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몇일 전 경주 대릉원 근처 지나가다 경주 환단고기 북콘서트 한다고 광고차 봤는데, 환단고기가 뭐나요? 어디서 하는 건지 궁금하네요?
yoyo**** 조회수 4,480 작성일2016.05.23

몇일 전 경주 대릉원 근처 지나가다 경주 환단고기 북콘서트 한다고 엄청 큰 광고차 봤는데, 환단고기가 뭐나요? 또 어디서 하는 건지 궁금하네요?


홍보지도 받고 서명도 했는데... 들어보니 관심이 생겨서 원래 역사에 관심이 많거든요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1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시크릿
바람신
한국사, 사회, 도덕 72위, 소규모종교 96위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6.12(일) 경주 환단고기 북콘서트 안내
https://youtu.be/JP19jneKgvw 


 
동북아시아의 잃어버린 문화와 역사를 되찾는 환단고기 북콘서트 [경주] !
놀라운 역사의 진실을 만나보십시오 ~

신라 천년역사의 수도 경주에서 열리는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자 초청 북콘서트에 많은 참여바랍니다.

☞일시 : 2016.6.12 오후2시
☞장소 : 경주 화백컨벤션센터 대회의실

감사합니다. 

 

목숨 걸고 지켜온 한민족 9천 년의 정통 유일 역사서 『환단고기』

“독립운동가인 운초 계연수 선생은 우리 역사와 옛 문헌에 관심이 많았던 분입니다. 그가 여러 집안에서 소장되어온 신라, 고려조와 조선조 때 다섯 석학이 쓴 다섯 권의 옛 사서들을 한 권으로 묶어 펴낸 것이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 합병된 이듬해, 1911년의 일이지요. 운초 선생은 그로부터 9년 뒤 일제 경찰에 의해 처형, 아니 무자비하게 살해당합니다.”

1920년 만주 관전현, 압록강 부근의 한 후미진 골짜기. 조선인의 사설학교 배달의숙倍達義塾에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쳤다. 이 학교는 독립운동가인 석주 이상룡 선생과 송암 오동진 장군이 출연, 설립한 뒤 일대 독립군 및 그 자녀들에게 조선의 역사와 혼을 가르쳐오던 터였다. 일본 헌병들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운초를 체포하고 운초와 여러 교사들이 수집하고 연구한 책과 저술, 자료 등 3천여 점을 강탈해 헌병대로 실어갔다.

“헌병대가 강탈한 온갖 자료들 가운데는 당연히『환단고기』도 포함돼 있었을 것입니다. 일본 헌병들은 운초가 『환단고기』를 펴낸 바로 그 인물인 것을 알고는 온갖 고문을 가하고는 곧 처형해 버렸어요. 그것도 사지를 다 잘라서 압록강에 내다버렸습니다. 너희 조선 놈들 엉뚱한 생각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봐라, 그랬던 것이죠. 일제는 혹시라도 한국과 중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인류의 시원역사가 되는 우리의 뿌리역사가 드러날까 겁먹은 나머지 그런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렇게 토막토막 잘려진 선생의 시신을 우리 동포들이 눈물과 비탄 속에 한 점 한 점 수습을 했습니다.
 
목숨 걸고 지켜온우리 역사서 ― 『환단고기』압록강 가에서 사람들이 운초 시신을 수습하던 장면을 한 소년이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열네 살, 그의 제자인 재야 역사학자로 활동하신 한암당 이유립 선생입니다.

이유립 선생은 평안북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인 해학 이기의 제자 이관집의 아들이고 열세 살부터 배달의숙에서 운초에게 배웠어요. 물론 운초와 이관집 선생은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고요. 운초와 그처럼 깊은 인연을 가졌던 이유립은 스승의 장례 아닌 장례를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어렵사리 보존된 『환단고기』 원본 한 부를 품에 안고 1948년에 월남했어요. 그리고는 우리에게 『환단고기』의 생생하고 고귀한 내용을 전해 주었습니다. 오로지 우리 역사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다 내놓았던 이러한 분들의 위대한 희생과 노력 덕분에 오늘 우리가 『환단고기』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환단고기』란
『환단고기』는 시대를 달리하는 다섯 석학의 글을 모은 것입니다.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것은 신라 때의 승려 안함로安含老가 쓴 『삼성기』입니다. 안함로는 안홍 법사, 안함 법사 등으로도 불렸던 인물인데 고려 때의 『해동고승전』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그 책에 의하면 안함로는 사물에 통달하고 지혜가 밝아 세속의 속박을 벗어나 왕래와 머무름을 뜻대로 하였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는 그가 『동도성립기』라는 책을 지었다는 것과 이웃 나라들의 침입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경주의 대궐 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앞날을 내다보는 문이 고국으로 귀국할 해 등을 모두 정확히 예견하여 명성이 높았던 승려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법만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사상과 역사에도 해박한, 유불선을 초월한 당대 최고의 도승이었습니다. 안함로의 『삼성기』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약간 차이가 있는 책이 원동중의 『삼성기』입니다.
원동중의 『삼성기』에서는 환국이 12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사실, 치우천황과 배달국의 18세 환웅들의 역년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귀중한 기록을 남긴 원동중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조선 전기 이전에 살았던 인물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세조실록』에 실린 금서목록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고려 때 사람이 아닌가 싶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 책은 『단군세기』로 이는 47세에 이르는 단군조선의 연대기입니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혼자서 1,500년을 통치한 전설적 인물처럼 그려져 있지만, 『단군세기』에는 달리 47명의 단군들이 대를 다스린 2,096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들 47명의 단군들이 모두 같은 왕조의 사람들은 아닙니다.

