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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우리고장에 전해오는 노래조사(대구)
wnsk**** 조회수 1,774 작성일2008.10.26

저의 고장은 대구인데

선생님께서 우리고장,, 그러니까 대구에 전해오는 노래를 조사해오라고 하셨어요.

대구(우리고장)에 전해오는 노래와 노랫말좀 가르쳐주세용 !!!

답변 제대로 해주시면 감사내공도 드릴께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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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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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전통 노래)

 

1.(대구) 어사용

 

이에에이

의양땅1) 갈가마구야 이 내 소식을 전해다오

히요 날라가는 저 기럭아 이 내 소식을 전해다오

히에 산은 내 산이요 물은 내 물이 아니로다

주야장천 흘러가는 물을 내 물이라꼬 할 수 있나

후후후야 허허이

 

바람아 강풍아 불지 말어라 서풍에 낙엽이 다 떨어진다 허허후야

이요 후야후야 슬프다 우리 낭군님은 점슴 굶고 나무하러 갔네

이요 어떤 사람은 팔자 좋아 고대광실 높은 집에

이요우 희롱하며는 살건마는

이요 이내 팔자는 왜 이러노 죽자 하니 청춘이요 살자하니 고생이데이

 

해설 1) 의양 : 의영. 의성의 옛이름.

 

2.(대구) 상여소리

 

§1 오홍 오홍 오호야 오홍

§2 에헤 헤헤이 어하넘차 오홍

 

-오홍 오홍 오호야 오홍 §1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사든 생각을 다 버리고 북망산천을 나는 가네 §1

-서른 두명 상두꾼들 눈물 가려서 못 가겠네 §2

-백년집을 이별하고 만년집을 찾어가네 §1

-황천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황천이네 §1

-빈 손으로 태어나서 빈 손으로 돌아가네 §2

-초롱 같은 우리야 인생 이슬 같이도 떨어지네 §1

-인지 가면 언지 올꼬 한 번 가며는 못 온다네 §1

-북망산천이 얼마나 멀어 한 번 가며는 못 오던고 §2

-활장 같은 굽은 길에 곱게 곱게나 모시 가자 §1

-열두대왕 문을 열어 날 오라고 재촉하네 §1

-하늘님도 무심하고 대왕님도 야속하다 §2

 

<좁은 길 가는소리>

 

어여차

 

-어여차

-조심하소

-질이 좁다

-조심하소

-한살 묵어

-아배 잃고

-두살 묵어

-엄마 잃어

-이구 십팔

-열 여덟에

-첫 장개라

-갈라 하니

-앞집 가여

-궁합 보고

-뒷집 가여

-책력 받아

-책력 봐도

-못 갈 장가

-궁합 봐도

-못 갈 장가

-한 모롱이

-돌아가니

-까막깐치

-지지 울고

-두 모롱이

-돌아가니

-야시 새끼1)

-쾡쾡 우네

-저게 가는

-상반님요2)

-밀양삼당

-가시거든

-편지 일매

-전합시다

-한 손으로

-주는 편지

-두 손으로

-피여 보니

-신부 죽은

-부골래라

-꽃가마는

-어들 가고

-황천길이

-무삼 말고

("자, 극락다리 왔심다")

 

<외나무다리 건너는소리>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극락다리 건날라니

-극락노자를 내라 하네

-상주님요 백관님요

-극락노자를 걸어주소

-극락노자를 걸었거던

-극락다리를 건너가세

-이 다리를 건너가면

-언제 한 번 돌아올꼬

-어린 시절 내 친구여

-부데 부데 오래 사소

-북망길을 나는 간다

 

<오르막 오르는소리>

 

("자, 다 왔심다 극락다리는. 팔부능선 올라갑니다.")

