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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고장에 내려오는 옛 이야기나 노래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11,797 작성일2005.07.18

고장에 내려오는 옛 이야기나 노래좀 알려주세요.. ㅠㅁㅠ 제목도 부탁해요~

 

(부산)에 살고 있음.. ㅇ3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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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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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예절, 의식 7위, 연애, 결혼, 가족행사, 이벤트 18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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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좌골에 얽힌 전설:

해운대구 반송2동 운봉마을과 기장군 철마면 경계를 이루는 계곡을 예부터 개좌골이라 불러 지금까지 전해내려 오고 있다. 지명에 대한 유래는 임진왜란 이후 철마면 장정들은 부산의 각 진영에 입방군으로 복무하게 되어 있었다. 이곳 연구리에 살고 있던 서흥도 부산성의 입방군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자기 집에서 부산성까지는 60리가 넘는 먼 거리였다. 그는 이런 먼 길을 걸어서 낮에는 입번을 하고 밤에는 부모님이 계시는 집에 돌아와서 부모님께 극진한 효도를 하였다. 혹독한 추위와 폭설에도, 폭우로 길이 없어져도 한 번도 빠짐없이 60리 길을 내왕하였는데, 그는 누렁개 한 마리를 길동무로 삼아 언제나 데리고 다녔다. 어느 해 이른 봄철 서홍은 입번을 마치고 걸음을 재촉하여 60리 길을 걸어서 이곳 개좌골 고개에 와서는 집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는지라 피곤한 몸을 잠깐 쉬어 가려고 들고 있던 횃불을 돌 위에 놓고는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그 사이에 횃불이 풀숲에 번져 곤히 잠든 서홍은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를 본 누렁개는 멍멍 짖으면서 주인의 옷자락을 물고 흔들며 깨웠지만 주인은 깨어나지 않자 누렁개는 산 밑에 있는 개울까지 달려가서는 온몸에 물을 묻혀 달려와서 주인이 잠든 주위의 풀숲에 물을 적셔 불이 번지는 것을 막다가 그만 연기에 질식하여 죽고 말았다. 얼마 후에 잠에서 깨어난 서홍은 이 광경을 보고 충성스러운 누렁개가 자기 생명을 구해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그 효자에 그 충견이라 하여 모두가 칭송하였고, 부산첨사는 서홍의 군역을 면하여 주고, 연구리에는 효자비를 세웠는데, 그 비각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으며, 그 일이 있는 후부터는 그 산 고개를 개좌산이라 불렀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해운대 구지』에서 발췌)

동래의 관황묘:

동래구 명륜동 447번지의 관황묘가 있었던 자리는 김장군이라는 아기 장수가 태어난 집터였다. 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일어서고 천장에도 달라 붙기도 하는 신동이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김해의 안장군은 이곳에 찾아와서 골상을 보니 장래 비범한 사람이 될 것으로 보이기에 다가올 앞날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에서 아이를 죽였다. 이때부터 이 자리에는 저녁만 되면 천병만마(千兵萬馬)가 달리는 말굽 소리와 함께 군신들의 다투는 함성이 소란하여 견딜 수 없어 부득이 공지로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부사 박계관이 동래에 부임하여 관황묘를 세웠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고 한다. 즉 박기체라고 부르는 동래 사람이 부산의 김모씨 집에 놀러갔더니 관황의 영정에 관우신장의 위패를 세워놓고 무엇인가 빌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박씨는 이상히 여겨, '노형은 어찌하여 관황의 영정에 관우의 패를 세워놓고 무엇을 그렇게도 공손히 빌고 있는 거요?'라고 물으니 '이 신장은 관운장이 온데 무엇이든 빌기만 하면 효험이 나타나기에 제가 이렇게 모시는 거요'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박씨는 '노형! 이 영정을 내게 주신다면 노형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은 물론이요, 제가 성의껏 신장을 모시겠소.'라고 애걸한 끝에 관황의 초상화를 얻게 되었다. 이 무렵 동래부사 박계관은 이 말을 전해 듣고 이상하게 여기고 있던 차에 하룻밤 꿈속에서 관운장을 만났는데 관우가, '부사! 나는 지금 고독하게 묻혀 있으니 넓은 자리로 옮기게 해주오'로 청하는 말을 들었다. 꿈에서 깨어난 부사는 너무나 신기했기 때문에 해몽 끝에 김 장군이 죽은 집터에 관황묘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후 동래부사 황정연이 논 열 마지기와 제실 다섯 간을 지어 영년 유지책을 강구해 주었다. 1970년대에 와서 이 일대가 개인소유로 넘어가 김장군의 사당과 함께 관황묘가 철거되었다.