일부는 백성들의 추대를 받거나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들이지요. 『삼국유사』보다는 훨씬 더 사실에 충실한 역사서인 『단군세기』는 공민왕 12년(1363)에 행촌 이암이 썼다고 저자와 저술연도가 분명히 밝혀져 있는 책입니다. 행촌 이암은 고려 말의 고위 관료이자 학자로서 재상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그는 홍건적의 난이 끝난 후 관직을 물러나 강화도로 들어가 자신이 그토록 남기고 싶어 했던 우리의 상고사를 썼던 것입니다. 네 번째 책은 『북부여기』로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의 역사서입니다.
 
이 책을 찬술한 이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인 복애거사 범장입니다. 그도 이암처럼 고려 조정에서 관직생활을 했는데 벼슬이 간의대부까지 올라갔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두문동에 은거하였습니다. 조선의 태조와 태종 임금이 여러 차례 벼슬을 권했으나 출사하지 않고 고향인 광주로 내려와 학문에 몰두했던 인물입니다. 범장은 벼슬하기 전 젊은 시절에 행촌 이암, 이명과 함께 소전거사라는 인물로부터 우리 역사기록이 담겨 있는 고서를 전수받았는데 아마 이러한 고서들이 그가 「북부여사」를 남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북부여기』는 해모수의 북부여 건국으로부터 고주몽의 고구려 건국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고, 형식이 『단군세기』와 유사합니다. 다섯 번째 책은 『태백일사』로 조선 중종 때의 관리였던 일십당 이맥이능력이 있어서 천리 밖에서 싸우는 신라 군사가 전쟁에 패할 일, 삼국통일이 이뤄질 해, 왕자 김인편찬한 책입니다. 이맥은 고성 이씨로서 행촌 이암의 현손이었습니다.
 
『환단고기』를 우리에게 전수해준 이유립은 이맥의 직계 후손입니다. 『태백일사』를 소장하고 있던 해학 이기 선생도 고성 이씨로서 행촌 이암의 후손이었습니다. 고성 이씨는 이런 면에서 참으로 우리 역사에 큰 공헌을 한 것입니다. 이맥은 『태백일사』에 붙인 발문에서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를 간단히 적어놓았습니다. 연산군 때 괴산으로 귀양을 갔는데 그곳에서 무료한 귀양살이를 하던 중에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고서들과 또 자신이 찬수관으로서 있을 때 내각에 비장하고 있던 옛 사서들을 읽고 쓴 책이 『태백일사』였습니다. 『태백일사』에는 그가 여러 사서들에서 본 내용들을 그대로 전재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귀중한 상고사의 기록들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데 『환단시대의 옛 경전인 「천부경」, 「삼일신고」 등의 본문이 그 가운데 실려 있고 또 고조선의 일부였던 마한과 번한 통치자들의 명단과 역년이 실려 있습니다. 이맥은 자신이 쓴 책이 당시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용납하지 못할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내놓기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책 이름을 ‘태백의 숨은 이야기’라는 뜻으로 ‘태백일사’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환단고기』는 신라 진평왕 때부터 16세기 전반의 조선 중종 때까지 근 천년에 걸쳐 당대의 뛰어난 지식인들이 우리의 주체적 사관에 입각해서 쓴 역사기록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1911년에 독립운동가면서 우리 역사와 고서에 관심이 많았던 운초 계연수 선생이 이 기록들을 한권의 책으로 모아 간행하였습니다.”

환단고기의 뜻

“먼저 ‘환桓’은 이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하늘의 광명, 즉 천광명天光明을 뜻합니다. ‘환’은 지금도 자주 쓰는 말로서, “달빛이 환하다”, “대낮같이 환하다”라고 할 때의 ‘환’이 바로 이 천광명의 환입니다. ‘단檀’은 박달나무 단 자인데, 여기서 박달은 ‘밝은 땅’이란 뜻입니다. 달은 양달, 응달에서 알 수 있듯 땅을 가리키고요. 단은 곧 땅의 광명, 지광명地光明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환단은 천지의 광명입니다. 그리고 ‘고기古記’는 오래된 옛 기록이란 뜻인데, 『환단고기』 범례를 보면 고기의 인용이 『삼국유사』로부터 시작됐으나 지금은 고기를 볼 수 없어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단군세기』를 합본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환단고기』라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고기는 한민족사를 우리 손으로 기록한 옛 역사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역사 문화의 핵심이란 광명사관이기에 ‘환단고기’라 한 것입니다.

『환단고기』란 곧 천지의 광명을 체험하며 살았던 태곳적 한민족과 인류의 삶을 기록한 옛 역사이야기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한의 뜻

또 이 하늘, 땅과 더불어 우주를 구성하는 인간의 광명, 인광명人光明을 따로 일러 ‘한’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한’ 속에는 환단, 즉 천지 광명이 함께 내재돼 있습니다. 인간은 천지가 낳은 자식이므로 그 안에 천지부모의 광명이 그대로 다 들어있는 것이죠. 한은 그 뜻이 수십 가지에 이르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천지광명의 주인공으로서의 인간’을 말합니다. 하늘, 땅, 인간의 밝음은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 “대시大始에...언제나 오직 한 광명이 있었다.”라고 말하는 하나의 광명입니다. 그 빛이 3수 원리에 따라 셋으로 나뉘어 우주를 열었던 것이며, 『환단고기』는 우리 옛 조상들이 그 빛을 신의 모습으로 이해했다고 전합니다. ‘한’으로 산다는 것, ‘한’의 인간이 된다는 것은 내 안의 밝은 본성을 틔워 천지의 뜻에 따라 이 땅을 광명한 세상으로 이룩하며 사는 삶이 되겠습니다.

