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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영창대군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9,501 작성일2004.02.29

영창대군과 그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 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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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대군

 

생존연대: 1606(선조 39)~1614(광해군 6). 선조의 막내아들. 이름은 의(懿). 본관은 전주. 어머니는 인목왕후(인목왕후)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弟男)의 딸이다.

그는 선조의 열네 아들 중 유일한 정비소생으로 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특히 인목왕후는 그를 세자로 세우려고 수차례 획책한 것으로 여겨진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정례(權停例:정식으로 절차를 다 밟지 아니하고 간략히 거행되는 의식)로 공빈김씨(恭嬪金氏) 소생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그뒤 인목왕후를 맞아들여 중전 소생인 영창대군을 낳자 선조는 세자 개봉(改封)의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유영경을 위시한 소북파는 이 뜻에 영합하여 왕을 위하려 하였으나, 선조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왕은 죽기 전에 영창대군을 걱정하다 대신들에게 영창대군을 돌봐달라는 유교(遺敎)를 내려 뒷일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로 인하여 광해군을 지지하던 이이첨(李爾瞻)등 대북파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13년(광해군 5)에 춘천 소양강을 무대로 시문(詩文)과 주색(酒色)을 즐기던 서양갑(徐羊甲). 박응서(朴應犀) 등 7명의 서출 유생들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이른바 '7서의 옥(七庶獄事)'이 일어났는데, 이이첨. 정인홍 등은 이 역모사건에 그들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영창의 외조부 김제남도 관계한 것처럼 진술을 유도하였다. 이 결과로 영창대군은 폐위,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그뒤 조야(朝野)의 각 계층에서는 끊임없는 구원의 상소와 탄원 등이 연이었고, 형제의 의를 따지는 전은설(全恩說)과 여덟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少年)이라는 이유로 그를 비호하였으나 대북파의 집요한 요구로 광해군도 더 이상 두둔하지 않았으며, 그 이듬해 봄에 이이첨 등의 명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증살(蒸殺)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관작이 복구되었다.

 

계축일기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지만..)

 

어느 궁녀

조선시대의 수필로 <서궁록(西宮錄)>이라고도 한다.
1613년(광해군 5:계축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 폐비 사건을 시작으로 하여 일어난 궁중비사를 기록한 글이다. 인조 반정 뒤 대비의 측근인 나인이 썼다고 한다. 그러나 문체와 역사적 사실을 들어 인목대비 자신이 쓴 것이라는 설도 있다.
<계축일기>는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둘러싼 당쟁을 중후한 궁중어로써 사실적으로 서술한 글이다. 묘사보다는 서술에 중점을 두고 있어 당시의 치열한 당쟁의 이면을 이해하는 데 보조 자료가 된다.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모반하려 한다는 무고로 김제남 부자와 영창대군은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인목대비는 서궁인 덕수궁으로 쫓겨나 폐비가 되며, 그 뒤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11년 만에 인조반정으로 복위되었다는 이른바 궁중비사이다.
<한중록>, <인현왕후전>과 함께 3대 궁중문학으로서 소설문학 발달에 크게 이바지한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중기의 궁중에서 전개되는 풍속·인정 및 생활상을 잘 보여준 점, 한문 고사를 피하고 순우리말을 구사한 점, 중후하고 전아한 궁중어와 문체를 남긴 점 등은 다른 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 <계축일기> 내용 정리
* 작가 : 어느 궁녀
* 연대 : 광해군 5년(1612년) 이후
* 갈래 : 궁정 수필, 일기체 수필
* 문체 : 내간체
* 표현 : 간결하고 중후한 궁중어 사용
* 주제 : 궁중 내의 권력 투쟁의 비극
* 별칭 : <서궁록(西宮錄)> 또는 <서궁일기(西宮日記)>
* 의의 : 1) <한중록>, <인현왕후전>과 더불어 삼대 궁중 문학
2) 조선 중기의 궁중에서 전개되는 인정, 풍속,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서술
3) 순 우리말을 구사
4) 중후하고 전아한 궁중어와 문체를 후세에 남김

