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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부산 지명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15,937 작성일2005.03.26

부산의 지명 변화를

 

고구려시대 고려시대 통일 신라시대 조선시대

 

이런 식으로 변해온 과정이 나타나게

 

지명 변화 내용을 너무 자세하겐 말구

 

써 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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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
우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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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의 유래 ]
우리 고장은 언제부터 '부산'으로 불리었을까요?
옛 기록에 의하면 처음에는 부산(富山)으로 썼다가 부산(釜山)으로 바뀌었다고 해요. 발음은 같지만, 한자말이 달라지면서 뜻이 약간 바뀐 셈입니다.

1454년(단종 2년)에 완성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우리 고장이 '동래부산포(東萊富山浦)로 기록되어
있어요. 그런데 1481년(성종 12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부산(釜山)'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산 모양이 가마꼴과 같아서 '가마 부(釜)'자를 써서 부산(釜山)'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부산(釜山)'으로 불리게 된 것은 15세기 후반부터라는 걸 짐작할 수 있겠지요?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가마 모양의 산은 동구 좌천동에 있는 증산(甑山)인 것으로 짐작되고 있답니다.


[ 부산의 연표]
선사시대
구석기시대
구석기시대
- 기원전 1만5천년 경 : 해운대 중동·좌동 유적지
* 원시적인 형태의 돌기구를 사용해 먹을 것을 구하였음.

신석기시대
- 기원전 6천년 경 : 동삼동 패총·범방존 패총
* 바닷가와 강가를 중심으로 수렵, 어로, 원시농경 생활. 빗살무늬토기 문화.

청동기시대
- 기원전 1천년 경 : 반여동 주거 유적
- 기원전 7백년 경 : 감천동 지석묘
- 기원전 3백년 경 : 두구동 주거 유적
* 내륙의 구릉지를 중심으로 농경생활. 주거지(집)와 지석묘, 석관묘 등의 무덤이 등장. 무늬 없는 토기 문화

삼한시대
철기 문화 중심의 역사 시대가 시작됨. 부산 지역은 변한 12국 중 독로국을 중심으로 발달(장산국, 거칠산국, 내산국 등)했으며, 철기 시대 유적은 수영강과 온천천 주변을 중심으로 발달함. 많은 철기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고분 유적도 발견됨
* 복천동 내성 유적, 노포동 고분, 동래 패총.

가야·삼국시대
가야·삼국시대
- 기원후 42년 : 김해를 중심으로 금관가야(가락국)가 건국됨.
- 522년 : 신라가 금관가야를 병합함
* 복천동 고분군(토기, 철기, 장신구, 뼈, 연장 등 9천 점이 넘는 유물이 나왔는데 특히 철기 유물이 많음)

통일신라시대
- 676년 : 신라가 삼국을 통일함
- 757년 : 거칠산군을 동래현으로 고침

고려시대
918년 : 고려 건국
1151년 : 동래로 유배된 정서가 유배지에서 정과정곡 지음

조선시대
- 1407년 : 부산포 개항
- 1407~1592년 : 부산포왜관 설치 (현재 동구 범일동 부산진시장 인근 지역)
- 1547년 : 동래현을 동래도호부로 승격
- 1607~1678년 : 두모포왜관 설치 (현재 동구 수정동 수정시장 인근 지역)
- 1652년 :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 남촌면(현재 수영구 수영동)으로 다시 옮김
- 1678~1876년 : 초량왜관 설치 (현재 중구 용두산에서 복병산 인근 지역)

개항기
- 1876년 : 부산항 근대 개항
- 1900년 : 부산에 처음으로 전등 가설


일제강점기
- 1910년 : 일제의 한반도 강제 점령. 동래 온천장부터 부산우체국까지 전차 개통 (약 30㎞)
- 1914년 : 백산상회 개점 (현재 중구 백산기념관)
- 1919년 : 3.1 독립만세운동
- 1920년 : 박재혁 의사 부산경찰서 폭파 시도
- 1921년 : 부산 부두 노동자 총파업
- 1936년 : 부산 부청사 개청 (현재 중구 중앙돈의 구 부산시청사)
- 1940년 : 부산항일학생의거 일어남

현 대
- 1945년 : 광복
- 1948년 : 대한민국 정부 수립
- 1949년 8월 : 부산부를 부산시로 고침
- 1950년 6월 : 한국전쟁 일어남
- 1950년 8월~ 1953년 8월 : 대한민국 정부 부산으로 옮김
- 1951년 1월 : 유엔묘지 조성
- 1960년 4월 19일 : 4월 혁명 일어남
- 1963년 1월 : 부산시 정부 직할시로 승격
- 1968년 5월 : 부산시내 전차운행 종료
- 1976년 8월 : 김해국제공항 개항
- 1987년 6월 : 부산 6월 민주항쟁 일어남
- 1991년 7월 : 초대 시의회 개원
- 1994년 6월 : 부산지하철 1호선 전구간 개통 (노포동~신평, 32.5㎞)
- 1995년 1월 : 직할시에서 광역시로 바뀜
- 1996년 9월 :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최
- 1998년 1월 : 연산동 부산광역시청사 개청
- 2002년 9월 : 제14회 부산아시안게임 개최
부산지하철 2호선 전구간 개통(호포~장산, 38㎞)

http://www.bs21.net/depart/market/market_01_01_05_01.html


[부산의 유래 ]