만덕고개와 빼빼영감:

옛날에는 동래 사람이 구포장을 보러갈때 넘는 만덕고개는 옛날부터 동래부 관내의 최대의 도적소굴로 소문난 험한 산길이었다. 이 때문에 만덕고개를 '만등고개' 라고도 불렀는데, 만사람이 무리지어 올라가야 도적을 피할 수 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라 한다. 어느 날 이 고개를 동래 남문밖에 사는 삿자리장수 영감이 구포장에 들렀다가 다른 장꾼들과 함께 넘게 되었다. 항상 말이 없는 이 영감에 대해 사람들은 그가 홀아비라는 것 외엔 이름도 성도 몰랐던 까닭에 그저 빼빼영감이라 불렀다. 이들은 지친 다리를 좀 쉬어보려고 만덕고개에 있는 주막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 순간 갑자기 십수 명의 도적무리가 달려들면서 『꼼짝마라, 이놈들 움직이면 죽인다.』고 고함쳤다. 서슬이 퍼런 도적들의 기세에 질려 꼼짝도 못하고 있는 장꾼들을 한 사람씩 묶은 뒤 괴수로 보이는 자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물건을 판돈과 가진 것을 모조리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이때 빼빼영감이 감연히 앞으로 나서며 도적들을 향하여 『여기 있는 장꾼들은 이 험한 고개를 넘나들면서 겨우 끼니나 이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이옵니다. 아무리 도적질을 하고 산다지만 사람을 보고 물건을 털어야 할 게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빼빼영감의 태도에 깜짝 놀라면서도 장꾼들은 당할 일이 너무나 뻔해 눈을 찔끔 감아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도적들은 이 빼빼영감에게 달려들면서 『이놈봐라, 뼈만 남은 게 그래도 입이 있다고 떠드는구나.』라며 뭇매를 때리고 발길로 차는 등 무지막지하게 영감을 쓰러뜨렸다. 영감은 주저하듯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더니 벌떡 일어섰다.
『이놈들아! 어서 이 끈을 풀어주지 못하겠느냐』고 외치는 그의 눈에는 살기가 등등했다. 어이가 없어진 도적들이 아주 영감을 죽여 버리겠다고 다가갔을 땐 이미 영감의 몸뚱이에 묶인 밧줄은 모두 끊어진 뒤였다. 이놈 저놈을 공격하는 솜씨는 이미 영감의 그것이 아니었다. 날쌘 비호와 같았다. 이 비상한 완력을 당해내지 못하자 도적들은 모두 도망쳐 달아났다. 영감은 묶인 장꾼들을 전부 풀어주었다. 장꾼들이 못 달아난 도적들을 끌고 동래로 가자고 했을 때 영감은 그자들은 이제 더 이상 도적질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장꾼들에게 술대접까지 하였다. 그리고 사흘 후 장꾼중 한 사람이 빼빼영감의 집을 찾았더니 그 집은 텅텅 빈집이 되어 있었다. 이 소문이 밖으로 새어나오자 나라에서는 빼빼영감이 비상한 힘을 가진 장사인 것을 알고 방방곡곡 수소문을 해 찾았으나 그 행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고 한다.

