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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현재까지 연쇄살인범
su94**** 조회수 91,088 작성일2009.02.12

저가 알고있는 연쇄살인범들은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인데요

그 전에 연쇄살인범들도 꾀 많터라고요 연쇄살인범들 좀 알려주세요

그리고 몇명을죽였고 어떻게 죽였는지 알려주세요 ㅠ.ㅠ

자세하게 알려주시는분한테 채택할께요 ㅇ_ㅇ 내공은 못걸어서 ㅈㅅ 하구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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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 드 레(Giles de Rais 1404.?~1440.10.26)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연쇄살인범을 들자면, 15세기 프랑스의 질 드 레 남작을 지명하겠다. 잔다르크의 상사로서 영국과의 백년 전쟁에 참전한 전쟁영웅이자, 왕관만 없다 뿐, 왕에 버금가는 부와 권력을 가진 이 작자는 영지에 거주하는 수 백명의 아이들을 인간의 상상이 허하는 거의 모든 고문들을 가하며 살해했다. 신체절단은 말할 것도 없고 시체뻑커(necrophile)에다가 아동뻑커(pedophile) 되시겠다.

그의 이런 행동 이면에는 전쟁 끝나고 할 일이 없어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연금술과 흑마법에 심취한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의사(擬似)과학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희생제의로 그는 아동살해를 취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영민하다 소리를 들었던 남작은 피 잔치를 계속하다가 마침내 교회와 왕권에 의해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당했다. 첨에는 열라리 거만하게 튕겨대다가 종국에 참회했다 전해지는 이 살인마는 모든 탓을 엄격하지도 못했고 요절까지 한 자신의 부모들에 돌렸다고 전해진다.

한편, 남작의 이런 행적은 다소 부풀려지거나 혹은 꾸며진 것이란 주장도 있다.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는 그를 교회와 왕이 당연히 견제하고 있었을 테고, 그를 숙청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도덕적 타격이 필요했을 테니까. 전술했듯 그는 전쟁영웅이었으므로.... 승자의 역사는 루저에게 불친절하다. 해서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이런 행적들이 전해 내려오면서 수많은 살해지망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왔다는 거다. 드 레 남작은 그림 형제의 유명한 동화 '푸른 수염'의 푸른 수염 캐릭터 원형이기도 하다.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1888)

원래 미해결 사건은 종결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전설이 되기 쉽다. 잭 더 리퍼는 1888년 하반기에 영국 런던의 빈민 지역에서 연속 발생한 살인사건의 살인자를 가리키는 이름으로써, 범인이 끝내 밝혀지지 않아 더욱 유명하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자신이 범인임을 주장하는 편지에 친절하게도,

"Yours truely, Jack the Ripper"

라고 써있었기 때문이다. 잭 더 리퍼의 이름으로 온 두 개의 편지는 그 진위여부가 엄청나게 논쟁적이었고 역시 끝내 밝혀지지 않았음이다.

사실, 당 사건 자체는 앞서 소개했던 미친 남작이나 이후 소개할 미치광이들보다는 어케 보면 두드러지지 않는다. 물론 이건 상대적인 거다.

런던의 빈민가이자 매음굴이 위치한 화이트채플 지역에서 약 넉 달 동안 5명의 매춘업 종사 여성들이 칼로 난자당하며 살해된다. 살해수법의 유사성으로 인해 동일범의 소행일거라 추측될 뿐, 범인을 못잡았기에 이게 확실한 것은 아니다. 주거지 한 복판의 거리에서 살해가 이루어진 점, 피해자에 따라서 많을 경우 40여 회 가까이 난도당한 점 등 대담하고 잔인한 살해양식은 곧 당대의 충격적 이슈가 되었고, 미제사건에 등극함으로써 수많은 용의자들과 이론들이 제시되었다. 

칼 쓴 솜씨가 장난 아니게 깔끔했기 때문에 근처에 있는 정육점 주인들이 물망에 오르기도 했고, 이상편력을 가진 외과의들이 용의자가 되기도 했으며 왕가의 사생아 출산과 관련된 음모론도 제기되었다. 최근에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작가인 루이스 캐롤이 잭 더 리퍼라는 주장까지 나왔다.(박스 참조)

19세기의 가혹한 자본주의가 아동의 노동력 마저 착취하던 암울한 이 시절에, 영국은 그 선봉에 서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 건설에 젖빨던 힘까지 다하던 무렵이었다. 씁쓸하고 오싹하지만, 말 그대로 시대를 반영하고 풍미한 사건이 아닐까나...

