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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책을 읽어보고 싶은데요 어디서 빌려야할지
비공개 조회수 327 작성일2019.06.21
사는것보다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다면 더 좋겠어요

기독교에 파가 많고 각자의 방식대로 해석하고 주장하는게 다른데

성경 속 구약,신약 전체적인 내용을 알기 쉽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적힌 책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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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신
메세지성경 추천드립니다.
현대어로 쉽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2019.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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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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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논리로 만들어진 책이므로 그 논리적 순서에 입각해서 읽어야 보다 쉽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얻으시기 위하여 창조된 곳이고, 그 위에서 살아가는 인생에게 하나님은 상대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조건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상대적 사고를 하는 인생에게 피조물의 상태에서 벗어나 아들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셨는데, 그것이 곧 성경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법으로서의 한 주제를 바탕으로, 한 논리로 구성된 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는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에 따라, 어떤 마음의 상태냐에 따라 다른 순서로 읽어야합니다.

일반적인 방법과 순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맨처음 읽으셔야하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책이고, 그 책은 복음서가 아니라 서신서입니다.

1, 서신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마음의 할례를 받을 수 있게하는 마음의 법인 성령의 법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설명도 하고 또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수 있게 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이 누구이든지 관계없이 서신이 정말 이런 내용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서신의 내용이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과는 , 즉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하는 여러분이 조각조각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기저기에 있는 내용을 조금씩 , 그것도 대부분 잘못알고 있는 것은 문장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편지를 읽는 시각, 즉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와 읽는 여러분의 의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체를 하나의 논리로 구성하셔서 편지를 보내셨는데 인생들은 그것을 이리저리 조각내서 각각 자기들이 주창하는 교리에 맞추어 다르게 해석을 해 놓고 "이것은 이런 뜻이다" 한 것을 여러분이 배웠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문장이 어려워서 그렇지, 차라리 쉽게 풀어쓴 것을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읽는다면 성경은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까페에는 풀어쓴서신과 해제로서의 서신 , 이렇게 두가지가 게재되어 있는데 먼저 해제로서의 서신을 읽으시는 것이 순서입니다. 이전에 어떻게 잘못알고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서신의 서두부분, 즉 로마서 8장에 언급된 생명의 성령의 법 에 대한 고찰이라는 글을 까페 화면 처음에 올려놓았으니 그것을 먼저 읽어 "과연 그러한가"를 먼저 성경의 내용으로 확인을 하신 후에 다른 내용으로 진도를 나가시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습니다.

중략....​​

​님께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어려운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되어 있는 네이버 카페명 "마음의 율법" 을 소개해 드립니다. ^^

2019.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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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jm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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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전체 구조>

성경은 총 66권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인생들은 그 성경을 모세의 율법인 행위의 율법과 관련된 부분을 구약이라고 분류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완성하신 성령의 법과 관련된 부분을 신약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분류 방법은 성경의 실제 내용과는 관계없는 인생들의 생각의 범위 안에서의 이해일 뿐이며 아울러 비진리적(非眞理的)인 이해인 것입니다.

인생이 성경을 들여다보는 이유는 인생의 삶, 그리고 그 인생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유한’ 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살다 간 무수한 인생들이 혹은 이미 오랜 시간을 살아보고는 말하기를 “인생은 쏜살과 같이 빠르다.” 혹은 “인생의 날은 문틈으로 달리는 말의 갈퀴를 언뜻 본 듯하게 지나가는 것이다.” 하는 말들을 듣고, 헤아려보고 과연 그렇다고 동의를 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미 오늘도 무수한 사람들이 나고 또 흙으로 돌아가는 모양은 계속되고 있고,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 것이 분명합니다.

‘유한’ 한 것은 지금은 ‘실상’ 이며 ‘현실’ 로 인식이 되지만 그것의 ‘본질’ 은 ‘헛된 것’ 혹은 ‘허상’ 입니다. 비눗방울이 잠깐 모양을 갖추고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나 인생이 잠깐 육신을 입고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나 시간적 차이만 있을 뿐 공간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있다’ 가 내일 사라지는 것은 원래 없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나무나 풀은 오늘 있다가 사라져도 내일은 땅으로 인해 다시 솟아나므로, 내일 다시 나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으므로 오늘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을 보고 허무하다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인생, 즉 ‘자기’ 가 느끼는 ‘자기의 존재’ 는 한번 사라지면 끝입니다.

