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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만약 영창대군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수내꺼 조회수 2,302 작성일2006.07.29

여러가지 가상 질문 좀 드리겠습니다.

 

광해군의 등극 후에도 의인왕후가 죽지않았다면.

 

의인왕후는 광해군에게 큰 힘이 되었을까요?

 

물론 여전히 자식이 없는 조건으로요.

 

그렇다면 인조반정 역시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지않았다면..

 

영창대군을 죽일일도 없고.. 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킬일도 없었겠지요?

 

그렇다면 또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동복형제인 임해군을 죽였다는 명분으로 반정이 일어났을까요?

 

 

마지막 한가지..

 

광해군이 임해군만은 죽이지않았다면..

 

반정 당시 임해군은 광해군을 비롯한 왕실을 지켜주지 않았을까 싶네요.

 

임해군은 다소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군사를 거느리고 반정군들과 싸워서.. 반정을 막아주지 않았을까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인조반정.. 광해군...

 

참 안타깝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개인적으로.. 광해군을..

 

흠모하고 있어요.

 

제가 이순신장군님의 후손인데..

 

이순신장군님께서 죽지않고, 광해군편에 서서 큰힘을 실어줬더라면..

 

반정을 막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아 그리고.. 인조반정후, 광해군의 9명 후궁들은 어찌 되었나요?

 

김개시와 함께 참살당했나요?

 

명쾌한 답변 원합니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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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엔 위의 세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더라도 인조반정은 일어났을 겁니다.

 

인조반정은 표면적으로 유교주의 국가에서 어머니를 폐위시키고 동생을 죽인 서자출신의 패륜한 왕을 폐위시킨다는 명분을 내 세웠지만,

 

그 이면엔

 

성리학적 기본질서의 수호냐 실리적인 북방외교냐 하는 사회 근간을 뒤 흔들수 잇는 혁명적인 요소에 대한 보수파의 극단적인 군사적 반동이었습니다.

 

때문에 영창대군과 인목왕후의 존재는 다만 그 명분을 위해 앞에 나선 것 뿐이지,

 

인조반정의 본질은 친명적이며 보수적 성리학파였던 서인의 개혁적이며 실리적이고 친청세력인 북인세력의 숙청이었습니다.

 

세자책봉당시 이미 인빈김씨와 신성군을 둘러싼 서인계에 의해 견제당하던 광해군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정치적 대결은 어쩔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사실이 인조반정에 빌미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인조반정의 근본적인 성격을 볼때 이는 다만 핑계였을 뿐이며,

 

결국 어떤 핑계를 대어서던지 서인측은 북인측에 대한 정변을 계획했을 겁니다.

 

다만, 왕위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공인해줄수 있는 의인왕후 박씨가 살아있어 광해군을 옹호했다면,

 

적어도 인조반정의 '실패'정도는 기대할 수 있었겠지요.

 

또한 임해군의 존재도 광해군에게 도움이 되었으리라곤 보기 힘듭니다.

 

조선왕조는 이미 건국초부터 형제간의 피묻은 싸움으로 자리를 잡은 나라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때문에 광해군 또한 임해군의 잠재적 위협을 걱정하여 임해군을 제거한 것이고,

 

임해군이 '사병'을 소유한 것! 바로 그 점이 그러한 광해군의 생각을 더욱 굳히게 만든 계기가 된 겁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나,  결국 왕위계승이란 피붙이간의 싸움입니다.

 

이순신장군은 무당파를 견지했기 때문에 백의종군의 아픔까지 겪어야 했었던 분입니다.

 

물론, 정치보다는 조국을 먼저생각하는 충신이었기에, 당연히 왕을 위해서 싸웠겠지만...

 

글쎄요... 아마 그때까지 살아계셨더라면, 광해군보다 먼저 숙청당했을 것 같네요.

 

인조반정이후

 

광해군은 제주도로 귀향가 인조 19년에 죽었으나, 폐비 유씨는 쫒겨난 얼마 뒤에 화병으로 죽었습니다.

 

폐세자 질은 위리안치된 강화도에서 탈출하여 반정을 일으키려다 잡혀 돌아왔고,

 

결국 사약을 마셨으며, 폐세자빈은 자살하였습니다.

 

광해의 후궁이 낳은 딸은 민가에서 사사로이 키웠는데, 이후 인조가 배려하여 성인이 될때까지 해조에서 음식과 의복을 내리도록 조처했습니다.

 

상궁 김개시는 정읍원에서 불공을 들이다 반정이 일어난 사실을 알고 민가에 숨었으나, 반정군이 발견하여 반정다음날  목을 베었습니다.

 

후궁중 특히 소의 윤씨, 소용정씨, 소용임씨가 그 가솔과 함께 가렴이 많았는데,

 

소의 윤씨는 반정군이 군문에서 목을 베었고,  소용정씨는 집에서 자살했으며,

소용 임씨는 이귀 김자점이 고변당할 당시 이들을 두둔해줬던 공을 인정받아  죽이지는 않고 광해군이 위리안치된 귀향지에 보내져 광해군을 모셨습니다.