매바위와 학바위: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의 두호마을 앞바다의 북쪽에는 학처럼 생긴 큰 바위와 남쪽에는 매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으며, 강변에는 용머리처럼 생긴 큰 바위산이 있다. 그래서 이를 학바위, 매바위, 용머리라 하였다. 옛날 옛적에 학바위 앞에 살고 있던 처녀가 매바위 앞에 살고 있는 총각 집에 시집을 갔다. 그 뒤로부터 학바위는 누렇게 변색하면서 그 근처 미역밭에 미역이 붙지 않아 친가는 가난하여졌고, 매바위는 검게 반질거려 미역이 주렁주렁 매달려 시가는 큰 부자가 되었다. 시가가 부자가 되는 것은 좋으나 친정이 가난해지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어느 날 탁발하러 온 스님에게 후하게 시주를 하고 그 딱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그 스님은 학바위와 매바위를 살펴보고 나서 하는 말이 용머리는 매를 노리고, 매는 학을 노리고 있는 형국이니 학이 꼼짝 못하고 기가 죽어 있기 때문에 학바위가 누렇게 터실 거리고 미역이 붙지 않으니, 매바위의 매눈을 찍어 부셔버리면 친정은 다시 부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두 마리의 새가 앉은 자리에는 부모의 묘를 썼으나, 한 마리의 새가 앉은 집자리는 여러 채의 집이 있어 그 집들을 헐어 버리지 않고는 새로이 기와집을 짓지 못할 사정이었다. 그런데 그해 겨울에 이상하게도 불이 나서 10여 채의 집들이 모두 타 버렸다. 오씨부부는 그곳에 기와집을 지어 살게 되자, 하루가 다르게 재산이 늘어나게 되어 한 때는 소작료만으로 2만 석이 넘었다고 한다.
(『기장군향토지』에서 발췌)

백록의 동래온천:

지금으로부터 천수백년전 신라 때 동래 고을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절름발이 노파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노파는 집 근처에 있는 논에 백학 한마리가 날아와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 노파는 같은 처지에 놓인 백학을 크게 동정하며 한참 동안 시선을 백학에서 떼지를 않았다. 백학은 다음 날도 역시 그곳에 와서 있었다. 그리고는 사흘째 되는 날 백학은 이상하게도 다리를 절지 아니하고 그 근처를 몇 바퀴나 돌다가 기쁜 듯 힘차게 날아가 버렸다. 이것을 본 노파는 '이상한 일이다. 학의 다리가 낫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다.' 하고 중얼거리면서 백학이 서 있던 곳으로 가보니 따끈따끈한 샘물이 솟고 있었다. '나도 이 물에 다리를 담가보아야 하겠다. 이것이 다리를 고쳐주는 약천이구나.' 노파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절름거리는 다리에 몇 번이고 약수를 찍어 발랐다. 이 약수는 신기하게도 효험이 있어 수일 후에는 그 다리가 부자유함이 없이 마음대로 움직이게 되었으니 노파의 기쁨은 더 말할 나위 없었다.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샘을 온천이라 불렀다.
(박원표, 『향토부산』에서 발췌)

부지런한 며느리와 산삼:

