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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레스터시티
비공개 조회수 18,385 작성일2015.12.02
안녕하세요 저번에 축구규칙 물어봤던 사람이예요...
그때 내공 100 안걸어서 죄송해요...ㅠ
그래서 1:1 드려요!
Q1.레스터 시티 구단 역사
Q2.레스터 주요 라인업(사진까지 있으시면 더 감사해요..)
두가지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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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빡구
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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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복붙ㅈㅅ)사진이 평균 라인업이에요



레스터 시티는 1884년에 레스터 퍼스(Leicester Fosse)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퍼시 로드(Fosse Road) 옆의 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이용했다. 1890년에 풋볼 얼라이언스라는 리그에 참가하였다.1891년에 필버트 스트리트로 홈구장을 옮기기 전에는 빅토리아 파크를 홈구장으로 사용했었다. 같은 해에 레스터 시티는 미들랜드 리그에 참가하였고, 1894년에 미들랜드 리그 준우승을 하게 되면서풋볼 리그의 2부 리그에 선출되었다. 레스터의 풋볼 리그 첫 경기는 그림스비 타운과의 경기로 3-4로 패하였다. 첫 번째 리그 승리는 홈에서 로더럼과의 경기였다.[4] 또 같은 시즌에 지금까지도 클럽 역사상 최다 점수차승 기록으로 남아 있는 13-0 승리가 FA 컵에서 노츠 올림픽(Notts Olympic)과의 예선전에서 기록되었다.[2] 1907-08시즌에 2부리그 준우승을 하며 1908-09시즌엔 1부리그로 승격하게 되었다. 하지만 단 한 시즌만에 리그 최다 점수차 패인노팅엄 포레스트와의 0-12 경기를 겪으며 다시 강등되었다.[2][5][6]

1919년에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중지되었던 리그가 재개되고, 재정상의 어려움 때문에 레스터 퍼스는 레스터 시티 FC로 재조직되었다. 이는 레스터 보로가 레스터 시로 승격하게 됨으로써 얻은 결과이다. 명칭의 변경 후에, 20년대에는 1924-25시즌의 2부리그 우승을 하였고,[7] 1928-29시즌에는 클럽 역사상 최고 성적인 1부리그 준우승을 하며,[8]어느 정도의 성공가도를 달려왔다. 그러나 30년대인 1934-35시즌에는 2부리그로 강등되었다가,[9]1936-37시즌엔 승격을 하고,[10] 1938-39시즌엔 다시 강등을 하며 30년대를 마무리짓는다.[11][2]

1949년에 레스터시티는 FA 컵 결승에 처음으로 오르게 되었다.[12][2] 결승전에서 울버햄프턴에게 1-3으로 패배하였다. 그러나 1주일 후에 레스터시티는 시즌의 마지막 날의 무승부로 2부리그에서 살아남은 것을 축하하였다.[13][14] 1954년에는 2부리그 우승을 하였다.[15] 비록 다음 시즌에는 다시 강등하긴 하였지만, 1957년에 다시 1부리그에 등장하였다. 이후 1969년까지 레스터시티는 클럽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1부리그에서 리그를 진행하였다.

클럽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감독으로 꼽히는 맷 길리스(Matt Gillies)의 운영 아래, 레스터는 1961년과 1963년의 FA 컵 결승에 두번 올라갔지만, 모두 패하고 말았다.[2] 1961년에는 더블을 기록한 토트넘에게 패하여서 다음 시즌인 1961-62시즌에는UEFA 컵위너스컵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1963년에 1부리그 4위를 기록했는데, 이는 클럽의 전후 최고 성적이었다. 1964년에는 리그컵에서 스토크 시티를 4-3으로 누르고 최초의 우승컵을 들어올리게 되었다.[2] 다음해에 리그컵 결승에 다시 한번 올라갔지만 첼시에 패배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 후 맷 길리스는 1968년 11월에 사임하였다. 그 뒤를 이은 프랭크 오파렐(Frank O'Farrell)은 팀의 강등을 막을 수 없었지만, 팀은 마지막 FA컵 결승에 올랐지만, 맨체스터 시티에 패하고 만다.

1971년에 레스터는 다시 1부리그로 승격한다. 그리고 채리티 실드에서 리버풀과 대결하게 되었다.[2]이상하게도 1부리그 우승 팀인 아스널의 유럽 대회에서의 제재 때문에, 2부리그 우승 팀인 레스터가 채리티 실드에 나가게 된 것이다. 레스터는 FA컵 우승 팀인 리버풀을 1-0으로 꺾고 최초의 채리티 실드 우승을 한다. 1974년에는 FA컵 준결승전까지 오르게 된다.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까지 레스터시티에서 선수로 성공적인 시기를 보냈던 프랭크 맥린토크(Frank McLintock)가 지미 블룸필드의 뒤를 이어 1977-78시즌을 맡게 되었다. 그 결과 팀은 강등되고 감독은 사임하게 되었다. 그는 레스터시티의 최악의 감독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성공적인 감독이었던 작 월리스(Jock Wallace)가 레스터시티를 맡았고 1979-80시즌에 팀을 2부리그 우승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1부리그에 잔류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1982년에는 FA컵 4강에 오르기도 하였다. 월리스 감독 하에서, 레스터시티의 가장 유명한 지역선수인 게리 리네커가 등장하였다. 레스터의 다음 감독은 고든 밀네(Gordon Milne)였는데 1983년에 1부리그 승격을 이룬 감독이었다. 리네커는 팀을 1부리그에 잔류시키는 것을 도왔으나, 1985년에 에버턴으로 이적되었고, 팀은 2년 후에 2부리그로 강등되었다. 밀네는 1986년에 팀을 떠났고, 1987년에는 데이빗 플리트(David Pleat)가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는1991년 1월에 있었던 경기에서 패배 후에 팀을 떠났는데, 그때 팀 순위는 꼴찌에서 4위였다. 고든 리(Gordon Lee)가 시즌 마지막까지 맡아서 이끌어갔다. 팀은 패하면 강등하게 되는 마지막 경기를 승리하며 2부리그 잔류를 확실히 하였다.[2]

