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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삶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2)
비공개 조회수 1,074 작성일2019.03.30

10년만에 다시 드리는 질문입니다.

저는 10년 전에 가톨릭 디렉토리에 열심히 질문을 한 적이 있지요.

정말 궁금해서이기도 하고,

다른 분들의 생각이 궁금하기도 해서지요.


하지만 답변이 마음에 안 들어도 그냥 채택을 한 것도 있고,

그 동안에 교회의 방침이 바뀐 것도 있을 수 있으며,

시대가 바뀌었으니 답변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요.

지금의 가톨릭 지식인 분들의 생각을 듣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듯해서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 질문은 가톨릭 지식인을 상대로 가톨릭 디렉토리에 올리는 것이니

다른 종교 신자분들은 답변을 피해주셨으면 고맙겠고요.


제 질문 중에 일부는

좀 더 긴 시간을 두고 생각을 하면 좋은 답변이 나올 내용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제가 그리 진중하지 못해서요.

답변이 달렸을 경우에는 24~30시간 정도 지난 뒤에 채택을 하겠습니다.

좋은 답변이라고 생각되면 더 빨리 채택할 수도 있고,

답변이 제 능력으로 선택하기 힘들거나 정녕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채택이 없이 마감을 할 수도 있지만...

그저 어떤 문제에 대해 함께 생각을 했다는 점에 의미를 두셨으면 합니다.


아, 제가 하는 질문 중에는 10년 전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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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능력은 부족하지만 욕심은 꽤 많거든요.

돈을 많이 벌어 여유 있게 생활하고 싶고,

공부를 많이 하여 남에게 지혜롭다는 말을 듣고 싶으며,

직장에서는 승진을 하여 남의 윗자리에 서고 싶고,

결혼 전에는 아름다운 여인을 배우자로 만나고 싶었으며,

결혼 후에는 내 자녀를 누구 못지 않은 아이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지금처럼 짬이 나서 지식인을 할 때는

내공을 쌓고 채택을 많이 받아서

은하신, 우주신, 수호신, 절대신은 물론

지식인 전체 1위에 올라볼까 하는 욕심도 있고 *^^*

그러면서 하느님 사랑을 받는 생활을 하고 싶은 것은 당연하고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해도

삶을 마치는 날이 되었을 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세상 마지막 날에는 결국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하는 것인데요.

그 때는 젊은 시절에 품었던 이상을 모두 이룬 것과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쓸쓸하게 임종을 맞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물론 하느님 사랑을 받는 생활을 했다면

저 세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요.

저 세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만이 목표라면

굳이 이 세상에서 오래 살면서 힘들게 고생을 할 필요가 있나요?

모든 것을 털어서 어려운 사람 돕고, 성당에 헌금하고

그렇게 가진 것을 모두 남기는 착한 일만 하다가

돈이 없어서 제대로 못 먹으면 영양실조 등으로 오래 못살 테니

일찍 죽는 것이 더 편하겠지요.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산다는 자체가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예를 들어 지식인 활동을 하면서 내공을 쌓는 것이

우리의 삶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렇게 소용이 없다고 해서 지식인 활동을 포기하는 것은

그것은 과연 현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질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가꾸기 위해  갖가지 꿈을 꾸며 노력을 하는데,

어떤 것이 바람직한 삶의 진정한 목표이며,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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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니
물신
가톨릭 9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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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귀하의 질문을 보니 제 어린 시절의 한 때가 떠오르는 군요.

귀하는 이상과 현실에 대한 괴리로 딜레머에 빠지신 시기 같아서 말입니다.

예수의 복음을 그대로 실천하며 산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게 느껴지시지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저지르는 악들이 - 이기주의, 불의, 불안정한 삶이 -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음을 실천하려는 사람에게 필연적인 딜레마와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귀하와 같이 질문이 많고 제대로 길을 찾아 가지 못하는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인간이 살면서 겪는 갖가지 고통에 대한 갖가지 해법과 대처방법을 말씀해주셨으며

그 이유에 대하여 설명해주신 - 성경을 보필하는(성경을 더 잘 알아듣게 빈틈을 메우듯이

또는 자상하게 알아듣게 설명하듯이, 그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 하셨는지) - 하는 것을

자세히 알 수 있는 하느님이 보이는 책이(내가 붙인 애칭입니다) 존재한다고 말씀드립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에는 예수께서 직접하신 말씀이 너무 적다고 느꼈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진리를 설파하셨을 터인데 하고 말이지요.