처녀가 시집을 가는데, 저거 어무이(어머니)가 화롯불을 하나 담아 주면서 "시집가서 이 불을 꺼주지 말고 내내 잇우고(잇고) 살아라." 카거든. 그래 처녀가 시집가서 만날(늘) 불을 일아놓이까네, 엄두리(어리석한) 총각이 저녁에 오디마는 화롯불을 꺼뿌고 가고 사흘 저녁을 꺼뿌고 가고 하거든. 이라이(이렇게 하니) 그 뒷날 저녁에는 화롯불을 일아놓고 있으니 엄두리 총각이 와서 또 화롯불을 꺼뿌이 처녀(시집간 그 처녀)가 그 총각을 따라 산중에 올라가이까네, 총각이 첩첩한 산골짜기 거(거기) 가디마는 사그라지고(사라지고) 없거든. 그래 처녀가 제 치매 끈을 뚝 따가지고 그 총각 없어진 자리의 나무에다 묶어놓고 집을 돌아왔거든. 묶어놓고 와가지고 그 이튿날 그 곳에 가이카네 나무 근방에 전신에(온통) 삼이라. 전신에 삼인데, 그래 그 총각이 나오거든.
나와가지고서는 "네가 너거 부모 말을 온창(매우) 열심있게 들으이, 이 삼으로 우리가 복을 주는데 사흘 있다가 사람을 뎃고(데리고) 와서 다 파가 가서 묵고 서라" 이러카더란다. 그래 와가지고 사흘만에 사람을 얻어가 산에 있는 삼을 말키(전부)다 캐가지고 저거집에 갖다놓으니까네 그 이붓(이웃) 사람이" 이이고 어떻게 이렇게 부자가 됐노?" 카거든. 그래 처녀가 이바구(이야기)를 했거든. "우리 엄마가 나 시집올 때 화롯불로 담아 주면서 이 불을 끄트리지 말고 내내 잇우라 카는 불을 총각이 와서 불을 꺼내 내가 산에 따라가니 그렇게 됐다." 카이, 이붓 사람이 지(자기)도 인자 그라이까네 참 그런 총각이 또 있거든. 그래 인자 이붓 사람이 그 총각을 따라가 지(자기)도 치마 끈을 묶어놓고 왔거든. 또 삼이 산에 천지거든. 총각이 사흘만에 파가라 카는 거로(것을) 뒷날 가서 파이 삼이 끊어지면서 피가 나고 이렇더란다. 그래 이붓 사람은 욕심이 많아서 실물하고, 인자 앞에 사람은 크게 부자가 되고 잘 살게 되었더란다.
(『부산시사』제4권에서 발췌)

삼정자(三亭子)의 삼장사(三壯士):

기장군 철마면 구칠리 점티마을 서쪽 개울가에 삼정자라는 정자가 있었다. 지금은 정자는 없어지고 커다란 바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옛날 조선시대 이곳에 삼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몸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다. 모두 겨드랑에 작은 날개 같은 비늘이 붙어 아무도 그들의 힘을 헤아릴 수 없었다. 이들은 큰 산이라도 둘러 뽑을 힘을 가진 장사들이었지만 미천한 신분 때문에 무과(武科)에 응시하여 과거를 볼 수도 없고 무사가 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삼 형제는 울분을 참지 못해 이곳 개울가에 바위를 뽑아서는 집어 던지면서 치솟는 힘을 달래었다. 그러나 맏형은 결코 힘자랑을 하지 않는 반면 동생들은 바위 돌을 뽑아 던지면서 늘 힘자랑을 하였다. 한번은 개울가에서 동생 둘이서 바위를 들어올리기 내기를 하였다. 먼저 셋째가 큰 바위를 들어올리고, 둘째는 그 보다 배되는 것을 들어 올렸다. 보고 있던 맏형은 "온 고걸 가지고 그렇게 끙끙거리나" 하더니 둘째보다 두 배가 되는 바위를 번쩍 들어서는 저만큼 갖다 버렸다. 이를 본 아우들은 평소에 형이 그렇게 힘이 센 줄 몰랐던 만큼 매우 놀랐으며 또한 끝없이 부끄러워하였다. 그러자 맏형은 동생들에게 우리가 시절을 잘못 만나 힘을 펴지 못하게 되었으니 누구를 원망하리오 하면서 은인자중 하였다고 한다.
(『기장군향토지』에서 발췌)

