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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탈 문화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chsu**** 조회수 6,732 작성일2010.10.05

하회탈 전설을 주제로 발표를 하게 됬는데요

비단 우리나라 탈 뿐만 아니라 다른나라의 탈 문화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종류뿐만 아리나 탈에 관한 전설 아는것이 있음 아려주시고(하회탈 전설 제외)

또 우리나라의 탈 문화가 세계에 어떻게 알려지고 있는지 문화콘텐츠 개발 계획이나 현황에 대해서도 아는것이 있음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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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탈춤의 종류

탈춤은 거의 우리나라 지방 전 지역에서 놀이 되었을 것입니다. 현재 보존되어 놀이되는 탈놀이는 대략 13종류 정도로 대개 지역별로 구분되는데

[1]. 황해도 지역 [봉산탈춤], [강령탈춤], [은율탈춤]
[2]. 서울 경기 지역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
[3]. 경북 안동 [하회 별신굿 탈놀이]
[4]. 경상남도 지방 [통영오광대], [고성오광대], [가산오광대]
[5]. 부산지방 [동래야류], [수영야류]
[6]. 강릉지방 [강릉 관노놀이]
[7]. 함경도 북청 [북청사자놀이]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2  탈의 유래와 역사

[탈의 유래]

 

우리 민족은 탈을 주변에 가까이 두기를 꺼렸습니다. 장례식에서 쓴 방상시(方相氏)는 물론이고 한 마을의 지킴이로 모셨던 탈들도 마을에서 좀 떨어진 당집 안에 둘 뿐 절대로 방안에 걸어 놓는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탈놀이가 끝나게 되어도 어느 고장에서나 탈을 불에 태워 없앴는데 이것이 놀이의 마무리인 양 꼭 지켜져 왔습니다. 그것은 탈에는 갖가지 액살이 잘 붙는 것이니 태워 버려야 한다는 것이 오랜 속신(俗信)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오래된 민족들에게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한국 연극, 무용, 영화 사전"(한국예술사전IV, 편찬위원회, 대한민국예술원,1985)의 '가면(假面)' 항목이 탈에 대한 국내외의 해석을 적절하게 요약하였습니다.

가면은 얼굴을 가려 변장이나 방호, 호신등의 특정한 목적과 용도로 쓰이며 또한 동물, 초자연적인 존재를 표현하는 가장성을 갖습니다. 넓은 의미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방한, 방독, 방호적인 측면까지 포함시키고는 있으나 대개의 경우는 토속적, 연극적 가면을 뜻하며 상징과 표정 두가지 요소로 환원되는 조형 예술품입니다.

가면은 한자로는 면(面), 면구(面具), 가수(假首), 가두(假頭), 가면(假面), 대면(代面,大面)등으로 표기합니다. 우리말로는 탈, 탈박, 탈바가지, 광대, 초라니라 불러 왔으나 현재는 일반적으로 탈이라 통칭되고 있는데, 얼굴 전면(前面)을 가리는 면구(面具)를 가면이라 하고, 머리 전체 후두부까지 가리는 것을 가두, 투두(套頭), 가수로 구별 하기도 합니다.

 

[탈의 역사]


가면을 사용한 것은 원시시대부터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처음에는 수렵생활을 하던 원시인들이 수렵 대상물인 동물에게 접근하기 위한 위장면(僞裝面)으로, 뒤에는 살상한 동물의 영혼을 위로 하며 또한 그 주술력을 몸에 지니기 위한 주술적 목적에서 비롯하여 점차 종교적 의식과 민족 신앙의 의식용으로 변모, 발전되었습니다.
중국의 연극사에서 가면의 효시는 나례(儺禮)에 쓰인 방상시 가면이며, 나례 계통과 다른 가면은 육조(六朝)시대 이래의 가무(歌舞)에 쓰인 구자(龜玆), 천축(天竺), 강국(康國), 안국(安國) 등 서역 악무의 영향을 받은 외래의 것이었습니다.
고구려의 무악면(舞樂面), 백제의 기악면(伎樂面), 신라의 월전(月顚)/속독(束毒)/산예면 등도 서역의 영향을 받은 가면들이며 중국의 방상시면과 서역계의 외래면도 함께 전해 받은 것으로 짐작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가면 중 최초의 것으로 알려진 것은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조개껍질에 두 눈과 입을 뚫은 가면입니다.
다음은 6세기경 신라시대의 방상시 가면으로 추측되는 목심칠면(木心漆面)으로, 1946년 경주 노서리 호우총 고분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그 외에 덕물산(德物山) 가면, 국보 제121호로 지정된 하회(河回) 가면, 병산(屛山)가면 등 옛 가면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탈의 의미]

 

탈이란 무엇인가를 명료하게 정의 내리기에는 탈 자체의 실체와 기능이 너무 다양하면서도 복합적입니다.

탈이란 아득한 인류의 역사와 함께 생산 신앙성을 띠면서 벽사, 의술, 영혼, 추억, 토템, 기우, 수렵, 전쟁, 연희, 등에 쓰여지기 위해 창출된 역사적 조형물입니다. 그것은 풍토, 역사, 생활 양식에 따라 독창적인 '탈문화권'을 형성하는 것이니 그 분류, 분포는 심지어 '마을의 역사' 단위로 세분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역사적 소산이기 때문에 지난 시대의 형태를 반복 표현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발전과 함께 가변하면서 부단히 재창출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창출했을 탈의 시원은 현재로서는 기원전 5천년에서 3백년경으로 잡는 선사시대의 유물들에서 그것의 편린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곧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소형인물상이나 동물상들이 돌, 뼈, 흙 등으로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인물우(人物偶)는 가족, 씨족이나 마을을 수호하는 샤먼적인 신상들인데 이러한 조형물들에서도 탈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는 부조들이 있습니다. 암벽화, 벽화등에서도 탈이 존재했음을 암시하고 있으나 '바로 이것'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은 없습니다.

문헌 자료로서는 제3세기경 한반도의 여러 부족의 생활상을 기록한「삼국지위지동이전」과 그 밖의 중국 사적의 단편적인 기록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에 의하면 어느 부족 사회에서나 1년에 한두 차례의 국중대회를 열어, 하늘에 제사하고 연일 술 마시며 춤을 췄다고 하였습니다.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 마한의 5월제와 10월제 등에서 이미 탈도 함께 쓰여졌을 만한 제의성(祭儀性)이 강한 연희가 포함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대의 제의 및 연희 유산은 오늘날에 전승되고 있는 다양한 민간 예능에서 내용을 복원, 재구성하게 되는 것이니 현존하는 '당굿'이 가장 소중한 대상입니다. 아직도 여러 고장에서 전승되고 있는 당굿의 습속과 그에 따르는 가무오신적(歌舞娛神的) 각종 예능들은 앞에서 말한 영고, 동맹, 무천 등에서 발전하였으며 본디는 원초적 근원 연극의 줄기들로 보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이 방면에 있어서 소상한 내용을 전하는 『삼국유사』를 보면 「가락국기」가운데 건국 신화인 수로왕의 전설이 춤과 노래의 제전연희(祭典演戱)를 통해서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세시풍속과 관혼상제 때에 병행되었던 예능 곧 '토템 의례' '농경 의례' 특히 '상장례'등은 물론이고 숱한 민간 놀이들에서 이 땅의 연극 기원과 함께 탈의 존재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탈놀이'라기보다는 악가무(樂歌舞)가 함께하면서 이루어지는 이 땅의 독창적인 연희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탈의 시작은 부산 동삼동에서 출토된 패면(貝面)과 강원도 양구에서 출토된 토면(土面) 등으로 보아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갈 수 있습니다. 1946년 경주 노서리 호우총에서 옻칠을 한 나무탈이 발견되었는데, 눈알은 유리로 되어 있고 두 눈에는 황금 환(環)이 그려져 있습니다. 방상시 가면으로 보이는 이 탈은 6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 밖에 덕물산(德物山) 가면과 국보 제121호로 지정된 13개의 하회탈 및 병산탈 등이 전해집니다.

《삼국사기》와 최치원의 〈향악잡영 鄕樂雜詠〉에도 탈놀이 기록이 전해집니다. 한편 분명하지는 않지만 신라시대 탈놀음으로 검무(劒舞)와 처용무(處容舞)가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 현종 때의 학자 민주면(閔周冕)은 《동경잡기東京雜記》 풍속조에서 검무가 탈놀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검무는 관창의 용감한 이야기를 춤으로 놀이화한 것입니다. 처용무는 오늘까지도 연희되는데, 《고려사》 고종 23년조에 복야(僕射) 송경인(宋景仁)이 처용무를 추었다고 기록된 것이 문헌상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또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나례행사 때 방상시가면을 사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탈들이 뒷날 예능가면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조선조에는 산대잡희(山臺雜戱)에서 파생된 산대 가면극을 비롯하여 최근까지 각 지방 민간에서 연희되어 오던 해서(海西) 가면극, 야류(野遊), 오광대가면극 서낭신제 가면극 등이 있습니다.

 

 

[탈의 기능별 분류 ]

 

우리 탈은 과장되어, 코는 삐딱하고 눈꼬리는 사납게 찢어져 있는가 하면, 입이 비뚤어져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언청이탈, 문둥이탈, 옴탈과 같이 얼굴이 특이하거나, 혹이 나 있고, 이가 드러나 있으며, 이마가 넓고 주름이 많아서 각 부위의 비례가 맞지 않는 탈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면서도 사자탈이나 원숭이탈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듯이 모든 탈은 인간적입니다. 탈은 거의 타원형이지만, 바가지탈은 원형에 가깝고 나무탈과 종이탈에는 장방형, 역사다리꼴, 역삼각형도 있으며, 가죽탈처럼 모가 난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조각품이 평면적인 것과는 달리 가죽탈을 제외하면 입체감이 두드러집니다. 눈은 대체로 크고 동그랗거나 치켜 뜨고 있으며, 코의 경우 젊은 남성탈은 지나치게 크게 과장되어 있고, 여성탈은 콧대가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거나 굽어 있습니다.

입꼬리가 위로 치켜져 해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밑으로 축 처져 불만스러운 모습을 짓는 것도 있습니다. 언청이와 입비뚤이 등 병신스러운 모양을 하거나, 아랫입술이 윗입술을 덮고 있어 심술궂은 모양을 하고 있는 탈도 있습니다. 귀는 대부분 없지만 산대탈이나 오광대탈에는 귀가 있습니다. 동래와 수영의 들놀음야류탈에는 귀가 특히 과장되어 있습니다.

통영오광대의 양반탈은 턱이 없고, 하회탈은 턱이 분리되어 있어 움직임에 따라 턱이 열리고 닫히며 웃는 표정과 화난 표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탈의 고정성을 뛰어넘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한편, 색상은 대체로 원색적이고 강렬합니다. 탈놀이가 야간에 장작불 아래에서 행해지므로 강렬한 색채가 아니면 표현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면극에 사용하지 않는 개성 덕물산의 신앙가면과 야간에 연희하지 않는 하회 및 강릉의 탈은 색채가 강렬하지 않습니다.

원색으로는 붉은색, 검은색, 흰색이 많이 보이며, 푸른 남색도 더러 있습니다. 간색으로는 얼굴색에 가까운 황색이 주로 쓰입니다. 사실성에 바탕을 두지 않고 인물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강렬하게 표현하는 데에는 원색이 기능적입니다.