 

오호호시용

 

-호호호시용

-팔부능선 올러가자

-힘을 내어 올러가세

-우렁차고 어이 좋다

-이 능선을 올라오니

-경치 좋고 방석 좋네

-대명산이 분명하다

-만년집을 찾아오니

-경치 좋고 방석 좋아

-한봉에다 다 올랐다

"자 놓고! 어허어 어어!"

 

해설 1)야시 새끼 : 여우 새끼. 2)상반님 : 상제, 장가갈 때 신랑과 같이 가는 웃어른.

 

3.(대구) 소꿉놀이

 

도랑 건니 사돈은

우에 우에 사는게

말 매고 소 매고

아들 놓고 딸 놓고

광지리도 저리고

산대미도 저리고

박쪼가리 대문 달고

새금파리 구들 놓고

그대로 제대로 사니더

2008.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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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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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서울 한가운데로 한강이 흐르고 있지만 예전 조선시대의 한양인 그 당시 서울 한가운데는 청계천이 흐르고 있었다. 청계천에는 그 당시만 해도 물이 맑아서 붕어나 피라미 등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노닐었고 청계천 뚝방에는 실버들이 늘어져 한양의 수려한 산세와 어울려져 좋은 경치를 이루었다.

청계천으로 들어가는 작은 시냇물이 허다한데 그 중 하나가 북한산 줄기인 정릉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성북동을 거쳐 안암동 용두동으로 내려오는 안암천(安岩川)이다.
한국전쟁이라 일컫는 6.25사변 전만 하더라고 안암동, 용두동, 제기동 사람들은 안암천 물에 빨래를 해 입었고 안암천변 모래톱에는 잿물에 빨아서 널어놓은 하얀 빨래가 눈이 부실 정도로 널려 있었다.
아이들은 여름날 안암천 물에 들어가 멱을 감기도 하고 물장구를 치면서 놀이터로 삼았다. 이 안암천의 원래 이름은 '안감내'라 불렀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안암천을 안감내라 부르게 된 사연이 있으니 그 사연은 이러하다.
옛날 조선시대에 현재의 안암동에 해당하는 지역은 주로 밭이었다. 개울보다는 지대가 약간 높기는 하였지만 맑은 물이 흐르는 개천이 가까이 있어 배추나 무, 파나 호련수(시금치) 등 채소를 심으면 농사가 잘되었다.
뿐만 아니라 4대문 안에 사는 양반댁이나 서민들 역시 싱싱한 채소나 푸성귀를 즐겨 찾았으므로 동대문 밖 채소밭은 한양사람들에게는 영양공급처라 할 수 있었다.

순흥 안씨(安氏) 성을 가진 안감(安甘)이라는 총각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채소밭을 가꾸며 홀어머니를 모시고 착하게 살았다.
'음, 오늘은 왠지 장사가 잘 될 것 같은데 일찌감치 채소를 뽑아다가 문안으로 지고 가야지.'

그동안 채소장사를 오래 하다 보니 장안의 대갓집에 단골도 생겼고 단골집에 가서는 채소만 파는 것이 아니라 장작도 패 주고 그러다 보면 아침밥이나 점심 요기를 돈 안내고 해결하는 수도 가끔 있었다.
더구나 안감이 허우대가 좋은 총각이다 보니 대갓집의 여종들이 호의를 베풀어 다른 채소장사보다는 안감총각에게는 단골고객이 매우 많은 편이었다.

그날 따라 안감은 손에 돈을 좀 만졌다. 며칠동안 계속해서 비가 온 탓으로 장안에 채소 공급이 좀 딸려서 그랬는지 아침 식전에 한 지게 가득히 채소짐을 지고 흥인지문 안으로 들어갔는데 해가 아직 중천에 오르지 않은 이른 아침인데도 채소가 몽땅 팔리고 값도 평소보다 좋아서 안감은 입에서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오늘은 오랜만에 복만이네 설렁탕집에 가서 뽀얀 국물에 편육을 썰어 넣은 설렁탕 한 그릇에 막걸리를 한 사발…' 생각만 해도 회가 동하여 걸음을 빨리하여 복만이네 설렁탕집으로 들어섰다.

