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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이용

[ 李瑢 ]

시대 조선 초기
출생-사망 1418. 9. 19 ~ 1453. 10. 18
분야 서예
직업 서예가

조선 초기에 활동한 왕족이자 서예가이다. 천부적으로 예술에 대한 자질을 타고났으며, 왕자라는 최고의 환경에서 시 · 서 · 화에 심취하여 15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서예가로 자리매김 되었다. 특히 조맹부(趙孟頫)의 글씨를 깊이 체득하고 이를 널리 보급시켜 조선 전기 송설체의 유행을 선도하였다.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解堂) · 매죽헌(梅竹軒) · 낭간거사(琅玕居士)이다. 세종(世宗)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사이의 여덟 왕자 중 셋째로 태어났다. 1428년 6월 16일 대광보국안평대군(大匡輔國安平大君)에 봉해졌고 이듬해 1월 20일 좌부대언(左部代言) 정연(鄭淵)의 딸과 혼인했다. 1430년 진평(晉平)[수양] · 임영(臨瀛) 대군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했고, 1438년 수양 · 임영 · 광평(廣平) 대군과 함께 함길도 네 곳에 신설된 진(鎭)의 각 고을을 총괄했으며 당시 이용은 회령(會寧)을 맡았다.

이용, 비해당집고첩발

이용, 비해당집고첩발

이용의 성품에 대해서는 박팽년(朴彭年)의 『비해당기(匪解堂記)』 및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 등에 자세히 적혀 있다. 이에 따르면 이용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을 잘했으며, 서화에 뛰어나 특히 글씨로써 당대 최고였고 음률과 바둑 등의 잡기도 두루 잘했다고 한다.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시 명사로서 그와 교제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잡업에 종사하는 이들까지 그를 따랐다고 한다. 반면 들뜬 성격에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호방한 행동을 보였다는 등의 상이한 평가도 전해진다.

이용은 옛 것을 좋아하고 탐승(探勝)을 즐기며 호사스런 생활을 했다. 이용은 비해당에 온갖 진기한 화목(花木)을 심고 진귀한 동물을 키우며 석천(石泉)의 즐거움을 누렸고, 남지(南池) 밖 용산강 가에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지인들과 모임을 즐겼다. 또 1451년 가을에는 지난 1447년 4월 도원(桃源)을 꿈꾼 곳과 방불한 장소를 도성 북문 밖에서 찾아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지었다. 이곳은 현 서울 종로구 부암동 329-4번지 유형문화재 제22호 일대로, 이곳에서 문사들과 더불어 학문과 예술로 교제했고, 측근들과 심계(心契)를 맺으면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갔다고 여겨진다. 말년에는 마포 별장에서 측근과 지내거나 김종서 또는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집에 자주 머물렀다고 전한다.

세종이 사망한 뒤 이용은 훈구대신 황보인(皇甫仁), 김종서와 술수에 뛰어난 이현로(李賢老) 등의 도움을 받아 정치력을 길러 작은형 수양대군의 세력에 맞서는 실력자로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1453년 10월 10일의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인해 김종서 · 황보인 등이 살해되고 그는 강화(江華)로 유배되었다가 10월 16일 강화 서북쪽 교동(喬桐) 섬으로 옮겨진 뒤 10월 18일 사사(賜死)되었다. 슬하에 2남 1녀가 있었는데 맏아들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은 아버지를 따라 강화로 유배갔다가 뒤에 진도(珍島)로 옮겨진 뒤 1454년 8월 사사되었다.

둘째아들 이우량(李友諒)은 어려서 죽었고, 외동딸과 이용의 첩, 그리고 이우직의 아내는 계유정난 뒤 외방의 관비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17세기 중반부터 종실을 중심으로 복관(復官) 움직임이 있다가 1747년(영조 23)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시호는 장소(章昭)이다.