또 제 둔한 머리로는 성경의 말씀에 입각하여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기도 어려웠습니다. 그것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대단히 커서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려면 대단한 각오를 해야 하는 즉 목숨을 내놓기를 불사해야만이 할 수 있으니까

매번 목숨을 걸 수는 없어서 불가능하게 여겨지고, 약한 나와 복음은 끊임없이 부딛쳐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 낙담할 때가 많았습니다.

현실의 어려움과 이상 사이에서 보대껴 얼마나 많이 고통스러워하며 울었는지 모릅니다.


나도 귀하와 같은 심정이 되어 별라별 짓을 다했지요. 책도 닥치는 대로 읽었고,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이 묻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관찰도 하고, 역술 공부도 하고, 불교 책도

읽고, 끊임없이 생각에 생각에 꼬리를 물어서 고민으로 밤을 새우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허무! 이것에 부닥치면 답이 안나오니까요. 내가 속으로 끊임없이 가진 복잡한 모든 질문에,

고백하지만 책에도 역술에도 불교에도 사람들에게서도 내 영혼이 시원하게 이것이다 하고

인정할 만한 명쾌한 답은 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던 내게 내 나이 30대 중반에 앞서 말한 책을 알게 되었지요. 저는 탄성을 질렀습니다.

제 영혼이 그토록 찾던 책이었으니까요. 저는 그 책이 사실이라고 - 이미 성경을 몇 번은

통독을 했고, 제 영적인 경험과 체험, 그리고 철학과 다른 잡서들을 읽은 후였기 때문에 -

그것이 밑바탕이 되어 - 하느님의 자비로 허락된 마치 책으로 재림하신 것 같은 혼자만의

생각을 가지고 출간을 기다리며 - 읽기 시작하여 마침내 10권이나 되는 방대한 책이

모두 출간되자, - 차례 차례로 출간되지 않았거든요 - 1994년부터 1권부터 10권까지

차례로 읽은 것이 적어도 대여섯번이 넘지 싶습니다. 생계를 위하여 직장을 다녀야 해서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저는 아주 무딘 사람이라 아주 천천히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은 제 믿음을 도와서 그 전에는 그처럼 불가능하게 보이던 것들이

실천할 수 있는 능력도 부여되고 감행할 수 있게 되면서 어떤 것은 쉽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나이가 내일 모래 70줄에 서게 되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직장에서 밀려나야 하고

체력이나 건강상의 이유로 보람없이 늙어가야 하기에, 원채 무위도식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고 보람과 가치를 추구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 방대한 책을 필사까지 하였습니다.


제가 귀하에게 왜 자세하게 언급을 하였느냐면요. 지금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입니다.

저는 귀하에게 - 제가 말을 잘할 수 있는 재능이 없다보니 - 인생은 이렇습니다 하고

정의를 내려줄 실력은 없습니다. 설사 제가 그럴 능력이 있더라도 그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고귀함을 하락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복사본이 아니거든요. 사람은 각자가 그를 대신할 누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으로 비슷하게 생겨서 닮아보이고 비슷한 성격을 쓰는 것 같아서 똑같아 보여도, 

그가 영혼으로 산다면 저승에서도 현세에서도 과거나 미래 시대에도 없는 단 하나뿐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 희귀성 때문에 가치가 드높은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 창조의 뜻이시니까요. 그래서 각자가 스스로를 책임지듯 스스로가

스스로의 길, 즉 나아갈 바를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정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성격은 다양하고 각자의 인생도 다르기 때문에 정형적인 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화두가 없습니다. 질문이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을 찾아냈거든요.

