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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나혜석이 김활란의 회유를 거절한 이유는?
비공개 조회수 1,820 작성일2019.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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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항공우주공학, 모형, 완구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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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아명(兒名)은 나아지(羅兒只), 나명순(羅明順)이며, 아호는 정월(晶月)이다.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뒤 1918년 귀국하여 화가, 작가로 활동하였으며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하였다. 1918년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경성부로 돌아와 잠시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지냈다. 윌슨민족자결주의 이후 1918년 12월부터 박인덕 등과 함께 만세 운동을 준비,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5개월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뒤 1920년 김우영과 결혼, 그를 따라 만주와 프랑스 등을 여행하였으며 그림, 조각, 언론, 문필, 시 등에서 활동했다. 1927년 유럽미국 시찰을 가게 된 남편을 따라 여행길에 올라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칭호를 얻게 됐다.[2] 프랑스에 체류하던 중 야수파, 인상주의,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체류 중 최린과 염문설이 돌았고 곧 귀국 후 그림 활동에 매진하였으나, 결국 외교관 최린과의 염문으로 이혼하게 된다. 그러나 뒤에 최린으로부터도 버림받게 된다.


1935년 정조 취미론을 발표, 순결정조(貞操)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내,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순결함을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내나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성욕을 품는 한국 남자들의 위선적인 행동에 대한 비판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였고, 당사자들의 의견이 존중되지 않고 집안의 뜻에 따라 결혼하는 것에 대한 비판,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성들에 대한 비판 등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의 유명한 신여성으로, 뛰어난 그림, 글, 시 등 다방면에 재주를 갖춘 근대 여성이었으며, 여성 해방, 여성의 사회 참여 등을 주장하였다. 박인덕, 김일엽, 허정숙 등과 함께 이혼 후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으로 유명하였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문재(文才)도 뛰어났으며, 일본 유학 때부터 여권신장의 글을 발표한 여권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연기자 나문희(본명 나경자)의 고모할머니이기도 하다.


이런 나혜석은 일제 강점기 후반


1937년 12월 극도의 정신쇠약으로 착란증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바로 자유로운 연애관을 피력한 '영이냐, 육이냐, 영육이냐' 라는 글을 「삼천리」에 발표하였다. 1938년 기행문인 해인사의 풍관을 발표하다.

지금은 장경각 불사가 잇으니 조선 총독이 10,000원을 내서 팔만 대장경을 복사하여 만주국 황제에게 헌상하는 것이다. 가야산 해인사라고 쓴 정문에 금단방이라고 크게 써붙이고 장경각 안에서는 23조로 나누어 복사 검열이 잇고 총독부에서 내려온 기술자들과 도감은 이것을 감독하고 있다. 2개월 넘어 하는 이 불사는 그 규모가 클 뿐 아니라 하루 노임을 1원에서 3원씩 받는다.
 
— 나혜석 ‘해인사 풍광’중에서

관광지를 소개하면서 은근짜 총독부의 행태를 꼼꼼하게 적었다.해인사를 다녀온 뒤 그는 조선총독부에서 문화재를 복사하는 것까지도 일일이 검열한다며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림 해인사 풍경은 이때의 작품인데, 그는 해인사 방문 당시 홍도 여관에 묵은 기념으로, 여관 주인에게 '해인사 풍경' 을 그려 선물하였다. 1939년 수덕여관을 나와 다시 김우영을 찾아갔으나 박대당하고 내쳐졌다. 다시 수덕여관으로 되돌아왔다.


1943년 수덕여관을 떠났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는 사람을 보내 내선일체에 협력하면 진료비와 집, 화실을 제공하겠다고 회유하였지만 거절하였다. 그러나 파킨슨병, 중풍 등의 병세가 심해지면서 거동이 불편해졌고, 화재로 그림을 태워 먹고 아이들을 보지 못하게 된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반신불수의 몸이 된 나혜석은 자기만의 거처를 갖지 못한 채 경성의 절집들을 떠돌아 다니다가 1944년 무렵 경성 인왕산의 한 사찰에 정착하였다.