한단고기가 아니다 환단고기가 맞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는데, 『환단고기』를 『한단고기』로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한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릇된 명칭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한은 인간의 내면에 깃든 무궁한 천지광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본질은 동일하다 하더라도 환과 한은 분명 서로 구별돼야 합니다. 이 책의 제호가 반드시 ‘환단고기’여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요. 환·단·한의 광명 정신은 동방 한민족 9천년 역사에 그대로 실현됐습니다. 환국에서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나라 이름들이 한결같이 광명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환국은 ‘환’ 그 자체고요,

배달은 ‘밝다’를 뜻하는 ‘배’와 땅을 뜻하는 ‘달’이 모여 ‘동방의 밝은 땅’을 뜻합니다. 고조선의 조선도 ‘아침 햇살을 먼저 받는 곳[朝光先受地]’을 가리킵니다. 고조선의 국통을 이은 북부여의 부여도 ‘불’이란 말로서 광명을 나타내고, 고구려 유민이 세운 대진국, 그리고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또 다른 이름 발해 역시 각각 ‘동방의 광명의 큰 나라’, ‘밝은 바다’를 의미합니다. 고종 황제가 선포한 대한제국의 ‘대한’이란 말에도 ‘한’의 광명 정신이 어김없이 담겨 있으며, 오늘의 국호인 대한민국은 이 대한제국에서 나왔습니다.

더불어 각 시대 창업자의 호칭에서도 한·단·한의 광명 정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환’과 ‘단’이 들어 있는 환인, 환웅, 단군의 세 호칭은 모두 ‘광명문화의 지도자’를 가리키고,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의 성씨인 ‘해’ 또한 우리말로 광명의 태양을 의미합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도 ‘밝다’는 뜻의 박朴 자로 성을 삼았고, 이름에 ‘빛날 혁赫’ 자를 써서 광명 사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양조선의 이성계는 즉위 후 이름을 땅 위에 해가 떠오르는 모양의 ‘새벽 단旦’ 자로 바꿨는데, 이 또한 광명을 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성계는 고조선의 영토와 문화를 회복하여 과거 한민족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웅지에서,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는 것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새벽 단’ 자로 개명한 것이죠. 환국 이래 동북아 한민족의 모든 역사 과정은 실로 환단, 천지광명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기록한 책이 『환단고기』입니다.”

환단고기의 간행
“『환단고기』가 편찬, 간행된 것은 조선이 일본에 망한 후 1년(1911)이 지난 때 였습니다. 『환단고기』의 앞에 붙어 있는 서문에 해당하는 범례에 따르면 계연수 선생은 자신의 동지이자 벗인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 장군 두 사람의 자금지원으로 30부를 간행했다고 합니다. 범례에 ‘기궐剞劂’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목판에 새긴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유감스럽게도 원본은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천우신조로서 『환단고기』가 이유립이라는 인물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유립 선생은 1907년생으로서 해학 이기의 제자이자 계연수 선생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13세 때 삭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배달의숙이라는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이 학교에서는 계연수를 위시하여 최시흥, 오동진 등이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유립 선생은 조선독립소년단에 참가하여 활동하는 등 소년시절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는데 특히 교육운동에 뜻이 있어 33세 때에는 신풍학원도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해방이 되자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그는 1948년 남한으로 월남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남북한 간의 경계가 완전히 닫히지는 않아 북한을 두어 차례 더 왕래하였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내려올 때 『환단고기』를 가져왔습니다. 이유립 선생은 1963년 대전 은행동에 정착해서 후학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쳤는데 그 때 사용했던 교재가 『환단고기』였던 것입니다. 이는 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양종현梁宗鉉 씨가 필자에게 직접 증언해준 사실입니다.
 
양씨는 1966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이유립 선생에게 사사했던 분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유립 선생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 초간본은 1976년경에 분실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유립은 월간 『자유』지를 운영하고 있던박창암 장군(1923-2003)의 도움을 받아 의정부에 살고 있었는데 백내장 수술차 5일간 집을 비운 사이 집주인이 야반도주한 걸로 착각하고 집세 대신에 이유립 선생의 책들을 모조리 팔아버린 겁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환단고기』 원본이 사라지는 바람에 『환단고기』 위서론이 나오게 된 것이죠.”

환단고기 원본의 분실과 보존
 
환단고기』가 분실되기 전의 일입니다만 이유립 선생의 제자 가운데 오형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형기는 이유립 선생보다 10년 정도 연배가 젊은 사람이었는데 이유립 선생이 오형기의 형과 친한 터라 그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이는 양종현 씨가 증언해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오형기가 이유립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환단고기』를 빌려가 필사를 하게 됩니다. 오형기 말로는 이유립 선생이 자신에게 『환단고기』 정서를 요청했다고 하는데 양종현 씨 증언으로는 오형기가 그 책을 필사하기를 원하자 이유립 선생이 허락하여 필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형기도 그 책이 대단한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도 한권 소장하고 싶었던 것이었겠지요.

