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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김원봉의 업적 및 독립운동의 방략을...
cjhl**** 조회수 3,897 작성일2019.06.10
김원봉의 업적 및 독립운동의 방략을 알려주세요
그리고 김원봉의 업적과 방략에 대한 평가를 논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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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의열단(義烈團)의 명칭은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에서 따온 것이다.

김원봉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그를 빼고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서 항일 무력투쟁사를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활약상 은 큽니다 .

신흥무관학교는 잘 알다시피 우리 고장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상룡> 선생과 서울의 <이시형> <이회영> 형제가사제를 털어서 1911년 서간도에 세운 독립군 양성학교입니다.

김원봉은 졸업 3개월을 앞두고 신흥무관학교가 마적단에 습격을 받는 수모를 당해 회의를 느껴

학교를 자퇴하고 의열단을 조직

만주의 독립군, 상해의 임시정부, 와 함께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은 항일 무력 독립운동에서 대표적인 단체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은 전국적인 운동이었지만일제의 탄압 때문에 많은 희생자를 내고 실패하자 김원봉은 평화적인 운동으로는 안되고 일제에 항거 하려면

무력투쟁이 있어야 한다며 신흥무관학교 출신 윤세주•이성우•곽경•강세우•이종암•한봉근•

한봉인•김상윤•신철휴•배동선•서상락•권준 등과 의열단을 조직 단장을 맡았다.

의열단(義烈團)의 지침 활동은 7가살(可殺), 5파괴(破壞)다

7가살(可殺)은 아래 일곱 부류를 암살 대상으로 삼았다.

①조선총독부 총독 이하 고관

②일본군부 수뇌

③대만 총독(당시 대만도 일제치하)

④매국노

⑤친일파 거두

⑥적의 밀정

⑦반민족적 귀족 및 대지주

5파괴(破壞)는

①조선총독부

②동양척식주식회사

③매일신보사

④각 경찰서

⑤왜적의 주요기관

을 파괴 대상으로 삼았다.

악질적인 친일파 제거

일본의 고위관료 암살

식민지 통치의 중요한 시설을 폭파 함으로서

일본의 식민통치 기반을 흔들리게 하자는 목적이었다.

1920년 박재혁 단원이 고서 판매원으로 변장

부산경찰서 서장실에 들어가 폭탄으로 하시모토 서장을 처단하였고

김익상의 조선 총독부 폭탄투척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등많은 활동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김원봉은 분명 이 땅의 희망이었다.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義烈團)은 일제강점기가장 조직적으로 가장 지구력 있게 가장 열렬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한 단체다.

김원봉의 의열단(義烈團)에 거리감을 두었던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도 의열단에 자극을 받아1931년 <한인 애국단>이라는 항일 무력 독립운동단체를 창설했다.

<한인 애국단>은 창설과 함께 매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도 <한인 애국단> 소속이다.

김구와 김원봉은 사상적인 노선이 달랐지만 두 사람은 공동으로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통신문을

발표하는 등 연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두 사람이 소망한 것은 오로지 조국독립뿐이었다.

하지만 김구는 해방 후 1949년 6월 26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소재 경교장 2층에서 정권의 검은 그림자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김원봉은 광복된 후 친일경찰 노덕술에게구타를 당하고 온갖 수모를 겪는 신세가 되다

1948년 이승만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기 위해

김구 김규식과 함게 4월 남북협상회의에 참가한 후 북한에 남아있다

1958년 장제스(장개석)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북한당국으로부터 숙청당했다.

의열단 주요거사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을 폭사.

1920년 12월 27일: 최수봉이 밀양경찰서 소속 모든 경찰이 모인 가운데 폭탄을 투척.

1921년 9월 12일: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폭발로 청사 일부파손.

1922년 3월 28일: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 체포. 오성륜 의사는 가까스로 탈옥하고, 김익상 의사는 1943년 처형되었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

1924년 1월 5일: 김지섭이 도쿄의 궁성 정문 앞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

1924년 6월 1일: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을 사살.

1924년 6월 :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이토 히로부미 수양녀이자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본경찰에 넘기던 밀정, 배정자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함(배정자가 은퇴하게된 사건임),

친일파 조직인 일진회 이용구회장 암살 시도중 부상만 입힌 채 실패함

1924년 6월 7일: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봉천성 일본 총영사관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로 실패, 대서관, 금정관에서 군자금 탈취하다 현장에서 김광추는 총에 맞아 순국, 김병현과 박희광은 체포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

2019.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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