그래서 한번 사라지면 끝나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만든 궁색한 이론이 ‘윤회’ 입니다. 물론 이것은 가설에서 출발하여 가설로 남아 있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이 윤회설은 논증할 수도 없고 논증될 수도 없는 무논리적(無論理的) 이론에 불과합니다.

이런 이론에 대하여 인생들은 ‘무지’ 를 동원하고는 그것을 ‘신앙’ 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나름 가치 있는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죽어서 가는 천국이나 지옥을 말하는 것과 불교인들이 윤회나 극락을 주장하는 것이 모두 이런 것들입니다.

인생이 ‘자기’ 를 인지하는 것조차도 세상에 낳아져서 ‘세상이 불러 주는’ 자기를 인식한 후에 자기를 자기로 인지할 수밖에 없는 마당에 오늘의 자기가 전생의 자기를 인지한다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이렇듯 인생들이 억지를 써가면서까지 종교를 찾고 신앙을 갖는 것은 자기 존재가 허무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교 안에는 ‘영원한’, 즉 사라지지 않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반드시 허무로 끝나는 인생이 아닌 초월적 존재를 찾아 자기의 존재를 그 초월적 존재와 연결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곧 ‘신앙’ 의 시작인 것입니다.

인생이 종교를 선택하고, 그 안에서 경전에 대한 신앙을 품고, 그 안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은 ‘영원’ 입니다. 그 영원을 가르치는 이치를 일컬어 ‘진리(眞理)’ 라고 합니다. 그래서 진리라는 말의 뜻은 ‘시공을 초월하여 항상 옳은 것’ 입니다.

사람이 ‘사실’ 로 인지하고 있는 시간이나, 시간으로 인해서 규정되는 연도 따위는 임의의 인간적 약속일 뿐 임시적인 것입니다. 숫자라는 개념도 그렇게 하기로 사람끼리 약속을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물질로 구성되어 인간의 눈으로 인식 가능한 것들도 본래 그 나온 곳인 흙으로 돌아가기 이전에 잠시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 뿐이므로 진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오백 년이 지나서 사라지는 것이나, 5초 후에 사라지는 것이나 ‘비진리(非眞理)’ 이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므로 ‘진리’ 안에 계신 분입니다. 그리고 인생과 세상은 ‘유한’ 하므로 비진리이며, 진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사라질, ‘이미 없는’ 허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죽음을 보지 않는 진리적 존재, 즉 영원을 향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진리적 존재가 되기 위함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불완전한 언약인 구약이 있고, 완전한 언약인 신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의 구원의 언약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은 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 한권의 책입니다.

성경의 핵심은 성경책의 중앙쯤에 배치되어 있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에 들어 있고, 그 중에서도 솔로몬이 쓴 잠언과 전도서가 성경의 중심입니다.

구약, 신약이라는 말에서 하나님의 약속이란 구원에 대한 약속을 말하며, 그 구원의 약속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법’ 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의 언약’ 이라는 말에서 ‘구원’ 이란 진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죽음’ 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순차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구원의 법, 즉 아벨이 드린 제사법, 모세의 율법은 완전한 구원의 법인 성령의 법의 완성을 위하여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단계적 과정이지 구약과 신약을 나누는 경계로 작용될 수 없습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신약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신 법이라는 이해는 ‘오해’ 인 것입니다.

법의 변환 단계는 인생의 학문적 이론상으로 보자면 인간의 지적 발달의 상태에 따른 격에 맞는 수준의 변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에게는 어린 아이에게 맞는 수준의 법이 옳은 것이고, 어른에게는 어른에게 맞는 수준의 법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자동차가 없는 때에 자동차에 대한 법이 있을 수 없듯이 지적 발달이 안 된 상태의 사람에게는 아벨이 드렸던 제사법만 있으면 되었고, 또 모세가 살던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모세 율법이 필요했던 것이며, 지적 능력의 발달에 따라 더 이상 행위의 율법으로는 마음을 속이는 인생의 머리를 제어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인생이 제어 불가능한 마음의 법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그저 인간적 사고 범위에 국한된 논리에 불과합니다.

