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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재질문입니다 ㅎ_ㅎ [평가]
owl0**** 조회수 57,962 작성일2010.11.11

...모두 올려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쓴 것입니다. 121페이지에 달하니까 천천히(이봐) 답변해주세요 엉엉

처음 부분 일부만 해주셔도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1

 아니, 그냥 읽어만 주세요!! 엉엉

 

(친구랑 같이 번갈아 쓴 소설입니다. 중간중간 글쓴이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거에요, 아마도.)

 

*제가 생각하는 수정을 요하는 부분 : 그 남자가 카스올리를 배신하는 부분, 에밀리와 카스올리가 싸우는 부분, 급하게 상황 분위기가 전환이 되는 부분, 상황묘사가 덜 들어간 부분, 급전개가 되는 상황들

->이걸 제외하고 수정할 것이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전체적인 느낌은 어떤가요? 아직 처음 부분이긴 하지만...

 

 

프롤로그.

 

“가자, 에밀리.” 어둠속에서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무언의 답변을 한 다른 존재는 그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두려운 듯이 자꾸만 고개를 돌려 힐끔힐끔 주변을 살펴보는 그 존재에 빽빽한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나온 희미한 빛이 설핏 비치면서 실루엣이 드러났다.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 불안하고 초조한 듯한 손은 꼭 쥐고 입가에 가져다 대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앞의 존재가 내민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저기요, 스승님…….” “쉿.” 앞의 존재가 주의를 주며 말을 끊었다. 여자아이는 손을 더욱 더 꼭 잡았다. 둘은 발걸음을 멈추고 숨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파르르 떨며 서 있었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까, 여자아이가 그 시간을 참지 못했는지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 순간 여자아이의 짧고 작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앗!” 그와 동시에 자신의 손에서 여자아이의 작은 손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앞의 존재가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에밀리? 에밀리? 어디 있어, 지금?” 소리를 죽였으나 몹시 다급하게 찾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여자아이가 대답했다. “여기 있어요.” “내가 절대로 손을 놓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안심한 목소리였으나 꾸중하는 말투가 함께 담겨 있었다. 어둠 속에서 다시 손을 잡는 여자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무엇 때문에 손을 놓친 거야?”

“……벌레가 다리에 앉아서요.”

“깜짝 놀랐잖아. 이제부터는 정말 조용히 해야 돼.”

“네.”

앞에 선 남자는 다시 조용히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여자아이도 그를 따라 숨죽여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 둘은 빽빽한 나무 사이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 남자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여자아이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점을 차마 깨닫지 못했다.

 

 

 

 

 

1.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이 검은색 우산을 톡 톡 치며 흘러내렸다. 우산살 끝으로 삐죽 나온 곳에서 줄줄 빗물이 흘러내려서 운동화 위로 떨어졌다. 아예 비가 올 거면 시원하게 장대비라도 오던지. 시험이 끝난 날인데 뭐가 이렇게 우울할까. 주위의 다른 아이들은 서로 재잘거리며 걷고 있었다.

14살이 된 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이렇게 우울하게 있어야만 한단 말인가. 눈살을 찌푸리며 학교 화단에서 굴러 나온 작은 돌멩이를 툭 툭 차며 걸었다. 그럭저럭 돌멩이가 내가 원하는 대로 굴러가 줄 때까지는 그나마 아무런 생각도 없었는데.

조그만 회색 돌멩이가 마침내 삐긋하면서 잘못된 각도로 나가버렸다. 그와 동시에 재생 버튼이라도 누른 듯이 내 머릿속은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냥 확 우산 따위 접고 걸어볼까. 뭔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좋은 아이디어 같아 내 머릿속을 휘젓는 아이러니에 혼자 웃었더니 옆에서 키아크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카스올리. 왜 그래?”

 

키아크라는 고상하다. 적어도 나보단. 만약에 누군가 검은색 우산을 쓰고 내 옆에서 웃는다면, 미친 거 아냐? 라는 표정으로 그 사람을 쳐다봤을지도 모른다.

 

“그냥, 짜증나서. 가뜩이나 시험도 망쳤는데 어떻게 날씨조차 이럴 수 있지?”

“첫 시험인데 말이지.”

 

키아크라가 위로를 하려는 건지 말을 덧붙이는 건지 모를 말을 하자 내 짜증은 극도로 치솟았다.

 

“그러니까 내 말이! 차라리 이런 날 해라도 나면 운동이나 하면서 스트레스 풀 수 있잖아! 세상에, 날씨도, 학점도 나에게 자비를 베풀 줄 몰라!”

 

키아크라가 무언가 맞장구치는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대신 난 우산을 접었다.

 

“너 우산 안 쓸 거야?”

 

키아크라가 옆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응, 안 써. 이런 날에 써 봤자 뭐해, 라고 대답하자 키아크라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쏘아온다. 아무렴 어때. 이런 날에 차라리 비나 맞자고. 키아크라의 동그래진 갈색 눈이 문득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갈색 머리와 잘 어울리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칙칙한 초록색의 눈에다가 짧은 검은색 머리가 불만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키아크라 옆에 있으면 자주 위축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우리 둘 다 남자애들과 잘 어울렸지만 급이 달랐다.

나는 같이 뛰고 차면서 말 그대로 함께 어울려 노는 쪽이었지만, 나보다 훨씬 여성스러운 면이 많은 키아크라는 줄곧 남자애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심지어 작년에 어떤 적극적인 아이는 축구하다가 나를 응원하는 키아크라에게 윙크를 날리기도 했다. 대담하게도. (그 애가 고백을 했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도 머리를 길러볼까, 하고 생각했지만 10초 안에 그 생각을 털어버렸다. 엄마 말대로, 나는 짧은 머리도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하니까. 아마 내 검은색 머리가 키아크라처럼 길어지면, 그대로 귀신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머리길이나 색깔, 눈 색깔은 친구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니까.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우리는 줄곧 단짝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하찮은 이유들로 싸운 적은 결코 없었다. 비록 내가 키아크라에게 억지로 축구를 시켜서 3일간 말도 안했던 적은 있지만.

 

그래. 나는 오늘 세 가지 형태의 비를 거세게 맞았다. 첫째는 내 성적표의 비. 둘째는 내가 우산을 접고 맞은 소나기. 셋째는 엄마의 잔소리 비. 아마도 셋째가 가장 강력한 폭우였던가? 내 점수를 보고 엄마는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셨지만 난 미처 도와드리지 못했다. 그건 온몸을 이빨과 발톱, 뿔로 무장한 어떤 잠자는 괴물에 손을 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난 전설 속의 영웅이 아니니까!

아무튼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아니, 전혀 좋지 않았다! 아니, 그것도 아니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난 망했다! 엄마가 어디서 알았는지 골목 구석에 박힌 조그만 학원을 보내기로 한 거다.

 

엄마의 잔소리가 간신히 조금 멎고 나자 어느 새 취침시간이 되어 있었다.

…웅. 잠자기 전, 무언가 깊게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랐다기보다는 짜증이 조금 났다. 갑자기 뭐야. 머리를 가볍게 털어내고-급하게 머리를 말리는 바람에 아직 덜 마른 물방울들이 조금씩 톡톡 튀어나왔다-이불을 몸에 돌돌 말았다. 내일 부터는 지옥의 연속일 테니 잠이나 자 두자는 심정으로 잠을 청했지만, 아까부터 나지막하게 웅웅거리며 울리는 소리 때문에 잠에 빠져들 수 없었다.

나는 내 지옥의 요소가 하나 더 추가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며, 그 웅웅거림을 뒤로 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꿈도 없이, 다만 자는 동안에도 계속되는 웅웅거림과 함께 호흡했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

 

“어! 카스올리-!”

“캑! 이거 놔!!!”

학원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달려오는 물체에 내 목이 조이는 것을 느꼈다. 낯익은 목소리와 이 익숙한 냄새…….

“키아크라!”

역시. 내 예상이 적중했다. 어쨌든 나 혼자 이 강의실 학생이라서-수준이 너무나도 딸리는 바람에 원장 선생님이 특.별.히. 만들어준 반이란다-심심했었는데, 새로운 애, 그것도 키아크라가 와 줘서 정말 다행이다.

“네가 이 반에 올지는 몰랐다.”

“너랑 학점이 별로 차이 안 나잖아.”

그렇다. 이번 새 학기 첫 시험 결과, 내 학점은 평균 D 정도로 바닥을 쳤고, 키아크라는 평균 C 정도로 바닥을 스쳤다.

“여기 학원 선생님 어때?”

“끔찍해.”

“남자야?”

“여자야. 그것도 아주 끔찍한.”

“적어도 너 보다는 낫겠지.”

 

키아크라가 쿡쿡 웃었다.

 

“장난해?”

“농담이야, 농담.”

그렇게 반갑게 만난 키아크라와 즐겁게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앉아라. 벌써 5분쯤 지체했구나.”

“끄아아아아악-!!”

어디선가 불쑥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나와 키아크라는 합창으로 비명을 질러댔다. 뭐, 뭐야. 이 사람은 언제 들어온 거야?

나와 키아크라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 남자였다. 어라? 날 가르치는 선생님은 인내심이 바닥을 치는 여선생인데. 이름이…뭐였더라. 에스카르고이었나.

“놀랐나요?”

 

그 새로 들어온 남자 선생님-별로 선생같이 생기진 않았어도 책을 들고 왔으니-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 웃음이 나와 키아크라 둘 다가 아닌 나를 유독 보는 것 같다. 착각인 건가?

놀란 가슴이 좀 진정되자, 그제야 그 남자선생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에… 뭐랄까. 굉장히 차갑고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얼음의 투명한 그림자랄까. 엄청 하얀 피부에다가 굉장히 까만 눈이 대비되어서 안 그래도 하얀 피부가 더 빛나는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내 귀에 대고 “어머, 되게 잘생겼다. 안 그래?” 라고 속삭였을 키아크라가 웬일로 가만히 있다. 그게 아마, 그 남자의 분위기 때문인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림자, 거짓 실루엣같이 보이는 그 남자.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 눈에만 보이고 마음에는 와 닿지 않는 남자.

 

“학생은 이름이 뭐죠?”

“…키아크라.”

 

키아크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걸 눈치 챈 건지, 그 남자가 빙긋 웃더니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내 온몸이 신경이 곤두서는 듯 했다. 내 얼굴이 싹 굳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남자는 내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학생은?”

내 입술이 떨어졌다 다시 붙었다. 무슨 일인지, 내 모든 몸이 그 남자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 남자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왜? 이 선생님의 압도적인 분위기 때문일까?

 

“쟤는 카스올리에요.”

 

결국 키아크라가 나대신 대답했다. 키아크라가 답한 후에도 이 선생님은 계속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결국 고개를 돌리고 다시 웃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느꼈다. 아까 날 보며 웃었던 미소와, 지금 이 미소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이 남자… 이상해.’

 

강의가 시작되었지만 내 정신은 다른 데 집중되어 있었다. 웅웅거리는 소리에 그렇게 내 자신이 빠져 본 적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이 선생님이라 불리는 남자와 마주치기 싫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2시간 내내 집중해서 웅웅거림을 들으니까 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 수, 아니 느낄 수 있었다. 그 소리는 살아있었다. 아니,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숨소리처럼 느려지고 빨라질 때도 있었고, 강해질 때도, 잦아들 때도 있었다.

마침내 수업이 끝났다. 순간 내가 그 남자 선생님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키아크라에게 물었다.

 

“저 선생님 이름 물어보러 갈래?”

“왜?”

“저 남자는 우리 이름을 아는데, 우리는 저 남자의 이름을 모르잖아. 뭔가 께름칙해.”

“글쎄. 아무튼 네가 ‘저 남자’ 라고 부르는 저 선생님 분위기가 이상하긴 하다.”

“그러니까 물어보자고오-!”

 

결국 내 고집에 못 이긴 키아크라는 내게 끌려가다시피 그 남자를 같이 찾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그림자가 사라진 듯이.

 

“없잖아.”

“......”

 

그 남자를 못 찾았지만, 실망이 느껴지기는커녕 오히려 불안감과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그 사람은…누굴까? 아니, 뭘까? 웅웅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2.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장난이 아니잖아. 이제는 잠을 잘 때도 들리니까, 정확히 말하면 꿈을 꿔도 금세 그 소리가 찾아오니까. 그렇다고 무턱대고 병원으로 가서는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요.” 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미쳤다고 그런 말을 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어놓자 옆에서 키아크라가 뭐하는 짓이냐며 물어왔다.

 

“미치겠어. 뭔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누구는 안 그런 줄 알고. 나도 미치기 일보직전이다.”

 

키아크라는 내가 말한 것이 문제를 풀다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저도 펜 꼭지를 깨물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말하면 문제 정도는 다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죽어라 풀던 문제인데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내가 모르겠다고 한 건, 그저 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

 

“다 풀었어요?”

“아악!!! 깜짝이야!!!”

 

또 언제 다가왔는지 내 옆에 서서 말을 거는 남자 덕에 하마터면 무의식중에 그 남자를 밀칠 뻔했다. 악 더 커졌어. 이번엔 귀를 울릴 정도로 확 커지는 소리에 순간적으로 귀를 막았다. 옆에서 괜찮냐며 물어오는 키아크라에게 괜찮다고 손을 들어주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디 아파요? 카스올리, 라고 했던가?”

“아뇨, 귀가 조금 아파서요.”

“……….”

 

웃으면서 얘기하자 아 그래요? 라며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주 잠시였지만, 나 방금 그에게 조금의 경계심?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나, 이상해 요즘. 한숨을 푸욱 내쉬고 펜을 집어 들었다. 이제 귀에서 웅웅대는 소리는, 노래처럼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

…대체 나에게 뭘 바라고 있는 것인가. 이제는 거의 폐인 수준이 되어버렸다. 가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어떤 리듬이 반복되는 느낌이긴 한데, 그 리듬은 차마 따라갈 수도 없이 복잡했고, 어떤 <언어> 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언어. 언어. 확실하지만, 내가 쓰고 다니는 언어는 아니었다.

 

“카스올리. 정신 차려.”

“아. 응. 아 뭐야.”

 

멍 때리다가 갑자기 나를 툭툭 치는 키아크라 덕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갑자기 볼륨이 올라간 듯 한 느낌에 나는 멍하니 키아크라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목소리도 안 들리네. 입모양을 보며 겨우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요즘 왜 그렇게 멍해? 정신 좀 차리라니까.

 

“나도 그러고 싶어. 그런데 정신이 안 차려지네.”

“무슨 일 있어?”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머리에 손을 올리는 키아크라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저 고개를 흔들어주었다. 내가 저 아이에게 뭘 얘기할 수 있겠어. 한숨을 푸욱 쉬고 풀다 만 문제를 바라보았다. be butted, be gored, 웅, be stuck, 웅, be hit, be bumped…웅웅웅웅웅웅. 아 짜증나. 참자 참자 참자 참자. be paint. bear. 난 할 수 있어. 나는야 보살.

 

“아야!!”

 

옆에서 들려오는 키아크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키아크라가 엄지손가락을 붙잡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와 책상과 종이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일어나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휴지를 꺼냈다. 휴지로 손을 붙잡고 있던 키아크라가 입을 열었다.

 

“이거 안 멈출 것 같아…나 잠깐 원장실 좀 다녀올게. 거기에 구급상자 있다고 했던 것 같아. 좀만 기다려.”

“알았어. 빨리 갔다 와.”

 

급하게 교실을 뛰쳐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책상과 종이에 떨어진 붉은 액체들을 바라보았다. 동글동글하게 퍼진 붉은 핏방울들을 보던 나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무섭게 뛰어버렸다.

 

먹고 싶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생각을 알아채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넘어질 뻔했다. 말도 안 돼. 왜? 이럴 수는, 없어. 엄청나게 쇼크를 먹어버렸다. 마시고 싶어, 핥고 싶어, 맛보고 싶어.

…먹고 싶어.

한 번 생각이 들자마자 수없이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들에 나는 이를 바득 갈았다. 종이에 묻은 핏방울들은 이미 굳어서 검붉은 색을 띄고 있었다. 그것마저 먹고 싶어. 살며시 들어 올린 손이 수전증 환자처럼 흔들렸다. 귓가에서 들리던 소리도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손을 들었다 올렸다 한 게 수십 번이었다. 왜 이렇게 키아크라는 안 오는 거지. 그녀가 와야 견딜 수 있는데. 낮게 중얼거렸지만 욕망은 멈추지를 않았다. 끝내고 싶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입 안에서 비릿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맛있다고 생각했다.

 

옆에서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 옆을 바라보았다. 문에 손을 얹고 나를 바라보는 그 사람. 그제야 겨우 정신이 드는 느낌이었다. 나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남자는 나를 놀랐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무표정. 딱딱하게 굳은 것도 활짝 펴진 것도 아닌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엄청나구나. 그렇지?”

 

갑자기 웃으면서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문득, 다시 귓속에 웅웅거리는 소리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직도 혀끝에서는, 피 특유의 달콤함이 퍼지고 있었다.

 

 

 

 

 

3.

 

 

 

그 남자의 표정은 뭐랄까, 이해하기 어려웠다. 뭐야, 저건. 시간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그 남자는 계속 나를 쳐다보았고-눈동자는 날 보고 있지만 나는 그 시선이 나를 꿰뚫고 있다는 걸 느꼈다-나는 그 시선을 맞받아치며 입 안에 퍼진 피 맛을 없애려고 혀를 굴리고 있었다.

 

“맛있니?”

 

뭐…라고요? 내 귀가 잘못된 건가? 마음 같아서는 귀를 후비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손가락 끝에 묻은 피 때문이기도 하고, 그 남자 앞에서 감히 움직일 수 없게 하는 이상한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다.

세상에, 진짜 내 귀가 맛 가버린 건가? 잘 알지도 못 하는 학생한테, 그것도 자기 앞에서 피를 먹고 있는 애한테, 맛있니? 라니. 그럼 난 네 맛있어요, 한 번 드셔보실래요? 하고 답해야 하는 건가?

꼴깍. 침을 삼키자 웅웅거리는 소리가 요동을 쳤다. 낮아졌다 높아졌다-어라? 높낮이도 생겼네…….―커졌다 잦아들었다가……. 아, 정말 미치겠네. 정신 차리자, 카스올리! 넌 지금 너한테 피가 맛있냐고 물어보는 미친 남자 앞에 있어!

일단 내가 지금 뭘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해. 우선 키아크라가 오기 전에 일을 처리해야겠지. 나는 순간적인 욕망에 홀딱 넘어가버린 내 자신을 원망하고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 남자가 훨씬 빨랐다.

 

“일어나.”

 

그 남자는 다시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그건 내가 이제껏 본 미소와는 부류가 다른 미소였다. 희열감에 차오른 섬뜩한 미소랄까. 그의 입 꼬리가 비죽거리며 비웃음을 자아내는 듯, 그런 환상에 사로잡힐 것 같았다.

또 그의 목소리는 감미로운 밧줄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부드럽게 다가와, 온 몸을 옥죄는. 그런 거. 목을 서서히 부드럽게 졸라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런 목소리. 거역하기 두려운 목소리. 그 남자의 존재 자체를 두렵게 하는 목소리.

결국 나는 일어났다. 일어나기까지 몇 세기가 흐른 것 같은 착각이 들었고, 웅웅거리는 소리의 리듬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마치 경고음 같이.

 

“따라와……. 카스올리.”

 

그가 내 이름을 천천히 발음했다. 마치 그게 시한폭탄이라도 되듯, 조심스럽게 다뤘다. 그 와중에도 그의 희열감에 찬 미소는 더욱 더 깊어갔다.

나는 잠깐 발을 옮기려다 멈칫했다. 내가 여기서 따라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렇다고 싫어요, 난 여기서 공부해야 해요, 라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도대체 저 남자의 속을 모르겠다. 이런 느낌… 처음이다.

 

“어디로 갈 건데요?”

“일단 따라와.”

 

작전을 바꿨는지, 그 남자가 섬뜩한 미소를 거두고 다시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

 

나는 순간적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남자의 왼손에 새겨진 흉터. 네 번째 손가락부터 시작된 흉터는 손목을 타고 팔뚝까지 올라가 있었다. 지구상에서 저런 흉터 내기는 쉽지 않을 텐데. 그의 왼손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내 눈길을 느꼈는지, 그 남자가 슬쩍 왼손을 거두었다.

 

“자, 가자.”

 

순간적으로 키아크라가 마음에 걸렸지만 하는 수 없이 그 남자를 따라나섰다. 귀에서는 계속 미친 듯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폭포소리마냥 세게, 거세게 내 귀를 때려댔다.

강의실 문을 나서자 쉬는 시간인지 다른 반 학생들이 보였다. 내가 아는 애들도 있어서 손을 흔들었지만 그들은 나를 무시했다. 아니,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 앞에서 걷는 그 남자도.

투명인간이 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본 적은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느낌을 실제로 생생히 느끼고 있다! 이 남자를 만나고 나서부터 일이 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웅웅……. 내 생각에 수긍하는 듯 그 소리의 리듬이 끄덕거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미친 게 분명해. 소리가 어떻게 고개를 끄덕이겠어?

그 때… 키아크라? 내 눈 앞에 키아크라가 보였다. 바로 앞에. 정말 내 앞에. 나는 순간 눈물을 흘릴 뻔 했다. 그녀는 날 보지 못 하겠지… 쓸데없는 후회가 밀려오기 전에 고인 눈물을 닦아냈다.

다음에 보자, 키아크라.

 

-

 

걷고, 걷고, 걸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우리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수없이 발을 밟히고 핸드백에 치이고 어깨에 부딪치기도 했다. 내 앞에서 걷고 있는 이 남자는 이런 일에 익숙한 듯, 끊임없이 다가오는 발과 핸드백과 어깨들을 잘도 피했다. 저 남자 정체가 뭐야? 도대체.

신기하게도, 거짓말처럼 다리가 전혀 아프지 않았다. 한 스무 번쯤 밟힌 것 같은 발은 꽤 욱신거렸지만. 나는 내 앞에 선 정체모를 남자를 찬찬히 관찰했다.

그는 정확히 걸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어떻게 나올지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거침없이 걸었다. 머뭇거리거나 잠시 멈추는 건 시간낭비라는 것을 다리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악!”

 

뭔가에 내 발목이 세게 부딪쳤다. 내가 비명을 질렀는데도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쳇, 매정한 인간 같으니라고.

 

“조심해서 내려와.”

“에?”

“조심해서 내려오라고.”

“에에?”

“계단 말이야.”

 

계단? 아, 계단이네, 하하. 어? 계단이라고? 맙소사. 내 앞에는 계단이 좍- 펼쳐져 있었다. 하하하, 이거 몇 개지? 내가 드디어 천국에 가는 건가? 아, 이제 이 세상과는 영원히 작별인사를 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드디어 미쳐서 경지에 도달한 건가?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을 내딛었다. 잠깐, 만약 이게 천국행 계단이라면 위를 향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왜 지하로 쭉쭉 신나게 뻗어있는 거지? 미치겠네. 나 혹시 납치당한거야? 어느 지하실로 끌려가는 건가?

 

“계단이 좀 많아. 천천히 내려와.”

“근데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지구에 있지만 인간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세계.”

“에에?”

 

내가 생각해도 난 정말 말을 못 알아먹는 것 같다. 내 귀에서 울려 퍼지는 웅웅거림의 메아리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내가 던진 물음표에 그 남자가 우뚝 그 자리에 서더니 돌아서 날 봤다. 그 때까지도 난 아직 열 몇 번째 계단에 서 있었다.

아주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르고, 그 남자가 빙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동안 인간들은 모든 세계를 파헤쳐 왔어. 우주, 지하, 수중까지도. 하지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수십 년,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이 지나도 발견되지 않을 거야. 아마도. 내 생각은 그래.”

“왜요?”

“열쇠가 없거든.”

 

그 남자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가볍게 대답했다.

 

“열쇠?”

“자, 그건 나중에 차차 알게 되니까 일단 내려가자.”

 

그 남자는 다시 몸을 돌려서 그 특유의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굴러 떨어지지 않게-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그 남자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인간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세계.’ 우리는 지금 그 곳에 와 있네. 그럼 나랑 저 남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거잖아! 내가 생각한 거지만 그 결과가 너무나도 충격적인 바람에 나는 계단에서 굴러 떨어질 뻔 했다.

나랑… 저 남자는 인간이 아니다? 저 남자는 그렇다 치고. 난 뭐야? 난 뭐냐고, 도대체! 오늘 학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하지만 나에게 뭐 때문에 그러냐고 물어봐 줄, 키아크라의 역할을 할 사람은 없었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라면 나는 이렇게 대답했겠지. ‘미치겠어. 저 남자가 말하길, 자기랑 내가 인간이 아니래!’

 

-

 

계단은 꽤 길었다. 나는 체력이 그렇게 딸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쇠로 만들어졌다고 일컬어질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축구 할 때 남자애들이 너 남자 아니냐고 종종 물어보기는 했다.)

 

탁.

 

또 멍하게 있다가 헛발을 내딛는 바람에 넘어져서 코를 박을 뻔 했다. 내 코가 단단하긴 해도-작년에 복도에서 릴레이 경주를 하다가 벽에 박았는데 이마에 멍은 들었지만 코는 말짱했다-이 정도의 강도를 가진-저 남자의 말에 의하면 이 계단은 엄청난 세월을 견뎌왔으니까, 그러고도 멀쩡하니까-계단에 부딪친다면 멀쩡하지 못할 것 같았다.

간신히 코가 부딪치기 전에 일어났다. 내 바로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이제 희열감이 아닌 만족스러움이 느껴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먼지가 가득 묻은 손바닥을 툭툭 털고 나서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당신, 인간 아니죠?”

“그래. 그리고 너도.”

“하지만 난 인간이에요!”

“글쎄. 그건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계단 끝에 이어져 있는 건, 에… 어두컴컴한 터널이었다. 그것도 좁은.

 

“숙녀 분 먼저?”

그가 내게 우아한 동작으로 손을 내밀며 물었다.

 

“가이드 먼저.”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난 여기 처음 와 보는데, 어떤 곤충들이 득실거릴지 모르는 저 어두컴컴한 터널을 먼저 들어갈 수는 없다고요! 게다가 친하지도 않은, 그것도 인간이 아닌 남자를 뒤에 두고서는.

 

“유감인걸.”

 

그가 농담처럼 말하고는 터널에 발을 내딛었다. 그의 발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나도 발을 내딛었다. 아무래도 길을 놓치면 안 될 테니까.

터널은 그렇게 길지 않은 것 같았다. 터널 끝이 벌써부터 보이니까. 그나저나 터널에 들어서자마자 무언가에 잠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얕은 물속을 걷는 달까. 하지만 실제로 내 발이 젖지는 않은 것을 보아 다만 그런 느낌이 나도록 만들어진 환상, 또는 내가 미쳐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라고 나는 단정지어버렸다. 아, 생각하기 귀찮아.

점점 갈수록 물에 잠긴 것 같은 느낌은 더해져 왔다. 발목, 무릎, 허리, 가슴, 어깨…… 그렇게 물에 잠겨가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젖지는 않았다. 기분이 묘했다.

마침내 머리. 나는 계속 숨을 쉬고 있었다. 물론 진짜로 물에 잠긴 건 아니어서 숨은 잘 쉬어졌다.

귀에서 웅웅거림의 메아리가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 아, 이거 재미있네. 걷다보니 이런 느낌을 즐기고 있는 나. 물속에서 걷지만 젖지는 않는……

그리고 터널의 끝. 터널을 나갈 때 비눗방울에 갇힌 것처럼 약간의 압력과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실제로 터널은 멀쩡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도착했어. 카스올리.”

“여기가 어딘데요?”

그는 잠시 뜸을 들이는 듯 멈춰서더니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뱀파이어들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4

 

 

 

“…에? 아 나 방금 잘못 들은 거겠죠?”

“뱀파이어들의 세계라고 들었다면 그건 네 귀가 많이 멀쩡한 거야.”

 

이 남자가 지금 나보고 뭐라고 한 거지??? 뱀파이어???? 뱀파이어??? 뱀파이어의 세계???? 아니 이건 뭐 초등학생들도 안 쓰는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인데 잠깐만 뭐라고요????

 

“그러면 지금 우리가 여기에 오게 된 건 당신이랑 제가 뱀파이어 여서 그렇다, 이거예요?”

