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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백범김구를 살해한 안두희
yjj4**** 조회수 18,673 작성일2008.07.13

1)김구를 살해한 안두희는 누구인가요?

2)안두희가 김구를 살해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ㄳㄳ내공 팍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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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1949년 6월 백범을 암살하여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 잔형면제를 받았으며 정치적 의혹에 대해 김구선생 살해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족하자 잠적하였다. 남은 여생을 은신생활로 보내다가 국회 법사위 백범 김구선생 암살진상조사 소위원회에서 증인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끝내 배후를 밝히지 않았으며 박기서에게 피살되었다.

 

 

 

 

때는 1948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는 대대적인 총선거가 일어납니다

(이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좌익 세력은 4월 3일날 제주도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미 3.8선이 그여져 있었기 때문에 북한은 참여하지 않죠

남한노동당도 마찬가지 입니다..그들은 남한에 있는 북한 잔당들이라 봐도 상관없으니까

남북협상파도 참가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총선거를 하고

남한만의 대통령이 나온다면 결론적으로 북한은 배제한 셈이 되기 때문에

한반도가 영원히 분단될거라 생각했죠(굉장히 현명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무대뽀 이승만은 미국 세력을 등에 업고 계속 진행합니다

 

같은 해 7월 17일에는 헌법이 공포되고(제헌절의 기원입니다)

같은 해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선포됩니다(8.15는 광복만 있는게 아닙니다)

같은해 9월 19일(맞는가 몰라)에는 북한에서 김일성 공화정부가 수립되구요

UN은 당연히 이승만의 정부만 한반도에서 합법적이라고 인정합니다

김일성의 사회주의 전파를 막기 위해서겠죠?

그리고 좌익은 또 10월 19일날 여수와 순천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여수순천 10.19사건)

 

(우리의 위대한)김구 선생님은 끝까지 반대를 합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한반도가 영원히 분단된다 그러시면서

북한의 김일성을 방문하기까지 합니다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임마(김구선생님)하는 짓이 눈꼴시죠

남한에 엄연히 자기 정부가 있는데

북한에 갔다 오지를 않나, 남한 유일의 정부를 부정하고 있지를 않나

UN까지 인정한 정부를 지 혼자 반대하고 있지를 않나

결국 이승만은 김구를 없앨 계획까지 합니다..

그로인해 1949년 6월 16일 김구는 안두희에게 총으로 사살당합니다

 

2 )

위와 같이 김구가 반대를 심하게 하여 이승만이 김구를 사살할 계획을 해서 입니다

2008.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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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구선생님께서 태어나신 날

1876년 7월 11일 (황해도 해주)

 

2. 김구선생님께서 돌아가신 날

 1949년 6월 26일

 

3. 김구선생님의 자, 호, 본관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였으나 구(九)로 개명 

 

4. 김구선생님의 가족 관계

 

아버지-김순영

어머니-곽낙원

아내-최준례

딸-김화경(일찍 죽음)

아들-김인/김신

 

 

5. 김구선생님의 별명

 '아기 접주'

 

6. 김구선생님의 생애

1876.1세 황해도 해주읍 백운방 텃골(현 황해도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파산동)에서 출생하다(8.29), 아버지 김순영, 어머니 곽낙원, 아명은 창암(昌巖)

1878. 3세 천연두를 앓다.

1880. 5세 강령 삼거리로 이사하다.

1882 . 7세 해주 본향 텃골로 다시 이사하다.

1884. 9세 조부상을당하다. 한글과 한문을 배우다.

1887. 12세 한학을 배우다.

1889. 14세 [통감], [사략] 병서를 읽다.

1890 . 15세 학골 정문재의 서당에서 [당시]. [대학]을 배우는한편 과문을 익혀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다.

1892. 17세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임진경과에 응시하고자 해주로 갔으나, 매관매직을 일삼는 당시의 부패한 과장을 보고 실망하여 돌아오다. 풍수와 관상 공부에 몰두하다.

1893. 18세 동학교도 오응선의 종지를 듣고 동학에 입도, 포교에 힘을 기울이다.  이름을 창수(昌洙)로 고치다.

1894. 19세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만나 접주라는 첩지를 받고 의암 손병희를 만나다. 동학교도들과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다. 동학군 토벌을 위해 일어난 진사 안태훈(안중근의사의 부친)과 교전하지 않기로 밀약을 맺고 구월산으로 이전하였으나, 이동엽부대의 습격을 받아 대패하다. 신천 청계동에 있는 안태훈의 의려소로 가서 은거하다.

