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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질문 세가지 (1.통찰지, 2.나-고통, 3.범천과 마라)
비공개 조회수 725 작성일2019.06.15


(A.통찰지와 알음알이)

https://cafe.naver.com/jetavana/4431

(B.사띠와 삼빠자나-지식인의 답변. 무단사용 양해바랍니다.)

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903&docId=329004437

(C.무아의 특징 경 S22:59)

https://blog.naver.com/whiteespresso/221197745468




질문1. 통찰지와 알음알이는 함께 간다. 의 이해가 맞는지요.



a. 통찰지 : 꿰뚫어 앎 (무상 고 무아) 
                 알음알이 -분별해서 앎 (연기되어 말미암아 일어남을 앎 - '공' 한 것을 앎)


b. 삼빠자나 :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보는것 (무상 고 무아)
    싸띠 : 마음챙김 (몸과 마음, 생각, 대상을 관찰함)


c.알음알이 역시 무상한 것(=괴로움=무아)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알음알이 = 마음챙김(사띠). 통찰지 = 삼빠자나(위빠사나), 위빠사나 = 삼빠자나 + 사띠.

이렇게 이해하는게 맞는지요?

지식인 답이 있긴 한데 확인차 한번 다시 여쭈어봅니다. 



질문2. C.'무아의 특징 경'에서 왜 나라면 고통이 따르지 않아야 하는지요.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아다. 만일 물질이 자아라면 이 물질은 고통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물질에 대해서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면 그대로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고' 다. 태어남으로 '고'가 발생 된다. 는 알겠는데


되려 물질이 자아라면 이 물질은 고통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이 부분이 이해가 안되네요.

왜 물질이 자아라면 고통이 따르지 않아야 하는지요. 

차라리 당연히 고통이 따른다고 하면 이해가 될텐데,


왜 물질이 나라면 고통이 따르지 않아야 하는지요?



질문3,


범망경(견해의 그물),


한편 이런 연기의 가르침이야말로 무아의 가르침이요 무아의 가르침은 바로 존재론적인

실체인자아를 해체하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연기-무아로 존재론적인 실체인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떨쳐버릴 때 그것이 바로 견해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이라고 부처님께서는 설하신다.


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903&docId=47938238&qb=6rKs7ZW07J2YIOq3uOusvCDrspXrp53qsr0=&enc=utf8&sect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UdcYNspVuFdssb6HIFlssssss/N-192744&sid=ca1r6ZYQnTuL8b8ZLoeUdA%3D%3D


범천의 초대 경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6jgp&articleno=15782833


하느님 바카 역시 마라(빠삐만) 손 안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빠삐만을 단순히 '고'라고 생각했는데

'천상의 행복'을 모두 포함한 '자아'라고 받아 들여 집니다.



위의 글들을 종합해보면


견해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것 =

자아를 해체하는 가르침 = 통찰지와 알음알이의 자나 깨나 실천(위빠사나)


이렇게 이해 합니다. 바른 이해가 맞나요?






제일 이해가 안되는 것은 2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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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

<달마어록 중에서>

마음이 움직임을 멈출 때 그것은 열반으로 들어간다.

열반은 바로 텅 빈 마음이다.

이 무심(無心)을 아는 것이 곧 부처를 보는 것이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은 피안(彼岸)에 다다른 것이다.

그대의 내면에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바깥 세계도 생겨나지 않는다.

바깥 세계와 마음이 둘 다 사라질 때 그것이야말로 참된 견해이다.

그대의 마음은 본래부터 텅 비어 있다. 모든 형상들은 환상일 뿐이니 그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대는 모든 장벽을 넘어갈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깨달음에 이르고자 결심했다면 그가 수행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다른 모든 방법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은 곧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깨달음에 이른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슨 수행을 하더라도 헛된 것이다.

열반의 영원한 축복이 마음이 쉬는 데서 나온다.

삼계에 태어나는 윤회도 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음은 모든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마음 없음이 곧 모든 것이고, 적멸(寂滅)이 곧 마음 없음임을 알아라.

http://blog.daum.net/heal4us

2019.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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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아재
태양신 열심답변자 eXpert
40대 이상 남성 사주, 궁합 99위, 불교 10위, 철학, 심리철학 17위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잘못된 방향으로 달리고 계시네요.

결국은 사마타(집중, 계율)와 위빠사나(통찰) 입니다.

수행을 해서 내 몸과 마음에 뭔가 얻는게 있어야지

다음이 보이죠.

디가니까야에 보면

아난다 존자님이 네가지 선정에 대해서 꼼꼼하게 설명하고 있죠.

지식은 결국 지식일뿐.

초월적 지식이 되지 않습니다.