원앙대의 용녀: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에 원앙대가 있다. 기장현감으로 있던 권적이 이곳에 놀러와서 절경에 감탄하였다 한다. 현감은 원앙대의 북쪽을 미랑대라고 부른다는 말을 듣고 자기 벼슬이름과 비슷함을 알고 자기 벼슬이름이 되는 시랑을 붙여 시랑대라 작명 하였다. 옛날 어느 여름에 날이 가물어 마을사람들은 원앙대 아래 해룡단에서 기우제를 올리고 대내마을로 가고 있었다. 미랑 스님은 기우제가 끝나자 큰방처럼 넓적하게 생긴 원앙대에 홀로 앉아 비오개의 넘실거리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이 되자 용궁에서 원앙대 밑의 동굴을 통하여 아름다운 용녀가 나타났다. 이 용녀의 자태에 유혹된 미랑스님은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용녀를 덮쳤다. 그 결과 용녀는 아기를 잉태했다.
용궁의 눈을 피해 원앙대에서 해산할 준비를 하였다.
탯줄을 끊을 가위와 상자를 놓고 자리를 펴고 진통으로 신음하면서 아무도 못 보게 하였다. 미랑스님은 용녀의 분부로 원앙대 병풍암 뒤에 숨어서 용녀의 신음소리에 어쩔 줄을 몰랐다. 동해용왕은 용녀공주가 인간과 불륜을 범하여 원앙대에서 출산의 산고를 겪고 있다는 급한 전갈을 받았다. 크게 진노한 용왕은 산더미 같은 파도를 일으켰다. 용녀는 막 순산하여 그 탯줄을 끊지도 못하고 성난 파도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처절한 광경을 보고 있던 옥황상제는 천마를 내려 보내 용녀와 아기를 하늘나라로 데려서는 천상의 옥녀로 삼았다. 지금도 그 바위에는 용녀의 탯줄이 붉은 줄로 길게 뚜렷이 박혀 있고, 탯줄을 끊은 가위는 그대로 돌바닥에 뚜렷이 박혀 있고, 네모진 바늘상자는 깊고 뚜렷이 박혀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젊은 수도승이 용녀를 구출하려고 뛰어 내렸던 곳에는 짚신자국이 깊게 새겨져 있다. 후세 사람들이 이 용녀를 위하여 해룡단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원앙대를 미랑대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원앙대의 동굴에 파도가 치면 애절한 용녀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고 한다.
(『기장군향토지』에서 발췌)

선암사의 꿈:

지금 당감동의 북쪽 산기슭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선암사는 신라 때의 고찰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4세기 초 부산지방에는 거칠산국이 있었는데, 이 나라는 북에서 남으로 뻗어 나온 신라의 세력에 의하여 신라 제4대 탈해왕 때 정복된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 때에는 지금의 당감동에 동평현을 두었고, 선암사가 동평현에 소속되어 있었다. 지금의 선암사는 산기슭에 있지만 먼 옛날 10세기 전에는 절 가까이까지 파도가 치밀려온 바닷가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 당시 불교의 독실한 신자였던 한 관리가 동평현의 현령으로 부임해 왔는데, 어느 날 그는 일본 배가 그곳으로 표류해온 것을 보고 갖은 힘을 다하여 그네들을 구출해 주었다. 그리곤 그들을 안내하여 잘 대접도 해주었더니 며칠 뒤 선장이 찾아와서 "영감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들은 영감님께서 도와주셨던 덕분으로 내일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은 영감님께 보답할 아무것도 없사옵니다마는 배에 약간의 약주가 있으니 한 잔이라도 올리고 싶습니다."라고 간곡히 청했다.
현령은 그들의 청을 받아들이기도 약속했다. 이때 선장은 "저희들은 여러분을 다 모시고 싶사오나 배가 작아 부득이 현령 영감님 한 분만을 모시게 되었사오니 혼자 오셔서 놀다 가시옵기를 바랍니다."라고 덧붙였다. 이 마음씨가 고운 현령은 그들을 따라 배까지 갔더니 뱃사람들은 갑자기 "이제 됐어. 인질로 납치해 가자." 고 하면서 그만 현령을 가두곤 닻줄을 올려 일본으로 향했다. 현령은 이 어처구니없는 왜구들의 처사에 어쩔 수 없이 반항도 못하고 일본까지 끌려가서 포로의 몸이 되었다. 이래서 현령은 너무나 의외의 참변을 당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붙잡혀간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수심과 피로 끝에 잠든 현령을 꿈속에서 그리웠던 고국의 선암사 주지를 만났다. "스님, 이 일이 웬 일이옵니까? 저는 일본 뱃사람을 구출해 준 덕분에 영어(囹圄)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스님, 제발 저를 구해주옵소서." 라고 두 손 모아 빌었다. "가히 염려 마오. 죄 짓지 않았으니 돌아갈 길도 있겠지오." 라고 정좌를 하면서 "옷을 바로 입고 바닷가로 나갑시다." 하면서 길 앞에 섰다. 바닷가엔 조그마한 배 한척이 있었다. 스님은 "빨리 배에 오르시오."라고 손짓을 했다. 현령은 같이 가길 원했으나 스님은 고개를 흔들며, "혼자 가오."라고 하면서 배를 왈칵 밀었다. 현령이 깜짝 놀라 깨어보니 동평현 자기 집에 돌아와 있었다는 것이다.
(박원표, 『향토부산』에서 발췌)