1895. 20세 진사 안태훈의 집에서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그의 훈도를 받다. 김형진과 함께 만주를 시찰하고 김이언의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강계성을 습격했으나 실패하다.

1896. 21세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중위 쓰치다를 살해하다(2월). "국모명 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살해"하였다는 포고문을 길거리에 붙이고 귀가하다. 3개월 후 체포되어 해주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

1897. 22세 해주감옥에서 인천 감리영으로 이감되다.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황제의 특사 명령이 내려지다. 그러나 일본 공사 하야시의 압력으로 출감하지 못하다.

1898. 23세 탈옥하다(3월) 전국을 방랑하다가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다(법명 원종).

1899. 24세 마곡사를 떠나 해주 수양산 신광사부근의 북암이라는 암자에 기거하다. 평양 대보산 영천암의 방주가 되어 지내다가 환속하여 귀향하다.

1900. 25세 강화에서 김두래라는 가명으로 지내며 아이들을 가르치다.

1901. 26세 부친상을 당하다(2월) 삼촌 김준영을 도와 집에서 잠시 농사를 짓다.

1903. 28세 약혼녀 여옥이 죽다. 기독교에 입교하고, 장연읍 사직동에 봉양학교를 설립하고 신문화 선전과 애국, 애족사상을 고취하다. 도산 안창호의 누이 안신호를 만나 약혼하였으나 파혼하다.

1904. 29세 신천 사평동 최준례와 결혼하다.

1905. 30세 을사보호조약 체결 후 진남포 의법 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전국대회에 참가하고 이준 이동녕 등과 을사보호 조약의 철회를 상소하다. 황해도로 돌아가 서명의숙교원이 되다.

1906. 31세 해서교육총회 학무위원이 되어 학교설립을 적극 추진하다.

1907. 32세 장녀 화경 출생하다.

1908. 33세 안창호 등 애국지사 lO4명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참여하다. 안악에 양산학교를 세우다.

1909. 34세 황해도를 순회하며 신교육 운동(향산학교 교원)과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배일운동을 전개하다. 10월 26일 안중근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사살 사건 관련자로 몰려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불기소로 석방되다. 재령 보강 학교의 교장으로 교육사업에 열중하였으며, 이완용을 찌른 이재명과 노백린을 만나다.

1910. 35세 서울에서 열린 신민회 비밀회의에 황해도 대표로 참석하다. 이 회의에서 만주 무관학교 설립을 결의하다.(11월)

1911. 36세 안명근사건으로 체포되다(1월). 서울로 압송되어 흑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징역 17년을 언도받은 후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다.

1912. 37세 대사면으로 8년 감형. 일본 왕 명치 처의 사망으로 5년 감형되다.

1913. 38세 일제의 국적에서 이탈하려는 의도로 옥중에서 이름의 구(龜)자를 구(九)로 바꾸다.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하자는 뜻에서 백정(白丁)의 백(白)과 범부(凡夫)의 범(凡)자를 따서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하다.

1914. 39세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감옥으로 이감되어 매일 중노동에 동원되다.
장녀 화경 죽다. 가출옥으로 석방되다(7월)

1915. 40세 동산평 농감을 맡다. 소학교를 개설하여 교원 생활을 하다.

1917. 42세 딸 은경이 죽다.

1918. 43세 맏아들 인(仁) 태어나다.(11월)

1919. 44세 3.1운동 직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에 취임하다.

1920. 45세 부인 최준례 여사가 맏아들 인을 데리고 상해로 건너오다.

1922. 47세 어머니가 상해로 오다. 상해에서 둘째 아들 신(信)이 태어나다.

1923. 48세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취임하다. 김구 명의로 국민대표대회 해산(6월)

1924. 49세 부인 최준례 사망하다.

1926. 51세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다.

1927. 52세 임시정부의 헌법개정으로 국무위원 겸 재무장에 춰임하다.

1928. 53세 자서전[백범일지]를 쓰기 시작하다.

1929. 54세 [백범일지]탈고, 상해 교민단장이 되다.

1930. 55세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선되다. 한국독립당을 조직하다.

1931. 56세 특수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독립투사를 양성하다.

1932. 57세 도쿄에 이봉창의사를 보내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지게 하다.(1월)
윤봉길의사에게 폭탄을 주어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지게 하다.(4월) 한국독립당 등 5개 단체 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하다. 조소앙등과 일경피해 가흥으로이주하다(5월)

1933 . 58세 강소성 가흥으로 피신하다. 남경에서 장개석주석을 만나 하남성 낙양군관학교 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기로 합의하다(5월)

1935. 60세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하다(이사장 김구)

1937. 62세 7월 중일전쟁의 발발로 일제의 폭격이 심해지자 임시정부를 강소성 진강으로 옮겼다가 다시 장사로 옮기다.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일명 광복진선)을 결성하다.