좌우간 이 오형기 덕에 『환단고기』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어요. 1979년에 광오이해사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환단고기』는 바로 오형기가 소장하고 있던 필사본을 간행한 것입니다. 출판을 했던 사람은 이유립 선생의 문하에 있던 조병윤으로 스승의 허락도 없이 간행한 터라 이유립 선생이 크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유립 선생은 오형기가 필사본에 쓴 발문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이 발문을 삭제하고 오자를 바로잡아 1983년에 배달의숙을 발행인으로 한 『환단고기』를 다시 간행했습니다. 배달의숙본이 나오기 바로 전해에는 가지마 노보루(鹿島昇)라는 일본인 변호사가 광오이해사본을 입수하여 일본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는데 이 일본어본이 역으로 국내에 수입되어 한국사학계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조병윤이 간행한 광오이해사본과 이유립 선생이 간행한 배달의숙본 모두 한문 원문만 실려 있는데 이후 여러 출판사들에 의해 『환단고기』 번역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
한민족 고유사서들의 소실 과정
“예로부터 전해오던 한민족의 고유사서들 대부분은 지금 그 자취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전란이 빈번하여 사서들이 소실된 경우가 많았고 외적에게 탈취되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궁궐과 많은 절, 건물들이 불에 타면서 그곳에 있던 서적들도 소실되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유학에 물든 조선 조정은 우리 고유 사서를 민간으로부터 수거하여 궁궐에 비장하였다가 전란이나 화재로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환단고기』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고기古記』, 『밀기密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려팔관 잡기高麗八觀雜記』 등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유 사서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렇게 한민족사의 참 모습을 확인시켜 줄 사서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지금, 『환단고기』와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등 몇 종의 책들이 겨우 전해지고 있습니다. 『단기고사』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발해문자로 쓴(729년) 책입니다. 전수 과정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59년 국한문으로 번역되었지만, 6·25 사변 때 소실되었습니다. 현존하는 『단기고사』는 구전되어온 자료를 토대로 복원된 것입니다. 『규원사화』는 그 서문에 의하면, 북애노인北崖老人이란 인물이 숙종 2년(1675년)에 지었습니다. 총 다섯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시대를 모두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환단고기』와 상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제왕연대력』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지은(890년경)대표적 저술 중의 하나로 신라 역대 왕력입니다. 원본은 일제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홍종국洪種國이 필사한(1929년) 필사본만 전합니다. 고조선의 1세, 2세 단군에 대한 서술이 나옵니다. 이들 고유 사서 가운데서도 삼성조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만 아니라 상고시대 동북아 문화권의 정치, 경제, 풍속, 언어, 음악, 국제 관계 등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전하는 『환단고기』야말로 한민족 고유사서의 최고봉이라 하겠습니다.”

환단고기가 나오기까지 과정 (조선시대 ~ )

조선왕조 ‘닉자처참 匿者處斬'이야기
<조선왕조실록> ‘예종1년’에는 ‘닉자처참 匿者處斬'이라는 말이 있었죠. 닉자 즉 은닉한자,숨기는 자는 목을 베었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숨겼기에 이를 이토록 엄하게 다스린 것일까요?


▶조선왕조의 사문란적
고려를 멸망시키고  명나라 사대주의의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가 명나라의 비위를 거스릴 수 있는 단군조선 이전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는 진시황처럼 무리수를 둬 가며 분서갱유을 하지 않았다. 사상 통제를 위해서 특정 고대 원전을 인용하지 못하게만 하면 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조선 왕조가 행한 “사문란적” 정책입니다. 주자가 주석을 달아 놓은 책 이외의 원문을 읽는 것만으로 큰 벌을 내리는 정책을 취한 것입니다.


▶세조의 사서 수거령과 예종의 닉자처참> 
세종때까지만 해도 "나랏말씀이 듕귁에 달아" 고유의 언어,고유의 음악 등을 취하고 또한 단군 제사도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후에는 달랐습니다.

“춘추”와 “자치통감 강목”만을 사필로 여기고 한민족의 고유 사서를 이단이라 하여 모조리 압수 소각 하였습니다. 조선 세조 3년 8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거두어 들이도록 한 고서만도 20권이 넘었다고 합니다. 예종 1년 때에는 닉자처참 匿者處斬 (고서를 숨기다 발각 된 사람은 목을 베라)는 명령까지 내렸습니다.


▶조선시대판 국정교과서 사건 ?

-명나라의 비위를 거스릴 수 있는 사서들을 수거하라
-유학,유교와는 다른 사서들을 수거하라

유학자들은 역사교육이 다양한 관점으로 시행될 경우에는 자신들이 사회 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내용만을 담은 획일적 역사교육이 시행되어야만 자신들이 사회를 통제하기 쉬울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 정부를 압박했고 유교주의 역사교육을 획일적으로 시행할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이 점은 세조 3년 5월 26일자(양력 1457년 6월 17일자) <세조실록>과 예종 1년 9월 18일자(1469년 10월 22일자) <예종실록> 등에서 확인됩니다.

이에 따르면, 조선 정부는 <고조선비사><삼성기><삼성밀기>를 포함한 다수의 서적을 금서로 지정하고 이 책들을 몰수했습니다. <예종실록>에 따르면, 금서를 숨긴 자는 참수형에까지 처했습니다. 금서를 불태우고 지식인들을 구덩이에 매장한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유사한 일이 조선에서도 있었던 것입니다.

금서가 된 책들은 거의 다 고조선과 고조선 이전의 역사를 바룬 사서들과 신선교(도교,선교,신교)에 관한 책들이었습니다. 

『신지비사神誌秘詞』,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고기古記』, 『밀기密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려팔관 잡기高麗八觀雜記』 등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유 사서의 이름이 나옵니다

☞세조 7권 3년 5월 26일 (무자)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諭八道觀察使曰 古朝鮮秘詞, 大辯說, 朝代記, 周南逸士記, 誌公記, 表訓三聖密記, 安含老元董仲三聖記, 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文泰山王居仁薛業等三人記錄 修撰企所 一百餘卷 動天錄, 磨蝨錄, 通天錄, 壺中錄, 地華錄, 道詵 漢都讖記 等文書 不宜藏於私處 如有藏者 許令進上 以自願書冊回賜 其廣諭公私及寺社 팔도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 비사,·대변설,·조대기,·주남일사기,·지공기,·표훈삼성밀기,·안함노.원동중 삼성기,·도증기, 지리성모, 하사량훈, 문태산.왕거인.설업 등 삼인 기록 수찬기소의 1백여권과 동천록,·마슬록,·통천록,·호중록,·지화록,·도선 한도참기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하는 서책을 가지고 회사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에 널리 효유하라.”하였다.



