 연약하고 게을러 자연 타락의 구렁에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런 환경에 휩쓸릴 겨를도 없이 오직 면학에만 열중했다. 이는 엄격한 아버지가 가끔 보내주는 약소한 학비로 그런 방면에 여유를 갖지 못한 데도 그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그의 유년 시절부터 마음속에 굳게 간직한 신앙과 열렬한 기도 생활의 힘이 더욱 컸던 것이다. 그는 다윗 성왕의 시편에서 마음에 맞는 구절을 마음대로 선택하여 스스로 기도문을 만들어 조석으로 열심히 기도했다.

 

그의 학교 성적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모두가 수(秀)였다. 특히 그는 라틴어에 능숙하여 어려운 문구를 자유자재로 구사(驅使)하며 시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어렵다는 시인 루싱아의 소설 중의 회화 편을 손쉽게 영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토마스의 입신 출세만을 바라던 아버지는 그를 더 이상 그곳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그는 곧 런던에 돌아와 법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의 공명정대한 사건처리 솜씨는 귿 그 지방민들의 깊은 신망을 받게 되어, 불과 25세라는 약관으로 민의원에 당선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민의원이 된 그는 개인의 이익보다 오히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해야된다는 결심아래 그야말로 분골쇄신하여 활약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어떤 추가 예산안 작성시에 10만 파운드의 예산액을 3만 파운드로 삭감하려는 논쟁을 벌여 그 결과 불행히도 의원직을 사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일단 의원직을 사퇴했으나, 정의를 위해 싸운 그의 공적은 잊혀지지 않았다.

 

 

한편 그가 법률을 더 깊이 연구할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그 뒤 4년 동안 가끔 가까운 수도원을 찾아 수사들과 같이 고해의 생활을 하는 것을 배웠고 그것으로써 일신상의 덕을 닦았다.

그동안 그는 수사나 혹 사제가 되려는 생각으로 이를 지도 신부에게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끝내 승낙을 받지 못하고 다만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2년간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에 유학했다. 거기서 돌아온 그는 다시 변호사업을 시작하고 경건하 요안나 골드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모진 바람은 다시 불어왔다. 즉 요안나는 남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자녀의 양육을 위해 토마스는 다시 과부인 알리스와 결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마스의 가정은 신심생활의 거울이었다. 그는 가장으로서 모든 면에 잇어 모범이 되어 매일 미사에 참여함은 물론, 식사때에도 성서 구절을 낭독하고 처자와 더불어 성서에 대산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다른 이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말할 것도 없었고 손님을 대접할 때도 얼마나 정성껏 친절을 베풀었던지, 사방에서 찾아든 손님들로 집안이 들끓었으며, 그 중에는 외국손님도 많이 끼어있었다고 한다. 첼시에 별장을 둔 후부터는 더욱 많은 손님을 대접했다.

 

그러는 동안 토마스의 명성이 날로 높아가 마침내 대심원장이라는 중직에 오르게 되었다. 국왕 헨리 8세는 그를 신임하여 그에게 프랑스와의 화친 문제등 기타 여러가지 중책을 맡겼으며, 그때마다 그는 대 성공리에 책임을 완수 했다. 그러자 국왕은 그를 더욱 더 믿게 되어 1529년 10월에는 그를 재상직에 올려 주었다.

본래 겸허한 토마스는 그 같은 고위 영직을 탐하지 않았으나 국왕의 명이므로 그를 받들어 그 선정에 적극 조력했다.

 

 

다음은 그가 대심원장 때의 일화 한 토막이다. 그는 중대한 사건의 결심판결에 앞서 일개 판사에 불과한 노부(老父)앞에 꿇어 올바른 판결을 위한 축복을 빌었다 하니, 그가 얼마나 책임감에 충실했던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같이 국왕의 총애를 받은 토마스는 신(臣)과 민(民)으로서의 모든 영예를 다 지녔다고 볼 수 있지만, 그는 결코 국왕의 비도(非道)에 대하여 묵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즉 헨리 8세가 안나 볼레인과 결혼하기 위해 본처인 황후와 이혼하고자 모어에게 동의를 청한 때이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헨리 8세의 사건이다.