범인에 관한 주장 중 가장 솔깃한 것은 아니고 황망한 케이스 둘의 세부내용되겠다.

하나는, 음모론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써 왕족과 관련된 스캔들이다. 당시 왕이었던 빅토리아에겐 알버트라는 손자가 있었다. 클레런스 대공이자 왕위계승 서열 2위에 빛나는 알버트 왕자가 윤락여성과의 빠굴로 사생아가 생기자, 이를 알게 된 빅토리아 여왕이 자신의 주치의를 시켜 '처리'하라 했다. 주치의 걸 경(Sir William Gull)은 자신의 마부와 함께 애 엄마와 애 엄마 친구들을 차근차근 살해했다는 다소 황망한 주장되겠다.

알려진 바, 알버트 왕자가 실제 주살해무대인 화이트채플에 자주 드나들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게이였다는 소문도 무척 강했고, 또 이런 혼외정사로 다섯 명이나 살해할 거까지 있었겠나 하는 점에서 신빙성이 마니 떨어지지 않능가? 뭐 하긴, 다이애나 공주 암살설도 파다할 정도로 영국왕실이 한 성질 하긴 한다.

다른 하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작가인 루이스 캐롤이 범인 중 하나라는 최근 주장이다. 리처드 월러스가 저서 'Jack the Ripper, Light-Hearted Friend(1996)'에서 제기 것인데, 근거로는, 그의 저서들이 살해 기간 중에 집필됐으며, 텍스트를 가지고 잘 연구--'anagram'이라는 일종의 철자바꾸기 등의 언어유희같은--하면, 당 연쇄살인과 관련된 내용이 숨겨져 있다는 거다.  

사실 루이스 캐롤이라면, 딱히 시대를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살아간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제가 되려다가 긴장하면 더듬는 습관 때문에 수학교수가 되었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아이들을 '참' 좋아했다고 전해지는 캐롤. 그렇다고 그가 아동을 성적 대상으로 삼았다는 증거는 그 어디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재직하던 대학의 학장 딸을 위해 만들었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시리즈는 사실, 당대의 영국인들이 아니라면 그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유머와 온갖 말장난을 잘 이해할 수 없다. 캐롤은 실제로 상당히 우울한 인간이었다 하는데 그렇다구 연쇄살인 공범이라는 주장은 너무 하지 않았나 싶다.

이런 이론이 나오는 가장 큰 이유는, 수학자이자 작가인 캐롤이 작품에서 즐겨 쓴 'Pun'이라는 일종의 동음이의어 유희와 수학적 메타포 때문이 아닐까 본기자는 생각한다.



 앨버트 피시(Albert Fish 1870.5.19~1936.1.16)

일단 심호흡부터 하시라. 소설 혹은 영화 <양들의 침묵>의 닥터 한니발 렉터를 기억하시는가? 그의 원형이 되는 자가 바로 앨버트 피시 되겠다. '달미치광이', '회색남' 또는 '브루클린 뱀파이어' 등으로 불리우기도 한 피시는 영화 속 렉터 박사가 그랬듯이, Cannibalism 즉, 식인행위로도 유명하고 또, 사도마조히즘적 가혹행위도 만만치 않게 유명하다.

피시는 화가였다는데 여기 저기 떠돌며 미국의 거의 모든 주에서 아동성학대 및 고문을 펼쳤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흑인 빈민가 아동들이었다. 왜냐면 흑인 아이들이 멍들거나 다친다거나 혹은 실종된다 해도 별다른 경찰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있어서였댄다. 20세기 초의 미국엔 흑인'시민'은 엄썼다, 쳇!

최소 15명의 아동을 살해했고 그들 중 다수는 먹어치우기까지 하셨다 하며 미국 전역에 걸쳐 많은 아동들을 고문하고 성적 학대했다 한다... 써글...

피시의 골반 엑스레이
검은 줄들이 바늘!

피시는 남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직접적인 고통을 가했다. 아니 말이 잘못됐다. 자신에게 가한 고문을 타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했다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일게다.

자신의 후장과 음낭 주변을 중심으로 바늘을 꽂아 넣는다거나(재판 진행 때 20개도 넘는 바늘들이 골반 부근에 들어가 있음이 엑스레이를 통해 확인됨), 솜에다가 알콜을 적셔 직장에다 쑤셔넣은 뒤 거따가 불을 붙이는 등이 그의 주된 유희되겠다.

