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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왜 3.1절에 대한독립만세인거죠?
비공개 조회수 4,379 작성일2019.03.01
3.1운동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만들어지고 태극기 만들어진거 아닌가요?
그럼 3.1운동때 외친건 대한독립만세가 아니라 조선독립만세 아닌가요?
독립선언서에도 조선독립이라 나와있는데 좀 이상해서요

따지고보면 대한독립만세는 광복절에 유효한게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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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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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jfa****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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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만세라는 말은
광복이후 대한민국 위정자들이 국민들 교육용으로 편집해서 만들어낸 구호라고 보시면 맞아요.
당시 3.1 독립선언서만 봐도 본문의 내용이 일관되게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고 있지..
대한의 독립이라는 말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고작 13년이란 기간 잠시 존재했으되 일반 백성들에게 의미가 미약했던
대한제국은 이미 망한 상태였고 그 당시 사람들에게 국호로서 또 국가의 의미로는 조선이 절대적이었습니다.
기미년 만세운동에서 사람들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지 '대한독립만세'라는 말은
대한민국 정부의 애국주의 마케팅에 의해 각색된 용어일 뿐이죠.

2019.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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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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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이상 남성 농림어업인 #재무제표 #주식투자 #성장주 정치외교학 1위, 주식, 증권 15위, 경제 정책, 제도 6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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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 ]

요약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의 조선의 국명.

대한제국의 국기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을 계기로 개화당은 조선 국왕을 황제로 격상하고자 하였다. 우선 용어를 공식적인 칭호에서 군주()를 대군주()로, 전하를 폐하()로 높여 불렀으며, 명령을 칙(), 국왕 자신의 호칭을 짐()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이 노력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중단되었으나, 1894년 갑오개혁 때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을 사용함으로써 1896년 1월부터 연호를 건양()으로 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고 같은 해 2월 아관파천()으로 중단되었다.

1897년 2월 고종이 환궁한 후 독립협회와 일부 수구파가 연합하여 칭제건원()을 추진, 8월에 연호를 광무()로 고쳤으며, 9월에는 원구단()을 세웠고, 드디어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올림으로써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

제국을 성립하기까지 서로 연합하였던 독립협회와 수구파는 정체() 문제로 대립하였다.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로 개혁하여야 한다고 한 반면, 수구파는 전제군주제()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대립은 1898년 절영도(:부산 영도)를 러시아에 조차()하는 문제로 격돌하였다. 독립협회는 조차를 외국이 침략하는 첫 단계라고 판단하고 1898년 3월 10일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1만여 명이 참가한 만민공동회()를 서울 종로에서 열어 절영도 조차 요구 반대, 일본의 국내 석탄고 기지 철수, 한로은행() 철거 등을 요구하고 제국의 자주독립 강화를 결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가 철회되고 일본도 국내의 석탄고 기지를 되돌려주었으며,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니시-로젠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세력이 균형을 이룸으로써 자주독립국으로서의 실천을 이룩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다.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계속 추진하여 1898년 11월 2일 중추원신관제()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발전적인 계획은 수구파들의 모략으로 좌절되었다. 그들은 독립협회가 의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한 공화제()를 수립하려 한다는 전단을 뿌렸다.

이에 고종은 경무청()과 친위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고 개혁파 정부를 붕괴시킨 다음 조병식()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 정부를 수립하였다. 여기에 자주 독립세력을 꺾어버리는 것이 이롭다고 판단한 일본이 수구파에 가담, 독립협회의 운동을 탄압하도록 권고하고 이를 고종이 받아들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해산함으로써 독립협회와 수구파의 싸움은 수구파의 승리로 끝났다.

수구파 내각은 1899년 8월 17일 대한국국제()를 제정·공포하였다. 이에 따르면 국호는 대한제국이고 정체는 전제군주제이다. 수구파 정부는 국제열강의 세력균형을 이용하여 실력을 기르는 데 힘쓰기보다는 친러적인 경향이 강하였다.

이를 지켜본 일본은 러시아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러일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안 정부도 1904년 1월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서울을 점령하고 2월 23일 대한제국을 위협하여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은 침해되기 시작, 일본은 1904년 7월 20일에는 군사경찰훈령()을 만들어 치안권()을 빼앗은 데 이어 8월 22일에는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로 재정권을 빼앗아갔고, 1905년 11월 17일에는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이 강제체결되고, 같은 해 8월 29일 공포됨으로써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한제국 연표
발생시기주요사건

1894년 7월

갑오개혁으로 중국의 연호 폐지, 개국기년을 사용하기 시작.

1896년 1월

연호를 건양으로 함.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갑오경장 내각이 붕괴됨.