1938. 63세 남목청에서 열린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의 3당통합회의 석상에서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아 중상을 입다(5월)

1939. 64세 임시정부 중경으로 옮기다.어머니 곽낙원 여사 사망하다.(4월)

1940. 65세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3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발족시키고 집행위원장에 추대되다. 또한 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출되다.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하다.

1941. 66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름으로 5개항의 대일 선전포고문을 발표하다.

1942. 67세 임시정부와 중국 미국 영국 소련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다.
간디에 '일본의 감언이설에 속지 마시오' 내용의 전보 보내다(8월)

1943. 68세 미국 O.S.S와 합작으로 국내침투를 위해 광복군 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진공 작전을 계획하다. 3.1절 기념대회에서 '임정에 국제지위 주기를' 연설하다.(3.11) 장개석과 회견갖다(7.26) 임시정부 주석직을 사직하고(8.3l) 다시 복직 집무시작하다.(9.21)

1944. 69세 2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다. 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다.

1945. 70세 맏아들 인이 사망하다(28세) 8월 15일 저녁에 성서성에서 조국해방의 소식을 듣다. 11월 5일 중경을 떠나 개인자격으로 환국(11.23)하여 첫 공식 기자회견에서 '건국의 포부와 방책'을 밝히다(11.26) 이승만, 김규식과 함께 돈암장서 회견을 갖다(12.1)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소식을 접하고 반탁운동을 전개하며 '3천만에게 고함' 방송하다(12.27 엄항섭 대독)

1946. 71세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다(2.1)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총리에 취임하다.(2.14)
브라운 군정장관과 회동, 임정에 정권 이양 요청하다(3.5) 우익합당관련 이승만과 함께 '어떤 정당에도 불참' 선언하다(4.9) 민정시찰에 나서 인천의 각 공장 시찰하다(4.14,15)
윤봉길 추도식 김규식등과 함깨 참석하다(4.29) 심장병으로 용산 제1병원에 입원하다(5.1)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유해 일본에서 찾아 효창원에 봉안하다.(6.30) 대한독립청년단 발족하여 부총재에 선출되다. 총재에 이승만(9.12) 하지중장과 요담하고 좌우합작에 찬성, 좌우합작 7원칙 발표(10.13)

1947. 72세 [나의 소원]을 발표하다. 우익반탁위원회를 구성, 위원장을 맡다(1.26)
2.8성명 '3천만동포에게 고함' 발표하다(2.8) 한독당 간부회담서 한독. 한민 합당 제의하다(2.26)  건국실천원양성소를 개소하다(3.20) 이승만과 함께 '공위협의에 참가보류' 성명 발표하다(5.22) 이승만과 함께 '공위참가는 각자의사에 따르기로 공동성명 발표하다(6.5)
서재필 환영회 준비위원 맡다(6.24) 여운형 암살 관련 담화 발표하다(7.22) 비상국민회의 43차 임시회의서 부주석 유임되다(9.21) 26청년단체 통합, 대동청년단 결성, 부총재 춰임하다(9.21) '정부수립 이승만과 동일 단정수립 반대' 담화 발표하다(12.1)

1948. 73세 유엔한위, 김구등 조선인 지도자와 협의 개시하다(1.26) '미소양군 철수후에 자유선거 실시가능' 담화 발표하다(1.27)  한위 협의 관련 이승만, 김규식, 조소앙 등과 협의하다(1.28) 유엔 한위 협의후 '철병후 선거실시' 의견서 제출하다(1.30) 김규식과 함께 유엔한위에 남북회담 소집을 요청하다(2.6)  민의,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방안에 대한 담화 발표하다(2.8)  김구등 3영수 19일 하지와 북조선 정권수립설에 대해 요담하다(2.19) 김규식과 함께 김일성, 김두봉에 남북회담 제의하다(2.25) 이북애국단체연합, 재남이북인대회서 고문으로 추대되다(3.10)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항구, 홍명희등과 총선거 불참 성명 발표하다(3.12) 남북협상 관련 담화 발표하다(3.26) 김구, 김규식 평양회담 참가 성명서 발표하다(4.1) 남북협상 출발전 성명 '우리 지표는 통일뿐' 성명발표후 38선 넘어 평양도착하다(4.20)
김일성등 15대표와 구체적 협상원칙 토의하다(4.30) 김규식과 귀경, 남북협상결과 공동성명 발표하다(5.5)  소련군 철군관련 '영토내 외국군 철수' 담화발표하다(6.14) 기자회견 통해 북조선서 2차 남북회담 제의하다(7.10) '단독정부에 불참' 담화 발표하다(7.19) '반탁과 철군은 동일'하다는 주장담은 담화 발표하다(10.19)

