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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영동지방에 율곡과 신사임당 외에 다른 인물없나요....????
boyb**** 조회수 4,829 작성일2004.09.24
영동지방에 율곡과 신사임당 외에 다른 유명한 인물이나... 업적을 만드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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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ya****
고수
한국사, 사회, 도덕, 국어, 한문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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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호 이익 (1681~1763)

 

본관 여주, 호 성호.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에 응시, 낙방하였다.

이듬해 형 잠이 장희빈을 두둔하다가 당쟁의 제물로 장살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낙향,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처음 성리학에서 출발하였으나 차차 이이 ·유형원의 학문에 심취하였는데, 특히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천문 ·지리 ·율산 ·의학에 이르기까지 능통하였으며, 서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투철한 주체의식과 비판정신을 토대로 그의 주요저서인 《성호사설》과 《곽우록》을 통해 당시의 사회제도를 실증적으로 분석 ·비판하여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중농사상에 입각하여 전제개혁의 방향을 개인의 토지점유를 제한하여 전주의 몰락을 방지하려는 한전론에서 찾았으며, 노비신분을 점차적으로 해방시킬 것 등을 주장하는 한편

당쟁의 발생은 이해의 상반에서 오는 것이라고 분석, 양반도 산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사농합일이론을 주장하였다.

인재등용에 대해서는 과거제도에만 의존하지 말고 공거제를 아울러 실시할 것 등도 제시하였다.

 

1727년(영조 3) 학행으로 천거되어 선공감가감역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763년 83세의 고령에 이르자 나라에서는 우로예전에 따라 중추부첨지사로 승자의 은전을 베풀었으나 그 해에 죽었다.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그의 학문은 직계 후학들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었다.

초서에 능했으며 저서에는 앞에 든 것 외에도 《성호집)》 《이선생예설》 《사서삼경》 《근사록》 등이 있고, 편저에 《사칠신편》 《상위전후록》 《자복편)》 《관물편》 《백언해》 등이 있다.

 

 

2. 초허 김동명 (1901∼1968)

 

강릉 출신으로 시인, 정치평론가이며, 호는 초허이다.

1920년 함흥 영생중학을 졸업하고 1947년 월남하여 1960년까지 이화여대 교수, 참의원 의원을 역임하였다. 1923년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에게 바치는 시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시면'으로 문단에 등단하여, 1930년 첫 시집 '나의 거문고', 1938년 두 번째 시집 '파초'를 간행하였다.

 '파초'는 그의 대표적인 시집으로, 일제의 탄압아래 전원에 묻혀 지내는 시인의 비애와 조국에의 향수가 투명하고 고아한 미의식으로 서정화되어 있다.

 

광복후에는 전원적 목가적 세계에서 점차 정치와 사회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신문 잡지에 정치평론도 많이 썼으며, '38선' '하늘' '진주만' '내마음은' 등의 시집과 '적과 동지' '역사의 배후에서' 등의 정치평론집을 발표하였다.

1954년에는 시집 '진주만'으로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현대시단의 대표적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그는 '파초' '내 마음은' 등의 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3. 가산 이효석 (李孝石 1907 - 1942)

 

호 가산(可山), 강원도 평창 출생. 소설가이자 영문학자이다.

평창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0년 경성제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하였으나 곧 그만두고 부인의 고향인 함북 경성으로 가서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가 되었다.

 

1934년부터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작품활동을 하다가 1942년 5월 25일 사망하였다.

1928년 "조선지광"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동반작가로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기우' '깨뜨려 지는 홍등' '노령근해' '북국사신' '마작철학'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3년 정지용, 이상, 김기림, 이태준 등과 순수문학을 표방한 구인회를 결성하면서

경향성을 버리고 '돈(豚)' '수탉' 등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향토색 짙은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34년 자연과의 교감을 수필적 필체로 유려하게 묘사한 '산' '들' 등을, 1936년에는 '메밀꽃 필 무렵', 이후에는 서구적 분위기를 풍기는 '장미 병들다' '화분' 등을 발표하였다.

 

193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인 그의 작품들은 성(性)과 자연의 자연스런 대비와 융합을 세련된 언어, 서정적 분위기로 형상화함으로써 예술적 감동을 안겨주는 소설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강원도 평창의 가산공원은 선생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온 군민이 정성을 모아

'93년 11월 준공한 공원으로 1,300평 부지 위에 가산의 동상과 문학비등 조형 광장과 주변에 벤치등의 편의시설을 갖추었다.

 

인근 지역에 이효석 생가와 소설에 등장하는 장터, 물레방아등 가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발자취들이 많아 문학 애호가들이 많이 찾고있는 곳으로 매년 9월초 이곳에서 이효석 추모 백일장이 개최되고 있다.

