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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박정희의 진실은 뭐죠?
rudr**** 조회수 16,201 작성일2007.08.10

 제가 아는 박정희는 일제때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이 스스로 만주행을 선택하여

만주에서 일본군의 장교가 되었다는 것 과 해방후에는 남로당의 군책을 맡다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자 자신이 아는 사회주의자는 모조리 실토하고 자신만 살아남은 비겁한 자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독재에 경제발전이라고는 이미 이승만정권 때부터 계획이 짜여져 있던 계획을 노동자들을 혹사시켜가며 실행한 것 뿐이라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지

식인뒤져보다 보면은 진실은 그게 아니며 박정희는 의로운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뭐가 진실이고 뭐가 가짜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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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어보세요...

 

 

1. 적극적 친일행위자만 해당된다 : 을사오적등 대표적 친일파들로서 이부분에 대하여 진보좌익과 보수우익 이견이 없다.

2. 일제시대 공직에 있었던자도 포함된다. : 이부분에 대하여 논란이 끝이 없다.

3. 창씨개명한자도 포함된다 :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가외에는 거의 모든 분들이 해당되는바, 창씨개명 자체로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게 좌,우의 공통적 입장


위의 세가지 분류를 본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2번에 해당됨에 따라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연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없었던 사람들의 시대를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고 심판할수 있을까?

많은 국민으로부터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시절 좌파를 제외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고 본보기로 삼아 기리며 추모했다는 것은 두말 할수없는 사실이다

민생을 팽개친 노정권의 과거사타령에 반감을 가진 많은 국민들은

일제하 중국이나 만주로 탈출하여 항일독립투쟁이나 지하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군인 뿐만 아니라 경찰이나 공무원 및 그시대 언론도 친일이고 법조인도 친일 사업가나 예술가 학자도 친일이란 식이 아니냐?  대체 싫어도 일제가 점령한 이땅에서 태어나고 살아야 했던 그 시대 사람들은 친일이란 소릴 안들으려면 뭘 할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전부 일제 식민지 지배에 큰건 작건 협력한 게 아니냐?  (일제가  철도를 통해 조선에서 수탈을 많이 해갔다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인데 그럼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은 친일파 중에서도 악질인가?)

그당시 반체제 지하활동을 빼고 식민지 지배 권력에 대한  대립과 반목으로 그어떤 사회생활을 조선땅에서 공식적으로 할수가 있을까?

아예 시골에서 머슴 아니면 농사나 지어야 했겠는가?

친일이냐를 따지자면 지위 고하에 막론하고 자신들의 부의 축적 자기 일신의 영달과 출세를 목적으로 그 시대 일제의 힘을 등에 업고 능동적으로 같은 민족을 수탈하고 핍박 탄압하는데 앞장섰느냐 아니냐를 객관적 증거에 근거해 따져야한다는 것이 반론으로 제기하는 것이다.


 

훌륭한 독립투사의 모델들을 제시하고 "보라 박정희는 이렇게 살지 않고 만주군이 됐으니깐 '친일파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렇게 비난하는 당사자들이 그때 박정희와 같은 시기에 태어났으면 모두 목숨을 당연히 내걸고 독립투사로 나서 일제와 싸웠을까? 하는 의문을 낳을 뿐이다.

진짜 나쁜 놈은 저렇게 훌륭한 삶을 산 위인을 두고 나보다 훌륭한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며 업적을 숨기고 악의적으로 모함하고 음해를 하는 세력들이다.


박 대통령은 위인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모셨고 후세가 마땅히 본 받아야 된다며 사당을 짓고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언제 그런 분들을 홀대하고 푸대접한 적이 있는가?

또한 최고 권력자로서 북괴 김일성이나 김정일처럼 자신의 과거경력을 미화하지도 않았다.

[김승곤(92)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비밀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세계일보-]

빨갱이들이 못 마땅할지라도 공산주의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일제와 대립하고 투쟁한 사람들은 대한민국 입장에선 진짜 독립운동가들이 아니다. 저런 인물들한테 독립투사라고 훈장을 준 노무현 대통령은 정말 대한민국의 이념으론 이해할수가 없는 인물이다.

(진보좌익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둘 다 생산 수단 공공화 및 중앙 집중적 계획체제에 바탕을 두고 사용을 위해 물건을 생산하는 체제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 바로 성장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것은 새로운 사회의 첫번째 형태이며. 공산주의는 여기서 더 발전된 더 높은 단계의 사회주의라 규정함.)

왜냐면 우리 대한민국의 헌법은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이어받는다"라고 명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절대 공산주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평화적 남북 통일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반공의 정신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상해 임시 정부는 수립 당시부터 공산주의자 집단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이 목적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제일의 목적이 한반도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는 것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이념화 되어 민족이란 이름으로 포용할 없다. 따라서 김구 선생님과 함께 상해 임시 정부는.. 공산주의자는 물론이고 그 활동을 돕는 자는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간주하고, 임정에서 축출하였으며, 대화의 상대로 여기지 않았다.

수많은 역사적 사실 중에서 한가지 증거가 있다. 상해 임정에는 성재 이동휘란 분이 계셨다. 이 분은 임정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내신 분이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군자금이 부족하여 활동 반경이 제한되어 있었다. 이동휘는 이들에게 몰래 임정의 자금을 지원 하였다. 그 사실이 밝혀지자 임시정부는 이동휘 국무총리를 해임 조치를 하였다.)

 

*[노무현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고발


일제 패망과 함께 김일성은 소련군을 등에 업고 소련군 대위로 평양에 입성하여 38선 이북을 장악하였다. 곧바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감행한 김일성은 헤알리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명을 앗아 갔으며 골 깊은 민족 간의 갈등을 유발하였다. 전후 김일성은 중공군의 참전 댓 가로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절반을 중국에게 헌납하였다. 노무현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일성, 김정일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고 있으며 얼빠진 인간들은 보란 듯이 혁명열사 능을 참배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는 6.25동란 당시 북한의 부수상을 역임한 1급 전범이다. 좌파들은 박정희대통령의 현존하는 기념물을 없애지 못해 안달을 하면서 민족의 원흉 홍명희의 생가를 복원하려는 천인공노할 음모까지 꾸미고 있다.