“넌 머리도 좋구나.”

 

…아니 잠깐만 난 그 대답을 원한 게 아니었어. 뭔가 미안, 서프라이즈였어. 이렇게 말해야 정상인 거 아냐?? 아니 잠깐만요 미친 사람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 남자는 어깨를 으쓱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못 믿겠다면 굳이 믿으라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런데 이게 진실이야.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결국은 이게 진실인 걸.”

“……….”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진짜. 어이야 어디 갔니. 어이야? 어이가 없네?? 어이야 어디 갔어?? 어디 있니??

 

“그래서 지금 저보고 뭐 어쩌라고요?”

“너는 그런 곳에서 썩을 애가 아니잖아. 넌 다른 애랑 많이 달라. 너를 그런 곳에서 썩히기에는 내가 못 견디겠어서 너를 데리고 온 거야.”

“그래서 지금 저보고 뭐 어쩌라는 거냐고요.”

“넌 나랑 같이 있어야 해.”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간 남자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 내가 왜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남자가 다시 말을 시작하는 바람에 묻지 못했다.

 

“너라면 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거야. 그렇지?”

“…네. 뭐. 그렇죠.”

“그 소리가 <용의 노래> 라는 거야.”

“……….”

 

이름이 엄청 유치해 낄낄낄. 속으로만 웃고 겉으로만 정색한 채 난 남자의 말을 계속 들었다.

 

“<용의 노래> 라는 건 용을 깨울 수 있는 방법이야.”

“용이요? 헐.”

“응. 이 세계에 용의 노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안 돼. 네가 그 중 하나인거야.”

“근데 제가 왜요?”

“…글쎄. 그걸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어깨를 으쓱하며 웃는 남자를 보며 얜 진짜 사이코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보통 저 상황에서는 웃는 게 아니라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게 정상 아냐? 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사이코?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꾹 누르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뭐 다른 말 없어요?”

“그게 내 이유야. 나는 네가 필요해.”

“……에?”

“너는 <용의 노래>를 알잖아. 부탁이야. 나를 도와줘.”

 

아 애절해. 딱히 어떤 말투를 담고 있지는 않았지만 급 아련한 포스를 풍기는 그에게 나는 어떤 대답을 내려주지 못했다. 내가 저 사람한테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물론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아는 사람은 저 사람밖에 없다. 저 사람밖에 없으니까 저 사람을 따라가야만 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저 사람을 믿을 수는 없다. 여자의 직감이지 핫핫. 아 어쨌든. 어떻게 해야 하지.

 

“…카스올리. 도와줘.”

“……뭐, 보고요.”

 

<Yes> 라고도 말할 수 없고 <No> 라고도 단정 지어 말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애매모호한 답변을 내려주었다. 어쩌면 긍정. 일단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건지 그 남자는 웃으면서 고마워, 라고 말해주었다. 굉장히, 그러네. 뭔가 찝찝해.

 

 

-

 

 

“그러면 그쪽 이름은 뭔데요?”

“…이름 없는데?”

“이름 없어요?”

“응. 그런 거 없어.”

 

그럼 어떻게 불러야 하지? 저기요? 선생님? 아 선생님은 안 되는데. 어색하기도 하고. 내가 쪽팔려서 못 견딜지도 몰라.

 

“그냥, 뱀파이어 씨라고 불러.”

“…내가 뱀파이어인데 누구를 뱀파이어라고 불러요. 남 말 할 처지도 안 되는데. 선생님이라고 불러요?”

“그건 나도 어색해.”

“그럼 뭐요?”

 

으음. 글쎄.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 그 남자를 보며 이 남자 의외로 인간적인 면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은근 놀랐다. 언제나 자기만 알고, 자기만 생각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한참동안 고민하던 그는 그냥 저기, 라고 부르라며 대충 단정 지었다. 저기요, 저기요. 그거 내가 맨 처음에 생각해 놨던 건데. 아깝다. 진작 그렇게 얘기할걸.

 

“다른 사람들은 그 쪽 뭐라고 부르는데요?”

“…그러게. 뭐라고 부르더라.”

이거 일부러 이러는 거다!! 다 알고 있으면서!!! 이제 귀 속의 웅웅거리는 소리의 리듬을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5.

 

 

 

아 그래. 난 이제 더 이상 영영 지극히 정상인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거지. 아하하하. 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남자 때문에. 뭐 자기를 도와달라나 어쩌나 해서 어쩔 수 없이 따라가긴 하지만-솔직히 말해 도로 나갈 수 있는지도 모르고 여기서 굶어 죽을 수는 없었다―뭔가 상당히 찜찜했다.

좋아. 나도 궁금한 게 있는 사람…이 아니라 뱀파이어일 지도 모르지만 일단 난 스스로를 정상은 아니더라도 인간으로 여기기로 했다-이라고. 몇 가지 물어보자. 도와달라고 했으면 값은 쳐 줘야지. 그나저나 여기서는 뭘 먹으려나? 이상한 동물이나 피만 먹고 사는 건 아니겠지?

 

“여기서 다시 나갈 수 있어요?”

“어렵지만 가능해.”

 

어렵지만? 저렇게 애매모호하게 대답하면 뭐 난 어쩌라는 건가. 어쨌든 가능하니까 난 여기서 언젠간 탈출해야지, 뭐. 비록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더라도 평범한 생활은 할 수 있을 거야. 이제까지도 그래왔잖아?

 

“내가 뭘 도와줘야 되는데요?”

“그냥 나랑 죽치고 같이 있으면 되는데.”

“나랑 당신이랑 단 둘이서?”

“설마 이 넓은 세계에 나밖에 없겠냐.”

 

그 남자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는데, 그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진짜 믿기진 않지만 그렇다고 좀비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일단 그렇게 부르기로 하고-을 알아서인지 뭔가 모르게 섬뜩해보였다. 혼자만의 착각이었을까? 어쨌든 꼬박꼬박 친절하게 답해주니까…….

 

“근데 그 용의 노랜지 뭔지가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일단 가서 설명해줄게.”

“근데 당신은 내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듣는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맞아. 어떻게 알았지? 묻고 보니깐 수상하잖아!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수상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잖아. 피를 보고 맛있니? 라고 묻질 않나, 다짜고짜 따라오라고 학원 밖을 나서는데 아무도 못 알아보지 않나, 거리에서 수없이 날아오는 발들과 핸드백들을 피하질 않나, 게다가 내 귀에서 들리는 소리의 실체를 알고 있지 않나!

정말 미친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뻔뻔하게 이런 일을 행할 수 있겠어?

 

“…그것도 나중에.”

 

왜 이렇게 숨기는 게 많아! 자기 이름도 그렇고.

 

“먹는 건 뭐 먹어요? 배고파 죽겠는데.”

“글쎄. 가서 먹어보면 알겠지?”

 

뭐야. 저 의미심장한 미소는. 심상치 않은 식단 메뉴를 예고하는 것 같은 저 악마의 미소는 뭐야. 어쨌든 지금은 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탈출 계획을 세우며 차근차근 경계를 하는 수밖에.

계속 걷다보니 어느 새 숲 속이었다. 길게 자란 풀들에 맺힌 물이 다리에 차갑게 묻었다. 지금 비가 오나? 아니지. 여긴 땅 속인데 어떻게 비가 오겠어?

 

“지금 비와요?”

“어. 그런 것 같네.”

“여긴 지하잖아요!”

“그런가? 난 잘 모르겠네?”

 

분명 아까 계단을 ‘내려’ 왔는데?

 

“당신 미쳤죠?”

“아니.”

 

그의 대답과 동시에 내 머리로 떨어지는 물방울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위를 보니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덕분에 비는 피했지만 간간히 떨어지는 큰 물방울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쳇. 그나저나 톡톡 떨어져 내린 물방울과 다리에 스며드는 물방울에 온 몸이 오슬오슬 추워지기 시작했다-나는 반팔 반바지 차림이었기에-.

 

“설마 용들이 여기서 불쑥 튀어나오는 건 아니겠죠?”

“응.”

 

거 참. 대답 참 희한할 정도로 간단하게 하시네. 어쨌든 내가 미쳤거나 아니면 저 남자가 미쳤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러고 보니 분위기가 어째 좀 이상하다. 발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분위기가 더욱 예리하고 살벌해져 내 숨통을 조르는 것 같다.

내 육감이라면 육감이겠지. 불길한 예감. 여기 오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학원에 끌려가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시험을 그렇게 못 보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정상적인 인간이었어야 하는데. 하……. 그 남자가 입을 꾹 다물고 걷자 나는 조용히 빗소리를 감상하며 환상적인 후회와 그리움에 젖어들 수 있었다.

키아크라… 보고 싶다.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있긴 한 걸까? 그나저나 여긴 인간이나 내게 익숙한 생명체라도 있는 걸까? 여긴 도대체 어디지? 어디 있는 세계인 거지? 용들은 또 뭐야?

그렇게 착잡한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 나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촤아아아아아아악-

후드드드드드득-

 

“끄아아아악!”

 

걷다 보니 어느 순간 숲에서 벗어난 모양이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순식간에 나는 쫄딱 젖어버렸다. (다행이 나는 흰 티를 입고 있지 않았다.)

정말로 눈을 뜨기조차 힘든 그런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남자는 어디 있는 거야? 여기서 길을 잃으면 큰일 날 것 같은데. 정말로 다른 건 모두 지워버린 듯 보이지 않고 폭포마냥 쏟아지는 빗방울의 거센 소리와 사정없이 떨어지는 빗방울만 보였다. 아, 거 참. 귀가 먹먹하네. 이러다 홍수 나는 거 아니야?

 

-

 

그 남자가 나타날 줄 알고 몇 분간 멍청하게 서 있었던 내가 바보였다! 나 설마 길 잃은 건 아니겠지? 최악이다, 최악이야. 울고 싶었다. 이름도 모르는데 뭐라고 불러야 되는 거야? 무턱대고 저기요! 라고 부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저씨! 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인데.

비는 계속 내렸고, 나는 얼빠진 애처럼 계속 서 있었다. 정말로 춥고, 세차게 떨어지는 빗방울에 온 몸이 따끔거리고 차가웠다. 머리는 쫄딱 젖어서 달라붙었고-머리가 짧아서 거추장스럽지는 않았다-속눈썹에도 비가 내려 시야를 가렸다.

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거의 가려질 정도로 세찬 비였다. 곧 이어 온 몸이 덜덜덜 고장 난 세탁기마냥 떨리기 시작했다. 신발에는 물이 가득 차서 움직일 때마다 철벅거리는 소리가 났다. 일단 이 비를 피해야 되니까, 숲으로 되돌아가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난 내 머리를 죽도록 쥐어박고 싶었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한 거지? 나는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어떤 물체가 엄청난 속도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가 본 건, 그저 검은 물체가 나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

 

쿵-

 

“으아아아아악-!!”

 

빗소리에 묻혀 내 비명은 들리지도 않았다. 나를 덮쳐 쓰러뜨린 물체가 조금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도 그 물체-인지는 모르겠지만-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이윽고 내가 내린 결론은, 그 물체가 여자라는 점과 당장 죽여 버리겠다는 뜻을 담고 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누구세요?”

 

그렇게 물으면서 나는 순간적으로 여긴 언어가 없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그 남자도 내 말을 알아들었는데. 그건 따로 공부한 건가? 아니면 자동 통역기가 있나? 어찌 되었든 간에 이 여자는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듯 했다.

아, 이거 큰일이네. 누가 나 좀 구해주지. 어쨌든 그 여자는 당장은 공격을 시행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그렇게 몇 초의 숨 막히는 정적과 비속에서 나는 간신히 숨을 쉬었다. 난 이 상황에서 뭘 해야 되지? 그냥 기다릴까? 그런데….어라? 갑자기 그녀가 벌떡 일어서더니 도망치듯 달려 숲으로 사라져버렸다. 뭘 봤기에? 혹시 육식성 야생동물 아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순간적으로 오싹해졌다. 여기 와서 고픈 배를 채우기는커녕 다른 짐승의 배를 채워줘야 하나? 그럴 수는 없지…그런데….몸이 말을 도통 듣지를 않는다. 비에 젖은 데다 아까 너무 긴장을 해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 설마 이대로 내 인생을 마감하는 건가? 어쩐지… 지하로 뻗어있는 계단을 보면서부터 예상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계속 시간은 지나고, 비는 끊임없이 쉬지 않고 내렸다. 돌아누울 힘도, 용기도-진흙탕에 얼굴을 처박고 싶은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없었다. 그 때문에 수많은 빗방울이 내 얼굴선을 타고 흘러내렸고, 눈에 스며들었다. 숨 쉬기가 무척 어려웠다. 코와 입으로 쏟아져 내리는 물을 애써 무시했지만…….

이렇게 처참한 시간은 처음이었다. 정말로. 눈을 감았지만 쏟아져 내리는 거센 빗방울에 눈꺼풀이 사정없이 부딪쳐 고통만 극심할 뿐이었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액체가 자꾸만 흘러내렸다.

 

탁.

 

그렇게 한탄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내 처참한 몰골이 되었을 얼굴 옆에 발소리와 함께 짐승의 발이 아닌 게 확실한 발이 보였다. 신발을 신은 발…….

 

“카스올리?”

 

맞다. 바로 그였다.

 

 

 

 

 

6.

 

 

 

눈을 뜨자마자 내 눈에 내리쬐는 빛줄기 때문에 나는 도로 잽싸게 눈을 찌푸리며 감았다. 그런데 뭐야, 이 찝찝한 느낌은.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나는 벌떡 일어나 내 몸 상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우선 머리카락. 내 짧은 머리카락이 말라붙은 흙 때문에 더럽고 뻣뻣한 상태였다. 좋진 않군. 그 다음으로는 얼굴. 옆에 흐리지만 그래도 얼굴 정도는 충분히 볼 수 있는 반들반들한 옷장 비슷한 곳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아 이런. 상태가 최악이군. 내 얼굴 맞아? 거리에서 10년은 묵은 듯한 노화된 얼굴이 비춰지는데?

휴…어쨌든 다음으로는 기타 몸 상태. 팔 다리는 놀랍도록 멀쩡했고 목만 조금 뻐근했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포함해서 온 몸에 달라붙은 진흙. 윽, 당장 씻어야겠네. 그나저나 내가 지금 누워있는 곳이 어디지?

그제야 내가 누워있었던 곳이 눈에 들어왔다. 식탁과 벤치를 급 조합해서 만든 것 같은 엉성한 침대 비슷하게 생긴 곳에 달랑 이불 하나를 덮고 있었다. 이게 무슨 꼴이람.

이불의 촉감이 신기해서 펄럭펄럭 거리고 있는데 그 남자가 벌컥 방문을 열고 들이닥치듯 들어왔다. 덕분에 나는 두 손으로 이불을 꼭 잡고 10년 쯤 노화된 얼굴을 한 상태로 그와 마주쳐버렸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들어왔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절대로! 그 누구에게든 이런 처참한 몰골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 이불, 좋지 않니? 마음에 들어?”

 

그가 능글맞다고 표현하는 것이 올바를 것 같은 미소를 내게 지어 보이며 물었다. 나는 그의 물음에 두 손에 꼭 쥐어져 있는 이불을 보았다.

 

“네. 촉감이 좋은데요?”

 

나는 평소에 보이지 않던 공손한 모습-어쨌든 간에 반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으로 대답하며 슬그머니 이불을 손에서 놓았다. 그런데 내 대답에 그가 이가 살짝 드러날 정도로 씩 웃더니 말했다.

 

“그게 뭐로 만든 이불인 줄은 알아?”

“글쎄요. 실크?”

 

내 대답에 그가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더니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거미줄.”

 

아아, 그렇구나. 거미줄이었구나, 하하. 참 신기하네. 거미줄이면 안 뜯어지나?

 

“무슨 거미인데요?”

 

그는 내가 보통 여자애들처럼 거미라면 경악을 하고 비명이라도 지를 줄 알았는지, 어쨌는지 태연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는 나를 보고 실망하면서도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대답은 재대로 해 주었다.

 

“그냥 여기 지하에서 서식하는 거미?”

“그나저나 여긴 어딘데요?”

“내 집?”

“에에?”

 

이렇게 큰 곳이-창문을 내다봐서는 내가 있는 방이 대략 3층에서 4층 쯤 되는 것 같았다-이 남자의 집? 부자인가? 사이코 재벌이라….음….

 

“순진하기는.”

 

속았네. 이런.

 

“그냥, 나랑 내 동료들이 머무는 곳이랄까?”

“근데 내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죠?”

“어제 죽을 둥 살 둥 빗속에 쓰러져 있는 걸 내가 건져왔지.”

 

아 그러세요? 어이구, 생명의 은인이시네. 참, 빨리도 구해주셨지. 그런데 난 미친 남자를 생명의 은인으로 받들 생각은 없는데.

 

“그런데… 그 전에 어떤 여자 못 봤어요?”

“여자라니?”

“당신이 안 와서 몇 분쯤 기다리다가-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내뱉었다-숲으로 들어가서 비를 피하기

로 하고 뒤를 돌았는데 어떤 여자가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날 쓰러트리고 튀었는데요?”

 

내가 대답을 마치자마자 난 순간적으로 그의 표정이 굳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그냥 놀랍거나, 그런 단순한 감정이 아닌 복잡한 감정이 얽혀 그의 웃음을 옭아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괜히 물어봤나.

잠시 후 그는 다시 웃었지만 무언가 텅 빈 웃음이었다. 아무 감정 없는 웃음. 마치 연극의 가면으로만 쓰이는 그런 웃음. 투명한 껍데기뿐인 웃음.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사막의 모래처럼 약간 건조했다.

 

“이런. 어제 그렇게 배가 고프다고 난리를 치더니만. 오늘은 어때?”

“심각한데요.”

“하하, 그럼 씻고 나온 다음 식사를 하시는 게 어떨지?”

“됐어요. 어차피 이 몰골 으로는 방에서 절대 못 벗어날 텐데.”

 

판자로 대충 이어붙인 침대에서 일어나는 순간, 한 가지 걱정이 내 뇌리에 퍼뜩 스쳤다. 갈아입을 옷은?

 

“저기요, 갈아입을 옷 혹시 있어요?”

 

그는 말없이 턱짓으로 옷장을 가리켰다. 아아, 저기 옷이 있나 보다. 나는 성큼성큼 옷장에 다가선 뒤 옷장 문을 확 열어젖혔다.

 

“……”

“마음에 들지?”

“온통 하얀색이잖아요!”

“거미줄은 흰색이니까.”

아아, 이것도 거미줄이야? 여긴 자원이 풍부하지 않은가봐?

 

“편하니까 괜찮아.”

“염색해 버릴 거야.”

“마음대로.”

 

나는 그 남자를 돌아보았다.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아무 장식이 없는.

 

“왜 그 쪽 옷은 검은색이죠?”

“검은색 거미줄. 넌 검은색 싫어할 것 같아서 흰색으로 했는데?”

“흰색이 뭐예요! 흰색이! 완전 웨딩드레스도 아니고 이거 뭐야!”

 

내가 툴툴거리자 그 남자는 놀란 눈치였다. 검은색 보다는 흰색을 더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나 봐. 진짜 나를 완전한 여자로 대해주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다, 오랜만이야.

 

“알았어. 그럼 검은색?”

 

그가 금방이라도 새로운 옷을 가져올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됐어요. 그냥 염색해서 입을 거예요.”

 

솔직히 난 뭐로 염색해야할지조차 몰랐다.

 

“알았어. 그럼 씻고 나와. 식당은 방에서 나온 뒤 오른쪽 복도를 따라서 쭉 걸으면 되니까 식당 입구

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나는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말라붙은 진흙과 달라붙은 먼지를 씻어내기 위해 경첩이 낡았는지 약간 삐걱거리는 욕실로 들어섰다. 그리고선 파격적인 욕실 디자인에 경악했다.

하느님 맙소사! 도대체가 뱀파이어들의 취향이란 산뜻한 데가 없어! 왜 죄다 칙칙한 회색, 검은색인 건데! 좀 밝게 보이는 곳이라고는 거울과-검은색 타일이 비쳐서 그 거울마저도 검게 보였다-수건 뿐 이었다.

어쨌든 내 처지에 검은색 흰색 가릴 게 못 되었기 때문에 서둘러 물을 틀었다. 그리고 평소 습관대로 손을 들이미는데……

 

“앗 차가워!!”

 

나는 손을 잽싸게 빼며 비명을 질렀다. 물이 아니라 얼음처럼,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에 머리를 들이밀고 샤워를 하려면 보통 용기가 아니고선 엄두도 못 내겠다. 이렇게 손에만 닿아도 온몸이 덜덜 떨리는데 어떻게 이 물 온도를 견디지?

뱀파이어의 미스터리 중 하나인 건가. 나는 심호흡을 하고 이를 악물고 검은색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줄기가 이가 시리도록 순식간에 온몸을 위협적으로 휘감았다. 와, 이거. 뱀파이어가 소설 속에서 강하고, 무감각적으로 나오는 이유를 알 것 같군.

 

-

 

그렇게 색다른 찬물 샤워를 마치고, 그 남자가 준 옷을 입었다. 반팔 티셔츠와 바지와 별 다른 게 없었다. 다만 장식이 없고, 온통 흰색이라는 점과 더 가볍고 간편하다는 점은 빼고. 그리고 왜 긴 바지야. 그냥 반바지 주지. 더운데.

그렇게 무사히 샤워를 끝내고 방을 나왔다. 이런, 온통 낯설잖아! 이런 데를 나 혼자 걸어서 식당에 들어가라고? 그 남자 미쳤어. 아, 그러고 보니 신발이 없네. 내 신발은 아직 젖었는데. 할 수 없지. 젖었더라도 대충 닦고 신지 뭐.

가는 도중에 모르는 뱀파이어라도 마주칠까봐 조마조마하면서 걸었다. 만약 정면으로 마주치기라도 하면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안녕하세요, 전 카스올리에요. 우리 잘 지내봐요. 라고 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오늘은 어때요? 날씨가 참 좋죠? 라고 물어야 되는 건가?

다행이도 아무도 만나지 않고 걸어갈 수 있었다. 복도의 벽에는 온갖 조각품들이 붙어있었는데-아니, 어쩌면 벽을 통째로 조각한 것일지도-대부분 알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뭐 드라큘라 백작의 추상화라도 되나?

음… 저기가 설마 식당 입구라는 곳은 아니겠지. 적어도 문이나 그 비슷한 걸 상상했건만. 솔직히 이건 입구가 아니잖아! 좁은 복도가 갑자기 탁 트였다. 그게 입구라고? 그나저나 날 기다린다던 그 뱀파이어 양반은 어디로 간 거야? 그렇게 주위를 힐끔거리며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늦었구나.”

“으아악! 깜짝이야!”

 

아악, 간 떨어질 뻔 했네! 왜 저렇게 소리 없이 나타나는 걸 즐기는지, 쯧. 혹시 신비주의자인가?

 

“음식이 네 입맛에 맞을지는 확신이 가지 않아.”

 

그가 재빨리 말했다.

 

“적응해야죠, 뭐.”

 

솔직히 나는 이 미친 남자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놀랍도록 잘 적응하는 나 자신을 보고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잘 적응이 되지? 내가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가? 귀에서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계속 반복되었지만, 그렇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그 소리가 내 몸의 일부가 된 느낌이랄까.

 

“들어가자.”

 

그가 나를 살짝 밀었다. 드디어 나는 낯선 냄새가 나는, 뱀파이어들의 식당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7

 

 

생각보다 식당은 넓었다. 옛날에 읽었던 책 중 해리포터, 라는 무시무시한 판타지 소설이 있었는데, 그 곳 학교 호그와트의 식당을 연상케 하는 그런 식당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넓었다. 아 그리핀도르…슬리데린…

 

식당 안은 넓었고, 안에 사람들도 많았다. 100명 남짓 정도. 여기 사람들이 많았구나. 식당 입구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남자 역시 내 옆에 앉았고 식탁을 바라보았지만 음식들은 없었다.

 

“이거 따로따로 받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좀 있다가 음식이 나올 테니까 좀만 기다려.”

“그것보다 지금 몇 시에요?”

“나도 모르지.”

 

지하다 보니까 지금 낮인지 밤인지 새벽인지 조차 모르겠고, 이런 곳에 시계가 있을 리도 없었다. 그래, 물어본 내가 바보였지.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문득 내 앞에 사람이 앉아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보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여자와, 그 여자의 무릎에 앉아있는 꼬마아이. 아들인걸까? 머리는 뒤로 묶어서 얼마나 긴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긴 것 같았다.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여자는 꼬마아이가 옹알이 하 듯 뭐라고 말을 하자 방긋 웃으면서 아이에게 시선을 옮겼다. 웃으니까, 꼭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글쎄 잘 좀 대해 줘. 또 왜 쌀쌀맞게 굴고 그래.”

“……….”

“잘 대해주라니까?”

“알았어.”

 

그만 떠들라는 듯 인상을 찌푸린 여자는 나를 다시 흘끗 보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 나도 인사해야하는 건가? 순간 당황해서 똑같이 고개를 숙이자 그 여자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아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기. 밥 언제 나오냐고요.”

“기다리라니까? 인내심이 없어.”

“배고프다고요, 나는.”

“그래, 먹어.”

 

엉? 무슨 소리? 그를 멍하니 바라보자 그는 턱짓으로 식탁을 가리켰고, 분명 접시가 식탁에 놓이는 소리 따위 들리지 않았는데, 진수성찬 비슷하게 음식들이 많이 놓여 있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굉장히 이상한 상황에 조금 당황해버려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자 그는 그의 앞에 놓인 접시들 중 하나를 집어 접시에 음식들을 대충대충 담고 나에게 밀어주었다. 잠시 고개를 돌리자, 다들 놀라지도 않은 듯 음식을 먹고 있었다. 눈치를 보며 조그만 고기? 고기조각이라고 해야 할까? 고기를 뭉쳐서 만들어놓은 것 같은 조각을 들어 올려 입에 집어넣었다. 상당히 질기기는 했지만 맛이 없지는 않았다.

 

“…이거 뭐예요?”

“뭘 것 같아?”

“…위에 있는 짐승들은 아닌 것 같고. 여기서 사는 동물 아니에요? 고기 같기도 하고.”

“고기야. 고기는 맞아.”

“그러니까 무슨 고기냐고요.”

“용.”

 

옆에 있던 잔을 입에 대고 마시고 있던 나는 그의 말에 하마터면 앞에 앉은 여자를 향해 물을 뿜을 뻔했다. 다행히 뿜지는 않았지만 사례가 들려버린 탓에 나는 콜록콜록 댔고 남자는 괜찮냐며 등을 두들겨왔다.

 

“용? 용이라고요?”

“응.”

“드래곤? 디 알 에이 쥐 오 엔? 드래곤?”

"Dragon. 맞다니까 글쎄?”

용이라고?! 아니 그것보다 무슨 용?! 그 큰 거? 불을 뿜으면서 날아다니는 그 용?!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놀랄 것 없다면 나의 어깨를 토닥토닥했다.

 

“네가 방금 먹은 건 용이고. 네가 방금 마신 건…아 이건 말 안하는 게 낫겠어.”

“심한 거면 말하지 마요. 나도 듣고 싶지 않아요.”

 

용의 피, 라거나 용의…그러면 나 울어야지. 갑자기 저 액체도 먹기 싫어졌어. 나 어떡해. 식탁에 팔꿈치는 대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자 여자의 무릎 위에 있던 꼬마아이가 옹알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좀 어려보이던데 말도 하는구나.

 

“걱정 마. 우리가 일부러 죽인 게 아니라 죽은 거 가지고 만든 거니까.”

“그냥 지상에 나가서 먹으면 안돼요? 왜 하필 지하에 살아서는 이런 거 먹고 살아?”

“뱀파이어 소설도 안 봤어? 뱀파이어는 햇빛 보면 타 죽잖아.”

“그런데 왜 난 계속 살아왔대요?”

“…너는 다르거든.”

 

아 그래? 나 완전 다르겠네? 하하 하하하. 솔직히 웃고 싶지도 않아. 울고 싶네, 오히려. 좀 더 먹어둬. 그래야 힘을 내지, 라며 다시 등을 두들긴 남자는 자신도 팔을 뻗어 음식을 잡았다. 저건 또 무슨 음식일까. 거미고기라고 하면 울어야지.