이용은 조선 초기 문예 방면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특히 세종의 깊은 관심을 받으면서 학문과 예술의 바탕을 키워갈 수 있었고, 뒤에 대군으로서 당시의 문예(文藝) 방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불서(佛書)를 간행하고 사경(寫經) 작업에 참여하는 등 조선 초기 왕실불사(王室佛事)에 적극 나섰고, 『당송팔가시선(唐宋八家詩選)』을 비롯하여 중국 여러 명시인들의 시선(詩選)을 편간하고 집현전 학사를 비롯한 문사들과 잦은 시회(詩會)를 통해 이를 실천하는 등 세종조 시학(詩學)의 중심에 섰으며, 나아가 중국 역대 서화를 널리 수장하고 이를 안견(安堅)을 비롯한 당대의 화가에게 제공하고, 조선시대 법첩의 효시가 된 《비해당집고첩(匪解堂集古帖)》을 간행하며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 · 《증도가(證道歌)》등의 조맹부 필적을 널리 개간하여 송설체 확산에 기여하는 등 서화 방면에서 크게 공헌하였다.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몽유도원기(夢遊桃源記)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몽유도원기(夢遊桃源記) 1447년, 비단에 먹, 38.7×70.5cm, 일본 텐리대(天理大)

이용의 글씨에 있어서의 명성은 당대부터 이미 높았고 후대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필적 또한 15세기 어느 명필에 비해 상당히 남아있는 편으로, 몇몇 진적을 비롯하여 다수의 모각 필적이 전한다. 이용의 해서로는 《몽유도원도권(夢遊桃源圖卷)》에 실린 <몽유도원기(夢遊桃源記)>가 가장 유명하다. 이 작품은 1447년(30세) 도원을 노니는 꿈을 꾼 뒤 그 정경을 안견(安堅)에게 그리게 하여 3일 후 완성되자 그 사연을 지어 소해(小楷)로 쓴 것이다. 비단 바탕에 종횡으로 계선(界線)을 치고 썼다.

글씨는 그가 잘 구사했던 조맹부의 소해필적과 유사하나 그것에 비해 붓끝의 움직임이 강하거나 기교적이지 않다. 특히 가로획이 좀 위로 굽고 운필이 매우 부드럽다. 이용의 해서가 조맹부의 송설체에 바탕을 두었지만 이처럼 완곡(婉曲)한 특징이 더욱 유연하게 나타나는 점이 돋보인다. 이런 점에서 이용은 송설체의 특징을 더욱 차분하고 원숙하게 해석해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용의 행초로 전하는 묵적에는 대부분 관서(款署)가 없다. 그러나 신빙성 있는 모각필적과 이들 묵적을 대조해보면 짜임이나 점획이 서로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진적의 범위에서 언급할 수 있다. 국보 제238호로 지정되어 있는 필적으로 비단 바탕에 당(唐) 이상은(李商隱)의 칠언율시 「봉시(蜂詩)」를 행초로 쓴 <소원화개첩(小苑花開帖)>은 균형잡힌 짜임새, 필선의 부드러운 리듬감, 붓끝의 미묘한 연계성, 용필의 완벽성 등이 조맹부의 중년행서와 흡사하면서도 그것에 비해 좀 더 차분하고 평온하다. 이러한 특징은 이용 행초의 전형으로서 다른 필적에서도 잘 나타난다.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는 흑지(黑紙) 바탕에 금니(金泥)로 썼기 때문에 붓질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자형이나 짜임 및 점획에서 앞의 <소원화개첩>과 상통하며 이용의 대표적 모각필적인 <송엄상좌귀남서(送嚴上座歸南序)>와도 잘 비교된다. <송엄상좌귀남서>는 석각(石刻)으로 수준높은 모각의 경지를 보여주는 필적이다. 석판 1매에 4행씩 모두 8매에 모각했는데, 마지막 판 끝에 소해로 "己未孟夏 福昌君楨摸刊"이라 새겨 1679년 복창군 이정(李楨)에 의해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1450년(33세 7월 하순)에 쓴 것으로 말년의 무르익은 글씨인데, <소원화개첩>에 비해 점획이 더 변화롭고 짜임도 훨씬 활달하다. 특히 붓끝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모각했기 때문인지 필세도 강하게 보인다. 이 필적은 비단 바탕에 정세하게 모사한 것도 전하고, 후에 목판으로 양각(陽刻)되기도 했다. 또 <재송엄상좌귀남서(再送嚴上座歸南序)>라는 모서(摹書) 2종도 전하며 엄상좌를 찬미하는 <엄상좌찬(嚴上座贊)> 석각 필적도 전하고 있어 <송엄상좌귀남서>와 일련의 것임을 말해 준다.