물론 자신이 한 다음, 피해아동에게 똑같은 짓거리를 반복했음이다. 또 그는 희생자의 살만 먹은 게 아니라 오줌, 똥, 피도 즐겨 섭취했더란다. 에이 씨!

고모며 삼촌, 동생들까지 병원을 들락거리는 등, 정신병력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피시는 고아원에서 자라며 가혹한 학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체포된 이후, 자신의 경향과 업적(?)들을 학대받은 아동기 탓으로 돌렸다 하는데, 앞서 제시해드린 드 레 남작과 참으로 닮아있는 부분이지 않은가?

그레이스 버드

결국, 10세 여아, 그레이스 버드의 살해혐의로 1935년 3월 11일 법정에 섰다. 법정에서 그의 변호사는 집안의 정신병력도 병력이려니와, 납중독(당시 물감에 납이 많이 들어가서)에 의한 정신 이상을 주장했다. 하지만 검사는, 오래 전에 딴놈과 눈맞아 집나간 아내 대신 6명의 아이들을 혼자서 성실하게 양육했고 나이에 비해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그는 정상이라고 주장했으며 배심원들은 유죄를 판결했다.

유죄에 대해서는 불만이었으나 판사의 사형 선고에는 피시의 눈이 반짝 빛날 정도였다고 당시 신문들은 전하고 있다. 1936년 1월 16일, 명성도 드높은 싱싱교도소의 전기의자에서 사형당했는데, 이때 "최상의 스릴(supreme thrill)"이라며 사형집행관을 도와 지몸에 가죽끈 조이는 거에 일익을 담당했다나...이 작자, 살인마였을까 아님 미친 놈이었을까? 확신범임에는 틀림이 없다.

재판을 위해 피시를 만났던 프레드릭 워담 박사(Dr. Fredric Wertham)는 그의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자상한데다 예의바르기까지한 모습에 아주 깜딱 놀랐다고 한다. 그는 일케 말했다는데...

"살고자 하는 특별한 열망도 엄꾸, 죽임당하고 싶은 특별한 열망 역시 엄써요. 나랑은 무관한 문제일 뿐. 내가 전부 옳았다고는 생각지 않아요(I have no particular desire to live. I have no particular desire to be killed. It is a matter of indifference to me. I do not think I am altogether right)"

자신이 정신이상임을 인정하냐고 묻자 피시는 "모르겠어....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어(Not exactly.... I never could understand myself)" 라고 했단다.

 

 에디 게인(Eddie Gein 1906.8.27~1984.7.26)

미국 위스콘신이 낳은 걸출한 살인광으로, 앞서 말한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버팔로 빌'의 모델이 된 작자며 히치콕이 만든 영화 '사이코'의 원작소설에 지대한 영감을 주기도 했다. 이 작자가 검거됐을 당시의 반향은 전지구적이었다 하더라. 살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신체절단에 빼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무덤도굴, 시신뻑킹, 복장도착(transvestism), 페티시즘 등 다방면에 능숙한 희대의 현신한 악마였다....가 맞을까?

1957년, 공구상 주인 살해혐의로 수색영장을 가지고 그의 집에 들이닥친 경찰은 그저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그의 집에 있던 아티펙트들을 함 열거해 보면,

에디 게인네 집 부엌

일단 주방에 목 잘린 사슴고기마냥 널부러저 있었다는 공구상 워든부인, 해골로 만든 수프접시며 심장이 가지런히 올려진 후라이팬, 침실에는 잘려진 머리들, 사람피부로 만든 전등갓에 의자보도 있었다 하며, 입술로 만든 목걸이, 여자성기와 가슴으로 만든 조끼, 젖꼭지로 장식한 허리띠..... 옷장을 열어보니 역시 피부로 만든 레깅스 바지, 거의 미라가 되어 가죽같이 보이는 마스크.... 마당을 파보니 열 구 가까이 되는 잘려진 시신들, 시신들.... 악마 맞네에~~

이 정도의 아우라를 가진 그이므로, 몇 년 사이 근방에서 있었던 모든 실종 사건의 용의자가 되었고, 사회는 경악했다. 허나 최종적으로 3건의 살인혐의를 받았고 그 중 워든부인 살해건으로 기소됐다. 대부분의 아이템들이 주변 공동묘지에서 시신을 도굴해다가 만든 것이 밝혀졌고 그간의 실종자들에 대한 살해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정에서 정신이상이 인정되어 죽을 때까지 범죄인 정신병원에 수감됐다 한다.