 

 

4. 김유정 (1908∼1937)

 

춘천 출신의 소설가로, 1908년 춘천시 신동면 증리 실레마을에서 태어나 1937년 3월 29일 폐결핵으로 2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짧은 문단 활동에도 불구하고 '동백꽃' '봄봄' '땡볕' 등 30여편의 소설과 10여편의 수필을 발표하는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보를 거쳐 1930년 연희전문학교와 1931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곧 중퇴하였다.

1932년 고향으로 내려와 금병의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1933년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낙비'가 당선되었고, 조선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가 가작으로 입선되었다.

이 해에 구인회 후기동인으로 가입하였다.

 

김유정 문학은 본질적으로 희극적인 해학성을 특징으로 한다.

즉, 1930년대 한국 농촌의 실상과 삶을 투박하면서도 정확한 문장, 그리고 독특한 해학과 능청으로 표현하여 농촌의 구조적 모순을 희극적인 해학미로 구조화한 독특한 소설세계를 창조하였다.

 

문화체육부에서는 1994년 3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으며, 매년 3월 29일 기일에는 그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5. 박인환 (1926∼1956)

 

인제 출신의 시인으로 1945년 경성 제일고보를 거쳐 평양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광복과 함께 중퇴하고서울 종로에서 서점 '마리서사'를 운영하였다.

 

학생시절부터 시작에 몰두하여 1946년 국제신문에 '거리'를 발표하였고, 1949년 김경린, 김수영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여 도시적 문명과 현실에서 시의 테마와 언어를 찾는 모더니즘의 기수로 각광 받았다.

 

1949년 경향신문 기자,

1951년 종군기자,

1955년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하여 상선을 타고 미국을 다녀오는 등

보헤미안적인 체험과 성향으로 이국적인 정서를 한껏 표현한 시가 담겨있는 "박인환 선시선"을 1955년에 발간하였다.

 

1950년대의 도시적 우울과 감상을 신선하고 리듬감있는 언어로 노래한 그는 대표작 '목마와 숙녀'에서 서구적 감수성과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면서 전쟁후의 어두운 현실과 풍속을

서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폭넓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1956년 3월 31세 때 서울 명동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와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는데, 사망하기 1주일전에 쓴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애창되었다.

 

 

6. 신숭겸 (申崇謙, ?∼927)

 

 

초명 능산(能山), 시호 - 장절(壯節) 본관은평산(平山),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본래 전라도 곡성현 출신으로 태조가 평산에서 사성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고려사』열전에는 그를 광해주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춘천도호부 인물조에 신숭겸의 이름이 실려 있고,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그는 본래 곡성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되어 그의 묘도 여기에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918년 궁예가 세운 나라인 태봉의 기장으로 있다가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년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당시 동료 기장(騎將)으로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등과 협력, 궁예(弓裔)를 폐하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룬고려 개국의 공신이다.

 

하루는 왕건이 장군들과 평주(평산)에 사냥을 나가는 도중에 기러기 세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서 맞힐 수있는가?" 하고 물으니 신숭겸이 자신이 맞추겠다고 하며 "몇번째 기러기를 맞출까요?" 하며 물어보자세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맞추라고 하자 날아가는 세번째 기러기의 왼쪽날개를 맞추어서 떨어뜨렸다.

태조가 탄복하고 근처 땅 300결을 하사하고 함께 본관을 평산으로 삼게했다.

 

927년(태조 10) 공산(公山)에서 견훤(甄萱)의 군대에게 태조가 포위되자 김락(金樂) 등과 함께 역전하여 이를 구출하고 전사하였다. 신숭겸의 묘역은 울창한 소나무 숲 속에 있으며

영정각, 신도비각, 기념관, 재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 묘는 도굴을 염려해 시신은 하나인데 봉분은 세 개인 1기 3분의 특이한 묘역을 조성하였으며 한국의 4대 명당지 중 하나로 손꼽힌다.

 

1120년(예종 15) 예종은 그와 김락을 추도하여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었다.

 

 

7. 난설헌 허초희 (1563∼1589)

 

조선중기 강릉출신의 여류시인으로, 본명은 초희이며, 호는 난설헌, 경번이다.

성리학자인 허엽의 딸이며, 허균의 누나이다.

삼당시인 중의 한 사람인 손곡 이달에게 한시를 배워 뛰어난 시재를 발휘하였으며,

8세 때 광한전 백옥루상량문을 지었다.