1949 . 74세 한독중집서 연설에서 '서울시 통일위한 남북협상 희망한다' 고 밝히다(1.16) 성금을 내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우다(1.29) '미소 철군협의는 평화통일의 진전' 담화 발표하다(4.19) 마포 염리동에 창암공민교 개교하다(5.17) 경교장서 안두희에게 피습받아 절명하다(6.26)  영결식 효창원에서 국민장으로 치러지다(7.5) 경교장 반환후 김신 충정로 금화장으로 이사하다(8.26) 건국실천원양성소 해산하다(8.23)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대한민국장이 추서되다(3.1) 
 

 

7. 김구선생님에 대해 기타 등등..

김구선생님이 피살되지 않았다면..과연 통일은 될수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2008.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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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백범김구선생을 살해한 사람 안두희맞습니다.

질문2)통일을 위한 운동을 하다가 결국!전쟁까지 나가서 운동을 하다가 백범김구선생이 화가나서 살해를 했습니다.

이상으로 허전한 답변이었습니다.-뮤직조아-

 

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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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통치에 이승만 김구 둘다 반대했는데 이승만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곧 깨달았고 최선의 방법을 찾으려 애쓴 반면 김구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3천만 동포에게 고함 미국 철수해라 걍 말로만 떠들어댈 뿐이지 맨날 성명서나 담화만 발표하고 대안도 없이 남한 단정수립이라고 비난하고 반대할 뿐 어떤 방법도 내놓지 못하다가 여운형이 암살되자 부랴부랴 남북협상하러 북한에 갑니다. 

김일성이 이미 공산국가를 만들기위한 북조선인민위원회와 군조직 인민군까지만들어 진행되고 남북연석회의 개최한건데 뻔히 바보도 아니고 김구가 참석해 김일성과 그의 가족들까지 만나고 오고 김일성을 돕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북한 현실을 보고왔고 남한을 침략할 것을 예상했으면서 미군 철수를 주장합니다. 

해방전과 달리 해방후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민국의 건국에 도움이 된것이 아니라 조선인민주의공화국 정권에 일조만한 것으로 보이는데 김구는 통일을 강력히 원했고 사회주의 이념을 선택해 북한이 내려와서 서울 함락해서라도 통일을 원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역시 통일을 원하나 이미 미국에서 경험한 민주주의를 원했기 때문에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을 맡아달라고 했을때도 거절했고 한국민주당의 영수직도 거절할만큼 소련이나 북한 공산주의에 강경한 입장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이 패망할 것을 알고 있었고 해방 직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 민주주의 국가를 보면서 민주주의 필요성을  생각하고 공산주의가 좋지 않다는 것을 미리 꿰뚫어 보고 판단했던것 같습니다. 이 당시에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잘 살았습니다.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소련이나 공산주의에 매료되거나 미국의 정치가등중에서도 공산주의에 흔들린 사람들이 있었을 정도로 사회주의가 얼핏보기에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소련도 해체되었고 북한도 그렇고 세계적으로 공산주의국가가 끝에는 잘살지 못하니 민주주의가 옳은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니 김구가 김일성 정권 통치에 일조하고 미군 철수를 주장했겠죠. 미군이 철수된뒤 625전쟁이 터지면 빠르게 서울을 점거할 수 있으니까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소련 사이에서 정 안되면 남한만이라도 민주주의로 세우려 한걸로 보입니다. 

안두희가 직접 살해했으나 누군가 사주한건지 이승만이 사주했는지 미국이 죽인건지  누군지 알수없고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안두희가 단독범행이라고 주장하며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아서 모릅니다.
이승만과 김구는 원래 함께 독립운동하던 사이였고 독립운동할 때 항상 뜻이 같았으나 해방 후 각자 다른 이념을 선택하면서 갈라진 것 뿐이라 아닐 듯 하고 맞을수도 있지만 모르겠습니다. 어쨋거나 김구를 싫어하는 세력이 사주했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죽였겠죠. 안두희 개인의 감정이었는지 사주의 의한 것인지 알수 없습니다.   

안두희는 원래 북한사람인데 월남했고 서북청년회에 들어가 활동하였고 미국첩보요원으로 일했으며 반공주의자였습니다.