에디 게인의 성장기는 여타 심각한 범죄자들의 그것에 모범을 보이고 있다. 무능력한 아버지, 집안의 실질적인 리더이자 기가 세며 종교적으로 대단히 경도된 어머니를 가진 그는 사회성이나 감수성 발달이 또래보다 지체되었기에 학교에서는 따 당하기 일쑤였다. 이런 그를 보호한답시고 어머니는 바깥세상으로부터 그를 격리시키기에 바빴다. 인간의 원죄에 대해, 빠굴에 대해 혐오강박을 주입하믄서. 해서 하나 있던 형을 포함, 모든 가족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망한 이후, 가뜩이나 외진 집에서 그는 완전한 '혼자'였다.

61세의 에디 게인 (왼쪽)

여러 연구에 의하면, 어머니는 그에게 있어 유일한 친구이자 절대선이었고 그녀가 강요한 금욕생활이 일반적 사회생활을 가로막았다는 거다. 그가 주로 애호한 시신과 피해자는 늘 중년여성이었다. 이들로부터 떼어낸 피부를 입고서 자신만의 의식을 치러온 거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정신병원 수감 생활이 퍼펙트 그 자체였다고 주치의는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정도의 환자만 있다면 지들 정신과의들은 할 일이 없었을 거라고 호들갑을 떨더라. 결과적으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산 삶이나 이후, 각종 페티시즘에 점철된 삶 등 자유인으로 살 때 보다, 격리되어 감시받은 삶을 훨씬 더 행복해 했다고 한다. 아씨 기분 더럽게 착잡해진다.

그는... 악마였을까, 아님 피해자였을까?


 테드 번디(Ted Bundy 1946.11.24~1989.1.24)

1974년부터 79년까지 활약한 테드 번디는 워싱턴, 유타, 콜로라도, 플로리다 등지에서 여성들을 살해했다. 정확한 살인 건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수감 중 자백을 토대로 30명에서 100명 이상까지도 추정하고 있다. 똑똑하고 고학력에 사교적이며 매력적인 외모의 이 인간... 혹시 재판 중에 자신의 팬과 결혼한 사형수 야그 어서 들은 적 없으신가? 바로 이 작자 되겠다.

대학에서 우수학생으로 교수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심리학에 뛰어난 실력을 보이던 테드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여친한테 채인 데다가 출생의 비밀까지 알아버린 후라고 많이들 그러더라. 자신의 누나가 실은 친모였고 부모라 알고 있던 양반들은 조부모였던 것... 이거 드라마 <빠리의 연인>이 슬슬 걱정된다. 박신양 혹시 연쇄살인범 되는 거 아닌가 몰라~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니라 잔혹쓰릴러였군, 이 드라마...

어쨌거나, 1974년 캐롤 대런치라는 여성의 유괴혐의로 유타에서 체포된 테드는 15년 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콜로라도주에서 기소한 살인혐의로 다시 심리를 받다가 두 번의 시도에 걸친 탈옥에 성공한다. 이후 미국 전역을 누비며 강간살해를 저지르는데 그 수법이 참으로 악랄해마지 않았다. 일례로 플로리다의 한 희생자의 시신에는 험학한 성폭행 흔적과 함께 국부에 헤어스프레이가 꽂혀있었으며 몸 구석구석이 심하게 물려 있었다 한다. 유두 한 쪽이 거의 떨어져 나갔을 정도로 말이다. 이런 씨바...

본 기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희생자를 교살해서 신체를 절단한 뒤 푹 고아 먹는 놈이 알버트 피시를 위시한 이런 자식보다는 차라리 훨 났다고.... 희생자가 산 채로 공황과 고통을 견디다 죽어가는 건 듣고 있는 나도 정말 견디기 힘들다고 말이다. 젠장...

 유죄평결에 어필하는 번디

테드 번디는 1978년 도주 2년 만에 붙잡혀 플로리다에서 발생한 두 건의 살해혐의로 다시 법정에 섰다. 그는 결백을 주장했고 배심원은 유죄를 인정했다. 이후 항소하여 일단 처형일을 미루고, 이번에는 유죄를 시인하며 '정신이상'을 주장했다. 6년 여의 공방 끝에 연방대법원은 항소를 기각했고 1989년 사형이 집행됐다.

