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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군산시 출신 유명인
비공개 조회수 6,853 작성일2017.01.16

군산시 출신 연예인이나 유명인 누가있을까요?


개그맨 박명수씨와 시인 고은님 말고 또 어떤 분이 계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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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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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 출신의 유명인으로는 작가로는 채만식, 이근영, 라대곤 등이 있으며, 운동선수로는 88 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복싱의 김광선이 있으며, 또한 군산출신의 문화예술인으로는 정만채(1884~1961), 남춘역 등이 있다.


(군산시 출신의 유명인)


1.채만식 (1902.6.17 ~ 1950.6.11)


본관 평강. 호 백릉. 전라북도 옥구에서 출생하였다. 중앙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중퇴, 귀국 후 동아일보·조선일보 기자를 역임, 1925년 단편 《세 길로》가 《조선문단》에 추천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 후 희곡 《사라지는 그림자》, 단편 《화물자동차》·《부촌》 등 동반작가적 경향의 작품을 발표했으나 1934년에 《레디 메이드 인생》·《인텔리와 빈대떡》 등 풍자적인 작품을 발표하여 작가적인 기반을 굳혔다. 그 뒤 단편 《치숙》·《소망》·《예수나 믿었더면》·《지배자의 무덤》 등 풍자성이 짙은 작품을 계속 발표했다.

 

장편 《탁류》는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사건을 놓고 사회의 비리를 풍자한 작품이다. 1973년에는 유고로 중편 《과도기》와 희곡 《가죽버선》이 발견되어 《문학사상》지에 발표되었다. 저서로 《채만식단편집》·《탁류》·《태평천하》·《집》(단편집) 등이 있고, 8·15광복 후에는 《여자의 일생》·《황금광시대》·《잘난 사람들》 등을 남겼다.


2.리근영 (1910~?)


전북 군산시 옥구읍에서 출생하였다. 1934년 보성전문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뒤 1946년 <동아일보> 기자를 지내다가 그 해 공화국북반부로 들어왔다. 1948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내고, 1954년부터 조선작가동맹 상무위원을 지냈다. 1955년에는 작가대표로 중국, 쏘련을 순방하였다. 1964년 다시 조선작가동맹 상무위원으로 사업하였다. 직업총동맹 평남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단편소설 ‘그들은 굴하지 않았다’(1955), ‘소원’(1975) 등이 있다.


장편소설 ‘청천강’(1960), ‘청천강’(1963, 제2부), ‘청천강’(1964, 제3부), ‘어머니와 아들’(1980)를 창작하였다. 론설로는 ‘항일무장투쟁시기에 김일성 동지를 선두로 한 공산주의자들이 사용한 조선어의 풍부한 인민적 성격’(1960), ‘문학작품에서의 대화’(1964), ‘문학평론과 언어’(1964), ‘언어문장 구성에서 사투리 문제’(1966)가 있다. 이외에도 고전문학 ‘장화홍련전’(1957) / 중편소설 ‘첫 수확’(1957) / 장편소설 ‘별이 빛나는 곳에’(1966) 등이 있다.


3.김광선 (1964. 6. 8.~ )


전라북도 군산 출신이며, 한양공업고등학교. 동국대학교 체육학과 졸업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출전하였으나 1회전에서 탈락하였다. 2년 후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으며, 1988년 서울 올림픽 플라이급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1990년에는 프로로 전향, 1992년 세계복싱평의회(WBC) 플라이급 챔피언 도전하였으며 프로 전적은 8전 6승 2패이다. 현재 이스턴오에스엠유 대표이다. 2008년 제1회 함평세계나비곤충엑스포 홍보대사로 임명되었다.


4.정만채 (1884~1961)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 출신의 육영 사업가로 정만채는 동산 학원을 설립하고 군산 시사회를 조직하였다.