부산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부산(富山)이란 명칭이 기록에 처음 보인 것은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강구사(講究使) 이하생(李夏生)을 대마도에 보낼 때 백미 천석(千石)을 부산포에서 반출하였다는 기록에서 보인다.
또『세종실록지리지』에는 "東萊富山浦"라 하였고, 신숙주의『해동제국기』에도 "東萊之富山浦"라 하였으며, 또 같은 책「三浦倭館圖」에도 "동래현부산포(東萊縣富山浦)"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때의 부산포는 '富'자를 사용하고 있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되고 그후 여러번 증보된『동국여지승람(1481)』산천조에 보면, "부산은 동평현(오늘날 당감동 근처)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이름하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이다. 항거왜호가 있는데 북쪽 현에서 거리가 21리이다."라고 하여 산 모양이 가마꼴과 같아 부산(釜山)이라고 하였다는 부산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그후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부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동래부지(1740)』산천조에도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 같이 이름하였는데 밑에 부산·개운포 양진이 있고 옛날 항거왜호(恒居倭戶)가 있었다"라고 하였고, 『동래부읍지(1832)』에도 같은 내용으로 나오고 있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동국여지승람』편찬 이전에는 부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1442년(세종 25년) 계해약조가 체결되고 삼포왜관(부산포·제포·염포)이 설치된 후 그 어느 시기에 부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 가마꼴과 같이 생겼다는 산은 과연 어느 산을 말하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357년 전인 1643년(인조 21년)에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건너간 신유의 『해사록』에 실려 있는「등부산시(登釜山詩)」에 "산 모양이 되도록 하여 가마와 같고 성문이 해수에 임하여 열려"라고 한 구절이 나온다. 이때 부산진성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 북쪽의 증산을 둘러싸고 있는 정공단 자리에 성문이 있어 성문 바로 아래가 바다와 접해 있었으므로 이 시문에 나오는 산은 증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18세기 중엽에 우리나라 사람이 그린「부산왜관도」를 보면 이 증산을 점초(点抄)하여「부산고기(釜山古基)」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동구 수정동으로부터 산을 넘어 가야동으로 통하는 고개를「가모령」이라하고 「부산호장소(釜山戶長所)」의 문서에는 "시령(枾嶺)"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가모(可牟)·감〔枾〕은 가마를 즉 「가마[釜]」를 뜻하는 것으로 가모령·감(枾, 嶺)은 우리 나라의 방언을 한자로 차용한 것으로 가마재·가마고개〔釜峙〕 즉 부산재(고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古老들은 증산을 시루산이라고도 하는데 시루〔甑〕와 가마〔釜〕는 같은 취기(炊器)로 금속성의 가마가 나오기 전에는 동일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모든 사실들을 종합하여 볼 때 "산이 가마꼴〔釜形〕과 같다"라고 한 가마꼴의 산은 옛날부터 좌천동 뒤에 있는 증산(甑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http://museum.donga.ac.kr/pusan/pusan01/pusan_01_a.htm


◎ 구석기시대

한반도 인류의 발자취가 비치기 시작한 것은 까마득한 구석기시대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유적은 웅기의 굴포리, 공주의 석장리,제주도의 비레곳 동굴 등 수십곳이 있으며, 구석기 시대 전시대에 걸쳐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부산지역은 기후조건이 양호하며 산물이 풍부하여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 우리나라의 다른 여러곳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이곳 부산지역에서도 해운대 청사포와 좌동 신시가지에서 사냥돌, 격지 등의 구석기 유물들이 채집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구석기시대에 사람들이 살았을 가능성은 많다. 그러나 지금까지 부산지역에서 출토된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은 주로 신석기시대 이후의 것이 많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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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유적은 모두 조개무지(패총)로 동삼동(東三洞), 조도(朝島), 영선동(瀛仙洞), 다대동(多大洞), 암남동(岩南洞), 금곡동 율리(金谷洞 栗里), 녹산동 범방(菉山洞 凡方) 등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모두 강가나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다. 부산지역의 신석기문화는 시베리아, 몽고지역의 신석기문화와 같은 계통으로서, 처음 한 갈래는 랴오뚱반도에서 서해안으로 들어와 남해안까지 퍼졌고, 뒤에 들어온 다른 갈래는 동만주(東滿洲)로부터 동해안으로 내려와서 동삼동 조개무지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부산지역의 신석기문화는 우리나라 신석기문화 중에서도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 존속기간도 이른 시기에서부터 늦은 시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계속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 남해안 지방의 신석기 문화는 부산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 되었으며, 이곳을 통해서 일본의 북구주 지방의 신석기문화와도 밀접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신석기 문화는 대개 5000 ∼ 6000년 전에 시작되어 3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부산지역에는 영도 동삼동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게 되었고, 뒤이어 이웃한 조도, 영선동, 다대동 등에서도 취락이 형성되었으며, 가장 늦게 암남동, 금곡동 등에서도 생활하게 되었던 것이다. 점차 해안선을 따라 낙동강 하류쪽으로 퍼져 나갔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하나의 동일집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각각 성격이 다른 집단들이 시기를 달리하여 생활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그 흔적들이 동삼동, 영선동, 다대동 조개무지 등에서 나타나는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들 문화는 그 이후 천천히 밀려오던 무늬없는 토기 문화와 접촉함으로써 부산지방의 청동기시대를 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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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기시대