그를 향해 온 미디어의 관심은 지대하다.

두 번의 탈옥과 재판정에서 올린 결혼식, 미디어가 좋아할 만한 외모와 지적 능력 등 그의 삶에 있어 드라마틱한 요소들은 여러 모로 주목을 받기에 쉬운 조건들 되겠다. 또, 그 자신, 심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바, 수감 기간 동안 FBI나 검찰 등에 '그린리버 연쇄살인범'의 심리나 양태를 자신의 경험과 더불어 제공하는 등 수사협조에도 적극적이었는데 이런 루트를 통해 그에 대한 분석 작업도 활발했던 것이다.

사형 전날 이루어진 한 기독교 단체의 짱 '돕슨 박사'와의 티비 이너뷰에서, 그는 폭력적인 포르노그래피가 자신의 범죄 행위에 실제적 영감을 주었다며, 미디어의 폭력물들, 특히 성적인 폭력을 담고 있는 것들이 뭇소년들을 '테드 번디가 되는 길'로 내몰 것이라 말했다 한다. 미국은 아시다시피 사형 바로 전에도 주지사 전화 한 통이면 사면이 된다.

이 자가 의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고.... 경험에 바탕을 둔 진정한 충고였나 아님 주지사의 사면장이었나?
 

 제프리 다머(Jeffrey Dahmer 1960.5.21~1994.11.28)

불우했거나 학대받은 어린 시절만이 연쇄살인의 동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걸 증명하는 작자가 바로 제프리 다머다. 잘 배운 부모와 유복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해, 1978년부터 1991년까지 최소한 15명을 살해하며 식인행위와 시신뻑킹을 즐긴 다머는 장하게도 '연쇄살인범'의 대명사가 됐다.

주로 젊은 흑인 동성애자들을 대상으로 성폭행 후 살해하는 수법을 즐겨 쓴 다머의 아파트에서는 커다란 염산통에 담긴 부패된 주검들이 발견됐고, 냉장고에는 잘려진 머리들이, 촛불 제단 위에는 해골들이 모셔져 있었다. 91년에 집중된 그의 엽기살인 양식을 잠깐 들여다 보면,

일단 게이바 등에서 상대를 꼬셔서 집으로 데리고 온다. 야한 비됴 등을 보며 술이나 약물을 하다가 교살한다. 이후 시신을 상대로 성교를 한 뒤, 즉석사진을 찍어 기록. 그담에 상체를 갈라버렸다는데, 다머는 내장의 색채에 열광했고 방금 죽은 시체의 온기에 꼴렸다 전해진다.
그 후에는 각종 화학약품으로 여러 실험을 한 뒤, 염산으로 깨끗이 녹여 아파트 하수구나 화장실에 쏟아 부었다지... 맘에 드는 부위들은 물론 일종의 트로피로서 집에다 보관도 좀 하고 말이다. 성기는 포르말린에 담가두고, 머리는 푹 삶아 두개골이 빠지면 거따가 색칠을 했다나.... 글구 시체뻑킹에 열광하믄 보통 식인행위도 좋아라 한다고 한다. 다머네 집에는 인육을 보다 맛나게 먹기 위하야 각종 조미료와 연육제도 있었다구 한다. 얘네 냉장고가 무자게 유명했다는데, 스테이크감 모냥 썰어 얼린 사람고기가 잔뜩 쟁여있었기 때문이었다나 머라나~~

  

 다머의 냉장고를 옮기는 중

다머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희생자들을 늘 곁에 두고 싶어 그들의 자유의지를 제거하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그니까, 두개골 일부를 제거한 뒤 대뇌백질에다가 각종 화학약품을 떨구거나 해서 말 잘듣는 일종의 자동인간장치를 만들고 싶은 소망이 있었단다. 언제나 거부없이 잘 대주는 섹스 머신...

