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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광해군과영창대군
adc5**** 조회수 3,271 작성일2017.03.30

왕비의 소생인 영창대군이아니라 후궁의 소생인 광해군이 왕이된 이유가 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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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대군은 광해군이 세자가 되고 난 뒤에 태어납니다.

것도 인목왕후는 선조의 계비입니다. 원비가 사망하고 들어온 두번째 정실부인이죠.

 

선조는 원래 기축옥사 이후 세자를 정하는 일에 소극적이었습니다.

원래 신성군(인빈 소생)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모든 부분에서 밀렸죠.

그러던 차에 조일전쟁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신성군이 죽습니다.

첫째 임해군은 포악하고 악명 높아서 제외되고

광해군이 명망도 높고 어질어서 세자로 책봉됩니다.

 

세자가 된 광해군은 남쪽으로 내려가서 각 지역을 돌며 의병을 독려합니다.

도망가던 사대부들도, 일반 백성들도 거기에 감동하여 바로 의병이 조직됩니다.

전쟁 중 많은 영웅이 있었지만 이순신과 더불어 광해군의 공적은 매우 우수합니다.

선조는 도망다니던 처지였고 의주를 넘어 랴오둥까지 가려 했습니다.

전세도 역전되고 명나라에서도 "오는 건 좋은데 100명 이내로 데려와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쟁 중에 이순신과 광해군에 대한 증오와 질투심은 하늘을 찌르죠.

전쟁 말미에 이순신은 적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고(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광해군에 대해선 명나라의 책봉(외교적 관례)을 받지 못했다고 구박합니다.

문안인사 오면 "명나라의 책봉도 받지 못한 주제에!"라고 호통을 쳤고

신하들이 명나라에 세자 책봉을 주청하는 사신을 보내자고 하자

선조는 "왕비 자리 비어있는 것은 안 보이냐"고 호통을 칩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부랴부랴 간택하고 절차에 따라 맞아 들입니다.

그녀가 19살 처녀 인목왕후(소성대비)입니다.

 

그녀가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2년 간격으로 연이어 낳습니다.

정명공주가 태어난 것은 광해군도 기뻐하고 예뻐해줬습니다만,

영창대군은 선조가 워낙 편애하고 자리를 위협당할 수 있어 불안해했습니다.

인목왕후의 손위 올케는 "우리 집의 화禍가 여기서부터 시작이구나"했다죠.

선조는 자신이 10년만 더 살면 세자를 교체하려고 했고

류영경 등은 거기에 영합하여 영창대군을 지지합니다.

반면 이이첨, 정인홍 등은 광해군을 지지해서 이 둘이 소북과 대북입니다.

 

선조가 영창대군으로 세자를 교체하지 못한 채 죽습니다.

광해군은 처음엔 잘해주진 않더라도 건들진 않았는데

칠서의 옥(명망있는 사대부의 서자 일곱명)으로 인하여 계축옥사가 있게 됩니다.

김제남, 영창대군 등을 엮어 제거해버립니다.

 

선조가 그 전부터 광해군을 위해주면서 영창대군이 위협이 되지 않게 해야했죠.

그리고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을 잘 살펴주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러지는 않고 무조건 부탁만 해놓으면 누가 듣겠습니까.

 

 

 

 

2017.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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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서둘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본인은 피난갔습니다

광해군은 이때부터 세자의 신분으로 

나라 곳곳을 돌아다니며 의병들을 격려하고 전쟁을 치루기 위해 식량과 군사를 모으는 등

최선을 다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광해군은 충분히 왕 노릇을 할만큼 나이가 들었지만

선조는 이제 막 다시 얻은 젊은 왕비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자 슬슬 다른 생각을 품게 됩니다

선조는 피난 가느라 욕 먹는 자신과는 달리 

전쟁터에서 백성들과 동고동락하여 민심을 얻은 광해군을 못마땅해 한 거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광해군은 세자로 있었고

신하들의 의견도 있고

결정적으로 선조가 죽으면서 광해군이 선조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2017.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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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해군이 사실상 조정 내에서 인지도가 높았으며 지지 세력 대다수를 장악하고 있었다.


 광해군의 총명함은 세자에 책봉되기 전에도 밝혀져서 분조를 이끌기 전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기도 했고, 분조 활동에서 두각을 보여 수많은 대신들이 광해군에게 지지 의사를 보내었습니다.

 심지어 대신들은 선조에게 직접적으로 하야하고 광해군을 옹립하려고 요구하려고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었다고도 하는 등, 이미 대신들의 신뢰는 선조가 아니라 광해군에게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2. 영창대군이 종통을 비롯한 모든 부분에서 열악했다.


 실질적으론 적장자가 영창대군이 될 수 있지만, 영창대군은 고작 2세에 불과하며 지지 기반도 제대로 갖춰져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유영경을 비롯한 탁소북과 선조가 몇 안되는 영창대군의 지지 세력이었지만 그마저도 광해군 지지 세력에 비하면 세발의 피라 볼 수 있을 정도로 한참 모자랐습니다. 게다가 종통으로 보면 '부자의 의를 맺은 이상 양자라 할지라도 친자가 그 자리를 침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이 대세가 되었던 상태라 광해군의 종통 상 우위를 흔들 수 없었습니다.

2017.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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