지금으로부터 3000년을 전후하여 신석기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청동기인들은 농경문화를 가지고 만주를 거쳐 들어왔는데, 그들은 선주민인 빗살무늬 토기인들을 정복하고 동화시켜서 오늘날 한국인의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부산의 청동기문화는 한반도의 가장 남단이라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늦게 도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부산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과 유물은 구서동, 온천동의 금강공원, 장전동, 금사동, 거제동, 사직동, 수영동, 부곡동, 낙민동, 대신동, 괴정1동, 괴정2동, 감천동 등 전지역에서 고루 발견된다. 또한 신석기시대에 비하여 그 유적 수가 훨씬 많고 종류도 다양하며, 위치도 바닷가에서 떨어진 내륙 구릉지대로 옮겨가면서 인구가 증가하였고, 생활 및 경제형태 또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부산지역에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유물과 유적만 알려져 있고 초기의 유적과 유물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동삼동 위층유적과 금곡동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말기에 이미 초기 청동기시대 문화와 접촉한 증거가 나타났다. 조도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공렬토기와 율리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마제석촉이 부산지방에서는 가장 빠른 시기의 것으로 보이며 청동기 전기는 신석기시대 말기의 연속해서 나타난 것으로 보아도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유적만 발견되지 않았을 뿐 실제는 부산지역의 청동기시대 문화는 단절없이 계속 존재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도 패총에서 출토된 점토띠 구연토기, 삼각형 석촉은 후기 한국식 동검과 함께 출토되지만 삼각형 석촉은 곧 소멸되고, 점토띠구연토기도 단면원형에서 삼각형으로 변화한다. 말기에는 부산과 구주지방 사이에 빈번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시대의 주민들은 지석묘, 석관묘, 옹관묘 등 여러가지 형태의 무덤을 사용하였다. 이 가운데서도 지석묘와 석관묘는 비교적 일찍부터 사용하였으나, 옹관묘는 아주 늦게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다음은 감천동지석묘, 대신동석관묘, 괴정동석관묘 등이 청동기 중기에 해당되는 유적으로 보인다. 청동기의 사용과 함께 농경중심의 정주생활과 생산력의 증대, 인구의 증가로 새로운 사회의 형성이 촉진되었다. 부산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일본의 야요이문화 발생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또한 늦게까지 청동기 문화를 유지하였고,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철기문화 즉 원삼국시대로 계승 발전되어 역사시대를 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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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기시대

철기시대는 기원전 1세기 ∼ 3세기까지의 대략 300년간을 말하며, 삼한 또한 삼국시대 초기에 해당한다. 이 무렵 삼국은 아직 강력한 왕국으로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고고학상으로는 석기와 청동기가 소멸되고 철기 사용이 본격화된 시기이다. 부산지역을 비롯한 우리 나라의 남부지방은 철기문화의 유입이 훨씬 늦어져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비로소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유적으로는 조개무지와 고분이 있다. 조개무지는 조도, 영선동 조개무지 위층, 다대동 조개무지 위층, 괴정동, 동래 등에 최근까지 남아 있었고, 그외에 청학동, 전포동, 범천동, 하단동, 신평동 등에도 있었다고 하나 도시개발로 오래전에 소멸되었다. 고분은 오륜대, 괴정동, 화명동, 복천동 고분의 예에 따르면, 전기는 앞 시대의 전통을 계승한 석관묘(石棺墓)와 석곽묘(石廓墓)였을 것이고, 후기에는 돌을 여러 단으로 쌓아서 만든 수혈식 석관묘와 동래 낙민동에서 나온 옹관의 전통을 이어받은 옹관묘가 유행한 것 같다. 그외 금사동에서는 풍화된 암반(岩盤)을 파고 들어가서 시체를 매장한 토광묘(土壙墓)도 발견되었다.
중국 『삼국지』의 동이전(東夷傳) 한전(韓傳)에서도 이때의 묘제가 석관묘나 토광묘처럼 간단한 무덤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다른 지방과 달리 부산 인근의 무덤에서 철기유물이 월등히 많은 사실은, 동래 조개무지에서 발견된 쇠를 제련하는 야철터의 존재와 함께, 이 지방이 옛날부터 철 생산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동래 조개무지의 야철 시설은 부근에 있는 사철을 채집하여 제련한 것으로 보이며, 여기서 만들어진 철은 수영강을 통해 왜(倭)나 낙랑(樂浪), 대방(帶方)에까지 수출하였다. 철은 주로 농구와 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고, 또 화폐처럼 물물교환의 매개물로 이용되었으며, 멀리 떨어진 다른 지방에서도 이 지방의 철을 가져갔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철은 당시의 사회문화 수준의 척도로서 기능하였음이 틀림없다.
부산지방과 낙동강 하류지방에서 많이 생산된 철은 이들 지방의 농경문화와 전반적인 사회경제를 발전시킨 기반이 되었을 것이며, 또 새로 등장하는 가야문화 발전의 촉진제가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부산지역의 삼국시대 문화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발전한 것이다. 현재 삼국시대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큰 규모의 고분군이 동래 부근인 복천동, 연산동, 반여동 일대에 밀집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부산지방의 삼국시대 문화가 동래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을 반영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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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시대


