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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한국독립을 위해서 희생한 외국인 독립운동가님들 가르쳐 주세요
비공개 조회수 188 작성일2018.08.14
한국을위해서 고결한 희생을한 외국인 독립운동가님들 상세히좀 가르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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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기 독립운동 및 지원한 친한파 외국인

 

호머 베잘렐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26~ 194985)는 미국의 감리교회 선교사이자, 육영공원에 교사로 근무하여 영어를 가르쳤던 교육인으로 한국의 항일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의 한국어 이름은 헐벗 또는 흘법(訖法), 할보(轄甫)이었다.

 

그는 고종 황제의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고종 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은 외국인이었고, 한국의 분리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였으며, 1907년 헤이그 비밀밀사에 적극 지원하여 밀사활동을 하였다. 19193.1운동을 지지했다.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한국어도 매우 유창하게 하였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대한제국 시대에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어니스트 베델(영국 출신)과 더불어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한국독립운동 지원

1890년대 중엽에 조선은 일본제국으로부터 위협을 겪게되는데, 헐버트는 일제의 이러한 침탈행위를 목격하면서 조선의 국내 및 국제 정치,외교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조선의 자주권회복 운동에 헌신하기 시작한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헐버트는 고종을 호위하고,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헐버트는 고종의 신뢰를 가장 많이 받은 외국인이었다.

헐버트는 1903년부터 타임스의 객원 특파원을 지냈으며, 1904년에는 AP 통신의 객원 특파원을 지냈다. 그는 러일전쟁을 깊이 있게 취재하여 송고하였다.

1905,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 사건이 있은 후에 헐버트는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무효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했으며,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또한 을사늑약의 무효성을 알리기 위해 고종 황제로부터 친서를 받아 1905년 미국 대통령에게 밀서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했으며, 미국을 비롯한 열강국가들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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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비신(魚丕信)

올리버 알 에비슨( Oliver R. Avison,)

1860630~ 1956829)은 캐나다의 선교사이자 의사이다. 18926월부터 193511월까지 한국에서 체류하며 활동하였다. 제중원의 제4대 원장,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면서 오늘날 연세대학교의 기틀을 마련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Ernest Thomas Bethel),

한국명: 배설(裵說), 1872113~ 190951)은 영국의 언론인, 신문 기자이다.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315- 1970416)는 캐나다의 감리교 선교사이며, 세계적인 수의학자이며 세균학자이다.일제강점기의 조선과 독립 후의 대한민국에서 활동하였으며, 제암리학살사건의 참상을 보도한 그의 활동을 기념하는 뜻에서 “3•1 운동의 제34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가 만든 한국식 이름 석호필(石虎弼)은 오늘날 Schofield, Scofield 또는 이와 비슷한 이름을 쓰는 외국인의 별칭이 되었다.

 

죠지 쇼우(George L. Shaw, 1880~ 1943)

아일랜드계 영국인 사업가로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의 망명과 한국의 독립운동에 지원한 공로로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외국인 독립운동가이다

 

임시정부에 반드시 등장하는  유명한 이률상사 대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연통제를 실시하게 되자 일본영사관 경찰의 권한이 미치지 못하는 이륭양행 2층에 임시정부 안동(단둥)교통국의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도록 도왔으며, 이륭양행에서 경영하는 무역선을 이용하여 독립운동에 필요한 무기 운반, 군자금 전달, 독립운동가의 출입국, 국내와 임시정부와의 연락 등 중요한 창구역할을 했으며, 19207월 내란죄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렸다.

백범 김구의 1919년 봄 동지 15명과 함께 상해로 망명할때도 이륭양행의 배편을 이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91911월 대한제국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망명 시도 당시에도 단동 교통국이었던 이륭양행이었으며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며 상해로 오가는 선편을 제공하는 한편 본인 이름으로 우편물의 왕래를 담당하였을 뿐 아니라 무기수입의 편의까지 제공하였다.

그는 의열단 또한 지원하기도 했는데 미국 작가 웨일스가 쓴 "아리랑"에서 독립운동가 김산의 조지 쇼우에 대한 기록이있음

20128월 후손에게 훈장 수여

 

원두우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71~ 19161012)는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 연희전문학교 설립

 

언더우드 가문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명문 사립 연세대를 설립하고한국의 교육, 종교, 사회 발전에 큰 공헌을 해왔던 언더우드가의 한국사랑...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으로  120년간 한국을 위해 봉사했던 언더우드 일가!