탈의 원색들은 신분계층에 따라 인물의 성격을 규정하기도 하지만, 남녀노소에 따라서 성격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늙은이 탈은 검고 어두우며, 젊은이 탈은 붉고 밝으며, 젊은 여성의 탈은 흰색이 많습니다.

색상은 방위와 계절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검은색은 죽음의 계절인 겨울과 북쪽을, 붉은색은 생산의 계절인 여름과 남쪽을 뜻합니다. 늙은이 탈이 검은색이고 젊은이 탈이 붉은색인 것은 겨울과 여름의 계절적 상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탈춤에서 보이는 노소의 극중 싸움에서 늙은이가 지고 젊은이가 이기는 것은, 싸움굿에서 여름이 겨울을 물리치고 승리함으로써 풍요를 비는 주술적 의미이기도 합니다.

간색으로 칠한 것은 하회탈이 대표적입니다. 여러 색이 배합된 간색을 몇 차례로 나누어 칠함으로써 입체감과 사실성이 돋보입니다. 부녀와 각시탈은 살색인 주황색을 몇 차례 칠한 위에 다시 흰색을 덧칠하고, 그 위에 연지, 곤지를 찍어서 화장한 여성의 얼굴을 실감 있게 표현하였습니다. 눈썹의 경우도 바로 검은색을 칠한 것이 아니라, 녹색을 칠한 다음 검은색을 덧칠하여 한층 깊이를 느끼게 하였습니다.

탈의 성격 표현은, 인물의 형상을 사실적으로 만들어 놓고 극중 행동을 통하여 어긋난 면을 폭로하는 경우와, 처음부터 인물의 부정적 성격을 형상화하여 풍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회의 양반탈은 반듯한 양반의 인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나, 극중 행위와 말은 양반답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 허위를 폭로합니다. 반대로 입이 비뚤어지고 턱이 뾰족하며 얼굴색이 검붉은 초랭이탈에는 신분적 한계가 드러나 있지만, 그 한계와 제약을 뛰어넘어 양반의 허위를 비판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하회탈은 용모 행위를 어긋나게 함으로써 인물의 성격을 풍자하는 효과를 올리는 것입니다.

기타 대부분의 탈은 생김새가 극중 성격을 드러냅니다. 양반의 바보스러움과 병신스러움을 우스꽝스럽게 나타내기 위하여 언청이와 문둥이 등으로 형상화하고, 노승의 허위를 풍자하기 위하여 검은 얼굴에 파리똥이 덕지덕지 앉은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탈의 형상에 이미 극중인물의 성격이 희화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들놀음의 말뚝이탈은 남성의 성기모양의 코가 이마에서 입까지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이는 건강한 성생활을 즐기는 민중의식의 반영이자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주술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탈의 색상에도 인물의 성격이 나타납니다. 붉고 짙은 색은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누런 색은 바보스럽고 무능한 성격, 그리고 검고 어두운 색은 찌들리고 소외당한 인물의 성격을 나타냅니다. 고성오광대의 홍백양반탈은 얼굴 좌우에 붉은색과 흰색을 칠하여 인물의 이중성을 보여줍니다.

하회탈은 보는 각도와 움직임에 따라서 표정이 바뀝니다. 양반탈은 눈두덩과 광대뼈 등을 갈매기 모양으로 파서 아래위의 움직임에 따라, 초랭이탈은 입매를 좌우 상반되게 그려 좌우 움직임에 따라 화난 표정과 웃는 표정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각시탈은 내려깐 눈과 정면을 응시하는 눈을 함께 조각함으로써 각시에 대한 사회적 제약과 이를 극복하려는 내면적인 의식을 함께 표현하고 있습니다.

탈에는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고려탈인 하회탈의 경우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등 인물의 성격이 표현되어 있고, 각시, 부녀, 할미 등 여성탈은 생산력에 따라 처음, 중간, 끝을, 중, 백정탈은 성속(聖俗)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조선 후기의 탈에는 포도부장, 포졸, 심지어 순사탈도 나타나며, 용산 삼계 덜머리집과 같은 술집여자, 취발이, 신장수와 같은 상업적인 인물도 나타납니다. 왜장녀, 서울애기와 같은 탈도 조선 후기에 등장한 탈입니다.

사회가 변하면서 새로운 탈이 생겨나기도 하고, 같은 탈이 다르게 형상화되기도 합니다. 고려탈인 하회의 중탈은 색상이 밝고 호방한데, 조선의 중탈은 어둡고 찌들려 보입니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와 불교를 탄압하던 조선의 시대상을 반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정리를 하여 탈의 기능적 분류 요약을 합니다.

 

 

백정탈

시대 : 고려시대
크기 : 높이24cm, 너비16cm
재료 : 오리나무
소를 잡는 백정역이 쓴다.
백정은 조선시대 계급구조에서도 최하층의 천민이었다.

이마에 주름살이 많은 것은 이같은 최하층 천민의 힘든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전에는 이 가면을 '희광이'라 불렀다고 하며, 사람을 사형하는 형용을 하였다고 한다.

얼굴빛은 주황색이나 좀 검붉다. 머리와 눈썹은 검은 칠을 했고 양미간에 홈이 있다.

이마와 미간과 양볼에 주름살을 새겨 험상궂은 인상을 주며, 눈은 실눈으로 뚫려있다.

콧날이 넓고 큰 코에, 턱은 하회별신굿의 다른 탈들처럼 따로 달아서 움직이도록 되어 있다.

극중에는 천민복장에 삼색 띠를 매고 도끼와 칼을 가지고 나온다.

 

부네탈

시대 : 고려시대
크기 : 높이24cm, 너비17cm
재료 : 오리나무

양반과 선비 사이에서 소첩역할을 하는 젊은 부인이 쓰는 가면이다.

얼굴 바탕은 살색으로 분칠을 하였으며, 이마와 양 볼에 연지, 곤지, 입술에도 붉은 칠을 하였다.

얼굴은 우뚝 솟은 날씬한 코, 눈썹, 눈, 양볼과 조화를 이루어 요염한 표정을 하고 있다.

젊은 부인의 복장으로 옥색저고리와 검정치마를 입는다.

 

이매탈

시대 : 고려시대
크기 : 높이15cm, 너비16.5cm
재료 : 오리나무
선비의 하인역으로 바보탈이라고도 한다.
얼굴빛은 주황색으로 양반, 백정가면과 같은 계통의 색깔이다.

눈은 실눈으로, 눈구석이 아래로 길게 처지고 이마와 볼의 주름살과 합쳐져 바보같이 웃는 표정을 나타낸다.
이 탈에는 하회별신굿에 나오는 다른 탈들과 달리 턱이 없다.

이 탈의 윕 입술에는 구멍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턱이 있었던 것 같다.
극중에서 이매는 평민 남자들이 입는 옷을 입고 벙거지를 쓰고 나온다.

 

초랭이탈

시대 : 고려시대
크기 : 높이20cm, 너비14cm
재료 : 오리나무
양반의 하인역으로 경망하게 까불어대는 성격이다.

오늘날도 경망되고 주책없이 까부는 사람을 보고 '초랭이 떨음한다'고 하는 것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턱이 움직이지 않게 고정되어 있는 대신 입을 벌리고 있으며, 벌린 입에는 아래윗니가 드러나 보인다.

양쪽 볼에 약간의 주름살이 새겨져 있으며, 짧고 빨간 수염을 달아 코믹한 효과를 나타낸다.

별신굿에서는 바지 저고리 위에 붉은 쾌자를 입고 두 어깨와 허리에 걸쳐 청홍색 띠를 두르고 나온다

 

중탈

시대 : 고려시대
크기 : 높이20cm, 너비16cm
재료 : 오리나무
세째과장에서 파계승이 쓰는 가면이다.
얼굴은 주홍색이며, 머리부분과 눈썹은 검은색을 칠한 흔적이 있다.

이마에 작은 혹이 있고, 코는 매부리코로 우뚝하다.
턱은 따로 노끈으로 매어 달아 움직인다.
지팡이를 들고 고깔을 쓰고 가사와 장삼을 입는다.

 

양반탈

시대 : 고려시대
크기 : 높이23cm, 너비17cm
재료 : 오리나무
하회별신굿 탈놀이 네째과장인 양반과 선비놀이에서 양반역이 쓰는 가면이다.
'한국의 탈'하면 언제나 제일 먼저 연상되는 이미지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특히 분리된 턱이 만들어내는 표정은 한국탈이 지닌 백미로 알려진다.

외모를 보아도 탈에 나타난 둥근 곡선에는 양반의 여유로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양볼 위와 눈구석 언저리에 가느다란 주름살이 잡혀 실눈과 함께 웃는 모습이다.
눈과 코는 뚫렸고, 턱은 따로 달아 움직인다.
극중에 나올 때는 흰색 도포를 입고 정자관을 쓴채 한 손에 부채를 든다.

후대의 양반탈들과 달리 이 탈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에서 권위와 위엄이 느껴지는 듯하다.

 

할미탈

시대 : 고려시대
크기 : 높이20cm, 너비14cm
재료 : 오리나무
늙은 할미역이 쓰는 가면이다.
얼굴바탕은 검붉은 색깔이고, 얼굴 전면에 녹색반점을 찍어 기미를 나타냈다.

머리와 눈썹은 검은칠을 하였고, 눈은 둥글게 뚫렸고, 미간은 깊이 파지고, 작은 코가 오뚝 솟았다.

양볼과 눈언저리와 입가에 주름살이 새겨져 있고, 턱은 움직이지 않는다.

평민계급의 노인복장으로 흰저고리와 회색치마를 입고 쪽박을 들고 나온다.

 

선비탈

시대 : 고려시대
크기 : 높이19cm, 너비16cm
재료 : 오리나무
네째과장에서 선비역이 쓰는 가면이다.
얼굴빛은 주홍색 바탕에 갈색이 덮혔다.
머리부분과 눈썹은 검게 칠했고, 이마와 양 볼과 눈 가장자리에 주름살이 새겨져 있다.

눈은 둥글게 뚫려 있어 웃는 얼굴이 아니고 다소 거만한 느낌을 주는 표정이다.

코는 매부리코로 크며, 턱은 따로 달아서 움직인다.

도포를 입고 갓을 썼으며, 담뱃대를 든다.

 

각시탈

시대 : 고려시대
크기 : 높이39.5cm, 너비20cm
재료 : 오리나무
세째 과장에서 처녀가 사용하는 가면이다.
얼굴전체는 살색 위에 분을 칠했고 양 볼의 둥근 연지와 이마에 곤지의 흔적이 있고 입술도 붉은 색을 칠하였다. 눈은 실눈으로 떴고 코는 평평한 편이다.

처녀의 옷차림인데 보통 노랑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는다.

 

 

 

 

 

 

 

 

 

 

 

 

 

다른나라의 탈.

