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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남 21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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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남 교수

성균관대 문과대학 한문학과 졸업, 성균관대 교육대학원 한문교육전공 석사,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강사, 원광대학교 교양학부 초빙교수

  • 시조의 성은 박씨,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기원전 57) 4월 병진[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일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居西干)이다. 이때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으며 나라의 이름은 서라벌이었다.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개의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觜山)의 진지촌(珍支村)[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진한(辰韓) 6부가 되었다. 고허촌의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곧장 가서 보니 말은 보이지

  • 신 김부식(金富軾)이 아뢰옵니다. 옛 열국도 또한 각각 사관(史官)을 두어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맹자(孟子)는 “진(晉)나라의 『승(乘)』과 초(楚)나라의 『도올(檮杌)』과 노(魯)나라의 『춘추(春秋)』는 같은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들 해동(海東) 삼국도 역사가 오래되었으니, 사실이 역사책에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노신에게 그것을 편집하도록 명하신 것인데, 스스로 돌아보니 지식이 부족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엎드려 생각해보옵니다. 성상폐하(聖上陛下)께서는 요(堯)임금과 같은 문사(文思)를 타고나시고, 우(禹)임금과 같은 근검(勤儉)을 체득하시어, 정무에 골몰하던 여가에 전고(前古)를 두루 살펴보시고, “요즈음의 학사(學士)와 대부(大夫) 중에 『오경(五經)』, 『제자(諸子)』와 같은 책이나 진(秦)ㆍ한(漢) 역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두루 통달하고 상세히 설명하는 자가 간혹 있으나,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서는 도리어 아득하여 그 처음과 끝을 알지

  • 다루왕(多婁王)은 온조왕(溫祚王)의 맏아들이다. 도량이 넓고 후덕하여 위엄이 있었다. 온조왕 28년(서기 10)에 태자가 되었고, 46년에 왕이 돌아가셔서 왕위를 이었다. 多婁王 溫祚王之元子 器宇寬厚 有威望 溫祚王在位第二十八年 立爲太子 至四十六年 王薨 繼位 2년(서기 29) 봄 정월, 임금이 시조 동명왕(東明王)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2월, 임금이 남쪽 제단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 지냈다. 二年 春正月 謁始祖東明廟 二月 王祀天地於南壇 3년(서기 30) 겨울 10월, 동부의 흘우(屹于)가 마수산(馬首山) 서쪽에서 말갈과 싸움에 이겨서 적병을 많이 죽이고 사로잡았다. 임금이 기뻐하며 흘우에게 말 10필과 벼 5백 섬을 상으로 주었다. 三年 冬十月 東部屹于 與靺鞨戰於馬首山西 克之 殺獲甚衆 王喜 賞屹于馬十匹租五百石 4년(서기 31) 가을 8월, 고목성(高木城)의 곤우(昆優)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기고 2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9월, 임금이 횡악(橫岳) 아래서 사냥을 하였는데 두