여운형은 일제 말(1943년) 수차에 걸쳐 일제의 학병지원을 독려한 당시의 신문기사가 발견되었다. 또한 일제에 전향서를 제출하고 황국식민서사를 한 명백한 친일파이자 남한 내 공산주의의 거두였다. 이런 여운형에게 노무현 정부는 특별법까지 제정하여 2005년 3월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그당시에 군인이 된 표면적 형상에 집착하여 무조건 친일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 청년 박정희가 교사직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이유에 대해 설명하자면.

어린 박정희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바로 나폴레옹 전기였다고 한다.

동기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소년 박정희는 여러 사람들이 쓴 나폴레옹 전기를 죄다 읽으려고 했다고 한다 '삼국지'에 빠진 소년들이 처음에는 되풀이하여 읽다가 나중에는 저자를 바꾸어가면서 읽는 것처럼 말이다. 청소년시절부터 군사학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다고 할수 있었다.

근본적으로 본다면 당시에 일선 소학교 교사로서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가며 어린 제자들에게 한글을 교육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등  평소 일본에 대해 자꾸 반항적인 성향을 보이는 요주의 인물 박정희에 대하여 경찰,행정,학교를 장악한 일본인들의 집요한 괴롭힘과 억압이 직업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군도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중략)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여제자 이순희씨 증언· 정운현의 ‘실록 군인 박정희’ 78쪽)


박정희에게 배운 이영태는 이낙선(5·16군사혁명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비서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은사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를 가르쳐주셨고 복도에 입초를 세우시고 우리 나라 역사를 가르쳐주셨으며 일본인 교사들과는 지금 생각하면 조국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자주 싸우시는 것을 목격했다’(조갑제 ‘박정희’ 79쪽)}


[ 교사시절 제자들의 증언 자료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1937-1940) 교사로 근무 ]

이영태씨의 증언입니다.

-"수업 시간에 우리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음악시간에는 황성옛터,심청의 노래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 주셨습니다. 평소 '전세계를 얻는다 할지라도 민족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망하는 길밖에 없다.우리는 남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기 위해서 앞으로 노력해야 한다.'라고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인 야나자와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 던진 일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중에 오가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후에 박선생님이 만주군관학교에서 군도(긴칼)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순사가 박선생님한테 뭐라고 했는데 박선생님이 오가와순사를 크게 혼낸 적이 있었습니다."-

정순옥씨의 증언입니다.

-"어느 일요일,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새로 오신 선생님(박정희)의 하숙 집을 찾아갔습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선생님의 방을 살펴봤더니 책상 위에 커다란 사진액자가 걸려 있는데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죽 달려 있는 사람인데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영웅 나폴레옹이라고 하시며 나폴레옹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4월 어느날 소풍을 가게 되어 고운 옷으로 갈아 입고 여러 가지 음식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선생님은 등산복 차림에 어깨엔 나팔을 메고 길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우리들이 장난을 치거나 줄이 흐트러지면 한 대씩 벌주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깊은 물에 빠져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순간 박 선생님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한참 만에 그 아이를 건져내어 인공호흡을 하여 살렸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그 동안 둑에서 발만 둥둥 구르고 계셨어요.

그리고 언젠가 박선생님과 일본인 교사 두분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일본인선생 한분이 조선여성은 예의가 없다느니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양동이를 이고 다니느니하며 우리나라 여자의 흉을 보았습니다.

이에 박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들 저 말을 잘 새겨 들어라.가난하고 무지하면 남에게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우리끼리 있을 때는 절대로 일본말을 쓰지 말고 조선말을 쓰자.´고 했을 때 우리는 철없이´조선말 쓰면 퇴학당하는데 왜 그러세요?´라고 반박한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

주영배씨의 증언입니다.

-"39년, 내가 보통학교 5학년일 때 조선어를 가르치며 박선생님께서는 ´이글을 잘 배워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박선생님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가정실습때는 문경에서 12키로나 떨어진 산골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셨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그 뒷모습이 산록으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습니다." -

전경숙씨의 증언입니다.

-"박선생님은 우리집으로 하숙집을 옮겼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어머니를 ´모친´이라고 불렀습니다. 식사는 가리는 것이 없었고 복장은 단정하였으며 출근은 빨랐습니다. 언제나 숙제를 내주시고 철저히 검사하여 평가를 해 주셨습니다.

월요일마다 공책을 점검하시고 글씨를 바르게 쓰도록 지도해 주시고 일기와 편지쓰기를 장려하셨습니다. 5학년 20명과 2학년 40명을 한 교실에서 복식수업을 하면서도 질서가 정연했습니다. 말은 간단명료하였으며 청소에 신경을 쓰고 유리창,천정의 거미줄,화장실 청소를 철저히 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청소도구를 왼비하여 가지런히 정리정돈되도록 하였으며 책상의 줄이 비뚤어지고 환경이 지저분 한 것을 매우 싫어 하셨습니다.

위인전 같은 이야기를 자주해 주시고´너희들도 이와같은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가을 소풍때 문경새재에 갔을 때는 제 1관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주시고 점심을 싸오지 못한 학생은 선생님이 도시락을 나누어 주시던 일, 발목을 삐어 걸음이 곤란한 학생을 업고 산길을 내려 오시던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

전도인씨의 증언입니다.

-"하루는 박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습니다.

그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 와 "오이 ! 교장 계신가?"하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습니다.

그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개 그런 언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등국민으로 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 있는 국민이 돼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해도 무례하기 그지 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사람이라면 나는 너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어서 나가봐 !"라고 내몰았습니다."-

황광실씨의 증언입니다.

-"박선생님이 우리학교에 오셨을 때 나는 6학년 반장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조선어를 가르치셨습니다. 역사 시조도 가르치고 학생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위인전을 많이 읽도록 하셨습니다.

박선생님이 일제 치하에서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것은 분명합니다.

학생 한사람을 복도에 세워 놓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 않나 망을 보게 했습니다.