 

 

 

 

 

 

 

 

 

 

 

아프리카 탈


아프리카 가면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는 많은 가면춤과 가면극들이 전승되고 있다.
이 중 나이지리아 요루바족의 에군군, 아픽포족의 오쿰크파, 이보족의 몬우, 말리 바마나족의 티 와라 등은 조상숭배와 관련이 있으면서 장례식가 입사식 등에서 연행된다.
말리 도곤족의 다마는 장레식과 기념식, 잠비아와 말라위 체와족의 니아우는 입사식과 장례식에서 연행된다.
말리의 도, 잠비아 므분다족의 마키시 등은 입회식에서 연행된다. 맘미와타는 성행위, 풍요와 관련된 물의 여신과 관계있는 가면극인데,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 널리 퍼져 있다. 이 외에도 아프리카에는 요루바족의 제레드, 아나낭족의 에콩, 티브족의 콰힐 , 시에라 레온의 오데레이 등 수많은 가면극이 있다.

이 가운데 나이지리아 요루바족 의 에군군과 이보족의 몬우, 말라위 체와족의 니아우 의식에서 연행되는 굴레 왐쿠루가 유명하다. 나이지라아 요루바족에는 조상숭배 제의인 에군군에서 연행되던 에군군 가면극이 있었다.
에구군은 누페족 또는 보르구족에서 유래했다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14세기에 에군군 가면극으로부터 궁정가면극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후대에 전문적인 유랑극단이 가면극인 알라린조(alarinjo)로 발전했다.

나이지리아의 이보어를 말하는 지역에서는 가면극들이 일반적으로 누에 보이는 형태에서의 영혼이나 단순히 신령을 의미하는 몬우 또는 무라고 불린다.
이보어를 말하는 지역에서 가면극은 거의 모든 마을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가면극에서 가면을 쓴 인물은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새롭고 일시적인 모습을 취하고 나타나는, 공동체의 죽은 사람의 영혼으로 간주된다.
몬우의 기원에 대해 영국의 식민지시대에 영국 출신 학자들은 몬우가 이가라, 칼라바리족, 에코이로부터 전래한 것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후에 나이리아 출신 학자들은 아우카 올루 고지대의이보족 정착 지역인 느리의 독립적이고 자생적인 문화적 전통에 주목하고, 가장 일반적이고 널리 퍼져 있으며 이상적이고 전형적인 몬우가 바로 느리 지역 내에서 활발하게 전승된다는 점을 들어, 느리의 몬우가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고 주장한다.

말라위의 체와족에서 가면을 만들고, 가면극을 연행하고 마을 공동체를 위해 가면행사들을 조직하는 사람들은 니아우 사회에 입회한 구성원들이다. 니아우에서 가면들 그 자체는 영혼들, 특히 죽은 사람들 그리고 조상들의 영혼들이라고 설명된다. 니아우 의식에서는 '굴레 왐쿠루'라는 가면극이 연행된다. 굴레 왐쿠루는 입사식, 장례식, 장례기념일, 새로 선출된 추장을 위해 봘로라는 제의공간을 새로 개설하는 축전 등 공동체 생활의 제의행사들이 일부이다.
굴레 왐쿠루는 체와족이 자이레의 루바 지역으로부터 말라위의 중부 지방까지 이주해 오는 과정에서 함께 따라온 것이다. 원래 굴레 왐쿨루는 니아우 의식이 구석기시대 기우사당 숭배로부터 분리되면서 발생했다고 한다.

 

 

 

 

 
콤메디아 델라르테 가면
유럽에서는 이미 고대 그리스의 비극에서부터 가면을 사용 했다.
기원전 1세기경 이탈리아에는 아텔라나라는 해학적인 즉흥가면소극이 있었고, 16세기 중반 이탈리아에서 성립된이후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의 각 도시를 순회하며 공연했던 콤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도 가면극이었다. 콤메디아 델라르테는 17세기가 되기 전에 전 유럽에 널리 퍼졌고, 18세기말까지 유럽의 대표적인 오락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유럽 대륙의 가면극은 16세기 튜더 오아조 때 영국으로 전래되었고, 왕 앞에서 연행되는 궁정연행물로 발전했다. 엘리자베스 1세 여황의 재위시 가면극도 여왕에게 헌정하는 뜻으로 연행되었다.

스튜어트 왕조 때 벤 존슨(Ben Jonson)이 궁정시인으로 일하면서 영국의 가면극은 절정에 달했다. 존슨은 가면극 형식에 문학적, 사회적 영향력을 가미했다.
존슨과 함께 무대미술가인 이니고 존스(Inigo Jones)는 1605년부터 1634년까지 함께 일하면서 우수한 가면극들을 많이 만들었다. 이와 같이 유럽에서도 고대부터 가면극이 성립되어 중세까지 활발하게 연행되었으나, 근세 이후 점차 쇠퇴했다.

 

 

 


데코데코코루루코루루코루루
 
코루루코루루코루루 



뉴질랜드 원시부족인 마오리족의 탈들이다. 올빼미 모양의 눈을 가지고 외부의 적을 방어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다. 올빼미는 밤에 활동을 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외부의 적으로부터 방어하여 준다고 생각한다.

"코루루KORURU"란 올빼미 눈 조각으로 마오리족 미팅하우스(의례장:공회당)의 꼭대기 용마루 부분 박공에 코루루를 조각하여 외부로부터의 적을 경계하고 지킨다. 또 혀를 내민 것은 적에게 겁을 주어 방어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눈 부분은 올빼미 모양으로 이 부분은 자개 PAUA SHELL로 만들어졌다.
어떤 탈들은 코코와이KOKOWAI를 칠하는데, 마오리족의 전통적인 페인트이다.
이 페인트는 말린 진흙과 오일을 섞어서 만든다.

코루루는 부족의 선조를 조각하여 전통을 이어가는 상징으로 여긴다.
그러나 요즘은 선조의 조각도 많이 달라져서 조상의 형상을 좀더 인간적으로 만들어 지고 있다.
머리의 모양이나 얼굴의 문신들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살아있을 때의 모습들이다.
머리 모양은 올려진 것들 나타내는 것이고, 문신은 양쪽으로 대칭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것들은 요즈음 새로 짓는 마오리족의 전통가옥인 공회당에서만 볼 수 있다. 자신의 조상들을 많이 각하는데
그 중의 하나인 데코데코 TEKO TEKO도 마찬가지이다. 마오리족의 조상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어 진 것으로 혀를 길게 빼고, 곤봉이나 몽둥이, 창을 들고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적을 위협하면서 추는 춤을 형상화 한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북미와 중남미는 가면극의 전승양상에서 매우 대조적이다.
북미는 서구인들의 식민지배와 점령을 통해 원주민들의 문화가 일방적인 쇠퇴를 거듭했다면, 중미와 남미는 스페인의 침입과 식민지배에도 불구하고 원주민의 문화를 어느 정도 지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문화를 받아들여 그것을 원주민의 문화와 혼합해 향유했다.

북미 원주민들에게도 애리조나 동중부의 화이트 마운틴 아파치(White Mountain Apache)족이나 북서안 지방의 부족들 등에 가면과 가면 춤이 전승되고 있으나, 가면극은 매우 드문 것으로 나타난다.
북서안에 사는 인디언들에게 포틀래치 행사의 일부로 식인자의 연극 등 약간의 가면그이 남아 있을 뿐이다.
포틀래치는 미국 북서안 인디언들이 부와 권력의 과시로 행하는 겨울축제의 선물 분배 행사이다.
원래 포틀래치는 가족, 부족 그리고 마을의 상호관계를 굳게 하기 위한 장치였다.
포틀래치의 중심은 의상과 가면들을 화려하게 전시하는 연극적인 행사들이다.

우리가 보통 중.남미-라틴 아메리카로 부르는 지역은 미주 대륙에 북미의 캐나다, 미국을 제외한 멕시코와 중미,
카리브해역 및 남미대륙의 제국들을 말한다. 이 중에서 멕시코의 가면문화는 인디오들의 여러 모양의 상징적인 가면들을 영혼과 직결하는 문화로 발전시켰다.
멕시코 동해안 지대의 또또낙Totonacs 인디오들은 가면으로 얼굴을 덮음으로서 일상생활을 떠나 자신의 정체와 영혼으로부터 해방되고, 새얼굴.새로운 인간성과 영혼을 가진다고 믿었다.

나무, 가죽, 천, 철기, 석기, 토기 등 다양한 재료와 색채를 이용 축제, 카니발, 의식(의례) 등에 사용되며,
신 , 마귀, 동물, 인어, 2중가면, 죽음, 귀족, 천사, 나비 등 다양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뜻에서 죽음의 가면에는 입이 없다. 주로 서해안 게레로Guerrero, 나야릿Nayarit, 미추아깐Michoacan, 오하카Oaxaca 지방이 주산지이다. 돌가면 중에 떼오띠우칸Teotihuacan (A.D : 450 - 650) 비취가면이 대표적이,통가면Casco은 크고 특이하다.

(중남미박물관의 팜플렛 내용을 발췌)

 

전사추장표범

 
장례가면장례가면멕시코 카니발에
사용되는 탈
멕시코 카니발에
사용되는 탈
멕시코 카니발에
사용되는 탈
멕시코 카니발에
사용되는 탈
멕시코 카니발에
사용되는 탈
멕시코 카니발에
사용되는 탈
멕시코 카니발에
사용되는 탈
 

 
콜롬비아 전사



 

 



귀주 옛탈 1귀주 옛탈 2귀주 옛탈 3종규종규 시종
삼국연희 장비삼국연희 유비삼국연희 관운장서유기 손오공서유기 삼장
중국 탄구탄구기복탈


 

 



운남성, 복건성, 귀주성를 주축으로 한 중국의 탈문화는 매우 발달된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의 전설에 따른 탈놀이는 매우 발달된 형태를 띄고 있다. 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탈들은 중국의 귀주의 소수부족과 한족, 내몽고지역의 탈들을 소장하고 있다.
귀주지역의 탈들은 청대말기의 것으로 삼국지의 인물들을 주제로 한 놀이이다.
내몽고탈은 요시대(700-800전)의 것으로 장례시 다시 태어남을 위해 얼굴에 씌웠던 것이다(장례용).

 

 

 

○ 하회탈이란?

 
-국보 제121호(1964년 지정)-
  하회탈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에서 전승되어온 제의용 탈이자 예술용 탈이기도 하다. 고려 중후기로 소급될 정도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무탈로 제작되어 그 조형미가 출중하기에 1964년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하회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본래 하회탈은 양반, 선비, 중, 백정, 초랭이, 할미, 이매, 부네, 각시, 총각, 떡다리, 별채탈 등 12개와 동물형상의 주지2개(암주지 숫주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총각’, ‘떡다리’, ‘별채’ 탈은 분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하회탈의 재질은 토종오리나무이며, 제작시기는 대략 고려 후기로 추정되고 있다.

  하회탈은 사실적 조형과 해학적 조형이 조화를 이루어 각 신분의 특성을 표현하였으며, 해당 인물의 성격에 따른 이미지까지도 드러내고 있다. 얼굴의 형상은 좌우가 비대칭적으로 조형되어 움직임에 따라 다양한 표정이 표현되도록 하였다. 특히 양반, 선비, 중, 백정탈은 턱을 분리시켜 인체의 턱 구조와 같은 기능을 갖게 한 점이 독창적이다. 탈을 쓴 광대가 고개를 뒤로 젖히면 자연스럽게 입이 크게 벌어지며 웃는 모습이 되고, 광대가 고개를 숙이면 윗입술과 아래턱 입술이 자연스레 붙게 되어 화난 표정이 연출되기도 한다. 마을주민들 사이에서, “탈이 신령스러워 탈 쓴 광대가 웃으면 탈도 따라 웃고, 광대가 화를 내면 탈도 따라 화를 낸다”는 향언이 전승되고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하회탈의 역사적 가치와 아름다운 조형미가 바탕이 되어 한국의 대표 이미지로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을 상징하는 각종 이미지로 활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광상품으로도 개발되어 외국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상태이다.