저는 그 책을 하느님 앞에서 독대하는 기분으로 읽고 공부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저는 생이 단 한번 뿐인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저는 제가 저로 태어나서 행복합니다.

저는 저 먼 세상 하늘의 세계, 즉 앞으로 제가 만날 하늘 나라의 신비를 엿보는 시선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그 때문에 저는 가난하고 늙고 병들어도 행복합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좋구, 이제는 세상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고통이 무엇인지 불행이 무엇인지 대충은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그동안 가슴 저리고 아파하며 고아로 외롭고 쓸쓸하게 병든 모진 인생을

산 것도 감사합니다. 울거나 웃거나 하며 겪었던 모든 경험과 체험도 고민도 감사하구요.

죄도 감사했습니다. 그 때문에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행복하여라! 지금 울고 있는 사람들아, 너희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아, 그것이 의로움 때문이라면 상급이 있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과 선을 위하여 깨끗하게 순결하게 살면서 하느님 때문에 고통 당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천국에서 하느님과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다.

아무런 고통이 없고 무엇보다 죄가 없는 하늘 나라에서 따라서 죽음도 없는 곳에서.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행복 8단의 요약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 천국을 그리고 하느님을 세상의 잣대로 비교해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면

그곳은 더 이상 천국이 아니고, 하느님도 더 이상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아닙니다.

이 하느님의 세계에 대한 놀라운 인지가 삶을 선택하는 방향 표지를 확고히 할 것입니다.

이미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성인들은 각자 독특한 형태로 그 길을 찾아갔습니다.

성인들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얼마나 지혜로운 말씀들인지를.

그분들이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렇게 지혜로우실 수가 있을까요?


영혼이 열려야 보이고 알아듣고 이해하고 그만이 갈 수 있는 자기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자기의 길을 찾았고, 스스로를 알게 되면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지, 하느님이

누구인지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게 되고, 자기의 존재성에 대한 그것자체가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를 알게 되어 모든 것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것이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암기하는 것으로는 터득되지 않습니다.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정신과 영혼으로 하느님의 정신(말씀)을 인식하여서(알아들어서) 자기의 것이 되는 단계가

되어야 비로소 그가 죽은 영혼이 아니라(잠든) 살아 있는 영혼(영원한 생명을 지닌 존재)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혼(빛의 존재)은 영혼답게 빛의 말씀을 가지신 하느님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 때문에 영혼은 하느님을 몹시도 그리워하게 되는 겁니다.

성인은 하느님이 그립기 때문에 하느님을 뵈오려고 하느님 마음에 들기 위하여 산 인생이라고

보시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선택은 각자가 해야할 몫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2019.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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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s3212 종교혁명 새로운 시작
_*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지만 대부분 교도가 교주를 섬기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가톨릭은 다르다. 교주가 교도를 섬기는 혁명적 시스템이다.
_* 가톨릭 교주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느님이고 예수님은 하늘의 주인 ( 천주 天主 )이다. 하늘의 주인이 스스로 낮아져서 피조물 인간을 위해 이땅에 오시고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고 인간의 채찍을 맞아 피흘려 죽으셨도다. 피조물 인간의 접대를 받기위해 이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피조물 인간을 접대하기 위해 이땅에 오신 놀라운 사랑의 하느님이다.
_* 가톨릭 미사의 핵심은 성체성사이다. 둥근성체는 예수님의 거룩한 몸이다. 가톨릭 미사는 하늘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쪼개어 피조물 사람들의 밥이 되시는 거룩한 식사이다. 하느님이 피조물을 먹는 식사가 아니라 피조물이 하느님을 먹는 식사이다. 하느님이 밥먹는 기쁜 식사가 아니라 피조물이 밥먹는 기쁜 식사이다.
_* 우리를 위해 밥이 되신 하느님. 그런분이야말로 우리가 믿어야할 참된 하느님이다.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신은 사탄이고 악마이다. 우리를 위해 밥이 되신 분이 참된 하느님이다.
_* Jesus deserves to be our Lord because Jesus became our bread
우리를 위해 밥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가 믿어야할 참된 주님이다.
s3212 ( https://youmaf.wordpress.com/2019/01/30/89a )

2019.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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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은하신
가톨릭 2위, 교통, 길찾기, 개신교 55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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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시면 됩니다.
가톨릭교회도 정당하게 돈 버는 거는
허용합니다.