그때 한 남학생이 천황의 사진에다 장난을 하고 교무실로 불려가 혼이 난 일이 있었습니다.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우는 따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게 한 것은 박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별명은 호랑이 선생님이었으나 자주 부르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졸업때 앨범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


[(제자들의) 증언으로 미뤄볼 때 박정희는 일본인에게 지지 않으려는 오기와 배짱이 대단했던 것 같다. 이런 그의 성향은 대구사범 학생,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 일제의 지나친 황민화 정책에 대한 반발심과 연결된다. 교사 박정희가 황민화 정책에 반발하며 조선인 학생들에게 나름대로 민족혼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제자들 증언에서 확인된다. -세계일보 "만주군 박정희를 보는 시각" 발췌-]


 

애초에 일황에 대한 개인적 충성심과는 상관없이  청소년시절부터 가졌던 나폴레옹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군사학에 대한 공부욕구와 말단 교사로서 현장에서 당하는 일본인들의 지긋지긋한 괴롭힘과 위협이 문경에서 계속 교사직을 갖고 일하기가  힘들어서 무상 대학급 교육기관인 만주군관학교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는 교사로서 의무복무를 마치고 만주군관학교 2기로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도 식민지 민족으로써 민족주의 신념을 키워 나갔다. 만주군관학교 역시 사범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족차별이 심해서 박정희의 민족감정은 부추겨질 수 밖에 없었다. 만주군관학교시절1기생 이기건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박정희에게 '자네는 왜 여기 왔는가'라고 물었을 때, 박정희는 "왜놈 보기 싫어 왔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일제는 곧 망합니다. 우리는 독립하고야 말 것입니다"라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섭준에 의하면, 박정희는 특히 2.26사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박정희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배울 것은 군사학뿐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고 했으며, 독립은 "혼자 사는 것이다. 남의 간섭 안 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발췌: 권장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지난번 민족문제연구소가 자행한 친일파인사명단발표는 어느 직책 직위 이상이면 무조건 반민족 친일파란 논리인데(군인은 소위 이상 경찰은 경사 이상 관료는 고등문관 이상으로 대상을 제한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열린우리당 인사들의 선친들을 뺀 친일파명단발표을 위한 것이며 박정희 대통령(소위)을 정치적 목적으로 넣기 위한 술책이라 보여지기 때문에 우리국민들로부터 많은 멸시와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독립군 색출 만주특무경찰,독립운동가들 검거해 고문한 헌병 오장,식민지 착취 상징 식산은행의 금융조합 서기,황국신민 의식화 및 수탈의 선봉 훈도야말로 식민지 지배와 수탈의 최일선에서 활동한 일제의 주구들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열우당 의원 부친들의 일제시대 행적- 1.김근태 의장의 부친은 일제시대에 훈도였다.(당시 훈도는 군수 월급과 맞먹었으며 권한도 대단하였다) 2.김희선의원의 부친 김일련(가나이 에이이치)은 만주경찰 특무로 독립군을 수도 없이 색출하여 잔인하게 처형하였다. 3. 이미경의원의 부친 이봉권은 일본군의 핵심 사찰요원인 황군 헌병오장으로 최고의 호사를 누렸다. 4.신기남 전 의장의 부친 신상묵(시게미쓰 구니오)도 헌병 오장으로 군림하며 독립군 색출과 잔인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다. 5.정동영 전 의장의 부친은 착취와 수탈의 최 일선 기관인 조선식산은행 산하 금융조합서기로 5년간 근무하였으며 6.25동란 당시의 행적도 불분명하다. 6.유시민장관의 백부는 면장이었고 부친은 훈도였다.


 

먼저 인터넷상에 유포하는 박대통령의 친일행적에 관한 글들의 내용을 검토 해 보겠다.

1)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혈서작성?

- 박정희 혈서설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박정희의 문경 보통학교 동료교사인 유증선(전 안동교육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이라는 사람이 입학연한에 걸린 박정희가 군관학교 당국을 감동시키기 위해 혈서를 쓰도록 했다는 근거불명의 루머가 마치 진실인 양 되풀이 전해지고 있지만 유증선의 말은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근거없는 혈서론은 박정희를 죽이기 위한 날조된 음모일 뿐이다.

박정희의 군관학교졸업식은 당시의 경성의 극장에서 뉴스로 보도될 정도로 다 알려진 사실이고 만주일보(1942년 3월 24일)에도 보도되었다. 친일파의 출세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선인이 1등을 했다는 것에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게 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박정희가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답사를 했다는 헛소문도 나게 된다. 실제는 일본인 오까미 쇼히꼬(岡見尙彦) 고야마 시게요시(小山重嘉) 두사람이 했다.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면 조선인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박정희의 혈서는 모든 만주국 신문이나 일본신문 어디에도 실려있지 않았다. 완전히 날조된 거짓말이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이란 혈서를 썼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의 출처는 전혀 근거가 없다. 진보좌익들은 만주신문(滿洲新聞)에 박정희가 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편지를 썼는데 그게 보도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혈서사진'을 보도한 신문기사가 있던지 적어도 '혈서를 썼다'는 신문기사가 있어야 하는데 기록 잘 챙기기로 유명한 일본이나 중국의 모든 도서관과 문헌 사료를 북한 김정일과 남한의 친북좌경세력 특히 친노방송과 언론들이 샅샅히 뒤졌지만 어디에도 혈서사진이나 혈서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럴듯한 말로 지어내 둘러대는 것이 바로 연변학계,연변자료 어쩌구 하면서 공갈치는 것이다. 말이 학계이지 그들은 완전 북한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2)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하였다?

3) 완전한 일본인이였다?

- 이런 글들은 주관적인 판단과 감정이 개입된 평가들로 객관적인 평가 자료가 될 수 없다.

한번 미운 사람 끝까지 밉다고 이와 반대되는 글들도 엄청 많다.(예들 들면 지난cbs 방송에서 박대통령의 제자들이 증언한 박대통령이 소학교 교사로 근무할 당시에 신념을 가지고 한 민족교육 및  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 이기청씨가 밝힌 만주군시절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몰래 빼돌린 일화등...)

님을 싫어하는 분들은 님을 극히 나쁘게 평가할 것이며, 님의 친구는 님을 극단적으로 좋은 평가를 할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항을 인용하여 평가하는 것은 맹인모상 즉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아전인수격 이다. 따라서 한사람에 대한 평가는 오직 객관적이며 실증적인 자료에 의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비판과 비난이라면 더욱 더 그래야 하는 게 아닌가?.


4)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했다?

- 이 주장 역시 허위 날조된 글이다.

이런 글에서는 박정희가 "요시"하며 독립군 토벌을 신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가 만주군으로 근무할 그당시 소속부대의 작전지역에는 독립군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박정희는 1944년 3월부터 1년 5개월간 만주군제8단(단장은 중국인 唐際榮)소속으로 근무지는 중국 열하 요즈음의 이름은 청더 (承德,승덕)지방 이였다. 이지역은 독립군이 활동하던 지역까지의 지금도 기차로 24시간이나 걸리는 곳이다.. 또한 박정희가 만주군에 복무한 1944년 당시의 만주독립군투쟁 항일기록을 보면 독립군은 1931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중국 내륙지방의 도시인 중경(중국표현으로 "충칭")으로 본부를 옮긴 뒤 거기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즉 1944년 당시에는 만주에는 독립군이나 광복군이 없었다.