이용, 송엄상좌귀남서, 1450

이용, 송엄상좌귀남서, 1450

이용의 모각 필적 중 1443년(26세)에 쓴 <비해당집고첩발(匪解堂集古帖跋)>은 이용의 기년작 가운데 가장 이르고 서풍도 이후의 것과 좀 다르다. 자형이 위아래로 수려한 점에서 조맹부 서풍과 더불어 왕희지 행초의 영향이 상당히 잔존해 있어 이용도 초년에는 왕희지 등의 고전적 서법을 익혔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필적이다. 이 발문 필적보다 좀 뒤에 썼을 것으로 여겨지는 예로서 <이교리전(李校理前)>이라는 서간 역시 모각으로 전한다. 현재까지 이용의 서간으로 알려진 유일한 필적인데, 초서를 위주로 간간이 행서를 가미한 것으로 위 발문 필적에 비해 조맹부의 초서풍에 훨씬 가까워 보인다.

몇 년 전 문종(文宗)의 초서, 이용의 행초, 조맹부의 행서 등의 모각필적을 합친 《낭간거사서법(琅玕居士書法)》이 소개되었다. 이 필적도 각법이 예리하여 원적의 면모를 잘 전하고 있으며 수량도 상당히 많다. 그 중에서도 석판 8매에 새긴 <칠언절구 7수>는 이용이 35세 때인 1452년 12월 하순에 썼다는 점에서 말년 시기의 글씨로서 매우 귀중하다. 이전의 행초 필적에 비해 짜임이 보다 변화가 많고 점획의 강약도 뚜렷하며 운필에 있어서도 힘들이지 않은 능숙한 필치를 보인다.

이 밖에 대자서로 목판에 새긴 병풍용 행초가 두 벌 전한다. 한 벌은 자형이 좀 길쭉하고 원필(圓筆)이 많으며, 다른 한 벌은 자형이 좀 납작하고 각진 방필(方筆)이 섞여 있다. 운필이 부드러우며 원필이 많은 <행초 오언율시(行草 五言律詩)>(6폭)는 드문드문 행서를 가미한 것으로 운필의 율동감이 매우 돋보이는 필적이다. 또 자형이 좀 납작하고 각진 획을 섞어 쓴 <행초 칠언절구(行草 七言絶句)>(6폭)은 모각으로 인해 좀 딱딱해졌지만 운필이 힘차고 경쾌하다. 이들 대자행초 필적을 조맹부의 필적과 비교해보면 행서와 초서를 섞어 쓰거나 방필과 원필을 적절히 배분하는 방식, 경사진 삐침, 파임이나 긴 세로획으로 운필의 리듬을 강조한 점, 위아래 자를 잇는 처리에 이르기까지 흡사한 경향을 보인다.

또 이용이 원(元) 선우추(鮮于樞)의 초서 6점을 소장했다는 신숙주(申叔舟)의 『보한재집(保閑齋集)』 권14 「화기(畵記)」의 기록이 있듯이 이용의 행초풍에 있어 선우추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이용의 대자필적을 선우추의 초서와 비교해보면 직선적으로 간명하게 처리한 획이나 글자의 대소를 뚜렷하게 구분한 점에서 상당한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이들 조맹부와 선우추의 초서에는 왕희지(王羲之)와 당(唐) 손과정(孫過庭)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회소(懷素)나 안진경(顔眞卿) 등의 분방하고 솔직한 행초서풍이 배어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용은 그들의 필적을 통해 진당고법(晉唐古法)의 풍격을 종합적으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이용의 서예는 계유정난의 화를 입은 뒤에도 큰 변함없이 찬미되었다. 이용의 글씨에 대해서는 당대나 후대의 찬사뿐만 아니라, 그의 글씨를 접했던 청 · 명의 문사들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1450년 1월 내조한 명사(明使)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이 중국에 전할 묘필(妙筆)을 청하자 이용이 수십 폭을 써 주었는데, 이를 본 예겸이 "우리나라에 진겸(陳謙)이 글씨로 천하에 이름이 났는데 필력이 굳세고 활발한 기상이 이에 미치지 못하니 정말 송설옹(松雪翁)의 삼매(三昧)를 얻은 것입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 말은 사신으로서 외교적 수사(修辭)라기보다 조맹부 서풍의 진수를 터득함에 있어 명나라 어느 문사보다도 뛰어나다는 의미일 것이다.