완죤 '지식의 저주'죠.

2019.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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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행
은하신 열심답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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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에서 다른 부분은 맞습니다만 한 가지 잘못된 부분이 있네요.

<알음알이 = 마음챙김(사띠)> => 서로 다릅니다.

알음알이는 마음입니다. (識蘊에 속함)

마음챙김(사띠)는 마음부수입니다. (行蘊에 속함)

질문 2에서

<왜 물질이 나라면 고통이 따르지 않아야 하는지요?>

왜냐하면 나는 고통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물질(몸)이 나라면 나는 늙기를 원하지 않고 죽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몸이 늙지 말아야 하고, 죽지 말아야 합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나'이니까요. 예를 들어 왕이 자기 나라 안에서는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명령을 내려서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처럼 몸이 '나'라면 내 뜻대로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지 않는 늙음, 병듦, 죽음이 있고 또한 키작은 사람은 키가 크기를 바라더라도 키가 커지지 않으며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또한 나는 고통을 원하지 않고 즐거움을 원하는데 고통이 일어나는 것도 뜻대로 안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질문 3에서

<하느님 바카 역시 마라(빠삐만) 손 안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바카는 마라(天魔)보다 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마라의 지배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바카는 범천이고 색계의 초선천에 속합니다. 악마 빠삐만은 욕계의 가장 높은 타화자재천의 꼭대기(범천의 밑)에 살고 있습니다.

마라는 부처님과 아라한, 아나함의 성인들을 제외한 욕계의 모든 중생들(수다원, 사다함 포함)을 손아귀에 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감각적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은 모두 마라에 잡혀있기 때문입니다. 마라는 수행자들을 감각적 욕망에 빠뜨리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유혹합니다. 마라는 도닦는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자기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통찰지와 알음알이의 자나 깨나 실천(위빠사나)> => 알음알이가 아니고 사띠입니다.

2019.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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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명 김상목
별신
40대 이상 남성 서비스업 #혼서지 #붓글씨 #대필 불교 2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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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통찰지 : 꿰뚫어 앎 (무상 고 무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높은 지혜에 의한 사실의 통찰=여실지견=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

알음알이 -분별해서 앎 (연기되어 말미암아 일어남을 앎 - '공' 한 것을 앎)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알음알이=견문각지=인식작용

b. 삼빠자나 :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보는것 (무상 고 무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삼빠자나=사띠의 확립의 실천=正知=올바른 알아차림

디가니까야

전재성 역주

2.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

(새김의 확립과 올바른 알아차림)

[세존]

“대왕이여, 어떻게 수행승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춥니까?

그는 나아가거나 되돌아 갈 때에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앞을 바라보거나 뒤를 돌아볼 때에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굽히거나 펼 때에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 때에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볼 때에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대소변을 볼 때에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가고 서고 앉고 잠자고 깨어 있고 말하고 침묵할 때에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춥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춥니다.”

싸띠 : 마음챙김 (몸과 마음, 생각, 대상을 관찰함)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사띠=새김=正念

이 싸띠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직접 <<쌍윳따니까야>>에서 정의 내린 부분-‘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anussarati anuvitakketi), 그 때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시작한다.(S45:3)’-을 참고 하여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는 분명히 기억과 사유가 새김의 전제조건으로 확실한 싸띠에 대한 해석학적 설명, 즉 기억과 새김의 전제조건으로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싸띠라는 말은 범어의 스므리띠(smurti)의 빠알리어 형태로 원천적으로 ‘기억’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나,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 분명한 앎’이란 의미도 갖고 있으므로 그 둘 다의 의미를 지닌 우리 말을 찾던 역자는 ‘새김’이란 가장 적당한 번역어라고 생각했다.

새김은 과거에 대한 기억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조각(彫刻)-물론 사유를 은유적으로 이해할 때에-이라는 의미를 모두 함축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이 없이는 사물에 대한 지각을 올바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재성박사, 싸띠(sati:念)와 새김, 맛지마니까야 해제, 중요한 번역 술어에 대한 설명)

왜 물질이 나라면 고통이 따르지 않아야 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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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이 나라면 질병이 들 수 없음

[세존] "수행승들이여, 물질(몸 육체)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물질(몸 육체)이 나라면 이 물질(몸 육체)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물질(몸 육체)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질병에 들지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전재성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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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한 것(오온,사람)은 내가 아니다)

실체가 있어 실재하는 나는 변화하는 법(무상한 법)이 아님

질병이 없는 내가 질병이 있는 나로 변할 수 없음

그러므로 육신이 나라면 질병이 들 수 없음

견해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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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해=번뇌

번뇌소멸=팔정도의 실천

2019.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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