 

[ 해방 전 박정희의 친일경력이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의 처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미’한 것이다. 박정희가 관동군 정보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군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 ]......생략......


 

그래서 이제는 팔로군을 마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항일군대처럼 교묘히 속이기 시작한다.

표면적으로 연변학계의 항일사료를 어쩌구하면서 내세우지만 말이 학계이지 그쪽은 완전 친북학계이다. 북한 김일성,김정일 공산주의자들의 일방적 역사왜곡의 동반자들이다.


여러분 팔로군이 무엇인가?  팔로군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한마디로 모택똥의 팔로 빨갱이 공산군이였다. 팔로군은 모택동이 장개석의 국민군에게 박살이 나자 마침 일어난 일본의 중국침략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국공합작을 이끌어낸 중국공산군의 또 다른 명칭이다. (본래 명칭은 홍군이라 불림) 모택동의 팔로군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다고 주장하는것은 소련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2차대전 막바지에 일본에 선전포고 했다는 논리와 똑같다, 더욱이 알다시피 팔로군은 중국통일후에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이 바뀌어서 6.25때 국군과 연합군을 공격한 바로 그 중공군이다. 한국의 양민들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바로 그 중공군이다. 팔로군이 독립군이라면 모택동은 독립투사이다. 이젠 고구려역사를 갖다바치는것도 모자라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하더니 중국 공산군이 대한민국 독립군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팔로군은 우리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독립투사들조차 공격해서 상당수를 죽여버리기도 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조선의 해방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전 세계 공산화를 지향하는 공산주의 그들만의 혁명을 추구했을 뿐이다.



5)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했다 - 간도특설대 활동?

- 이것 역시 허위 날조된 글로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 장교의 명단(出典 : 중국측 조사자료-"特設部隊", 1960, 66 - 84쪽.)은 아래와 같다.

박정희의 이름이 어디에 없다.

간도특설대(총79명) - 姜在浩 李元衡 朴鳳祚 金燦奎(金白一) 金錫範 金洪俊 宋錫夏 石希峯 崔南根 崔在恒 신현준 최경만 윤춘근 문이정 趙某(豊田) 김용기 태용범 백선엽 윤수현 이재기 김묵 豊田義雄 吳文剛 李淸甲 申奉均 海原明哲 白川** 金松壯明 伊原久 鶴原** 朴東春 李鶴汶 崔忠義 朴鳳朝許樹屛 金大植 方得官 洪淸波 金龍虎 金致斑 具東旭 朴春植 方太旭 孫炳日 劉仁煥 尹秀鉉 李德振 李龍昊 李東俊 李龍星 李準龍 李逢春 太溶範 崔在範崔炳革 李龍 金忠南 車虎聲 金忠九 柳益祚 朴春範 朴春權 曺昌大 洪性台 李東郁 廉鳳生 吳南洙 金萬玉 金鍾洙 李東和 朴蒼岩 朴泰元 李白日 金龍周 申然植李龍星 任忠植,, 馬東嶽, 桂炳輅, 全南奎


- 2004. 06. MBC에서 방송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만주군의 친일파 내용중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의 명단에도 박정희의 이름은 없었다.

(MBC 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길 바란다. 현재 박정희는 간도특설대 출신이란 저서에 대해 박대통령 유족이 고인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여 재판중이다.)


 

6) 변신의 달인 박정희는 한때 빨갱이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평소에 과거 남로당 사건에 연루된 것에 대해 잘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번 70년 7월에 김종신씨에게 말한다.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되는 분(이재복)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면서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하려다 그분이 자꾸 청하길래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였어. 나는 거기서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 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

여순반란사건 때(48.10월), 박정희 소령은 반란군 진압차 광주에 갔다 왔으며, 11월 남로당 혐의로 체포된다. 그리고, 위 내용의 자술서를 쓰고, 당시 그 이재복과 같이 간 장소에서 본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작성해 제출한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의 좌익활동이라는 것에는 하나같이 명백한 증거가 없다. 활동은 커녕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도, 도장도 없고, 당적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남은 것은 이재복의 가진 명단속에 박정희란 이름인데, 이것으로 빨갱이라 몰아붙일 수 있는가? 능력이 뛰어나서 포섭 물망에 오른 것이 죄라면 죄라고 할 수 있겠다만.


 

7) 박정희의 창씨개명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 김대중대통령 시절 박 대통령을 친일파로 몰고가기 위하여 박 대통령의 창씨개명인 다카키마사오를 들고 나왔으나, 김대중대통령의 창씨개명명이 도요다다이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없었던 일로 흐지부지되었는데 ....아직도 이것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다.....또한 오카모토미노루의 창씨개명을 운운하는데 어쨌든 창씨개명으로는 친일파의 기준에도 포함되지 않는 사항이다.


*김대중의 친일 행각과 부정적 평가.


-도요타 다이쥬로 창시개명을 했다.

- 학생 시절 일본으로 망명하여 친일 정신이 투철하였다.

- 일본인 학생 못지않게 일왕에게 충성하였으며 세계 2차 대전 시에

   는'천황폐하를 위하여 대일본제국에 뼈를 묻겠다'라고 하기도 했다.

-일제 치하에서 수많은 동족들의 재물을 거둬서 착취하였다.

-한반도가 해방되자 재빨리 한국으로 돌아와 정치활동을 했다.

-김대중이 89년도에 히로히토일왕이 죽었을 때 주한일대사관을 찾

아가 '몰래' 조문을 하였다는 것은 그시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

는 사실이다.


 

김대중에 대한 부정적 평가


김대중은 노벨평화상을 돈으로 샀다. -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전 미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은 남한을 북한에 팔아넘기려 하고있다. - 존 메이저 전 영국 수상

내가 김대중이라면 결코 북한에 협력하지 않겠다 - 존 매케인 전 공화당 대선후보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의 개가 될 것이다. - 댄 퀘일 전 미부통령

김대중은 살아있는 친일파중 친일파이다. - 라이트코리아 시민단체

김대중은 대통령이 될만한 인물이 아니다. - 이한기 전 국무총리 서리

DJP연합이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 남덕우 전 국무총리

김대중은 야당시절부터 줄곧 거짓말만 늘어놓았다. -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나는 김대중에게 내각책임제와 박대통령기념관 건립을 약속받고 지

지했지만 김대중은 그런 나를 속였다. - 김종필 전 국무총리


 

8) 박정희 그는 대통령으로써의 친일적 언동했다? 