성경 말씀 전체 안에서 아벨의 제사법 사건으로 교훈하시는 것은 처음 말씀을 대했을 때 ‘인생의 생각을 배제한 순종’ 입니다.

먼저, 구원의 방법으로써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이성적 사고를 통하여 말씀을 보고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의 필요와 방법이 있음에 대하여 그 시발점을 보여 주시고, 길을 가겠느냐는 선택을 하게 하십니다.

그 다음에 나가야 하는 진도는 ‘말씀을 따름’ 인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람은 이미 배워 익숙해진 인간적인 방법이 있고,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법은 인간의 생각과는 반대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은 하나님과 세상의 방향이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나면서부터 높음과 채움을 향해 살고, 하나님은 “그것이 너희에게 좋더냐? 아니지 않느냐?” 하시고 그 반대인 낮아짐과 비움의 길을 제시하신 것이 성경의 구원의 길입니다.

그렇다 보니 그 다음의 길을 감에 있어서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서로 방향을 달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의 방향에 대하여 가인의 생각, 인간적인 생각을 주장하려 하지 말고, 인간이 모르지만 일단 시발점이 맞으므로 그 다음의 과정에 대하여 무조건 따라 가라는 가르침이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 가르치는 교훈인 것입니다.

그렇게 첫 번째 율법을 따르는 과정에서 일단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지는 ‘에끌레시아’ 에 속해지는 일이 발생하며 ‘첫 번째 유월 곧 구원’ 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단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이전 단계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 이 되어 그 나라의 법을 따르게 되는데, 이것이 행위의 율법인 모세의 율법이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모세 율법을 액면 그대로 보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용처럼 보이지만 방언, 즉 ‘발음은 같으나 뜻이 다른, 성경 전체에 공통으로 사용되는 의미의 용어’ 로 해석을 하여 읽으면 그것이 당대의 사람들을 가르치는 율법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율법임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레위기 해제를 읽어 보시면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해석은 시공을 초월하여 이 땅에 인생이 살아 있는 한은 언제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적 내용입니다.

그렇게 두 번째 율법을 배우고 깨달아 실천을 하는 과정에서 훈련되며, 하나님이 도구로 쓰실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훈련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분뇨로 여겨 만지기도 싫어하는 상태가 되면 그것이 곧 ‘두 번째 구원’ 을 받은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적용을 받게 되는 것이 마음의 율법인 성령의 법입니다.

이때부터는 ‘자기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자기’ 에 대한 씻음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인생이 인지하는 자기는 사실 사단이 점령한 세상이 만든 것입니다. 그 자기 안에 어떤 선하지 못한 것이 있는지 스스로는 알 수 없습니다. 자기 눈의 들보, 자기는 결코 빼낼 수 없는 흠을 끄집어내 지우게 하시는 과정이 성령의 법으로 치리를 받는 과정입니다.

성령의 법인 잠언의 ‘잠’ 자는 바늘 잠(箴)입니다. 바늘로 찔러 상세하고 정확하게 교훈을 하시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바늘에 찔리므로 가르침마다 아픈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행위의 율법의 훈련을 지난 사람은 그 찔림에 대하여 흔들림 없이 혹은 설령 넘어진다 하여도 다시 일어나는 과정을 지나며 점진적으로 마음이 온전히 선을 향하고 악으로 향하지 않을 수 있는 상태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서 “하나님의 안식에 든 자는 자기 일을 쉰다.” 하신 것과 같이 온전히 자기의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만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시 나감이 없는 하나님의 안식’ 에 드는 ‘세 번째, 진정한 구원’ 을 맞이하게 되는 때인 것입니다.

이렇게 아벨의 제사법과 모세의 율법과 성령의 법은 구원을 위한 하나의 과정인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이 과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세대가 전혀 모르게 되었던 것은 본래 없었다가 이제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이후부터 있었으나 시대를 거듭하며 높아지고 채우려는 인간의 욕심에 무너진 자들이 성경의 말씀들을 2천년이라는 세월동안 가리고 덮으면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중략..

네이버 까페 "갈릴라이아"에 있는 글입니다. 누구나 읽고 이해하기 쉽게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해 놓은 성경 까페입니다. 성경을 읽으시는데 도움이 되실듯 합니다. ^^

2019.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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