 
☞예종 7권 1년 9월 18일 (무술)
 예조에 명하여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수집하게 하다
 
○傳于禮曹曰 周南逸士記, 志公記, 表訓天詞, 三聖密記, 道證記, 智異聖母河沙良訓, 文泰玉居仁薛業三人記 一百餘卷, 壺中錄, 地華錄, 明鏡數, 及凡干天文地理陰陽諸書家藏者, 京中限十月晦日, 呈承政院, 外方近道十一月晦日, 遠道十二月晦日, 納所居邑. 納者超二階, 自願受賞者及公私賤口, 賞綿布五十匹, 隱匿不納者, 許人陳告, 告者依上項論賞, 匿者處斬. 其速諭中外 예조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지공기·표훈천사·삼성밀기·도증기·지이성모하사량훈, 문태·옥거인·설업 세 사람의 기록 1백여 권과 호중록·지화록·명경수 및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서울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에 바치고, 외방에서는 가까운 도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천구에게는 면포 50필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하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에 속히 유시하라.”하였다.



 
☞성종 1권 즉위년 12월 9일 (무오)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천문·음양·지리에 관한 책을 수납하는 것에 대한 글을 보내다
○下書諸道觀察使曰 前者, 周南逸士記, 志公記, 表訓天詞, 三聖密記, 道證記, 智異聖母, 河少良訓, 文泰王居仁薛業三人記一百餘卷, 壺中錄, 地華錄, 明鏡數 及凡干天文.地理.陰陽諸書 無遺搜覓上送事 曾已下諭. 上項 明鏡數 以上九冊, 太一金鏡式道詵讖記, 依前諭上送, 餘書勿更收納, 其已收者還給.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교서를 내리기를, “전일에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천사, 삼성밀기, 도증기, 지리성모, 하소량훈, 문태.왕거인.설업 삼인기 1백여 권과, 호중록, 지화록, 명경수와 무릇 천문·지리·음양 등 여러 서책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보낼 일을 이미 하유했으니, 상항 명경수 이상의 9책과 태일금경식, 도선참기는 전일의 하유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하였다.


▶역사의 아이러니 - 자료의 집대성


 숨기는 자는 참형에 처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들이 왕실 도서관에 모여있었겟지요. 그런데 이 책들이 모인 곳을 볼 수 있었던 위치에 있었던 분이 있습니다. 일십당 이맥이라는 분입니다. 이분이 이 책을 보고서 한권의 책으로 모으게  됩니다. 요즘 말로 데이타베이스화한 것입니다. 그책이 바로 태백일사라는 책이고 .. 이 태백일사는 1911년에 발간된 환단고기라는 책의 60퍼센트를 차지하게 됩니다.



▶태백일사는 고대원문 저장하기 백데이타(back data)였다
고조선 이전 우리의 뿌리 역사를 복원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대 역사의 원문”이 남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환국,신시배달부터 고려 까지의“역사서 원문을 데이타베이스화 하여서 일사 즉“숨겨뒀던 것”것입니다.
태백일사는 “태백에 대한 숨겨진 역사”이면서 “태백에 대한 숨겨서 후손들에게 반드시 전해주어야 하는 역사책” 이였던 것입니다.


▶이맥의 『태백일사』 발문跋文
그 이맥 선생의 책을 쓰게 된 계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갑자(연산군 10,1506)년에 내가 괴산으로 귀양을 갔는ㄴ데 마땅히 근신해야할 처지였기에 너무 무료하게 나날을 보냈다. 이에 집안에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상자를 열고 점고해보니 역사와 전기에 근거로 삼을 만한 것과 평소에 노인들에게 들은 것을 함께 채록한 것이 있는데 책으로 완성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후 16년이 지난 경진(중종 15,1520)년에 내가 찬수관 신분이라 내각의 비서를 많이 구해서 읽을 수 있었다. 이에 이전 원고를 순서대로 편집하여 [태백일사]라 이름 붙였다. 하지만  감히 세상에 묻지 못하고 비밀히 간직하여秘藏 문밖에 내놓지 않은 것이다. 일심당 주인이 쓰노라 "


▶이맥은 어떤 분인가?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자는 정부(井夫)이며, 호는 일십당(一十堂)이다.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原)의 손자입니다.. 1474년(성종 5)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나, 과거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힘쓰다가 1498년(연산군 4) 44세 때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습니다. 성균관전적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이르렀는데, 이때 장숙용(張淑容)이 연산군의 총애를 기화로 축재에 광분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자, 여러 차례 탄핵하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유배되었습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자 성균관사예에 제수되고, 이어서 사헌부장령을 겸하였으며, 뒤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습니다. 성품이 매우 강직하고 매사에 공정하였습니다. 저서에《태백일사(太白逸史)》가 있습니다.


▶이마니시류도 이 책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 책들에 관해서는 이마니시류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쓴 단군고라는  책에 보면 수서령을 내렸던 책들이 언급되어있습니다.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이 책들을 모두 어떻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본이 조선사편수회를 통해서 조선사를 만들어서 조선을 영원히 통치하려 했는데 일본보다 오래된 한민족의 뿌리역사를 드러내는 사서들을 가만둘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위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역사책을 불태우거나  일본으로 가지고 갑니다. 이때 살아남은 책이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그 이맥 선생의 책을 쓰게 된 계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갑자(연산군 10,1506)년에 내가 괴산으로 귀양을 갔는ㄴ데 마땅히 근신해야할 처지였기에 너무 무료하게 나날을 보냈다. 이에 집안에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상자를 열고 점고해보니 역사와 전기에 근거로 삼을 만한 것과 평소에 노인들에게 들은 것을 함께 채록한 것이 있는데 책으로 완성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후 16년이 지난 경진(중종 15,1520)년에 내가 찬수관 신분이라 내각의 비서를 많이 구해서 읽을 수 있었다. 이에 이전 원고를 순서대로 편집하여 [태백일사]라 이름 붙였다. 하지만  감히 세상에 묻지 못하고 비밀히 간직하여秘藏 문밖에 내놓지 않은 것이다. 일심당 주인이 쓰노라 "