대통령이 국가이익을 위해서 일본을 방문 및 협조를 받은 것이 친일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그러면 그때 일본과 외교관계를 끊어야 했는가? 또한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 외교적 수사법으로 한 발언이 친일파의 기준이 될 수 있는지? 옛날 일제시대 자기를 가르친 일본인 선생을 만나 듣기 좋은 소리 좀 했기로소니 그게 전부 친일인가?

못 먹고 사는 국민들을 먹이기 위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일본의 자본과 기술 가난한 나라로서 손을 좀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인데 지도자면 국민들을 위해 그보다 더한 것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공적 사적 외교석상에서 노통처럼 나오는 데로 막말을 하면 그것이 대통령으로 해야 할 언행인가? 역대 대통령 치고 이러한 외교적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는 대통령이 없다. 하물며 반미면 어떻냐?는 노통이 취임후 정작 미국가서는 미국이 없었다면 나는 수용소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9) 박정희 대통령으로서 친일적이며 굴욕적인 한일협정체결했다~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대일청구권문제의 타결을 위해 7차례나 회담, 우리가 요구하는 8억 달러와 일본이 제시하는 최고액 7000만달러중 무상으로 3억 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 상업차관으로 3억 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타결했다.

(한일회담 당시 일본의 국고는 14억 달러 정도였다 그러므로 위 조건은 작은 돈이 아니다)

즉 8억달러 주겠다는데 박 대통령이 어떻게 안받았겠는가? 많이 받으면 좋겠지만 돈 주는 쪽이 일본인데 우리가 많이 달라고 해서 일본이 그렇게 주겠는가?

더우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한 승전국의 위치가 아니였다.

배상금이라는 것은 패전국이 승전국에게 주는 것이다. 일본은 협상하는 동안 시종일관 배상금이라는 이름보다는 경제협력금, 독립축하금이라는 이름으로 수교하길 원했다. 그들은 미국한텐 패전국이지 어부지리로 독립 얻은 한국에겐 패전국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협상의 출발부터 우리나라에게 유리한 협상카드는 별로 없었다. 더구나 사과를 하기를 싫어해 현재까지 위안부 할머니들이 죽길 기다리는 일본이 그때당시 사과를 다 받아 낼려고 하였다면 현재까지 일본과의 국교는 계속 단절 되어 있을것이 아닌가?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정신대문제와 관련하여 대일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발표하였으며, 11월 국제법률가협회에서 일본의 배상의무가 있으며, 1965년 한일협정의 청구권에 불법인권침해와 위안부 개인의 권리침해에 관한 청구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특히 위안부문제에 관하여 한국, 타이완, 일본, 필리핀, 타이, 홍콩등 아시아 6개국 여성단체에서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결의하였다. 즉 일본으로부터 위안부문제로 보상받은 나라는 현재까지 없다.


 

참고로 각 단체들이 선정한 박 대통령의 친일파 여부는 아래와 같다.

- 반민특위 : 해방이후 최초의 친일청산을 위하여 7000명을 조사 이 중 690명을 친일파로 선정하였습니다만 박 대통령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독립 운동가들의 총본산인 광복회(친일반민족행위자 692명)에서도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았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한일역사문제연구소 : 박정희, 장면 해당없음


- 민족문제연구소 : 박정희를 친일파로 주장함. 박정희 생애에 대한 왜곡된 만화를 편찬하고 여당의원 선친을 뺀 친일인사명단발표를 함으로써 박 대통령을 대표적 친일파라 규정함 그러나 친일파로써 어떤 구체적 반민족행위를 했는지? 실체적 근거나 규명을 내놓고 있지 않고 있다.


 

결론 : 현재까지 밝혀진 박 대통령의 친일논란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 내근직에 근무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 이외 사항은 전부 허위, 날조, 과장된 것들일 뿐이다.


 

(일본육사와 인연을 맺은 한국인은 188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114명에 이른다. 여기에 만주국 군관학교 예과 졸업자로서 이 학교 본과에 편입, 졸업한 27명을 추가하면 141명이 된다. )


조선인 중에 박정희 혼자만 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 편입한 것도 아니고  역사를 극단적인 흑백논리로만 따진다면 일군 중위 까지 하다 망명하신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이나 중국의 장개석도 자신의 조국을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로 만들려는 진정한 극일파였다.

일본의 육사를 다녔는데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도 친일파가 되는 것인가?

중국사람들은 장개석을 친일파라 얘기하지 않는다.

 

한국경제 약자의 희생만으로 성장했다는 교과서 서술은 잘못“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한강의 기적’이라고까지 불렸던 한국의 경제 성장은 노동자의 저임과 농촌·중소기업에 대한 차별을 바탕으로 했고, 그 결과 극심한 소득 격차를 사회문제로 낳았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통념이다. 물론 중·고등학교 교과서도 그처럼 쓰고 있다.

경제사학자 이영훈 서울대 교수가 29일 열리는 ‘교과서 포럼(상임대표 박효종)’의 ‘중·고등학교 경제 관련 교과서 이대로 좋은가’ 심포지엄에서 이 같은 교과서 서술이 객관적인 통계 수치를 무시한 오류라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 큰 논란이 예상된다.

이 교수는 미리 발표한 논문에서 현재 전국의 중·고등학교에서 사용 중인 경제 관련 교과서 8종을 검토하고 “한국 경제가 이룩한 성과와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교과서 포럼은 지난해 일부 고교 역사 교과서가 한국 현대사를 분단 고착과 독재, 성장 과정의 독점이라는 ‘실패의 역사’로 본 것을 비판하며 태동했고, 지난 1월 주요 사회과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출범했다.


이들은 대한민국사를 “기본권의 신장과 삶의 질 향상, 정치 권리의 증대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저임금으로 성장했나?… 노동생산성 만큼 임금도 올랐다경제학적으로 ‘저임금’이란 노동생산성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것을 말한다.

교과서는 1970~90년 동안 노동생산성은 729% 증가했는데 임금은 436%에 그쳤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통계를 확인하면 제조업체 노동자의 임금은 생산에 기여한 부분만큼 착실히 상승했다.