 

 

-

 

 

뭐, 어떻게 해서 난 음식을 먹었다. 용 고기라고 생각만 하지 않으면 지상에서 먹던 고기와는 별로 다를 게 없는 맛이라서 애써 용의 고기라는 말을 지우면서 꾸역꾸역 먹었다. 용아, 이런 여자애한테 먹히다니. 정말 미안하다.

 

“뭐 혹시 필요한 거라고 있니?”

“그런 건 없는데 나 이제 뭐해요?”

“여기 좀 돌아다녀볼래?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좀 살아야 되니까.”

 

그러지, 뭐. 대충 고개만 끄덕이자, 그는 그럼 잘 돌아다녀, 라고만 말하고 내 등을 떠밀었다.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엎어질 뻔해서, 그에게 뭐라고 할 속셈으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역시나. 그가 내 뒤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 건물은 무지하게 넓어서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보다 도대체 내가 지내던 방은 어디였지. 목적지를 잃고 이리저리 방황하던 나는, 식당이 있는 층에 내가 지내던 방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맞아, 그러면 감각을 되살리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뱀파이어도 있는 시기에 뭐가 말이 안 될까.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나는, 어느 방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그 방 앞에 섰다. 상당히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나보다는 높은 여자아이의 목소리.

문에 막혀 그 여자아이가 뭐라고 말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문 앞에서 그 여자아이의 목소리를 듣다가 그럼 슬슬 다시 돌아다녀볼까, 라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는 바람에 문짝에 머리를 부딪쳤다. 그 여자아이도 조금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날갯죽지까지 정도의 머리길이에, 조금 진한 갈색머리의 그 여자아이는 나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문을 닫고 저 앞으로 걸어 나갔다. 미안하다고 말 안 할 줄 알았어, 하여간. 나랑 비슷해 보이는 또래면서.

 

-

 

 

“잘 돌아다녔니?”

“솔직히 같은 곳만 뺑뺑 돈 것 같아요.”

 

휴게실을 연상케 하는 장소의 의자에 앉아있던 나는, 옆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놀라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여기서 멍하니 앉아있으면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을까? 라는 느낌. 뭐, 다행히도 생각대로 됐지만 말이다.

 

“여기 많이 넓어. 구조도라도 줄까?”

“구조도 보고 돌아다니면 재미없어요.”

“그럼 뭐 도와줄까?”

“저 어디서 지내야 해요?”

 

아무데나 방 골라서 써.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를 보면서 그건 예의가 아니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조금 참았다. 아마 이 남자는 아무데나 들어가서는 자고 씻고, 그랬겠지, 뭐. 아 다 상상이 가. 그것보다 이 남자 잠은 잘까?

 

“여기 몇 층 까지 있는 거예요?”

“생각보다 높아. 그건 네가 잘 알아봐.”

“헐. 어이가 없어.”

“어떻게 생각해도 좋아. 구조도 있으면 재미없다며.”

“이거 60층. 이렇게 있는 거 아니에요?”

“그것보다 높을 걸?”

헉. 이거 맨 위로 올라가면, 지상이 있는 거 아니겠지? 그럼 잘 해봐, 라고 중얼거린 남자는 다시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나도 순간이동이나 배울까. 슉슉.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 나는 한 가지 의문점에 잠시 그 자리에 멈췄다.

 

내가 지내던 방이 3,4 층 정도. 그렇다면 식당도 3,4 층 정도. 그럼 1층에는?

 

나중에 남자를 만나면 다시 물어볼 생각으로 나는 그냥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도 않은 채 걸음을 뗐다. 일단, 이 복도의 끝을 알아볼 속셈이었다.

 

또 한참을 걷다가 남자에게 말할 <필요한 거> 가 생겨버렸다. 여기에는 필기도구 따위 없으려나. 나 혼자서 구조도 그려가지고 돌아다니게. 그것보다, 나 여기 돌아다니려면 10년은 더 걸릴 것 같아.

 

 

-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나는 겨우 이 복도의 끝을 찾아냈다. 생각보다 그 끝은 휑했다. 그 끝에는 창문 하나 밖에 없었다. 물론 창문을 내다봤자 보이는 건 하나도 없었다. 지하다 보니까, 그러는 게 당연했다. 조금이라도 밝은 걸 기대했던 내가 멍청이일지도. 아, 그래. 내가 멍청이라고. 이 복도까지 걸어오면서 봤던 방은 총, 45개였다. 와우 나 이거 다 기억해냈어. 나 천재인가 봐. 핫핫. 그런데 진짜로 많구나. 이거 어떻게 만들었을까나. 아, 어쩌면 숑쇼로롱 하고 마법으로 만들었을 수도.

 

“…힘들다.”

 

창문 아래에 주저앉아서는 중얼거렸다. 힘들어 힘들어 힘들어…흑흑. 다리 아프다고. 여기 있다가는 살은 잘 빠지겠네. 다리 아파. 이러다가 다리에 알배길 것 같다고.

 

그리고 또 한참 후에 나는 알아챘다. 귀에서 들리던 그 <용의 노래> 라는 것이 잘 들리지를 않았다. 만날 들리던 게 또 들리지를 않자, 또 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볼륨을 높였다 줄였다 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던 그 소리는 이내, 가장 평균적인 소리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라고 나는 알지도 못하고 아직 보지도 않았고, 그저 들리기만 하는 그 용을 걱정했다.

 

 

 

 

 

8.

 

 

일단 자야겠다, 좀. 졸려 죽겠어. 옷이 특수한 소재인지 땀에 젖어 끈적거리거나 뭐 그렇지는 않았지만, 뭔가 찝찝하기도 하고. 그런데…. 여기가 지하라면 숲에서 그 비는 뭐야? 아니, 애초에 숲부터 말이 안 되는 거잖아. 아, 몰라. 그건 내일이나 다음에 물어보기로 하고. 일단 방으로 돌아가자.

그런데…방이 다 비슷비슷해서 내가 있었던 방이 어디였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방 호수가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만약에 아무 문이나 덜컥 열었다가 간식시간을 즐기고 있던 뱀파이어와 마주치면 어떡하지? 하느님 맙소사.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일 것만 같았다. 아 뭐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고 뭐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건데! 일단… 최대한 살펴봐서 비어 있을 가능성이 제일 많은 방을 고르지 뭐.

그런데 아까 복도를 쏘다닐 때는 몰랐는데, 이제 보니까 방문이 열려있는 방도 있고, 닫혀있는 방도 있었다. 아, 그럼 혹시……!

머릿속에 퍼뜩 스치는 생각에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방문이 열린 방에 냉큼 들어섰다. 물론, 내 생각이 정확히 들어맞았기 때문에 방 안은 조용했다. 아, 방문으로 ‘사용 중’ 표시를 하는 거구나. 거 참. 그러면 더울 땐 어떡해! 이놈의 뱀파이어들은 뭐 더위도 추위도 안타나?

아, 창문이 있구나. 거의 벽 한 면을 다 차지하고 있는 창문이 있는 방이었다. 창문을 내다보니…… 별 거 없다. 쳇, 뭔가 기대했었는데. 뱀파이어들은 낭만을 모르나봐? 밤인가, 되게 깜깜하네. 거 참.

방을 둘러보니 침대 하나, 옷장 하나, 거울 하나, 탁자 하나, 의자 둘, 욕실 하나가 있었다. 필요할 건 다 있구나. 침대에 털썩 누웠다. 아니, 판자때기 대충 붙여서 만든 침대라 털썩 까지는 아니어도 어쨌든 쿵덕거리며 누웠다.

 

“하…. 내 신세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삐걱거리는 침대에 누우니 그런 생각이 막 들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내 머리를 채우는 의문점들…….

그 남자는 누굴까. 평범해 보이지는 않던데. 아까 식당에서도 꽤 높은···까지는 아니어도 어쨌든 낮은 자리에 있는 인간, 아니 뱀파이어는 아닌 것 같던데. 게다가 여기는 지하야. 근데 나는 숲에서 비를 호되게 맞고 왔는데….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침대가 위태위태하게 흔들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하나뿐인 탁자에 앉았다. 뭐 잡을 만 한 건 없나. 종이가 있을 리는 없고. 이윽고 나는 필기구와 종이를 찾는 것을 포기한 채 멍 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일단 비는 구름에서 내리지. 구름은 물이 증발해서 생기지. 물이 증발하려면 햇빛이나 열에너지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꽤 요란스럽게 탁자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가서 창문에 얼굴이 붙을 정도로 바싹 다가섰다. 여기 해가 있나? 지금 시간이 몇 시야? 해가 뜰 시간인가?

아, 갑자기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퍼뜩 들어오는 의문점 하나 더. 그 남자는 엄청 태연하게 ‘뱀파이어는 햇빛 보면 타 죽잖아.’ 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 남자는 분명 여기 오기 전에 땡볕 까지는 아니어도 하여튼 대낮에 돌아다녔단 말이야. 핸드백이랑 발을 잘도 피하면서.

여긴 어디야? 그 남자는 누구지? 내가 숲에서 기절한 뒤로-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지? 그 남자는 거짓말 한 건가? 난 속은 거고?

순간 머리에 키아크라가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은 폭풍의 눈 속에 들어온 것처럼 조용해졌다. 나는 그녀의 특징 하나하나를 다 내 머릿속에 굴려가면서 차가운 유리창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손끝에 전해지는 창문의 차가움이 너무나도 짙었다. 내 친구가 너무나도 그리워서 그렇게 느껴진 걸까? 귀신이라도 있는지, 손이 베일 것 같이 너무 냉랭한 차가움이었다. 기분이 우울해지고 말았다.

“키아크라. 내 말 들려?”

 

분명 그녀가 없는데도, 내 말을 들을 리도 없는데도, 난 미친 애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정말로 키아크라가 내 앞에 있는 것처럼 여기면서,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키아크라처럼 여기려고 애쓰며 중얼거렸다. (나는 짧은 머리고, 키아크라는 긴 머리라서 내 얼굴을 통해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는 건 쉽지 않았다.)

 

“나, 그 미친 남자한테 이끌려서 여기까지 왔어.”

 

유리창에 너무 붙어서 말했나, 투명한 유리창이 뿌옇게 되었다.

 

“여기가 어딘지도, 내가 왜 왔는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간 꼭 돌아갈게.”

 

뿌옇게 흐려진 유리창이 더욱 흐려졌다. 어쩌면 내 눈에 고인 눈물 때문일지도.

 

“아니, 곧 돌아갈게. 여기서 내가 할 일은 없는 것 같아. 나오는 길만 찾으면……여기서 나오면…… 너부터 찾을거야…기다…릴 수 있지? 응? 키아크라…….”

 

말이 점점 띄엄띄엄 나오기 시작했다. 생전 ‘죽을 만큼 그리운’ 느낌을 몰랐던 나는 비로소 그 느낌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없다고 생각하니 외로움이 밀려왔다. 곧이어 엄마와 아빠 생각이 났고, 다정했던 친구들에 대한 생각까지 머릿속을 채우자 내 눈에서는 눈물이 뚝 뚝 떨어져 내렸다.

내 발에 톡 톡 떨어지며 작은 눈물방울들을 튀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눈물은 뜨거웠다. 나는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

 

 

“굿 모닝.”

 

내 앞···· 아니 옆···· 아니 뒤·····, 아 몰라! 도저히 방향감각을 잡지 못하겠어! 나는 신경질이 나기도 하고, 자꾸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짜증도 나서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나는 나에게 웃으며 ‘굿 모닝’ 이라고 말했던 남자와 부딪칠 뻔 했다. 다행히 그 남자가 놀라운 속도로 피하는 바람에 간발의 차로 뇌세포 대학살은 면했지만.

잠깐. 햇빛……? 햇빛이라고? 나는 거의 빛의 속도로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

 

찬란한 햇빛이 엄청나게 큰 창문을 통해 죄다 내 방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드디어 내가 현실 세계로 돌아온 건가? 오, 예!

 

“여기 어디에요?”

“뭔 소리야? 내가 널 하룻밤에 어디론가 순간이동 시켰겠냐?”

 

네, 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의 얼굴….정확히 눈을 보고 내 입은 얌전히 다물어졌다. 솔직히 순간이동 시킬 수 있잖아! 쳇. 숨기는 게 도대체 몇 가지야? 이 남자 사이코긴 사이코네, 제대로.

그 남자의 눈동자가 햇빛을 받으니 약간 검붉은 빛을 띠면서 사이사이에 황금빛 무늬 같은 게 있었다. 예전엔 몰랐는데.

 

“뭐야, 뭐야, 뭐야! 당신 햇빛 받아도 멀쩡하네요!”

“상당히 둔하네. 그렇게는 안 봤는데.”

 

그가 피식, 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와, 이거. 아침부터 제대로 열 받게 하네. 한판 붙어보자는 거야 뭐야? 난 전혀 차분한 성격이 아니라고, 이봐.

 

“아 씨. 난 거짓말 하는 사람 별론데.”

그는 말없이 웃으며 뒤로 조금 물러나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내 기억엔 저기에 의자가 분명 없었는데. 아, 망할 놈의 순간이동. 슈슈슉, 슈슉. 그는 깍지를 껴서 머리 뒤로 넘기고 그에 의지해 몸을 뒤로 젖혔다. 거미줄로 만들었다는 저 검은 색 옷은 정말 잘 늘어나네. 그럼 내 것도?

나는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보았다. 아, 하얀색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바지라도 검은색으로 바꿔야지. 손으로 잡아 늘여 보니 잘 늘어났다. 쭉쭉.

 

“당신 이름이 도대체 뭐에요?”

 

처음에 ‘저기’라고 부르기로 했건만, 난 어느새 당신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뭐야, 생각해보니까 느글거리잖아. 그러고 보니 나 말 거의 반쯤 놓고 있네. 하하.

 

“글쎄, 이름 따위 내게 없다니까?”

“별명이라도 가르쳐 주던가요! 헷갈려 죽겠잖아요!”

 

그는 나를 놀리듯 빙글빙글 웃었다.

 

“오늘은 10층에 있는 식당으로 와. 거긴 여기랑 분위기가 좀 다를 거야. 적응하길 바래.”

“오늘 식단은 뭔데요? 또 용의 어쩌구 거미의 어쩌구 하는 거 아니겠죠?”

제발 그렇지 않길 바란다. 제발. 나 여기 있기 싫어졌어.

 

“응. 어제는 좀 특별했었고.”

“왜요?”

 

그 남자의 정곡을 찔렀다는 걸 나는 그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사라졌다.

 

“음……, 왜냐하면…….”

나는 내 눈동자가 그의 눈동자의 흔들림을 쫒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윽고 그는 손깍지를 천천히 풀어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몸을 똑바로 세워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입술이 비죽이며 대답을 했다.

 

“네가 온 날이기 때문에.”

 

응, 네. 알았어요. 라고는 절대 대답 못 해!!! 그의 대답에 묻고 싶은 질문이 갑절로 늘어나 버렸다. 응, 그래. 내가 그 남자를 돕기로 했다고 쳐. 그게 용의 어쩌고랑 뭔 상관인데, 도대체.

내가 머릿속이 의문들로 파열되기 직전까지 간 것을 알아차렸는지, 그는 조용히 사라져 주었다. 아, 정말 고맙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게 가 줘서 고마워요.

 

 

-

 

 

준비를 마치고, 나는 방을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거 정말 간편한 시스템이잖아. 짐도 없고, 방도 다 똑같으니깐. 뭐 몸만 들락날락 하면 되는 거 아냐. 나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 ‘비었음’ 표시를 하기 위해서-잠시 생각에 잠겼다.

10층…. 10층이라고 그랬는데. 엘리베이터는 있나? 가만. 계단은 못 본 것 같은데. 뭐 어떻게 올라가야 하는 거지? 고민에 잠겨 복도를 서성이고 있는데, 어제 그 식당에서 본 여자-나에게 꽤나 쌀쌀맞게 굴었던-와 하마터면 부딪칠 뻔 했다. 와, 이제 보니까 미인이다, 상당히.

완전 새까만 머리에다가 그 남자랑 거의 비슷한 색깔인 눈. 오늘은 옆에 꼬마아이는 안 달고 왔나 보네? 그녀의 옷은 조금 희한했다. 뭔가 두려운 분위기를 조정하는… 그런 옷이랄까. 소매가 없는 검은색 윗옷에다가 약간 달라붙는 듯한 흰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도 저런 거 주지. 그 남자는 패션 감각이 수준 미달인 게 틀림없어. 아니면 인간 여자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취했거나.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는데, 갑자기 그 여자가 빙긋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서 엉겁결에 나도 고개를 숙였다.

 

“어제 만났었죠?”

 

그 여자의 목소리는 상당히 부드러웠다. 하지만 털의 부드러움이 아닌, 매끄러운 금속의 부드러움이랄까. 그 남자의 목소리도 그랬는데. 투명한 얼음의 매끄러움. 우와, 나도 저런 목소리 있었으면 좋겠다. 굉장히 뭐랄까, 우아하잖아. 어쨌든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은 넨시에요. 그 쪽은 아마…. 카스올···이었나?”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간에 그 남자는 남의 이름도 제대로 가르쳐 주질 못해!

 

“카스올리요.”

“아, 카스올리.”

 

이참에 여러 가지 물어봐야겠네. 10층은 도대체 어디에 있고 어떻게 가는 거야?

 

“그런데 10층으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되요?”

“여기가 10층인데요.”

 

아, 네······. 에엑? 여기가 10층이라고? 말도 안 된다!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니 마치 한쪽 눈을 찡긋하는 게 보이는 듯 했다. 실제로 그랬나? 하여튼 2배속도 아니고, 여기는 너무 빠르다니까. 슈슉, 슈슈슉.

주위를 둘러보니까……. 뭐야, 똑같네 뭐. 아니다. 복도에 창문이 있네. 엄청나게 큰 창문. 나는 무심결에 창문을 내다보았다가 후회했다. 하필이면 저 멀리 강이 있어서 햇빛이 반사되는 바람에 거의 실명할 뻔 했던 것이다. 아이고, 내 팔자야.

어쨌든 여기가 내가 방금 전 까지 있었던 3~4층은 아닌 것 같았다. 분위기가 훨씬 더 화사했다.

 

“카스올리?”

 

어느새 그 넨시라는 여자 뱀파이어는 내 곁으로 와 있었다.

 

“네?”

“카스올리도……, 뱀파이어인가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얼어버렸다. 물론 지금 상황으로는 네, 라고 대답해야 옳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그 대답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는 인간이라고, 절대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고 끊임없이 외쳐대고 있었다. 결국 나는 상당히 중립적인 대답을 하고 말았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아직은, 이라니. 내 영혼의 한 부분이 부르짖었다. 아직은, 이라니. 넌 영원히 인간이라고. 넌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란 말이야. 괴로웠다. 나도 모르겠다고!

 

“카스올리는 뱀파이어랑은 달라요.”

 

무슨 뜻이지?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문득 넨시라는 이름이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우리. 우리 같은 평범한 뱀파이어랑은 다른 것 같아요.”

“……네?”

“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다르다는 걸.”

 

왠지 모르게 그 소리가 거슬렸다. 그녀가 내게 살살 장난을 걸어 어디론가 내몰고 있다는 느낌이 확연했다. 내 눈이 어때서.

 

“그렇다고 인간도 아니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내 마지막 기대를 무너뜨렸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 한 쪽에서는 계속 나는 인간이라고 외치고는 있었지만.

 

“……”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는 거야? 아, 내 홍채를 감정해 줘서 고마워요, 넨시양. 이렇게라도 말해야 하는 건가? 잠시 그렇게 침묵이 흘렀다.

 

“뭐해. 여기서.”

“……”

 

이젠 놀라지도 않아. 보나마나 그 남자겠지. 그러고 보니 넨시가 사라진 지 꽤 된 것 같아. 카페트에 눌린 자국이 사라진 걸 보면.

 

“아, 왜 자꾸 순간이동 해요. 놀라게.”

“이건 순간이동 아냐.”

“그럼 뭔데요?”

“그냥 빨리 움직이는 건데?”

“그게 순간이동이 아니고 뭐에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 남자의 목소리에 갑자기 짜증이 확 하고 치밀어올라 소리를 질렀더니 놀란 모양이다. 그 남자가 흠칫했다.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올라왔어? 너가 있던 곳은 3층인데.”

 

아, 3층이었구나. 그런데 이렇게 물어보는 걸 보니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네, 뭐.

 

“알고 있으면서 괜히 물어보지 마요.”

 

내 퉁명스런 말투에 그가 소리죽여 킥킥, 웃었다.

 

“넨시가 데려다 줬지?”

“거 봐. 다 알고 있으면서.”

그가 다시 웃었다.

 

“일단 들어가시죠, 배고픈 숙녀분.”

 

그가 유난히 ‘배고픈’ 에 힘주어 말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이기도 하고 반박할 힘도 없고 해서 그냥 조용히 넘어가주기로 하고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여기엔 식물이 없네. 화분이라도 있다면 분위기가 좀 산뜻할 텐데.

 

“여긴 왜 식물이 없는 거죠?”

“식물? 화분 같은 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 행동의 본뜻은 ‘하나하나 가르쳐주기 귀찮군.’ 이나 ‘괜히 데려왔어.’ 쯤 될까. 개인적으로는 후자이길 바라지만.

 

“우리는 식물이랑 친하질 않아.”

“왜요? 식물 알레르기라도 단체로 걸렸나?”

“그런 건 아니고. 여기 식물은 인간 세계의 식물과는 좀 다르거든.”

 

아, 네. 맨날 말만 하면 여긴 달라. 여긴 달라. 이 모양이야. 쳇. 다르기도 하겠다. 어쨌든 밥부터 먹자. 그 남자를 따라 들어가자 어제보다는 ‘확실히’ 다른 식당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굉장히 현대적인 느낌을 줬다. 약간 회색빛이 나는 하얀색과 검은색 타일으로 이루어진 체크무늬 타일이 바닥을 이루고 있었고, 2인용이나 3인용처럼 보이는 흰색 탁자와 푹신해 보이는 원형에 가까운 모양인 검은색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와우, 저번보단 괜찮군 그래. 식단도 괜찮아야 할 텐데. 그 남자가 탁자를 하나 골라잡았고, 우리는 거기에 앉았다. 의자는 보기만큼 부드럽고 푹신했다. 재질이 뭐지? 보나마나 거미의 어쩌고겠지 뭐.

그렇게 앉아서 음식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귀에서 너무나도 뚜렷하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용의 노랜지 뭐시긴지 하여튼 반가웠다.

이제는 꽤 익숙해져서 그 ‘노래’를 감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갑자기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어느새 내 옆에 놓인 물컵을 떨어뜨릴 뻔 했다.

 

“뭐해, 안 먹고.”

“에? 아, 네.”

 

물컵에는 어느 새 자줏빛이 감도는 음료-피는 아니었다, 다행히도-가 채워져 있었고, 식탁에는 별다른 게 없었다. 그냥 과자? 같은 것이 그릇에 담겨 있었다.

 

“이건 또 뭐에요? 설마 이번엔 뱀의 어쩌고 하는 건 아니겠죠?”

“응.”

“그럼?”

“그냥 먹는 거.”

 

잠시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건 나도 안다고요, 이 뱀파이어 양반아! 누가 그걸 몰라! 식탁에는 당연히 먹는 게 나와야 되는 거 아냐? 으이구, 답답한 양반 같으니. 누가 저런 미친놈을 따라 여기까지 와서 생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네. 그 인간은 정말 바보 천치일거야. 그렇지, 카스올리?

아, 나도 정말 미쳐가나 봐. 여긴 친구가 없어서 그래. 혼자서 말 걸고 있잖아.

 

“어떻게 먹는 건데요?”

 

나는 이 정체모를 과자의 실체를 밝히는 걸 포기하고 먹는 방법을 물었다. 내 물음에 그는 시범이라도 보여주겠다는 듯이 천천히 과자 한 조각을 꺼내들었다. 근데 솔직히 저건 한 조각이 아니라 한 ‘가닥’ 이잖아. 과자가 무슨 국수 가락도 아니고, 저렇게 길고 가느다란지, 원. 딱 펜만 한 굵기잖아.

 

“이렇게.”

 

그가 그 과자 한 ‘가닥’을 집어서 음료수-라고는 장담하지 못하겠지만 어쨌든-안에 넣었다. 그러자 그 과자가 순식간에 분해되며 작은 방울들로 변했다. 자세히 보니, 공기방울 뭐 그런 게 아니라 가루? 같은 것이었다. 그가 컵을 살짝 흔들자, 그 작은 가루들이 모여 무언가 형태를 만들었다.

바람. 그건 바람의 형태였다. 작은 가루들이 스스로 움직이며 세차게 부는 바람의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와.”

 

내가 감탄사를 내뱉자 그는 싱긋 웃었다. 내 반응이 만족스러웠나?

 

“너도 해 봐.”

 

그는 어느새 잔을 비워가고 있었다. 마시는 모습은 못 봤는데. 여기서 뱀파이어들이 여러 가지 잡다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려면 상당히 눈이 빨라야하겠군.

나도 그가 한 것처럼 과자 하나를 집어 내 잔에 넣었다. 역시 과자는 빠르게 분해되며 작은 가루가 되어 둥둥 떠다녔다. 나는 잔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어.”

 

맙소사. 내 잔에 띄워진 형상은 축구공이었다. 헉, 이거 뭐야. 그 형상을 보고 그 남자가 웃어댔다. 킥킥거리면서. 뭐야, 이건. 정체가 뭐냐고. 내가 노려보는데도 축구공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아 뭐야. 제대로 망신살 뻗쳤네.

나는 잔을 들어 조심스럽게 입에 대었다. 축구공을 이루던 작은 가루들이 내 입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의외로 맛이 괜찮네.

내가 잔을 내려놓는 동안 그는 다른 과자 하나를 집어넣고 있었고, 그의 잔은 어느 새 다시 채워져 있었다. 정말 빠르다, 진짜.

그렇게 과자 5개쯤을 더 해치운 다음에-축구공 다음으로는 음표, 파도, 물고기, 돌고래, 그리고 해골이 나왔었다-의자에 편안히 기댔다. 그 남자는 과자 하나를 더 집어 들고 있었다. 의외로 맛있네, 이거. 나는 왠지 그가 무슨 말을 할 것만 같아서 그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다행히 그는 먹는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9.

 

 

그래. 이 곳, 분명 정상적인 곳은 아니다. 정상적이라니? 턱도 안 되는 소리. 비정상? 비정상을 넘는 표현 없을까. 비정상을 넘어서 병신 같기도 하다. 와오 도대체 이 상황은 뭐지. 하지만 가장 웃긴 건 내가 이 상황에 동화되고 있는 것 아닐까나. 아하하하 정말 웃기구나. 도대체 나는 누구지.

 

“일어났어?”

“제발 얘기 좀 하고 다녀요. 심장마비로 죽겠네.”

“전혀 죽을 것 같지 않은데.”

 

…당신 이리 와 봐요. 나랑 좀 싸우자. 이리 와보라는 듯 손짓을 하자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나 가려고 하면 죽이려고 그러는 거지.”

“아니에요. 난 여자애고 당신은 성인 남자잖아요. 내가 설마 당신을 죽이겠어요?”

“너라면 가능할걸?”

 

그는 쿡쿡 웃으면서 사라졌다. 나도 순간이동을 배워야겠어. 서러워 살겠나. 잠시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었다. 다시 귀에서 울리는 소리가 커졌다. 저 남자가 사라진 후에야 안도가 된 듯 나타나는 소리에게 물었다. 그렇게 저 남자가 무서워? 물론 나 혼자 중얼거린 것이었다. 조금 미친 짓. 하하. 반응을 하려는 듯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잠시 멈추었던 소리는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한테 반응을 하려고 한 거였어? 고맙다, 야. 웃어버렸다.

 

“…카스올리? 여기서 뭐해요?”

“…에?”

 

사실 내 앞의 여자의 목소리 따위 듣지 못했다. 그저 다시 사라져버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것이었다. 어쩌면 뱀파이어가 무서운 것일까? 저 남자가 아니라, 여기에 있는 뱀파이어들이 무서운 것뿐일까? 어쩌면 겁쟁이.

 

얼마 전에 통성명을 하게 된 넨시는 나를 바라보다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분명 착한 사람 같았다. 그런데 뭐가 무서운 거야. 나는 넨시에게 똑같이 웃음을 지어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넨시는 잘 잤어요? 라고 물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잘 잤겠어요? 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나. 예의란 것도 아는 여자애다. 그 것도 모름 쓰나.