 

1577년(선조 10)경 김성립과 결혼했으나 원만하지 못하였고, 두 딸을 낳았으나 모두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친정집에 옥사가 있었고 동생 허균마져 귀양가는 등 비극이 연속되어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결혼후의 형편과 친정에 겹친 고뇌를 시작(詩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로 여인의 특유한 감상을 노래, 애상적인 시풍의 독특한 세계를 이룩하였다.

 

뒤에 작품 일부를 동생 허균이 명나라 사신 주지번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으며, 1711년에는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널리 사랑받았다.

 

작품은 시로 '유선시' '빈여음' '망선요유흥' '동선요' 등 총 142수, 가사로는 '규원가' '봉선화가' 등이 있다.

 

 

8. 교산 허균 (1569∼1618)

 

조선중기 강릉출신의 문신, 개혁사상가로 호는 교산이며 본관은 양천이다.

 

아버지는 삼척부사를 지낸 허엽이며, 어머니는 강릉김씨인 예조판서 김광철의 딸이다.

임진왜난 직전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허성과 허봉이 이복형이고, 허균과 허난설헌이 동복형제다.

 

1594년(선조 27)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하였다.

이후 황해도 도사, 형조정랑, 공주목사, 예조 호조참의 등의 관직을 지냈다.

 

1606년(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치고, 누나인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주어서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617년 좌참찬이 되었고, 이듬해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에 연루되면서 역적모의를 하였다하여 사형당하였다.

 

그의 소설 홍길동전은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한 조선시대의 대표적 한글소설이다.

특히 허균은 당시 선비사회에서 보면 이단시할 만큼 다각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인물로,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관과 학문관을 피력해 나간 시대의 선각자였다.

문집으로 성소복부고가 남아 있다.

 

문화관광부에서는 2001년 9월 이달의 문화인물로 허균과 그의 누나인 허난설헌을 함께 선정하였다.

 

 

9. 약천 남구만 (1629∼1711)

 

조선후기 숙종 때의 명신으로 호는 약천, 본관은 의령이다.

 

1656년(효종 7)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한성부좌윤, 대제학, 대사간, 우의정 등의 관직을 거쳐

1687년(숙종 13) 영의정에 올랐으며, 1707년(숙종 33) 봉조하가 되었다.

 

조선후기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론의 영수였던 약천 남구만은 1689년(숙종 15) 숙종이

소의 장씨(희빈) 소생아들로 세자를 삼으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송시열에게 동조하다 실각하여 1690년 조정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지금의 동해시 망상동 심곡마을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약천 남구만이 지은 시조로 청구영언에 기록되어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는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

라는 시조는 그가 이곳에 머물면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이곳에는 시조에 나오는 '재너머'와 '사래 긴 밭'을 비롯하여 그가 마셨던 우물물인 '약천'이 소재하고 있다.

문집으로 약천집이 있다.

 

 

10. 의암 유인석 (1842∼1915)

 

구한말 춘천 출신의 의병장, 유학자이며 호는 의암, 본관은 고흥이다.

 

유중곤의 아들로 14세 때 족숙인 유중선의 양자로 들어가 당대의 거유이자 위정척사의 대표적 사상가인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1893년(고종 30) 제천으로 옮겨가 후학을 양성하고 있던 중, 1895년 명성왕후 민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이필희 등 문인사우들과 함께 거의하여 호좌의병진(제천의병)의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1907년 고종의 퇴위와 정미 7조약 그리고 군대해산으로 더 이상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1908년 블라디보스톡(해삼위)으로 망명하여 1910년 6월 13도의군을 결성하여 도총재에 추대되었다.

그후 러시아의 탄압으로 13도의군이 와해되자, 1914년 서간도로 망명을 단행하였으나 1915년 1월 29일(음) 서간도 봉천성 관전현 방취구에서 74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2000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11. 윤희순 (1860∼1935)

 

여성 독립운동가로, 16세 때 춘천 남면의 유제원과 결혼하였다.

본관은 해주이다.

 

1895년(고종 32) 춘천의병이 춘천과 가평일대에서 전투할 때 윤희순은

'안사람 의병가', '병정의 노래' 등 수십 수의 의병가를 지어 사기를 진작시키고, 식사와 세탁 등 뒷바라지를 하면서 적극 도왔다.

 

1907년(융희 1)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춘천 가정리 항골(恒谷)에서 시아버지인 유홍석을 비롯한 의병 6백여명이 전투를 벌일 때, 윤희순은 군자금을 모금하여 여의내골의 주산에 무기제조장을 설치하게 하였다.