이 인간의 살인행각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잡혀 있던 한 피해자가 용케 탈출해 경찰에 신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바로 며칠 전에도 14살짜리 라오스계 소년이 극적으로 탈출해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번개같이 나타난 다머가 '19살 먹은 내 앤인데 좀 아프다' 머 이렇게 둘러대니 걍 게이커플의 사정인갑다 하고 경찰아자씨들이 집구경만 하다 돌아갔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하의가 벗겨진 채로 여기 저기 상처입고 공포에 질려 거리로 뛰쳐나온, 코네라크 신타솜포네라는 이름의 그 라오스 소년은 경찰에 의해 다시 다머의 집으로 들여보내짐으로써, 경찰이 두 번째 왔을 때는 이미 살해된 후였다. 아아...

 

코네라크 신타솜포네

제프 다머는 삼엄한 경비의 법정에서 유죄를 인정하고 정신이상 판정을 호소했다. 15명의 살해혐의 모두가 인정되어 총 936년형, 즉, 감형이 있다해도 영원히 종신형이 되는 판결을 받고 수감됐다. 이후, 교도소에서 모범수로 활약하다가 살인죄로 복역 중이던 흑인 동료죄수에게 얼굴이 짖이겨지며 살해당했다.

당 사건은 엽기공력도 공력이려니와, 이혼가정이긴 해도 성장기 피학대 경력이 없고 평탄하게 자란 인간도 잔인한 연쇄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며 대단한 발견인 양 호들갑을 떠는 학계와 언론계에는 의미가 꽤 크다 하겠다.
 

 해럴드 쉬프먼(Harold Shipman 1946.1.14~2004.1.13)

15명의 환자들을 약물로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2000년 1월 종신형을 선고받은 영국의 내과의 해럴드 쉬프먼은 2004년 자신의 감방에서 목매 자살할 때까지 살인 동기를 밝히지 않았다. 유죄 또한 인정치 않았고....

2002년에 나온 보고서에 의하면 그러나 최소 215명에서 최대 459명까지 그에게 희생되었을 거라 추정되는데, 희생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양호한 건강상태를 가진 중년 여성이었다. 환자가 어케 건강하냐구? 영국에 있는 정통한 소식통 P씨에 따르면, 영국의 의료체계는 우리와 많이 달라서 1차 의료기관인 GP
(General practice)에 각 지역민들이 등록을 하고 GP에 근무하는 의사들이 주민들의 주치의가 되어 치료할 거 치료하거나 상급의료기관의 트랜스퍼를 결정한단다.

쉬프먼은 바로 GP의 의사였다. 즉, 감기 걸려 쉬프먼을 찾아간 환자도 그의 살해대상일 수 있던 거다. 하여 그의 약물살인은 명백한 의지를 가진 범죄가 되는 거고, 주치의와 환자라는 신뢰의 관계가 여지없이 무너진, 가혹한 살해라 할 수 있다. 이런 요소들로 인해 전 영국민들이 느낀 충격이 실로 증폭되었던 거고.

능력 있는 의사였으나 수련의 시절부터 약물 남용에 대한 문제를 지적받던 해럴드 쉬프먼의 살해동기는 여전히 미스테리다. 다만, 희생자들 대부분이 중년 여성이라는 점에서 어린 시절 암으로 사망한 그의 어머니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할 뿐. 흥미로운 점은 '국립의료센터' 회원자격이 유효했으므로, 60세 이전에 죽은 그의 연금을 피부양인인 부인이 탈 수 있다는 것이다. 쉬프먼은 58번째 생일 바로 전날 자살했다.
 

 게리 리언 리지웨이, 그린리버 킬러
(Gary Leon Ridgway 1949.2.18~생존)

리지웨이를 소개하기 전에 먼저 그린리버 살해사건부터 말씀드리겠다. 미국 워싱턴주 켄트 지역의 그린 강 주변에서 1982년부터 1984년 사이를 피크로 대략 49건의 사체들이 발견되는데, 당 살해사건의 범인들을 총칭하는 말이 바로 그린리버 킬러였다. 피해자 대부분은 매춘여성 혹은 가출청소년이었다.

자, 게리 리언 리지웨이라.... 82년과 2001년에 매춘관련으로 체포된 바 있는 전직 트럭도장사 리지웨이는 83년에 당 연쇄살인의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고, 87년 경찰이 체모와 타액을 확보는 했으나 디엔에이 분석기술이 도입될 2001년까지 경찰서 증거보관실에 쳐박혀 있어야 했다. 드뎌 2001년, 이 증거물들이 리지의 디엔에이와 일치함이 밝혀짐으로써 리지웨이는 체포되어 기소됐다. 씨바, 화성연쇄살인사건보다 훨씬 더 전에 발생한 게 그린리버 킬링이다.