삼국시대 이전의 부산지방은 가야영역에 속한 동시에 가야문화권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1세기 무렵의 부산지방에 있었던 일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서 『삼국사기』 (44권) 예전(藝傳)에 의하면 "그는 탈해이사금에게 배술하여 간(干)이 되었다. 이때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이 이웃지경에 끼어 있었는데 자못 나라의 근심 거리가 되었다. 거도는 변방 관원이 되어 몰래 이를 병합할 뜻을 품고 있었다.
이에 군사를 일으켜 그들이 준비하지 않은 기회에 두나라를 쳐서 멸망시켰다"고 서술되어 있다. 열전(列傳)에 당시의 사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 기록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찍부터 부산지방의 문화적인면은 가야문화권에 포함되어 있었고 영역도 가야세력권 속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부산이 가지고 있는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팽창 일로에 있는 신라의 정치세력과 접촉하고 있었던 것을 반영한 것이라 보아진다. 한편, 3세기 무렵 부산의 사정은 중국의 문헌인 『삼국지』위지 동이전에서 엿볼 수 있다. 그 기록 가운데 부산에 관계되는 중요한 사실을 변진한 24국의 국명에 나오는 변진에 대하여 "나라에서 철을 생산하였고, 한인(韓人), 예인(濊人), 왜인(倭人)도 모두 이것을 가져가며, 모든 매매에 철을 사용함을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하고, 또 오군에 공급하였다"고 한 부분이다. 이것은 부산의 동래 조개무지에서 철을 제련하였던 용광로 터가 발견된 사실이나, 복천동고분에서 많은 철정이 출토되었다는 사실과 부합된다. 따라서 부산은 삼한시대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철을 중심으로 하는 수공업이 최고로 발전했고, 이를 배경으로 그 당시 해상 교역의 중요한 거점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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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시대


