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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부산항의 역사적인 발달과정에 대해 가르쳐주세요
fire**** 조회수 4,311 작성일2009.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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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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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의 역사적인 받달과정

부산항 과거
1) 부산항의 유래
“항거왜호가 있는데 북쪽현에서 거리가 21리이다.”라고 하여 산 모양이 가마골과 같아 부산이라고 하였다. 부산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부산(부산)이란 명칭이 기록에 처음 보인 것은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강구사 이하생을 대마도에 보낼 때 백미 천석(千石)을 부산포에서 반출하였다는 기록에서 보인다. 또『세종실록지리지』에는 "동래부산포"라 하였고 신숙주의『해동제국기』에도 "동래지부산포"라 하였으며 또 같은 책「삼포왜관도」에도 "동래현부산포"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때의 부산포는 '富'자를 사용하고 있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되고 그후 여러번 증보된『 1530년(중종 25) 중종의 명에 의해 이행·윤은보·신공제 등이 펴낸 관찬지리서
동국여지승람(1481)』산천조에 보면 "부산은 동평현(오늘날 당감동 근처)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이름하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이다. 항거왜호가 있는데 북쪽 현에서 거리가 21리이다."라고 하여 산 모양이 가마꼴과 같아 부산(釜山)이라고 하였다는 부산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그 후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부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2) 부산항이란?
북항 남항 다대포항 감천항을 통틀어 부산항이라 불린다. 하지만 최근 부산신항이 추진 됨에 따라서 미래에는 부산신항도 부산항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부산항은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컨테이너부두 일반부두 정박지로 나뉜다. 부산항의 정박지는 크게 다섯가지로 나뉜다. 북항 남외항 감천항 다대포항 수영만으로 나뉘며 대표 항구에는 여러 개의 정박지가 있어서 생략하도록 하겠다. 항구 전면에 영도와 조도가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어 항만으로서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항만법상 부산항의 지리적인 범위는 남서쪽 몰운말 남단을 기점으로 하여 서도 남단, 두도, 생도 남단, 오륙도 남단, 동백섬 산정을 이은 내해로서 북항·남항·감천항·다대포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남항은 1974년 12월에 부산항에서 분리되면서 현재 연안항으로 지정되어 있다. 항내총면적 81.7㎢, 해안선길이 97㎞이다. 

3) 시대별 부산항

* 조선시대 : 군사적으로는 고려말부터 계속되는 왜구의 창궐로 그 폐해가 심하였다. 이에 태종 7년(1407년) 부산포와 내이포 두 곳에 왜관을 두어 일본인의 내왕과 함께 교역을 허용하였으나, 왜구의 침탈이 계속되자 세종 원년(1419) 왜구의 소굴이었던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후 왜의 국교 재개의 간청에 따라 세종 5년(1423)에는 부산포와 내이포에 다시 왜관을 두고, 동왕 9년에는 울산 염포에도 왜관을 설치하였다. 세종 25년(1443)에「계해약조」를 맺어 무역선의 수와 세사미두의 수량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삼포의 왜관은 지역을 제한하고, 임진왜란 이후에도 동래부사가 일본사신을 접견하였으며, 왜관에서만 왜인들의 거주가 허락되었다. 왜관 주위에는 복병막소를 설치하여 왜인은 물론 조선인의 출입을 통제하였고, 허가를 받은 사람만 출입이 허용되었다. 부산포에 설치된 왜관의 변천을 보면, 태종대에서 중종 5년(1510)「경오왜변」이전까지는 부산포왜관(현 자성대 부근), 선조 36년(1603)에는 잠시 절영도왜관(현 대평동 부근 )에 있었고, 선조 40년(1607)에 두모포왜관(현 수정시장 일대), 숙종 4년(1678)부터 고종 13년(1876)까지 초량왜관(현 용두산과 복병산 일대)이 존속하다가 1876년「강화도조약」체결 이후에는 전관거류지로 바뀌었다.

 

개항기 - 1876년 부산포란 이름으로 개항

19세기 중기에서 이은 후기의 세계정세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산업혁명을 거친 구미 선진국들은 자유경쟁의 산업자본이 점차 독점화 되어갔고 그 자본독점은 과잉자본화되는데 따라 과잉자본을 해외 미개발 후진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갔다. 영국 프랑스들은 아프리카 대륙을 둘러싸고 심각한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독일과 미국도 가세하였다. 영국은 19세기 초부터 아시아에 진출하여 싱가포르·말레이지아·버마·인도를 차례로 식민지화 했다. 프랑스도 1850년대 이후 베트남·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화 하였다. 중국도 1840년의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한 결과 1842년 8월 <난징조약> 1842년 8월 아편전쟁(阿片戰爭)의 종결을 위하여 영국과 청(淸)나라가 체결한 강화조약<남경조약>이 체결되고 1843년 6월 추가조약을 맺음으로서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광주(廣州)·복주(福州)·상해(上海)·영파(寧波)·하문(廈門) 5개항을 개항했다. 그뿐만 아니라 영국을 무역상의 최혜국(最惠國)으로 대우할 것을 약속했다.