정만채의 호는 매촌이다. 1884년(고종 21) 조촌리(현 전라북도 군산시 조촌동의 옛 이름) 대지주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권유로 다섯 살 때 한학을 수학했으며 성장하면서 농업과 학문에 몰두했다. 청년 시절에는 문학을 즐겼다. 1915년 자택에 야학당 매촌 의숙을 설립하고 군산·옥구 지역 청소년들을 모아 학문을 전수하였다.


정만채는 일제 강점기이던 1920년부터 군산 지역 문맹자를 대상으로 한글 교육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감시와 간섭은 날로 심해졌고, 1926년에는 탄압을 견디다 못해 문을 내렸으나 대신 춘궁기가 되면 가난한 소작농들에게 식량을 급여하는 등 빈농 구제 사업을 전개하였다.


평생 이념이 교육 보국이었던 정만채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아들 정찬홍의 권유를 받아들여 전라북도 부안과 군산에 보유하고 있던 농지를 모두 처분한 쌀 1천 석을 쾌척, 일본인이 설립한 군산 가정 여학교를 인수하고 1948년 9월 학교 법인 동산 학원을 설립하였다.


1955년 군산 시사회를 조직하여, 군산 지역 한시 육성 발전 및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정만채가 남긴 한시를 『매촌한시초』로 출간하였다.

 

전라북도 군산시 옥산면 백석리에 정만채의 묘가 있다.

 

현재 매촌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매촌 의숙 장학 재단이 설립되어 지역 학생들에게 매년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5.남춘역 (1923~1963)


전라북도 군산 지역 출신 가수이자 영화 배우로 남춘역의 본명은 이종모이고 1941년 가수가 됐다. 일본으로 건너가 데뷔곡 「그림자 고향」, 「왕모래 선창」 등을 취입하였고 총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남춘역은 1923년 전라북도 군산시 흥남동 말랭이[고지대]에서 태어났다. 1941년 4월 태평 레코드사가 개최한 가요 콩쿠르 대회 군산 예선을 어렵게 통과했다. 1941년 5월 서울 제일 극장[훗날 한일 극장]에서 열린 총결선에서 1등으로 레코드 예술상을 차지하면서 가수가 됐다. 일본으로 건너가 데뷔곡 「그림자 고향」, 「왕모래 선창」 등을 취입했다.


남춘역의 가수 인생은 순탄하지 못했다. 1등 은컵을 들고 고향에 내려오니 와병중이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쟁이놈이라며 멸시했다. 그 무렵 군산에 들어온 악극단을 따라 상경하여 황금좌, 신태양 악극단 소속 가수로 떠돌다 1945년 해방 후 배우가 되었다. 그러나 구두 수선공, 보일러공, 뱃사공, 식당 보이, 광부, 어부 등 외로움을 씹고 살아야하는 밑바닥 인생 배역만을 도맡았다.


1959년 어느 날 정치 깡패 임화수가 희극 배우 김희갑이 말을 듣지 않는다며 주먹과 발길로 짓이겨 늑골 세 대가 나가는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옆에는 당시 잘 나가는 배우가 여럿 있었으나 누구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고, 남춘역과 주선태가 꼬꾸라지는 김희갑을 부축해서 병원으로 옮겼다. 이를 항상 감사하게 생각했던 김희갑은 훗날 자서전에서 이같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


남춘역은 마흔이 넘은 나이로 극단 신협의 「갈매기떼」에 19세 소년으로 출연하는 등 열정을 다했지만, 건강이 따라주지 않았고 오랜 세월 괴롭혀 온 요독증과 기관지 천식이 악화되어 1963년 8월 24일 사망하였다. 남춘역의 장례식은 배우 협회장으로 치러졌고, 요절을 슬퍼하는 행렬이 종로 거리를 메웠다고 당시 언론은 전하고 있다.


남춘역은 1963년 12월 제1회 청룡 영화제에서 특별 연기상을 수상했다. 이미 고인이 된 후여서 상패는 후배 장혁에게 전해졌다. 1964년 3월에는 『부산 일보』가 주관하는 제 7회 부일 영화상에서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2017.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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