부산은 삼국시대 이전의 거칠산국에서 삼국시대 신라의 거칠산군으로 편입되었다. 거칠산국은 장산국이나 내산국으로 불리어지기도 하였다. 거칠산국 또는 거칠산군은 "거친 뫼"에서 따온 것이며, 지금 양정동 뒷산인 황령산의 옛이름이 거친 뫼인 데서 유래하였다고 생각된다.
동래라는 지명의 유래는 변진 24국의 하나인 독로가 동네 → 동래로 변하면서 동래란 중국식 지명으로 다듬어졌다는 설도 있다. 그 유래가 어떠하든 동래현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거칠산군을 중국식 지명으로 고친 것이다. 동래군 영현의 하나가 되는 동평현은 본시 대증현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당감동 일대가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부산이 동래군의 관하에 있었다고는 하나 사실 신라 때의 경우에는 대증현, 즉 동평현의 관할에 있었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부산은 『고려사』에 전하는 바와 같이 견훤이 고려 태조에 사신을 보내어 절영도의 명마 한필을 보냈다가 되돌려 받은 사실에서 볼 때, 절영도의 목마장은 통일신라 무렵 이후부터 유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절영도(絶影島)란 이름도 명마가 빨리 달려 얻어진 이름으로 『절영』같은 명마를 사육하는 섬이라는 데에서 생겨난 이름이며, 지금과 같은 영도로 부른다. 한편, 부산은 옛부터 천연의 경치가 뛰어나고 온천이 풍부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해운대와 동래의 온천은 신라 때부터 널리 알려져 있어서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찾기도 하였다. 신라 태종무열왕이 태종대에 와서 사냥하고 유람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는 전설을 가진 태종대라든지, 최치원 선생이 노닐던 대에 새긴 글자에서 유래된 해운대 등은 옛부터 부산지방의 경치중 널리 알려진 명승지의 하나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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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나말여초의 혼란기를 수습한 고려는 각 지방에 존재하는 호족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지방제도를 정비함과 아울러 행정구역도 새롭게 재편하였다.
고려시대의 부산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지리지에는 "동래현은 본래 신라의 거칠산군으로서 경덕왕이 동래군으로 고쳤는데, 현종 9년 울주에 내속되었고, 뒤에 현령을 두었다. 온천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동평현에 대해서는 『고려사』지리지에 의하면, "동평현은 본래 신라의 대증현이며,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동래군의 영현으로 삼았고, 현종 9년(1018) 에 양주에 내속 되었다. 절영도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동래 현조에 의하면, "고지도(古知道) 부곡은 즉 고지섬을 말한다고 하였고, 조정부곡은 동평현의 북쪽 20리에 있다고 하였으며, 형변(兄邊)부곡은 동평현의 남쪽 해안에 있으며, 신라가 남해신을 여기에서 제사하였는데 중사(中祀=나라에서 지내던 제사)의 기록에 실려 있다고 하였다. 부산부곡(富山部曲)은 부산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이어서 생천향(生川鄕)은 동평형의 남쪽 20리에 있다"고 하여 4개의 부곡과 1개의 향이 존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부산〔동래〕는 고려시대 동래현, 동평현으로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동래온천은 고려시대에도 널리 알려져 그 온도는 달걀도 익힐 수 있는 정도이며, 병을 가진 사람도 목욕만 하면 낫는다고 전할 만큼 유명하였다. 또 당시 지식인이었던 이규보 등도 동래 온천을 찬양하는 시(詩)를 지었다. 이는 고려시대에 동래 온천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졌다는 증거이다. 또 앞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절영도가 목장으로서 이름을 날리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후삼국 중에서 서로 자웅을 다투던 후백제 왕 견훤이 부산의 절영도 명마 한필을 고려 태조 왕건에게 선물하였다는 데서 더욱 유명하다.
고려말 부산은 왜구가 침입하여 노략질이 심하여 피해가 가장 심하였던 곳으로,. 왜구의 활동 범위는 광대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집중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은 곳이 우리나라 남쪽의 해안지방이었다. 공민왕 때 경남, 부산지방에 있었던 약 30회에 걸친 왜구의 침략은 부산지방의 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조정에서는 혹은 이를 격퇴하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왜구의 금지를 요청하는 동시에 해변의 주요지역의 군현에 성보(城堡)를 설치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에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門使) 박위는 우왕 13년(1387)에 종래 황폐하였던 동래읍성을 개축하게 되었다. 이때 쌓은 육성은 석축인데 둘레가 3090척, 높이가 13척에 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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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부산이란 지명은 부산포에서 유래된 것으로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부산포 (富山浦)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보인다. 15세기의 전반기까지만 하더라도 부산포 (富山浦)라 하였고,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지금 동구 좌천동에 있는 증산의 이름인 부산(釜山)을 따서 부산포라 불렀다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부산포는 군, 현과 같은 당시의 독립된 지방행정 단위는 아니었다.
초기에는 동래현과 그 속현이었던 동평현의 관할 아래에 있었고, 그 후에는 계속해서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의 구역내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선 태조 6년(1367)에 동래에 진(鎭)이 설치되고, 병마사가 동래의 행정관인 판현사(判縣使)를 겸임하게 되었다. 한편, 동래현의 속현인 동평현(현 당감동 일대)은 고려 때는 양주의 영현이었으나 태종 5년(1405)에 동래현의 속현이 되었고 동왕 9년 (1409)에 다시 양주에 속하였다가, 그후 세종 5년(1423)에는 병마사가 첨절제사로 개칭되고, 판현사를 겸하게 되었다. 세종 10년(1428) 다시 동래현의 속현으로 현령의 행정적인 지휘 감독을 받았으며, 그후 속현제도가 없어짐에 따라 통합되었다. 세종 22년(1440)에는 부산포에 일본인의 내왕이 빈번하게 되자, 진을 속현인 동평현으로 옮겼다가 동래로 환진하였고, 다시 판현사를 현령으로 바꾸었다.
그후 명종 2년(1547)에 도호부로 승격시켜 무관을 부사로 임명하고 아래에 판관을 두었으나, 선조 34년(1601)에 외교상의 사정을 감안 당상의 문관을 부사를 삼고 판관제도를 폐지하였다. 효종 6년(1655)에는 동래부에 독진을 설치, 숙종 16년(1690)에는 부사가 방어사를 겸임하게 되었으나, 2년 후에 방어사는 없어졌다. 영조 15년(1739)에는 부사가 동래성과 금정산성의 수성장을 겸임하여 고종 32년(1895)까지 계속되었다.
군사적으로는 고려말기부터 계속되는 왜구의 창궐은 그 폐해가 막심하였다. 이에 태종 7년(1407년) 부산포와 내이포 두곳을 개항하여 일본인의 내왕과 함께 교역을 허용하였으나, 왜구의 침탈이 계속되자 세종 원년(1419) 왜구의 소굴이었던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후 왜의 사죄와 간청에 따라 세종 5년(1423)에는 부산포와 내이포를 개항하고, 동왕 9년에는 울산 염포까지 개항하니, 이른바 삼포의 개항이다. 세종 25년(1443)에 『계해약조』를 맺어 무역선의 수와 세사미두의 수량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삼포의 왜관은 지역을 제한하고, 그곳에 객사 등 여러 건물이 있었고, 동래부사가 일본사신을 접견하기도 하였으며, 왜관내에서는 왜인들의 거주가 허락되기도 하였다. 왜관 주위에는 복병막소를 설치하여 왜인은 물론 조선인의 출입를 통제하였고, 허가를 받은 상인의 출입은 허용되었다.
부산포에 설립된 왜관의 변천을 보면, 태종대에서 중종 5년(1510) 경오왜변 이전까지는 부산포왜관(현 자성대부근 추정), 선조 36년(1603)에는 잠시 절영도왜관(현 대평동부근 추정)에 있었고, 선조 40년(1607)에 두모포왜관(현 수정동일대), 숙종 4년(1678)부터 고종 13년(1876)까지 초량왜관(현 용두산일대)이 존속하다가 1876년 개항 이후에는 전관거류지로 바뀌었다.
부산〔동래〕은 나라의 관문이었기 때문에 군사의 요새였다. 즉 금정산성은 그 규모로 볼 때 국가의 대표적 성이었으며, 국방시설도 발달하여, 지금의 수영에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부산진에는 부산진영이 설치되어 있었고, 육군을 동래부사가 관장하고 해군은 좌수영, 부산진, 다대진이 관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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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항기