1876년(고종 13) 2월 부산포란 이름으로 개항되었으며, 1898년 매립공사로부터 1906년 부두 축조공사를 함으로써 항구의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
 

* 일제강점기 -

1910년 제1부두와 1945년 제2·3·4부두 및 중앙부두·물량장·방조제 등이 각각 축조되었다.

일제가 한국과 아세아 대륙을 침략한 그 침략은 부산항에서 시작하여 부산항에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일반적으로 1910년의 강점부터 1945년까지인 36년간을 말하지만 부산은 1876년의 개항부터 강점에의 의사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개항한 그로부터 부산의 요긴한 땅은 일본인손에 넘어가고 메워진 바다는 그들 소유가 되고 수산업과 제조업 운수업들이 그들의 손에 억눌리고 고래의 순풍미속마저 그들의 침략을 입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침략은 조약·조규·협약·협정같은 소리없는 문서침략이 행위침략으로 현실화되었다.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이 1910년 8월 29일에 체결되어 우리의 통치권을 잃게 되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 전인 1937년 7월부터 중일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영국과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갔다.  1940년 5월부터는 독일이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항복시키고 영국본토 상륙의 기미를 보이자 일본은 40년 9월 독일과 이탈리아 3국동맹을 체결하고 동남아 남침의 호기로 삼았다. 그리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은 영국과 결속하고 중일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국의 장정권을 원조 강화하였다.  1941년 6월에는 독일과 소련의 독소전이 시작되었다. 41년 7월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에 진주하자 미국은 미국에 있는 일본자본을 동결하고 일본에 대한 석유수출을 단절했다. 이 미국의 조치는 일본 군부를 자극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 진주만(펄하버)을 기습공격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 현대 - 남항은 1974년 12월에 부산항에서 분리되면서 현재 연안항으로 지정되어 있다. 항내총면적 81.7㎢, 해안선길이 97㎞이다. 그뒤 1960년대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항만 정비와 개발·확장 사업이 이루어졌고, 1970년 이후에는 부산항 제1·2·3단계개발사업을 통해 국제무역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제1단계개발사업은 1971년 착공하여 1978년 완공했다. 이때 제5부두·제7부두·국제여객부두·연안여객부두 및 기존의 제1·2부두를 대대적으로 개축·정비하여 선박 접안능력을 높이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제1단계개발계획 당시의 화물추세로 일반화물은 1986년까지, 컨테이너는 1981년까지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3차에 걸친 경제개발5개년계획사업이 성공하면서 경제성장과 함께 부산항의 물동량이 급격히 증가했다. 이에 따라 실시된 제2단계개발사업은 제1단계개발사업이 끝난 1978년에 착공되었다. 이 사업은 컨테이너 물동량을 원활히 처리하기 위한 제6부두 건설에 치중했으며, 기존의 제3부두·중앙부두·제4부두·제5물량장을 개축했다. 그러나 1983년에는 부산항의 컨테이너 화물이 한국 총화물의 반 이상과 수출화물의 대부분을 담당하게 되자, 부산항은 만성적인 적체항구로 기능이 마비될 정도가 되었다.
이런 문제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실시된 제3단계개발사업은 1985년 12월 북외항에 신선대부두건설을 시작으로 1991년 6월 준공되었다. 그결과 주요항만시설을 비롯한 모든 부대시설이 증축·정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두 내에 컨테이너 야적장(0.88㎢)과 진입도로(2.5㎞) 등을 함께 갖추게 되었다. 즉 5만t급 컨테이너선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으며, 연간 96만 개의 컨테이너 화물을 더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방파제 공사로 전에는 외항이었던 곳이 내항으로 변모되면서 내항의 면적도 기존의 2배가 넘는 17.3㎢로 크게 증가했다. 특히 2~4일 정도 걸리던 채선시간도 완전히 해소되었으며, 부산항에 집중되던 컨테이너 화물들이 부산 곳곳에 산재한 외곽 컨테이너 야적장으로 분산됨으로써 도심교통체증도 크게 완화되었다. 이 신선대부두에서 남구 용호동 동국제강 앞까지와 남구 수영 로터리에서 도시고속도로까지 약 3.7㎞는 8차선 배후 수송도로로 건설하여 컨테이너 차량 전용도로망을 갖춤으로써 도심을 통행하는 컨테이너 차량수를 1/3로 줄일 수 있게 되었다.

2009.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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