사서들과 비교해 『환단고기』가 갖는독보적인 특징
 
“『환단고기』의 독보적 가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지요.첫째, 『환단고기』는 동방 한민족 뿌리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한민족사의 유일한 사서입니다. 『삼성기 상』의 첫 문장은 ‘吾桓建國이 最高라(우리 환족의 나라세움이 가장 오래되었다)’하여, 한민족이 환국을 세웠으며 그 환국이 인류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는 한민족의 뿌리역사를 삼성조三聖祖 시대로 묶어 전합니다. 이 7천년 삼성조 동안 역대 임금의 이름, 재위연수, 치적 등을 기록하여 한민족 시원역사의 진실을 밝혀주는 책이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둘째, 『환단고기』는 한민족사의 국통國統 맥을 명확하게 잡아줍니다. 『환단고기』의 5대 사서 가운데 『북부여기』는 특히 삼성조로부터 고려·조선에 이르는 우리 국통 맥을 바로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역사서입니다. 국통 맥의 잃어버린 고리인 부여사(북부여, 동부여를 비롯한 여러 부여의 역사)의 전모를 밝혀, 고조선 이후의 단절된 역사를 이어주기 때문입니다.

셋째, 『환단고기』는 한민족의 고대 종교와 사상인 신교 삼신문화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혔습니다. 배달과 고조선 시대에 신교의 삼신 원리에 따라 전도佺道, 선도仙道, 종도倧道라는 유불선 삼교의 모태가 되는 원형 삼도가 출현하였습니다. 유불선과 신교문화를 회통한 안함로安含老를 위시한 『환단고기』 집필자들에 의해 동북아의 원형 문화이자 인류의 시원 문화인 신교문화는 세상에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신교는 삼신상제님을 모시는 신앙입니다. 환국, 배달, 고조선 시대 이래로 우리 조상들은 삼신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올려 그 은혜와 덕을 칭송하고 상제님의 가르침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넷째, 『환단고기』는 하늘, 땅, 인간 즉 천지인 삼재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 사람이 이 우주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밝혀 줍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사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을 『환단고기』는 신교의 신관, 인간관, 우주관, 역사관에 바탕하여 종합적으로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신과 기, 신과 천지인, 천지와 인간 사이의 관계, 인간의 탄생 원리 등의 심오한 진리 주제를 총망라하여 싣고 있는 철학 경전이요 문화 경전이라 하겠습니다.
 
다섯째, 『환단고기』는 천지와 인간의 광명정신인 환桓, 단檀, 한韓의 원뜻을 밝혀줍니다. ‘환’은 ‘하늘의 광명’이요, ‘단’은 ‘땅의 광명’이므로, ‘환단’은 ‘천지의 광명’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천지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기 안에 천지 부모의 광명을 그대로 다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광명人光明인 ‘한’입니다. 이 ‘한’ 속에는 ‘환단’, 즉 ‘천지의 광명’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요컨대 ‘환단’은 천지 광명의 역사를 드러냈던 시원역사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환단고기』는 삼성조 시대의 국가 경영 제도를 전하는 사서로서 만고불변의 나라 다스림의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신교의 삼신문화가 국가 경영 원리로 정착된 가장 결정적인 제도는 다름 아닌 고조선의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입니다. 대단군이 중앙의 진한을 다스리면서 두 명의 부단군을 두어 번한과 마한을 다스리게 한 이 제도는 고조선 국정 운영의 핵심 제도였습니다. 고조선은 삼한관경제의 성쇠와 운명을 같이 하였습니다. 『환단고기』는 우리 상고시대의 정치를 드러내주는 정치학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일곱째, 『환단고기』는 배달과 고조선의 문자 창제를 기록하여 한국이 문자 문명의 발원처임을 밝혀줍니다.문자는 문명 발상의 필수 요소로서, 한민족은 배달시대부터 이미 문자생활을 영위하였습니다. 초대 환웅천황(BCE 3897~3784)이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을 창제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오래된 문자로 평가받는 BCE 3,000년경의 쐐기문자(수메르)와 상형문자(이집트)보다 더 오래된, 세계 최초의 문자입니다. 고조선 3세 가륵단군은 이 문자를 수정 보완하여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가림토의 모습은 조선 세종 때 창제된 한글과 매우 흡사합니다. 여덟째, 『환단고기』에는 상고시대 한민족의 대외 교섭사와 함께 중국과 일본의 왕조 개척사가 밝혀져 있습니다. 『단군세기』에는 고조선과 중국의 관계에 대한 적지 않은 기록들이 나옵니다. 중국의 고대 왕조 요·순 시대뿐 아니라 하·상(은)·주 3대 왕조와의 대외교섭사가 나옵니다. 고조선은 하·상(은)·주 왕조들의 개국 과정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데, 그 대표적 예가 단군왕검이 치수治水법을 우禹에게 가르쳐주어 당시 중국을 괴롭히던 9년 홍수를 성공적으로 다스리게 하여 그 공으로 하나라를 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태백일사』에는 아직도 미스터리에 싸여 있는, 일본의 개국 과정을 밝힐 수 있는 단서들이 실려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환단고기』는 왜곡된 한·중·일의 고대사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나침반입니다.”

왜  우리 역사 교과서에 언급조차 없나.