 
국보 하회탈은 한국문화의 대표적 상징물이자 한국인의 얼굴이다.
  국보 하회탈은 국보로서 가치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얼굴을 상징하고 있어서 사실상 한국인의 캐릭터 가치를 담고 있다. 하회탈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탈이자, 현재도 탈춤에서 연극용 탈로 쓰이고 있다. 오늘날에도 전통을 상징하는 포스터, 관광기념품, 각종 디자인 등에 널리 활용되고 있어, 살아 생동하는 국보의 위상을 지니며, 한국민족문화의 상징 구실을 하고 있는 국보 중의 국보이다. 한국의 국기가 태극기이고, 한국의 맛이 김치로 표현되듯이, 또한 아리랑이 한국의 소리이듯이 하회탈은 한국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국보로 지정된 각시탈>

<왜곡된 관광상품으로서 각시탈>

 
    

국보 하회탈은 변증법적 조형미로 미학적 독창성을 확보하고 있다.

  국보 하회탈은 조형미에 있어서 세계적인 찬사를 받고 있다. 천년 가까운 역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부조화의 조화, 불통일의 통일, 색조에 의한 캐릭터 표현 등 변증법적 조형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국보 하회탈의 원형을 회복하고 예술적 아름다움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국가적 상징물인 국보 하회탈의 원형을 복원하고 그 조형적 이치와 예술적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현재 하회탈 관련 이미지들은 관광상품, 포스터, 디자인, 광고 등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지만, 그 원천소스가 대부분 조악한 모조품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국보 하회탈의 문화재 가치를 훼손하고 예술적 조형성을 왜곡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국보로 지정된 하회탈의 본디 모습을 되찾고, 하회탈이 가지고 있는 조형미를 분명히 밝히는 동시에, 이를 현대사회에서 가치 있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 하회탈의가치
하회탈은 하회마을의 ‘탈’이며 하회마을 사람들의 ‘얼굴’이자 하회마을 문화의 ‘상징’이다. 하회탈은 마을 동사에 고이 보관되어 오다가 별신굿을 할 때만 광대들이 꺼내 쓰게 되는데, 이 때에 탈을 넣어둔 나무 상자 앞에 향불을 피우고 큰절부터 올린다. 절을 올리는 경건한 제의가 끝나면 탈 궤에서 조심조심 탈을 꺼내서 향나무를 우려낸 물로 정성스레 닦아 단장을 한다. 잘 닦은 탈을 오재기에 담아서 어깨에 메고 산주와 광대들이 서낭당에 올라가 내림굿을 한다. 산주가 제물을 차려놓고 절을 하며 서낭신을 모시고 마을로 내려오면 비로소 광대들이 탈을 쓰고 별신굿을 시작한다.

  하회탈은 서낭신과 함께 노니는 신성한 탈인 까닭에 천년의 세월 동안 아무 탈 없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다. 하회마을 사람들로서는 마을을 지켜주는 신성한 보물이라 할 만하다. 이제 하회탈은 하회마을에 머물지 않고, 한국의 탈이자 한국인의 얼굴이며 우리 민족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따라서 하회마을의 보물이 나라의 보물로 지정되어 ‘국보’ 하회탈로 거듭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국보들과 달리 실질적으로 한국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간판 구실을 하고 있다.
하회탈은 한국을 떠올리고 접속하게 만드는 그림 기호(icon)이자, 한국인의 모습을 상징하는 독특한 인물상(character)이며, 국가의 문화 이미지를 창출하는 등록상표(logo) 노릇까지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회탈은 한국인의 표정으로 한국을 알리는 문화 사절인 동시에,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드러내는 한국 최고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하회탈이 어디가 아름답게 생겨서 국보로 지정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 사회적 가치, 미학적 가치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역사적 가치로 보면, 하회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굿탈이자 연극탈이다. 현재 고려 중기 탈로 추정되어서 약 800년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탈놀이를 한 뒤에 탈을 불에 태워버리는 까닭에 오래된 탈이 남아 있지 않으나, 하회마을에서는 탈을 신성하게 여겨서 마을 동사에 고이 보존해 왔기 때문에 예전의 본디 탈이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기적처럼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회탈과 탈놀이는 우리나라 연극사, 특히 민속극의 기원을 연구하는 데 매우 긴요한 자료이다.

 문화적 가치로 보면, 탈만 오롯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탈놀이를 전승하던 하회마을이 지금 고스란히 살아 있고, 또 하회별신굿이라는 중요한 전통문화와 더불어 남아 있기 때문에 문화적 의의가 더욱 크다. 고분 속에서 발견된 금관도 국보지만, 사실상 금관을 쓰던 사람도 사회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금관이 실제로 어떻게 쓰였는지 제대로 알 수 없다. 문화재는 사람들의 삶과 함께 이해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회탈을 전승하는 하회마을이 남아있는 것은 물론 하회탈을 쓰고 연행하는 하회탈춤과 별신굿이 최근까지 전승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국보 가운데 이처럼 살아 생동하는 문화재는 하회탈이 유일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회적 가치로 보면, 하회탈의 인물 구성이 당시의 사회상을 고스란히 형상화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당시 사회의 인적 구성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인물상이 바로 하회탈의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신분이 높고 낮은 데 따른 상하(上下), 슬기가 많고 적은 데 따른 우지(愚智), 그리고 남녀노소는 물론 민관(民官)과 성속(聖俗) 등의 대립적 사회관계에 따라 제각기 한 사람씩 자기 얼굴을 드러낸다. 다른 고장의 탈춤에서는 5양반, 샌님형제, 8목중 등 한 성격의 인물이 여럿 등장하고, 어떤 성격의 인물은 아예 없는 경우도 많은데 비하여, 하회탈에는 공동체에서 있음직한 인물들이 골고루 한 사람씩 저마다 개성을 지니고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치라 할 수 있다.

  하회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회탈의 조형적 가치이자, 예술작품으로서 의의이다. 하회탈은 다른 조각품과 달리 표정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조형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표정이 바뀐다는 것이다. 턱을 분리시켜 두었기 때문에 광대가 탈을 쓰고 얼굴을 움직일 때나 말을 할 때에 턱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한편, 얼굴을 뒤로 젖히면 웃는 것처럼 입이 크게 열리고, 앞으로 숙이면 화난 것처럼 입이 다물어진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 표정도 역동적으로 바뀐다. 여러 탈의 좌우 모습이 서로 대비될 만큼 어긋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왼쪽에서 보는 것과 오른쪽에서 보는 표정이 서로 다르게 보인다. 극중에서 등장인물들끼리 인식하는 표정과, 구경꾼의 자리에서 보게 되는 표정이 불일치를 이루도록 변증법적 통일성을 보인다. 한 인물이지만 처한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두 가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상황을 절묘하게 하나의 얼굴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피카소의 작품에 견줄 정도로 예사롭지 않다. 사회적 제약에 따라 주어진 얼굴과, 인간해방을 추구하는 본성적인 얼굴을 더불어 가진 것이 진정한 인간의 얼굴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부조화의 조화, 불일치의 일치, 미완성의 완성이라는 변증법적 미학을 새롭게 개척한 세계적 조형예술이라 할 수 있다.

 
 

  아리랑이 한국의 소리이듯이 하회탈은 한국의 얼굴이다. 하회탈은 조형예술의 독창적 경지를 열어 보이는 세계적 수준의 조각품이자, 탈놀이를 위한 분장도구로서 가장 뛰어난 걸작품이다. 그런 까닭에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는 숱하지만 하회탈처럼 한국문화의 대표적인 상징 구실을 폭넓게 하는 문화재는 없다. 외국사람들도 하회탈을 보면 한국과 한국인, 한국문화를 떠올릴 정도로, 하회탈은 세계 속에서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신분증 곧 한국인의 ‘아이디 카드’ 구실을 하고 있다.

  하회탈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50년이 채 못 되지만, 이제 하회탈은 우리 전통문화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모델로서 각종 포스터에 널리 쓰일 뿐 아니라, 한국관광을 오는 외국인들에게 가장 호기심 높은 문화상품이자 가장 특색 있는 기념품구실을 한다. 실제로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기념상품이 하회탈이었다.

  그런데도 우리의 문화적 얼굴인 하회탈이 지금 한갓 기념품으로 조잡하게 만들어져서 상품화된 채 여기저기서 팔려 다니고 있을 뿐, 국보답게 온전하게 복원되지도 못하고 체계적으로 연구된 일도 없다. 탈을 거짓얼굴이라는 뜻에서 흔히 가면(假面)이라 하는데,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하회탈의 가짜 얼굴 곧 ‘가면의 가면’을 보아온 셈이다.
이제는 하회탈의 가면을 벗기고 본디 얼굴을 정확하게 포착할 때가 되었다.

 
○ 하회탈의 구성 및 특징


 
       
 

 하회탈은 모두 몇 가지인가. 현재는 10가지만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하여 10가지라고 할 수는 없다.
잃어버린 탈이 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탈이 3가지라고 하는데, 사실은 2가지로 볼 수 있다. 잃어버린 탈이 3가지이면 하회탈은 13가지이고, 2가지라면 하회탈은 모두 12가지라 할 수 있다. 12개라 하지 않고 굳이 12가지라 하는 까닭은 주지탈이 암수 둘이며, 한때는 중탈도 둘이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탈의 성격이나 구성을 이해하는 데에는 탈의 개수보다 종류수가 더 중요하다. 특히 같은 종류의 탈이
여러 개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오광대 탈의 경우는 양반탈만 예닐곱 개가 되고, 오방신장탈이나 무당탈은 제각기 5개씩이나 되기도 한다. 이처럼 하회탈이든 다른 탈이든 같은 인물의 탈이 여러 개
있는 까닭에 탈의 개수는 양적 사실만 드러낼 뿐 탈의 종류를 통해서 탈의 극적 내용이나 탈의 구성을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탈의 개수보다 가짓수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탈의 종류는 곧 인물의 성격을 유형별로 가닥지어 주는 까닭이다.

 


<하회탈 인물 구성도>
 
   잃어버린 탈이 3가지라고 하는 주장은 떡달이탈과 총각탈, 별채탈을 잃어버렸다고 보는 것이다.
일본인이 가져갔다는 설도 전한다. 그렇다면 하회탈은 13가지이다. 과연 13가지일까. 그러면 극중에서 떡달이와 총각, 별채의 역할이 분명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 현재 별채는 양반선비마당 말미에 등장하는 세리(稅吏)로서 ‘환재 바치시오’라고 외치는 자기 역할이 분명하게 있다. 지금은 별채가 없기 때문에
그 대역을 이매탈이 맡아서 한다.

