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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셀주크 투르크의 전성기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3,963 작성일2007.07.14

유럽 전체가 덤벼도 못이겼다???

 

그리고 셀주크투르크는 훗날 오스만 제국 그다음 터키로 되는 겁니까??

 

어느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궁금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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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주크 투르크는 오스만투르크 보다 2-세기 정도 앞서 중앙 아시아에서 흥기했습니다. 셀주크 투르크인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여 이슬람의 "성전" 이데올로기로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셀주크 투르크 중-후기 셀죽 투르크의 지방 토후국 중 하나로 발전한 것이 오스만이라는 사람이 세운 오스만왕국이었습니다. 이 때 오스만은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특히, 셀주크 투르크의 지방 가신국들 중 가장 서쪽, 즉 유럽 비잔틴 제국에 가까운 지방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비잔틴제국의 용병으로서 처음 유럽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셀주크 투르크는 여러 개의 토후국으로 분열했고 오스만제국은 중앙아시아와 소아시아에 분열되어 있던 이슬람 토후국들을 모두 통일했고, 유럽 발칸에 진출해서는 비잔틴제국과 불가리아, 세르비아, 알바니아, 헝가리까지 모두 합병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를 더 자세하게 보자면 10세기 말 족장 셀주크가 중앙아시아로부터 아랄해 북동쪽 해안에 이주하여 수니파 이슬람교에 귀의하였으며, 대셀주크왕조를 건설한 그의 손자 투그릴 베크(Tughril Beg:재위 1037∼1063)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진출, 아바스왕조의 분쟁을 틈타 가즈나왕조를 격퇴하여 전 이란을 병합하고(1040), 이어서 이라크를 점령하였으며, 바그다드로 쳐들어가 아바스왕조 칼리프로부터 술탄의 칭호를 얻었습니다(1055).

 이로써 아바스왕조의 분열 이후 빠르게 세력을 확장한 셀주크투르크는 11세기 중엽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1071년에는 동로마 황제 로마누스 4세의 군대를 물리치고 소아시아 지역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며, 시리아·팔레스티나·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이집트의 파티마왕조를 눌러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한편 11세기 중엽 기독교인들의 성지라고 하는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순례자들을 박해하자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성지 탈환을 위하여 십자군을 조직, 1096∼1270년까지 200여 년 간 10차례에 걸쳐 성지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전쟁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11세기 말부터 정권 분쟁으로 분열이 일어나 1157년 대(大)셀주크왕조가 망함으로써 이란의 종주권을 잃게 되었습니다. 또 게르만·시리아·이라크와 소아시아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던 분파 정권도 12세기에 모두 멸망하였으며, 몽골인의 서진을 막아내며 버티던 소아시아의 분파 정권은 1307년 오스만투르크에 항복하였습니다.



대략의 역사적 맥락은 이렇고...

질문하셨던 두 국가 간 관계는(공통점과 차이점)

오스만제국의 이슬람신앙은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받아들였고, 그 외 국가 경영 기술, 제도(노예행정관제도 등)등도 본받은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스만제국은 셀주크 투르크의 후예라고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차이점은... 오스만제국이 셀주크 투르크의 지방 왕조로서 출발은 했지만 결국은 셀주크 터키에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중앙집권적인 이슬람 술탄 제국으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셀주크 투르크는 이슬람적 신앙을 보다 더 고집한 국가였고, 이에 반해 오스만제국은 좀 더 융통성있는 이슬람 국가로서, 유명한 메흐멧 2세나 슐레이만 대제 등의 술탄들은 외교술에도 능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오스만제국은 셀주크 투르크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700년 가량), 훨씬 더 방대한 영토(유럽, 아시아, 아픠카를 모두 포함하는)를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술탄 쉴레이만 1세(1494∼1566)의 통치 이후로는 정치적·행정적·재정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1718년경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에서 투르크족을 축출했으며, 러시아는 1783년에 크리미아를 합병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19세기에 발칸 제국 대부분과 이집트의 통치권을 잃었습니다. 19세기말에는 소수 민족과 소수 종교분파에게 지방자치를 용인했던 밀레트(비이슬람 종교자치제) 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여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결국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라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1908년에 젊은 투르크인들이 혁명으로 제국을 되살리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발칸 제국에서의 군대와 영토 상실로 인한 어려움은 계속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중 터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편에 가담했습니다. 전후 아라비아의 여러 속주와 일부 지역을 잃었지만 격렬한 시민전쟁과 그리스와의 전쟁 결과 1923년 로잔 협약으로 지금의 국경선이 생겼고, 케말 아타튀르크를 대통령으로 한 터키 공화국이 탄생했습니다. 술탄제와 칼리프제는 폐지되고 케말 아타튀르크의 지도 아래 현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아타튀르크는 터키의 정치·경제·사회체제 전반에 대한 급진적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이슬람의 지배적 역할을 축소하고, 터키어를 아랍 문자 대신 라틴 문자로 쓰도록 하므로써 터키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을 축소시켰습니다. 또한 이후 오랫동안 영향력이 지속된 국가통제 방식의 경제발전 정책을 마련했습니다. 1938년 아타튀르크 사망 후 불안정한 기간과 짧은 군부 통치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정치 및 다당제가 정착될 수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전후 서유럽과 제휴하고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를 받았습니다. 1952년에는 NATO에 가입했으며, 1953년에는 발칸 협정의 조인국이 되었고, 바그다드 조약(1955, 후에 CENTO로 이름이 바뀜)과 유럽 경제협력기구(OEEC) 및 유럽 의회에 가입했습니다. 1959년에는 그리스와의 3년에 걸친 키프로스 분쟁을 잠정적으로 해소했습니다. 1961년 터키 제2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새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1963년에 유럽 공동시장의 준회원국이 되었습니다.

 1963년말 키프로스에 거주하는 그리스인과 터키인들 사이의 분쟁으로 키프로스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그리스와 터키 양국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어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국제연합(UN)의 압력으로 전쟁이 억제되었습니다. 1987년과 1996년에는 영토분쟁으로 재차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1974년 키프로스에서 그리스 군사정부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이에 맞서 터키군은 북(北)키프로스를 점령했습니다. 그후 국내정세 불안과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면서 1980년 군부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2년 후 새 헌법이 대다수 유권자들의 찬성으로 통과되었습니다. 1983년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계엄령은 점차 해제되었습니다. 1983년 과격한 쿠르드족 분리주의 운동의 출현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지속적인 분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터키는 조국당의 투르구트 외잘 총리 재임기간(1983∼89)중에 비교적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1990년대 들어서는 친이슬람계 복지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지지가 증가하는 가운데 중도파 정당들이 집권했습니다.

 

어쨌건 도움이 되시길^^

2007.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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