한국인 보다 한국을 사랑했던 언더우드 1, 원두우 박사와 백두산 천지의 깊이를 재고,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설계도를 그리며한국의 것에 큰 관심을 가졌던 언더우드 2세인 원한경 박사... 6•25 전쟁중 정전 통역관으로 큰 활약을 하며 한국 현대사의 비극의 중심에 섰던 언더우드 3, 원일한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한국을 지키며한국 교육의 국제화에 힘쓴 원한광 단장 4120년간의 한국발전을위해 노력한 가문

 

원한광

원두우 의 4대손인 원한광은1980년에 광주민중항쟁을 해외에 알렸다는죄목으로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 추방을 당하였음

 

윌리엄 린튼( William Alderman Linton, 1891~ 1960)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이다. 22세 때 한국에 와서 48년간 의료, 교육 선교 활동을 했다. 전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교장을 지낸 윌리엄 린튼은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쫓겨났다가 광복 후 다시 한국을 찾아 지금의 한남대학교인 대전대를 설립하였다.

 

윌리엄 린튼은 1912년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남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시 48년 동안 호남과 충청 지역에서 선교와 교육사업을 위해 일하였다. 군산영명학교에서는 한국어로 성서와 영어를 가르쳤고, 전주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그는 1919년 전북 군산의 만세시위 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였고, 19198월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미국 남부지역 평신도대회에 참석하여 3.1운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전주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일제의 강제적인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를 자진 폐교해 1940년 일제로부터 추방되었다.

 

아들 휴 린튼은 군산에서 태어나 전남의 도서지역에 600여 개의 교회를 개척했으며,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휴 린튼의 큰 아들 스티브 린튼(인세반)'유진 벨' 재단의 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둘째 아들 존 린턴(인요한)은 연세대학교 가정의학과 교수, 세브란스 병원 원장이고 북한에 구급활동을 위해 앰뷸런스를 보내는 등 북한 의료지원에도 관여하였다.

드와이트 린튼은 청소년기를 한국에서 보내고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1952년 한국으로 돌아와 광주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하였다.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 1869∼ 1931)

한국에서의 활동으로 유명한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 언론인이자, 저술가이다. 1919년에 조선의 경기도 수원군에서 발생한, 일본 제국 군대에 의해 일어난제암리 학살 사건의 진상을 폭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생애

캐나다의 퀘벡 주에서 태어나서, 1900년에 영국의 일간지인 데일리 메일에 입사하여 기자 생활을 시작하였다.1904년에는 러일전쟁의 취재를 위해 대한제국을 방문하였고, 당시 그는 일본 제국 육군의 종군기자로 활동하였다. 그 뒤에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거쳐서 영국으로 돌아갔고, 1905년에 그때까지의 기록을 《도쿄에서 트빌리시까지 - 검열 받지 않은 편지》라는 저서로 간행하였다. 1906년에 대한제국을 다시 방문하였고, 1907년에는 당시에 있었던, 조선 통감부에 의한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명령에 항의하여 대한제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활약상을 취재해, 이를 사진으로 남겼다. 같은 해에 출판한 저서 《베일을 벗은 동양》의 부록에서 매켄지는 한국인은 일본의 통치에 반대하고 있다는 글을 올렸다. 1908년에는 《대한제국의 비극》이라는 책을 집필하여 간행하였다.1910년부터는 영국의 일간지인 런던 타임스로 이직하여 1914년까지 그곳에서 근무했다. 이후, 일제 강점기를 맞은 한국을 다시 방문하였다. 그 동안에 매켄지는1919년에 당시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던 3•1 운동을 목격하였고, 특히 그 해 4월에 있었던 제암리 학살 사건에 주목해, 당시 그 현장을 목격한 캐나다인 선교사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의 증언을 토대로 일본 제국이 일으킨 학살 사건의 진상을 세간에 폭로하였다.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20년에는 《한국의 독립운동》이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1921년에는 미국의 일간지인 데일리 뉴스로 이직하고, 1926년까지 근무하면서 유럽 각국에서 강연을 하였다. 1931년에 캐나다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

수상 및 서훈 •    2014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가네코 후미코(, 1903125~ 1926723)는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로, 한국의 독립 운동가인 박열의 부인 독립유공자로써 문경에 안장 .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ふせ たつじ)

18801113~ 1953913, 미야기 현 이시노마키 시 출생)는 미야기 현 이시노마키 시 출신의 일본의 인권변호사, 사회운동가이다. 한국독립운동가 변론 공로로

2004년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018.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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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순이
식물신
어류, 갑각류 41위, 새, 조류, 파충류, 어류, 갑각류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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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 선생 비록 파란눈의 외국인 이었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분 입니다 
헐버트 선생은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청년의 계몽에 기여하였고
독립신문 창간 지원 및 Korea Review 창간,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한국 특사를 지원등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상이 도덕성,인간 중심사상에서 신학을 마친후 해외 선교사의 길을 선택한분입니다 그리고 유명한 사민필지 라는 세계 지리서를 펴내는 등 한국사람들에계 세계를 알리는 계몽활동에 전념하신분 입니다 
미국에 돌아간 후에도 순회강연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습니다 광복 후 1949년 국빈자격으로 그토록 갈망한 독립된 한국을 다시 찾았던 그는 내한 후 일주일 만인 1949년 8월 5일 영면하였습니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던 유언에 따라 사회장으로 장례를 거행하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습니다

201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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