총각은 혼례마당과 신방마당에서 신랑 역할을 하며 각시와 함께 긴요한 구실을 한다. 지금은 총각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선비탈이 그 대역을 한다. 그런데 떡달이의 역할은 불분명하다. 우리 탈춤에서는
한 가지 탈도 여러 마당에 등장할 뿐 아니라 때로는 두 가지 역할도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떡달이라는 인물은 그 성격도 모호한 데다가 배역까지 뚜렷하지 않아서 그 존재를 인정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하회의 이웃마을이자 병산탈로 유명한 병산동에서는 탈을 곧 ‘떡달’이라 일컬었다. 그러므로 떡달이를 병산에서처럼 탈을 일컫는 일반명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전제로 보면, 하회에는 본디부터 12가지 탈이 전승되었는데, 총각탈과 별채탈이 없어지고 현재 10가지의 탈만 전한다고 할 수 있다. 총각탈이나 별채탈은 미혼남성과 고려시대 세리를 일컫는
인물로서 성격이 분명하지만, 떡달이는 어떤 인물을 일컫는지 불확실하다. 더러 떡달이탈을 더벅머리 총각탈이라고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문둥이탈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만일 떡달이가 총각을 뜻한다면 떡달이탈과 총각탈 가운데 하나만 있으면 그만이고, 만일 떡달이가 문둥이를 뜻한다면 하회탈춤에서
문둥이의 역할을 찾아야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총각탈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든
문둥이탈의 역할이 전혀 없는 사실을 고려하든 현재로선 떡달이탈이 긴요하게 소용된다고 판단하기
어렵다고 하겠다.

안동 일대와 하회에서는 탈을 곧 떡달이라고 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떡달이는 곧 고유한 인물탈이 아니라 탈 일반을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햐면 별채탈과 총각탈은 일정한 배역이 있었으며
지금은 이매탈과 선비탈이 그 대역을 하고 있으나, 떡달이탈은 극중 배역도 없을 뿐 아니라 이를 대신하는 탈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장 확실하게 없어진 탈은 총각탈과 별채탈 2종이라 할 수 있다.
두 가지 탈이 없어진 까닭은 확실하지 않다. 일찍이 하회탈에 관심을 가졌던 민속학자들 가운데에서
문화재로 지정한다는 구실 아래 하회탈을 빼돌렸거나, 또는 하회마을 사람들 가운데 제법 탈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이를 빼돌렸다고 하는 풍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소문만 있고 분명한 근거가 없어 막연한
짐작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 제법 근거 있는 주장은 하회탈에 오랜 관심을 기울이며 하회탈을 직접 깎기도 했던 윤병하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별채와 떡달이탈 외에 총각탈도 없어졌는데, 이 탈 세 개가
특히 우수한 탈이라고 평가하면서, 대구에 살던 한학자 곽만우(郭晩愚)의 집에 자주 드나들던 일본인 미요시진파(人破美吉)이란 자가 이들 탈을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대구 사는 이응성(李應星)이 말해
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회탈은 모두 13가지가 된다. 일반적으로 떡달이탈을 곧 총각탈로 여기는 걸 보면 이응성의 진술이 착각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한다. 왜냐하면 탈의 종류가 13종이라 하는 것은 12라는 숫자의 전통적 전형성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떡달이탈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12라는 숫자는 12간지이자 하루 12시와 일년 12달을 나타내는 시간 개념이다. 12띠도 같은 주기이다. 이처럼 전통사회에서 12가 일정한 주기를 나타내고 대상을 포괄하는 전형적 숫자로 쓰였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13의 수에서는 그러한 전형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하회탈이 용의주도하게 조각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인물의 설정도 마찬가지이다. 중복되는 인물이 없고 사회상을 효과적으로 잘 드러내는 대립적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탈의 가짓수도 일정한 전형성을 지녔을 것이라 할 수 있다.

출처: 임재해 외, 하회탈 그 한국인의 얼굴, 민속원, 2005.

 

○ 하회탈의 조형미

 

하회탈은 탈이 많은 탈이다. 반듯한 얼굴을 한탈 이 드문 데다가 사람의 얼굴이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일그러진 탈이 있는가 하면, 아예 턱이 없는탈도 있다. 어느 탈도 온전한 얼굴로서 그럴듯한 모습을 한 것이 없어서 상당히 특이하게 보이는 데도, 탈을 쓰고 탈놀이를 하면 살아 있는 인물로 생생하게 실감이 난다.

그것은 두 가지 조형기법에서 비롯된다. 하나는
하회탈이 얼굴을 움직이는 데 따라 표정이 바뀌는 까닭이며, 둘은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표정을 짓는 까닭이다. 표정이 변화하도록 만든 기법도 두 가지이다. 아예 턱을 움직이도록 만들어서 실제로 광대가 탈을 쓰고 말을 하면 턱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역동성을 띠는가 하면, 탈을 입체적이면서도 부대칭으로 깎아서 아래위 또는 좌우로 움직이는 데 따라 표정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보는 방향에 따라 하회탈의 표정이 다른 것은 이목구비가 부조화를 이루는 까닭이다. 이를테면 각시탈의 눈매는 좌우가 짝짝이이다. 구경꾼이 보아서 왼쪽 눈은 아래로 내리 감고 있는데, 오른 쪽 눈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아예 한쪽

눈을 감아서 윙크하는 일은 쉽지만, 내리 깐 눈과 바로 뜬 눈은구조적으로 지을 수 없는 표정이다. 왼쪽에서 보면 각시는 다소곳한 눈매를 하고 있지만, 오른 쪽에서 보면 눈을 바로 뜨고 있다. 내리깐 눈은
각시에게 강요된 가부장적 질서 속의 제도적인 눈이라면, 바로 뜬 눈은 세상을 자기 눈으로 직접
포착하려는 각시 자신의 인간적인 눈이다.
그러므로 부조화를 이루는 두 눈은 각시의 처지를 가장 절묘하게 형상화한 진실의 눈이다.

이러한 조형 양상은 초랭이의 입 모습에서 더 잘 드러난다. 초랭이 입을 정면에서 보면 입비뚤이이다. 심하게 일그러져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입 모양이다. 왜냐하면 보는 사람의 처지에서 왼쪽 입꼬리는 아래로 처져 있는 데다가 화가 난 듯이 옥다물고 있다면, 오른쪽 입꼬리는 위로 올라가 있는 데다가 웃는 듯이 볼에 살짝 주름이 잡혀 있다. 한 입으로 두 말은 해도 한 입으로 두 표정은 지을 수 없는 법인데, 초랭이 입은 화난 표정과 웃는 표정을 한 입의 좌우에 더불어 짓고 있어서 엉터리처럼 보인다.

하인 초랭이는 양반 앞에서 늘 웃음을 띠며 굽실거려야 할 처지인 한편, 양반에 대해서 누구보다 불만이 많은 인물이다. 그러니 웃음 띤 입 모양만 하거나 불만스러운 입 모양만 지을 수는 없다. 그래서는
하인의 처지를 올바르게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탈마당에서 양반이 볼 때는 짐짓 웃음을 띠며 순종하는 것처럼 보여야 하나, 구경꾼들이 볼 때에는 뭔가 양반에 대해 불만이 많은 것처럼 보여야 한다. 그러므로 있을 수 없는 입 모양이야말로 마땅히 있어야 할 진실의 입 모양이다.

각시탈의 눈매가 그렇듯이 초랭이탈의 입매도 순종하며 따르는 형과 저항하며 거스르는 형으로 좌우가 대립을 이루고 있다. 서로 맞서 있는 대립적인 눈매와 입매가 한 사람의 얼굴에 형상화되어 있는 것은 ‘변증법적 조형기법’이라 할 만하다. 세상의 문제점을 탈잡아 드러내는 탈의 미학이니 변증법적 조형기법을 ‘트집의 미학’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것이다. 변증법적 조형기법과 트집의 미학을 염두에 두고
탈을 보면 탈의 조형미가 더 잘 보인다.

초랭이탈의 코를 눈여겨보면, 어느 누구의 콧대보다 높게 직선으로 뻗어나가다가 콧대 끝이 무 자르듯 싹둑 잘려나간 것을 알 수 있다. 콧대는 인간의 자존심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직선으로 곧게 뻗은 초랭이의 콧대는 그의 인간적 자존심이 대단히 높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반면에, 잘려나간 콧대를 통해서 신분체제의 억압이 초랭이의 콧대를 여지없이 꺾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따라서 초랭이의 코 또한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지만, 하인의 처지를 탈잡아 드러내는 ‘트집의 미학’으로서 절묘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각시탈의 입을 보면 꾹 다문 입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꾹 다문 입은 사실상 다문 것이 아니라 아우성치는 것이다. 각시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가부장 체제에 대해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을 역설적으로 꾹다문 입을 통해 형상화했으니 변증법적 조형에 해당된다. 변증법적 조형 논리에 의해 트집의 미학을 추구한 조형물은 하회탈이 세계적으로 유일하다 할 수 있다. 하회탈이 한국인의 얼굴로서 세계적인 탈로 주목받는 까닭도 이러한 독창적 미학에서 비롯된다.

출처: 임재해 외, 하회탈 그 한국인의 얼굴, 민속원, 2005.


 

   


 

○ 하회탈의 작동원리

하회탈은 그냥 놓고 보면 고정된 표정의 가면이지만 탈을 얼굴에 착용하고 움직이면 움직이는 방향과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표정 변화의 폭이 매우 큰 탈이다. 이러한 작동원리가 바로 하회탈의 탁월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 턱을 인체구조와 같이 분리해 놓고 탈광대 치아에 끈으로 연결한다. 이렇게 하면 말을 할 때 실제의 턱이 움직이는 것과 같아 생동감을 주는 원리가 작동한다.

* 코를 중심으로 좌우 얼굴의 폭이 다르고 광대뼈의 높이가 다르다. 좌우의 폭과 광대뼈의 높이가 차이가 나기 때문에 관중이 오른쪽에서 볼 때와 왼쪽에서 볼 때 상당히 차이가 나는 표정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눈의 크기와 모양도 좌우가 다르다. 탈의 눈(시선) 역시 좌우의 차이로 인해 관중에게 다양한 표정과 느낌을 갖게 만들고 있다.

* 각시탈의 트레머리나 양반탈 등의 턱을 느슨하게 묶어서 움직일 때 흔들리게 한다. 아래로 땋아 내린 머리는 앞뒤로 흔들리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며, 한쪽은 뒤로 한쪽은 앞으로 나오게 했다.


 

○ 하회탈의 표정변화


  조각은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내 어떤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조각가는 그 형상에 자신의 생각이나 사상을 담아서 보여 주려고 한다. 하회탈은 허도령이 신의 계시를 받아 만든 조각품이다. 따라서 하회탈에는 탈을 만든 허도령의 생각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하회탈을 복제하려면 탈 속에 깃들어있는 허도령의 생각을 하회탈의 표정에서 먼저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하회탈은 사람의 얼굴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얼굴이기보단 거짓의 얼굴이자 인위적인 얼굴이고, 양식화된 얼굴이자 풍자적인 얼굴로 현실적인 얼굴보다 과장되고 강조된 얼굴이다. 우리는 사람의 얼굴에서 국적,성별,연령,성격,건강을 대충 짐작해 낸다. 예민한 사람은 얼굴에서 직업과 교육정도, 능력 정도 심지어 마음까지 대충 알 수 있다고 하며, 심지어 그 짐작이 어느 정도는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짐작 할 수 있는 능력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회탈은 고정된 표정의 가면이지만, 광대가 탈을 쓰고 춤을 추면서 좌우로 움직이고 아래위로 움직이는데 따라 표정이 달라지며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서도 달라 보인다. 하회탈을 만든 허도령은 그가 자주 보아왔던 주위사람들의 얼굴을 모델로 탈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허도령 주위에 살고 있는 어떤 인물의 특정한 순간의 습성이나 표정을 기억했다가 탈에 표현했을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지금은 허도령이 살았던 시기와는 800여년 정도의 시차가 난다. 그때 사람들의 습성과 표정을 오늘의 시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부터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얼굴을 과학적으로 풀이한 연구도 되어 있고 표정이나 감정이란 것이 세월이 오래 지났다고 크게 변하지 않는 것이므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추정해 낼 수 있다.

