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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김구와 안두희에 대해서.. 알려 주센~
tnql**** 조회수 4,815 작성일2007.08.10

저기요! 김구랑 안두희가 아는 사이이에요??? 친구라면 암살 하면 안되죠!!!

 

그래서 안두희는 감옥에서 처형했어요~? 아니면, 감옥에서 죽었나요??

 

(이런걸 물어서 죄송하지만..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 좋은 친구사이~ 부탁 드려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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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
지존
한국사, 사회, 도덕 39위, 세계사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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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두희는 김구와 인연이 있었죠. 김구의 한국독립당에 입당했었거든요.

 그런데 얼마 후인 1949년 6월 26일 그는 김구가 머물던 경교장으로 찾아가서 김구를 총 4발로 죽입니다. 김구의 라이벌이었던 이승만 쪽에서 시켰을 가능성이 많다고 하죠. 그는 이후 종신형 선고를 받았지만 이승만 정권의 보호를 받았는지 3달 만에 15년형으로 감형되고 6.25전쟁이 터지자 장교로 복귀해 (소위였습니다.)  얼마 후엔 대위가 됩니다.

 그 후 강원도에서 공장을 경영하다가 4.19 혁명 이후 김구선생 살해 진상규명 위원회가 만들어지자 잠적합니다. 얼마 후 이 위원회의 김용희란 사람한테 잡혀 경찰에 넘겨졌지만 공소시효(범죄를 저질렀어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범죄를 저지른 사람한테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가 다했기 때문에 풀려나고 1965년엔 곽태영이란 사람한테 칼로 찔리기도 했지만 어떻게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후 오랫동안 이름을 바꿔 은신생활을 했는데 1987년 민족정기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잡혀 몽둥이를 맞습니다. 91년과 93년에도 권중희에 의해 험한 꼴을 당하고 그 과정에서 김구선생 묘에 가 참배를 하기도 했죠.

 그리고 1996년 10월 집에 쳐들어온 버스기사 박기서에 의해 목숨을 잃습니다. (몽둥이에 맞아죽었죠.) 박기서는 이후 99년 석방돼 지금 버스기사를 하고 계신다네요.

 

 도움이 되셨기를....

2007.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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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hall
중수
수학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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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九선생 암살 안두희는 美방첩대 요원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 시해사건의 주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사실이 미 국립공문서 보존기록관리청 문서를 통해 처음으로 밝혀졌다고 3일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했다.

편찬위측은 해외사료 이전사업의 일환으로 미국에 파견한 방선주 박사와 정병준 박사가 미국 정부측에 수년 전부터 비밀해제를 요구해 열람하게 된 「김구:암살에 관한 배후 정보(Kim Koo:Background Information Concerning Assassination)」란 제하의 미 육군 정보국 문서파일(RG 319, Entry 85A, 1949년6월29일 작성)에 이같은 사실이 적시돼 있다고 밝혔다.

이 문서에 따르면 48년 말까지 CIC요원으로 한국에 근무했던 미 육군 소령이 이후 미 본토로 귀환, 미 1군 정보과장으로 근무중 1949년 김구 선생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이 문서를 작성했으며, 이 문서는 신뢰도면에서 A, B, C, D, F(각 1, 2, 3, 4등급으로 세분)등급 중 A2등급을 받아 신뢰도가 높다는 미군 자체평가가 붙어있다고 편찬위측은 말했다.

편찬위측은 “이 문서에 김구 선생 시해사건 당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빠져있어 미 방첩대가 시해사건의 배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작성자는 한국 근무 당시 안두희를 잘 알고 있었고, 안씨가 CIC를 위한 정보원으로 일하다 나중에 정식 요원이 됐다고 기록했다”고 말했다.

또 42년 결성된 최대 우익 청년단체였던 ‘백의사’의 단장 염동진 앞에서 안두희가 ‘죽음으로써 활동하겠다’고 맹세했으며, 김구 선생이 염동진과도 잘 아는 사이라는 사실도 새로 밝혀졌다고 편찬위측은 말했다. 이 문서에는 김구 선생이 남북 연석회의에 다녀온 후 연공적인 길을 걷고 있다며 ‘큰 나무인데 공산주의라는 벌레가 꼬이고 있다’는 백의사측의 비판적 발언이 기록돼 있어 김구 선생이 이념투쟁 과정에서 우익에 의해 살해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편찬위는 말했다.