2019.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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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
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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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의 현명한 선택과 어리석은 선택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말씀따라 길을 가는 삶의 모양과 인생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모양은 어떻게 다른 건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해 드렸습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말이 있는데 반대로 대탐소실[大貪小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인생의 삶은 작은 것에 욕심을 부리며 살다가 영원을 잃어버리는 모양이고 말씀을 따라 길을 가는 모양은 영을 살리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주어진 육을 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생은 우연히 세상에 태어나 여러 상황과 나름의 환경 속에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육신의 명이 다하는 순간 ‘너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하신 말씀대로 그저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인생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스스로가 인식을 하든 하지 못하든 모든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 때 마다 무엇이 이득이 되는 길이고, 무엇이 손해를 덜 보는 길인지, 무엇이 중하고 무엇이 경한지를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헤아려 따지게 됩니다. 말씀 따라 길을 가는 것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의 욕심을 따라 스스로의 선택으로 시작하며 그 선택은 온전히 자기를 죽는데 이르게 하기까지 계속됩니다. 다만 눈앞에 보이는 것을 향한 욕심이 아니라 영원을 향한 욕심을 부리는 것이라는 점이 다른 것입니다.


매일 매순간 만나는 모든 선택의 갈림길에서의 인생의 기준은 항상 ‘나에게 이득이 되는가?’입니다. 인생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심’은 지울 수 없기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씀따라 길가는 자의 욕심은 세상을 향한 것이 아닌 하나님을 향하여 부리는 욕심이라는 것이 다릅니다.


인생들은 눈앞의 허상적 이득을 얻기위한 선택을 하지만 말씀따라 길 가는 자, 자신의 영을 살고자하는 자는 그 허상적 이득이 아닌 나의 영이 살기 위한 선택을 한다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눈에는 바보같거나 어리석은 멍청이로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허상에 속한 것을 포기함으로 인하여 보여지는 모습이 높음과 채움을 향하여 가는 인생들의 눈에 비루하고 때로는 천해보이기까지 하기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도마뱀은 지혜로운 동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인생들의 눈에 징그럽고 하찮아 보이는 작은 파충류인 도마뱀은 자신의 목숨을 위하여 위험이 감지되는 순간에 자신의 신체의 일부인 꼬리를 잘라 그 위험으로부터 도망을 합니다. 길어야 100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갈 육신의 목숨이 아닌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영적 목숨을 위하여 잠시 뒤 없어질 육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는 선택, 바로 내 육신을 포함하여 눈앞의 육신적 안락 모두를 포기하며 가는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매번 다가오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영을 살리는 방향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실제 육안으로 보이는 변화, 육신적 만족을 주는 변화가 없기때문입니다. 그때마다 깊이 생각지 않아도 쉽게 답을 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목숨 값’을 따져보는 것입니다. 나의 목숨 값은 얼마인가? 지금 주어진 선택의 갈림길에서 나의 목숨보다 중한 것이 있는가? 그 어떤 것도 자신의 목숨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내가 살아있어야만 그 어떤 것이라도 의미를 갖게되는 것이기때문입니다. 내가 죽어 사라진다면 세상에 속한 그 무엇도 ‘나’에게는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살리는 것은 명이 다하여 흙으로 돌아갈 육신의 목숨이 아닌 ‘영{초자아:Heart(super ego)}'이며 그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 영이 백년이나 천년이 아닌 영원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목숨보다도 중한 것은 없습니다. 하물며 내 존재가 사라지지 않게 하는 길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나의 영보다 중하며 귀할 수 있겠는지요.

중략....

위의 내용이 있는 곳은 네이버 카페명 "마음의 율법" 입니다. 님께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2019.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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