청사포 망부송:

해운대구 청사포에 금슬이 좋은 젊은 부부가 있었는데 그 부인의 성이 임씨였다. 그 임씨는 남편이 바다로 고기잡이로 하러 나가 돌아올 무렵이면 오늘날의 망부송앞 바닷가에 있는 바위 위에서 남편을 기다리다가 마침내는 그 바위가 소나무에 올라 아득하게 먼 바다를 바라보며 남편을 돌아오지 않았는데, 남편 되는 사람은 이승이 아닌 저승의 바다 속 궁정이란 용궁으로 가서 이승을 바라보니 아내가 바닷가 소나무에 올라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자기를 기다리고 있더란 것이다. 남편으로 보아서는 가슴이 저미는 안타까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남편은 용왕님께 하소연하고 용왕은 그 임씨부인과 남편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푸른 뱀인 청사(靑蛇)를 이승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이승의 임씨 부인은 용궁에서 보낸 청사를 맞아 청사를 타고 용궁으로 가서 남편을 다시 맞아 부부의 정을 다시 일구었다고 한다. 현재의 청사포의 이름은 이 전설에서 보이는 청사에서 유래한 것인데 뒤에 사(蛇)라는 글자가 좋지 않아 사(沙)로 바꾸어 청사포(靑沙浦)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임씨 부인이 올라가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바다를 바라보던 소나무를 망부송이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산지명총람』제3권에서 발췌)

마하사의 16나한 전설:

연제구 연산동의 금련산에 있는 마하사에 어느 해 참새가 모여들어 청정한 도량을 시끄럽게 하고 곡물에 피해를 많이 줌으로 주지가 나한전에 가서 참새들을 물리쳐 달라고 기원하였더니 어느 날 뜰 가운데 죽은 참새가 한 마리 떨어져 있는 뒤로는 지금까지 참새는 일체 범접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한 해는 불사를 거행하는데, 금전이 부족하여 나한전의 불사를 뒷날로 미루고 우선 불사 종료 회향식을 거행하게 되어 식순에 따라 범종을 치니 종소리가 나무소리로 변하고 종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에 수많은 대중이 황공하여 목욕 정심하고 나한전에 나아가 "오늘 불사를 거행하고 내일 나한전에 불사를 거행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대자비심을 베풀어 주십사"하고 고축(告祝)을 한 뒤에 종을 치니 그 때서야 비로소 종소리가 났다고 한다. 또 한 해는 동짓날이 되어 절의 공양주가 새벽 일찍이 동지 팥죽을 끓이려고 부엌으로 나가 화로에 묻어둔 불씨를 찾았으나 없었다. 그래 우선 팥죽을 씻어 솥에 앉쳐 놓고 불을 얻으러 산지기 집에 가서 불을 달라 하였더니, 산지기의 말이 조금 전에 상좌 아이가 불을 얻으러 왔기에 불을 주고 또 우리 집 팥죽을 주었더니 먹고 갔다고 하였다. 절에는 상좌 아이도 없을 뿐더러 불을 얻으러 보낸 일도 없는데 공양주가 이 말을 듣고 이상히 생각하여 절 부엌에 가보니 화로에 불이 있어 그 불로 팥죽을 쑤고, 팥죽을 퍼서 나한전에 올리려 가보니 한 나한의 입에 팥죽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부산시사』제4권에서 발췌)