● 등장인물
* 인목대비(仁穆大妃.1584-1632) : 김제남의 딸이며, 선조 35년(1602) 19세 때 계비가 되어 정명 공주와 영창 대군을 낳았으나 25세 때 남편인 선조 대왕을 여의었고, 광해군 5년에 폐모, 광해군 10년에 서궁(西宮)에 갇혔다가 1623년 인조 반정 때 복위됨
* 영창대군(永昌大君.1606-1614) : 선조의 아들 13명 중 유일한 적자(嫡子). 김제남의 반역죄에 연루되어 강화에 위리 되었다가 강화 부사 정항에게 죽음을 당함
* 정명공주(貞明公主.1603-1685) : 인목 대비 소생으로 영창 대군의 누이. 어릴 때 동생이 잡혀가는 비참한 광경을 목격했으나, 홍씨 집에 출가하여 홍봉한(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의 고조모가 됨
* 광해군(光海君.1575-1641) : 조선 15대 왕. 간신들과 대북파에 의해 추대되어 본의 아니게 잔인한 일을 많이하여 역사상 오점을 남김. 인조 반정 때 쫓겨나 제주도에서 죽음
● <계축일기> 읽어보기
일변으로, 대군(大君)(선조와 인목대비 사이에 난 영창대군) 뫼온 내인(內人)(나인들, 곧 궁녀들)들이 대군 아기씨(어린 왕자, 왕녀 높임)를 달래되
"사나흘만 피접(병을 치료하기 위해 잠시 조용한 곳으로 옮김) 낫다가 올 거시니 보션 신고 웃옷 닙고 날조차 나가압사이다."하니 니르시되
"죄인이라 하고 죄인 나드는 문으로 내여 가라 하니, 죄인이 보션(버선) 신고 웃옷 닙어 쓸 데 업다." 하셔늘
"뉘셔 그리 니르압더니잇가?(그리 말을 했습니까?)" 대답하시되
"남이 닐너 알가? 내 다 아랏네. 쇼셔문(小西門)은 죄인 나드는 문이니, 나도 죄인이라 하고 그 문 밧긔다 가두려 한다." 하고,
"나과 누으님조차 가면 가려니와, 내 혼자는 못 갈노라."
하시니, 우흔(위, 곧 인목대비) 더옥 텬지(天地) 망극히 우오시더라.
어셔 내라 재촉하며, "아니 내여 주거든 내인을 다 잡아 내라."
발발(거듭하여) 사람 브리더라.(시키더라)

날은 느저(늦어, 저물어) 가고 하 민망하여 힐(詰) 우다가(다투다가) 못하여 우흔 뎡샹궁(정상궁)이 업삽고, 공쥬 아기씨(정명공주를 가리킴)는 쥬샹궁이 업삽고, 대군 아기씨는 김샹궁이 업사와시니, 대군이 하니되
"웃뎐(어머님, 인목대비)과 누으님과 몬져 셔시고, 나는 뒤헤 셔디라." 하셔늘
"엇디 그리 셔라 하시는고?" 하니
"내 몬져 셔면 날만 내고 다 아니 나오실 거시니, 나 보는 데셔 가압사이다." 하시더라.


우흔 짓의데(상주가 입는 무명옷)에 짓보(무명으로 만든 보자기) 덥삽고 두 아기씨는 남보 덥사와 각각 업사와 자비문에 다다라더니, 내관 이 십 여인이나 업데여(업드리어), "어셔 내압쇼셔." 바야더니(재촉하더니),
우히 내관다려 니르오시되,
"너희도 션왕(先王)(영창대군의 아버지, 선조대왕) 녹(녹봉, 월급)을 오래 먹고 사라시니, 현마(설마) 어이 참측(慘惻)한(슬프고 참혹한) 마음이 업스랴? 사십여 년을 졍위예 자식을 못 보아 겨오시다가 병오년의 처음으로 대군을 보오시고(낳으시고), 깃브고 사랑하오시미 가이 업사오시나 당시 강보의 싸인 것을 무삼 뜻을 두어 겨압시리?"
하오시고 하 애통하오시니, 내관이 눈믈을 씨사며 입을 여러 말을 못하고, 한갓
"어셔 내압쇼셔."하더라.


2004.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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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대군
이름 의( ).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 선조의 14왕자 중 막내이며, 유일한 정궁(正宮)의 소생이어서 선조는 이미 세자(世子)로 책봉한 광해군(光海君) 대신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등과 비밀리에 의논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고 이이첨 등을 등용하였다. 대북파(大北派)의 농간으로 형 임해군(臨海君)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한 광해군은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죽인 데 이어 영창대군도 역모 연루죄로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켜 강화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다. 1614년 만 8세의 어린 나이에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에 의하여 증살(蒸殺)되었다.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


본관 연안(延安). 성 김씨(金氏). 존호 소성정의명렬(昭聖貞懿明烈). 휘호(徽號) 광숙장정(光淑莊定). 제남(悌南)의 딸,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어머니이다. 1602년(선조 35) 왕비에 책봉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소북(小北)의 유영경(柳永慶) 일파가 몰락하고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이 득세하였다. 1612년(광해군4) 이들의 사주를 받은 윤인(尹)에 의해 살해될 뻔했으나 박승종(朴承宗)의 저지로 목숨을 보전하였다. 1613년 대북파의 모략으로 어린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었으며, 친정 아버지 김제남 등이 사사(賜死)되고, 1618년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 대북파는 폐모정청(廢母庭請)사건을 일으켜 왕대비(王大妃)로서의 지위를 위협하다가 1623년 서인(西人)들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과 대북 일파를 몰아내자 복호(復號)되어 대왕대비(大王大妃)로서 인경궁(仁慶宮) 흠명전(欽明殿)을 거처로 삼았다. 글씨를 잘 썼다. 능은 경기 구리시 인창동의 목릉(穆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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