 

“얼굴을 잘 보니 잘 잔 것 같지는 않네요.”

“…혹시 독심술 하세요?”

“…아, 조금 할 수 있어요.”

 

네?! 분명 농담으로 물어본 건데, 넨시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니 여기 뱀파이어들은 무슨 능력도 있대? 신기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그럼 좀 있다 봐요, 라며 그 남자처럼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나도 순간이동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나중에 물어봐야겠군. 난 새삼스럽게도 결심을 하고 다시 돌아온 속삭임을 들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

 

 

아침에 일어난 나는 생각했다. 아니 이걸로 나는 몇 번째로 잠에 든 거지? 시간 감각이라는 게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확실했다. 사라져버렸다.

 

“잘 잤어?”

“이제는 남의 방에도 막 들어오는 거예요?”

“…하긴 너도 여자애지. 다시 나가줄까?”

“어차피 볼 것도 없잖아요. 저기 그건 그렇고 여기에는 필기도구 같은 거 없어요?”

“필기도구? 글쎄. 필요해?”

“있으면 좋죠. 뭔가 쓰거나 그리고 싶어요. 손도 굳어버리면 안 되잖아요.”

“그래? 잠깐만 기다려.”

 

눈 한번 깜빡 했을 때 남자는 사라졌고 다시 눈 한번 깜빡 했을 때 그 남자는 내 앞에 다시 서 있었다. 좋겠다. 나도 순간이동…제길. 남자의 손에는 하얀 종이가 들려 있었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종이람. 사실 종이, 라기 보다는 천에 가까웠다. 이것도 거미 어쩌고…실? 그런 걸로 만든 걸까? 남자는 내게 종이(라고 쓰고 천이라 읽는다.)들을 내게 건네주고는, 연한 분홍색을 띄는 막대기를 건네주었다. 사실 연분홍색이라고 단정을 내리기에는 뭐했다. 아하 이것이 말로만 듣던 무지개…아 미안. 내가 잘못했어.

 

“이게 종이인 건 알겠는데 이 막대기는 뭐예요?”

“그건 그냥 대고 쓰면 돼. 그럼 나타나.”

“말도 안 돼.”

“해 봐.”

 

나는 종이를 쉽게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기에 내 손바닥에 그 막대기를 대보았다. 아무것도 안 나타잖아 이 사기꾼아. 나는 장난하냐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눈으로 입을 열었다.

 

“손에다 하면 안 돼. 그 막대기는 그 종이에만 나타나거든.”

“…헛 매직인가요.”

“아마도.”

 

나는 설마, 라고 생각하며 막대기를 종이에다가 가볍게 가져다 댔다. 사실 무언가 나타난다고 해도, 종이는 천에 가까웠기 때문에 물감처럼 번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진짜 매직일 까나. 그냥 종이에 펜을 대고 찍은 것처럼 종이에는 자국이 찍혔다.

 

“진짜 매직인데요?”

“엄청나지?”

“뱀파이어, 사실은 머리가 많이 좋은가 봐요.”

“좀 그렇지.”

 

그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또 올게, 라고 중얼거리고는 다시 사라져버렸다. 그가 내게 준 종이는 13장이었다. 아니 이 애매모호한 숫자는 뭐지. 나중에 더 주라고 하면 더 줄까나. 날아다니는 글씨체로 나는 뱀파이어(Vampire)를 썼다. 뭔가 낯설었다. 하하. 엄마, 내가 이거래. …엄마 나 어쩜 좋아. 난 뱀파이어 영화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서웠다고. 그런데 나보고 뱀파이어래. 어이고 엄마…

 

한참 후에 정신을 차렸을 때에 종이는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사실 내가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은 아니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완전. 젠장. 엄청나게 못 그린다. 나비를 그려놓으면 자전거로 보고 달을 그려놓으면 배로 보이니. 난 끝내주게 엉망인 그림체로 그 남자를 그려 놓았다. 분명 남자는 잘 생긴 편에 속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건 뭐…이, 이건 뭐…그래.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다고!!!!

 

 

-

 

 

“…왜 죽어가는 거예요, 카스올리.”

“배가 고파요.”

 

넨시는 조금만 기다려요, 라며 내 등을 토닥였다. 그녀의 무릎 위에 앉은 꼬마아이는 나를 바라보다가 넨시에게 뭐라 옹알거렸다.

 

“아들이에요?”

“아니에요.”

“그럼 누구에요?”

“사실 얘, 제가 만든 아이에요.”

“에?”

 

넨시는 방긋 웃으면서 아이에게 앞에 있던 컵을 들어 올려 아이의 입에 흘려보냈다. 만들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물었지만 그녀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원을 얘기하라고 했거든.”

“네?”

 

갑자기 옆에서 입을 연 남자 덕에 내 시선을 물론이고, 넨시의 시선까지 그 곳에 꽂혔다. 남자는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아이가 갖고 싶다고 했지, 아마?”

“……….”

 

입 다물어. 라고 얘기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 대신해서 입 다물어요, 라고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다른 이야기가 궁금했다. 하지만 더 물어보면 넨시에게까지 미움 받을 것 같았기에 그저 그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그만 알약을 주면서 얘기했지. ‘이걸로 아이를 가지게 될 거에요. 하지만 당신은 뱀파이어잖아요? 아이도 뱀파이어가 될 거에요. 괜찮겠어요?’ 뭐라고 얘기했더라.”

“……….”

“‘괜찮아요. 대신 그 아이가 행복할 수 있도록 약속해주겠어요?’ 하하.”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넨시는 말을 꺼냈다. 입 다물어. 드디어 얘기했구나. 남자는 알았어, 화내지 마. 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배고프다며. 먹어.

 

“…다시 한 번 그 얘기 꺼내보기만 해 봐. 너도 죽여 버릴 거야.”

“화내지 말라니까. 카스올리가 궁금해 했잖아.”

 

아니 거기서 내 얘기가 왜 나와요. 당황스럽다는 듯 물었지만 둘 다 대답은 없었다. 둘이 옛날에 무슨 사이였나? 그들의 눈치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다가 넨시가 나를 바라보자 생각을 멈췄다. 아차, 독심술. 나는 가장 앞에 놓인 음식을 집어 들었다. 입에 넣고, 그 것이 질기다는 걸 깨닫자, 나는 생각했다. 이거 용 고기구나. 제기랄, 다시는 안 먹겠다고 결심했는데 먹어버렸어. 표정이 굳어간다, 라기 보다는 썩어간다 에 더 가까운 나를 보며 넨시는 웃었다. 그래도 많이 화가 난 건 아니구나.

 

나는 아무런 말이 없는 그 둘을 보다가 문득, 식당에서는 한 번도 들리지 않았던 노래가 들려오자 깜짝 놀라버렸다. 용.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거야? 하지만 속삭이는 듯 작은 소리에 나는 금세 실망했다. 조금은 무서운가 보다. 조금 바보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나는 그 용이 내게 무언가 말하고 싶다는 것을 조금 깨달아버렸다. 무슨 말이었을까.

 

 

-

 

 

“노래가 듣고 싶어요.”

“…어?”

“노래 노래 노래. 노래가 듣고 싶다고요. 여기는 mP3 같은 것도 없어요? 스피커라거나.”

“…있을 것 같아?”

“아악, 컴퓨터가 있을 리는 없고. 미치겠네.”

 

네가 작곡 해. 그는 웃으면서 답했다. 어휴, 잘도 작곡을 하겠네. 장난치지 말라며 대답은 했지만 조금 끌리는 건 사실이었다. 옛날에 들었던 노래나 다시 한 번 떠올려야 할까.

 

“근데 여기에 있게 된 거, 언제부터예요?”

“글쎄…네가 오기 전까지는 내내 위에서 활동했어.”

“……….”

“아, 거짓말이야. 네가 오기 한 달 전부터는 위에서 활동하고 그 전에는 여기서 활동했어.”

“언제부터요?”

“내가 뱀파이어고 되고 나서부터. 한, 183년 정도.”

“…헐.”

“사실 더 오래 됐어. 200년 가까이 될까?”

 

그러면 할아버지시네요. 쿡쿡 웃자, 그는 아 그런가? 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문득 저 사람 뱀파이어가 되기 전에는 어떤 성격이었을지 궁금해져버렸다.

 

…아악. 동화되고 있어. 이럼 안 돼.

 

“어제 내가 준 종이로 뭐 했어?”

“…그냥. 여러 가지.”

“혹시 그림 잘 그려? 그럼 나 좀 그려주라.”

“…나 놀려요? 나 그림 얼마나 못 그리는데. 어제도 그 쪽 그렸다가 망해서 내가 울 뻔했어요?”

“…봐보고 싶다. 어떻게 그렸기에.”

“분명 당신 좀 잘생긴 쪽에 속하거든요? 그런데 나 오크 그렸어요.”

 

남자는 진짜로 보고 싶다, 라며 다시 웃었다. 보면 안 돼요. 보면 당신 죽을지도 몰라. 심장마비로. 진심으로 대답했다. 진짜로 브이텍 올지 모르는데. 그는 아 그 정도야? 그럼 됐어. 라며 다시 사라졌다. 맨날 저런다니까. 자, 용아 이제 나오렴. 생각함과 동시에 다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뭐 어쩐다고? 이제 대충 발음 정도가 들리는 듯 했다. 반복, 이 아니라 내게 말을 걸어오는 느낌.

 

아, 힘들다. 기지개를 쭉 폈다. 그리고 방으로 다시 가 모아두었던 종이들을 꺼냈다. 나는 그림 쪽으로는 절대 나가지 말고 영원히 글만 써야지. 사실 글도 그렇게 잘 쓰는 편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그 남자가 혹시나 그림들을 볼까 두려워 막대기로 그 그림들을 빡빡 지웠다. 사실 종이를 찢어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그것보다 천에 가까운 상태였으니, 잘 찢어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분명 그림은 그리지 않고 글만 쓸 거라 결심을 했는데도, 그림을 그리려는 이 본능을 나는 이기지 못했다. 나는 제어가 확실하지 못한 여자. 하하. 정확히 말하면 인내심이 완전 부족한 여자. 작심삼일의 대표적인 예? 그림을 그리던 나는 어느 순간 내가 뭘 그리려고 했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건 음표 같기도 하고 사람 발 같기도 하고. 난 뭘 그리려고 한 거지.

 

“아, 이런 식으로 그림을 못 그려서 못 보게 한 거야.”

“헐 깜짝아!!!!”

 

분명 순간 이동하는 남자는 많이 익숙했는데도 깜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내 뒤에 서서 내가 그리던 것들을 본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만 보여주라. 남자는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그 손을 외면했다. 그래 나 그림 완전 못 그려. 나도 잘 안다고. 그렇다고 그렇게 비웃으면 내가 뭐가 돼…

 

“나 그린 거 없어?”

“다 지웠어요.”

“아 아깝다…다시 그려주라.”

“또 비웃게요? 내가 미쳤다고 다시 그려?”

“아깝네. 그럼 너 그려봐.”

“됐거든요. 원래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자기 모습 안 그려요.”

“자화상 어쩔래.”

“…아악!!!!! 말꼬리 좀 잡지 마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자 그는 계속 웃으면서도 미안, 미안, 이라고 대답했다. 전혀 미안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쁘게 쏘아붙이지는 않았다. 내가 이래서 mP3 가 필요하다고 했던 거야. 볼륨 완전 높이고 이런 말들 다 무시하고 그러고 글 쓰고 그림 그리게. 나 학원에 내 가방. 거기에 책도 있고, 노트도 있고, 나의 사랑 mP3도 거기에 있고 핸드폰도 거기 있고 읽던 책도 거기 있는…헐 나 연체 됐겠다. 망했네. 그거 연체료…문득 생각난 책에 잠시 아무 말도 안 하자 그는 왜 그래? 라고 물어왔다. 말하기에는 너무 막연한 이야기였기에 나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별 일 아니에요. 그저…연체료가…뭐, 연체료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근데요. 여기서 1층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요?”

“생각해. 1층으로 가고 싶다고.”

“…네…”

어이고 잘 도 가겠네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10.

 

 

 

1층…1층이라……. 나는 잘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열심히 생각했다. 여기는 1층 복도라고.

 

“지금 뭐 하는 거야?”

 

아, 아직 안 가고 있었네. 나는 눈을 뜨며-눈을 감고 있었다-대꾸했다. 조금은 툴툴거리는 말투로.

 

“생각하라면서요.”

 

그 말에 그는 뒤로 벌러덩 넘어졌고-물론 그는 정확하게 침대 위로 쓰러졌다-복도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만큼 큰 소리로 폭소를 터뜨렸다. 내가 뭘 잘못했나? 아, 또 멍청한 짓 했구나. 나는 스스로에게 한숨을 쉬며 그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분명 뱀파이어들은 머리가 좋은 것 같은데, 왜 나는 이렇게 멍청할까. 아직 인간의 뇌세포가 남아있어서 그런가? 제발 뇌세포만 바뀌면 좋겠네. 진짜.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야.

한 3분쯤 지나자 그는 이제 미칠 듯한 웃음에서 벗어나 조금씩만 킥킥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곧 있으면 일어나겠지, 하고 생각만 했는데 어느새 그 남자는 일어나 테이블 옆에 기대 있었다. 계속 웃으면서. 그 웃음이 비웃음 같이 보여서 나는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만약 우리 엄마가 저렇게 웃었다면 난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 만약에 키아크라가 저렇게 웃었다면 어땠을까? 쓸데없는 생각 집어치워, 카스올리. 스스로에게 그렇게 타일렀지만 내 머릿속에는 어쩔 수 없이 냉랭하게 무표정인 나와 같이 행복하게 웃고 있는 내가 나란히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다시 울고 싶어졌다.

 

“내가 생각하라는 말은 그게 아냐. 넨시가 너랑 10층으로 올라갈 때 눈 감디?”

 

목소리가 눈물에 메여 나오지 않았으므로 나는 살짝 고개만 흔들었다.

 

“음…여기서 내려간다면 꽤나 소란스럽겠어. 복도로 나가자.”

 

나는 왜 복도로 나가는 게 좋은지, 또 여기서 내려가면 왜 소란스러운지 묻고 싶었지만 이미 그는 사라진 뒤였다. 아마 복도로 나갔겠지. 묻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차라리 이번만큼은 누군가 내 마음 속 얽힌 물음표들을 말 하지 않아도 모조리 읽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대답.

그의 이름은 뭐지?…내 귀에서는 왜 소리-용의 노래-가 들리는 거지?…여기서 내려가거나 올라가거나, 이동은 어떻게 하지?…넨시의 아이가 아들이 아니라면, 누구지?…알약? 알약은 뭘까?…여기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뭘까?…난 여기 왜 온 거지?…내가 정말 뱀파이어와는 다르고, 인간도 아니라면 난 뭘까? 도대체.

복도로 나가니 뱀파이어들이 많이 나와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 심각한 얼굴, 심각한 몸짓. 그들 중 몇몇은 따로 뭉쳐서 심각할 게 분명한 소식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즉석 회의?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대답이 없는 걸 보고 나는 분명 뒤에 그가 없을 것이라 예상하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아마 조금 큰 소리로 흘러나온 대화의 일부를 들은 것이겠지.

 

“아냐, 아무것도.”

 

그러나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위험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카스올리, 신경 쓰지 마. 그냥 좀 사소한 문제가 생겨서 그래.”

 

그는 ‘사소한’ 이란 단어에 힘을 주고 말했다. 분명 사소한 문제가 아닐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의문점 하나가 더 생겨 버렸잖아.

그가 준 종이에다가 ‘물음표 리스트’ 라도 작성해야겠군. 언젠가 답해줄 날이 오겠지. 어차피 그 전에 떠나버릴지도 몰라. 일단 이대로는 ‘물음표’ 때문에 머리가 돌아버리겠어. 적어도 하나는 해소해야지. 나는 수많은 의문점들 중에 하나를 골랐다.

 

“저기요.”

 

어느 새 다른 뱀파이어들의 모습에 집중하고 있는 그를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아, 처음으로 저기요, 라고 불렀네.

 

“응?”

“물어볼 게 있어요.”

“뭔데?”

 

분명 그의 눈은 내 눈과 마주치고 있었지만, 그의 관심은 내가 아니었다. 귀찮다는 듯 질문을 받는 그가 얄미웠다.

 

“저번에…넨시가 그 아이를 ‘만들었다’ 고 했잖아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움찔. 그가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번에도 그냥 어물쩍 넘기려고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어. 나는 그 남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우리 둘 사이에는 잠시 날카로운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그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그러니까 뱀파이어들은, 아기를 갖지 못해. 즉, 자손을 번성시킬 능력이 없다는 거지.”

그가 주저하며 털어놓은 사실에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아, 그러면 아기를 ‘낳지’ 않고 ‘만드는’ 능력이 있나? 뱀파이어들은 모두 창조주야?

 

“뭐 나름대로의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어. 장점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 개체 수를 조절할 수 있다는 거지. 단점은…필요할 때, 그러니까 전쟁 같은 걸 할 때, 기하급수적으로 개체 수를 늘리지 못한다는 거.”

“그럼 그 ‘알약’ 은 무슨 뜻인데요? 그거 먹으면 아이 만들 수 있는 건가요?”

 

그가 살짝 웃었지만-내 멍청함이 그에게 기쁨을 주고 있었다-꽤나 일그러진 웃음이었다. 아마 뱀파이어들의 ‘사소한’ 대화 때문이겠지.

 

“아니. 카스올리, 너 뱀파이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아?”

“아뇨. 알 리가 있나.”

“잘 들어. 뱀파이어에겐 천적이 없어. 따라서 우리는 생태계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어.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번식을 못 하기 때문에, 그렇지 못해. 한편으로는 번식을 아예 못하면 우리가 멸종되기 때문에 우리의 개체 수를 조절해 주는 ‘시스템’ 이 있어. 아, 시스템이라고는 하지 못하겠다. 어쨌든.

여기에는 ‘운명의 영혼’ 이라고 불리는 게 있어-그는 여기서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이름이 유치하기 때문일까-그는 새로운 뱀파이어들을 만들고, 생태계를 조정하지. 여기에서는 인간 세계와는 달리 자연에 질서가 없어. 한 종이 갑자기 줄어들기도 하고 반대로 갑자기 늘어나기도 해.

그는 뱀파이어의 수가 줄어들면 다시 늘려야 하는 거지. 따라서 우리는 그 때마다 그의 ‘알림’을 받아. 그 때마다 자신의 ‘제자’를 얻고 싶어 하는 뱀파이어 몇몇이 나오지.-나는 ‘제자’라는 말에 의아했지만 잠자코 있었다-넨시도 그 중에 한 명이었어.

아, 뱀파이어를 만드는 방법은 간단해. 자세한 건 모르지만 아무튼 대강은 알고 있어, 대부분의 뱀파이어들은. 일단 앞에서 말한 그들의 피를 추출해서 인간 배아 중 몇몇을 골라 그 피를 집어넣으면-적절한 언어 선택이 아닌 것 같았다-돼. 너도 그런 아기들 중 한 명이야.

아기들은 태어날 때는 정상적인 인간이야.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뱀파이어로 변하게 되지. 그들 대부분은 인간 세상에서 잊히게 되어 있어. 예를 들면 ‘미아’ 라던가? 그런 방식으로. 그리고 그런 ‘덜 자란 뱀파이어’를 찾아서 이곳으로 데려오는 일을 하는 뱀파이어들은 또 따로 있어.”

“당신도 그들 중 한 명이군요?”

“그래. 혹시 이해하기 어렵니?”

 

나는 거짓말을 했다.

 

“아뇨.”

 

그가 빙긋 웃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뱀파이어 한 명당 자신의 피를 받은 ‘제자’는 단 한 명밖에 가질 수 없어.”

 

잠깐. 그럼 나는 누구의 피를 받은 거지?

 

“그럼 나는요? 나는 누구의 피를 받은 거죠?”

“응?”

 

곤란한 질문이었나. 그가 몹시 당황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일단 아까 하던 얘기로 돌아가자, 카스올리.”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애원조가 섞여 있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 설득당해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진 않았지만.

 

“보통 뱀파이어들이라면 14년이나 많아도 20년 이하의 제자를 원하지. 하지만 넨시는 달랐어. 넨시는 4년이나 5년쯤 된 ‘신생아’를 원했단 말이야.”

“신생아요? 그 정도면 신생아까지는 아니잖아요.”

“내가 얘기 안 했나? 지금까지 역사상 뱀파이어들 중에서 가장 장수한 뱀파이어는 거의 800년을 살았어.”

“에에?”

“너도 아마 정신만 건강하다면 600년은 살걸.”

잠깐. 600년이라면 자그마치 6세기잖아! 그나저나 ‘정신만 건강하다면’ 이라니. 뭔가 거슬리는데? 쳇.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라고, 당신 말이야!

 

“정신만 건강하다면 이라니요!”

“지금처럼 막 흥분하거나 화내거나 깜짝 깜짝 놀라는 거. 좀 침착해 봐.”

“난 누구처럼 사람 놀래키면서까지 침착한 인간 아니에요. 이제 아까 하던 얘기로 돌아가 봐요.”

 

나는 거의 한숨에 가깝다시피 말했다. 아니, 거의 푸념이었지, 아마. 그는 긍정의 의미로 다시 웃었다.

 

“어쨌든. 그게 아마 20년 전인가? 하여튼 얼마 안 됐어. 넨시는 뭐랄까…, 약간 감성적인 그런 면이 있었어. 보통의 뱀파이어하고는 달랐지.”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

“설마 넨시와의 첫 만남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넨시는 정말 쌀쌀맞았는데.

 

“그건, 넨시가 너에 대해 잘못된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야. 그녀는 네가 뱀파이어들에 대해서 모조리 알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네가 그녀 자신을 이상하게 볼 까봐 두려웠던 거지.”

“아아, 그렇구나.”

 

뭔가 그 남자가 <넨시>라는 단어를 정말정말 소중하게 발음하는 것 같아서 겉으론 정색하고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응. 넨시는 굉장히 다정한 뱀파이어야. 그녀가 제자를 갖고 싶어 하는 자들 중 한 명으로 뽑혔을 때, 폭탄발언을 했지. 자기는 아기를 갖고 싶다고. 하지만 그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지. 그냥 정상적인 제자를 가져도 굉장히 많은 양의 피를 내어주어야 하거든. 그녀는 제자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했지. 꽤 드물게 찾아오는 기회인데 말이야.

그녀는 한동안 침울하게 지냈어. 나는 몇 십 년 후에 새로 만들어진 반 뱀파이어들을 찾으러 갔지. 그렇게 갔다 와 보니 넨시는 정말 변해 있었어. 그렇게 다정다감했던 뱀파이어가 거의 우울증에 빠져있더군. 말을 걸어도 겨우 대답밖에 하지 않고.

그래서 나는 넨시에게 물었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겠냐고. 그녀는 소원을 들어달라고 했어. 이제 생각해보면 꽤 잘한 짓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말해보라고 했어.

너도 알다시피, 그녀는 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어. 그건 정말로 불가능한 짓이었지. 결국 나는 금지된 짓을 해야만 했어. 또 다시 15년 정도가 걸려서 알약을 하나 구했어.

그 알약은……, 엄청난 거였어. 어쨌든 그녀는 굳이 인간 아기를 원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기가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 바로 뱀파이어가 되는 것에 쉽게 동의했지.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음에도 말이지. 다행히도 부작용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말이야.

그녀는 자신이 그 아기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확신했어. 뭐, 그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 같지는 않아.

그 알약은 넨시의 아기를 만들 수 있는 거였어. 우리는 인간 세계로 가서 ‘미아’들 중 어린 아기를 이곳으로 데려와 알약을 먹였어. 아니, 우리라고 하기 보다는 넨시라고 하는 게 훨씬 낫겠군. 그녀는 혼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니까.

나는 미리 짜 둔 각본을 그대로 실행에 옮겼어. 넨시가 사라졌다고 알렸지. 물론 넨시를 찾아와야 한다는 소리가 꽤나 많이 들리기 시작했지. 나는 회의를 열었고, 몇몇 뱀파이어가 넨시를 찾으러 가겠다고 자진했어.

물론 넨시는 자신을 잡으러 온 그들을 미행했고, 적당한 때를 봐서 그들이 아기와 함께 있는 자신을 발견하도록 만들었지. 작전은 성공이었어. 넨시는 그들의 심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말과 모르겠다는 말만 되풀이했고, 그 일은 잊혀져갔어. (그런데도 키라드는 내게 그 때부터 반감을 품고 있던 것 같더군, 그 남자가 덧붙였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게 끝이야.”

 

아 그래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을 추스르기 위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좋아, 이제는 딱 두 가지만 더 물어보자.

 

“그런데 여기도 직책이나 직위… 같은 게 있어요?”

“뭐 뚜렷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봐야지.”

“그럼 당신은 높은 직책인가요?”

“응. 그렇다고 봐야지.”

 

머뭇거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자랑스러운 걸까.

 

“그럼 넨시랑은 무슨 관계에요?”

“넨시?”

“네.”

분명히 보통 관계는 아닌 것 같단 말이에요, 부부라도 되나. 이렇게 덧붙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삼켰다. 정말 무슨 관계야.

 

“이거 이거, 설명이 또 길어지겠는데.”

“그냥 짧게 해 줘요.”

“그럴까?”

 

그가 빙긋 웃었다. 뭐야, 뭔가 미심쩍잖아. 하지만 지금은 너무 졸렸기에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냥 마음이 맞는 친구 사이?”

“친구? 그것뿐이에요?”

“그럼 뭘 더 바래?”

“연인이나, 뭐 그런 거 아니에요?”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웃음을 참고 있는 거겠지. 그의 새하얀 이가 웃으면서 살짝 드러났다. 하지만 생각처럼 뾰족하지는 않았다.

 

“그런 거 아냐.”

“아, 네.”

 

뭐 아니라는데 어쩌겠어, 내가.

 

“그럼 이제 들어가서 잘까?”

“아니요.”

“응? 왜? 너 졸려 보여.”

“1층으로 가는 방법은 알려 줘야죠. 넨시랑 항상 같이 이동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여기 1층이야.”

 

헐, 설마 또? 나는 그의 말에 지긋지긋함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대로였다. 아, 뭐야. 1층도 10층이랑 디자인이 똑같은가? 어라? 별로 변한 게 없는데? 방문이 열리고 닫힌 배열도 똑같고.

“또 속았네.”

“아, 뭐예요!!”

 

그가 피식, 웃었다.

 

“눈을 감을 필요는 없어. 그냥 네가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 있다고 생각해. 여기는 아무데도 아니라고, 그렇게.”

 

엄청 쉬웠다. 평소에 노래를 들으며 나 말고 다른 모든 것들을 새까맣게 지워버리는 연습을 많이 해서 그런가, 내 앞의 풍경이 지워졌다. 이제 나만 남았다. 내 목소리, 내 심장소리, 내 생각, 오직 나만 남았다.

 

“나는 이동하지 않을 거야…이제 그 곳에서 블라인드 손잡이 같은 걸 꺼내.”

 

그의 목소리가 공간을 뚫고 들어와 울렸다. 나는 기다란 줄로 연결된 블라인드 손잡이를 그렸다.

 

“당겨서 밑으로 이동한다고 생각해. 너가 블라인드라고 상상해 봐.”

블라인드? 이쪽을 당기면 내려가나? 아니면 이쪽인가? 한 쪽을 당겼다. 블라인드는 순식간에 내려와 햇빛을 가렸다. 블라인드 끝이 바닥에 닿자, 나는 지워져 있던 풍경을 되살렸다. 잠시 머리가 어지러웠다.

 

“여기가…1층 맞나?”

 

어지러운 의식 속에서도 이상하리만치 시각은 또렷했다. 10층과는 확실히 다른 디자인이다. 온통 검은색인. 그는 그의 말대로 내려오지 않았다. 그럼 혼자서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아까와 같은 방법을 사용해 올라가려고 노력했다. 잘 되지 않을 때는 눈까지 감아가면서.

그런데 웬일인지, 잘 되지 않았다. 블라인드를 내리는 것 보다는 올리는 게 더 힘들어서 그런가? 그 때, 갑자기 여자 목소리가 고요한 어둠을 뚫고 나왔다.