현재는 주택가가 되었지만 개울 건너쪽인 용머리 마을 끝에 국왕께서 친히 행차하여 한 해 농사가 잘 되어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기를 바라는 제사를 드리는 선농단이 있었다.

임금님께서 제사를 올린 후에 신하들을 데리고 몸소 쟁기질을 하시고 제사에 참여한 신하들이나 구경을 나온 백성들을 위로하고자 제물로 쓴 소를 잡고 탕국을 끊이고 탕국에 밥을 말아준 국밥을 예전에는 선농단에서 끓인 탕이라 하여 '선농탕'이라 했는데 후에 설롱탕 또는 설렁탕이라 했다.

용머리 마을은 또한 나라에서 쓰는 소나 말을 키우고 훈련하는 목마장이 가까이 있었으므로 소 시장이 자주 섰고 그래서 설렁탕을 파는 집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복만이네 할머니가 끓이는 설렁탕 맛이 제일이었다.

안감총각이 설렁탕 한 그릇을 사먹기 위해 복만이네 집으로 들어섰을 때 이미 식당 안에는 많은 손님들이 자리하고 앉아 맛있게 설렁탕을 들고 있었다.
"저기 노인 양반 잡수시는 데 옆에 빈자리가 하나 있군, 거기 가서 앉게나."?
복만네 할머니가 자리를 권했다.

안감이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옆에서 설렁탕을 먹고 있는 노인을 무심코 바라보니 단저고리 바람의 노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얼마나 음식을 맛있게 먹는지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안감은 배가 부른 듯 하였다.
'저 연세에 저렇게 음식을 맛있게 잡수시다니! 아무래도 노인께서 너무 시장하셨던 모양이야'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노인을 자세히 바라보니 노인의 풍모에 어딘가 기품이 있어 보이는 것이 아무리 봐도 농부는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안감이 주문한 설렁탕이 그때 나와서 그 역시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식당 안이 시끄러워졌다. 주인 할머니가 언성을 높여 야단을 치고 있었다.
"남이 장사하는 음식을 먹었으면 당연히 그 값을 치뤄야지. 외상이라니? 수중에 돈이 없으면 먹지를 말든지 아니면 배가 고프니 좀 달라 할 것이지 아무 소리도 안하고 꿀꺽 남의 음식을 먹고서 이제 와서 돈이 없다니 그게 무슨 법이요?"
"주인장 사정이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그만 깜박하고 돈을 안 가지고 나와서 이리 된 것이요. 내 급히 집에 다녀와서 밥값을 치를 터이니 조금만 봐 주시구려."
그러나 복만이네 할머니는 목청을 돋구었다.
"아니 내가 언제 영감님을 봤다고 어리석게 밥값 떼일 짓을 한단 말이요? 입고 있는 옷이라도 벗어 놓고 간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옷을 벗어 놓고 갈려니 단저고리만 입었으니 맨몸으로는 나갈 수가 없는 일 아니오? 주인장께서 내 사정을 좀 봐 주시구려."
"나는 그리는 못 하겠소. 옷을 벗어놓고 갔다 오든지 돈을 내든지 양자택일을 하시오."
"없는 돈을 내가 어찌 내겠소. 우리 집 하인들이 이 집 설렁탕이 하도 맛있다고 그러기에 내가 돈 생각은 못하고 그냥 들어오다 보니 이런 결례를 하지만 내가 무전취식을 할 사람은 아니오."
안감이 사태를 보니 여간해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주인 할머니, 그 어르신 잡수신 음식값이 얼마요?" 안감이 주인을 불러 물었다.
"채소 장사 총각이 그건 왜 물으오? 대신 돈을 낼 생각은 아닐 텐데?"
"내가 그 어르신 잡수신 음식값을 치러 드리리다."
안감은 그날 아침 장사로 벌은 돈으로 설렁탕 두 그릇 값을 치른 후에 노인과 함께 그 집을 나왔다.
"총각, 이름이 무엇이고 사는 곳은 어디요? 내가 꼭 총각에게 진 신세를 갚아 드리리다."
"괜찮습니다. 저도 어르신 연세의 어머님을 모시고 사는데 연세 많으신 어른께 국밥 한 그릇 대접한 것이 무에 그리 대수로운 일입니까? 오늘 일은 잊어버리십시오."
"그러지 말고 사는 곳과 이름을 알려 주구려. 사람이 남의 신세를 졌으면 반드시 갚아야만 도리가 아니오?"
"저는 오늘 장사가 잘되어 재미도 솔솔하니 더구나 이렇게 좋은 일도 했고. 어르신은 그냥 가십시오."
"고마운 젊은이야. 그럼 오늘은 이렇게 신세를 지고 내가 갈 테니 언제 시간이 나면 내 집으로 오게나. 종로이니까 혹 채소가 안 팔리거든 몽땅 가지고 오게 내가 팔아줄 터이니까."
그렇게 하고서 노인과는 헤어졌지만 안감 총각은 그날 하루 기분이 매우 좋았다.