 

 

  
 
  
○ 하회탈의 제작단계별 설명
1단계 - 나무고르기 및 준비.  
하회탈은 토종오리나무로 제작되었다. 오리나무는 산기슭이나 개울가 습지에서 잘 자라며 우리나라를 비롯 일본 시베리아 사할린 등에 분포하는 나무로 토종오리나무와 사방오리나무 두 종류가 있다.

  토종오리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나무다 그러나 이제 토종오리나무는 멸종 상태에 있어 쉽게 구 할 수 없는 나무가 되 버렸다. 토종오리나무는 비교적 곧게 자라며 높이 20여미터 직경 60㎝미터 이상 자란다. 잎은 넓은 타원형으로 끝이 뾰족하고 밑이 둥글다. 열매는 솔방울 모양이며 나무껍질이 두껍고 거친 것이 특징이다.

  사방오리나무는 일본이 원산으로 1940년 이후 우리나라에 도입된 나무로 뿌리혹박테리아가 있어 척박한 땅에도 잘 자라고 뿌리가 깊어서 황폐한 산을 빨리 복구하거나 산의 경사면과 도로변이 무너지는 것을 막아주는 나무이기 때문에 사방오리나무라고 한다. 1950년대 이후 사방 사업용으로 집중적으로 심어져 주변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껍질이 얇고 매끄러워 토종 오리나무와 쉽게 구별 할 수 있다. 크기도 토종오리나무보다 작아 높이 5미터 지름 25㎝ 정도로 20여년 자라면 퇴화가 시작되어 쓸모없는 나무가 된다. 잎 모양은 계란형으로 길게 뾰족하고 작으며 열매도 작다.

  오리나무는 추위나 공해에 강하고 성장이 매우 빠르지만 수명이 짧고 가장 빨리 썩는 나무다. 겨울철에 베어서 6-7 개월 후 장마 비를 맞으면 섬유질이 하얗게 변하면서 부패하기 시작해서 쓸모없는 나무가 되고 만다. 그러나 하회탈은 12세기경 토종 오리나무로 만들어 졌다.
 

 
 
  좋은 나무를 고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겉만 보고서 좋은 오리나무를 골라야 하는데 좋은 오리나무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① 곧게 자라고 껍질이 고른 나무.
나무는 자라는 환경의 영향으로 곧게 자라기도하고 휘거나 꼬여 자라기도 한다. 휘거나 꼬인 나무는 제재 후에도 섬유질의 상태에 따라 뒤틀리거나 휘어지는 성질이 그대로 남아있어 변형되기 때문에 좋은 나무가 아니다.

  ② 직경이 25-40㎝ 정도의 나무.
오리나무는 성장이 빠른 만큼 퇴화도 무척 빠르다. 나무의 성장이 가장 왕성할 시기가 직경 25-40㎝ 정도로 자랐을 때이며 이후부터 오리나무는 퇴화하기 시작 중심에 구멍이 생기고 변색이 된다.

  ③ 가지를 잘라낸 흔적이 적은 나무.
가지를 잘라낸 흔적이 자라면서 옹이가 되기 때문이다.

  ④ 마구리면이 나이테를 따라서 갈라지지 않은 나무.
나무의 가장 큰 단점은 갈라짐이다. 마구리가 빗살이나 방사형으로 갈라진 나무는 조각을 하는데 지장이 없으나 나이테를 따라서 갈라진 (윤상할) 나무는 내부에서부터 나무결을 따라 갈라지는 것으로 조각하는 과정에서 파손될 우려가 많아 반듯이 피해야 한다.

  ⑤ 외부의 상처로 껍질이 목질부 내로 침입한 곳이 없는 나무.

  ⑥ 마구리 가운데 구멍이 없고 심재와 변재의 색상이 같은 나무.
  오리나무는 심재와 변재의 색상 차이가 없는 나무다. 그런데 심재 부분이 진한 색으로 변재와 차이가 나는 것은 퇴화가 시작된 것으로 좋은 나무가 아니다.

  ⑦ 마구리에 흰 반점이 보이지 않는 나무.
오리나무는 가장 빨리 부패하는 나무로 흰 반점이 보이는 것은 이미 부패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흰 반점이 있는 부분은 목질이 연해 부스러진다.
 
 

  오리나무를 제재 할 때 나무의 목심에서 2-3㎝ 정도를 피해 제재를 해야 한다. 나무의 심재 부분은 부패가 가장 먼저 시작되는 곳으로 색상도 다르고 잘 갈라지기 때문에 목심은 반듯이 피해서 제재를 한다.

  이매탈, 할미탈, 부네탈, 초랭이탈은 두께 8㎝ 각시탈, 선비탈, 양반탈, 중탈, 백정탈은 두께 12㎝로 제재를 한다. 이는 실제 탈보다 여유 있게 제재하는 것으로 나무가 건조되면서 수축되는 것을 감안한 것이다.



 

   
 

2단계 - 겉목치기

1) 뒷면 파내기
  뒷면을 먼저 파내는 것은 얼굴을 먼저 조각하고 뒷면을 깍을 때 작업이 불편하고 먼저 조각된 얼굴에 손상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뒷면은 둥근 자귀나 둥근칼로 깎는다. 이 때 깊이 조정을 잘 못하면 앞면을 조각할 때 구멍이 생겨 불량이 될 수 있고 턱을 분리 할 때 턱의 두께가 얇아져 양쪽 끝이 없어져 턱을 사용 할 수 없게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때문에 단순하고 쉬운 작업이지만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2) 겉목치기
  겉목치기란 깍아 할 부분이 많을 때 자귀로 크게 쳐내는 것이다. 하회탈은 코가 높기 때문에 필요 없는 부분이 많아 자귀로 겉목을 쳐야 작업이 빠르다. 이 과정은 단순해 보이지만 하회탈 같이 작은 나무를 한 손으로 잡고 자귀질을 하기가 매우 위험하다.

  그리고 깍아 내야 할 곳을 정확하게 찍어 내지 않으면 나무가 깨지거나 손을 다치게 되므로 자귀질이 숙련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 하회탈춤 소개

<하회별신굿탈놀이 개요>

  하회별신굿탈놀이(하회탈춤)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에서 려말선초 경 상민(常民)들에 의해서 연행되어 온 탈놀이이다. 이 탈놀이는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기 위하여 마을굿의 일환으로 연행되었다. 전국적으로 전승되어 온 별신굿은 매년 지내는 동제와 구별되는 특별한 동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대개 신과 인간이 하나되어 축제적 굿판을 벌이는 형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별신굿은 매년 지내는 동제와 달리 마을의 여러 사정에 따라서 느슨한 주기성(10년 혹은 5년, 3년 또는 신의 계시가 있을 때)을 가지고 연행되었다. 특히 별신굿 때에는 전문적인 사제자 즉, 무당집단을 불러서 연행하는 것이 보편적인 관행이었다.

  하회별신굿에서 연행된 하회탈춤은 서낭굿계통 민속극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탈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고형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다른 지역의 탈춤과 달리, 명백한 증거물로서 하회탈이 국보(1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하회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음:1.15)과 사월 초파일(음:4.8)에 동제(洞祭)를 연행했다. 이 마을의 성황신은 여신으로서 무진생(戊辰生) 성황님으로 불리고 이 성황신에게 매년 제사를 지내는 것을 동제(당제)라 하며, 별신굿은 3년, 5년, 또는 10년에 한번씩 정례적으로 벌이는 동시에, 마을에 우환이 있거나 돌림병 등이 발생한 경우에 마을의 사제자격인 산주의 신탁(신내림)에 의해서 임시제로 거행되었는데, 이때에는 탈춤이 동제와 함께 연행되었다.

  하회탈춤은 강신(降神), 무동(舞童)마당, 주지마당, 백정마당, 할미마당, 중마당, 양반·선비마당, 혼례마당, 신방마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요즘 들어서는 중마당과 양반선비마당 사이에 ‘이매넋두리’라고 해서 이매와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벌이는 놀이판이 점점 그 비중을 높여가고 있다. 이는 역동적으로 변화해가는 사회와 발맞추어 탈춤 역시 적응해나가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회마을은 역사가 깊은 전통마을로 인정되어 민속마을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마을 입구 하회탈춤 공연장에서는 11월부터 2월까지를 제외하고 매주 상설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듯 하회마을은 현재 유교문화의 고장으로 유명한 안동에서도 한국을 대표하는 양반마을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하회마을이 어떻게 지금과 같은 전통마을로 자리잡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별신굿의 역사와 관련하여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양반마을로 표상되면서 의미가 희석되었던 별신굿과 같은 민중의 문화들이 양반의 문화와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이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한 마을에 사는 양반들과 상민들의 문화는 결코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며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마을공동체의 문화로 자리잡아 왔다고 볼 수 있다.
 
 
<하회탈춤의 근대적 변화 양상>
1) 근대 이전의 전통과 일제강점기 마지막 별신굿의 연행

  하회탈춤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탈에 대한 신성시에서도 나타나듯이 도시형 탈춤에 비해 주술성이 강하며 고형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유감주술적 행위를 통해 풍요를 기원하려는 혼례마당과 신방마당이 있고, 제의 순서 마지막에 무당이 주관하는 헛천거리굿이 남아있던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하회에 거 건물(동사)이 탈 때, 나두 어릴 땐데. 뭔지 모르구 봤는데. 밤중에 불이 나서, 그 집이 막   불길에 쌓였는데, 그 옛날에 건물, 목조건물이, 개와(기와)가 달아서 막 나는 판인데. 개와 같은 거 아주 불이 세게 나믄 그게 열이 받아가주구 막 그기 튀겨요. 그런 형편인데, 어떤 사람이, 아이구 저기 탈이 있는데 탈 나는데.... 탈이 화를 입으믄 마을이 화를 입는다는 신앙적인 그게 있기 때문에, 누구도 죽어서 못 들어가는 형편인데, 한 사람이 쫓아 들어가서 자기
죽을 지도 모르는데 거 들어가서 금방 꺼내왔어.