1960년대 이후 현재까지 노동의 한계생산성 증가율과 임금의 증가율 그래프는 완전히 겹치는 양상을 보인다. 노동 생산성만큼 임금이 상승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 중소기업 희생시켰나?… 지난 40년간 中企 10배로 늘어 한국의 중소기업은 1980년대 이후 대기업과 계열관계를 강화하면서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다. 중소기업 수는 급증한 반면 대기업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1961년 137개였던 대기업은 1988년 1318개로 정점에 달했다가 2002년 670개로 급속히 줄었다. 반면 중소기업은 1961년 1만5067개에서 2002년 10만8819개로 10배 증가했다.

1970년 10%에 불과했던 대기업에 대한 중소제조업체 수급비율은 70%로 상승했다. 대기업은 경기 변동에 따른 신축적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중소기업과의 연계 강화로 노동·자본의 감축분을 대체하고 있다.


◆ 소득 분배 불균등했나?… 소득분배 수준은 국제적 모범생 소득 분배를 나타내는 지표는 한국 경제가 국제적으로 ‘소득 분배의 모범생’임을 보여준다. 소득 분배 수준을 나타내는 ‘10분위 분배율’ 지표에 따르면 1996년 한국은 0.558로 국제적으로 덴마크(0.710) 다음으로 양호하다.

한국은 미국(0.338)은 물론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네덜란드(0.526)보다 소득 분배가 균등하다.

소득 분배 구조의 악화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이 몰락하면서 부터이다.

◆ 농촌경제 차별했나?… 쌀값 보전 등 보호정책이 더 많아 한국의 농업은 오히려 지나친 보호를 받아 왔다.

쌀값은 국제 수준보다 5~6배 높은 수준으로 계속 인상됐다. 농산품 가격은 1960년대 이후 공산품에 비해 높은 수준으로 인상됐다.

2000년을 100으로 할 때 공산품은 1965년 300에서 현재 80~90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농산품은 30~ 40에서 120~130 수준으로 상승했다.


(이한수기자 hslee@

 

2007.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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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

질문자님 질문자님 말하신 그대로가 사실입니다.

 

박정희는 일제시대때 창씨개명을 두번이나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개새끼라도 창씨개명 두번한사람은 박정희뿐 입니다.

 

오카모도 미노루(岡本 實), 혹은 다가키 마사오(高木 正雄)

 

이것이 박정희의 일본이름입니다.

 

일단 먼저 박정희의 벌레같은 짓을 알려드리지요 .

 

님의 말씀처럼 일본장교로 있었던적도있었고 사회주의 자였다가 동료를 모두 실토하고

 

자기혼자만 살아남은 기회 주의자입니다. 일본을 위해서 혈서까지 쓴적이 있었지요.

 

박정희의 유일한 장점인 경제발전 그경제발전도 모순점이 엄청나게많습니다.

 

먼저 일본과의 굴욕적인 한일협정의로 고속도로 뚫은겁니다.

 

그리고 수출 100억도 맨날 적자였습니다. 즉 재료를 100억이넘는 값으로 사와서

 

조립만하고 100억에 팔았던 것입니다. 겉만번지르르한 경제정책이죠.

 

또 대기업으로 경제발전을 한덕택에 지금 삼성,현대등 대기업이 망하면 나라 자체가

 

흔들리는것도 박정희 때문입니다. 노동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도록 노동해도

 

얼마받지못하는것도 박정희의 경제정책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박정희의 겉만번지르르한 경제정책을 보기전에 김구선생님이나 이육사

 

안중근 윤봉길같은 독립투사분들을 생각해주십시오.

 

그분들께서 피눈물흘리며 지킨 나라를 창씨개명2번 일본에 혈서 일본장교까지지낸

 

박정희가 대통령질 하고있는거 보면 얼마나 슬프시겠습니까 ...

 

질문자께서 현명하게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007.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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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
초인
유머 27위, 비뇨의학과, 사람과 그룹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보는눈에 위치에 따라 보이는 사물이 달라지지요.

 

1.만주육사 일본육사 나와 만주군 장교 된것

  (통일된 조국의 군에 필요한 인제가 되기 위하여라고 답할수 있고

  6.25때 북괴군에게 투항하지 않고 낙동강 전선등 3년간 일선 에서

  적과싸운 장군들 정일권 백선엽 백인엽 김종오 이한림 송요찬 등    

  대부분 장군들이 만주군이나 일본군 출신이지요)

  *북한도 마찬가지 입니다 김일성 동생 김영주도 일본경찰

  정보원이였고 6.25때 북한군 공군사령관도 일본군 출신입니다

   북한군 창설시 많은 일본군 만주군출신이 참여 했어요.

 

 2.박정희는 좌파이던 친형이(김종필 장인) 경찰에게 사살당한후

   남노당에 포섭 당하여 남노당  당원이 된것 사실이지만  여순사건후

   체포되여 정보국 김창룡대위에게 군내부 남노당 명단을 알려주워

   전원체포 되였지요

   결과적으로 6.25때 북한군에게 투항하거나 협조한군인이 없었어요

    질문자님은 혹시 군내부에 남노당 출신이 수백명 있어

   김일성 원했던되로 6.25때 국군이 일시에 무너지지 않은걸

   안타까워 하는분은 아니시지요?.

 

3. 박정희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은 아래와 같은 사실로

    알수 있어요

   가. 남노당 사건후 예편한 박정희가 제일 중요한 국방기밀을

         다루는 정보국에 다시 문관으로 채용되였다

        (우리정보부대나 미군사고문단에서 박정희가 빨갱이가 아니라고

         판단 하였기 때문입니다

   나. 전쟁3일후 육군본부가 대전으로 기급 피난할때 마지막으로

        수많는 기밀 서류를 챙기고  소각한 인물이 박정희입니다.

         박정희가 빨갱이라면 그시간에 벌써 북괴군 105탱크 여단이

         미아리에 들어와있었는데 그리 달려 갔겠지요

        그공으로 박정희는소령으로 다시복귀하지요

    다.그후 전쟁 3년간 박정희는 정보국에서중요간부로 일선에서

        사단참모장.  연대장으로 전선에서 북한군과 싸웠지요.