프리미어리그가 설립된 1992년 이후에 레스터는 프리미어리그로의 승격을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1991년부터 감독직을 맡은 브라이언 리틀(Brian Little)은 1991-92시즌 마지막에 승격 플레이오프 결승전에 올랐다. 그러나 전 레스터시티 선수였던 마이크 뉴웰이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면서 블랙번 로버스가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하게 되었다. 1년 후에 레스터시티는 스윈던 타운과의 플레이오프 최종 결승전에서 3-0으로 뒤지던 경기를 3-3으로 동점까지 만들어 놓았지만 결국 4-3으로 지고 말았다. 1994년의 세 번째 기회에서는 지역 라이벌인 더비 카운티를 2-1로 누르고 승리하였다.

브라이언 리틀은 레스터의 감독직을 사퇴하고 11월에 애스턴 빌라로 옮겼다. 그의 후임자인 마크 맥기(Mark McGhee)는 1994-95시즌에 팀이 강등되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마크 맥기는 1995년 12월에 급작스럽게 팀을 떠나 울버햄프턴 원더러스로 옮겼다. 다음 감독인 마틴 오닐(Martin O'Neill)은 1995-96시즌에 1부리그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고 크리스털 팰리스를 2-1로 물리치고 다시 한번 프리미어리그에 참가하게 되었다. 오닐 감독은1997년과 2000년에 리그컵을 두번 우승하였고,1999년엔 준우승을 하였다. 이는 클럽이 1998년과 2001년에 UEFA 컵에 진출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1961년에 처음 유럽 대회에 나간 이후에 37년만의 성과였다.

오닐이 2000년 6월에 셀틱으로 옮겨가고 뒤를 이은 감독은 전 잉글랜드 21세이하 대표팀 코치였던 피터 테일러(Peter Taylor)였다. 이 때에 많은 선수들이 팀을 떠났고, 이적 시장에서의 좋지 못한 결과는 리그 결과에도 반영되어 팀의 성적은 점점 안좋아지고 결국 테일러는 팀을 사직하게 되었다. 그 뒤를 이은 감독들 역시 팀의 강등을 막지는 못하였다.

레스터시티는 필버트 스트리트의 마지막 시즌을 보내고 나서 2002-03시즌부터는 32,500명 규모의킹 파워 스타디움으로 이전하였다. 2002년 10월에 3천만 파운드의 빚과 함께 경영관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이유는 TV 중계로의 손실, 높은 세금, 선수들의 이적료와 새 경기장을 짓기 위한 3천7백만 파운드의 건설비가 주된 이유였다.[16] 미키 아담스 감독은 팀을 디비전 원의 2위 자리에 올려 놓아 다음 시즌 프리미어리그로의 자동 승격을 하게 되었다. 팀은 프리미어리그에서 한 시즌만을 보낸 뒤에 새롭게 명칭을 고친 풋볼 리그 챔피언십으로 강등되었다. 팀의 채무로 인한 재편성의 대응으로 풋볼 리그는 10점의 벌점을 주고 시즌을 시작하게 하였다.

2006년 10월에 포츠머스의 전 회장인 밀란 만다리치가 클럽을 구매하는 것에 흥미가 있다고 말하며 일러도 2007년 1월에야 경영권 취득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클럽의 공시가격은 약 6백만 파운드에 선수들의 몸값은 대충 4백2십만 파운드였다. 10월 30일에 만다리치가 회의를 열고 2천5백만 파운드의 투자를 할 것이라고 하였다. 11월 18일에 의 위원회의에서 위원회는 만다리치에게 공식 권한을 주기로 결정하였다. 12월 16일에 레스터 라디오 방송에서 비록 만다리치의 자문단이 이 요구를 거절하긴 했지만, 만다리치의 거래는 매우 불확실하게 보인다고 말하며 협상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하였다.2007년 1월 2일에 지역신문인 레스터 머큐리는 협상이 매우 활발하며 조만간 몇주 내에 해결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2007년 1월 15일에 레스터 머큐리는 협상이 거의 성사되었다고 전하였다. 만다라치의 어머니의 건강에 문제가 생겨 연기되다가 2007년 2월 13일에 공식적으로 인수가 발표되었다.[1]

2007년 4월 11일에 로버트 켈리가 감독직을 사퇴하고 나이젤 워싱턴이 임시 감독직을 맡았다. 워싱턴은 팀의 강등을 막았지만, 팀은 정식 감독 제안을 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공석이었던 북아일랜드 감독으로 떠났다. 2007년 5월 25일에 팀은 MK 던스의 감독이었던 마틴 앨런을 3년 계약의 감독으로 뽑았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앨런과 구단주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 4경기 후에 쌍방의 동의로 감독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2007년 들어 아홉 명의 감독이 바뀌고 (임시 감독직 5명 포함) 2007년 11월 22일에 이안 할러웨이가 감독으로 부임해왔다. 그는 50여년의 레스터시티 감독 중에 첫 경기를 승리한 최초의 감독이었다.[17]

2013-14 풋볼리그 챔피언쉽 우승을 확정,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했다.

2015년 시즌 내내 강등권 순위를 유지하다 리그 후반기에 웨스트햄, 웨스트 브롬, 스완지, 번리, 뉴캐슬, 사우샘프턴 을 차례로 꺾고 5월 16일 선덜랜드와 무승부를 기록하며 프리미어리그 잔류를 확정지었다.


201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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