며칠 후, 그날은 어찌된 일인지 채소지게를 지고, 온 동네를 외치고 다녀도 채소를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단골집도 몇 집 찾아가 사정을 해 보았지만 명절 뒷끝이라 남은 음식이 있어 채소를 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언뜻 종로에 산다는 노인이 생각이 났다.
'그래. 노인께서 헛소리를 하지 않으신 것 같았어. 설마 집을 못 찾으면 헛걸음을 한 셈치면 되니까 종로로 한번 가봐야지."

안감총각은 노인께서 알려준 그 집으로 찾았다.
아주 으리으리한 기와집, 솟을대문이 있는 커다란 집이었다.
"그 노인께서 이렇게 큰집에서 사시는 분이셨구나! 내가 지금 찾아가면 아는 척이라도 해 주실까?"
은근히 걱정이 되어 그 집 앞에 서서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하인 하나가 눈을 부라리며 나와 호통을 쳤다.
"대관절 누구이기에 대감님 댁을 뚫어져라 살피느냐? 어서 가거라."
오래 있다가는 치도곤을 당할까 겁이 날 정도였다.
안감총각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사정을 말했다.
"저는 동대문 밖 숭인방에서 채소농사를 하여 갖다 파는 장사치인데 어느날…"
그때였다. 하인이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럼 자네가 그 채소장수?!"
"저를 어떻게…?"
"말도 말게. 우리 대감님께서 얼마나 자네를 기다리셨는지. 자네 참으로 잘 왔네. 어서 들어가세나."
안감은 하인의 안내로 대감집에 들어가 지게를 내놓았다. 대감께서 친히 나와 그를 맞이하고 채소를 다 팔아주고 또한 융숭한 대접을 해 주었다.
"사실을 내가 그 날 내 신분을 밝히지 못하였네만 우리가 이리 만났으니 내가 자네 소원 하나쯤은 들어주고 싶네. 소원이 있으면 말을 해보게."
"…"
"벼슬인가?"
"아닙니다. 저는 못 배웠습니다."
"그럼 재산인가?"?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고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럼 장가를 들여줄까?"
"언젠가 저에게도 나타나는 참한 처녀가 있겠지요."
"그러면 뭔가? 그 소원 듣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구먼. 개의치 말고 어서 얘기해 보게. 내가 들어줄 테니."
"그럼 어르신을 믿고 제 소원을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래. 어서…"
"우리 동네에 냇물이 하나 있는데 비가 오면 물이 불어 그냥 건널 수가 없습니다. 다리를 하나 놓아주십시오. 그렇게 되면 채소장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저도 좋고, 우리 동네 사람들도 좋고, 우리 어머니도, 동네 노인들도, 아이들도 모두 좋아할 터이고 성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도 좋아할 것입니다. "
"참으로 기특한 청년이로다. 내가 다리를 놓아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부터 그 내 이름을 '안감(安甘)내'라 하고 그 다리이름은 '안감내다리'라 칭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지금의 안암교가 예전에는 '안감내다리'라 불리어지게 되었다.