  위의 사례와 같이 탈에 대한 신성시와 별신굿에 대한 신앙은, 하회탈춤이 예술적 기량의 발달보다는 주민들의 신앙이 근간이 되어 정성을 다하는 방향으로 연행이 이루어졌음을 잘 드러낸다. 즉 대사에 있어서도 거의 묵극이나 풍물의 잡색놀이와 유사한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춤에 있어서도 영남지역의 허튼춤인 덧뵈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일대의 탈춤은 도시탈춤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탈춤은 강제된 근대화의 시기를 맞이하면서 그 전승이 단절되었다. 일반적으로 정리되어온 전통사회 하회별신굿과 하회탈춤은 원시신앙적인 예술로서 평가되었다. 일제강점기 일인학자들의 견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일인학자들이 원시적인 미개문화로서 하회별신굿과 탈춤을 다룬 데 비해서, 한국학자들은 이를 희랍의 디오니소스 제전에 비유하거나 원시종합예술의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오랜 역사를 보유한 민족문화로서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1928년을 마지막으로 연행되었다고 전하고 있지만, 그 실상을 다시 되짚어보면, 먼저 1935년경에 일제 당국의 행사를 목적으로 한 소규모 연행이 이루어지고, 1941년경에 송석하의 조사를 위해 소규모로 연행된 것이 마지막이었다고 전한다. 이미 전통의 맥락으로부터 벗어난 인위적인 탈춤이 일제강점기 동안에 시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동에서 하회탈춤에 대한 관심이 일어난 것은 일제 당시 ‘문화민족주의’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하회탈춤에 대한 관심을 처음으로 불러일으킨 사람은 일제강점기 송석하로 추정된다. 송석하는 1940년대 하회마을에 들러 하회탈과 그 춤사위를 조사한 것으로 확인된다. 송석하는 자신의 조사보고서를 발표하였고, 이러한 영향으로 하회탈은 안동의 문화로 알려지게 된다.

  송석하의 조사 경향은 유한상에게 영향을 준다. 유한상은 하회마을 출신으로 안동지역에서 문화적인 소양으로 이름이 났던 사람이다. 유한상은 안동문화회관장, 안동문화원장 등을 오랫동안 역임한 인물로, 그가 중학교 재학 당시에 송석하에게 받은 영향으로 하회탈에 대한 관심을 이어왔다고 술회한다. 그는 송석하가 당시 무비카메라와 흑백사진을 촬영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하회탈과 탈춤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고, 하회에 남아있던 하회탈춤 연행자들을 대상으로 자료를 수집하여 하회탈춤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게 된다.

 
 
2) 1958년 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과 하회탈의 국보 지정
 

  제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는 한국전쟁 이후 재건의 열풍과 함께 시도된 것으로 파악된다. 각 지역의 대표들이 출전하여 경연을 벌이는 방식은 생활 속에서 살아 생동하는 문화를 고취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전시적이고 선전을 목적으로 했을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각 도별로 준비를 하는 가운데 경상북도에서 준비한 것은 하회탈춤, 놋다리밟기, 고전무용, 창작무용 등 여러 가지 민속연행물을 섞어서 만든 그야말로 버라이어티쇼의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상북도가 1등을 차지한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 이두현 교수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회고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제1회 대회 때 하회가면극은 1964년에 국보 제 121호로 지정된 하회가면 보물을 쓰고, 유일한 연희자로 생존한 박지홍옹이 출연하였으나 전래한 그대로가 아니고 재구성한 것이 흠이었다”

  이두현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당시의 하회탈춤은 전래한 그대로가 아니고 재구성한 것이었다. 이러한 재구성에 참여한 사람들이 바로 관련학자와 무용 및 전통음악 전문가, 그리고 해당지역의 문화인물, 관련공무원 등이다. 그런데 재구성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1등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다음으로 장한기 교수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한 하회탈춤을 직접 관찰하고, 참가단체 성원들(주로 유한상씨)을 면담해서 작성한 신문기사가 있다.

  “끝으로 이 특이한 가면무극이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 가면은 가장 오래인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앞으로 연극사적 내지는 민속학적 입장에서도 많은 연구를 요할 뿐 아니라 그 귀중한 자료로서 훌륭한 가치를 인정하고도 남음이 있을 줄 안다.

  일정한 형태를 가지지 않은 탈춤이라는 부분을 강조하면서도 탈에 대한 가치를 높게 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또한 하회탈춤이 많은 대사를 가지고 있는 고정된 텍스트의 형태가 아니고, 탈을 쓰고 벌이는 즉흥적인 연극적 놀이형태였음을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즈음해서 유한상의 작업은 본격화된다. 또한 최상수도 하회탈춤을 조사했으며 이것이 1958년에 발표된다. 춤과 음악에 대한 전문성이 없었던 유한상은 실제 대본과 탈의 의미를 추적하는 것에 그친다. 그러함에도 그의 이러한 작업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것은 1958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육군회관에서 열린 제 1회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면서부터이다. 민속예술경연대회는 민속예술을 발굴하여 경연대회를 펼치는 것으로, 처음 이 공문이 경상북도에 접수된 이후 경상북도 문화관련 인사들은 처음 준비하는 행사라 상당한 고민을 한 끝에 소위 민속이라 불리는 장르를 묶어서 나가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결정된 것이 하회에서 전해 내려오는 하회탈춤을 다시 복원하여 공연하는 것과, 안동의 놋다리밟기, 그리고 석운 윤병하 선생의 “에밀레종”이라는 창작무용이었다고 한다.

  이중 하회탈춤은 유한상이 이제까지 관심을 가지고 대본을 정리한 자료를 이두현이 받아서, 윤병하 선생의 연출에 의해 연습에 임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회탈춤을 연행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을 떴고 그나마 일부 남아있던 연행자들은 춤사위를 구사할 수 없을 정도로 노쇠하여 탈춤을 복원하는 데는 여러모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구에 있던 국악학원생들을 모아서 하회탈춤 복원을 계획한다. 하회탈춤은 대본이 아니라 풍물장단과 춤이 결합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약 50여명 정도가 모였는데 춤을 추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자들이었고 장단과 연출을 담당한 사람들은 국악학원 남자 교사들이었다. 춤을 가르친 사람 중에는 고향이 평안도이며 황해도 탈춤을 연행한 사람도 있었고, 특히 장구를 잘 다루어 반주를 맡았다고 한다. 전라도에서 온 사람도 있었는데 함께 의논하면서 하회탈춤을 재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하회탈춤은 재현되었으며, 그 해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1등을 수상한다. 그러나 하회탈춤이 하회 사람들에 의해 복원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한상은 이를 당시 안동시내 공연 공간이었던 문화극장에서 하회탈춤 공연에 대한 검증을 시도한다. 유한상은 이때 공연에 당시 생존해 있던 하회탈춤 연행자들과 하회주민들을 초청하여 과거 연행하던 하회탈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인정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조직된 하회탈춤 임시 팀은 다시 해산하게 되고 당시의 연행은 중단된다. 그러나 1958년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한 하회탈춤은 한국의 민속예술사에서 일정한 의의를 지닌다. 첫 번째 의의는 하회마을 사람이 아닌 전문적인 공연자들에 의하여, 하회마을이 아닌 특정의 다른 공연장에서 연행되었다는 것이다. 마을 민속이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재현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으며, 마을공동체의 제의성과 공동체성을 상실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점에서 유한상은 전통사회에서의 하회별신굿과 그 내용에서 하등의 다름이 없다고 자신하고 있으나, 실제로 복원된 하회탈춤은 하회별신굿이 아닌 그 형식과 외피만을 답습한 다른 문화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사항은 이때부터 하회탈춤에 대한 공연예술화의 막이 올랐다는 것이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하회별신굿이 가진 마을축제로서의 의미를 살릴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조차 제대로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탈과 춤, 그리고 극에 치중한 조사와 주변사람들의 관심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1964년 하회탈이 국보로 지정되고, 1973년 하회가면극연구회가 탄생할 수 있는 토대가 구축된 셈이다.

  세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의의는, 1958년 공연이 전통에 대한 나름의 위상을 지역주민들에게 확보해 주었다는 측면이다. 처음 출전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한 관계로 하회별신굿이 지역주민들에게 상당한 문화적 표상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표상의 기제는 하회탈이 국보로 지정되면서 2차적으로 발전하였으며, 마침내 1980년 하회탈춤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더욱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제반 사항은, 하회별신굿을 주목하는 것이 이제 하회마을 사람들의 민속 혹은 제의로서의 맥락을 떠났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이제 하회별신굿은 연희자의 선호에 따라 변화과정을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선택적 적용에 따라서 새로운 전통을 창출할 수밖에 없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즉 과거의 연희를 잇는다는 맥락 아래, 지금 여기의 조건에 부합하는 전통의 창출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하회탈춤에 대한 본격적인 지역 내 복원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58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과 함께, 맥타가트(Arther Joseph Mactaggart)라는 미국인이 하회탈 사진과 설명을 해외 잡지에 소개하면서부터이다. 당시 맥타가트는 미국 문화원 직원이자 영남대학교 교환교수로 와 있으면서 한국의 전통적인 예술작품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중섭이라는 희대의 화가를 제대로 조망할 수 있게 해준 일로도 유명하다.

그때 얘기는, 자기가 보고 감탄을 했어요. 감탄을 하고, 사실 외교관 일을 하는 것도, 딴 나라에 가면은 그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는데, 한국한테 큰 기대를 가지고 왔는데... 서울에나 뭐 딴 데는 세상에 다 알고 있는 뭣이 많고, 내가 새로 뭐 발견하거나 이건 없는데, 그 때만 해도 그 사람 얘기는, “너무 서구에 오염돼서 인제 서구에 빠다 썩은 냄새가 나는 기분이다, 너무 서구 쪽에 오염되어 가고 있다... 이렇게 참 귀중한 거를, 난 임기가 얼마 안 남았는데 이걸 보고 간다는 게 이렇게 좋은 게 없다.” 가다가 이 사람이 되돌아 왔어요. 왜 왔느냐고 하니까, “내가 사진은 다 찍었지만 현물 한번 더 보고 싶다”, 그러고 보고 간 거에요.


  유한상은 맥타가트의 하회탈에 대한 글이 외신으로부터 한국에 소개되면서 하회탈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와 문화재 지정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진술했다. 또한 소실된 나머지 탈들을 복원하는 작업도 시작되었는데, 당시 이 작업에 참여한 인물로는 운보 김기창 화백을 비롯한 미술계 인사들이 중심이었고 몇몇의 민속학자들이 가세한 형태였다고 한다. 특히 당시 문화재 전문위원이었던 이두현은 문화재 지정 및 보존처리를 해야 한다며 유한상에게 차용증을 써 주고 하회탈을 서울로 가져갔는데, 그 이후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하회마을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유한상은 마을주민들로부터 원망을 사게 되고, 이 사건이 있은 후 이전의 복원을 주도하던 이두현과 유한상의 공조체계는 무너지게 되었다.

  1958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공연 이후 최상수, 유한상에 의하여 대사본과 연구보고서가 발표되는 등 많은 관심이 일어난다. 그러나 대구 국악학원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하회탈춤 팀은 해산되고 이들의 연행물은 더 이상 전승되지 못한다. 또한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사실은 하회탈춤이 하회별신굿과 완전한 결별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본래의 제의적인 맥락으로부터 이탈하여 탈춤이 하나의 민속예술로 독립되기에 이르렀다.

 
 
3) 1970년대 하회가면극연구회와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국가적인 차원의 관심과 함께 안동지역 자체에서도 하회탈춤을 복원해야 한다는 논의가 확산되고, 1970년대 당시 탈춤부흥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1973년 하회가면극연구회가 만들어지고 새롭게 하회탈춤이 복원되기에 이른다. 1973년 하회가면극연구회는 유한상의 후원 아래 염순규, 김수진, 이재호, 이상호 등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상호는 초등학교 때부터 성대묘사 등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소위 원맨쇼 등을 하면서 안동지역에서는 상당히 알려진 연예인이었다. 그는 유한상으로부터 고등학교 때 하회별신굿 대사본을 받고 이를 연극으로 만들어보려고 노력한다. 처음 모임은 1973년도 6월경에 시작되었는데 탈춤을 위하여 모인 것이 아니라 안동지역의 좋은 전통소재를 가지고 연극을 만들기 위하여 모였다고 한다.