19세기 중반이후 조선은 내적으로 봉건사회의 위기에 직면하였고, 외적으로는 구미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하였다. 1866년 프랑스함대의 강화도 침범으로 병인양요가, 1871년 미국 함대의 침략으로 신미양요가 야기되자, 조선은 양이론(洋夷論)이 더욱 득세했고, 일본의 수차에 걸친 교섭요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한 가운데 일본은 1875년 2척의 군함으로 부산항에서 무력 시위를 전개한데 이어 강화도에도 운양호사건을 도발하여 1876년 일본정부는 소위 운양호 포격사건에 대한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군함 7척을 거느리고 강화도에 보내어 조약체결을 강요하여 1876년 2월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은 전문12개 조항으로 첫째, 조선은 20개월이내에 부산항 이외에 2개소를 개항하고 일본 상인활동의 자유요구. 둘째, 일본은 조선의 연해, 도서 암초 등의 자유로운 측량과 해도권 요구. 셋째, 일본은 조선이 지정한 항구에 영사를 파견하여 주재시키고 일본인의 범죄 행위에 대하여는 일본영사가 처리한다는 등 불평등내용 이었다. 이어서 『병자수호조약부록』, 『조일무역장정규칙』이 강제적으로 체결하였다. 일본인 보호를 위한다는 구실로 외무성 관리를 관리관으로 파견하였고, 관리관과 동래부사 사이에 부산 일본인거류지 설정문제의 회담이 진행되어 1877년 1월 30일(양력) 『釜山口租界條約』체결로 일본인의 내왕과 통상, 토지임차권, 가옥건축권 확보로 점차 부산지방을 잠식하여 침략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개항 당시 부산의 외교, 통상사무는 동래부사가 관장 처리하였고, 중앙정부에서는 변찰관을 파견하여 동래부사와 협의하여 외교업무 등을 처리하였다. 그후 전문외교, 통상사무를 위해 1883년 8월 19일에 부산에 감리를 두고, 동래부사가 겸하게 하였다. 동년 부산해관이 설치되었다. 1890년(고종 27)에는 독립된 관서로서의 감리서(監理暑 )를 설치하였으나, 1895년 5월 1일 폐지 되었다가 이듬해 8월 7일 재차 설치(현 봉래초등 자리)되었다. 1884년 7월 청은 초량에 영사관과 청관을 설치하여 그 관리는 동래 감리의 지시를 받은 감리서원이 간수까지 맡고 있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패배는 청관내의 토지, 가옥까지도 일본영사에 의해 일본소유로 징집할 정도에 이르렀다. 한편, 1883년 영국은 부산에 영사관을 설치하였으며, 영선산일대를 부지로 삼아, 바다 매립공사때 그 일부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독점적인 지위를 갖게되자 일본은 동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내정을 실질적으로 관장하였다. 1906년 2월에 이사청 설치로 부산은 이사관이 부산의 일본영사와 동래감리와의 사이에 사무인계가 이루어졌다.
부산에 일본이사청의 설치로 영사관은 물론 감리제도가 폐지되었다. 또한 일본전관 거류지가 초량왜관이 있었던 용두산 일대 11만평에 설치하였다. 일본정부는 대륙침략의 전초기지인 부산항 매축, 토목, 철도, 도로공사 등에도 주력하였다. 먼저 매축 및 부두공사시설을 시작하여 오늘날 중앙동부근 바다의 매축(바다를 매운다)을 1902년 7월 착공, 1905년 12월 준공을 보았고, 북빈일대를 1902년 7월부터 1909년 8월까지 1, 2기에 거쳐 41,374평을 매축하였다. 이 외에 초량과 부산진 앞바다 37만평을 매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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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관제』, 『조선총독부 지방관제』를 반포하여 10월 1일 이를 실시하였다. 당시 지방제도는 전국을 13도, 12부, 317군으로 도 밑에 부, 군을 두고 부에는 부윤, 군에는 군수를 임명하였다. 부산이사청을 폐지하고, 부산부를 설치하여 동래부 사무를 인계하고 관할 하였다.
그후 1914년 군, 면의 통합에 따라 옛동래부의 일부와 기장군을 합하여 동래군이 되고, 경상남도에 속하여 부산부와 구별되는 행정구역이 되었다.