김안로(金安老)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는 이런 일이 있은 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이들이 중국의 묘필을 구하려 하자 명인(明人)들이 너희 나라에 제일의 명필이 있는데 굳이 먼데서 구하려 하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또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우리나라 명서가를 평가하면서 이용에 대해 "안평대군은 오로지 자앙1)을 모방했으나 호매(豪邁)함에 있어서는 서로 상하를 다툴 정도로 늠름한 것이 비동하는 필의(筆意)가 있다"고 하여 이용의 위상을 조맹부에 견주었다.

16세기에 이용의 글씨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알려주는 기록으로 『중종실록(中宗實錄)』의 이용 관련 기사를 예로 들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명의 사신으로 내조하는 인사들 가운데 국내 묘필을 원하는 경우가 많아지자 중종이 이용의 글씨를 준비하여 1537년 3월에 내조한 명 사신 일행에게 이를 선사했으며, 주고 남은 12폭 병풍을 나누어 8폭을 개장하여 다음에 오는 정사와 부사에게 각각 4폭씩 주고 나머지 4폭도 족자로 개장하여 후일의 쓰임에 대비하자고 승정원에 하명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용의 필적은 그가 사망한 뒤에도 어필(御筆)에 버금갈 정도로 조선을 대표하는 필적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이용, 시문

이용, 시문

조선 후기 18세기 문헌 『학산한언(鶴山閑言)』에는 이용이 이백의 오언율시를 쓴 큰 병풍에 대해 "안평대군의 체(體)는 송설(松雪)이지만 획은 종(鍾) · 왕(王)이다"라고 한 김창협(金昌協)의 말에 참으로 동의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조선 후기 문사들에게 이용 글씨는 외형적 체격은 조맹부를 따랐으나 획법은 종요 · 왕희지의 고법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인식했음을 말해준다. 즉, 이용이 고전적 규범으로서 왕희지 서풍을 근간으로, 근대적 유행서풍으로서 조맹부 서풍을 터득했음을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예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 후기 문인서화가 신위(申緯)의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에는 청(淸)의 문인 옹방강(翁方綱)이 신위가 소장한 이용의 필적에 대한 평이 실려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담계(覃溪)가 내가 소장한 안평대군의 비단 바탕 진적에 대해 말하기를 '이는 능히 송설(松雪)의 솜씨로 《성교서(聖敎序)》 필의를 운필한 것이다'고 했는데, 정말 정확한 의론이다" 하였다. 즉 이용의 필적에 조맹부의 영향과 함께 왕희지의 필의가 나타난다는 것을 간파한 옹방강의 논평에 대해 신위도 전적으로 동의한 것이다. 앞서 1443년 작 <비해당집고첩발> 등 이른 시기의 필적에 왕희지 서풍이 나타나듯이 이용 글씨에 이러한 고법이 깔려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안평대군 이용은 36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세종 · 문종 연간의 문예 방면에서 왕성한 활동력을 보였다. 특히 예술 방면에서 이용의 글씨가 조선시대 서예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뚜렷하다. 고려 말에 들어왔던 조맹부의 송설체를 비롯한 복고주의 서풍을 깊이 터득하여 원 · 명대는 물론 조선의 어느 송설체 서예가도 미칠 수 없는 경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용의 서예 방면의 성과는 문예활동과 깊이 관련되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켰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용은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이러한 문예 방면에서의 활동과 성과로 인해 사사된 뒤에도 그의 학예(學藝)는 지속적으로 찬미되고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실제 조선 왕조 전반기 동안 이용의 영향을 받지 않은 서예가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특히 성종을 비롯한 왕실인사의 서풍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다만 명필의 개성을 논함에 있어 이용의 글씨는 아쉬운 감을 떨칠 수 없다. 만약 정치적인 정변(政變)에 희생되지 않고 수를 누렸다면 이용의 글씨는 보다 뚜렷한 독자성을 이루었을 것이며 후세에 미친 영향도 더욱 커졌을 것이다. 현재 이용의 전칭작(傳稱作)이 다수 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상세한 고증작업과 이용 서풍이 후대에 유행된 양상 등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제공처 정보

삼국시대~1945년을 전 · 후한 시기에 활동한 2,260명에 달하는 화가 · 서예가 · 화승(畵僧)의 약력과 작품세계 등을 수록한 전문사전으로, 2007년부터 2011년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교열 · 편집 · 감수 과정을 거쳐 발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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