어쨌거나, 1급 살해혐의로 기소된 리지웨이는 2003년 5월에 이른바, 플리바겐(Plea bargain)이라는 선고 형량 에누리제도를 통해, 사형을 면하는 조건으로 그간의 살인들을 자백했다. 경찰이 당 연쇄살인의 희생자로 추정한 49명 중에서 42명을 지목했고, 8건의 또다른 살인을 진술했다. 총 48건 되겠다. 그해 12월 킹카운티 상급법원은 리지웨이에게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의 희생자들은 대부분이 매춘여성이었는데 세가지 이유를 대더라. 첫째, 이들 여성을 증오하고 둘째, 차에 태우면 별다른 의심없이 잘 타주고 셋째, 이들이 사라졌다고 해도 금방 수사가 되는 것도 아니며 혹은 수사대상이 되지도 않는다는 점.... 이란다.

48명을 죽인 인간에게 한 두명 죽인 인간보다 더 가벼운 선고가 내려지는 것에 대해 찬반격론이 펼쳐졌으나 결국,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러한 플리바겐이 성사됐다. 진실? 그게 그리 중요하냐구?

그린리버 연쇄살인 희생자 및 실종자들 중에서

희생자 가족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추가 살인사실을 자백받는 것은 사건이 영원한 미궁으로 빠지는 것보다 훨씬 가치있는 일이라는 점, 그리고 신원미상 희생자들의 신분을 밝혀내고, 실종자명단을 훑어 살해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들이 이런 거래를 가능케 했다.

하지만 법질서 수호는 차치하더라도, 향후 많이 죽일수록 사형을 안당할 가능성이 높아짐을 만방의 연쇄살인범 혹은 후보자들에게 선언한 이 양날의 에누리는 논쟁적이지 않을 수가 없음이다.

또한 그의 살인행각이 82-84년에 집중됐다가 90년, 98년에 있었다는 점이 열라리 의심스럽다는 주장도 있다. 보통 연쇄살인범의 특성상 일케 띄엄띄엄 범행을 저지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모든 살인을 킹카운티 안에서 벌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관할법정 이외의 곳에서 살인을 했다면 그쪽 검사가 공소제기를 할테니 말이다. 그의 플리바겐은 킹카운티 검사하고만 유효하자나. 48건의 자백으로 사형을 면한 리지웨이... 그 어느 연쇄살인범보다 그는 더 지능적이지 않은가? 씨!



 
아~~ 여기까지다. 물론 이밖에도 명망 두터운 연쇄살인범은 많더라. 소개한 기준은 그냥 본기자 판단에 중요하다 싶어서다.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를 살해해 한층 더 유명해진 찰스 맨슨이나, 안데스의 몬스터로 불리우며 세 나라에 걸쳐 300명 이상의 아동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페드로 로페즈 등 시각에 따라서는 더 기념비적이고 역사적이며 그래서 반드시 한번 더 분노해줘야 할 사건들도 많을 수 있음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연쇄살인사건이 언제부터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일까?

@ 1932년 이관규 사건

신문이 보급되기 시작하던 근대에 들어서 알려진 최초의 연쇄살인 사건은 1929년 남자 어린이 2명을 성폭행 후 살해한 이관규 사건이다.

범인은 결혼해서 아이를 다섯명이나 둔 30대 후반의 평범한 가장이었고, 전국을 도망다니다 1년 6개월 뒤 자신의 집에서 붙잡혔다.

 그러나 1932년 12월 7일자 중앙일보 보도를 보면 이관규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고, 그 이후의 자료는 확인이 안되고 있다.



1932년 12월 7일중앙일보 보도 제목'증거가불충분하다하야'



@ 1975년 김대두 사건

 1975년 8월 12일 새벽 전남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이 55일동안 발생한 9차례(17명 사망, 3명 중상, 3명 강간)에 걸친 살인사건의 시작일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 사건의 범인인 김대두는 전남에서의 살인사건을 시작으로 무안군, 서울시 면목동, 경기도 수원, 양주, 시흥 등 전남과 서울, 경기 일대를 휩쓸며 무차별 살인을 저질렀다.

살인의 동기도 돈이 아니었던 것이 17명의 목숨을 앗아갈 동안 모두 2만6천8천원을 빼았았을 뿐이었다.

김대두는 피묻은 옷을 세탁하러 왔다가 세탁소 주인의 신고로 붙잡혔다.