이밖에 편찬위는 “이 문서에는 1948년 여순사건 진압부대였던 한국 4연대가 여순반란자들과 관련돼 있었으며, 이승만 정부와 북 정권과도 다른 파시스트적인 정부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 정부의 수반으로 김구 선생을 옹립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미국측의 여순사건에 대한 시각을 엿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안두희는 지난 96년 10월 23일 인천시 중구 신흥동 동영아파트 502호 자신의 집에 침입한 버스운전사 박기서(53·97년 3년형 확정 후 복권)씨가 휘두른 방망이에 머리를 맞고 살해됐다. 당시 안두희는 79세였다.



"김구선생 암살범, 미군 정보원 활동"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이성무)는 4일 기자회견을 열고 “백범 김구 시해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요원이자 우익단체인 백의사 특공대원이었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했다”고 밝혔다. 미 제1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조지 실리 소령이 백범 암살 직후인 1949년 6월 29일 작성한 이 문서는 ‘김구-암살관련 배경정보’란 제목 아래 “나는 그를 정보원으로, 후에 한국 주재 CIC 요원으로 알고 있었다”며 “안두희는 백의사 혁명단 1소조 구성원으로 백의사 지도자인 염동진이 명령을 내리면 암살을 거행하겠다는 피의 맹세를 했다”고 기록돼 있다. 실리 소령은 1946년부터 1948년 12월까지 한국 주재 CIC파견대에서 근무한 한국통으로, 20개월간 염동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위원회는 “백의사는 염동진이 해방 직전 평양에서 조직한 대동단을 모태로 1945년 11월 서울에서 월남한 청년·학생들이 중심이 돼 조직한 단체로, 반공 테러활동과 함께 미군 CIC와 연계하에 대북 첩보활동을 펼쳤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백의사는 1945년 9월 현준혁(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장)을 암살했고, 1946년 3월에는 신익희와 연계하에 대북 테러공작을 전개, 김일성·김책·강양욱 암살을 시도했다”고 밝혔다. 실리 소령은 “장덕수와 여운형의 암살범들도 이 지하조직의 구성원으로 알려져 있다”고 적었다.

염동진은 1932년 중국 낙양군관학교를 졸업, 중국군에서 활동하다가 관동군에 체포돼 첩보요원으로 변절한 인물로, 6·25당시 북한군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성무 위원장은 “현재로선 미국이나 백의사가 백범 암살에 개입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며 “관련자료를 계속 발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사편찬위 자료공개 "백범암살 배후는 미국"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의 암살범인 안두희(安斗熙·96년 사망)가 미군 방첩대(CIC)의 정보원이자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우익 청년단체인 백의사(白衣社)의 특공대원이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이로써 미국이 백범 암살에 개입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짙어지는 한편, 백의사의 단장인 염동진(본명 염응택)이 이를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또 장덕수와 여운형을 암살한 범인들도 백의사일 것이라는 자료도 나왔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국외사료 조사작업의 일환으로 미국에 파견한 정병준 방선주 박사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보관된 문서철에서 ‘김구-암살에 관한 배후 정보(Kim Koo-Background Information Concerning Assassination)’라는 제목의 문서를 발견했다고 4일 밝혔다.

이 문서는 1948년 12월까지 남한 주둔 CIC 파견대에서 근무한 조지 E 실리 소령이 1949년 6월 백범 암살 직후 본국에서 작성해 미국 육군정보국에 제출한 A4용지 5장 분량의 보고서로 비밀등급 3급, 신뢰도 A2를 책정받은 최상급 신뢰도의 문건이다.

실리 소령은 보고서에서 “안두희는 백의사의 특공대원으로, 나는 그를 한국주재 CIC 정보원으로, 뒤에 한국주재 CIC의 요원으로 알고 있었다”면서 “그는 염동진이 암살 명령을 내리면 누구든 죽이겠다는 피의 맹세를 했다”고 밝혔다.

백의사는 낙양군관학교 재학시절 백범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던 염동진이 장제스 휘하의 반공 결사단체인 남의사(藍衣社)를 모방해 1942년 8월 창설한 반공 결사조직이다. 백의사는 1946년 평양역 광장에서 열린 3·1절 기념대회에서 김일성 암살을 기도하고, 북한지역 토착 공산주의자인 현준혁을 암살하기도 했다.

실리 소령은 또 “2명의 저명한 한국 정치인인 여운형과 장덕수의 암살도 백의사 구성원들의 소행으로 알려져 있다”고 밝혔다.