한편, 부산부는 부산면, 사중면, 사하면 가운데 지금의 서구, 중구, 영도구지역을 관할하는 행정단위로 그 면적은 84.15㎢가 되었다. 1925년에는 진주에 있던 도청이 부산에 옮겨왔고, 1936년 제1차 행정구역 확장으로 서면과 암남리의 편입으로 면적이 112.12㎢로 늘어났고, 부산진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42년에는 제2차 행정구역 확장으로 동래읍 전부와 사하면의 편입으로 동래, 사하, 수영출장소가 설치되어 면적이 241.12㎢로 늘어났다.
일제강점기 동안 식민정책으로 주요사업이 집중적으로 추진되었다. 먼저 전차시설은 1910년 3월 7일 부산궤도주식회사에 부산진 ∼ 동래사이에 경편궤도시설을 인가하였고, 부산진 ∼ 초량선이 부설되었고, 부산 ∼ 동래간은 경편과 전차를 겸용할 수 있게 건설되어 1915년 11월 1일에 영업을 개시하였다. 시내선은 1916년 9월에 개통, 운행되었다. 1917년 12월에는 우편국 ∼ 중앙동 ∼ 광복동 ∼ 한전(현 충무동)선이 개통되었고, 9월에는 옛 부산역전 ∼ 부산진간을 복선화와 1925년 보수동 ∼ 도청앞 ∼ 부용동, 1927년 10월말에는 동래선을 온천장까지 연장, 1928년 9월에 운동장까지 연장, 개통되었다. 한편, 1931년 10월까지 표준궤도로 개조, 아울러 1934년 9월에는 토성동 ∼ 운동장까지 복선으로 개통되었다.

둘째로 수도시설은 일본인의 급격한 인구증가와 근대공장 시설의 증가 등으로 기존 수도시설로서는 급수가 어려웠다. 따라서 1920년 ∼ 22년과 23년 ∼ 25년 사이에도 수도확장공사를 실시하여 양산시 동면 법기리와 현 금정구 청룡동에 수원지를 1933년 3월 31일 준공하였다. 하수도 시설은 하수계획에 따라 1929 ∼ 1931년까지 용두산 주변에 공사를 시행하여 시설을 완성하였다.

셋째로 항만시설은 1902년 ∼ 1909년까지 1기 32,627평, 2기에 8,347평의 매축하였고, 부산진 매축은 1913 ∼ 32년까지 1차로 부산진 앞바다 14만5천평과 2차로 우암동에 걸친 31만5천평의 바다를 매축하였다. 그리고 부산축항합자회사에서 남항일대 147,300평의 바다를 매축하고, 선류장, 하양장, 방파제 등의 축조가 이루어졌다. 1902 ∼ 8년까지 해관공사로 41,375평을 매축하였다. 1909년에는 중앙동부근 쌍산(또는 쌍악)의 착평공사로 파낸 토석으로 30,590평의 바다를 매축하는 공사를 1912년 8월에 준공하였다. 부산축항 제1기공사를 1911년 ∼ 1919년까지 제1부두의 축조, 항내의 준설 등의 설비공사를 완공하였고, 제2기는 1927년에 완공되었다.
그후 1935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남쪽 방파제에 상대하는 적기반도로부터 연장 286간의 북쪽 방파제를 축조하였다. 또 부산부에서는 연안설비를 위해 1928년부터 1931년에 걸쳐 북빈연안 설비공사 및 영도연안 매축공사를 시행하여 각각 3,400평과 4,200평을 매축했다.


이상에서 설명한 부산의 도시 및 항만시설은 일본의 군사적, 경제적 요청으로 이어진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부산부청(구 시청)은 부산부 설치 당시부터 부산이사청사를 사용했으며 1936년 3월 31일에 부산부청(구 부산시청)이 준공되어 사용되어 오다가 1998년1월 연산동 신청사 이전으로 10월 완전히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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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한 부산은 여러가지 산적한 현안을 안고 있었다.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철수, 해외동포의 귀국, 일제잔재의 청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도 전에 남과 북을 미소가 분할 점령하여 남한은 미군정의 실시로 부산에 미군이 주둔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의 행정체계는 일제식민지 지배기의 행정체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은 1948년 8월 15일을 기하여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미군정도 종식되고 부산도 새로운 행정체제 속에서 민주적 법치행정이 실시될 수 있었다.
그리고 1947년 10월에는 일본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뀌었으며, 1949년 8월 15일 부제(府制)가 시제(市制)로 개칭되어 비로소 부산시가 되었다. 1951년에는 영도, 초량, 서부출장소가 설치되고, 1953년에는 대연출장소가 부산진출장소(1936년 설치)에서 분리 설치되었고, 해운대출장소도 수영출장소에서 분리되어 출장소는 8개로 늘어났다. 1957년 1월 1일 구제가 실시되어 6개구(중구, 동구, 서구, 영도구, 부산진구, 동래구)가 설치되었다.
1963년 1월 1일을 기하여 정부 직할시로 승격으로, 제3차 행정구역이 확장되어 동래군의 구포읍과 사상, 북면, 기장읍, 송정리를 편입하여, 6구(중구, 서구, 동구, 영도구, 부산진구, 동래구), 7출장소(대연, 사상, 사하, 북면, 수영, 구포, 해운대), 136동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부산은 급격한 발전을 거듭하여 1960년 중반 부산의 인구는 광복 당시보다 무려 5배 증가한 150만명에 시역이 373.23㎢로 확장됨으로써 대도시 특유의 기능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78년에는 제4차 행정구역 확장으로 낙동강 삼각주의 대부분 지역인 김해군 대저읍, 가락면, 명지면 등이 시역으로 편입되면서 면적은 432.32㎢ 로 늘어났고, 1989년에는제5차 행정구역 확장으로 인구 400만을 수용하는 세계적 도시로 발전하여 국제 도시의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 그 시역은 경남 김해군 가락면과 녹산면 그리고 창원군 천가면 등으로 확대되어 면적 525.95㎢로 거대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게 되었다.
아울러 행정구역도 1975년에는 남구, 1978년에는 북구, 1980년에는 해운대구, 1983년에는 사하구, 1988년에는 금정구, 1989년에는 강서구가 설치되어 12구로 늘어났다. 한편, 1995년 1월 1일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부산광역시로 개칭 되었다. 1995년 3월 제6차 행정구역 확장으로 기존의 동래구를 분구하여 연제구를, 남구를 분구하여 수영구를, 북구를 분구하여 사상구를 신설하였다. 또한 양산 동부 5개 읍면인 기장읍, 장안읍, 일광면, 정관면, 철마면 등을 편입시켜 기장군에 편제하였고, 진해시 웅동2동 일부를 강서구 녹산동에 편입되면서 면적은 749.17㎢으로 확장되었다.
1998년 1월 현재 면적은 750.90㎢로서 전국의 0.75%를 차지하고 있다.
http://museum.donga.ac.kr/pusan/pusan01/pusan_01_e.htm