평소라면 신경쓰지 않았을 정도로 적은 피가 묻어있었지만 당시의 상황이 이 정도도 심각히 의심받을 정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고가 들어왔던 것이었다.

형사가 출동하여 김대두를 추궁했지만 크게 의심할 사항은 없었다. 그러나 형사와 같이 식사하러가서 김대두는 스스로 살인사건에 대해 자백하면서 김대두는 연쇄살인범으로 체포되었다.

워낙 혐의가 뚜렸했기 때문에 쟁점도 별로 없었고, 결국 76년 3월 18일 김대두는 항소심 판결에 상고하지 않고 사형이 확정된다.

김대두는 76년 12월 28일 사형되었고 마지막 말로 전과자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사회가 되면 좋겠고 초범과 재범을 분리 수용하고 그리하여 초범이 범죄를 배워 나오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김대두-키가 160Cm가 안되고 매우 마른 체형이었다고 한다.

현장 검증하는 김대두


@ 1986년 김선자 사건

1980년대의 살인사건들은 그 당시 군사정권 막바지였던 사회환경이 아니었더라면 발생하지 않았던 사건들이었다.

지능범들이 아니라 누구나 의심갈만하게 사람을 살해했는데도 불구하고 군사정권 시절 모든 경찰력이 시국사범을 잡기 위해 동원되어 사건은 크게 번져갔다.

 


한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이 었던 김선자 사건은 케이블TV의 KPSI에서 드라마화 되기도 한다.


1986년 11월 서울 중구 신당동의 대중목욕탕 탈의실에서 40대 후반의 여성이 사망한다.

이름은 김기순(49) 사인은 청산가리 중독이었다. 뒤늦게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탐문수사를 벌였으나 특별한 목격자나 범죄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이웃에 사는 김선자(49)씨가 함께 목욕하러 가자고 불렀다는 가족들의 진술에 따라 조사하였지만 혐의점이 없었다.

1987년 4월 4일 용산역 근처를 지나가던 시내버스안에서 50대 여인이 청산가리 중독으로 사망하였다.

김선자가 같은 계원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은밀히 내사했지만 당시 모든 경찰 인원들이 시위 진압과 시국 사범을 잡기 위해 차출되는 바람에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한다.

1988년 3월 딸하고 같이 친척 회갑 잔치에 다녀오던 김종춘(73)옹은 서울로 오는 시외버스 안에서 사망한다. 노령에다 여러사람이 있는 버스에서 발생한 일이라 심장마비에 의한 병사로 처리된다.

1988년 4월29일 언니와 함께 시내버스를 타고 가던 김문자(43) 언니가 준 건강음료를 마시고 사망한다. 김문자씨 역시 병사로 처리된다.

1988년 8월 8일 좋은 집을 싸게 주겠다는 김선자씨의 제안을 듣고 온 12촌 사촌누이 손미림(46)씨는 선자씨가 준 건강음료를 마시고 사망한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경찰은 김선자씨를 체포하였다.

김선자씨가 활동하던 시기는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으로 이어지는 시기였고, 공안 정국에 경찰 총동원령이 내려진 비상시국이었기에 이어질 수 있었다.



@ 심영구 사건


최초의 사건 발생은 성남 미장원에 발생했다. 3년 이상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심영구는 출소 후 가지고 있던 돈을 탕진하자 미장원에 칼을 들고 들어가 이씨(23)를 찌르고 달아난다. 이씨는 이웃의 도움으로 살았지만 어두워 범인의 인상착의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날 새벽 귀가하던 심영구는 평소 사이가 안 좋았던 술집주인 신씨(42)를 살해했지만 목격자는 없었다.

5일후 새벽 귀가중이던 술집주인 김씨(42)를 살해 역시 목격자는 없었다.

두달 후 역시 같은 방법으로 김씨(43)를 살해 역시 목격자가 없었다.

이후 5건의 살인 사건을 저지른 심영구는 성탄절에 슈퍼마켓에 들어가 여주인의 아들을 살해하고 도주하던 도중 슬리퍼 한짝을 현장에 떨어뜨렸다.

이 슬리퍼를 대조하여 심영구를 검거한다.



단신으로 처리된 심영구 사건


이 사건은 공안시국으로 인해 짤막하게 단신으로 처리되며 사람들의 뇌리속에 잊혀져 간다.

200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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