 

그외

숙의 허씨, 소의홍씨,  숙의 권씨, 숙의 원씨, 소용권씨등은 다 중도부처, 즉, 유배지를 정해 그곳에 머물게 하는 유형을 내렸습니다.

 

 

 

 

 

 

 

 

 

 

 

 

200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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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말은 없다고들 합니다만

그래도 굳이 따져보자면

아마 의인왕후는 광해군에게 힘이 되기는 했을 것입니다.

친자는 아니지만 광해군은 의인왕후를 많이 따랐고

의인왕후도 광해주를 많이 아끼고 사랑해줬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인조반정을 막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크게 네가지인데요

 

첫째, 동생(이복형제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인목대비)를 폐하였으므로 오륜에 어긋난다.(서자인 광해군과 북인정권으로서는 적통인 영창대군이 위협적이었죠)
둘째, 명나라의 은혜를 배반하고 오랑캐(후금 즉 청국)와 내통하였다.
셋째, 광해군이 서자이다.
넷째, 부패한 정치를 바로 잡는다.

 

하지만 인조반정은 반정이라기보다는 반역이라고 하는게 맞을 겁니다.

광해군이 능양군(인조)의 동생 능창군을 죽였기에 그에 따른 원한도 있을 것이고

그 스스로의 야심도 컸을 것입니다. 위에 네가지 명분은 다 반박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에 대한 반박: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보위에 세우려했음 대역죄에 해당하는 것이고 태종대왕이나 세조대왕에 비할 바가 못된다.
두번째에 대한 반박: 명나라는 쇠약해졌고 후금은 강성해지고 있었다. 또한 일전에 명국의 요청대로 군대를 파병했다(물론 열심히 싸우진 않았으나 파병했다는 자체로도 명의 은혜를 배반한 것은 아니었고, 명국 역시 명조실록에 광해군이 찬탈당했다고 적었습니다).
셋째에 대한 반박: 그 당시에는 선조의 적통이 없었다.
넷째에 대한 반박: 인조 때의 관리 즉 서인들의 부패도 극심했다.

아마 인목대비의 자식이 없었다면 인목대비가 폐비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왜냐면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만들려고 하였고 위협을 느낀

북인과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해서 유폐한것이거든요.

광해군은 또 영창대군을 죽일 때 임해군도 같이 죽이는데요 자신이 서장자가 아닌

 둘째인 것역시 위협이 되었으리라 생각하구요.  선조 사후 명나라에서 서열문제가 나오자

위협을 느낀 광해주가 영창대군과 임해군을 역모로 몰아서 죽인겁니다.

 

사실 권력은 부자지간도 형제지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임해군이 난폭하다는 이유로 세자에 오르지 못했구요. 군사력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기에 광해군은 임금자리를 빼앗길까봐 더욱 위협을 느낀겁니다.

임해군의 성격은 포악하다고 하여 세자에 오르지 못한 것입니다...

또 많은 군사였다고 해도 인조세력만큼 많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는 대부분 명국에 사대하고 있었고 광해군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또 김개시는 요부라 하여 참수당하고 다른 후궁들은 노비가 되거나 쫓겨나버렸구요

부인인 문성군부인 유씨는 유배후 화병으로 죽고 광해군의 아들은 자살을 합니다.

세자 뿐 아니라 폐세자빈 박씨도 스스로 목숨을 끊구요.

 

이순신장군이 살아계셨다고 해도 별 힘은 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 당시 당파로 서로 헐뜯기에 급급하고 썩은 대신들의 항의가 계속되어

결국 이순신장군이 관직에 못올랐을거라 생각했구요.

만일 관직에 올랐다고 해도 이순신장군도 별 수 없었을 겁니다.

인조반정당시 그 세력은 어마어마했고 도성 문도 쉽게 함락을 당해버렸으니

이순신 장군 한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겠죠

 

저도 광해군을 많이 좋아합니다.

사실 연산군이야 사람을 많이 죽여서(조선조 네차례 사화중 두 번이 연산군 때 일어났어요) 그 명분은 합당했지만요 광해군은 그 명분들이 하나같이 말도 안되는 것들이구요

오히려 민족의 반역자는 인조라고 생각을 하구요 폐위를 당하려면 인조가 당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호란 이후에 서양문물을 받아들여서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소현세자를 극도로 미워하는 등 아주 고집불통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토대로하면

인조가 독살했을 가능성이 높구요.. 그나마 광해군일기 중초본이 남아있어서

그의 업적들이 다시 재조명되고 있어요.. 참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200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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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예전에 답변자가 릴레이를 마감하면서 조선왕을 설명한 것 중에서 광해군을

선정해서 트로피를 달아준 것이 생각이 나는 대요

 

물론 릴레이는 답변자가 만들었으니 답변자고 말고는 누구나 트로피를 달아 줄수 있기는 하지요.

 

한마디로 답변자가 마음대로 달아 줄수도 있지만 누구바도 광해군을 설명한 것이 제일

잘 만들 었더군요.