  • [ 1. 김유신의 선조] 김유신(金庾信)은 경주 사람이다. 그의 12대 할아버지 수로(首露)는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그는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 임인(서기 42)에 구봉(龜峯)에 올라가 가락(駕洛)의 아홉 촌을 살펴보고, 드디어 그 땅에 가서 나라를 열고 국호를 가야(加耶)라 했다가 후에 금관국(金官國)으로 바꾸었다. 그 자손이 대대로 이어져 9대 자손인 구해(仇亥)[혹은 구차휴(仇次休)라 한다.]에 이르렀는데, 유신에게는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소호(少昊) 김천씨(金天氏)의 후예라고 여겼기 때문에 성을 김(金)이라 한다고 하였고, 유신의 비문에도 ‘헌원(軒轅)의 후예이며, 소호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남가야 시조 수로도 신라와 성이 같았던 것이다. 金庾信 王京人也 十二世祖首露 不知何許人也 以後漢建武十八年壬寅 登龜峯 望駕洛九村 遂至其地開國 號曰加耶 後改爲金官國 其子孫相承 至九世孫仇亥[或云仇次休] 於庾信爲曾祖 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이 왕위에 올랐다.[차차웅을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이 이르기를 ‘방언으로 무당을 이르는 말이다. 무당이 귀신을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까닭으로 사람들이 무당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다가, 마침내 존경받는 어르신을 자충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혁거세의 큰아들로서, 몸집이 장대하고 성품이 침착하였으며 지략이 많았다.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며, 왕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이다.[아루부인(阿婁夫人)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를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 해를 원년으로 하였다. 南解次次雄立[次次雄或云慈充 金大問云 方言謂巫也 世人以巫事鬼神尙祭祀 故畏敬之 遂稱尊長者 爲慈充] 赫居世嫡子也 身長大 性沈厚 多智略 母閼英夫人 妃雲帝夫人[一云阿婁夫人] 繼父卽位 稱元 사관이 논평한다. 임금이 왕위에 오르고 해를 넘겨 원년이라고 하는 법도는 『춘추(春秋)』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절대적인 선왕의 법도이다....

  • 내해 이사금(奈解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벌휴왕(伐休王)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내례부인(內禮夫人)이고 왕비 석씨는 조분왕(助賁王)의 누이 동생이다. 용모와 풍채가 웅장하고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전 임금의 태자 골정(骨正)과 둘째 아들 이매(伊買)는 먼저 죽었고 맏손자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이매의 아들을 왕위에 세웠으니, 이가 곧 내해 이사금이다. 이 해 정월부터 4월까지 비가 오지 않다가 임금이 즉위하는 날에 큰 비가 내렸으므로 백성들이 기뻐하며 경축하였다. 奈解尼師今立 伐休王之孫也 母 內禮夫人 妃昔氏 助賁王之妹 容儀雄偉 有俊才 前王太子骨正及第二子伊買 先死 大孫尙幼少 乃立伊買之子 是爲奈解尼師今 是年 自正月至四月不雨 及王卽位之日 大雨 百姓歡慶 2년(서기 197) 봄 정월,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二年 春正月 謁始祖廟 3년(서기 198) 여름 4월, 시조묘 앞에 쓰러져 있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났다. 5월, 나라 서쪽에 홍수가 났다. 수해를 당한 주와 현의 조세와...

  • 아달라 이사금(阿達羅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일성왕(逸聖王)의 맏아들이다, 키가 일곱 자이고 콧마루가 우뚝하여 기이한 모습이었다. 어머니인 박씨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내례부인(內禮夫人)으로 지마왕(祇摩王)의 딸이다. 阿達羅尼師今立 逸聖長子也 身長七尺 豊準有奇相 母朴氏 支所禮王之女 妃朴氏內禮夫人 祗摩王之女也 원년(서기 154) 3월, 계원(繼元)을 이찬으로 삼아 군무와 정사를 맡겼다. 元年三月 以繼元爲伊飡 委軍國政事 2년(서기 155) 봄 정월, 몸소 시조묘에 제사 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흥선(興宣)을 일길찬으로 삼았다. 二年 春正月 親始祖廟 大赦 以興宣爲一吉飡 3년(서기 156)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계립령(雞立嶺)의 길을 열었다. 三年 夏四月 隕霜 開雞立嶺路 4년(서기 157) 봄 2월, 처음으로 감물(甘勿)과 마산(馬山) 두 현을 설치하였다. 3월, 장령진(長嶺鎭)을 두루 살피어 지키는 병졸들을 위로하고 각각에게 군복을 주었다

