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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보은출신인물정보
hanc**** 조회수 1,402 작성일201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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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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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의 인물)

 

1.김가기 (1537~159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사원, 호는 일구당이다.부사직 김벽의 손자로, 부친은 김제군수를 지낸 통훈대부 김천우이다. 스승 성운이 아들이 없어 조카사위인 그를 후사로 삼았다.


1579년(선조 12) 기묘식년사마시 생원 1등에 합격하여 노성현감을 지냈다. 그 후 성운의 문집 편찬에 몰두하던 중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마을에 침입한 왜적과 맞서 대항하다가 순절하였다. 당시 부인 전주유씨는 남편을 구하려다 순절하였고, 며느리 고령신씨도 피난 중 왜적을 만나 자결하여 일가 셋이 한 날 순절하였다.


1598년(선조 31)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증직되고, 유씨 부인은 숙부인(淑夫人)으로 추증되었으며 며느리 고령신씨는 정려가 내려졌다.


그가 수집하여 간행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성운의 문집은 1603년(선조 36) 아들 김덕민이 유근 등과 함께 『대곡집』으로 간행하였다.


2.송찬호 (1959.08.05~ )


1959년 8월 5일 충북 보은 출생. 경북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축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1987년 『우리시대의문학』에 「변비」, 「금호강」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송찬호의 시 세계는 존재론적 성향과 미학주의라는 충동을 통해 시적 긴장감을 창출하고 있다. 출구가 없는 닫힌 공간의 사각형 이미지를 통해 원초적 고통인 죽음을 탐구한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1989), 언어의 순수성 회복 및 언어와 세계의 확장을 그려 보인 『10년 동안의 빈 의자』(1994), 지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운동성을 부여한 특유의 식물성의 상상력이 나타난 『붉은 눈, 동백』(2000), 문명의 위력에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2009) 등의 시집을 간행한 바 있다.


그의 시는 상투적인 세계인식을 전복시키는 언어체계의 의도적 굴절이 특징적이다.

 

3.강효신 (1935~2014)


보은 출신으로 경희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경희의료원 한방병원장 및 교수를 지냈고 경산대 학장을 지내는 등 한의학계에서 가장 저명한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강박사는 단군의 건국 이념인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사상을 전파하는 중심인 동추한의학연구원이라는 '약의 집'을 건립하고 일요일이면 전국에 있는 한의사 제자들이 찾아와 무료 의술을 펼쳤다.

4.김정 (1486~1521)


충암 김정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 자는 원충 호는 충암,고봉으로 보은읍 성족리 출신이다. 아버지는 호조정랑 효정으로 판도판서 장유의 6세손이다. 1504년(연산군10) 사마시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2) 중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보임되고 홍문관 수찬 병조좌랑 거쳐 정언에 전임되었다. 이어서 병조정랑, 홍문관부교리 헌납 홍문관교리 이조정랑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때 왕의 구언에 응하여 담양부사 박상과 함께 일찍이 중종이 왕후 신씨를 폐출한 처사가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신씨의 복위를 주장함과 아울러 신씨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등을 추죄할것을 상소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고향 보은 함리역에 유배되었다.


1516년 그는 박상과 함께 재등용되고 뒤에 조광조와 더불어 혁신정치를 꾀하다 을묘사화로 금산에 유배되었다. 귀향살이에서 금산군수의 허락을 받아 늙은 어머니를 보려고 보은에 왔으나 훈구
판에 아첨하는 수령의 농간으로 도망친것으로 보고되어 제주도로 귀향쳐가 옮겨졌다가 사약을 받았다.

201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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