 

“에밀리……제발!”

 

엄마야, 깜짝이야. 여기 누가 있나? 아까는 분명 없었는데. 창문도 없는데다 복도가 칠흑 같은 검정색이라 누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입 다물어. 그의 제자는 나라고! 나는 그의 피를 받았어.”

“그게 네가 지금 하려는 일과 무슨 상관인데? 네가 하려는 일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생각해 봤어?”

“충분이 생각해 봤으니 제발 이제 그만 꺼져.”

 

흠… ‘에밀리’라는 사람…아니, 뱀파이어는 아무래도 입이 꽤 거친 것 같다.

 

“에밀……”

“입 다물라고! 곧 전쟁이야. 알아?”

“그건 알아! 하지만……!”

“내가 막을 거야. 그가 다치는 건 용납 못해.”

“하지만 네가 다칠 거야. 혼자서 어떻게 나설 생각을 하냐고!”

“상관없어. 어차피 카…아니, 그는 내가 다쳐도 별 상관 안 할 거야.”

 

전쟁? 그? 뭔 소리래. 이것 참.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간첩으로 몰릴 것 같아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가만히 숨어있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하얀색 옷을 입고 있다니. 하얀색을 저주 할 테다! 그리고 앞으로는 검은색을 입고 다닐 테다! 아무튼 여기서 살아나가기만 한다면 말이지.

그런데 전쟁이라는 말이 자꾸 귀에 걸린다. 세계 3차대전이라도 일어나려나?

 

“……이제 그만 비켜줘. 난 가야 해.”

 

갑자기 쩔그렁거리는 쇳소리가 들렸다. 윽, 완전무장까지. 걸렸다가는 초특급 스테이크가 되게 생겼다. 칼집이 멋스럽게도 나긋나긋 나 있는. 그것도 십자로.

 

“……에밀리, 너 꼭 그렇게 해야 돼?”

 

짤깍, 하고 꽤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내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겠지. 절대로 칼집에서 칼을 뽑는 소리가 아닐 거야. 제발. 난 그렇게 믿는다.

 

“응. 걱정하지 마. 어차피 놈들은 자고 있을 거야.”

“글쎄. 그렇지는 않을걸.”

“상관없어. 그러니까 좀 비켜줄래? 너까지 다치는 걸 원치 않아.”

 

탁. 갑자기 누군가의 발이 내 코앞에 나타났다. 으아아악! 깜짝이야!! 심장이 아예 없어지는 줄 알았다. 도대체 누구의 발일까? 에밀리? 아니면 그 상대편?

 

“알았어. 하지만…”

“고마워.”

 

그 대답과 동시에 쉭-하고 벽에 바짝 붙어있는 나 앞으로 어떤 물체가 순식간에 지나가며 바람이 불었다. 아마도 그 ‘에밀리’라는 사람이겠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무슨 일인가 일어나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 가 버린 걸까? 아니면 아직 누군가 남아있는 걸까. 제발 누가 대답 좀 해 봐요!!

윽, 나 다리에 쥐날 것 같아. 벽에 바짝 붙어서 다리를 쭈그린 형상을 한 탓에 혈관이 조여 왔다. 아 제발 아무나 나타나줘라. 제발.

그렇게 마음속으로 빌며 한참 동안 쭈그려 앉아있는데 갑자기 복도가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야? 꽤 많은 숫자의 사람…, 아니 뱀파이어들이 우르르 달려오는 것 같았다. 분명 뱀파이어들은 소리 없이 다니는 데도 불구하고,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보통 숫자가 아닌 듯 했다. 뭐야, 이러다가 나 밟혀 죽는 거 아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망설이고 할 겨를이 없었다. 곧장 벌떡 일어난 나는,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 무슨 일인가, 하고 살펴봤다.

오 마이 갓.

 

-

 

이 건물에 있는 뱀파이어들이란 뱀파이어들은 모조리 모인 것 같았다. 그들은 모두 한 방향을 향해 오고 있었다. 어라? 내가 있는 쪽? 헐. 엄마야. 나 어떡해.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카스올리? 너 왜 여기 있는 거야?”

 

내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자 너무도 다행스러움이 든 나머지 몸을 돌려 그를 껴안을 뻔 했다. 정신 차려, 카스올리. 귀에서 시끄럽게 고음으로 울리는 소리 덕에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잠깐. 너 왜 여기 있는 거야? 몰라서 물어요? 당신이 내려 보냈잖아요! 올라오는 법은 설명도 안 해주고.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건가?

 

“그걸 몰라서 물…”

“위로 올라가! 빨리! 지금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왜요?”

“위로 올라가라고!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마!”

“하지만…”

“빨리!”

 

아, 짜증나네, 이거. 난 지금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상태는 잘 알 수 있었다. 아 글쎄, 난 위로 어떻게 올라가는지 모른다고, 이 양반아! 자꾸만 내 말을 끊는 이 사람…,아니 뱀파이어에게 짜증이 확 치밀었다.

 

“아, 좀 말 끊지 말고 들어 봐요! 난 어떻게 올라가는지 모른다고요!”

“다 내 잘못이야. 너를 1층으로 내려 보내는 게 아니었어!”

“그게 왜…”

툭.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쳤다. 이건 또 누구야? 나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휙 돌렸지만 곧 후회했다. 처음 보는 뱀파이어가 서 있었다. 중간 중간 금빛 머리카락이 섞여있는 갈색 머리를 하고 이 남자와 똑같이 무늬가 있는 검은 눈을 하고 있었다.

 

“에? 누구세요?”

 

내가 이렇게 물은 건, 죄송합니다, 잘못 봤네요. 라는 대답을 얻기 위해서였지 즉석 소개 자리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뱀파이어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이번 ‘충돌’의 책임자인 ‘키라드’라고 합니다.”

 

뭐 어쩌라고?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대꾸하고 싶었지만 그의 허리춤에 주렁주렁 매달린 살상무기들을 보니 용기가 쏙 들어갔다. 아 네, 반가워요 라고 대꾸라도 하라는 건가?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쭈뼛거리는데 내 앞으로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마치 나를 보호하려는 듯.

 

“‘충돌’이라니. 되도록 그런 분야의 이야기는 가급적 피해주시게.”

 

뭐야. 이 점잖은 말투는. 나는 고개를 들어 그 남자를 살짝 쳐다보았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아, 정확히 말하면 ‘제 1차 충돌’ 이겠죠. 그나저나 이 숙녀분은 누구십니까?”

 

이 키라드라는 남자가 깍듯이 존대를 하는 걸 보면 높은 직책이긴 정말 높은 직책인가보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넨시도 그렇고 이 전혀 호감이 가지 않는 키라드라는 남자도 그렇고 만나면 우선 자기소개부터 하는데 왜 도대체 뭐가 문제이기에 이 남자는 자기 이름을 죽어도 밝히지 않는 걸까.

 

“키라드. 자네도 알 텐데.”

 

엄청 날이 서 있는 그의 말투에 키라드가 움찔했다. 아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덩치는 이 남자보다 훨씬 크지만… 직책은 이 남자가 더 높단 말이지. 왜 대드는 거냐고! 나는 내가 이 남자라도 된 양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1층에는 내려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걸로 아는데요?”

 

으드득. 아 깜짝이야. 분명 내 앞의 남자에게서 나오는 소리였다. 마치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 입 다물어, 라는 경고를 담은 메시지였다.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제 수명에 죽고 싶다면 그 입 다무는 게 좋을 것 같네, 키라드.”

“그렇게 하죠. 하지만 저 아이가 여기 있었던 이상 증언을 해 주어야겠습니다. 동의하시죠?”

“난 자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 만약 정말로 큰 전쟁이 일어난다면 자네를 맨 앞에 세울 걸세. 그렇다고 쉽게 죽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치명상은 입겠지.”

 

이렇게 직설적이라니. 그럴 줄은 몰랐는데. 그런데 내가 여기 ‘있었던’ 건 어떻게 알지? 한 번 시치미 떼고 물어볼까? 하여튼 여기 와서 궁금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니까.

 

“여기 ‘있었던’ 이라니요?”

 

아 이 순진무구한 목소리. 가식인 게 너무 티 나지만 않았으면 하는데.

 

“거짓말 할 생각은 하지 마라. 난 네가 방금 전 까지 여기 쥐새끼처럼 숨어서 대화를 엿들은 걸 다 알고 왔으니까.”

 

윽.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CCTV라도 달린 건가. 그나저나 ‘쥐새끼처럼’ 이라니. 표현이 이상한데? 이봐요, 아저씨, 그 칼 이리 줘 봐요. 나랑 한 판 뜨고 얘기해. 응? 내가 보통 여자애들처럼 보여? 칼만 봐도 벌벌 떠는? 이봐, 아저씨 한 판 뜨자니까! 아, 정말.

솔직히 이 재수 없는 뱀파이어와 칼싸움을 해서 이길 자신은 없었지만 어쨌든 속으로 이렇게라도 해야지 분이 풀릴 것 같았다. 세상에, ‘쥐새끼처럼’ 이라니. 쳇. 날 도대체 뭘로 보고.

 

“알았으니까 여기서 죽고 싶지 않다면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키라드. 앞으로 몸 제대로 간수하시고.”

“염려 마시지요.”

 

아오, 저 얼굴! 확 때려 부수고 싶다. 어라? 내 소리를 들었나? 그가 날 쳐다보자 순간적으로 뜨끔했다. 뭘 봐, 이 늙어빠진 뱀파이어야! 아 진정하자, 카스올리. 이런다고 될 일은 없어. 심호흡 한 번 해. 괜찮아질 거야. 자, 심호흡 한 번 해 봐.

 

“켁!”

 

아, 뭐야! 숨을 들여 마시고 있는데 등을 치면 어떡해! 덕분에 나는 한동안 벽을 잡고-그 웅성거리는 복도에 무슨 틈이 있다고…나도 참 신기한 ‘인간’이지-켁켁거렸다.

 

“괜찮아?”

 

어느새 그는 원래의 그의 말투를 되찾았지만 꽤나 딱딱했다.

 

“아, 진짜. 저 사람 뭐예요?”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은 ‘그렇게 치면 어떡해요?’였지만 그의 분노에 찬 눈을 쳐다보며 그렇게 짜증을 낼 자신은 없었다. 그의 상태는 심각했다. 건들기만 하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이는 간신이 악물고 있는 것 같았고, 손은 주먹을 쥐고 있었다. 아까 ‘괜찮아?’라는 말은 어떻게 한 건지, 원.

 

“사람이 아니라 뱀파이어지. 신경 쓸 거 없어.”

“당신이 더 높은 직책인 것 같은데, 그냥 그 자리에서 입 다물게 하지.”

“이 자리에서? 그건 좀 그렇고, 내가 말했잖아. 전쟁에서 맨 앞에 세워 버린다고.”

“그렇게 해서 죽기라도 해요?”

“응. 죽게 만들 거야.”

 

헐. 뭐니, 이 남자. 정말 죽일 기세다.

 

“일단 이렇게 된 이상 너는 저기서 증언을 해야만 해.”

“증언이요? 무슨 증언?”

“아직도 사태 파악 못 했어?”

“그런 것 같네요.”

 

그가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내가 멍청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어진 것 같아서…….

 

“네가 에밀리와 넨시의 대화를 엿들었다고 들었어.”

“넨시라고요? 아, 그게 넨시였구나.”

 

나는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그가 내 말을 또렷하게 들을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앞으로는 혼잣말을 하려면 정말 작은 소리로 해야겠네. 그나저나 그게 넨시였다니. 어쩐지 목소리와 말투가 귀에 익더라.

 

“응. 다행히 에밀리한테 공격받지는 않았지만, 뭐.”

 

근데… 에밀리라는 사람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설마 이곳 뱀파이어들은 모두 독심술이라도 하나.

 

“근데 에밀리…라는 뱀파이어는 어떻게 알아요?”

“내가 말 안 했었나? 걔는 내 제자야.”

“아, 그럼 당신의 피를 받은 뱀파이어네요?”

“그런 셈이지. 좀 다혈질이라서 그렇지, 괜찮은 애야.”

 

음? 괜찮은 애라고? 전쟁 어쩌고 얘기를 간식 얘기처럼 간단하게 하는데? 허허, 정신 차려요 뱀파이어 씨.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고요?”

“대화 들었다며? 그런데도 이해를 못 해?”

“그런 것 같아요.”

“에밀리가 여기를 몰래 빠져나가다 발각됐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순간 머릿속에 대화의 일부가 떠올랐다.「내가 막을 거야. 그가 다치는 건 용납 못해.」아, 그럼 혹시 그 대화 속의 ‘그’ 가 바로 이 남자였나? 어…! 그렇다면…혹시…!!

「하지만 네가 다칠 거야. 혼자서 어떻게 나설 생각을 하냐고!」「상관없어. 어차피 카…아니, 그는 내가 다쳐도 별 상관 안 할 거야.」

이 부분……. 「카…아니, 그는…」그렇다면 이 남자의 이름이 혹시 ‘카’로 시작되나? 혹시 카메라? 아니지. 내가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와, 어쨌든 중요한 열쇠를 하나 찾았군.

 

“그럼 내가 어디서 ‘증언’을 해야 하는 건데요?”

나는 일부러 ‘증언’ 이란 단어에 힘을 줘서 발음했다.

 

“너 앞에 있는 방에서. 아니, 좀 넓으니까 방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그가 ‘방’ 대신 쓸 말을 고민하고 있는 동안 나는 내 앞을 살펴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까 내 앞에 문이 하나 있었다. 아까는 못 봤는데. 그래서 저 많은 뱀파이어들이 모두 내 앞으로 몰렸던 거구나.

 

“일단 들어가자. 곧 문이 닫힐 거야.”

“…….”

 

안으로 들어가니 새하얀 빛이 거대한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전등 빛인가? 하고 천장을 올려다 보았더니 웬걸, 빛을 내는 무언가가 천장을 가득 채운 채 날아다니고 있었다.

 

“헐. 저게 뭐에요?”

“뭐? 아, 저거. 그냥 빛을 내는 곤충…같은 거라고 생각해. 정확한 명칭은 브릿이지만.”

 

응, 브릿. 알았어요, 기억해둘게요.

어두운 복도에서 금방 들어와서 그런지 빛에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서서히 적응되면서, 내 앞에 있는 ‘방’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 정말이지 그렇게 커다란 공간은 본 적이 없었다. 와, 뱀파이어들이 득시글득시글 한 거대한 공간이라…, 매력적이군.

그 길고 넓은 방 맨 앞에는 탁자가 빙 둘러 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나란히 놓아져 있는 의자 세 개가 있었다. 빙 둘러 놓아진 탁자들 중 한 자리와, 그리고 의자 세 개 중 하나가 비어 있었다.

 

“우리 설마 저기 빈자리에 앉아야 돼요?”

“응.”

 

설마, 하고 물었지만 그의 대답은 너무나 명료했다. 아마 저기 탁자들의 빈자리 바로 옆에 키라드가 떡 하니 앉아있기 때문일까. 심히 불쾌하기도 하겠군.

그렇다면 내 자리. 내 자리 바로 앞이 그의 자리였고, 옆에는 넨시와… 갈색머리 여자애가 앉아있었다. 그런데 저 갈색머리… 뭔가 눈에 익는다. 분명 어디선가 봤었는데… 기억이 안 나. 묘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데자뷰인가? 아냐. 도대체 어디에서 봤었지?

 

“뭐 해. 빨리 들어와.”

“네?”

“들어오라고.”

“아, 네.”

 

우리가 발을 디디자마자 바로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웅성거리는 침묵 속에서 묵묵히 나아가 제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이 남자가 저기 저 자리에 앉으니까 뭔가 위엄 있어 보인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졸립다. 그러고 보니 나 자려다가 말고 온 거잖아? 내일 아침은 못 먹겠군. 그 시간에 자고 있을 테니.

그나저나 내 의자는 뭐가 이렇게 볼품없는 걸까. 앉자마자 삐걱 소리가 났다. 대충 판자때기 붙여놓고, 이게 뭐야.

내 옆에는 넨시가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갈색머리 여자애. 슬쩍 고개를 빼서 보니 정말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다. 잠깐. 잠깐. 잠깐…!! 저, 저, 저, 저, 얼굴 말야…, 나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 냈어……. 기억해 냈다고!

분명 그 애였다. 내가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복도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문이 열리는 바람에 머리 부딪쳤을 때,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지 않았던, 바로 그 진한 갈색머리 여자애였다! 어쩐지 낯이 익더라!

 

 

 

11.

 

 

그 여자아이…어 그니까 쟤가 그 에밀리, 인가? 아무튼 그 여자애는 굉장히 심기불편하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인상은 살며시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는 그 여자아이에게서는 킬러(Killer) 의 포스가…어휴 나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도 참. 웃을 뻔 했지만 뭔가 모두의 표정이 진지했기에 나는 기침만 살짝 하고 바르게 앉았다.

 

“자. 이번 <증명> 의 주인공은 3명. 이름을 얘기해주시죠.”

“…낸시 루아 리스.”

 

낸시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풀네임을 얘기하는 건가. 내 풀네임이 뭐더라.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엄마가 예전에 얘기해줬던 것 같은데. 여기 있으니까 기억조차 사라지나 봐.

 

“에밀리아넨코 유리에.”

 

헛. 그냥 에밀리가 아니었단 말이야? 조금 놀라버리고 말았다. 유리에? 내가 좋아하는 어떤 가수의 노래 제목인데 저거. 잠시 딴 생각을 하던 나는 몇 명이 나를 쳐다보는 것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어…카스올리 카라스.”

“‘카라스’?”

 

에? 깜짝 놀라서 키라드인가 키자드인가 하는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한 쪽 눈썹을 찡그러뜨리고 나를 바라보는데 또 웃음이 터져나올 뻔했다. 어유 웃겨. 어유 웃겨. 다시 기침을 하자 에밀리아넨코 라는 그 여자아이가 나를 흘낏 바라보았다. 그냥 유리에 라고 할까. 그게 더 귀여운데.

 

“어쨌든. 이번 ‘증명’ 의 주인공은 카라스 양이니까. 카라스 양?”

“아.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키라드는 뭔가. 웃기는 했는데 그 표정이 굉장히 불쾌해서 나도 모르게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넨시는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가 다시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뭔가, 다른 사람 같았다. 전혀 다른 사람. 그 남자아이를 안고 방글방글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던 그 여자가 아닌 것 같아 굉장히 기분이 이상했다. 귀에 들리던 그 <언어> 는 이제 들려오지도 않았다.

 

“일단 카라스 양. 1층에 내려오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알고 있었겠어요? 저 여기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난 저 남자 정말 맘에 안 든다니까. 괜히 짜증이 나서 다리를 살짝 꼬고 앉았다. 키라드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하하 나란 여자 이런 여자. 하하.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나란 여자가 뭐 이런 여자지. 잠시 본색을 드러낸 나를 낸시는 당황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1층에 내려오는 방법은 어떻게 알았죠?”

“어떻게 하다 보니 알게 되었네요.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요.”

 

생각 같아서는 “저 남자가 다 알려줬대요.” 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또 구설수에 오를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리고 저 남자가 당황스러워질 것 같았다.

 

“그렇다면, 리스 양과 유리에 양이 하는 이야기를 언제부터 들었나요?”

“…굉장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사실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도 뭔 내용인지를 모르니까 별 상관이야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난 저 남자가 싫다고!!! 어서 저 면상을 내 눈 앞에서 치워!!!! 속으로는 그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난 그렇게 예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저렇게 얘기했다는 게 충분히 예의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키라드는 더 인상을 찌푸렸다.

 

“어서 얘기하십시오. 어떤 얘기를 들었습니까?”

“…진짜로. 정말로 죄송한 말씀이시지만 저는 <너까지 다치는 걸 원치 않아> 라는 말 밖에 듣지 못했는데요.”

“확실합니까?”

 

어휴, 그래요. 거짓말이에요. 그렇다고 뭐 어쩔 거예요. 해리포터에서처럼 크루시오 마법이라도 쓰시게? 흥이다. 키라드는 내가 불쾌하다고 생각했던 그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돌렸다.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다가 졸지에 남자와 눈이 마주친 넨시는 깜짝 놀라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어이 넨시 루아 리스 씨? 당신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요. 뭔가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에게 무엇이든 따지고 싶었지만 상황이란 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차라리 눈치가 완전 없었으면 좋겠네.

 

“리스 양?”

“……….”

“리스 양? 대답하십시오.”

“……네.”

“너까지 다치는 걸 원치 않아, 라고 한 말은 리스 양이 하신 건가요?”

 

뭐야 저 능글거리는 말투는. 난 오로지 그 남자의 능글거리는 목소리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던 지라 남자가 뭐라고 얘기하는 지 하나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 그니까 좀 있다가 알아채버렸다. 아니 뭐라고요?? 저기 지금 당신 우리 넨시한테 작업 거는 거예요??

 

“…리스 양? 한 번 물었으면 대답을 해주시죠.”

“…그래요, 제…”

“죄송합니다만 그건 제가 했어요.”

 

넨시가 한숨을 푸욱 쉬고 뭐라 말하려는 순간 에밀리? 유리에? 아무튼 그 여자애가 말을 가로채고 말았다. 무슨 얼음공주도 아니고 눈의 여왕도 아니고. 자기가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하얀 여왕인 줄 알아? 얼음공주 같은 눈빛은 말고 한번쯤은 웃어도 봐요 오금 저리고 얼어붙어…아니 이게 아닌데.

 

“뭐라고요, 유리에 양?”

“제가 했다고요. 너까지 다치는 걸 원치 않아, 는 제가 한 말이에요.”

“…왜 그런 말을 한 거죠?”

 

미소 한 번쯤은 내게 줘 봐요. 그날 바로 급 노예 모드…이것도 아닌데. 아니 그것보다 저 남자 진짜 짜증나네. 뱀파이어들은 프라이버시도 없나. 우리에게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선택의 자유 으쌰으쌰!! 아 뱀파이어니까 그런 것도 없나?

 

“…그거야…”

“제가 말씀 드릴까요?”

“…말씀하시죠, 카라스 양.”

 

자 여기서 내 거짓말 솜씨나 뽐내볼까. 목을 살짝 옆으로 꺾었다가 시선을 옆에 앉은 여자들에게 돌려봤다. 무슨 생각이냐고 입 모양으로 묻는 넨시에게 그냥 웃어주고 에밀리를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이세요? 가 아니라 무슨 짓이야? 라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우 쪽팔려. 완전 얼음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에밀리는 입모양으로 뭐라고 말을 했다. 엉? 뭐라고? 다시 한 번 묻자 조금 짜증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얘기해주었다.

 

<너 거짓말 잘 해?>

 

아 거짓말 잘 하냐고?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지만 키라드가 다시 말을 거는 바람에 대답을 해주지는 못했다. 하여간 저 타이밍 진짜…다시 시선을 앞으로 했다. 몰랐는데, 앉아있는 뱀파이어들. 조금 개미떼 같다고 생각했다.

 

“…어, 그러니까요. 제가 1층으로 휙 내려왔을 때 들은 목소리는 넨시 씨와 에밀리…양의 목소리가 확실했어요. 둘이 속삭이듯 말을 했기 때문에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기라는 단어가 들린 것도 같았어요. 뭐라 얘기하다가 에밀리…양이 얘기했거든요. ‘아기 가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너까지 다치는 걸 원치 않아.’ 라고요.”

 

말을 끝내자 넨시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표정 관리 좀 해요, 넨시. 그렇게 입모양으로 말을 전하자 그제야 넨시는 혀로 입술을 한 번 훑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키라드는 나를 의심스럽다는 듯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당신의 입에서 진실이 나올 때까지 당신을 고문할 수 있어요. 거짓말이라면 어서 진실을 말하시죠.”

“죄송하지만 저는 고문을 당하고 싶지도 않고, 결정적으로 이건 진짜예요.”

 

누군가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내가 고문을 당한다면 그 정도는 견뎌낼 수 있다고 이미 오래전에 결심한 후였다. 사실 넨시와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에밀리는 이번에 두 번째인가로 만난 사람이어서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겠지만, 만약 진실을 털어놨다가는 저 앞에 보이는 저 남자. 저 남자의 얼굴이 더 하얘질 것 같아서 그냥 거짓을 말하기로 했다.

 

“…확실합니까, 카라스 양?”

“진실을 불게 하는 약을 먹일 생각이 아니면 그만 물으세요. 몇 번을 물어도 결국 답은 같으니까요. 제가 지금 한 말은 모두가 전부예요.”

“그렇다면 다른 말들은 듣지 못했습니까? 다른 문장들을 이야기 해주시죠.”

 

사람 귀찮게도 하네. 낮게 중얼거리자, 그 목소리를 들은 건지 아래에서 넨시가 발을 꾹 눌러왔다. 아프지는 않아서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니 이 사람은 내가 뭘 잘 못했는데 내 발을 누르는 거야?! 라고 말이다.

 

“다른 문장이라…제가 기억력이 그렇게 탁월한 편은 아니어서 말이죠. 굳이 말하자면. ‘아기를 가지는 게 그렇게 위험한 거야?’ 랑 ‘그걸 말이라고 해? 우리는 그냥 제자를 가지기만 하면 되는 거야.’ 였죠. 나머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네요.”

“…확실합니까?”

“아 글쎄 그렇다니까요.”

 

만약 진실의 약을 먹인다고 해도 나는 조금의 자신감이 있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거짓말을 믿기만 하면, 그런 것 따위 다 필요 없다고 어디서 들었으니 말이다. 아, 이런 게 바로 근거 없는 자신감. 근자감이라는 것인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금 웃었다. 기침 소리처럼 웃어서 그런지, 아무도 내가 웃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듯 했다. 엘렐레렐 뱀파이어는 바보래요.

 

“리스 양, 유리에 양.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대화라도 들었다는 게 조금 놀랍기는 하지만 사실입니다.”

“…사실, 이네요.”

 

에밀리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먼저 말을 하자, 넨시도 뒤이어 대답했다. 사실 나보다 얼굴에 철판을 더 두껍게 깐 사람은 에밀리가 아닐까 싶어. 쳇, 하고 작게 내뱉었다. 엇 그러면 내가 일부러 머리를 굴려서 거짓말을 한 보람이 없잖아. 조금 아쉽다고 생각해버렸다. 잠시 시선을 돌려 아까까지만 해도 온 얼굴이 하얘서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조금 시체 같았던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생기가 좀 돌아온 얼굴에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잘 했어.>

 

살짝 웃으면서 말하는 그에게 에이 뭘요, 라는 뜻을 담은 손짓을 해주었다. 내가 얘기할 때까지만 해도 조금 조용하다고 생각했던 뱀파이어들이 뭐라 뭐라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말한 게 맘에 안 들면 아예 당당하게 이야기를 하던가, 나를 흘끗흘끗 쳐다보면서 얘기하는 게 꼭 내 뒷담화를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조금 나빠 왔다.

 

“…어쩔 수 없지요. 이렇게 얘기하는데, 조금은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갑자기 키라드 옆에서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에 깜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아, 키라드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었나 보구나. 옅은 백금발 색의 머리를 깔끔하게 말아 올린, 젊어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늙어보이지도 않는 여자는 가늘지만, 단호하고 강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지금까지 본 증명자 중에 저렇게 당당한 태도는 처음 봤네요. 아무리 저게 거짓말이라고 해도, 태도로 봐서는 절대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될 듯 하네요.”

 

어 그래서 지금 내가 한 말이 거짓이라고 진실이라고? 뭔 소리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나를 향해 한 번 웃었다. 아 뭔가 여신님 포스.

 

“저는 저 아이를 믿겠습니다. 저들을 베지닉에 넣을 이유는 없어요.”

 

엥 베지닉? 잠깐 멍을 때려버리고 말았다. 베지닉이 뭐지?? 베지닉?? 블랙리스트 같은 것을 말하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블랙리스트. 아하. 여자는 뭔가 엄청 여신님 포스를 풀풀 풍기는 표정으로 그렇게 얘기했고, 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남자도 입을 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네요. 저들을 베지닉에 넣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저런 의견들로 약 3명 정도가 더 말하자 키라드의 표정은 미안하지만 형편없게 구겨져 있었다. 아, 진짜 미안한 얘기지만 조금은 통쾌하다고 생각했다. 남의 고통은 나의 즐거움 핫핫핫. 괜히 뿌듯해 하는 나를 남자는 흘끗 바라보고 또 한 번 웃어주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저들을 베지닉에 넣지 않는 걸로 하죠. 이상입니다.”