상세내용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는 1917년 평북 용천군에서 태어나 신의주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떠나 1939년 메이지대(明治大) 전문부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3학년 때 대학을 중퇴,1941년 중국으로 건너가 안휘성 회남(淮南), 강소성 서주(徐州) 등을 전전하며 사업을 했다. 1945년 1월 귀국하여 용암포 군청에 근무하기도 했다.
안두희의 집안은 고향 일대에서 손꼽히는 갑부였다. 해방 후 북한에서 토지개혁이 실시되자 그의 집안은 몰락했다. 1947년 빈손으로 월남한 그는 서북청년회 종로지부 총무부장과 중앙 총무부장을 지냈다. 안두희의 행적을 기록한 자료들을 보면 이 시기에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 및 요원, 우익 테러조직인 백의사(白衣社)의 자살특공대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1948년 11월 육군사관학교 특8기로 입교, 1949년 육사를 졸업하고 포병사령부 연락장교(소위)를 맡았다.
요약하자면 안두희는 일제 시대 때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인텔리 출신이고, 국내외에서 다양한 사회 경험을 쌓은 인물이다. 그는 부유한 지주 집단 출신으로 반공정신이 투철한 월남 실향민이었다. 

그런 그가 김구를 암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2009년 11월 3일 국사편찬위원회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사실이 미 국립공문서 보존기록관리청 문서를 통해 처음으로 밝혀졌다고 공개했다.
미 제1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조지 실리 소령이 백범 암살 직후인 1949년 6월 29일 작성한 이 문서는 ‘김구-암살관련 배경정보’란 제목 아래 “나는 그를 정보원으로, 후에 한국 주재 CIC 요원으로 알고 있었다”며 “안두희는 백의사 혁명단 1소조 구성원으로 백의사지도자인 염동진이 명령을 내리면 암살을 거행하겠다는 피의 맹세를 했다”고 기록돼 있다. 실리 소령은 1946년부터 1948년 12월까지 한국 주재 CIC 파견대에서 근무한 한국통으로, 20개월간 염동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의사는 낙양군관학교 재학시절 백범 김구와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던 염동진이 장제스 휘하의 반공 결사단체인 남의사(藍衣社)를 모방하여 1944년 11월 서울에서 월남한 청년·학생들이 중심이 돼 조직한 반공 결사조직이다. 이 단체는 반공 테러활동과 함께 미군 CIC와 연계 하에 대북 첩보활동을 펼쳤다.
백의사는 1946년 3월 평양역 광장에서 열린 3·1절 기념대회에서 김일성 암살을 기도하고, 북한지역 토착 공산주의자인 현준혁을 암살했다. 실리 소령은 “장덕수와 여운형의 암살범들도 이 지하조직의 구성원으로 알려져 있다”고 적었다.
국사편찬위가 공개한 ‘실리 보고서’에 의하면 김구가 남북 연석회의에 다녀온 후 연공적인 길을 걷고 있다며 ‘큰 나무인데 공산주의라는 벌레가 꼬이고 있다’는 백의사 측의 비판적 발언이 기록돼 있어 김구가 이념 투쟁 과정에서 우익에 의해 살해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또 하나 ‘실리 보고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1948년 여순사건 진압부대였던 한국 4연대가 여순 반란자들과 관련돼 있었으며, 이승만 정부와 북한 정권과도 다른 파시스트적인 정부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 정부의 수반으로 김구를 옹립하려 했다는 기록이다. 말하자면 김구가 군부 내 반이승만 세력과 손잡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혐의가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사주했을 가능성이 제기된 백의사 단장 염동진은 누구인가? 

염동진은 1909년 경기 파주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1932년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했다. 이 학교의 한국 학생들은 김구 계열과 이청천 계열로 나눠져 있었는데 염동진은 이청천 계열로 분류되어 김구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안두희가 부자로 북한에서 갑부에 손꼽힐정도로 잘 살고 있다가 사회주의 이념때문에 재산을 전부 빼앗기고 월남해 공산주의가 너무 싫었고 근데 김구가 북한갔다오더니 공산당을 지지하는 것 같자 죽인것 같습니다. 어차피 단독으로라도 죽이고 싶었는데 안두희 6일전 이승만 대통령을 접견해 이승만대통령이 사주한것 아니냐라는 의혹도 있지만  미국이 소련과 견제중이었기 때문에 만일 김구가 눈엣가시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전부 범행 공범일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2018.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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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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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pfk****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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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는 육군소장으로 김구에게 사랑을 독차지 했었습니다.

하지만 안두희는 김구를 배신하였지요(뮈야 나쁜놈)

안두희가 김구를 살해한 이유:

그냥은 아니고 이승만박사님께서 돈을 주어 유혹

한것같습니다.

 

2008.09.30.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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