 

이로 말미암아 오늘의 영국 성공회가 시작된 것이지만, 가톨릭적 결혼관은 "주님께서 맺어주신 바를 사라미 능히 이를 풀지 못하느니라"하신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혼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토마스는 국왕에게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권유하려 했으나 국왕이 도저히 이를 들어주지 않았기때문에 마침내 사표를 내게 되었다. 물론 왕은 이를 수리하지 않았다. 토마스의 고민은 날로 커져만 갔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정적들은 때를 이용하여 여러 자기 모략으로 토마스에게 역적의 죄목을 씌웠다. 토마스의 충성은 세인이 다 알기 때문에, 그런 죄목에 대한 혐의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다만 신조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일보도 양보치 않을 것은 분명했던 것이다.

 

이것이 국왕의 비위에 거슬리게 되어 그는 즉시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재산까지도 몰수당했다. 그는 최후 판결을 받는 날 눈물겨운 심정으로 고해 영성체하고 미사 참여를 마친 후 일단 신자들에게 이별의 인사를 고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몸이 되고 말았다.

 

재감 1년간, 정적들은 수차에 걸쳐 그의 배교와 번의 (飜意)를 꾀했다. 심지어는 그의 사랑하는 딸 마르가리타를 보내 "피셔 주교님도 국왕의 이혼을 승낙하셨는데 아버지도 마음을 돌리세요"라고 말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죄를 지을 수는 없다"하며 끝까지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다음은 사랑하는 아내 알리스가 와서 애걸했다. 남편이 없는 가정이란 말할 수 없는 형편이라는 등 여러 가지 사정을 들어 눈물로써 토마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토마스는 "알리스, 내가 양심을 어겨서 국왕의 비행에 동의하고 형벌을 면한다 합시다. 우리가 앞으로 얼마동안 더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며 살 수 있겠소?"

 

"한 20년쯤은.."

"뭐 20년쯤? 그래 그것 더 살려고 죽어서 영원한 지옥 불을 당해도 좋단 말이오? 그건 너무나 미련한 짓일 뿐이오" 하는 대답뿐이었다. 토마스의 옥중 생활을 편지를 쓰거나 저서를 저술하는 것 등이었다. "신앙을 위한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등은 재감 중에 저술한 서적이다. 얼마 후 그는 펜과 잉크까지도 압수당했다. 이렇게 되자, 그는 기도를 드리는 것 외에는 위로를 삼을 길이 없게 되었고, 가끔 종이 조각에다 숯 부스러기로 편지를 써서 처자에게 소식을 전하곤 했다.

 

 

 

1535년 7월 1일에 토마스에게 추상같은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형 집행은 6일이었다. 그가 단두대에 섰을 때,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기는 무수한 군중들에게 전래대로 고별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그것마저 인심을 소란케 한다는 이유로 금지 당하고 말았다. "나는 가톨릭 신앙을 위해 죽는다"는 간단한 한 마디와 십자가를 손에 꼭 쥐고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자비를 베푸소서"를 외쳤다.

 

변천 무상함은 세상의 상사인지라, 한때는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었던 대 재상이 지금은 역적의누명을 쓰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려는 찰나에 아무리 심장이 강철같은 집행인일지라도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본 토마스는 침착한 발걸음으로 그들 앞으로 가까이 가서 등을 두드리며 "걱정할 것 없어. 지금은 당신들이 나의 가장 고마운 친구들이야"하며 오히려 격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잠깐동안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고스스로 단두대에 머리를 눕혀 형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그러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의 머리는 가장 번화한 거리인 런던 다리 위에 매달아 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도록 했다 한다.

 

그러나 정의를 위해서는 어떠한 권력에도 굽힐 줄 모르는 철석같은 신앙은 마침내 상급을 받았으니, 즉 1934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토마스는 요한 피셔와 더불어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오늘날 가장 근대적인 성인으로 전세계 신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 토마스 모어가 옥중에서 자기 딸 마르가리따에게 보낸 편지에서

(The English Works of Sir Thomas More, London, 1557, p.1454)

 

하느님께 내 모든 희망을 걸고 내 전부를 맡기겠다

 

내 사랑하는 마르가리따야, 내 지난 날의 죄를 볼 때 나는 하느님께로 부터 마땅히 버림받아야 할 몸임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다 내 신뢰를 걸고 또 마음을 다하여 희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 하느님의 거룩한 은총은 나를 굳세게 해주시어 나로 하여금 양심을 거슬러 서약하는 것보다 기쁜 마음으로 재물과 토지와 생명마저 잃을 수 있게 해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또 국왕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그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주시어 아직은 나에게서 자유만을 빼앗도록 하셨다.