  • 동천왕(東川王)[혹은 동양(東襄)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우위거(憂位居)이며, 어릴 때 이름은 교체(郊彘)이고, 산상왕(山上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주통촌(酒桶村) 사람으로서 산상왕의 소후(小后)가 되었으나, 역사에는 그의 가족과 성이 나타나 있지 않다. 임금은 전왕 17년에 태자로 세워졌고 이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임금은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였다. 왕후가 왕의 마음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왕이 유람하러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사람을 시켜 임금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자르게 했다. 임금이 돌아와서 말하였다. “말이 갈기가 없으니 가련하구나.” 왕후가 또 모시는 사람을 시켜 밥상을 올릴 때 일부러 임금의 옷에 국을 엎지르게 하였는데, 역시 화내지 않았다. 東川王[或云東襄] 諱憂位居 少名郊彘 山上王之子 母酒桶村人 入爲山上小后 史失其族姓 前王十七年 立爲太子 至是嗣位 王性寬仁 王后欲試王心 候王出遊 使人截王路馬鬣 王還曰 馬無鬣可憐 又令侍者進食時 陽覆羹於王衣...

  •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 사람이다. 용모는 구부정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빛이 났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발을 걸치고 시정(市井) 사이를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니 왕이 놀리며 말했다.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자라면 틀림없이 사대부의 아내가 못되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을 가야 되겠다.” 왕은 매번 이런 말을 하였다. 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鐘可笑 中心則睦然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平岡王少女兒好啼 王戱曰 汝常啼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딸의 나이 16세가 되어 왕이 딸을 상부(上部, 동부) 고씨에게 시집 보내고자 하니, 공주가 왕에게 말하였다. “대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되리라.’고 하셨는데, 이제...

  •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남해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이며, 왕비는 일지 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이다.[혹은 왕비의 성은 박씨이며, 허루왕(許婁王)의 딸이라고도 한다.] 애초에 남해(南解)가 돌아가셨을 때, 유리가 당연히 왕위에 올라야 하는데, 유리는 대보(大輔) 탈해(脫解)가 본래 덕망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에게 왕위를 사양하였다. 탈해가 말하였다. “임금이라는 자리는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나이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시험 삼아 떡을 깨물어 보시지요.” 그 결과 유리의 이 자국이 많았으므로 즉시 가까운 신하들과 함께 그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하고, 왕호를 이사금(尼師今)이라 하였다. 예부터 전해오는 말이 이와 같았다. 김대문(金大問)이 이르기를 “이사금은 방언이다. ‘이사금’은 곧 ‘이의 자국’이란 말이다. 이전에 남해가 죽음을 앞두고,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내가 죽은...

  • 지마 이사금(祗摩尼師今)[혹은 지미(祇味)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파사왕(婆娑王)의 큰아들이다. 어머니는 사성부인(史省夫人)이며, 왕비는 김씨 애례부인(愛禮夫人)으로 갈문왕 마제(摩帝)의 딸이다. 앞서 파사왕이 유찬(楡飡) 연못가에서 사냥할 때 태자가 따라갔었다. 사냥을 마치고 한기부(韓歧部)를 지날 때, 이찬 허루(許婁)가 음식을 차려 대접하였다. 술기운이 오르자 허루의 아내가 어린 딸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다. 그러자 이찬 마제(摩帝)의 아내도 또한 자기의 딸을 데리고 나왔다. 태자가 그녀를 보고 기뻐하였으나 허루는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임금이 허루에게 말하였다. “이곳 땅 이름이 대포(大庖, 큰 부엌)인데, 그대가 이곳에서 훌륭한 음식과 좋은 술로 잔치를 베풀어 즐겁게 해주었으니, 직위를 주다(酒多, 술이 많음)라고 하여 이찬 위에 두어야 마땅하겠다.” 마제의 딸을 태자의 배필로 삼았다. 주다는 뒤에 각간이라고 일컬어졌다. 祗摩尼師今立[或云祇味] 婆娑王嫡