이때 내선일체에 협력할 것을 권고한 이가 바로 김활란이다. 그녀는 한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였으며, 일제에 협력한 사람이었고, 한 때 나혜석의 지지자였다.


나혜석은 독립운동을 실천한 독립운동가이자 예술가였다.


나혜석은 이화학당 학생들이 만세를 부른 사건의 배후로 지목, 3월 5일의 만세운동 참여, 사주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고, 그 뒤 3월 25일 다시 이화학당에서 만세 사건이 터지면서 '3·25 이화학당 학생 만세사건' 의 핵심인물로 지목되면서 경성법원에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그해 9월 풀려났다. 김마리아 등과 함께 3·1 운동에 여학생 참가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도 하는 등 3.1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나혜석은 가석방 후에도 일제의 보호감시처분을 받았고, 그해 속리산, 지리산, 설악산 등의 바다와 명승지를 구경하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1920년 1월 조선노동공제회의 기관지 '공제(共濟)' 창간호에 열심히 노동하는 남녀 농부들 위에 떠오르는 태양을 배경으로 한 판화 '조조(早朝)'를 발표했다. 이후 공제 지에 칼럼과 시를 싣기도 하고,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1920년 2월 김일엽 등과 함께 신여자지를 창간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으나 재정난으로 곧 폐간되었다. 그해 7월 국내에서 간행된 폐허(廢墟)지의 동인이 되었다. 직접 <폐허> 동인을 구성해 김억, 오상순, 염상섭, 김일엽 등과 교류했다. 그러나 <폐허>지는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반일적이라는 이유로 1년만에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폐간되었고, 그는 모교인 이화전문학교의 미술강사로 출강하면서 다른 언론사에 칼럼 등을 기고하는 등 항일 언론을 계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1922년 3월부터 안동현 태성의원(泰誠醫院) 내에 ‘안동현 여자야학’을 설립해 교육사업에 나서는 한편 부영사 부인의 직위를 이용해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또한 의열단김원봉 등에게 거사 자금을 비밀리에 송금하기도 했다. 후일 박태원(朴泰遠)은 ‘약산과 의열단’에서 ‘의열단에 대하여 은근히 동정을 표하여 온 사람의 수가 결코 적지 않으며, 그 가운데 여류화가로 이름이 높던 나혜석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의열단 외에도 나혜석은 1923년 8월에는 중국으로 망명하던 아나키스트 정화암(鄭華岩)의 월경을 도와주기도 했다.[11] 또한 의열단에 송금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송금 하였다. 나혜석이 비밀리에 의열단과 애국부인회를 도와주는 등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나혜석은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였으며, 굴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국과 민족을 저버리지 않은 예술가였다.


어찌보면, 이렇게 열렬한 독립운동에 선봉에 있었던 나혜석이 김활란의 회유를 거절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참고 : 김활란


일제 강점기 조선 및 남한의 페미니스트 계열 사회운동가이자 처음에는 독립운동가 행보를 보이다 변절 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악질 기회주의자.

金活蘭. 일제강점기 한국의 교육인 겸 언론인. 이화 학당 졸업생, 이화여자전문학교 7대 교장이자 최초의 한국인 교장[3]이며 이화여자대학교의 초대 총장[4], 학교법인 동구학원[5] 설립자, 한국 최초의 여성 박사 등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지만, 악질 친일 매국노이다.

아호는 '우월(又月)'이며, 창씨개명한 이름은 아마기 가쓰란(天城活蘭). '아마키'라고 잘못 읽는 인터넷 자료가 있지만, 정확한 발음은 아마기(あまぎ)가 맞다. 아마도 현재 아마기라는 성씨가 겨우 99명뿐인 희귀한 성이라 착각했을수 있다.

김활란이 이화여자대학교의 설립자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냥 교장 / 총장이었고, 설립자는 미국인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부인이다. 실제 김활란이 세운 사학재단은 동구학원 뿐이다.

2019.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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