       그때 김영삼이나 김대중이는 전쟁 3년간 무얼 했는지

       아무도 몰라요

4.  박정희가 이승만때 세운 계획으로 노동자들 혹사 시켜

     경제 발전   시켰다고 했는데 경제 계획은 박정희가 만든게

     아닐지 몰라도 실천한건 박정희지요

     조폭 세계에서도 덩치크거나 머리좋은 놈들이 보스로(no1)으로   

     올라가지 않아요. 사시미(회뜨는칼)로 상대편을 찌를수 있는자가

    보스가 되지요(양은이 태촌이등)

     아무리 좋은계획도 실천 하지 못하면 종이 일뿐입니다

     아이러니 한건 당시 박정희와 같이 조국건설을위해 땀흘린

     분들은 아무도  박정희를 욕하지 않는데 조국근대화를

     위하여 삽한번 든적 없는 인간들이 그를 비방하고

     없는이야기 까지 만들어 냅니다 

2007.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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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y****
초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박정희는 조국근대화에 확고한 철학과 원대한 비전을 바탕으로 시의적절한 제도적 개혁을 단행했

다. 매우 창의적이며 능률적이었다. - 카터 에커트/하버드대학교수 


"아시아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세 지도자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중국의 덩 샤오

핑, 한국의 박정희를 꼽고 싶다" "오직 일에만 집중하고 평가는 훗날의 역사에 맡겼던 지도자"

- 리콴유/싱가포르 수상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던 한국이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시작으로 불과 20년 만에 세계적인 무역

국가가 되었음을 경이롭게 본다. - 폴 케네디/예일대학 교수 



박정희의 역사적 큰공헌은 그의 뛰어난 지도력하에 한국을 저개발의 농업국가에서 고도로 성장

한 공업국가로 변모시킨 것이다. - 앰스덴/MIT정치경제학 교수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의 목표는 자립경제력을 갖춘 현대국가의 건설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은 그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 맨스로프/러시아 안보연구소 교수 


중국의 덩 샤오핑 등은 세계 유례없는 한국의 연 10% 급성장, 경제부상에 놀라며 박정희식 경제개

발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 마홍/중화인민공화국정책과학연구회장


"박정희 대통령은 매우 강한 지도자였으며 대기업을 일으켜 국부(國部)를 증진시킨 훌륭한 지도자

이다" - 말레이시아 전 총리 마하티르 - 


중국의 덩 샤오핑의 개혁은 박정희 모델 모방 - 美, RAND 연구소


"매 회의마다 우리 농촌과 국토에 가졌던 뜨거운 애정, 빈곤했던 우리 역사에 대한 한에 가까운 처

절한 심정, 그리고 빈곤을 극복하여 경제대국을 이룩하려는 치열한 집념에 숙연해지곤 했다"

- 고건,  대한민국 대선 전 후보


요즘은 박정희 대통령이 좋게 인식되는 것 같은데, 옛날에는 유신이니 해서 비판이 많았지만 초

기 새마을 운동을 한 덕택에 경제 발전의 기초가 되었던 점은 훌륭한 점입니다. 나도 영화를 통

해 서울을 보았는데, 서울은 일본의 도쿄보다 훌륭한 도시로 조선이 자랑할 만한 세계의 도시입니

다. 서울에 가면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도 참배하고 싶다.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 김정일, 1999년, 현대 고 정주영 회장과의 대화중 


"많은 몽골인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리더십과 개발모델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 또

한 그렇다. 한국은 박 전 대통령의 지도 아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개발의 금자탑을 쌓아올

렸다" - 잔라빈 차츠랄트, 前 몽골 총리 


"대통령 박정희(1961∼79)는 강력한 손으로 남한을 불과 20년만에 근대적인 공업국가로
변모시켰다"


"선박건조율 세계1위 반도체 생산량 세계1위 제철 조강 생산성 세계1위
휴대폰 보급성장률 세계1위- 신화를 만든 한국경제의 건축가

-뉴욕타임스-


"어렵던 시절, 한국을 이끌어 고도로 공업화된 민주국가로 변화시킨 역사적 역할을 담당한 박정

희 전 대통령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후임 대통령들이 본보기로 삼을 만한 유산

을 남긴 한국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지도자들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 -


"박정희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다. 박정희는 헌신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으

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국가에 일신을 바친 리더였다"

- 2006.11.11 에즈라 보겔, 美 하버드대 교수 - 

"박정희 근대화 성공으로 중산층 창출이 되고 이것이 한국 민주주의 토대가 되었다
박정희야 말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2005. 2.4 오버홀트,  美 카터 전 대통령 수석비서관

"20세기의 위대한 아시아 지도자들 중 20명중에 한명"

-뉴욕타임스-

"박정희는 비록 민주화운동을 억압하였으나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중산층을 대폭 창출시켜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1991.4.2 김상기 대학교수"

민주화란 것은 산업화가 끝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자유란 것은 그 나라의 수준에 맞게 제한되어야 합니다 이를 가지고
독재라고 매도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2001.6.7 엘빈토플러


"1965년 필리핀 1인당GNP 270달러 한국 1인당GNP 102달러 였다가
2005년 필리핀 1인당GNP 1030달러 한국 1인당GNP 16500달러로 변하였다
"가난한 절대빈곤의 후진국에서 조국보다 잘살 던 동남아 나라들을 따돌리게 한
박정희의 지도력이 존경스럽다"

-필리핀 아로요 대통령-


"임정때 독립군이 매우 부족했었는데 , 박정희가 조선인병사를 빼돌려 임정에 배속시켜 , 많은 

도움이 되었다"

- 독립운동가 ,임시정부출신 백강선생 -

 

박정희가 이끈 1961년 5월의 군사혁명을 정당화시킨 것은, 정부 내에 만연한 부패, 무능한 정치, 비효율적인 관료체제, 사회의 무질서, 민족정신의 훼손, 낙후된 경제, 그리고 끝없는 빈곤 등이었다. 새로운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경제적 개혁의 도입, 사회 기강, 법과 질서의식의 확립, 근면자조협동,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국민정신을 일깨워 ‘조국근대화’ 실현에 나섰다. 박정희는 이에 도전하여 성공한다.

 

첫째, 박정희는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18년의 통치기간에 국민소득을 87달러에서 1,644달러로 약 19배 끌어올렸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경제의 기적’으로 인정받는다. 박정희는 한국경제의 도약과 근대적인 공업국가로의 변혁이라는 과제를 성공적으로 주도해 냈던 것이다.

