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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고지전 역사에대해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3,961 작성일2017.08.20
고지전 영화말고 역사에대해 정리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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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고지 영웅  김만술(金萬述) 육군 대위를 5월의 6ㆍ25전쟁영웅으로 선정.

1947년 6월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부산에 주둔하던 제5연대에 배속된 김만술은 1948년 ‘여순 10ㆍ19사건’ 진압작전과 태백산맥 등지에서 준동하던 공비토벌작전에 기관총 사수로 참여하였다.

6ㆍ25전쟁이 발발한 후 평양 탈환작전을 비롯한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탁월한 지휘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53년 7월 15일 특무상사에서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되어 제1사단 제11연대 소대장으로
부임하였다.

부임 당일 소대원 35명과 함께 베티고지를 지키고 있던 2소대장 김만술 소위는 야음을 이용해
인해전술로 공격해오던 중공군 제1군 예하 제1사단의 2개 대대 규모의 적을 맞아 5차례의 공방전을 벌이면서 13시간 동안 치열한 혈전을 전개하여 적 314여명을 사살하고 450여명을 부상시키는
전공을 거두었으며,

 

이 공훈으로 미국 십자훈장(‘1954년)

 

 

에 이어 국군 최고의 영예인 금성태극무공훈장(1954년)을 수여받았다.

베티고지는 임진강 지류가 남북으로 흐르는 가운데 표고 120~150m의
봉우리 3개로 형성된 전초진지로서 방어를 담당하던 제7중대 1소대는 3일 동안 이어진
적의 공격으로 전력이 절반 이하로 감소되어 더 이상 버틸 능력이 없었다.

 

 




이에 따라 진지를 인수한 김만술 소위의 제2소대는 이미 서봉을 장악한 적과 교전하며 진지를 보수하고
경계를 강화하던 중 야간에 대대규모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수류탄을 투척하며 적을 저지하던 김만술 소위는 중과부적으로 전세가 불리함을 판단하고
소대원을 유개호 속으로 피신시킨 후 진내사격을 요청하여 적을 격퇴하였으며,
퇴각했던 적이 짙은 안개를 이용해 다시 공격을 가해오자 수류탄전과 백병전을 통해 이를 격퇴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김만술 대위가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고 있다.(좌측은 흉상과 전공기)






미군도 이런제도가 있습니다

미육군의 오디머피 (영화배우)는 일등병으로 유럽전선에 참전 이등병에서

27개월 동안 참전해 2차대전 당시 미군병으로서 가장 많은 훈장을 수여받은 것으로 유명한 미군 병이다.

대전 당시 미군으로 수여받을 수 있는 최고 훈장인 명예 훈장 은성 훈장등의 군인 훈장, 국가 기장이나 프랑스와 벨기에의 훈장과 수여장 5개 등 총 33개의 훈장을 받았으며, 이등병에서 중위로 진급했다

전역후

배우로서 33개의 서부영화를 포함한 44개의 영화에 캐스팅 되었으며 특히 자서전을 기초로 제작되어 한국에서도 개봉된 적 있는 <To Hell and Back>으로 유명하다. 컨트리음악 작곡가와 목장 사업가로도 활동했다.

1971년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여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으며, 그의 묘지는 존 F. 케네디의 묘지 다음으로 방문객의 수가 많다


오디 머피의 사진과 서명

 

 

35명으로 2개대대를 방어할수있었든 힘은 전투력이란 투지와의지가 작용했겠지만 전쟁 수행 밥법중 진내사격이란 방법이잇습니다 즉 진지내 곡사포 사격을 하라는것인데 이는 죽음을 무릅쓰고 너죽고 나죽자는식의 방어전 최후 결전방식입니다 백병전도 인간의 체력의한계가 있어 이때는 아군을 전부 참호안에 엄폐시키고 아군 포병 사격을  진지내 포격하여 적군을 죽도록하는방법을 말합니다

진내 사격 진전 사격이란 방어전술중 최후의 수단을 말합니다 아군 머리위에 포탄을 쏱아붓는것입니다 이때 참호안에 있지않은 적군을 전부 제거 할수있는 최후수단이며 최종수단이며 확실한 퇴치법입니다

이고지전은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 포로석방  휴전회담 결렬등 1953년 휴전 막바지에 일어난 전투입니다

 

베티고지를 점령사수하지 않았드라면 현재 휴전선은 아마도 더 남쪽으로 내여왔을것입니다

한국전쟁에 특별한 무공자 입니다  기관총 사수에서  상사로 소위로 중위로 대위까지 특진에 특진을 거듭한  전쟁 영웅입니다

 

 

 

 

 

다음은 전사 인용합니다

베티고지 전투는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이후 휴전회담이 결렬되면서 전개된 1953년도 서부전선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목전에 두고 전 전선에서는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서부전선의 요충지였던 베티고지(Betty) 전투는 휴전후 그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중요성으로 인해 국군과 중공군간에는 이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치열했다.


베티고지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북쪽에 위치한 고지로서그 주위에는 임진강이 허리띠처럼 둘러 흐르고있는 작전상의 요충지였다. 만일 베티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휴전이 성립될 경우, 주 저항선에서 남쪽으로 2㎞ 이상이 비무장지대로 결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국군은 그만큼 임진강 남쪽으로 물러나야만 되었다. 이는 군사적·지리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초래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베티고지를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베티고지는 소대장 김만술 소위와 제2소대원의 임전무퇴의 감투정신에 의해 사수되었다.