2005.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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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지역(강서구)
-삼한시대 : 변한 구사국→금관가야
-삼국시대 : 법흥왕19년 금관군→문무왕20년 금관소경→경덕왕15년 김해소경
-고려시대 : 태조23년 김해부
-조선시대 : 태종3년 김해도호부→고종33년 김해군
-해방이후 : 1978년 부산직할시 북구→1983년 부산직할시 강서출장소→1989년 부산직할시 강서구

 

기장지역(기장군)
-삼한시대 : 변한 거칠산국 갑화양곡
-삼국시대 : 지증왕6년 거칠산군(영현 갑화양곡현)→신문왕 삽량주 내속→경덕왕16년 동래군(영현 기장현)
-고려시대 : 성종14년 영동도 경주목 양주군(영현 기장현)→현종9년 울주(영현 기장현)→충렬왕30년 양산군(영현 기장현:고촌+결기+사랑+사아부곡)→공양왕3년 기장군
-조선시대 : 태조3년 경상도 기장현→선조32년 동래현+울산군 하미면(기장현 폐현)→광해군9년 기장현→고종32년 동래부 기장군
-일제시대 : 1914년 경남 동래군
-해방이후 : 1973년 양산군→1986년 양산군 동부출장소→1995년 부산광역시 기장군

 

동래지역(그외)
-삼한시대 : 변한 거칠산국
-삼국시대 : 탈해왕 거칠산군(영현 대증현, 갑화양곡현)→경덕왕16년 동래군(영현 동평현)
-고려시대 : 현종9년 울주(속현 동래현)+양주(속현 동평현) (고지도부곡+조정부곡+형변부곡+부산부곡+생천향)
-조선시대 : 태종5년 동래현(속현 동평현)→태종9년 동래현+양주(속현 동평현)→세종10년 동래현(속현 동평현이 나중에 통합)→명종2년 동래도호부(속현 동평현)→선조25년 동래현→선조32년 동래도호부→고종32년 동래관찰부→고종33년 동래부→고종40년 동래군→고종43년 동래부(양산군 구포읍 편입)
-일제시대 : 1910년 동래부▶부산부→1914년 부산부(부산면+사중면+사하면=현재의 서/중/영도구)+경남 동래군(동래부 일부+기장군)→1936년 서면, 암남리 편입(부산부 부산진출장소)→1942년 동래읍, 사하면, 남면, 북면 편입(부산부 동래, 사하, 수영출장소)
-해방이후 : 1946년 정(町)▶동(洞), 정목(丁目)▶가(街), 통(通)▶로(路)→1949년 부산부▶부산시→1951년 부산시 영도, 초량, 서부출장소→1953년 부산시 부산진/대연, 수영/해운대출장소 분리→1957년 구제실시(부산시 중,동,서,영도,부산진,동래구)→1963년 부산시▶부산직할시, 구포읍, 사상면, 북면, 기장읍 송정리 편입(부산직할시 구포, 사상, 북면출장소)→1975년 남구, 부산시 사하, 북부출장소(구포, 사상, 북면출장소 폐지)→1978년 북구 신설, 김해군 대저읍, 가락면, 명지면 편입→1980년 해운대구 신설→1983년 사하구, 부산시 강서출장소 신설→1988년 금정구 신설→1989년 강서구, 강서구 천가출장소 신설, 김해군 가락면, 녹산면, 의창군 천가면 편입→1995년 부산직할시▶부산광역시, 동래/연제, 남/수영, 북/사상구 분리, 양산군 동부출장소▶기장군

2005.03.27.

  • 출처

    부산광역시청, 기장군청, 강서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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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부산직할시 →부산광역시 입니다.

그리고 참고로 말씀 드리면 우리나라 제1의 해양수도 '부산특별시'

제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 밖에 준비를 못했는데

 

과연 이것들이 도움이 될까 걱정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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