 
조선초기 수도인 한양에는 외곽이 토성으로 쌓여 있었고, 동·서·남·북으로 각각 커다란 대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4대문 안을 문안 또는 성안이라 하였다.
당시만 해도 4대문에는 통행금지 시간이 있어 밤이 되어 일정시각이 되면 통표(통행증)가 없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대문을 통과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수도인 송악(현재의 개성)을 떠나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태조가 즉위한지 3년째(1394) 였으며, 이듬해 봄부터 도성축조계획을 세워 한양 주변에 성을 쌓고 4방에 한 개씩 큰 대문을 만들어 달았다.
기록에 의하면 동대문은 태조 5년 1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그 해 여름에 장맛비로 토성이 붕괴되어 다음 해인 태조 6년 1월 27일에 태조가 친히 동대문에 나가 옹성의 터를 보고 같은 해 4월 28일에도 왕이 친히 동대문에 나가 옹성을 둘러보고 성을 돌아 동소문까지 갔다가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는 걸 보면 아마도 동대문의 옹성은 태조 6년 1월에 착공하여 그 해 4월에 완공된 듯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4방향을 가리킬 때 동·서·남·북 순서로 말하듯이 고려 패망의 원인인 불교의 횡포를 처단하고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5상(五常) 중 4덕(德)을 인·의·예·지(仁·義·禮·智)로 하여 여기에 신(信)을 더하여 5상이라 하였다.

그래서 동쪽의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쪽의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쪽의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북쪽의 북대문은 홍지문(弘智門)

다시말해 仁·義·禮·智 한 글자씩 각 대문에 넣어 그 이름을 만들고 오상(五常)의 신(信)은 서울 한가운데인 광화문 앞의 보신각(普信閣)으로 이름 지었다.
그 후 동대문인 흥인문은 서울의 지세가 서·남·북은 산과 고지로 되어 있어 균형이 잡히나 동대문이 있는 동쪽은 지대가 턱없이 낮아서 그 기운을 메우기 위해 갈지(之)자를 넣어 '흥인지문'이라 하고 한 줄로 세워서 글씨를 쓴 다른 대문의 현판과는 달리 '흥인지문'의 현판은 가로 두 줄로 써서 풍수지리설에 의해 모자라는 기(氣)을 보충토록 했다 한다.

동대문이 기울면 나라에 큰 일이 온다
동대문이 기울면 나라에 큰 일이 온다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보는 동대문은 조선후기에 와서도 여러 번에 걸쳐 개축을 하고 보수를 하여 튼튼하지만 조선초기의 동대문은 토성 위에 둘러싸여 있는 나무대문 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였을까.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동대문이 기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수양대군에 의해 단종이 강원도 영월땅 청령포로 귀양을 떠난 후였다.
그때 단종의 왕비였던 송씨는 단종을 따라서 함께 가지 못하고 궁궐에서 쫓겨난 후 동대문 밖에 있는 정업원 암자에 홀로 남아 아침저녁으로 멀리 강원도 영월땅에 계신 낭군님인 단종을 그리워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한다.