<김만술 소위에게 부여된 베티고지 사수 임무>

베티고지의 영웅인 김만술 소위는 1929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베티고지 전투의 김만술은 영웅이었다. 일본 오사카 공업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 6월 경비대에 입대하여 제5연대에 배속되었다. 입대 후 그는 여순 10·19사건의 진압작전과 태백산맥 등지에서 준동하던 공비토벌작전에 기관총 사수로 참전하는 등 약 6년여의 기간을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평양 탈환 작전 등 주요전투에서 탁월한 지휘능력을 인정받아 1950년 7월 15일 특무상사에서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베티( Betty)고지 전투상황도>


임관 후 김만술 소위는 7월 15일 제1사단 제11연대 제2대대 제6중대 제2소대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베티고지 사수임무를 부여받았다. 7월 15일은 휴전을 앞두고 중공군이 벌인 막바지 공세인 이른바 7·13공세의 사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7·13공세는 중공군이 휴전을 앞두고 중부전선의 금성돌출부의 만곡부를 없애기 위해 퍼 붓은 최후의 공세였으나, 이러한 불길은 서부전선 임진강 대안의 고양대 일대와 노리고지를 감제하는 중심부인 베티고지까지 불어 닥쳤다. 당시 이 지역은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 제2대대의 전초진지로서 대대에서는 중공군의 발악적인 공격을 저지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동안 베티고지 사수를 위해 대대에서는 사흘 동안 3개 소대를 투입했으나, 하룻밤만 지나고 나면 중공군의 공격에 반수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날이 새기도 전에 새로운 1개 소대를 다시 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김만술 소위가 지휘하는 제6중대 제2소대가 4번째로 이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김만술 소위가 임무를 부여받았을 때 베티고지는 세 개의 봉우리 중 중앙봉과 동봉은 아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중앙봉에서 직선거리로 10m도 안되는 서봉은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김만술과 제2소대의 베티고지 사수작전>

1953년 7월 15일 14:00, 김만술 소위는 아직 얼굴조차 익히지 못한 34명의 소대원들과 함께 베티고지 사수를 위해 중앙봉과 동봉(東峯)을 점령했다. 김만술 소위는‘목의 가시’와도 같은 서봉(西峯)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지금까지 국군이 당하고만 있던 수동적인 자세를 뒤집어 국군의 사기를 드높이는 한편, 중공군에게 매서운 맛을 보여주기 위해 중대장에게 서봉에 대한 공격을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 당시 베티고지에서는 많은 사상자로 인해 병사들은 고지에 오를때“오늘은 몇 명이 전사할 것인가”를 걱정하게 되었고, 상급부대도 다음에는“어느 소대를 투입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정도로 사상자가 많아 국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특무상사로서 실전 경험이 많았던 김만술 소위는 병사들에게 먼저“아무리 치열한 포탄 속에서도 침착하고 민첩하게만 행동하면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김만술 소위는 서봉을 기습 공격하여 적병 5명을 사살하고 8부 능선까지 공격하여 소대원들의 사기를 올린다음 야간에 적의 기습공격에 대비하여 교통호의 모래를 파내고, 무선과 유선을 세밀히 점검하고, 시계를 일일이 확인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중공군의 야간공격을 받았다.

<13시간 동안 19번이나 빼앗고 빼앗긴 혈전속에서 베티고지를 끝까지 사수한 김만술 소위의 동상>


김만술 소위는 중공군 1개 대대 규모의 공격에 맞서 수류탄과 소총, 백병전, 그리고 4차례의 포병 진내사격을 요청하며, 사선에서의 혈투를 벌였다. 이렇게 13시간이나 진행된 격전 속에 19번이나 뺏고 빼앗기는 접전을 치룬 결과 제2소대의 생존자는 소대장을 포함 단 12명뿐이었다.7월 16일 날이 밝은 뒤 김만술 소위와 생존한 소대원들은 중앙봉과 동봉 일대에 퍼져 있는 메케한 화약내음속에서 중공군의 시체와 엉켜 처절한 모습으로 쓰려져 있는 소대원들의 시신을 잡고 몸부림치며 절규했다. 이 때 확인된 중공군의 시체만도 350여구에 달했고, 국군은 23명이 전사했다. 김만술 소위와 제2소대원은 치열한 혈투속에서 왕성한 책임감과 감투정신으로 베티고지를 몸으로 지켜냈다.


<휴전과 베티고지 영웅들>

김만술 소위의 제2소대가 목숨을 바꿔가며 사수했던 베티고지는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면서 휴전선 북쪽에 포함되었다. 포연속으로 사라져간 전우들의 영령이 있다면 통탄할 일이었다. 6·25전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치열했던 베티고지 전투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1953년 7월 23일 이 전투의 전공으로 이강로 하사는 충무무공훈장을, 김순구 중사와 김흥규 중사는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김만술 소위는 휴전 이후인 1954년 2월 21일 서울 운동장에서 유엔군총사령관인 테일러 대장으로부터 미국최고 훈장인 십장훈장을 수여받았고, 그해 9월 2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김만술 소위는 대위까지 진급한 후 전역했다. 그러나 베티고지 영웅 김만술 대위는 1991년 60세로 영면하여 사랑하는 부하들의 곁으로 갔다.

 

 

2017.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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