 

경술국치 다음 해인 1911년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나, 시아버지와 남편이 순국하고 1935년 7월 아들 유돈상마저 순국하면서 3대에 걸친 의병활동을 뒷바라지해 오던 그도 8월 1일 76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유해는 정부의 후원으로 봉환되어, 1994년 10월 20일 춘천의 선영에 남편 유제원과 합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그 공훈을 기려 198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2. 한서 남궁억 (1863~1939)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 보급운동을 전개하고 황성신문을 창간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로, 호는 한서이다.

 

1884년 영어학교인 동문학을 수료하고 어전통역관으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896년 7월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

 

1898년 9월 황성신문을 창건하고, 사장에 취임하여 일제의 한국침략 야욕을 폭로, 심한 고문을 받았다.

 

1906년 2월 양양군수로 부임하여 그 다음 해 7월 동헌 뒷산에 현산학교를 설립하고 구국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10년 배화학당 교사로 재직하면서 애국심 함양과 여권신장에 온 힘을 기우렸다.

 

1918년 고향인 홍천군 서면 모곡리로 낙향하여 교회를 짓고 학교를 설립하여 무궁화 보급운동을 전개하면서 동사략, 조선이야기 등 국사책을 직접 저술하여 교육시키는 등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다.

 

1933년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투옥되어 8개월간 일경의 모진 고문을 받고 끝내는 그 여독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문화관광부에서는 2000년 1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13. 동안거사 이승휴 (1224∼1300)

 

고려후기 문인 관리로 호는 동안거사이며, 가리(嘉利) 이씨의 시조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학문에 힘써 1252년(고종 39)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홀어머니가 살고 있는 삼척 두타산 구동에 들어가 10여년 동안 몸소 농사를 지으면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1264년(원종 5) 경흥부 서기로 관직에 오른후 도병마녹사, 감찰어사, 우사간, 양광 충청 안렴사를 거쳐, 1298년(충열왕 24) 밀직부사를 지냈다.

1280년(충열왕 6) 국왕의 실정과 측근들의 전횡을 간언하다 파직되어 삼척 구동으로 돌아와 용안당을 짓고 은거생활을 하면서 "제왕운기"와 "내전록"을 저술하였다.

만년에는 불교에 몰입하여 용안당을 간장사로 고치고 토지를 희사하였다.

 

<제왕운기>

제왕운기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던

당시 신진사류들의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써

민족문화의 우월성과 역사전통에 대한

강렬한 자부심을 깔고 있는 자주적인 역사서이며,

우리나라 민족사관의 기초를 닦은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14. 운곡 원천석 (1330∼ ?)

 

고려말 조선초의 유학자로 호는 운곡이다.

종부시 정을 지낸 원윤적의 아들이며,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고려말 정치의 문란함을 보고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진사가 된 것을 부끄러워 하여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면서 부모를 봉양하는 한편,

당대의 거유들인 이색 이숭인 길재 등과 사귀면서 학문에 힘썼다.

 

일찍이 왕자시절의 태종을 가르친 스승이었지만, 태종이 즉위한 후 그를 기용하려고 불렀으나 따르지 않았으며, 태종이 직접 찾아 왔어도 만나주지 않았다.

그 뒤 상왕이 된 태종의 특명으로 마지못해 입궐한 그는 도와 달라는 태종의 청을 또 다시 거절하였다.

 

작품으로는 고려를 회고한 시조 1수가 전해지고 있으며, 여말선초의 정사 5권을 저술하여

상자에 넣어 후손에게 전하였는데, 국사에 저촉되는 것이 많아 증손대에 이르러 전부 소각하였다고 한다.

 

운곡 원천석의 절의는 후세에 귀감이 되어, 원주지방 유림들이 칠봉서원을 건립하여 사표로 봉안하고 제향하였다.

 

 

15. 매월당 김시습 (1434∼1493)

 

조선초기의 학자이자 문인,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강릉이다.

그는 타고난 천재로 세상에 나서 8개월만에 글을 알았고, 5세 때는 중용 대학을 읽는 등

5세신동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1세 때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출가하여 평생동안 관직에 나가지 않는 등 절개를 지키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비롯하여 십현담요해, 탕유관동록, 탕유관서록, 탕유호남록 등 탁월한 저술을 남겼다.

이중에서 탕유관동록은 강원도에 관한 글을 집대성한 시문이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강원도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의 본관이 강릉이고, 춘천의 청평사와 강원도의 명산인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등을 순방하면서 남긴 많은 시문들이 매월당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설악산의 오세암은 매월당의 '5세신동'으로 부터 연유된 사찰이다.

 

그의 진영이 모셔진 사당인 청간사가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의 명주군왕릉내에 소재하고 있으며, 문화관광부에서는 1999년 9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2004.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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