이 딱한 사정이 정업원 근처 민가에 알려지자 동대문 밖에 사는 마음씨 착한 아낙네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서로 다투어가며 정업원에 살고 있는 단종비 송씨를 돕기 위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그러나 가난한 민초들인 그들이 단종비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집에서 키우는 닭 한 마리 정도였고 아니면 쌀이나 보리쌀 한 되 또는 집 근처 텃밭에서 나는 푸성귀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바깥에 나갔던 상궁이 숨을 가쁘게 몰아 쉬면서 단종비 송씨에게 아뢰었다.
"마마, 참으로 기이한 일이 생겼다 하옵니다."
"기이한 일이라니?"
"…"
"어서, 말해 보거라. 기이한 일이 생겼다 하지 않았느냐?"
"글쎄 동대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고 하옵니다."
상궁은 송씨의 눈치를 보며 겨우 고했다.
"아니! 뭐야? 동대문이 기울어졌다 했느냐?"
"그렇습니다. 마마."
그 말을 듣는 순간 단종비 송씨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예전부터 동대문이 기울면 나라에 큰 일이 온다는 말을 자주 들은 바 있었다.
"또 무슨 변이 나려고 그러는고?"
송씨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낭군인 단종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스쳐갔다.
"동대문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다 하더냐?"
송씨가 상궁 나인에게 물었다.
"마마…공교롭게도 동남쪽이라 하옵니다."
"아니! 뭬야? 동남쪽이라고 했느냐?"
"그러하옵니다."
"동남쪽이라면? 상감마마께서 가 계신 강원도 영월쪽이 동남쪽이 아니더냐!"
안 그래도 요 며칠사이 꿈자리가 뒤숭숭하여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송씨로서는 큰 근심이 아닐 수 없었다.
단종비 송씨는 동대문이 동남쪽으로 기울었다는 상궁 나인의 말을 듣고 그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그 후 며칠이 지나 단종은 사약을 받고 말았다.

인조반정 때도 동대문은 기울었다.
단종이 유배지 영월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뜬 후 다시 100여 년이 지난 광해군 말년에 동대문이 다시 또 기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단종 때와는 달리 동남쪽이 아니라 북서쪽으로 동대문이 기울었다.
동대문이 기울었다는 소문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가뜩이나 광해군의 폭거에 뒤숭숭하던 민심은 타는 불에 기름을 갖다 부은 듯이 전국적으로 이 소문을 퍼뜨렸다.
"동대문이 기울면 국난이 온다는 데 이제 곧 나라에 큰 변고가 나겠지."
"이번에는 동대문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다 하던가?"
"북쪽으로 기울었다지?"
"북쪽 오랑캐들이 침범하는 것 아닌가?"
사람들은 삼삼오오로 모여 입소문을 키우며 얘기를 나눴다.
자연히 민심이 뒤숭숭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광해군 곁에서 온갖 만행을 저지른 간신 이이첨이 포졸들을 풀어서 동대문이 기울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잡아 엄벌을 처했다.
그러나 그렀다고 해서 동대문이 기울었다는 소문이 불식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그 해 동대문이 북서쪽으로 기울었던 그대로 한양의 북서쪽인 홍제원에서 인조를 옹립하는 반정군이 군사를 일으켜 간신 이이첨과 광해군을 궁궐에서 내쫓았다.
그 또한 국난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난 대 사건이었다.

구한말 임오군란 때도 동대문은 기울었다.
구한말 임오군란 때도 동대문은 기울었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구한말에도 동대문이 동남쪽으로 기울었다. 그 당시 고종은 쇄국정책을 고집했던 대원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개화정책을 쓰고 있을 때였다.
"왜놈들이 우리 땅을 맘대로 유린하고 있으니 어찌 조상들이 노하지 않겠소?"
"그래도 대원군께서 정치는 잘했어. 그때는 멀쩡하던 동대문이 이제 와서 왜 기울겠어?"
"민씨 일파들이 나라를 들어먹으니까 경고를 주는 것이 아니겠어?"
다시 또 민심이 흉흉해 지기 시작했다.
고종 19년(1882) 6월, 결국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명성황후인 민씨 일파에 의해 유지되던 민씨정권은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구식 군대를 도태시키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조직했다. 일본군대를 본뜬 군제였다.