 

키라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아니 뱀파이어들은 모두 일어섰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면서 조금 시끄러운 소리가 날 법도 했지만, 시끄러운 소리 까지는 아니고. 소음답지 않은 소음에 나는 엄청나다고 생각했다. 바퀴 달린 의자들도 저런 소리는 안 날 텐데. 아니 그것보다 바닥이 나무가 아니었단 말이야? 허허, 라고 생각하던 나는, 넨시가 일어나세요, 라고 얘기한 다음에야 몸을 일으켰다.

 

“카라스 양?”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옆을 바라보았다. 엇 아까 보았던 여신님…나보다 훨씬 키가 커서 조금 눌렸지만 굉장히 엄마 같은 분위기어서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나를 향해 다시 한 번 웃어준 그 여자는 입을 열었다.

 

“수고하셨어요. 증명자 역할이 쉬운 건 아닐 텐데.”

“아뇨, 아뇨, 네. 어이고. 쉬운 건 아니었…아니 이게 아니라 괜찮아요.”

 

더듬거리며 이야기하자 그녀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오오 엄마 미소. 엄청나다고 생각했다. 아까 단호한 표정을 지을 때에는 굉장히 무섭다고 생각됐는데 웃을 때는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까지 하는 분위기였다. 포스인가.

 

“수고하셨습니다. 나중에 다시 뵙도록 하자고요.”

“…아, 네…안녕히 가세요…”

 

그 여자가 조용히 나가고, 잠시 멍을 때려버렸던 나를 남자가 건들자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잘 했어. 어휴 뭘요. 넉살 좋게 이야기하자 간만에 그는 밝게 웃었다. 뭔가 웃는 게, 그가 아닌 것 같아서 조금은 놀랐다. 웃으면 다른 사람인 것 같은 인상이 있다고 했는데 저런 사람이었구나.

 

“에밀리. 누군지 알지? 카스올리잖아.”

“……….”

 

에밀리의 등을 툭툭 두드린 그가 인사를 하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를 잠시 바라보던 그녀는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로지 나를 향해 얘기를 해준다는 것에 대해 굉장히 경이로움을 표해버린 나는 한참 후에야 내 눈빛이 얼마나 웃겼을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거짓말 잘 하더라. 수준급이었어.”

“그건 그 쪽도 마찬가지였어.”

“…고맙네. 그럼 다음에 보자고.”

 

그 말만 남겨두고 휭 나가버리는 에밀리를 보며 하마터면 신발을 벗어서 던져버릴 뻔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까, 그녀가 나를 향해 무슨 말을 했어도 나는 그녀가 맘에 들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잠시 멍을 때리다가 넨시의 뒷모습이 보이자, 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던 게, 저 남자와 넨시였나 보다. 무슨 내용인지 조금 궁금하기는 했지만 굳이 그에게 물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묻지 않았다.

 

“…으음. 저기요.”

“어?”

“베지닉이 뭐예요?”

“아, 그거. 네가 옛날에 읽었을 해리포터에 나오는 아즈카반이라고 생각하면 돼.”

아 감옥이었던 거야? 블랙리스트 따위가 아니었다고? 이름이 상큼하네. 아즈카반은 듣기만 해도 뭔가 어두침침한데 베지닉은 꼭 베이직 하우스도 아니고…하하.

 

“아무튼. 안 졸려?”

“…어우 긴장이 풀리니까 온 몸이 흐늘흐늘해지는 기분이에요. 자고 싶네요.”

“자도 좋아. 빨리 가자.”

 

그가 손짓을 하자 나는 긴장이 풀려 허해버린 몸을 이끌고 그를 따라갔다. 난 언제부터 이렇게 튀는 인간이 되어버린 거지. 인기인도 힘든 거였어. 조금은 거만한 생각이 들어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러고 보니, 귓 속에서 용이 또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겁쟁이 주제에. 당당하게 나와야지.”

 

그렇게 말하자 꼭 고양이가 끼잉, 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부끄러워하는 건가? 웃음이 또 다시 터져버렸다. 어유 웃겨라. 어쩐지 모든 것을 잊어가는 기분이었다.

 

 

 

 

 

12.

 

 

"카스올리, 일어나."

 

이런, 벌써 아침인가? 익숙한 목소리…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넨시의 목소리가 아직 덜 깬 내 귓속에서 윙윙거렸다.

 

"으아아아……, 5분만 더 잘래요. 넨시, 저는 잠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알고 있어. 하지만 여기서 자면 안 된단 말이야. 좀 일어나 봐."

아악, 넨시. 나 어제 키라드인가 지라드인가 그 인간…이 아니라 그 뱀파이어 때문에 졸려 죽겠단 말이에요. 재판을 할 거면 제대로 진행하던가. 아니면 대낮에 하던가. 햇빛 때문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왜 밤에 해가지고…….

 

"여기서 자면 왜 안 되는…데요……."

 

나는 웅얼거리면서 물었다. 아, 졸려. 솔직히 내가 말을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나는 정신이 없었다.

 

"아, 그게 좀… 위험해. 자세한 건 이따가 설명해 줄 테니까 제발 좀 일어나 봐, 카스올리."

"왜요……. 폭탄이라도 있어요?"

"뭐 그런 셈이야. 그러니까 죽고 싶지 않다면 좀 일어나 봐."

 

잠깐만요. 뭐라고요? 폭탄? 그…… 뭐지? 다이너마이트? 그런 거? 아니면 대포? 헐. 지금 무슨 여기가 전쟁터야? 나는 장난삼아 그렇게 물었지만…여기에는 뭐 설마, 하면서 말하면 다 <Yes> 라고 대답하냐고! 내 머릿속을 헤집는 난잡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잠시 흔들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으윽… 어지러워. 나는 잠시 휘청했다. 역시 어제 너무 무리한 건가. 인기인은 피곤하다니까.

 

"카스올리, 괜찮아?"

"……괜찮…아요. 좀 어지러워서…"

 

아, 어지러워. 잠깐. 또 시간 감각하고 공간 감각이 사라졌네.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잠시 눈을 감고 앉아 있자니 차근차근 머릿속이 정리가 되면서 어제 일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아…… 맞아. 베이직인가 베지닉인가 거기에 날 처넣으려고 했었던 키라드……. 아니, 근데 왜 키라드의 그 짜증나는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거냐고!

키라드의 얼굴에 갑자기 기분이 확 상해버린 나는 신경질적으로 엉망이 된 머리를 긁었다.

 

"왜 그래, 카스올리."

 

네? 아 그저 키라드의 얼굴이……. 아니 됐어요. 아침부터 그 짜증나는 이름을 거론하고 싶지는 않아요. 내가 얼굴을 찌푸리며 가만히 있자-예의 없는 행동이란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키라드만 떠올리면 자동적으로 나오는 표정이니-넨시는 내 정신 상태를 체크하는 눈빛으로 날 들여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좀 옮기자."

"에? 어디로요?"

 

아 나 아직도 정신 못 차려. 시야가 가물가물하네. 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자 어제 일 이후로 부쩍 친해진 넨시가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괜찮아요, 넨시. 나 원래 이런 애에요. 에휴…….

 

"그냥 내려가면 될 것 같아. 여기 바로 밑에 모두 모여 있으니까."

"아……. 그러면 여기 몇 층이에요?"

 

여기 밑에 누가 어떤 이유로 모여 있는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넨시를 아침부터 피곤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저 고개만 살짝 끄덕여주고 물었다. 아 나 어떡해. 어제 일이 하나도 기억 안 나. 단지 그냥 키라드가 짜증났다는 점? 그 정도랄까.

아 근데 왜 그렇게 에밀리도 아니고 넨시나 그 남자도 아니고 그 여신포스를 풀풀 풍기던 뱀파이어도 아니고 하필이면 키라드가……. 이봐, 짜증나게 내 머릿속에서 머물지 말고 꺼지란 말야! 훠이훠이.

 

"12층? 아마 그 정도 될 걸. 10층만 넘어가면 공간 감각이 없어져서 말이야."

 

오오, 넨시도 그런가요.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이 어마어마한 공간에 적응하려면 1년은 족히 걸릴 텐데. 아니, 어쩌면 10년. 만약에 내가 여기서 좀 더 머무르면 평생 2, 3, 4 층만 왔다 갔다 해야지. 곧 돌아갈 생각은 하고 있지만.

 

"일단 내려가자. 내려가는 방법…알고 있지?"

 

넨시가 장난스럽게 한 쪽 눈을 찡긋한 것 같았지만 역시나 너무 빨라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리 자신 있지는 않았다. 저번에 1층으로 갈 때는 그냥 쭉 내려가면 됐는데, 요 바로 밑층으로 가려면 얼마정도 내려야 되는 거지? 아, 거 참.

어정쩡하게 멈추면 상반신은 여기에, 하반신은 밑에 매달려 있는 거 아냐? 불안감이 나를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그리 잘 알고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아, 네. 뭐……."

 

어떻게 안 거지? 아 맞다, 독심술. 아니, 어쩌면 독심술이 필요 없었을지도 모르지. 내 표정이 워낙 구겨져 있었을 테니까. 하여튼 그 남자, 가르쳐 줄 거면 좀 제대로 가르쳐 주던가! 도통 ‘스승’ 으로서 소질이 없네, 없어.

 

"어쨌든 빨리 내려가야 되니까, 여기서 가르쳐 줄 시간은 없고. 내려가도…되지?"

"아, 그럼요."

 

굳이 양해를 구하는 이유는 또 뭘까. 괜히 궁금해졌다. 이번에는 이동하는 순간을 내 눈으로 직접 포착하고 싶어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나. 역시나 순식간에 내 앞에서 슈슈슉 하고 변해버리는 방 풍경이었다.

아하, '모두' 모여 있다는 건 에밀리와 그 남자를 말하는 거였네. 제자라고 해서 칠판이라도 펼쳐놓고 수업 비슷한 걸 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그 남자는 침대에 기대서 공상 비슷한 걸 하고 있었고 에밀리는 탁자에 앉아 있었다.

 

"카스올리 데리고 왔어."

 

잠시 그 남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넨시는 그를 일깨워주듯 말했다.

 

"아, 카스올리."

 

그 남자가 멍하게 내뱉고는 잠시 고개를 흔들었다. 잠 깨기 위해서일까. 그러고는 날 처음 대하듯 또 다시 멍하게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 똑바로 앉았다. 저 남자 오늘 왜 저래? 상태가 이상하네. 문득 저 남자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허공을 떠돌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넨시와 그 남자가 가볍게 담소를 나누는 동안 나는 방 안에 에밀리와 그 남자 둘 뿐만 아니라 넨시의 아이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 혼자서도 잘 노네. 뱀파이어들은 선천적으로 지능이 높아서 그런가? 아, 그러고 보니 저 애 이름을 모르는구나. 나중에 물어봐야지.

에밀리는 애초에 아기 따위에게는 흥미도 없다는 듯 탁자에 앉아서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어라, 그림 그리나? 아니면 글? 헐, 나보다 훨씬 잘 그릴 것 같아. 손놀림 봐봐. 저렇게 몰입하는 모습을 보니 완전 모범생이다, 모범생.

궁금증에 슬쩍 눈치를 보며-그 남자가 무슨 농담을 했는지 넨시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에밀리의 어깨 너머로 그 작품…을 살짝 봤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귀에서 확 울려 퍼지는 소리 때문에 하마터면 에밀리 위로 엎어질 뻔 했다. 뭐야, 조용히 있다가 왜 그래, 너.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속으로 말했지만 그 소리는 반응하지 않고 계속 으르렁거렸다.

그제서야 나는 무슨 문제가 있나, 하고 에밀리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봤다. 아, 저거 용이었구나. 와, 그림 정말 잘 그린다. 나 같으면 용 그리면 샤워기로 보일 텐데 말이지. 하하. 그런데 뭐가 문제야. 나는 그 소리에게 말했다. 용의 모습이 저게 아니어서 화난건가?

잠깐. 주변이 너무 조용하잖아. 내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고개를 살짝 들었을 때는, 넨시와 그 남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불안하다는 얼굴로. 그러고 보니 둘이 살짝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건 그렇고… 나 무슨 잘못했나? 이거 굉장히…스산하잖아. 이봐요, 무섭다니까요? 고개 좀 저리 돌려요…아니, 이게 아닌데. 그나저나 이거 분위기 참 뭐하네. 마침내 그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초점은 나를 벗어나 내 뒤를 주시하고 있었다.

"에밀리, 살살 해."

 

뭐라는 거야? 나는 그의 말에 잠시 멍하게 그를 주시했다.

 

"카스올리, 뒤 돌아. 아 그리고…"

 

쿵-

 

그 남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무언가 내 뒷통수를 후려치는 게 느껴졌다. 와우, 강력한 풀 스트라이크…아니, 이게 아니지. 하여튼 그림 한 번 봤다고 관람료 되게 비싸게 받네.

 

"…에밀리는 자기 그림 절대 안 보여주거든. 나한테도. 저번에 몰래 보려 했다가 죽을 뻔 했다. 어쨌거나 네가 첫 번째로 에밀리의 그림을 관람한 사람이 되겠네."

 

아, 그걸 왜 이제 말해요! 그리고 왜 축하한다는 말투로 말하는 건데. 부러워요? 부러우면 지는 거. 핫핫. 잠깐. 이렇게 웃고 있을 때가 아닌데.

 

"계속 맞고 싶지 않으면 좀 피해라."

 

쿵-

 

아 이런. 나는 뱀파이어가 ‘아니라서’ 순식간의 반사신경은 없다고. 진짜 이건 뭐, 해보자는 거야? 이런 곱상하게 생긴…아니, 이게 아니지. 어쨌든 오랜만에 싸움 좀 하게 생겼다. 에밀리…생각 외로 강한 ‘주먹’을 가졌구나.

뒤를 돌아보니, 정말 살기가 '흘러넘치는' 에밀리가 강력한 눈빛을 쏘면서 서 있었다.

 

"야, 좁은데 여기서 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지?"

 

싸울 거면 밖에서 하자고. 이봐. 여기서 싸움질하면 쓰겠어? 봐, ‘아기’ 도 저기 있잖니, 얘야.

 

"복도에서 하잔 말이야?"

"뭐, 싫으면 관 둬."

 

보니까 너 구경거리 되는 거 딱 싫어할 얼굴이야.

 

"너부터 나가."

 

한참을 뭐 씹은 얼굴로 날 째려보던 에밀리는 마침내 그렇게 말했다. 하하, 나의 승리.

 

"뒷통수 치지 말기."

 

나는 에밀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잽싸게 복도로 나갔다. 오우, 의외로 복도에 나다니는 뱀파이어들이 많네. 내가 나가자 어제 일 때문에 나를 기억하는지 흘낏 흘낏 쳐다보는 뱀파이어들도 몇몇 있었다. 뭐야, 쳐다보려면 좀 당당하게 쳐다봐! 기분 나쁘게…….

옆을 돌아보니 어느 새 에밀리가 나와 있었다. 아, 맞다. 스피드. 뱀파이어는 엄청 빠른데. 아아, 신이시여 어이하여 제겐 저런 능력을……. 하, 나 오늘 자꾸 헛소리하네. 뱀파이어가 되고 싶다는 소리는 아니었어요, 신님. 어쨌든 몇 대 얻어맞겠네. 제대로 피하기가 어려울 테니. 아까 보니까 힘도 장난 아니던데.

그런데…에밀리의 발걸음이 이상한 곳을 향한다. 어? 어디가? 밖에서 하자니까? 설마 권투장, 이런 장소도 있는 건 아니겠지.

 

"야, 어디가?"

"밖에서 하자며."

 

에밀리가 태연하게 말했다. 나보다 더 두꺼운 철판을 깔고 계신 에밀리. 하, 나 참.

 

"여기 밖으로 나가게?"

 

설마, 설마…하면서 물었지만…….

 

"어. 이럴 때를 대비해서 건물 뒤쪽에 넓은 공터가 있어."

 

이런 젠장할. 이럴 때 라는 건 이런 일이 종종 있다는 건가. 뭐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

 

 

도통 위아래 이동에 소질이 없는 나는 겨우겨우 에밀리의 도움을 받아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쳇, 자존심 상하게. 1층에는 내려오면 안 된다고 그랬으므로 우리는 2층에서 멈췄다. 여기서 그냥 뛰어내릴려나? 설마. 그냥 에밀리만 따라가자. 입 열었다간 무식이 철철……근데 나 왜 이렇게 무식한 이미지로 변한 거지.

여기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그런가. 어쨌든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문 채 에밀리를 따라갔다. 어, 그러고 보니까 복도 끝이 넓게 되어 있는 건 뱀파이어들이 한꺼번에 이동할 때 북적거리지 않기 위해서였어. 하하, 스스로 깨우치다니. 뿌듯하군.

2층에는 다른 복도와는 달리 복도 끝이 오른쪽으로 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밖으로 연결된 듯한 계단이 있었다. 아, 저기로 나가면 되는 건가. 멀리서 볼 땐 계단이 매끄러워 보였는데, 내려갈 때 보니까 굉장히 부드러웠다. 이것도 거미 섬유인가. 흠…….

아, 그러고 보면 나 여기 밖에 처음 나와 보네. 저번에 그 빌어먹을 숲에서 기절한 이후로 줄곧 건물 안에만 있었잖아. 숨통이나 터 볼까. 나는 심호흡을 했다. 아, 날씨 좋네. 여기가 지하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햇빛과 바람, 구름이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네.

 

"마침 텅 비었네."

 

한참 그렇게 바깥 공기를 즐기고 있는데 에밀리가 말을 걸었다. 아니, 혼잣말인가?

"그러게."

 

우리 앞에는 축소판 경기장 비슷하게 생긴 곳이 있었다. 작은 관람석 비슷하게 생긴 곳도 있는 걸 보니 구경할 수도 있나 보다. 에밀리는 그 곳에 들어서서 상태를 체크하는 듯 하더니, 순식간에 뒤를 돌아 나를 쳐다봤다.

잠시 우리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에밀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내 그림을 훔쳐 본 대가를 치러주실까."

뭐야, 저 건방진 말투는. 마음에 안 들어.

 

"쳇."

 

나는 꽤 작게 중얼거렸다고 생각했는데 그 소리를 들었는지 에밀리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고, 무서워라. 잠깐. 에밀리가 사라졌다? 어라, 어디 갔지?

 

퍽-

 

아, 나 또 맞았구나. 이런 상황 생길 줄 알았어. 뒤를 보니 에밀리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 알았어. 뱀파이어들의 싸움은 어떤 식인지 볼까나.

이번엔 눈을 똑바로 뜨고 그녀를 주시했다. 아직 덜 자란 뱀파이어라 그런지 움직이는 게 조금씩은 보여서 다행이었다. 몇 대를 날렸는데 그 중 절반은 성공한 것 같았다. 핫핫, 나를 우습게 봤다면 조금 미안한데?

나한테 연속으로 몇 대를 얻어맞은 에밀리의 눈은…음, 차마 말할 수가 없다. 만약 저 눈빛이 무기라면 이 세계를 반쯤 태워버리고도 남겠군. 나도 포함해서. 아마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겠지.

한 10분쯤 흘렀나. 에밀리의 움직임이 차츰 느려지기 시작했다. 오, 체력만큼은 내가 우월한가. 점심시간마다 운동장에서 뛰어놀아서 그런가? (내가 축구를 하고 있으면 키아크라는 그늘에서 응원해주곤 했다.)

 

“제법 하는데?”

 

칭찬인가. 아 감사……. 아니 이게 아니지. 먼저 친 게 누군데. 귀에서 다시 소리가 울렸다. 뭔가 응원하는 것 같은 소리. 그런데 이런 종류의 싸움은 뭐 어떻게 끝을 내는 걸까. 설마 죽음까지 가지는 않겠지. 결투인 것 같지도 않고 딱히 룰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다시 자세를 똑바로 하고 에밀리를 주시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에밀리에게서 뭔가 변화가 느껴진다는 것을 조금 느낄 수 있었다. 뭐지? 아니면 내 눈이 변해서 그녀가 왜곡되어 보이는 걸까? 시야가 흐려졌다 다시 또렷해졌다. 마음 같아선 눈을 비비고 싶었지만 차마 눈을 비빌 수는 없었다. 아, 나 왜 이래. 에밀리가 두 명으로 보여.

귀에서 소리가 속삭였다. 뭔가 알려주는 느낌.

 

“이제 지루하니까 끝낼까?”

이런. 내가 말했지만 내가 말한 게 아닌 것 같아. 반쯤은 자율적인, 반쯤은 타율적인 것 같은 그런 느낌. 이런 비유는 좀 그렇지만 조종당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정작 그 조종기를 쥔 손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나 자신.

싸움 중에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왜지. 정신을 차려보니 에밀리의 표정이 구겨져 있었다. 어, 야 그러니까 키라드 닮았다. 아니, 이건 욕에 가까운 말인데.

어쨌든 내 몸의 적어도 반쪽은 에너지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런 느낌…처음인데? 아 이런. 이제 반을 넘어서서 나머지 반쪽도 알 수 없는 힘에 차근차근 눌려가는 것만 같았다. 나 자신이 다른 누군가로 채워지는 느낌. 하지만 정작 그 다른 누군가는 바로 나 자신.

하하, 나 무슨 소리 하는 거지. 에밀리가 나에게 달려드는 것이 보였고, 그 뒤로 내 온전한 정신은 증발되어 버렸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이미지들. 간신히 보고는 있었지만 느끼지는 못했다. 내 몸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하고 ‘보고’ 있다는 느낌. 나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 설마 육체 이탈인 걸까. 점점 내 ‘눈’ 이 감기고 있었다. 내 몸은 움직이고 있겠지만, 느끼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하지만 정작 내 몸을 움직이게 하고 있는 건 내 자신. 그것만은 확실했다.

 

-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에밀리는 내 밑에 거의 깔려버린 상태로 있었고,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에밀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밀리의 어깨를 잡은 채. 뭐지? 내가 숨을 헉헉거린다는 건 엄청 뛰었다는 거고. 그런데 왜 기억이 안 나는 거냐고. 신나게 싸운 건 확실한데.

심장이 강하게 펌프질을 했다. 아까 전 까지만 해도 내가 나 자신을 느끼지 못했는데.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왔다는 건 뭐지?

잠시 멍하게 있다가 이러다간 에밀리가 질식할 것 같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 살짝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의 힘을 풀고 말했다.

 

“졌지?”

 

솔직히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가 어떻게 해서 이겼는지 구체적인 기억이 나지 않을뿐더러 싸웠다는 느낌, 승리의 쟁취감도 없었다. 한마디로 실감이 나지 않았달까. 내가 이긴 건가? 정말로? 나는 순간적으로 내 몸을 채웠던 그 힘과 혼란스러웠던 그 순간을 회상했지만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에밀리가 분노에 차서 씩씩거리는 소리와 귀에서 울려퍼지는 기쁨을 표출하는 용의 노래-보다는 만세에 가까웠지만-를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네가 만세하면 됐다. 너도 에밀리에게 화났던 것 같은데. 이런, 만세 삼창인가. 귀가 터질 것 같군.

 

“갑자기 그렇게 빨라지는 게 어딨어. 너도 뱀파이어긴 뱀파이어네. 숨기고 있었던 거야? 어쨌든, 네가 이겼다.”

 

예상 외로 에밀리는 꽤 깔끔하게 그녀의 패배를 인정했다. 비록 앉은 채로 말해서 폼이 약간 구겨지긴 했지만. 하지만 그녀의 말이 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갑자기 그렇게 빨라지는 게 어딨어…너도…뱀파이어네…….

 

짝짝짝-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낯선 박수소리가 들려와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놀랐다기보다는 퍼뜩 제정신이 돌아왔달까.

뒤를 돌아보기 전에 먼저 에밀리의 반응을 살폈다. 어느새 일어난 그녀의 얼굴은…싹 굳어있었다. 아니, 얼음 같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까? 아님 조각상? 어쨌든 그 남자나 넨시는 아니라는 소리네. 그럼 누구지? 키라드일리는 없을 테고.

마침내 나는 뒤를 돌았다.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이름이…카스올리?”

 

그녀가 그렇게 물었는데도-목소리가 상당히 고풍적인 분위기를 풍겼다-나는 계속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키가 좀 큰데다가-덕분에 나는 그녀를 올려다봐야만 했다-넨시보다는 눈이 작았다. 정말 까만 머리카락을 위로 살짝 틀어 올리고 있었는데 동양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옷은…뭐 이건 말할 것도 없네. 그냥 ‘나는 위험한 사람입니다’ 라고 팻말 달고 다니세요. 전쟁 경력이 ‘엄청’ 있어 보이는 옷에다가 옆에는 칼까지……. 그런데 왜 나한테 관심을 갖는 거죠? 이봐요. 난 그저…….

“난 아사츠유. 혹시 알아?”

 

나는 내 뒤의 에밀리의 표정이 갈수록 굳어가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누군데 그러지? 유명인사인가? 아니, 그건 그렇고 이름이 특이하네. 그런데 이 여자, 꽤 부드러워 보이는데 왜 에밀리가 긴장하는 거지? 혹시 칼 때문인가?

 

“아뇨.”

“그래?”

 

전혀 뜻밖이라는 듯이 그녀가 되물었다. 네, 몰라요. 라고 얌전히 대꾸하자 그녀는 에밀리를 향해 돌아봤다.

“넌 네 스승에게나 가 버려. 지금 상황에 대해서 알리던지, 그건 네 선택이고.”

 

이 여자는 에밀리하고 무슨 앙숙인가? 목소리가 싸늘했다. 그녀의 말 속에 숨은 뜻은, ‘저리 꺼져’ 쯤일까나. 아무튼 매섭게 쏘아붙이는 그녀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평소에 에밀리는 분명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낼 텐데. 웬일로 에밀리는 가만히 입술만 살짝 깨물었을 뿐, 조용히 물러나 계단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에밀리의 모습을 보니까 뭔가 모르게 더 불안해졌다. 다혈질인 에밀리가 저 정도로 굴 상대라면 보통 상대가 아닐 텐데. 아니, 보통은 무슨 보통? 에밀리를 때려눕히고 나서 잠시 조용해졌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잘 싸우던데?”

 

칭찬인가? 그녀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꿀꺽. 자연스레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나랑 해도…이길 수 있겠지?”

“지금 그 말은…….”

 

나는 차마 말을 마저 할 수가 없었다. 두려움 때문인가? 아니, 어쩌면 내 앞에 서 있는 여자의 분위기 때문일지도.

 

“그래. 한 판 하자고. 카스올리…, 네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어. 유일하게 스승 없는 어린 뱀파이어라고. 누군가 그러더라고. 그래서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우연히 네가 저 덜 자란 뱀파이어랑 싸우는 걸 봤는데…조금은 놀랍더라.”

 

‘덜 자란 뱀파이어’ 라는 말에 에밀리가 움찔하는 게 뒤에서 느껴졌다. 그나저나…나 아까 어떻게 이겼는지도 모르는데. 이 ‘다 자란 뱀파이어’와 싸워서 이길 자신은 거의 0.1퍼센트에 불과했다.

 

슥-

 

어라? 당신, 지금 칼 뽑는 거예요? 그런 거예요? 헐, 설마.

 

“설마 그거…로 싸우려고요?”

“왜? 그럼 뭐로 싸우게. 맨손으로? 너랑?”

 

저 말투는 뭐지. ‘너랑?’ 이라니. 내가 그렇게…위협적으로 싸웠나? 아냐. 이건 아냐. 신경질적으로 한숨에 가깝게 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사츠유가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툭, 하고 옆에다 칼집을 내려놓았다. 와, 진담이었어요?

 

“하, 하지만…전 칼이 없는데요?”

 

열대우림에서 악어와 1대 1로 수중전을 뜰 때의 느낌이 이런 것일까. 저절로 말이 더듬어졌다.

 

“상관없어.”

“아, 아니…이봐요, 아사츠유. 우리 좀 정정당당하게 할래요? 나에게 무기를 주던가, 아니면 그쪽이 무기를 버리던가.”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사츠유는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뭐지, 저 눈빛은.