 

광해군을 최고의 릴레이로선정하는 것은 문제가 없고 아무리바도 쉽게 판단할만하다군요

 

그러하다고 광해군의 설명이 똑히 완성적인 것 이라기 보다는 구분이 가능 정도라는 것이지요

 

본론으로 가서 먼저에서 설명된 것은 다 빼고 영창을 살려다면 글쎄요 어림반푼도 없다고 하면 너무 격한 표현인가요.

 

바꾸어 말해서는 영창을 죽였기에 그나만 광해군이 그만치 살고 귀양을 갔지만 천수를 누리었던 것입니다.

 

결과는 그럽니다. 부정하기도 그러군요

 

왜 너마져도 하고 죽은 시저라는 인간이 무덤을 판것은 바로 자신입니다.

 

결국 자신이 아주 큰 은혜를 배풀고 너무 착한 마음으로 용서를 해주고 목숨까지 살려준

그자가 시저를 가장 열렬히 죽이려고 했고 안죽여도 되고

시저가 산다고 해도 자기가 나쁘 것도 아니고 그냥 조용히 살면은 되는대...

 

개니 아무 생각없이 지가 나서서 시저를 죽이는대 앞장을 섬니다 한마디로 짐승보다 못한 인간인대요(하지만 이것은 이래야 하는 것임=역설적인 표현임)

헌데 이상한 것은 여기에 동조한 인간들이 대부분이 시저가 은혜를 배풀고 실수를 용서하고 살려준 것들입니다.

 

그리고 정치에서 용서라는 것은 곳 자살행위와 연관이 됩니다. 그리고 좋은 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요. 시저가 명군이라고요. 당시는 죽일놈 취급의 다름이 아니었고 지금에 평가를 하지만

전반적으로 이미지가 썩 좋은 것도 아니고요

 

 

반대로 시저와는 딴 판으로 정말로 사람죽이는 재미에 살았던 로마의 잔혹하기 이를 때 없는 황제가 있었는대... 그는 별 반역기가 있는 것이 아닌대도 지나치다 십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이것에 대한 미안함이라는 것은 생각도 안했고 광해군처럼 망설임도 없어습니다.

 

그리고 정치를 잘한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이 황제는 놀랍고 이해가 안 갈정도로 말년이 좋았고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것이 황제를 포기하고서도 무사히 행복하게 말년을 보냈다는 것은 더욱 믿겨지지 안는 정도지요.

 

도적적으로도 문제가 있던 황제였는대도 그랬지요. 이것은 역사학자들도 역사의 웃음꺼리고 이해가 안간다고 하더군요

 

인간의 악성은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모르는 것은 짐승이라는 말이 있고 항상이를 경계를 하려는 측면이 있는대 사람이라는 것은 태생적인 악성도 있어서 배은망덕한 행동을 부끄러운지 모르고 합니다.

 

또한 비굴한 것에도 수치심을 못찾고요

 

이런 인간의 특성을 탓할 것이 없어서 쓸 때 없이 만용적인 행동할 것이 없고 공적으로는 용서를 해주더라도 개인적인 용서는 단호해야 합니다.

 

쓸때 없는 폼잡다가 자기가 골로간다는 것을 명심하고 알아야지..

멍청이 라면 그리되지요

200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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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에서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사람은 세조, 중종, 인조입니다.

 

세조는 명분이 없었으므로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에도 몇달간은 단종을 왕위에서 몰아내지 못하고 권력을 잡는데 치중했습니다. 반대세력을 숙청해서 권력을 확고히 한 다음에야 왕위에 올랐죠.

 

중종반정은 거의 다수의 신하들이 찬성한 쿠데타였습니다. 연산군은 그만큼 악정을 저질렀고 많은 선비를 죽였으므로 최측근 외에는 아무도 지지하는 세력이 없었습니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인목대비를 폐비(어머니를 내쫒는 행위)한 행위가 가장 컸습니다.

그 행위에도 서인을 제외한 세력은 인조반정을 충분히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폐모까지도 하지 않았다면 전혀 반정의 명분이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인왕후 박씨가 살아 있었다면 인조반정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의인왕후가 살아 있었다면 인목왕후는 왕비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영창대군도 태어나지 않았을 테고 폐모도 없었겠죠.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긴급상황에서 둘째아들임에도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왕이 된 후 임해군이 계속 목숨을 보전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임해군은 장남임을 내세우면서 걸핏하면 왕좌를 빼았겼다고 떠벌이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었으니 아마도 제명에 죽지 못했을 겁니다. ...세종때 양녕대군, 효녕대군은 동생이 왕이 되었지만 전혀 왕권에 미련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세종과도 사이가 좋았고 그래서 세종보다도 훨씬 오래 살 수 있었죠.....임해군이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것은 무엇보다도 당시에 대궐을 지키는 총사령관인 훈련대장 이흥립이 반정에 가담한 것이었습니다. 호위대장이 반란군에 가담하지 않았는데도 반정이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희박했습니다. 이흥립은 반정음모의 거의 마지막에 가담했는데 사위였던 장신(張紳)의 설득이 주효했습니다.

 

인조반정이 일어날 당시 광해군의 후궁들은 다수가 죽거나 유배되었습니다.

김상궁(김개시), 소원정씨, 숙의윤씨는 피살되었고 그 외의 후궁들은 유배되었습니다.

 

 

200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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