국사편찬위원회측은 “실리 소령이 한국을 떠난 지 6개월 후에 백범이 암살됐기 때문에 미국이 백범 암살에 직접 개입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암살배후 규명이 진일보하게 된 것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신용하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안두희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그동안의 심증을 확인해주는 물증”이라고 말했다.

▼백의사단장 염동진은 누구▼

이번 자료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인물은 염동진(본명 염응택). 백의사 단장을 맡았던 그가 백범 암살을 사주했을 가능성이 제기됐기 때문.

고문당한 후유증으로 눈이 멀어 ‘맹인장군’으로 불렸던 염동진은 1909년 경기 파주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상하이에 건너가 1932년 중국 국민정부의 군사교육기관인 낙양군관학교을 졸업했다. 이 학교의 한국 학생들은 김구 계열과 이청천 계열로 나눠져 있었는데 염동진은 이청천 계열로 분류된다. 이로 인해 김구와 평소 사이가 나빴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광복 이후 공산주의자에 대한 각종 테러활동을 벌였으며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살해당했다. 실리 소령은 보고서에서 그에 대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나 미국인과 인터뷰할 때는 통역을 활용해 신분을 위장할 만큼 비상한 지략의 소유자”라고 회고했다.

☞ 김구 암살 관련 美 정보문건 전문



"백범 암살범 안두희는 미군정보요원"

1949년 6월26일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는 주한 미군방첩대(CIC) 요원이었음이 4일 밝혀졌다.

또한 안두희에게 백범 암살을 지시한 인물은 해방 직후에 활발한 대(對) 공산주의 테러 활동을 벌인 극우테러리스트 집단인 '백의사'(白衣社) 단장 염응택(일명 염동진)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드러났다. ▼관련기사▼

- 김구 암살 관련 美 정보문건 전문


이런 사실은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와 국사편찬위원회 정병준 박사가 최근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George E. Cilley) 소령이 백범 암살 3일 뒤인 1949년 6월29일에 작성을 하고 그 해 7월 1일 미 육군 일반 참모부 정보국장 앞으로 보낸 문건을 미국 국립문서보관서에서 발굴해 이날 국사편찬위원회를 통해 공개함으로써 밝혀졌다.

안두희가 CIC 요원으로 드러남에 따라 백범 암살에 미국이 개입돼 있다는 그동안의 의혹은 사실일 가능성을 한층 짙게 해주고 있다.

이 문건은 방선주 박사팀이 미 정부측에 대해 비밀해제를 요구해 최근 열람하게된 '김구:암살에 관한 배후정보(Kim Koo : Background Information concerning assassination)'란 제목의 미 육군 정보국 문서파일에 들어있으며 3급 비밀문서(confidential)로 분류돼 있다.

이 문서에서 실리는 "안두희(Ahn Tok Hi)는 한국인 청년으로 이 비밀조직(=백의사)의 구성원이자 이 혁명단 제1소조 구성원이다"라면서 "나는 그를 (한국주재 CIC의) 정보원(informer)으로, 뒤에 한국주재 CIC의 요원(agent)으로 알고 있었다"라고말하고 있다.

실리는 또한 안두희가 "염동진이 명령을 내리면 암살을 거행하겠다는 피의 맹세를 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고 있는 '백의사'는 해방 직전인 1944년 11월 무렵 신익희 주도로 서울에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사무국'이 모태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해방 뒤에는 각종 극우테러리즘 활동을 벌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1946년 3월1일 평양역 광장에서 소련 공산당 주요 인물과 김일성, 김책, 최용건,김두봉을 비롯한 나중의 북한 정권 핵심 인물을 비롯해 7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3.1절 기념행사장에서 폭탄투척사건을 일으켰으며, 북한지역 토착 공산주의자의 대표자인 현준혁을 암살하기도 했다.

이 단체 핵심인물인 염응택 또한 그 전모가 제대로 드러나지는 않고 있으나 이번 실리 문건에 따르면 가장 '악질적인'(The Most Malignant) 인물로서 '맹인장군'(Blind General)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백의사를 통해 각종 청부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나 있다.

이와 관련 실리 문건은 "두 명의 저명한 한국 정치인인 장덕수와 여운형의 암살범들도 이 지하 조직(백의사)의 구성원으로 알려져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안두희가 각종 테러와 암살 사건에 개입된 백의사 골수멤버로 드러남에 따라 백범 암살 또한 염응택의 지시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단체는 장개석이 항일전쟁 때 조직한 테러리즘 단체인 '남의사'를 본떠 '백의민족의 남의사'라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으며 신익희와 유진산이 지도하는 가운데 염응택이라는 인물이 단장을 맡았다.