그 당시 서울에 있었던 구식 군대는 실상 군인이라 하기보다는 도시 하층민, 다시 말해 영세 소상인이나 영세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 노동자·농민 중에서 충원된 사람들로서 각자 가족을 거느리기 위해 부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복무하는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신식군대가 발족하자 구식군영 군인들이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소속된 군인들에게는 무기며 의복 등 여러 면에서 좋은 대우를 해주고 봉급도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지급하는데 반하여 구식군영 군인들은 자꾸만 실직을 당하여 불안해 하면서도 몇 달치의 급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오군란이 있기 전에 이미 구식 군인들 사이에는 동요와 반항의 기운이 고조되었고 군란이 일어나기 전 해인 1881년 2건의 폭동준비 사건이 있었다.

군인들의 움직임이 아니다 싶었던지 정부에서 약간의 급료를 쌀로 지급하여 구식군영 군인들을 무마하려고 1882년 6월에 밀린 급료 1년치 중에서 1개월 분을 지급했다.
그러나 군인들이 받은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있고 또한 양도 규정에 휠씬 못 미치자 군인들이 끝내 분노를 못 이기고 배급 책임자를 구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는 배급을 담당한 선혜청의 잘못을 시정하지는 아니하고 오히려 난동의 주동자를 잡아들이자 마침내 6월 9일 군인들이 무기고를 점령하고 일제히 봉기를 하기에 이르렀다.
군란을 일으킨 군인들은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선혜청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선혜청 책임자인 민겸호의 집에 불을 질렀다. 또한 별기군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을 살해하고 일본공사관을 폐쇄하였다. 다음날은 여세를 몰아 창덕궁으로 쳐들어가 대원군의 친형인 흥인군 이최응을 비롯하여 민씨 일파에 의해 조종당했던 고관들을 살해하였다.
그 당시 명성황후 민비는 군란를 피해 변장을 하고 창덕궁을 빠져 나와 장호원으로 피신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장호원은 동대문이 기울었던 서울의 동남쪽 방향이었다

200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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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la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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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요

- 모찌기 소리

 들어내자 들어내자 이 모판을 들어내자
 위와내자 위와내자 이 모판을 위와내자

 이 논에다 모를 밟아 모찌기가 난감하네
 하늘 우에 목화 밟아 목화따기가 난감하네

 쪼루자 쪼루자 이 모판을 쪼루자
 해는 솟아 중천이다 이 모판을 쪼루자

 잡아 가거래이 저 사자야 이 모판을 잡아 가거래이
 젲쳐주이소 젲쳐주이소 주먹모로 젲쳐주이소

 * 모를 찔 때 부르는 소리는 거의 전승이 끊긴 상태지만 드물게 채록되었다. 두 패로 나누어 ''주고 받아부르는'' 교환창 형식으로 불렀다. 이 노래가 이 유역 〈모찌기 소리〉의 일반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2.판소리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창, 노래)와 아니리(말)로 엮어 발림(몸짓)을 곁들이며 구연하는 창악적 구비서사시(口碑敍事詩)이다. 
 판소리의 어원과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 일치된 견해가 없으나 다수의 청중들이 모인 놀이판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판소리는 일반적으로 지역적인 특징에 따라서 전라도 동북지역의 소리제를 동편제, 전라도 서남 지역의 소리제를 서편제라 하며 경기도, 충청도의 소리제를 중고재라 분류하기도 한다. 다만 대구의 경우 독특한 제(制)는 없으나 지리산을 경계로 한 경상도 지역은 동편제의 탄생지역으로 역대 대구권 에서 여류 판소리 명창들이 많이 태어났으며 또한 이들 명창들은 대구의 판소리는 독특한 나름의 특징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기능보유자 이명희는 선산의 명창 박녹주의 계보를 이어받았으며, 1990년 전주대사습에서는 영남인으로서는 처음 대통령상을 수상하여 명창으로 인정을 받았다. 

혜텍점,,,

2008.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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