범어사 창건 전설:

신라 문무왕때, 왜구가 대거 침범하는지라 왕이 그 퇴치 방안을 아무리 생각하여도 묘책이 없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신인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대왕은 근심하지 마소서. 태백산중의 의상대사는 금산보개여래(金山寶蓋如來)의 후신으로 항상 여러 신중(神衆)을 거느리고 다닙니다. 대왕께서는 의상대사를 맞이하여 친히 함께 금정산으로 가시어 금정암 밑에서 7일 7야 화엄신중경(華嚴神衆經)을 독송하고 정근하시면 미륵여래가 금색신을 현현하고 사방의 천왕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색신(色身)을 나타낼 것이며, 비로자나여래가 금색신을 나타내어 보현, 문수, 향화동자(香華童子) 등 40법체를 거느리고 제신 천왕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해동을 위압하면 왜병이 자연히 물러갈 것입니다. 만약 후대에 어진 이가 이어나지 않아 왜적이 침입하고 사방에 병란이 일어나거든 또한 이 바위 밑에서 화엄정근을 하시면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간과(干戈)가 길이 쉬게 될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래서 문무왕은 의상대사를 불러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금정산 밑에 범어사를 짓게 한 것이다.
(『부산시사』제4권에서 발췌 )

운봉산 김씨 묘

조선 성종 때 만호(萬戶) 벼슬을 하는 김보는 두 남매가 있었다. 아버지 김보가 병에 걸렸을 때 딸이 하늘에 맹세하여 빌기를 "만약에 하늘이 도우시지 못해 아버지께서 불행을 당하시면 나도 따라 죽으리라"고 하였다. 그의 부친이 병으로 죽자 그 딸은 남동생을 불러 "너는 살아서 어머니를 모셔라. 나는 죽어서 아버지 시중을 들어 드리련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종 22년(1491)에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세워지고, 효녀의 묘는 운봉산 (반송동 소재) 밑에 있었다. 임란때 왜적이 그 무덤을 파헤쳤는데, 임란이 평정된 후 수사(水使)의 꿈에 김씨가 나타나 "저는 동래부 효녀 김씨로 불행히 저의 묘가 왜구의 파헤침을 입어 뼈가 드러난 지 오래이니, 원컨대 뼈를 거두어 묻어 주시기 바라옵니다."라고 했다. 수사가 놀라 깨어 이상히 여기고 다음날 탐문하여보니, 과연 효녀의 묘가 운봉산에 있었는데, 파헤쳐져 있었으므로 해골을 거두어 옛무덤에 잘 묻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그날 밤 김씨가 수사의 꿈에 다시 나타나 고맙다고 사례하였다 한다.
(『동래부읍지』에서 발췌 )

용당의 혈흔:

남구 용당동은 옛날에 큰 못이 있었고, 이 못을 둘러 싼 부근의 산세(山勢)가 용의 형상과 같다고 하여 용당(龍塘)이란 이름이 생겼다. 어느 해 김씨 문중이 중심이 되어 동민과 함께 용당과 신선대 앞을 절단하여 거랑을 만들고 전답(田畓)을 이루었는데, 못 도랑을 절단할 때 사토(沙土)에 혈흔이 묻어 나왔다고 하며, 그 일이 끝난 뒤 일년 안에 김씨 전문중(全門中)에서 장정(壯丁) 10여명이 무단히 병이 들어 죽었다고 한다.
(김의환, 『부산지방의 지명의 유래』에서 발췌)