실리 문건은 또한 염응택이 중국에서 활동 당시 김구의 밀고로 중국 공산당에 넘겨져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맹인이 되었다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백범 암살이 그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면 이런 개인적인 원한도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연합뉴스]

동아일보 2001년 9월 4일



“안두희는 美방첩대 소속”…국사편찬위 자료 오늘 공개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 암살범인 안두희(安斗熙·96년 사망)가 미군 방첩대 소속이었으며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선생의 암살에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단체의 단원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사편찬위원회는 4일 이 같은 내용을 뒷받침하는 사료를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국사편찬위 관계자는 3일 “안두희는 백범 선생 암살 당시 국군 장교였으나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해 그 배후가 베일에 가려있었다”면서 “이 사료는 안두희가 활동했던 단체를 밝히는 최초의 사료”라고 말했다.

이 사료가 미국이 백범 암살사건에 개입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사료를 계기로 백범 암살에 미국이 개입했는지 여부가 관심사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200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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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낸들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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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n****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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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제가 다른것들도 조금알려 드리죠.제가 형광펜으로 줄그어놓은것이 님이 질문하신것의 답변입죠.채택부탁1. 김구선생 은거추모비 

 

◎ 명칭 : 김구선생 은거추모비


◎ 건립년도 : 1990. 3. 1


◎ 건립자 : 김구선생기념사업추진위원회


◎ 실제관리자 : 득량면사무소

 

◎ 소재지 : 전남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226-3(쇠실휴게소내)

 

◎ 관련행사 : 
 
▶ 건립취지 : 

백범 김구선생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제를 응징코자 일본장교를 살해하고 옥고중 1898.3.9 인천감옥에서 탈옥하여 이곳 쇠실에서 달포여를 은거하며 동국사기를 가르치며 민족정기를 일깨웠고 떠날때 이별의 아쉬움을 담은 이별난시를 남긴후 중국으로 망망하였고, 해방후 귀국하여 쇠실의 집집마다 친필휘호를 써보내 은거의 깊은 인연을 이어갔고 백범 김구선생 공적및 애국정신을 받들고자 함.

 

▶ 답사 교통편: 승용차 거리: 45Km        소요시간: 40분


▶ 인근지역유적지 : 
- 명칭: 최대성장군 충절사    거리: 15Km         접근방법: 자가용    소요시간: 10분


▶ 인근관광지 : 
- 명칭: 낙안민속마을    거리: 24Km      접근방법: 버스      소요시간: 30분


▶ 인근지역행락시설 : 
- 명칭: 율포해수욕장      거리: 30Km    접근방법: 버스      소요시간: 40분

 

▶ 지역특산물 : 
- 특산물: 방울토마토,느타리버섯,참다래,간척지쌀           구입방법: 직거래 판매, 시장구입

 

 

2. 백범김구기념관

백범 김구의 삶과 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 안에 건립한 기념관.

설립연도2002년 10월 22일
소재지서울 용산구 효창동 255 효창공원
규모부지면적 5,552평, 연건평 2,929평
관람시간3~10월(오전 10시~오후 6시), 11~2월(오전 10시~오후 5시), 매주 월요일 및 1월 1일, 설날·추석 휴관
주요소장품

백범 좌상, 동학 및 의병활동, 구국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자주통일운동 관련 자료

 

 

 

여기까지 김구선생님에 대한 유적지엿습니다. ㅎ

다 찾진 못해서 죄송하구요 다음은 김구선생님의 업적입니다.

 

 

1876년에 황해도 해주의 백운동 텃골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890년 15세의 나이에 학골의 정문재에게 글을 배우고

1892년 17세에 과거를  치르러 갔다가 돈으로 관직을 사고파는 짓에 실망하여 시험을 치르지 않고 집으로 돌아옵니다.동네에 글방을 마련하여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구요.

1893년 18세의 나이로 동학에 입교하여 동학을 알리는데 압장섰지요

1894년 19세 때는 고부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의 동학군을 모아 해주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웁니다.

1895년 20세 때는 신천 안태훈 진사의 집에 머무르면서 그의 아들 안중근을 알게 됩니다.

만주 삼도구로 가서 김이언이 이끄는 [의병단]에 들어갑니다.

1896년 21세에는 치하포에서 일본군 장교 스치다를 죽이고 일본 경창에게 잡혀 인천감옥에 갇힙니다.