“그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서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있습니다. 이 두 사서가 중요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편 사서 집필에 있어 사대주의적 관점이나 신라중심의 서술 등의 문제점이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환단고기』는 기존의 사서와는 다른 파격적인 내용과 상세한 기술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기존에 알려진 역사적 내용들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고조선의 성립 기원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라든가 47대에 이른 단군의 명칭과 재위년도 등은 고조선을 지금으로부터 겨우 2,700년 전에 건국된 청동기 시대 부족국가로 보는 식민사학의 논리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역사학계에서 볼 때 『환단고기』는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박병섭 박사가 지적하듯이 그들은 이 책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축소 지향적으로 접근하여 그 가치를 폄하하고, 『환단고기』의 허점을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하고 침소봉대하여 『환단고기』 전체를 근세에 지어낸 책이거나 조작된 책으로 낙인찍으려 했습니다.

환단고기 위서론의 주장들
강단사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을 ‘『환단고기』 위서론’이라고 부릅니다. 위서론이라고 하면 무언가 학술적인 이론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논리적 관점이나 학술적 논증이 담겨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해 온 『환단고기』 역주본 작업을 마무리 지으면서 지금까지 학계에서 발표한『환단고기』 진위 논쟁에 대한 세미나 자료와 논문, 서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체계적으로 점검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위서라는 주장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환단고기』의 소중한 가치가 정말 부당하게 흠집이 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입니다. 주류 강단사학계가 『환단고기』의 독보적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위서론자들은 책 제목인 『환단고기』의 뜻조차 모르고 있으며, 『환단고기』를 단 한 번도 깊이 있게 제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불선 경전을 비롯한 동북아의 고전과 인류의 시원 종교인 신교의 우주론에 대한 이해가 천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위서론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환단고기』는 조작된 책이라는 주장입니다. 위서론자들은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의 원본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조작한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환단고기』 범례에서도 나오듯이 이 책은 운초 계연수가 1911년에 만주 관전현에서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 오동진 두 사람의 자금 지원을 받아, 스승 해학 이기의 문중에서 전해 오던 『태백일사』(8권으로 구성)와 다른 4권의 정통 사서를 한 권으로 묶어 간행한 책입니다. 『환단고기』를 이유립이 조작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오형기가 필사한 『환단고기』 발문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유립의 제자 양종현은 원본 책을 직접 본 사람인데, 책의 제목이 ‘『환단고기』’라고 분명히 증언하였습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그 방대한 역사적 내용들을 시기적으로 정합할 수 있도록 창작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둘째, 『환단고기』에 나오는 지명과 인명의 실제 사용연대가 저술 연대보다 훨씬 후대이므로 그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고탑이라는 지명과 잠청배라는 용어를 들어 단군세기나 북부여기가 청나라 이후에나 저술될 수밖에 없는 책이므로 고려시대에 저술된 책이 아니라 청나라 이후에 조작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무지하고 억지스러운지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고탑은 그들의 주장처럼 청나라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명대明代의 기록에 영고탑이라는 명칭이 나오고 있으므로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환단고기』에 근대 술어가 사용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위서론자들은 국가·문화·평등·자유·헌법·인류·세계만방·산업 같은 근대용어가 쓰였다는 이유로 『환단고기』는 최근세에 쓰인 책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고서에 현대에서만 사용하는 용어가 있다면 당연히 그 저술 연대를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근대술어라는 것이 고대에도 사용된 전거들이 무수히 발견됩니다. ‘문화’나 ‘인류’는 최소한 1,600년 전부터 고전에서 사용되었으며, 구마라습鳩摩羅什의『금강경』에는 ‘평등’이란 용어가 사용되었고, 『주역』에서는 ‘국가’, 전국시대 역사서인 『국어』에서는 ‘헌법’이란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정말 근대어가 가필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환단고기』 자체가 완전 조작된 위서임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인류사의 여러 경전을 돌이켜보면 수백,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가필과 재편집을 통한 보정 작업 끝에 오늘날의 경전이 되었습니다. 백번 양보하여 『환단고기』의 일부 술어와 연대 표시가 사실과 다르거나 다른 사서와 다소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시원 역사, 한민족의 국통 맥, 태곳적 한韓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밝혀 주는 『환단고기』의 독보적인 가치를 결코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계연수가 처음 펴낸 후 70년이 지나 이유립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환단고기』를 다시 펴낼 때 가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도적인 조작과 첨삭이 아니라 누구의 손에 의해서든 꼭 이뤄져야 할 보정 작업이라 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 보정도 원전을 훼손하지 않는 아주 미미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넷째, 후대의 다른 사서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 사서들을 표절했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환단고기』에 나오는 ‘삼조선’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환단고기』는 『조선상고사』를 베낀 책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는 『조선상고사』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삼조선의 배경이 되는 삼한과 삼신관이 동방의 원형 문화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독창적인 우리 한민족의 역사관이 밝혀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먼저 존재했는지는 자명한 것입니다.

또한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나오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환지還至 17세손世孫’에 대한 해석만 보아도 『환단고기』와 『조선상고사』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조선상고사』의 영향을 받아서 조작되었다는 위서론은 터무니없는 낭설일 뿐이다. 특히 각종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고구려 900년 설’의 진실은 오직 『환단고기』와 대조, 분석해 봄으로써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다섯째,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각 역사서의 저자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그들은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라는 『세조실록』의 기록은 보지 않고 그보다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함安咸·원로元老·동중董仲’ 세 사람이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삼성기』의 저자를 안함로, 원동중 두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주장합니다. 얼핏 일리 있는 말로 들리지만 이 주장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책을 인용할 때 앞서 나온 책을 인용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 경우는 『세조실록』을 기록하는 사람이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였다는 상식 밖의 주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몇 가지만 지적하더라도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비양심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환단고기』에 대한 태도부터가 잘못되었습니다. 일단 부정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꼬투리를 잡다보니 ‘잠청배’를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 땅에서 청나라를 몰아낸 일본이 ‘청과 몰래 내통한 무리’를 가리켜 한 말”이라고 잘못 해석하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잠청배는 원래 이암이 『단군세기』 서문에서 처음으로 쓴 말인데 원나라 간섭기 때 고려 인물로 정치적 문제를 일으켰던 오잠과 류청신의 이름을 빗대어 ‘오잠과 류청신 같은 무리’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위서론자들은 이렇게 잠청배를 잘못 해석하여 『단군세기』 서문은 이암이 아닌 구한말 이후의 사람이 쓴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학자가 역사 지식의 부족을 스스로 드러낸 주장입니다. 정말 통탄할 노릇입니다.”