이정헌공의 혼령: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에 부산에 첨사가 부임만 하면 어쩐 일인지 며칠 지나지 않아 급사의 변을 당하였다. 조정에서 첨사만 보내면 계속 급사의 변이 생기니 누구도 부산첨사 되기를 꺼렸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구성(舊城)을 정성(整城)하여 자성대로 본성을 옮기게 하고 구성지(舊城地)를 팔 때 동문못(東門池) 속에서 수많은 해골이 나왔다. 그래서 이 해골을 모아 자성대 아래에다 묻었다. 그랬더니 하루 저녁에 이 마을에 사는 한 노인의 꿈에 위엄 있게 갑옷을 입은 장수가 나타나 하는 말이 "나는 영천 조방장(助防將) 이정헌이다.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에서 정발 장군과 함께 부산진을 지키다가 전사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나의 이 공로를 아는 자가 아무도 없어서 마음속 섭섭하게 짝이 없다. 그래서 이 서러운 사정을 호소하려고 역대 부산첨사의 꿈에 나타났더니 모두가 소인이라 말도 하기 전에 죽어버리기에 애통한 감을 참지 못하는 바다" 라고 말하더니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뒷날부터 이 마을에 갑자기 병이 유행되어 급사자가 하루에 40여 명씩 생겼다고 한다. 이에 꿈을 꾼 노인이 이상하게 여겨 동래부사에게 꿈꾼 이야기를 하였더니, 당시의 부사 박명한공은 즉시 이정헌의 공로를 상소하여 좌승지의 관직을 내리게 하고, 몸소 이곳에 와서 기치(旗幟)를 갖추고 군고(軍鼓)를 울리고 제사를 크게 지내어 이정헌의 혼령을 위로했더니 그 후로는 무사했다고 한다.
(김의환, 『부산의 고적과 유물』에서 발췌)

정문도의 진정:

동래 정씨의 시조인 정문도는 고려 현종 때 동평현 안일호장(安逸戶長)이었는데, 흑암리(黑巖里, 지금의 양정동 북쪽)에 살고 있었다. 늙어서 퇴거(退居)하였는데, 뿔피리 부는 소리를 듣고 문득 하정(下庭)에 배복(拜伏)하여 손수가꾼 정근(정根)을 길가에 쌓아두고 굶주린 행인을 먹임으로써 사람들이 감동하여 진정사(賑정詞)를 지었더니, 후손이 다 현달(顯達)하여 조정에서는 세신(世臣)이 되고 고을에 있어서는 세족(世族)이 되었다 한다.
(『동래군지』에서 발췌)

정묘사 부처의 영험:

연제구 거제동의 서남쪽에 있는 화지산에 정묘사가 있는데, 이 절을 화지사 (華池寺)라 하기도 한다. 어느 해에 법당 안에 정씨 문중 사람들이 많이 모여 놀 때, 술을 먹고 담배를 피워 당내가 자못 시끄러운지라, 그러던 중 당내에 놀던 사람 전부가 갑자기 두통이 일어나고 전신이 아프므로 여러 의원을 불러 치료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그때 몇 사람이 "우리가 부처 앞에서 불손하게 놀아 이런 모양이니 정성 드려 불공을 한번 해보자"라고 하였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정성들여 불공을 올렸더니 모든 사람의 병이 일시에 나았다고 한다.
(김의환, 『부산의 고적과 유물』에서 발췌)

초읍동과 두구동:

부산지방에 동평현(지금의 당감동 일대)이 생긴 뒤 읍지(邑地)를 물색하기 위해 명사들이 오늘날의 초읍동을 둘러보았더니 산세가 좋고 지리가 음양에 맞아 이곳을 우선 읍지로 '초(抄 = 点을 쳐 놓음)'해 놓고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을까 하여 지금의 두구동으로 가보니 역시 산세가 좋아 '두고'보자 한 후에 지금의 동래에 들렀더니 동쪽에 학수대(鶴首臺)가 있고 남쪽에 지형이 대조포란형(大鳥抱卵形)이라 서울(당시 한양)의 산세와 같으므로 이곳을 읍(邑)을 정하였다. 그리하여 '두고' 보자고 한 곳을 두구동이라 이름 짓고, '초(抄)'해 놓은 읍을 초읍(抄邑 = 草邑)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김의환, 『부산지방의 지명의 유래』에서 발췌)
http://www.busan.go.kr/index.jsp (이상 부산시청 홈피에서)

수고하세요..

2005.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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