 

“너의 그 능력과 기술을 합하면 내 검을 능가할 텐데?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정말로 의아하다는 말투다. 아 이거……뭐라고 설명해 줘야 하나. 나는 잠시 고민했다. 무턱대고 그건 내 능력이 아니걸랑요, 라고 말할 수도 없고. 하하, 다 에밀리 때문이야. 아니지, 남의 탓은 하지 말자고.

 

“아, 그 쪽은 다 자란 뱀파이어고, 나는 덜 자란 인…뱀파이어잖아요. 그러니까 그 쪽이 무기를 버려도 상관은 없다 생각하는데요. 게다가 저는 아직 쉬지도 못해서 그 쪽보다 체력이 많이 딸릴 텐데. 게다가 신체 조건은 그 쪽이 더 유리하고요. 이만하면 이유가 충분하지 않나요?”

 

하마터면 덜 자란 인간, 이라고 할 뻔 했다. 간신히 뱀파이어라고 내뱉긴 했지만, 그 말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내 말이 끝나자 아사츠유는 의아하다는 눈빛을 쏘더니, 간단하게, 하지만 충격적인 대답을 했다.

 

“상관없어.”

 

상관이 없긴 뭐가 없어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저 주춤거리며 뒷걸음칠 뿐이었다. 하, 이 상황 되게 어이없네. 거의 모든 확률을 운에 맡기고 있는 이 싸움. 다시 그렇게 이길 수 있을까. 차라리 에밀리의 스승…그러니까 그 남자가 와 줬으면 좋겠다. 그 남자라면 이 싸움을 말릴 수 있겠지.

 

“너는 덜 자란 뱀파이어가 아니잖아.”

“에? 왜요? 나 아직 20년도 안 지났어요.”

 

상관없어, 라고 한 말이 그 자신도 조금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보충 설명을 붙이듯 그녀가 말했다.

 

“스승이 없잖아. 있던 스승이 죽은 것도 아니고. 독립…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넌 지금 제자의 신분은 아니야. 내 말 틀려? 널 누가 데리고 왔는지, 왜 데리고 왔는지, 또 왜 스승이 없는지,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너는 그런 애야.”

 

흠…가만, ‘누가, 왜, 어떻게 데리고 왔는지’를 모른다는 것은 그 남자가 내가 용의 노래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납치하다시피 데려온 것을 모른다는 거네. 그렇다면 극비라는 뜻인데……. 입조심하자, 카스올리.

그나저나 ‘스승’이란 게 저렇게 중요한 거였나? 엄마…같은? 그 남자는 에밀리에게 무심하던데.

 

“시간은 대충 이 정도 끌고. 이제 시작해보자.”

 

그녀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살짝 바람이 불었고, 그녀의 실루엣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칼까지 지니고 있는데, 이러다가는 팔, 다리 중에 한 쪽이 없어지는 일이 생길 수도 있겠네. 귀에서 잠시 잠잠했던 용이 다시 쉭쉭거렸다. 위협적이지만, 지친 소리. 야, 제발 나 좀 도와주라. 미치겠다…진짜.

아사츠유가 다시 나타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굉장히 긴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1초에서 3초쯤이나 될까. 아니면 훨씬 짧을 수도. 다행히도 그녀의 날카로운 검은 내 신체부위를 절단하지 않았다.

 

쉭-

 

다시 그녀의 윤곽이 뚜렷해질 새도 없이 아사츠유는 사라졌고, 나는 멍하게 서 있으면서 행운을 기다릴 뿐이었다. 잠깐. 이대로 있으면 안 돼. 퍼뜩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는 허공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가 땅에 떨어지기 직전, 나는 옆으로 살짝 피했다.

“이제 날아오르는 짓은 그만하고……."

 

아사츠유가 재밌다는 듯 살짝 웃더니 나에게 칼을 겨누었다. 그리고…곧장 저 멀리 땅바닥으로 떨어져 박히는 칼날.

 

“칼 없이 해 볼까? 널 보니 이제는 그래도 될 것 같네.”

 

흠…그러면 나야 좋죠.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아사츠유는 사라졌고, 아주 잠깐의 찰나에 내 등에 엄청난 타격이 내리쳐졌다.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만큼 강한 주먹. 확실히 아까 에밀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벌써 그렇게 되면 안 되지.”

 

확실했다. 아사츠유는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거의 비웃음에 가까운 즐거움. 그녀는 고양이, 나는 새. 새장에 갇혀 꼼짝 못하는 새. 아사츠유는 확실히 타고난 사냥꾼이다. 내가 아무리 힘을 쏟아도…결코 손가락 하나 닿지 못한다.

다시 그녀가 사라짐과 동시에 강한 발길질이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방향을 조금이라도 예측해 몸을 살짝 튼 것이 다행이었다.

 

“카스올리. 아까처럼 해 봐. 재미없잖아.”

 

비웃음. 귀에서 분노에 찬 소리가 났지만 속삭임에 불과했다. 일부러 작게 내는 소리가 아니라, 크게 낼 수가 없어 내는 소리. 억눌러진 소리. 설마 힘들어서? 아까 도와준 게 너였니?

다시 그녀가 사라졌고, 이번에는 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손바닥에 손톱이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평지를 훑었다. 아사츠유가 돌진하는 것이 느껴졌고, 나는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가 몸을 틀어 아사츠유의 등을 가격했다.

하지만 내 주먹은 그저 살짝 ‘접촉’ 했을 뿐이었고, 그것에 화가 났는지 아사츠유의 뻗은 팔이 내 어깨를 쳤다. 심장이 점점 세게 뛰었다.

이제 아사츠유는 날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엔 그녀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녀의 공격이 살짝 빗나가는 것 같더니……옆구리에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고,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아……, 이런 젠장할. 설마 갈비뼈가 부러졌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맞은 데가 쓰렸다. 동시에 기침이 나왔다. 그녀가 다시 내 뒤를 노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자꾸만 나오는 기침과 가쁜 호흡에 정신이 없었지만 이것이 바로 본능이란 걸까. 순간적으로 몸을 납작하게 엎드렸고, 그보다 위를 노렸던 아사츠유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이런 행운을 놓칠 수는 없지. 나는 이를 악물고 아사츠유가 일어나기 전에 그녀의 등을 팔꿈치로 가격했다. 와, 키아크라가 이 상황을 보면 과연 나를 응원해줄까.

온 힘을 다해 내리쳐서 그런지 잠시 아사츠유는 일어나지 못했다. 잔인한 짓이라는 걸 알지만 나는 그녀가 일어나서 뒤를 돌자마자 다리를 발로 걷어찼다. 하지만, 역시 ‘다 자란’ 어른과 ‘덜 자란’ 애는 다르단 말씀.

그녀는 유유히 내 발길질을 피하고 오히려 다리를 잡아 넘어뜨렸다. 으윽, 또다시 엄청난 통증. 이번엔 다리가 부러졌나. 에밀리는 지금 뭐하고 있는 걸까. 이 상황을 보고하고 그 남자를 데려왔으면 좋을 텐데.

빨리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차마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간신히 몸을 돌린 순간, 그대로…내 명치에 가까운 곳을 가격하는 아사츠유. 그녀의 실루엣을 보고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나 설마 죽지는 않겠지…그렇겠지…….

 

“아사츠유!”

 

마지막으로 들은 건, 분노에 찬 그 남자가 아사츠유를 부르는 소리. 하, 빨리도 왔네.

 

-

 

“으으으으윽…….”

 

뭐지…브릿이었나? 그 곤충들이 내는 빛인가? 아니면 햇빛? 설마 천국? 새하얀 빛이 내 눈앞을 가렸고 저절로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아, 눈을 떠, 카스올리. 힘 좀 내봐. 간신히 눈꺼풀을 1mm정도 들어 올리자 새하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병원? 눈을 완전히 떴다. 머리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베개의 감촉. 음…그래, 거미 섬유. 이불도 두껍고 푹신한 것. 와, 침대…진짜 방에도 이런 것 좀 놔 봐라. 매트리스인가? 굉장히 푹신하네. 천장을 보니…그 때 그 재판장에서 봤던 것과 같은 빛이 날아다녔다.

브릿이었나, 아마. 근데 저거 갑자기 여기로 날아오면 어떡하지. 아, 유리창으로 막아놨구나. 조금 잔인하다고도 생각되었지만 그것보다 내 몸 상태가 심각했다. 으으윽. 아 맞다, 아사츠유. 브릿이 밝게 빛나는 것을 보니 분명 밤이라고 생각했다.

조금씩 고개를 돌려-통증이 강했기 때문에 그마저도 힘들었다-방을 둘러봤다. 온통 흰색의 매끄러운 타일로 된 바닥, 부드러운 재질의 흰색 벽지, 흰 빛을 내는 천장. 그리고 꽤 넓은 이 방에 침대는 하나, 환자는 나 하나. 아, 그리고 약재가 다소 들어있는 선반 하나.

어, 넨시도 있구나. 밤을 새웠는지 그녀는 눈 밑에 살짝 다크 서클이 진 채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미안해요, 넨시. 사고 쳐서.

 

“카스올리? 일어난 거야?”

 

앗, 깜짝이야. 언제 눈을 뜨고 날 본 거지.

 

“네…….”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나저나 왜 나는 매일 기절한 채로 업혀 올까. 생각해 보니 창피하네. 음…….

 

“도대체 어쩌자고 그 폭탄…, 아니 아사츠유하고 싸운 거야? 먼저 시비를 걸었니? 아니, 아사츠유가 먼저 하자고 했니?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아사츠유는 전쟁 아니면 남에게 무관심하니까. 설마 네가 관심을 끌 만한 짓을 한 거니?”

 

거의 혼잣말에 가까울 정도로 넨시는 나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아니, 나도 말 좀 하자고요. 아, 그러고 보면 넨시가 아침에 말했던 ‘폭탄’ 이라는 것은 아사츠유였구나. 나 참.

내가 황당한 눈빛을 한 채 그녀를 응시하자 넨시가 말했다.

 

“아, 미안. 카스올리. 너를 당황스럽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 네가 잠든 지 10시간 가까이 되어서… 무척 궁금했거든.”

“괜찮아요, 넨시. 그나저나…잠깐만요. 지금 10시간이라고 하셨어요?”

 

나는 외치다시피 그녀에게 물었다. 어쩐지 배고파 죽겠더라!

 

“그래. 배고프지?”

“죽을 것 같네요.”

 

그녀가 살짝 웃음을 터뜨리더니 방문을 열고 잠시 나갔다. 나는 그녀가 곧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차분히 기다렸다. 예상대로, 넨시는 15초 만에 돌아와 나에게 따뜻한 식사를 내밀었다. 음…스프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이건 빵이랑 비슷하게 생겼고.

 

“어서 먹어.”

 

이미 먹고 있어요, 넨시. 하하. 순식간에 한 끼를 해치워버렸다. 먹을 때만큼은 뱀파이어의 속도가 나는 나. 하하. 하나를 더 해치우는 동안 방문이 열리더니 에밀리가 들어왔다. 에밀리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넨시 옆에 있던 의자 하나에 털썩 주저앉았다.

“상황이 꽤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어.”

언제 꺼냈는지 물 한 컵을 마시며 에밀리가 말했다.

 

“그래?”

“응. 아사츠유가 입을 꾹 다물고 있다는데. 뭐 그 뱀파이어는 고문을 한다 해서 말 할 것도 아니고. 덕분에 키라드 꼴이 볼만 하던데.”

“음……. 또 다른 건?”

“딱히 특별한 건 없어, 넨시. 단지…이건 내 추측인데 말이지.”

“…응.”

“곧 그들이 올 거야.”

“곧? 곧 이라니? 적어도 일주일은 걸린다고 했잖아.”

“글쎄. 특수부대라도 조직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준비해야 해. 어쨌든 지금은 모두 쟤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어. 아사츠유가 말 안하면 쟤가 해야지 뭐.”

 

너무도 자연스럽게 넨시에게 반말으로 대화를 하고 게다가 나한테 ‘쟤’ 라는 호칭을 갖다 붙이는 에밀리의 당당한 태도에 혀를 내둘러 버렸다. 와, 쟤 얼굴에 깔린 철판은 도대체 몇 겹이나 될까. 20겹? 30겹?

 

“아. 그래. 나 깨어났다.”

 

보고 있기만은 답답해서 시큰둥하게 에밀리에게 말했다. 그러나 에밀리는 들은 체 만 체.

 

“괜찮아? 너 또 거기 가야 할 텐데. 아사츠유가 싸움의 전말에 대해서 얘기를 하지 않고 있어. 목격자도 없는 데다, 에밀리도 일부밖에 몰라서 말이지…….”

 

에밀리 대신 대답해주는 친절한 넨시. 그런데 ‘거기’ 라는 건 혹시 그 재판장을 말하는 건가. 어휴……. 또 키라드의 얼굴을 봐야 한단 말이야? 피곤하다, 피곤해.

 

“내가 잠든 10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설명이나 좀 해주세요.”

“글쎄. 그 쪽에 대해서는 에밀리가 훨씬 잘 알 거야. 에밀리,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카스올리한테 설명이나 좀 해 줘.”

“응.”

 

피곤했는지 넨시가 기지개를 펴며 일어났고, 잠시 후 새하얀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갔다. 넨시가 나간 후, 에밀리와 나 사이에는 뜻모를 어색함이 감돌았다. 한 1분쯤 후에서야 에밀리가 그 특유의 찬바람 쌩쌩 부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아사츠유가-그녀의 이름을 말하는 데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나보고 꺼지라고 한 후에, 나는 곧바로 넨시와 내 스승에게 가서 말했어. 네가 아사츠유와 싸우고 있다고. 넨시는 그 말을 듣고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었어. 내 스승은 이유를 물었지.

나는 자초지총을 설명했어. -그냥 자초지총 따위는 나중에 설명하고 빨리 내려오기나 하지!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건지-너와 내가 싸웠는데, 네가 이겼다고. 그런데 아사츠유가 그걸 보고 한 번 싸워보자고 했다고 최대한 빨리 설명했어. 내 스승은 곧바로 내려갔지.

그런데 가는 도중에 키라드를 만난 거야! 젠장. 키라드는 눈치가 없어도 지지리도 없지! 그 상황에서 보고는 무슨 보고? 뭐, 나중에 알고 보니 꽤나 중요한 보고였지만 아무튼 내 스승이 그에게 나중에 듣겠다고 설득하는 데도 시간이 지체되었어.

마침내 나가 보니까 네가 쓰러져 있고, 네 옆에는 아사츠유의 장검이 꽂혀있고, 게다가 아사츠유가 네 앞에 서있더라고. 당연히 오해할 만하지. 내 스승은 아사츠유를 불러서 자초지총을 캐물었지만 아사츠유는 얘 안 죽었거든요? 하여튼 뭐라고 했더라. 어쨌든 그 비슷한 말을 했어.

너야 그녀를 잘 모를지도 몰라. 하여튼 굉장히 무관심한 뱀파이어니까. 책임감이나 양심의 가책따위는 없을 걸. 아마. 아사츠유는 유유히 칼을 뽑아들고 칼집에 넣고, 그것으로 사건을 정리했어. 아무튼 제 딴에는.

하지만 내 스승은 아사츠유를 불러 세웠지.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그 둘은 꽤 오랫동안 팽팽하게 싸웠어. 무슨 상관이냐, 안 죽었다, 그런 일이야 생길 수 있다. 반대쪽에서는 상관 있다, 책임 져야 한다, 누가 먼저 시작한 거냐. 이런 의견을 냈지.

아무튼 때마침 그 때 키라드가 왔어. 그리고, 나, 아사츠유, 내 스승, 그리고 너를 번갈아 쳐다봤지. 그러고는 아연실색해서는…, 나 참. 엉뚱하게도 내 스승에게 따져 묻는 거야. 아사츠유가 무서웠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해.

하여튼 그래서 내 스승은 보고나 마저 하라고 했지. 그리고 아사츠유에게는 돌아가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어. 아사츠유는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 말에 순순히 따랐어.

다시 돌아가서, 키라드는 내 스승에게 작은 소리로 보고를 했지. 나는 그 동안-어차피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았어. 정말 작았거든, 이라고 에밀리가 덧붙였다-너를 여기로 옮겼어. 지금 생각해 보니 키라드의 보고는 그들이 곧 쳐들어 올 거라는 보고 같네. 아무튼 이게 끝이야. 궁금한 거 있어?”

 

아, 물론 있지.

 

“‘그들’은 누구야?”

“아…그거…….”

 

에밀리가 잠시 머뭇거렸다.

 

“쉽게 말하면 우린 지금 ‘휴전’ 상태에 놓여 있어. 전쟁에는 항상 두 편으로 갈라져 싸우지. 우리와, 그들. 이해 가?”

“그럼 키라드의 보고는…설마 전쟁이 일어날 거란 뜻은 아니겠지?”

아, 제발. 난 여기서 산전수전 다 겪을 생각은 없다.

 

“안타깝지만 그래. 카스올리, 내가 ‘곧’ 이라고 했잖아. 불시에 쳐들어올지도 모르지.”

 

에밀리가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아 그래. 전쟁……. 근데 아사츠유가 적어도 30명은 혼자서 쓰러뜨릴 것 같던데. 잠시 또 다른 침묵이 우리 사이에 깊고 넓게 흘렀다. 에밀리는 날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어느 순간에는 물을 홀짝이고 있었고 또 어느 순간에는 넨시를 기다리는 듯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근데 너 정말 그 때 어떻게 한 거야?”

 

한참을 그렇게 행동을 반복하던 에밀리가 마침내 침묵을 깨고 물었다.

 

“뭐를?”

“헉헉거리던 애가 갑자기 눈빛이 이상하게 변하더니…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공격했잖아.”

“……에밀리, 미안하지만 나도 몰라.”

 

무슨 소리야, 그게? 라고 에밀리가 물었지만 난 그저 어깨만 으쓱해주며 기억이 안 나, 라고 대답했다. 에밀리, 나도 기억났으면 좋겠다고!

 

“그나저나…넨시가 왜 이렇게 안 오지?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은 아닐 텐데.”

“뭐 하러 갔는데?”

“네가 깨어났다는 걸 알리려고…잠깐만!”

 

에밀리가 갑자기 버럭 외치는 바람에 하마터면 침대에서 굴러 떨어질 뻔 했다. 무슨 일이야? 도대체. 그 스승에 그 제자고만, 뭐. 사람 놀래키는데 재주도 좋아요.

 

“위험 신호.”

“뭐?”

“길게 설명할 시간 없어. 걸을 수는 있냐?”

 

혼자서 뭐라 뭐라 중얼거리던 에밀리가 걱정스럽게 쳐다보면서 물었다. 걸을 수야 있지, 라고 대꾸한 후에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스승과 제자는 미세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복잡한 언어 말고 간단한 신호 정도는 보낼 수 있어. 방금 전에 위험하다고 신호가 왔어. 그러니까 빨리 좀 나가자.”

“위험하다는 건…….”

“빨리!”

 

으윽, 몸을 움직이자 극심한 통증이 몸을 찔렀다. 이를 악물고 침대를 벗어나 에밀리에게로 갔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몸속의 내장이 바늘에 찔리는 듯 아파왔다.

 

“진짜 걸을 수 있겠냐?”

“그…럼.”

 

내 꼴이 우습게 보일 것이라는 건 알지만 이를 악물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지만 손을 꽉 쥔 채 입을 다물고 간신히 참았다.

 

“일단 이거라도 마셔. 진통제 비슷한 건데, 당분간은 효과가 있을 거야.”

 

에밀리가 작은 병을 내밀며 말했다. 안에는 푸른색으로 빛나는 액체가 들어있었다. 망설일 필요야 없지. 그 맛은 생각하지도 못한 채 나는 그대로 그 액체를 들이켰다.

액체가 혀에 닿는 순간 그 끔찍한 맛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목으로 넘어간 뒤였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에밀리를 바라봤다. 이거 혹시 독살?

 

“효과는 있을 거야. 가자.”

 

그래, 그래. 이렇게 고약한데 효과가 없으면 뭐가 되겠니. 하하, 참자, 참아. 나는야 보살. 에밀리와 함께 문을 열고 나가니 온 복도가 고요했다. 쥐새끼 한 마리 없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일까.

 

“무슨 일이지?”

 

에밀리에게 물었지만 에밀리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창문으로 다가갔다. 엇, 어느 새 날이 밝아 있었다. 아니면 원래 밤이 아니었던 건가. 나는 에밀리와 함께 창문에 다가섰다. 그리고 그 창문을 통해 본 풍경은…….

 

“믿을 수가 없어. 그들이 정말로 먼저 습격했단 말이야?”

 

전쟁? 전쟁이라고 하기에는 표현이 부족했다. 거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에 사상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2층이구나. 그러면 누군가 칼이나 무기를 들고 여기로 올라올 수도 있는데…! 진통제가 효과를 발휘하는지 점점 몸이 괜찮아 지고 있기는 하지만 뛰어다녀도 괜찮을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왜 이 모양이 된 거지.

 

“에밀리, 여기 설마 2층이야?”

“그래. 왜?”

“누군가 올라올 수도 있잖아.”

 

내 말에 에밀리가 순간적으로 뒤를 돌았다-우리는 계단이 있는 쪽과는 반대편에 있는 창문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없다는 걸 발견하고는 살짝 엷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도 없는걸. 모두 앞쪽에서 싸우느라 뒤쪽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어. 빨리 내려가…….”

 

탁.

 

불시에 울린 발소리가 에밀리의 말을 잘랐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서로를 마주보았고, 서로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구지?”

 

나는 작은 소리로 물었지만 그 소리가 뱀파이어들에게는 충분히 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에밀리는 내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소리도 없이 다가온 뱀파이어의 칼이 우리 사이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전혀 보지 못한, 적. 깔끔한 머리를 하고 여기서는 보지 못한 옷차림을 한 뱀파이어가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13.

 

 

“…헐.”

 

작게 내뱉자, 우리와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정확히 말하면 우리에게 칼을 겨누고 있던 뱀파이어는 인상을 찌푸렸다. 에밀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뱀파이어만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헐 무서워. 헐. 헐. 쟤 설마 얼음 마법 쓰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와 차갑다. 차갑다. 얼음공주 오셨다…하지만 sexy…아 이게 아니야.

 

“…시작해.”

 

그 뱀파이어가 작게 중얼거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사람, 아니지. 뱀파이어들은 나와 에밀리를 지나쳐 앞으로 뛰어 갔다. 앞으로 뛰어 가 저 뱀파이어들을 막고 싶었지만, 내 목에 들어와 있는 칼이 굉장히 신경 쓰였기에 당당히 앞으로 갈 수 없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바로 네 목에 칼자국 진하게 남을지도 모르니까.”

어이구 살벌해라. 깜짝 놀라서 그 뱀파이어를 보고 있자니, 나한테 한 말은 아닌 듯 했다. 에밀리는 누구 죽일 기세로 그 뱀파이어를 노려보았고, 나는…나는? 나는 뭐 했더라. 그냥 멍 좀 때리고 있었다. 한참동안 아무런 말도 없던 이 셋 사이에 떠돌던 침묵은, 에밀리가 웃음을 짓는 것과 동시에 부서져버렸다. 에밀리는 말 그대로 뿌듯함 + 비웃음이 뒤섞인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목에 들어온 칼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챙, 하고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

 

“끝났어, 너희도.”

“입 다물어.”

“끝났다고. 너희.”

“입을 잘라버리기 전에 다물어.”

“누구 입을 자른다고?”

 

뱀파이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마자, 그 뱀파이어의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 듯 했다. 뱀파이어보다 키가 더 작아서 그런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느낌이 있었다. 아, 이런 게 바로 여자의 직감…짧은 단도가 뱀파이어의 목을 그어버릴 듯 피부에 닿았다.

 

“넨시.”

“나 왔어, 카스올리. 에밀리도.”

“……….”

 

오오 여신님…넨시의 무릎을 붙잡고 여신님이라며 울 기세로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넨시는 그런 나를 본 건지 웃더니, 금세 뱀파이어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여자도 만만치 않은 얼음공주 구만. 얼굴이 싹 굳어서 뱀파이어를 노려보는데, 나는 순간 에밀리와 자매인 줄 알았다. 완전 얼음공주 자매.

 

“섣부른 생각하면 너야말로 그 뇌를 그어버릴 테니까. 움직이지 마.”

 

뱀파이어는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이를 바득 갈았다. 쟤도 살벌하네. 그것보다 쟤 남자 맞지? 잠시 멍하니 생각하고 있는데, 나와 에밀리의 뒤에서 넨시, 라고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카…”

“무슨 일이야?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피하듯, 그는 넨시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그 말을 잘라 먹었다. 아, 낯익은 남자군. 에밀리는 아까보다 훨씬 밝아진 표정으로 그 남자를 보았고, 나는 그저 사람들이 오로지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것에 대하여 굉장히 좋아하고 있었다.

 

“유리…아니 에밀리가 이쪽으로 신호를 보내와서 오긴 했는…혹시?”

“맞아. 적이 침입했어.”

 

전쟁이 시작됐다고. 넨시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것보다 저 뱀파이어 짜게 식어가네. 불쌍해라. 조금의 동정스러운 눈빛을 그에게 주자, 그 뱀파이어는 다시 이를 바득 하고 갈았다. 저 이를 바득, 하고 가는 게 일종의 주문이면 어떡하지, 라며 나는 굉장히 판타지스러운 걱정을 했다. 뭐 내가 지금 있는 곳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처럼 생긴 것들이) 뱀파이어라는 것 자체가 충분히 판타지지만 말이다.

 

“이봐. 너, 어디로 보냈어?”

“……….”

“어디로 보냈냐고. 몇 층이냐.”

 

오오. 우애를 지키시겠다 이건가? 에밀리가 그 뱀파이어를 비꼬듯 말하자, 뱀파이어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저 뱀파이어가 조금은 불쌍하다고 생각됐다. 미안해서 어쩐담.

 

“어서 말해. 네 입이 먼저 잘리고 싶나 보지?”

“……….”

“어디냐고!!!”

 

갑자기 화를 내는 넨시 덕에 깜짝 놀라버렸다. 그런 넨시에 놀란 건 나만이 아닌 듯 했다. 에밀리도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 남자는 딱히 많이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동안 옆에 있던 사람이니까, 놀랄 일도 없겠다 싶었다.

 

“…가장 위.”

“……뭐?”

“가장 위로 보냈지. 이제 슬슬 연락이 올 것 같은데 말이지.”

 

아까까지만 해도 분노해서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던 그 뱀파이어가 갑자기 평온한 얼굴로 우리를 대했다. 그건 평온한 얼굴, 이라기보다는 한심하다는 얼굴에 더 가까웠다. 뭔가. 우리가 이겼어, 이 멍청한 것들아. 라는 표정. 그 뱀파이어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귓속에서 울리던 윙윙 소리가 볼륨을 4배 정도 올린 것처럼 시끄러워졌다.

 

“아, 시끄러워…”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중얼거렸다. 비상. 비상. 머릿속에 사이렌이 울리는 것처럼 일정하게 소리가 울렸다. 넨시도, 그 남자도, 에밀리도 모두 뱀파이어의 입에 나온 말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어서, 나에게 관심을 가져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무하다고 생각되기 보다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쾅.

 

옆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순간적으로 모두의 시선이 그 쪽으로 향했다. 눈치 좋게 사그라진 용의 목소리에 나는 조금 고맙다고 생각했다. 우리와 약 6에서 7m 정도 떨어진 문이 쓰러지면서 나는 소리인 듯했다. 문 위에 엎어진 사람은, 그저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는 뱀파이어였다. 문이 떨어지면서 졸지에 문이 없어진 입구를 통해서 나온 어떤 뱀파이어가, 긴 칼을 들고 있지만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도 저 평범한 사람 같은 뱀파이어가 습격당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무슨…!!”

에밀리가 옆에서 중얼거리자 용은 다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용의 노래라더니. 용 알고 보니까 완전 음치였구나. 귀를 막아도 귀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였기 때문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조용히 해, 라고 작게 중얼거리자 그제야 조금 소리가 줄어들었다. 용이 내 말도 알아듣나봐? 완전 신기하다. 그래도 계속 사이렌이 울리는 것처럼 소리를 지르는 건 줄어들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했기는. 난 그저 내 ‘보스’ 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뱀파이어는 굉장히 여유로운 얼굴로 얘기했고, 이번에는 그 남자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사실 무슨 일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 솔직히 얘기하자면. 난 지금 저 뱀파이어가 완벽한 ‘적’처럼 여겨지지가 않는다.