이 자유를 나에게서 거두실 때 하느님께서는 이제까지 내 신앙을 북돋아 주시고자 그토록 허다하게 베풀어 주신 당신의 커다한 영적 은혜들 가운데서

내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 가장 큰 은혜라고 생각토록 해주셨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불신할 수없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국왕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를 대하게 하시어 그가 나에게 아무 해를 입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의 죄 때문에 응당히 받아야 할것 이상으로 고통받게 하기를 원하신다면,

그분의 은총이 나로 하여금 인내의 마음으로 그리고 어쩌면 기쁜 마음으로까지 그것을 받아들일 힘을 주실 것이리라고 확신한다.

내가 고통을 잘 참아 낸다면 이것을 내 인내심의 공로를 훨씬 초월하는 주님의 쓰라린 수난의 공로와 결합시키시어,

내가 연옥에서 당할 고통을 줄여 주시고 천상에서 받을 상급을 늘려 주실 것이다.

 

마르가리따야, 내 비록 허약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느끼고 있지만, 절대로 하느님을 불신하지 않겠다.

나를 쓰러뜨릴 정도의 두려움을 내가 느끼어 되어도 성 베드로에게 생긴 일을 기억하겠다.

돌풍이 일자 약한 믿음 때문에 물 속으로 빠져 들기 시작한 그가 그리스도를 부르면서 도움을 간구한 것처럼 나도 그를 본받아 그리스도께 간구하겠다.

그때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손을 뻗치시어 폭풍에 휩싸인 이 바다에서 나를 붙들어 올리시어 물에 빠져 들지 않게 하시리라.

그런데 내가 베드로를 답습하여 나도 그처럼 유혹에 넘어져 주님을 모른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하게 된다면,

(하느님의 자비는 내가 그런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고 혹시라도 빠진다면 유익보다는 해가 되게 해주기를)

그때에도 베드로를 인자하게 굽어보신 것처럼 나도 연민에 찬 시선으로 굽어보시고 다시 일으키시어 내 양심의 진실을 다시금 고백하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내 잘못에 대한 수치와 마음의 괴로움을 느끼도록 해주실 것입니다.여하튼 나는 이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마르가리따야, 하느님께서는 내 잘못이 아니라면 결코 버림받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을 허락치 않으실것이다.

나는 하느님께 내 희망을 걸고 내 전부를 그분께 맡기겠다.

그러나 내 잘못 때문에 버림받은 자 된다 해도 이것은 하느님의 정의와 찬미와 영광이 될 것이다.

마르가리따야, 하느님이 너그러우신 자비는 이 불쌍한 영혼을 구하시고 내가 그 자비를 찬미할 수 있게 해주시리라 굳게 믿으며 이를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내 사랑하는 딸아, 이 세상에서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걱정하지 말아라. 하느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그 어떠한 일도 생길 수 없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겉보기에 그것이 나쁜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참으로 가장 좋은 것이 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가톨릭굿뉴스홈에서)

 

 

 

정직함


‘사계절의 사나이’로 불리는 성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 때 대법관이자 법률가, 신학자, 철학자, 작가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지위나 재능보다도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으로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헨리 8세는 토마스 모어가 두 번째 아내 앤 불린의 딸(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적법한 왕위 계승자임을

공표하는 법령에 서명하기를 거절하자 그를 옥에 가두었고, 설득에 실패하자 결국은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가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어 영국 교회를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시켜는 의도가

그 서류에 담겨 있음을 간파했다.

그는 자신이 그 서류에 서명하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나는 왕의 좋은 신하로 죽지만 그보다 먼저 하느님의 착한 종이다.”

 

그는 법률가였고 정치인이었으므로 법에서 빠져 나갈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양심에 걸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날마다 강도와 불륜, 사기 사건으로 가득 찬 신문을 읽는다.

어떤 때는 도대체 이 세상에서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일이 의미가 있는가 하고 의심하기도 한다.

토마스 모어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 주는 성인이다.

나 자신뿐 아니라 남에게도 정직한가?

타협의 기준은 외부의 압력이 아니라 나의 양심이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2005.12.07.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3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yeo0****
시민
본인 입력 포함 정보

모어의 생애를 단축시켜말하면

모어는 1478~1535년까지 살았고

에라스무스라는 친구가 있는 영국 인본주의자입니다.그런데도 신앙심이 깊어요.

모어는 욕심많은 귀족과 가난한 사람들을 궁지로 모는 영국사회를 경악했습니다.

그래서 우토피아라는 책을 짓습니다.

그후 모어는 헨리8세 신하로 있었지만

"헨리가 영국 교회의 우두머리다"라는 서약을 거절해서

단두대에서 참수형을 당하죠.

 

너무 단축시켰나요?^^

2008.10.11.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