  이러한 가운데 하회탈춤이 이슈로 떠오르게 되었고, 이에 가면극을 하기 위하여 당시 춤을 강습하고 있었던 오숙자씨를 영입하고 그의 문하생들을 모두 춤꾼으로 가입시켰다. 가면극을 연행하자면 춤과 대사가 함께 나가야 하는데, 1958년 당시 대구 국악학원 팀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공연을 보지 못하고 다만 이야기로만 전해들은 까닭에 정확하게 춤을 재현해 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당시 이상호는 장터 혹은 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경상도식 춤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면밀한 연구를 거듭했다고 한다. 이때 소위 몽두리춤, 엇박자춤 등이 회원들 사이에서 기본적인 춤사위로 공유되고, 어느 정도 틀거리를 만들어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1973년 10월 23일에 문화회관(당시 관장이 유한상이었음)에서 12-3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하회가면극연구회로 창립총회를 가졌다. 이때 연희부장은 이상호, 총무는 이재호, 회장은 염순규가 담당한다.

  한편 하회탈춤을 연행하기 위해서는 탈과 의상 등이 필요하였다. 탈은 당시 홍익대 조각과를 나온 주상찬씨가 한 벌을 제작하여 연구회에 기증하였다. 그리고 탈춤에 필요한 의상은 회원들이 갹출하여 구입하였다. 1973년 프랑스 대사의 안동 방문 때 가면극연구회 회원들이 하회탈춤 첫 공연을 하면서 본격적인 하회탈춤의 복원이 시작되었다. 또한 1974년 10월에는 낙동강변에서 벌어진 경로잔치에서 하회탈춤 공연이 이루어졌다. 또한 이 당시부터 유한상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으면서 문화재 지정의 꿈을 키워갔던 것으로 판단된다.

  1973년 연구회가 만들어진 후 우여곡절이 많았다. 탈춤이 새롭게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회원들이 많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주변 인물들을 끊임없이 접촉하고 연구회로 끌어들이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다가 하회탈춤의 마지막 연희자로 알려진 이창희옹을 찾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창희옹을 찾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이상호, 김수진 등은 이창희옹을 찾기 위하여 장터마다 찾아가서 탈춤을 추며 옷과 잡화를 팔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고 한다. 특히 풍산, 풍천을 중심으로 장터를 많이 다녔는데 그것은 하회와 인접한 장터를 탈춤을 추고 다닌다 보면 이창희옹과 같은 생존 연행자나 구경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74년 경에 이창희 옹을 찾게 되는데, 이때부터 하회탈춤에 대한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할 수 있게 된다. 기존의 유한상 대본을 보다 다듬고 하회가면극연구회원들 역시 복원공연을 계속하여 시도한다. 당시 안동민속축제와 문화회관에서 이루어진 공연은 하회탈춤의 전형을 구축하는 데 상당한 진척을 가져오게 했다. 성병희의 기록에 따르면, “1928년의 마지막 별신굿 때 각시탈을 맡아 놀았던 이창희[李昌熙 : 아명 재수(再壽), 1912년생, 작고]옹에 의해 하회별신굿의 많은 의문이 풀리고, 원형에 근접한 전승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창희옹의 구술에 따라서, 1928년에 놀았던 별신굿 때의 내용과 실태가 밝혀졌고, 마당의 순서와 내용, 춤사위와 가락, 그리고 의상과 소도구에 이르기까지, 드물게 기억력이 좋은 이옹에 의하여 확인되었다”고 한다.

  하회탈춤이 고정적인 전형성을 가지게 된 것은 1978년 민속예술경연대회를 기점으로 볼 수 있다. 춘천에서 열린 경연대회에서 경상북도는 대통령상을 수상하기 위하여 하회탈춤을 다시 재복원하여 출전시키게 된 것이다. 이로써 당시 이창희옹이 구술한 내용으로 대본과 판이 다시 정리되었고 춤사위와 가락을 본격적으로 연습한다. 경상북도와 안동시의 재정 후원으로 1978년 10월 19일 경연에 참여하기 전 여름에 보름동안 지례에서 합숙을 하는데, 이때 상당부분 하회탈춤의 판세와 춤, 대사가 고정되기에 이른다.

  한편 이때 하회탈춤이 복원된다는 사실이 각지에 알려지게 되었고, 심우성씨 등이 안동을 찾게 된다. 이때 심우성씨와 함께 온 사람이 이용배인데, 그의 가락과 춤사위가 합숙훈련에서 많은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그런데 이용배는 전라도 출신의 전문적인 광대로 춤과 장구가락이 뛰어났기에 하회탈춤이 상당부분 세련미를 갖추게 되었으나, 오히려 경상도 특유의 탈춤의 맛이 살아나지 않게 되었다는 반대의견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이상호는 이용배와 갈등관계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용배에게 배운 하회탈춤의 판세를 새롭게 과거의 판세로 조정하려고 노력하였다.

1970년대루 오면서는, 이른바 민속 연출가가 생겼습니다. (중략) 왔다갔다 하면서 전국적으로 하는 분들이 몇 분 있죠... (중략) 도가 지나치면은 상을 전제루 하게 되구요, 저는 그 경연대회를 1회부터 참여를 하면서, 처음에는 나두 젊었을 때니까 몰랐다가, 한 10회를 넘긴 다음부터는 상제도를 없애자는 거, 경연이라는 말을 없애자는 거, 하튼 그거 주장하는 늠이었거든요. 사실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1990년대 말에 경연이 빠지고 한국민속예술축제가 됐는데, 지금두 기능은 마찬가지지요, 대통령상두 주구, 뭐두 주구, 저걸 없애야 하는 겁니다. 저게 처음부터 없었드라면 오늘과 같은 조작된 민속연희가 무형문화재가 되구, 또 그게 올바른 것처럼 인식되고 하는 그런 잘못은 없었었겠죠. 그게 참 큰 거죠.

  하회탈춤은 이 합숙과 이후 일련의 집중적인 연습기간을 거쳐 고정화된다. 당시 합숙을 담당한 시청 공무원인 하재인은 합숙 이전보다 합숙을 하고 난 이후 집중적인 연습을 거치면서 극을 모르는 자신이 보더라도 훨씬 매끄러워졌다고 술회하였다. 이러한 점을 보면 1978년은 하회탈춤이 정형화된 판을 형성하는 시기임에 틀림없다. 이상호는 당시를 술회하면서 합숙과 연습을 통해 하회탈춤이 고정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하여 민속예술경연대회가 40분이라는 시간 제약을 엄격하게 고수하기를 원하였고, 이에 하회탈춤을 40분의 시간에 맞추어 마당과 춤사위 대사를 대체로 고정적으로 몰아갔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진단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즉 하회탈춤에 대한 여러 가지 대사본이 존재하고 그것이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대사에 대부분 의존하였다는 유한상의 진술이나 앞서 인용한 장한기의 글에서도 이러한 면은 드러난다. 이상호는 여기에 덧붙여서 유한상본과 이창희 옹에게 받은 대사본은 상당한 분량이었다고 한다. 처음 하회탈춤이 연행되었을 때 시간은 근 100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이상호는 이점에서 이러한 대본이 정리되고 단정하게 만들어진 것이 춘천에서 개최된 민속예술경연대회를 거치면서였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춘천민속예술경연대회 문화공보부장관상 수상을 거치고, 국립영화제작소가 해외홍보용으로 만드는 영화를 제작하면서, 전통사회에서 하회마을을 배경으로 연행되었던 하회탈춤의 가치를 더욱 인정받게 되었고, 1980년 11월에 중요무형문화재 69호로 지정받는다. 그리고 이때 지정은 1978년 민속예술경연대회 공연을 중심으로 한 내용으로 고정되었다.

  1973년 하회가면극연구회의 창립, 1978년 민속예술경연대회 참여는 하회탈춤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드러낸다. 하회가면극연구회는 시작은 연극모임으로 출발하였으나 결국 안동지역을 대표하는 전통극인 하회탈춤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유한상과 이상호 등과 같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논의된 하회탈춤을, 보다 조직적 차원에서 연행이 이루어질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국가적 정책에 의한 민속예술경연대회를 통해 고정된 연희로 판짜기가 이루어졌고, 결국 이것이 1980년 무형문화재 지정으로 박제화되기에 이른다.
초기 복원에 있어 유한상의 역할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하회탈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복원하는 데 앞장서는 가운데 탈춤의 채록본을 작성해서 학술지에 게재하는 적극성도 보일 정도였다. 이러한 그의 열성은 여러 학자들의 하회탈춤에 대한 높은 관심도가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자신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저 평범한 마을의 연행물일 뿐인 하회탈춤이 여러 학자들에게 상당한 관심거리가 되는 상황을 접하면서 그는 자신이 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4) 무형문화재 지정 이후 본격적인 공연예술화

  무형문화재 지정까지 내외적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은 개인적 관심사에서 조직적인 역할분담과 구성으로 이어지고, 이윽고 국가적인 전통담론이 개인과 민간단체의 관심사를 1970년대의 정책적 방향성에서 저울질하고 재편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의 결론은 전통적인 담론의 최고조인 문화재 지정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하회탈춤은 정형화된 하나의 판구조로 고정되어, 그 자체로 본원적인 맥락을 상실하게 되고, 춤과, 가락, 대사만을 고정적인 레퍼토리로 연행하는 박제의 길로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문화재 지정 이후의 흐름들을 보면 공연예술자체가 가지고 있는 역동성을 살펴볼 수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판구조를 유지하되, 미세한 각 부면에서 새로운 변화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백정마당에 등장하는 소를 연행하는 이들이 물총을 준비해서 관객들을 향해 오줌싸는 시늉을 하는 것이나, 백정에게 도살당할 때 발을 치켜들고 벌벌 떨다가 죽는 시늉, 이매의 즉흥적인 판엮음(이매 넋두리 마당)을 통해 관객들을 판으로 끌어들여서 함께 대거리를 주고 받고 한판 춤을 함께 추는 형태 등은 공연예술로서 생명력을 유지하고 강화시키려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관객들과의 호응이나 연극적인 완성도를 위해 전통적인 방식의 연행이 아닌 서구적 연극양식의 흐름으로 가는 경향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마당과 마당 사이의 부재 또는 느슨했던 연결구조를 앞뒤의 맥락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인위적으로 대사를 만들거나 연출을 가미하는 것, 관객들에게 인물의 전형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대사를 점점 늘여 가는 것 등이다.

  현재 보존회는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지역의 문화예술단체로서 위상을 높이고, 1997년도부터 시작된 상설공연을 통해 지역주민 및 관광객들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으며, 잦은 해외공연과 외부 공연을 통해 문화상품적 가치를 높이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이제는 국가주의적인 전통담론이나 내 고장 가꾸기의 담론이 아닌 철저한 경제적 기제로 옮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상......... 저도 좀 알고 정리해보는 차원에서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201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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