1897년 8월

고종 환궁 후 칭제건원 추진하여 연호를 광무로 함.

1897년 10월

고종 황제즉위식 거행.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선포함.

1898년 3월

서울에서 만민공동회 개최하여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강화를 결의함.

1898년 4월

러시아와 일본이 '니시·로젠 협정'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기로 협약함.

1898년 11월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추진하여 의회설립법인 '중추원신관제' 공포.

1899년 8월

수구파 내각이 전제군주제인 '대한국국제'를 제정, 공포.

1904년 1월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 국외중립을 선언.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일본이 서울을 점령하고 한일의정서를 체결.

1904년 7월

군사경찰훈령으로 치안권 강탈.

1904년 8월

한일외국인고문용빙 관련 협정서로 재정권 강탈.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로 외교권 강탈.

1907년 7월 20일

고종 황제 퇴위, 순종 황제 즉위.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 체결. 국권 피탈.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제국 [大韓帝國] (두산백과)

201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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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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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h****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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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1919년 3월1일에는 대한독립만세가 아닌 조선독립만세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한독립만세가 익숙하지요?

지금부터 그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조선이었던 시기는 고조선도 있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조선은 1392년~1910년까지 존속했던 나라를 말하는거예요.

그런데 1897년에 황제국을 표방하면서 대한제국으로 국호가 바뀌죠.

참고로 대한이란 뜻에는 삼한을 잇는 큰 한이란 뜻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조선도 고조선을 잇는다는 뜻이 있어요.

그렇게 국호가 바뀌었지만 그 국호는 13년 밖에 쓸수가 없었죠.

그래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대한이라는 국호보다는 조선이라는 국호가 더 익숙해진것입니다.

그런데 일제시기를 지나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인 1950년(단기4283년) 1월16일 관보에 보면

조선이란 명칭을 사용금지한다는 고시가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범석 국무총리이름으로 나와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국호는 대한민국이다. 그렇지만 편의상 대한 이나 한국으로 부르는것은 가능하다.

그렇지만 조선이란 이름은 북한괴뢰정권과 결연히 구별하기 위하여 앞으로 국명은 물론 지명으로도 사용함을 금한다고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라는 국호에서 분명히 조선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과 구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우리는 조선이 아닌 대한이 익숙하게 된것이고 그렇기에 조선독립만세가 아닌 대한독립만세가 자연스럽게 된것입니다.

참고하시라고 당시 관보중 조선이라는 국명 사용금지가 나온 맨 첫부분을 첨부해 드립니다.(국한문혼용이라 알아보시기 어려울수는 있다는점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태극기는 조미수호조약때 처음 도안이 되요.

처음에는 태극에 8괘로 하려고 했지만 너무도 복잡하다는 의견을 따라 4괘로 하게 된것입니다.

단 국기의 모양은 이때는 정해지지 않습니다.

단지 내각수반이었던 김홍집의 명령으로 역관 이응준이 도안을 했다고 전해지는것이 바로 조미수호조약당시 조선에 왔던 슈펠트제독문서에 전해지고 있어요.

이렇게 국기의 필요성을 절감한 조선정부는 1883년 3월6일 국기를 정식으로 선포하는데요.

당시 국기의 이름은 조선국기였습니다.

참고로 태극기라는 이름은 3.1운동때 처음 등장하는데요.

이유는 조선국기하면 일본이 알아들을 수 있지만 태극기는 당시에는 들어본적이 없는 이름이었기 때문에

조선국기를 상징하는 암어로 등장하는것입니다.

이렇게 조선과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되고 정부수립이 된 이후인 1949년 1월 태극기에 대한 법령이 논의되기 시작해

그해 최종적으로 태극기의 모양과 명칭이 확정이 됩니다.

그리고 1997년 기존의 태극기가 색상이 너무 어둡다는 지적이 있어 색상이 밝은 톤으로 바뀌고 규격도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고로 아래에 이응준이 도안했다고 하는 태극기 사진을 올려드립니다.

2019.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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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신
3.1 운동은 2.8 도쿄 운동에서 비롯되었고요
3.1 운동 만세운동이 일어난 7곳 중 6곳이 이북이예요
현재 대한민국에서 말할 수 있는 건 서울 뿐이죠
당시 조선은 대한제국이었고 대한민국이 아니었고요

201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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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3.1 운동이 일어나게 된 여러가지 배경이 있는데요 , 이중에 제일 컸던것은 바로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이전 1897년 대한제국으로 나라이름을 바꾸고 난 후 일어났던일이기 때문에 대한독립만세가 맞습니다

2019.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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