환단고기 진서론
진서론이란 말이 어폐가 있는데 왜냐하면 『환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정통 역사서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 전체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일 뿐입니다.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굳이 증명하라고 한다면 중국, 일본, 중동 등지의 고대사 역사 현장을 가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곳을 답사해 보면 『환단고기』는 진실이 가득 찬 역사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환단고기』야말로 한민족과 인류의 잃어버린 태고 역사를 되찾아 줄 유일한 역사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최근 중국 정부에서도 인정한, 인류 역사상 최고最古의 문명이자 동북아 창세시대의 문명인 홍산문화(일명 ‘발해연안문명’) 유적지에 가본다면 『환단고기』의 내용이 유물과 유적으로 증명됨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위서론자들이 그곳에 가봤는지 물어보고 싶네요.

물론 위서론이 하도 판을 치니까 여러 학자들이 그에 맞서 『환단고기』의 내용을 검토하여 진서임을 입증하기도 했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이를 진서론으로 부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몇 가지 주장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먼저 『환단고기』에 기록된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을 지금의 과학을 통해 증명한 것입니다. 천문학자인 박창범, 나대일 두 교수는 천문현상기록을 근거로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입증했습니다.

『환단고기』에는 단군시대에 일어난 천문현상에 관련된 기록만도 12회나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 기록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BCE 2333년까지 역추적하여 실제 일어난 자연현상과 사서에 나타난 기록을 과학적으로 비교해 본 결과 사서의 기록이 진실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 한 예가 BCE 1733년 흘달屹達단제 50년 “오성취루五星聚婁”라는 기록입니다. 오성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육안으로 관측 가능한 5개 행성들이고, 루는 24수 중의 하나로 그 주성主星은 양자리의 베타별(β Aries)입니다. 그 두 과학자들이 검증한 결과 BCE 1734년 7월 13일 초저녁에 태양으로부터 금성, 목성, 토성, 수성, 화성 그리고 추가로 초승달 등이 일렬지어 하늘에 나타나 장관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었고, 또 한 번은 1953년 2월 25일 새벽에 한 번 있었다고 합니다. 행성결집현상은 천문학적으로 매우 드문 현상인데 이를 감안해 볼 때 단군조선 때의 기록은 1년 차이지만 주목할 만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 29세 단군 마휴 9년(BCE 935)에 “남해의 조수가 석자나 물러났다[南海潮水退三尺].”이라는 기록이나 일식기록에 대한 기록도 과학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러한 과학적 검토는 『환단고기』가 최근에 저술된 위서라는 주장에 대한 명백한 반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환단고기』의 기록을 검토해 볼 때 그 내용이 유물로 입증된 사례도 있습니다.
 
『환단고기』에는 장수왕의 연호와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 내용이 1915년에 발견된 불상에 새겨진 기록에 의해서 입증된 것입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있는데 건흥 연호가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역사기록의 진실여부는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입증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사례를 과학적 용어로 검증이라고 합니다. 시기적으로 볼 때 기록이 먼저 있고 그 기록의 사실여부를 밝혀주는 유물이 발견되면 그 기록의 진실성이 검증됩니다.

천남생묘지 비문도 그러한 예가 될 것입니다. 천남생은 고구려의 재상이자 영웅인 연개소문의 큰 아들입니다. 그의 묘비명이 1923년에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남생의 아버지 개금, 할아버지 태조, 증조부 자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태백일사』가 『조대기』를 인용하여 밝힌 기록과 일치합니다. 이 책은 여기에 남생의 고조부, 즉 연개소문의 증조부 이름을 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또 광개토태왕 비문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환지 17세손’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는 ‘광개토태왕은 추모鄒牟왕의 13세손’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다릅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환단고기』를 보면 그 이유가 밝혀지게 됩니다. 『환단고기』에는 고구려 제왕의 계보가 제1세 해모수(BCE 194년에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북부여 건국)로부터 →제2세 고리국의 제후 고진(해모수의 둘째 아들)→제3세 고진의 아들→제4세 옥저후 불리지(고진의 손자)→제5세 고추모(고주몽, 고진의 증손자) … 제17세 광개토태왕(주몽의 13세손)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주몽의 선조는 해모수이며 그로부터 치면 광개토대왕은 17세가 되는 것입니다. 『삼국사기』도 광개토대왕비도 모두 정확한 사실을 담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환단고기』가 해명해준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환단고기』가 후대의 창작이 아닌 진서임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알려주는 여러 증거들이 『환단고기』 자체 내에 많이 들어있습니다. 문제는 그 증거들을 일일이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환단고기』를 대하는 자세입니다. 왜 자세히 연구하고 검토하지 않고 굳이 위서라고 낙인찍는가 하는 것입니다. 『환단고기』 연구는 완전히 새로 출발해야 합니다. 민족사학자이건, 역사학계의 주류 사학자이건 누구라도 『환단고기』를 연구하는 사람은 우선 『환단고기』에 담긴 한민족과 인류의 시원 문화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열린 태도와 긍정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2016.05.23.

  • 채택

    질문자⋅지식인이 채택한 답변입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