  • 고국원왕(故國原王)[국강상왕(國罡上王)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사유(斯由)[혹은 쇠(釗)라고도 한다.]이다. 미천왕(美川王) 15년에 태자가 되었고, 32년 봄에 임금이 돌아가시자 왕위에 올랐다. 故國原王[一云國罡上王] 諱斯由[或云釗] 美川王十五年 立爲太子 三十二年 春 王薨 卽位 2년(서기 332) 봄 2월, 임금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나라 안을 두루 살피고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늙고 병든 자들을 구제하였다. 3월, 임금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二年 春二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巡問百姓 老病賑給 三月 至自卒本 4년(서기 334) 가을 8월, 평양성을 증축하였다. 겨울 12월, 눈이 내리지 않았다. 四年 秋八月 增築平壤城 冬十二月 無雪 5년(서기 335) 봄 정월, 북쪽에 신성(新城)을 쌓았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에 큰 해를 입혔다. 五年 春正月 築國北新城 秋七月 隕霜殺穀 6년(서기 336) 봄 3월, 큰 별이 서북방으로 날아갔다.

  • 일성 이사금(逸聖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유리왕(儒理王)의 맏아들이다.[혹은 일지(日知) 갈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왕비 박씨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이다. 逸聖尼師今立 儒理王之長子[或云日知葛文王之子] 妃 朴氏 支所禮王之女 원년(서기 134) 9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元年九月 大赦 2년(서기 135) 봄 정월, 임금이 몸소 시조묘에 제사 지냈다.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廟 3년(서기 136) 봄 정월, 웅선(雄宣)을 이찬으로 삼고, 겸하여 중앙과 지방의 병마의 일을 맡겼다. 근종(近宗)을 일길찬으로 삼았다. 三年 春正月 拜雄宣爲伊飡 兼知內外兵馬事 近宗爲一吉飡 4년(서기 137) 봄 2월, 말갈이 국경에 쳐들어와서, 장령(長嶺) 지방의 다섯 군데 목책을 불태웠다. 四年 春二月 靺鞨入塞 燒長嶺五柵 5년(서기 138) 봄 2월, 금성에 정사당(政事堂)을 설치하였다. 가을 7월, 알천(閼川)의 서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이 북쪽을 두루 살펴보

  •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토해(吐解)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나이가 62세였다. 성은 석(昔)이며, 왕비는 아효부인(阿孝夫人)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는데, 이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쪽 1천 리 밖에 있다. 앞서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의 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커다란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였다.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이는 상서로운 일이 아니다. 버리는 것이 마땅하리라.” 그 여인이 알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되는대로 흘러가도록 하였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 해변에 닿았으나, 금관 사람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다시 진한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닿았다. 이때가 곧 시조 혁거세(赫居世) 39년(기원전 19)이었다. 그때 해변에 있던 할머니가 상자를 줄로 끌어올려 해안에 매어놓고 열어보니, 한 어린 아이가 있었다. 할머니가 아이를 거두

  • [ 1. 문무왕 4년(서기 664년, 당 고종 인덕 원년)] 인덕(麟德) 원년(서기 664) 갑자 3월, 백제(百濟)의 남은 군사들이 다시 사비성(泗沘城)에 모여 반란을 일으켰다. 웅주(熊州) 도독이 자기 휘하의 병사들로 공격했으나, 여러 날 안개가 끼어서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었다. 이런 까닭으로 싸움을 할 수 없어 백산(伯山)을 시켜 사정을 알리니, 유신(庾信)이 계략을 알려 주어 그들을 이겼다. 麟德元甲子三月 百濟餘衆 又聚泗沘城反叛 熊州都督 發所管兵士攻之 累日霧塞 不辨人物 是故 不能戰 使伯山來告之 庾信授之陰謀 以克之 [ 2. 문무왕 5년(서기 665년, 당 고종 인덕 2년)] 인덕 2년(서기 665)에 당 고종(高宗)이 사신 양동벽(梁冬碧)과 임지고(任智高) 등을 보내 예방하고, 동시에 유신을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에 책봉하고 식읍 2천 호를 주었다. 麟德二年 高宗遣使梁冬碧任智高等來聘 兼冊庾信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 食邑二千戶 [ 3. 문무왕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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