둘째, 박정희는 ‘새마을운동’ 등 의식개혁을 통하여 빈궁한 농촌사회의 기근을 극복하고 도농(都農) 간의 소득과 생활수준 격차를 최소화하는 데 성공했다.


셋째, 박정희는 비록 민주화 운동을 억압했지만 경제발전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한국 다원주의 사회의 근간이 되는 중산층을 대폭 창출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넷째, 주한미군의 철수를 가능케 할 수도 있는 닉슨 독트린에 직면한 박정희는 경제성장 능력과 능란한 외교활동, 군사력 강화를 통해 북한의 도발과 위협에 대처했다.

다섯째, 박정희는 농촌과 지방정부에서부터 중앙정부기구와 기업에 이르기까지 자조와 자족, 긍지와 자부심, 협동정신을 고취시킴으로써 ‘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자’는 국민정신을 함양 강화했다. 이로써 다음 세대에게 경제분야뿐 아니라 사회, 문화, 과학, 예술, 스포츠, 레저 등 각 분야에서 국민적 자신감과 긍지를 갖도록 했다.

 

여섯째, 정치와 정부의 부패 기록들을 보면 다른 어느 정권, 특히 박정희의 뒤를 이은 정권들에 비하여 박정희 정권은 그 부패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훨씬 덜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는 혁명적인 철학을 갖추고 있었으며 유교적인 가치관으로 자신이 가난에 찌든 농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족과 친척들의 금전적 이익에는 철저하게 냉철하고 청렴하게 대처했다.

 

그 뒤의 대통령들처럼 자신이나 측근 또는 가족과 친척들에게 금전적으로 도움을 준 부정부패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박정희가 이룩해 놓은 경제발전은 오늘날 미래 한국의 ‘성숙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며, 이를 가능케 하는 절대조건이 되었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 박정희시대 18년의 통치기간은 결코 짧은 것은 아니었다. 그 기간에 일어났던 일들을 통해 한국은 한국역사 5천 년의 진보보다 더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박정희 시대 18년의 의미에 대해서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실제적인 진실을 잘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나한테는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기적'이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쓰는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박정희 시대 18년 동안 해낸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세계의 대부분의 경제학자, 역사학자들이 불가사의하게 여기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를 폄하하여 말하는 사람들은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했더라도 더 잘하지는 못해도 그 정도는 했을 지 모른다' 또는 '오히려 개발 독재의 후유증이나 상처 없이 이루어 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단연코 아니다'이다.

구미제국이 식민지를 착취하면서 200년이나 걸려 완성한 산업화를 자원無 자본無

과학기술無 3無에서 출발하여 20년만에 산업화를 완성하여 오늘날 87민주화 88올림픽

2002월드컵 이지스함건조의 기초를 쌓았다

 

박정희가 집권한 1961년에 국민 80%가 초졸이었으며 영국보다 200년이나 뒤떨어졌는데

과연 지금같은 민주화로 가능하였을까? 북한과의 대치상황에서 박정희시대에 인권탄압고문치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를 일방적으로 독재라고 매도할수 없다

 

박정희를 독재자로 보는 것은 그 기준을 100년 200년 동안 혁명과 전쟁, 제국주의 등으로 피를 흘리고 자본을 축적하며 기나긴 민주주의 실험을 거친 선진국의 민주주의로 두기 때문이다. 그렇게 거의 절대적인 기준을 들이댄다면

 

영국이나 미국 프랑스 등도 1920년대 이전에는 모조리 독재 국가다. 그 때까지는 어떤 나라도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은 1948년부터 바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었다. 미국 덕분이긴 하지만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세기만 해도 영국에서는 선거구의 의원보다 투표권을 가진 자가 더 많았다. 3명이 5명의 의원을 뽑곤 했다. 보통선거의 길은 그렇게 험난했던 것이다. 그러면 그 당시 영국이 민주국가가 아니었던가.

영국은 1688년을 입헌군주제가 완성된 해를 민주주의가 정착된해로 본다

1688~1928년까지 250년간 정치에 민주에 反하는 사례가 없었으나 국민을 착취하고

탄압하였고 빈부격차가 매우 심한 불공정한 사회였는데 이는 모두 산업화를 경험한

나라들의 모든 공통점이었다

 

"1964년 아프리카 최빈국보다 못살던 한국이 2004년 미국-캐나다-중국을 합친것보다

더 큰 아프리카대륙 전체의 GDP<한국GDP가 되었다 세계의 기적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다"

UN보고서

2007.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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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을 드리자면 스스로 만주로 간게 아니고 교사 시절에 학생들에 조선말을 가르치는 것

 

때문에 일본인 교장과 마찰이 잦았고 강제로 순화교육을 받은 뒤 만주 군관 학교로 간 것

 

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것은 허위 날조된 사실입니다. 당시

 

독립군이 활동하던 열하와 박정희가 복무했던 만주 제8단은 지금도 열차를 타면 꼬박 하

 

루가 걸리는 거리인데 박정희가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로당 군책은 어릴 적 박정희가 가장 존경하는 형 박상희가 독립운동가이자 좌익 세력이

 

었습니다. 어린 박정희는 당연히 좌익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겠지요. 그리고 군사정

 

변은 당시 민중들도 윤보선 정권의 경제파탄과 지독한 부패에 지쳐있던 터라 환영을 하는

 

분위기 였습니다. 당시에 장준하 선생은 사상계 6월호의 '5.16은 혁명이다'라는 글을 게재

 

했습니다. 또 경제개발 정책은 이름만 같을 뿐 경제개발 중점 자체가 다릅니다. 이승만과

 

윤보선이 추진했던 경제개발 정책은 필리핀을 모델로 한 농업중심 경제개발 정책이고 박

 

정희가 추진한 경제개발 정책은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추진한 선진 공업국가였습니다.

 

지금 세계 제1의 기술을 자랑하고 있는 조선업도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 회장에

 

게 지시함으로써 그 싹이 심어졌구요. 포항제철소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건설되었습

 

니다. 여담으로 한마디 하자면 등소평이 미국 철강업자에게 우리도 한국의 포철같은 대형

 

철강 회사를 만들어서 중화학 공업지대를 육성해야 겠다고 요청을 했지요. 하지만

 

그 미국 철강업자는 당신의 나라에는 박정희와 박태준이 없어서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없다고 말을 했지요. 그 만큼 세계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의 신화로 불리우고 있

 

고 그가 18년만에 달성한 수출액 350배 증가는 아직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깨지 못하고 있습니다.

200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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