1897년 22세의 나이에 사형이 선고됐으나 고종의 특사령으로 사형을 면하게됩니다.

1898년 23세에 인천 감옥을 탈출하여 마곡사에서 중이 됩니다.[스님]

1904년 29세에는 공립학교 교원[교사]가 되어 최준례와 결혼합니다.

1905년에는 30세의 나이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여러 곳을 돌며 강습회를 열어 애국심을 일깨우는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1909년 34세 때 안중근의 이토히로부미 암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해주 감옥에 갇혔다 풀려납니다.

1911년 36세에는 안명근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습니다.

1914년 39세의 나이에는 감형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1919년 44세에 3.1운동이 일어난 뒤 상하이로 망명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됩니다.

1922년 한국노병회를 조직

1927년 52세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국무령이 됩니다.

1930년 이동녕, 안창호, 조완구, 조소앙, 이시영, 김두봉, 안공근, 박찬익, 윤기섭, 이유필, 엄항섭, 차이석, 김붕준, 송병조 등과 한국독립당 창당.

 

1931년 56세에는 이봉창에게 일본 천황의 암살을 지지합니다, 한인 애국단을 창단합니다.

1932년 57세에는 해방이 되어 27년만에 조국 땅을 밟습니다!, 윤봉길의사 상해 흥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즉사케 함. 미국인 피치 씨의집에 피신. 각 신문에 김구가 사건의 주모자임을 발표되자 상해에서 탈출.임시정부에서 이탈.
1937년 7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인애국단 및 미주 5개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결성.
1938년 이운환의 저격으로 의식 불명. 임시정부, 유주로 옮김.
1940년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 결성. 백범은 중앙집행위원장.
1941년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공함을 보냄.
1945년 57세에 윤봉길에게 흥커우 공원에서 천황 생일 축하 기념식을 할 때에 폭탄을 던지도록 지시합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반대총동원위원회를 조직.
1946년 비상국민회의를 소집. 의장에 선출됨.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 총리에 선임됨.
1947년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 제2차 반탁운동 전개.
1948년 UN한국위원단에 통일정부수립을 요구하는 6개항의 의견서를 보냄. 통일독립촉진회 결성.

1948년 73세에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막기 위해 평양으로 가서 김일성과 회담을 가집니다.

1949년 74세의 나이로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가 쏜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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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해주 동학농민 운동의 선봉이 되었다가 일본군에 의해 쫒겨 1895년에 만주로 들어가 의병단에 들어갔다. 이듬해 귀국하여 명성황후늬 원수를 갚는다며 일본중위를 죽이고 체포되어 사형이선고되엇으나 복역 중 탈옥하여 마곡사의 중이 되었다. 그 후, 1910년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년에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았으나 감형되어 1914년에 출옥되었다. 3·1운동 후에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가 충청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했으며, 한국광복이 되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반탁했다. 그 후, 1945년 8·15 광복을 맏아 귀국하여 반탁운동을 지휘,민주의원 부의장 , 민족통일 본부 부총재를 지냈다. 1948년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라는 유엔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 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안, 평양에 가서 정치회담을 했으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그럼 많은 도움되셧기를 바랍니다.

200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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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와 안두희 , 아는사이 맞습니다

200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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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는 김구와 인연이 있었죠. 김구의 한국독립당에 입당했었거든요. 그런데 얼마 후인 1949년 6월 26일 그는 김구가 머물던 경교장으로 찾아가서 김구를 총 4발로 죽입니다. 김구의 라이벌이었던 이승만 쪽에서 시켰을 가능성이 많다고 하죠. 그는 이후 종신형 선고를 받았지만 이승만 정권의 보호를 받았는지 3달 만에 15년형으로 감형되고 6.25전쟁이 터지자 장교로 복귀해 (소위였습니다.)  얼마 후엔 대위가 됩니다.

 

그럼 김구는 어떤 사람일까요??

김구는 고려말기의 학자이다. 원나라에 다녀온뒤 <<북정록>>을 지었으며, 우간의 대부, 정당문학.중서시랑평장사등을 역임 하였다. 통문관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이장용. 유경등과 함께 신종. 희종.강종 3대의 실록을 찬수하고, <<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집<<지포집>>이 있다.

 

본관- 부령

호- 지포

별칭- 자 차산, 시호 문정, 초명 백일

주요작품- <<북정록>>, <<고종실록>>, <<지포집>>

200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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