 

“네 보스가 뭐라고 했지? 어서 얘기해!!”

“…잠깐.”

 

넨시는 분노한 듯 소리를 질렀지만, 뭐라고 대답하려던 뱀파이어는 잠깐, 이라며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혹시 저 뱀파이어도 무슨 신호가 온 건가? 그 남자와 에밀리처럼 말이다. 문득 생각난 에밀리 때문에 그녀가 있던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에밀리는 자리에 없었다. 조금 당황해 주위를 둘러보자, 언제 그 쪽으로 간 건지, 문과 함께 넘어진 아군(그러니까 우리 쪽 뱀파이어)의 옆에 앉아있었다. 그녀의 앞에 서 있는 뱀파이어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에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밀리!!”

소리를 치자, 그 남자는 그제야 에밀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에밀리는 나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앞에 쓰러져 있는 아군의 목을 짚었다.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확인하는 건가? 그들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누가 내 어깨를 붙드는 바람에 깜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너 설마…!!”

 

어이고 깜짝이야!!! 언제 온 건지 넨시는 저 쪽에 내동댕이 처져있고, 정말로 베인 건지 목 부근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그 뱀파이어는 상당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저기 놀란 건 내가 더 하거든?! 뱀파이어는 분명 놀란 표정이기는 했지만, 어떤 살기가 담겨있지 않아서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왜곡될 수도 있지만, 그는 나를 죽일 생각은 없는 듯 했다.

 

“…너, 네가 카스올리야?”

“……에?”

 

맞는데. 별 생각 없이 대답하려는 내 입을 막은 건 넨시였다. 칼을 들고 뱀파이어를 찌르려는 듯 이 쪽으로 달려드는 넨시를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더니, 금세 알아챈 건지, 뱀파이어는 급하게 몸을 피했다. 아슬아슬하게 그 뱀파이어를 스친 칼날은, 내 허리를 조금 긁어버렸다. 넨시. 힘 조절 잘못했구나? 옷 덕분인지, 아프지는 않았다.

 

“카, 카스올리. 괜찮아?”

“전 괜찮네요. 아프지 않아요.”

“미안해.”

 

그렇게 말한 넨시는 다시 매섭게 시선을 돌렸다. 당연히 뱀파이어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 뱀파이어는 없었다. 네가 카스올리야? 라는 질문을 내게 왜 한 걸까. 그래. 나 카스올리야. 하하 내가 바로 카스올리 카라스다. 뭐 어쩔래. 분명 키라드가 물었다면 난 이렇게 답했을지도 모르겠다. 아, 난 왜 걔가그렇게 싫지.

 

“제길, 사라졌어…!!”

“넨시.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생각보다 빠르게 적이 들어왔어. 이왕이면 피하는 게 가장 좋은데.”

 

확실하게 그들이 적이에요? 묻고 싶었지만 넨시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에 묻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로 의문이었다. 정말로, 그들이 적 맞아요? 내가 입이 가벼운 편에 속하지만, 그래도 눈치는 좋은 편에 속하니까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에밀리와 그 남자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 쪽에 있던 다른 뱀파이어도 같이 사라진 건지, 주위에는 나와 넨시, 에밀리와 그 남자. 그리고 아군밖에 있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모르겠어. 갑자기 왜 사라지는 거지.”

“그 쪽에서도 무슨 일이 생겼나?”

“하지만 이 쪽에도 신호가 오지 않는다고. 키라드가 그렇게 멍청한 놈일 리가 없잖아.”

 

아니, 걔라면 충분히 멍청할 걸. 속으로 피식피식 하고 웃으면서 용의 윙윙거리는 소리를 감상했다. 용의 언어나 미리 배워놓을 걸. 이렇게 답답하다니. 용은 이제 조금 안심이 된 듯 소리를 죽였다.

 

“잠깐 위로 올라가자. 넨시.”

“그럼 나도…!!”

“너는 카스올리랑 같이 있어. 위는 위험할지도 몰라.”

“…알았어요.”

 

에밀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에밀리가 그 남자에게 존댓말을 썼다는 것에 대해 굉장히 엄청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방금까지 넨시와 그 남자가 서 있던 곳을 바라보던 에밀리는 내게 시선을 돌리고 빨리 와, 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 쪽으로 가볍게 뛰어가자 에밀리는 나를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허리는 왜 그래?”

“넨시가 뱀파이어 찌르려다가 이렇게 됐다네.”

“…안 됐네.”

 

어이. 전혀 안 됐다는 말투가 아닌데? 에밀리의 말투가 조금 불만스럽기는 했지만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얘기 해봤자 돌아올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건, 나도 잘 안다.

 

“빨리 와. 이왕이면 높은 곳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방금 걔가 가장 위로 보냈다고 했잖아.”

“아, 진짜…그럼 어떻게 하지. 아래도 위험하잖아. 또 어떤 사람들이 올지 몰라.”

“…그냥 아무데나 들어가 있자. 이 건물에서 가장 넓은 곳은 없어?”

“……이리 와. 강당 대용으로 쓰는 곳이 있어.”

 

그녀 쪽으로 더 가까이 가자마자 에밀리는 내 옷을 꽉 붙잡았고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에 우리가 있던 곳은 미로 수준의 방이었다. 호텔 로비같은 느낌인데? 강당 대용이라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에밀리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내 시선을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안심해도 될 것 같군.”

“…저 문들은 뭐야?”

“나도 몰라. 닫혀있으니까.”

“열어보고 싶다. 열어보면 안 돼?”

“연 후에 책임은 네가 져.”

 

알았네요, 알았어. 어쩔 수 없이, 나는 에밀리를 따라 나섰다. 저 쪽에 무대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에 나와 에밀리는 그 쪽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굉장히 넓어서, 거의 운동장을 걷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운동장보다 더 넓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뱀파이어가 건축 기술 하나는 뛰어난가 봐?”

“그렇지, 뭐. 덤으로 여기는 내가 설계했어.”

“정말로?!!”

 

그걸 또 믿냐? 한심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 에밀리는 비웃듯이 웃고 저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이거 슬슬 다리가 아파오는 걸? 2분 정도를 느릿하게 걸어서 나는 결국 무대에 도착했다. 털썩하고 소리 나게 앉는 순간, 나는 문득 목이 마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마르다. 물 없나, 어디?”

“이런 데에 잘도 있겠네.”

“못 만들어내? 뱀파이어잖아.”

“뱀파이어가 무슨 마법사인 줄 알아? 못 해.”

“뱀파이어는 마법사 아니었어? 순간이동도 막 하잖아.”

 

물론 조금의 농담을 섞어서 한 말이었다. 갑자기 정색하고 나를 바라보는 에밀리 덕에 나는 헛기침을 해야 했고, 에밀리는 다시 피식, 하고 웃으며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데에 농구대나 축구 골대라고 있으면 땀 좀 빼는 건데. 아깝네. 아쉽다는 듯 혀로 입술을 살짝 핥았다. 어딜 뛰어다닐 일도 없으니, 운동부족이 된 기분이었다. 이러다가 만약 지상에 올라가게 되면, 완벽한 약골이 되는 건 아닐까, 싶어서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근데 뱀파이어들은 운동 같은 거 안 해?”

“운동 광들은 하지. 그런데 거의 안 해. 할 일이 없지.”

“…살 안 쪄?”

“찔 일이 없어. 피를 마시는데 살이 찔 것 같아?”

“고기도 먹잖아.”

“용 고기는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된다고 누가 그러더라.”

 

누가? 꼬치꼬치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나만 더 피곤해질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하긴. 에밀리도 꽤나 마른 편이었다. 다른 여자애들보다 좀 큰 편에 속하는 내 손으로 에밀리의 손목을 잡는다면, 남을 것 같았다. 조금 부럽기도 했지만, 저런 약골들은 나중에 불편하다. 내가 잘 알지.

 

“…아아…그런데 우리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돼?”

“2가지 경우가 있어. 그 사람한테 먼저 연락이 오던가, 적들이 여기로 먼저 오던가.”

 

아무래도 우리가 여기서 나가게 된다면, 그건 전자 쪽일 것 같다. 뱀파이어들은 신호를 주고받을 때 어떻게 주고받으려나. 초능력…비슷한 건가? 좀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며 앉아 있던 나는 지상에 있을 때보다 조금 더 긴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잘 묶이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충분히 묶일 만큼 길어져서, 혹시 가위라도 있다면 그냥 잘라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넌 머리 그렇게 하고 다니면 안 더워? 엄청 더워 보이는데.”

“더웠으면 나는 차라리 삭발을 하고 말아. 안 더워.”

 

말이 조금 살벌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안 더운 것 같아서 조금은 부러웠다. 아 묶어주고 싶어. 내가 더워 보이는데? 에밀리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으려는데, 갑자기 에밀리가 벌떡 일어났다. 어이고 깜짝이야. 깜짝 놀라서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갑자기 왜 저래…에밀리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무언가 듣다가 나를 흘끗 보았다.

 

“그 사람이, 너 옆에 있냐고 묻는다. 뭐라 대답해줄까?”

“목이 말라서 죽어가고 있다고 전해줘.”

 

진짜로 그렇게 신호를 보내는 듯 에밀리는 또 인상을 찌푸렸다. 신호를 저렇게 어렵게 보내야 한다면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어우 더워. 손으로 부채질을 하다가, 텅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주위를 바라보았다. 워낙에 넓으니까,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그렇게 시끄러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나 놀라버렸다. 에밀리 역시 조금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야 방금?”

“…나도 모르지. 아무것도 없는데 들렸으니까.”

 

하지만 뭔가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농구공에 대한 집착이 더 커졌을 뿐이다. 아, 농구 하고 싶어…농구…축구도 좋지만 이런 데에서는 농구가 최고지…별의 별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에밀리가 다시 내 옆에 털썩, 하고 소리가 나게 앉았다. 아 벌써 연락 주고받기 끝냈어? 빠르네. 아까 그 소리에 대해서는 관심도 가지지 않은 채 손으로 부채질만 하고 있는 나에 비해 에밀리는 아직도 경계심을 낮추지 못한 표정으로 주위를 보고 있었다.

 

“…환청일 수도 있잖아. 뭘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시나.”

“둘 다 들었는데 잘도 환청이겠네.”

“그런 거 있잖아. 뭐 예를 들면 적들이…”

 

마저 말을 이으려는데 쾅, 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오히려 내가 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는데, 에밀리는 너 뭐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소리 안 들렸냐고 물을 참이었는데, 생각을 해보니 용이 그런 것 같아 그냥 다시 앉았다.

 

“뭐 해.”

“아니, 순간 꿈을 꾼 것 같아.”

“2초 동안? 용자네.”

“음. 나 용자야. 이제 알았지?”

 

아무렇지 않게 말은 했지만, 벌써 2번째나 이런 소리가 들리니 나로서는 굉장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작게 들려오는 소리도 요즘은 통 뜸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크게 소리가 들려오면, 나보고 뭐 어쩌라는 건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보다 여기 진짜 덥네.”

“입 다물고 명상이나 해. 너 때문에 더 더워.”

“너 안 덥다며.”

“내가 언제 그랬어. 이 머리 스타일이 안 덥다고 했지.”

 

자랑이십니다. 너무 당당한 태도에 괜히 중얼거리자 에밀리가 옆에서 또 웃었다. 저건 확실히 비웃는 거 아냐?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나는 용에게 조금만 조용히, 라고 얘기해주었다. 어쩌면, 텅하는 소리도 이 용이 한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해보았지만 에밀리가 그 소리를 들은 걸 보면 그건 아닌 듯 했다. 용아, 좀만 조용히 하자. 너 이렇게 시끄러운 애 아니었잖아.

 

“…카스올리!”

 

갑자기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그 남자의 목소리에 나와 에밀리는 동시에 일어났다. 오, 다행이다. 적이 먼저 오지 않아서. 거 봐. 전자 맞잖아. 조금 뿌듯해하면서 그 남자를 보는데, 뭔가 그가 풍기는 아우라가 달랐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렇게 눈치가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여기 있었구나! 놀랐어.”

 

에밀리는 별 말 없이 그 남자에게 걸어가고 있었지만, 뭔가 선뜻 그 남자에게 갈 수 없었다. 갑자기 드는 생각이었지만, 오히려 그가 ‘적’처럼 보였다.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기에 나는, 다른 뱀파이어가 그 남자의 모습을 흉내 낸 건가, 했다.

 

“…안 오고 뭐해. 또 꿈 꾸냐?”

 

오히려 꿈을 꾸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에밀리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왜 저 남자가 적 같지? 이러면 안 되는데 말이다. 지금 이 상황은, 그를 믿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 자리에 서서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자, 에밀리가 나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에밀리는 다시 내게로 와서 야, 라며 내 어깨를 툭툭 쳤고, 그 남자는 카스올리? 라며 물어왔다. …왜 무섭지? 진짜 내가 이해 가지 않았다. 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계속 커져왔다.

 

 

 

 

14.

 

 

귀에다 확성기라도 단 건지, 계속 증폭되어 오는 소리에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뱀파이어 스승과 제자가 합창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더 그랬다. 미칠 것 같은 소음을 조금이라도 막아보기 위해 눈을 감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하긴, 귀로 들리는 걸 어찌 눈으로 막으랴.

마침내 주위가 고요해졌다. 어둠. 눈을 살그머니 떴지만 여전히 어둠. 뭐지? 눈이라도 가려진 건가? 얼굴 부근을 더듬었지만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어둠. 뭐야 이건. 어디 갇힌 건가? 주위를 둘러봤지만 보이는 건 그저 어둠. 까만색.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뭔가 얼굴에 떨어졌다. 톡. 그리고 주르륵. 뭐지? 차가운 무언가. 누군가 외치는 소리도 들린 것 같긴 했다. 놀라서 숨을 헉, 하고 들이마셨는데 그 차가운 게 콧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콜록, 콜록!”

 

눈이 번쩍 떠지면서 흐릿한 실루엣과 함께 빛이 마구잡이로 눈을 통해 머리를 쿡쿡 쑤셔댔다. 정신을 차리자 보이는 것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는 에밀리와 그 남자. 아니, 걱정스럽기 보다는 한심하다는 눈빛인가? 나는 에밀리의 손에 들려있는 컵과 비슷한 걸 보고 사태파악을 했다.

 

“카스올리, 괜찮아? 고의적으로 거기다 뿌린 건 아냐.”

 

에밀리가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말투로 말했다. 아, 그래. 나 괜찮아. 이런 일이야 뭐 늘 있는 일이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머리카락에 묻어있었던 듯 액체 몇 방울이 투둑 소리를 내며 다리에 떨어졌다.

 

“그래, 괜찮아. 그런데 여긴 어디야?”

 

내가 생각해도 멍청한 질문이었지만 묻지 않고는 도저히 못 배기겠어서 결국 묻고 말았다.

 

“그나마 조용한 복도. 아직도 전쟁 중이고, 누가 이길지는 잘 모르겠어. 아사츠유와 키라드 등 모두 잘 싸워주고는 있지만… 아까 네가 잠시 혼절한 바람에 여기 데리고 와서 물 좀 먹였어. 아니, 정확히 물은 아니지만…….”

“물이 아니라니?”

 

고맙게도 여러 번 질문을 하지 않게 잘도 대답을 해줬지만 ‘물’ 이 아니라는 말에 신경이 쓰여 말을 중간에 끊고 물었다. 물이 아니라면 뭐지? 피?

 

“물보다는 그게 갈증 해소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해서……음…그래서 말이지 100%는 아니지만 거의 5 : 1 비율로 희석시킨 거야.”

“뭘 희석했는데?”

“피.”

“그니깐 어떤 피?”

 

어쩐지 물이 조금 맛이 이상하더라.

 

“몰라, 나도. 확실한 건 인간이나 뱀파이어, 엘프 등 두발 동물이 아니라는 거야.”

 

그러면 다행이고. 근데 엘프도 있어? 와, 신기하다.

 

“시간 없어. 나가야 돼.”

“나간다고? 여기서?”

“이런 종류의 싸움은 오래 끌수록 불리해져. 나가서 최대한 빨리 끝내야지.”

“적들이…많아?”

“우리보다 적지만 결코 만만한 상대들이 아니야.”

“그래?”

“응.”

 

에밀리가 일어나라는 듯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가볍게 거절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제야 혼자 벽에 기대고 서 있는 그 남자가 보였다. 그런데, 저 남자 왜 지금까지 한 마디도 안 한 거지? 다시 두려움이 일었다.

지금까지 편하게 지내왔잖아. 왜 그러지? 학원에서 저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 꼭 그 때 기분이다.

 

“가요.”

 

그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그대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가 따라온 거구나.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 남자는 에밀리와 나 옆에 서 있었다. 순식간에 바뀐 공간에 적응하기가 좀 힘들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복도였는데. 그런데 여기는…바로 그 경기장 비슷하게 생긴 곳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뒷마당이라고 해야 하나.

아사츠유하고 나하고 싸웠던 데를 포함해서, 잡초밖에 없는 그 마당 비슷하게 생긴 곳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도망쳐야 되는 거 아냐? 의문스럽다는 눈빛을 그 남자와 에밀리에게 쏘아 보냈지만, 그 둘은 흥미롭다는 듯 보고만 있을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다른 쪽 보다 약간 높은 곳. 표적이 되기 쉬운 곳이었지만 여기가 마치 사각지대, 안전지대라도 되는 듯 에밀리와 그 남자는 여유롭게 서 있기만 했다.

이래도 돼? 조심스럽게 에밀리에게 물었지만 에밀리는 고개만 살짝 보일 듯 말 듯 까닥였다. 그렇게 초조하게 있는데-그 남자를 조금씩 경계하면서-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젠장, 키라드. 군데군데 다쳤는지 자잘한 상처가 나 있었다. 그를 걱정하는 생각보다는 잘 됐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 이러면 안 되는데. 어쨌든 그는 아군이잖아. 전쟁 중이니 아무리 싫어도 아군은 아군이야…그런데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말을 부정하는 이유는 뭐지?

정신을 차려보니 키라드가 그 남자에게 보고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지고 있습니다.”

 

뭐? 지고…있다고? 승산이 없단 말이야? 왜? 이봐요, 아사츠유도 있잖아요……. 멍 하게 있다가 갑자기 지고 있다는 말을 듣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유는?”

 

그 남자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을 뿐 걱정스럽거나 그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로 간단하게 물었다.

 

“저들이 폭발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항상 그게 문제군. 당연히 거래한 물건이겠지?”

“아마도 그렇겠지요.”

 

폭발물? 폭탄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오, 역시 신세대였어. 어쩐지 옷차림부터 여기와는 차원이 다르더라…아니 이게 아닌데. 적을 칭찬하고 있다니. 그나저나 거래? 누구랑? 인간들이랑? 더 잘 듣기 위해 은근슬쩍 몸을 조금 그 쪽으로 가까이 돌렸다.

그나저나 폭발물이라니……. 그럼 아까 강당 대용으로 쓰이는 곳에서 난 소리는 대포나 수류탄 비슷한 게 터지면서 난 소린가? 아, 그럴 수도 있겠네. 텅, 하고 폭탄을 던지고 쾅, 하고 터지고. 그런데 왜 에밀리는 쾅, 소리를 못 들은 거지?

 

“어떻게 할까요? 무슨 수라도…”

“키라드, 싸움을 중지시키고 최대한 빨리 몸을 숨겨. 건물 안으로 가서 가능한 한 흩어지지 말고 있어. 그리고 내부에 적이 있다면 소리나 신호를 보내지 못하도록 보는 즉시 죽여.”

“…예.”

 

그 대화-보다는 일방적인 명령에 가까웠지만-가 끝나자마자 정말로 순식간에 키라드는 사라졌다. 아니, 증발했다고 하는 게 더 어울리려나? 왠지 찜찜했다. 양심까지는 아니지만 마음 한 쪽이 켕겼다. 설상가상으로 용이 경고음 같은 소리를 보내고 있었다. 야, 그러지마. 불안하잖아. 그런 소리 낼 때 마다 꼭 이상한 일이 생기더라.

그렇게 용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는 힘이 느껴졌다. 아프다고 느끼기도 전에, 곧장 몸의 중심을 잃으면서 나가 떨어져버렸다. 서 있던 곳이 조금 높은 곳이라서 그런지, 하마터면 구를 뻔 했다. 누구야, 날 민 게.

뒤를 돌아보려고 하는 찰나에 또 다시 중심 감각을 잃어버린 바람에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 했지만 간신히 팔을 휘두르며 제자리를 찾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분명 그 남자가 날 밀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뒤돌아봤다. 그런데…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와 그 남자, 에밀리가 서 있던 곳에 아무도 없다? 무슨 일이지?

에밀리는 나와 조금 거리가 있었으니까 에밀리는 분명 아니고. 그 남자다. 에밀리, 거 참 스승 한 번 잘 뒀고만……. 아니 이게 아닌데. 지금 상황이 심각하잖아.

자자, 침착하자고. 앞을 보니 탁 트인 시야에…적들뿐인 뱀파이어들. 하, 나 어떡해. 무기도 없는데. 그나저나 그 남자는 왜 날 갑자기 민 거지? 뭐 꼭 그가 날 밀었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렇게 긴장하며 서 있는데 키라드 등 싸우던 적들이 없어져서인지 당황한 뱀파이어들의 초점이 마침내 모두 나에게로 맞춰졌다. 꿀꺽. 잠시 몇 초간의 침묵.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하고 잠시 멍하게 날 쳐다보던 뱀파이어들이 갑자기 정신을 차렸는지 땅을 향하고 있던 칼끝을 도로 세우고 조심스레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마 저 자리에 그 남자가 있다면-나는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상당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날 지켜보고 있겠지. 그 면상에 한 방 날려줘야 하는 건데.

하, 이 참 재미있는 상황. 뭐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 거지. 일단 지켜보자. 지금 여기 있는 뱀파이어들은 어디 보자, 하나 둘 셋 넷…모두 아홉 명. 9대 1이라. 총 아홉 명 중 두 명의 여자가 있었는데 둘 다 짙은 보라색 눈에다가 긴 머리를 하고 있어서 마치 쌍둥이처럼 보였다. 옷차림도 비슷하고. 아니, 그냥 쌍둥이, 맞나?

도대체 뭘 믿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난 자신감이 있었다. 내 눈앞의 뱀파이어들이 날 해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 팔짱을 살짝 끼고 조금은 건방진 포즈로 서 있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데 한순간 제일 앞에 있던 뱀파이어가 고개를 들고 내가 아닌 다른 곳에 초점을 맞췄다. 뭐지? 내 뒤에 누가 있나?

 

“카스올리?”

 

내 이름 끝을 살짝 올려서 은근하게 묻는 목소리. 뭐야…날 비웃고 있어? 뒤를 돌아보니 어느 새 그 남자와 에밀리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아까 전에는 분명히 없었는데. 그 남자가 재밌다는 듯 웃고 있는 데 반해, 에밀리는 굳었다, 라기보다는 약간 침울한? 아니, 우울한, 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평소보다는 이상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에밀리. 도대체 무슨 일인 거지.

 

“왜 싸우지 않는 거지?”

“…….”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왜 싸우지 않는 거냐고? 단순하게는, 싸우기 싫어서, 도 있긴 있지만 그것보다는 무기가 없어서. 맨손으로 9대 1로 싸워서 뭐 어떻게 하게. 내가 미치지 않은 이상, 그런 무모한 짓은 안 해. 하지만 또 다르게는, 말도 안 되는 거지만 난 저들이 내 적이 아닌 것 같아. 그렇다고 완전한 아군도 아니지만.

그런데 안타깝게도 난 이런 대답을 그에게 해 주지 못했다. 내 옆에서 계속 그 남자를 죽일 듯 쏘아보던 뱀파이어가 순식간에 그 남자에게 돌진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또다시 몸의 중심을 잃은 나는 다시 넘어질 뻔 했다.)

나를 포함해 뒤에 서 있던 뱀파이어 8명 모두가 얼빠진 채로 멍하니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달려가는 뱀파이어를 눈으로 좇고 있는데 갑자기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무언가 우두둑,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흙먼지랄까, 무언가 눈앞을 뿌옇게 가렸다. 잠깐…그 남자의 웃는 모습이 설핏 보인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곧 피어오른 흙먼지에 의해 가려지는 바람에 정확히 웃는 모습인지를 확인하지 못했다. 이게 웃을 상황인가?

아무래도 그 뭔가가 심하게 부러지고 으스러지는 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뼈라도 부러진 건가? ‘적’ 으로 정의되어 있는 뱀파이어였지만 내 앞에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었던 그 남자보다는 걱정이 되었다. 바로 옆에 있는 누군가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뿌예진 공간에서 뱀파이어들이 빠르게 대화를 주고받는 게 들려왔다.

마침내 시야가 앞에 서 있는 물체를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선명해졌을 때, 나를 포함해서 그 남자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눈앞에 펼쳐진 끔찍하다 못해 잔혹한 광경에 얼굴을 찌푸렸다. 두 명의 여자 뱀파이어-쌍둥이 같이 생긴-는 고개를 돌렸다.

심지어 그 차갑던 에밀리까지도,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는데 그 남자를 원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만약 에밀리라면 그 남자에게 욕을 퍼부었겠지만 다행히 나보다는 점잖은 편인 에밀리는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요.’라고 말하는 듯 했다.

아까 그 남자에게 달려들었던 뱀파이어는 더 이상 ‘인간’ 이나 ‘뱀파이어’ 또는 하다못해 ‘생명체’ 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온통 드러난 뼈들은 멀쩡한 곳 없이 으스러졌거나 깨져있었고, 몸의 형체를 갖추지 못해 그 속에 있었던 거의 모든 것이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적어도 반경 1m까지는 검붉은 액체가 퍼져 있었…윽, 뱀파이어도 피가 빨간색이었구나. 토할 것 같은 기분을 간신히 추스르고 그 남자를 있는 힘껏 쏘아봤다. 도대체 저 뱀파이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감정이라는 게 있긴 한 거야? 그 ‘시체’로부터 꽤 가까운 거리에 있는 편인 나는 역겹게 풍겨오는 피 냄새에 정말로 토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짓을 하고도 저 남자는 웃을 수 있을까. 그것도 비웃음.

 

“누구든 저 꼴이 되고 싶다면 와도 좋아.”

 

그 남자가 팔짱을 낀 채 말하자 뱀파이어들이 술렁거렸다. 비열한 놈, 내가 혼자서 중얼거리자 그 소리가 들렸는지 그 남자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카스올리.”

“…….”

 

섬뜩하게 다정한 목소리. 처음의 얼음의 매끄러움을 담고 있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대신 깨진 얼음의 날카로움만 남아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렇게 변한 거지? 순간 의문이 들었다.

 

“왜 날 그렇게 보는 거지? 네 적들은 정작 저들인데 말이야.”

내 답변은 침묵. 여자의 마음이 그렇게 설명하기 쉬운 줄 아나…아니 이게 아닌데. 다시 바람이 살짝 부는 바람에 풍겨오는 냄새에 다시 속이 뒤틀렸다. 자기가 벌려놓은 판이면 깨끗이 뒷정리를 하던가. 정말 처음엔 안 그렇던 사람이 왜 이렇게 변한 거냐고. 뭐 원래도 그리 다정다감한 편은 아니었지만.

잠깐. 변한 게 아닐 수도 있잖아. 원래 이런 사람인데…그걸 감추고 있다가 이제야 드러낼 수도 있는데. 갑자기 변한 걸까, 이제야 드러낸 걸까. 어쨌든 전자이든 후자이든 결과는 실망과 함께 느껴지는 배신감.

……어라? 그 남자와 나의 대화로 인해 뱀파이어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의 아군 한명을 참혹하게 ‘폭파’ 시킨 그 남자와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사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뱀파이어들의 눈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총 9명 중 한 명은 사망. 8명이 남았다. 즉 다시 말해서, 8쌍의 눈동자가 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런 비유는 좀 그렇지만, 내 앞에 서 있는 여덟 명의 뱀파이어들, 마치 신기한 곤충 한 마리를 발견해 이걸 어떻게 가지고 놀까 고민하는 어린아이들 같았다. 긴장을 타고 흐르는 침묵 속에 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원래 얌전한 성격이 아닌데다, 특히 이런 곤란한 장소에서는 더욱 더 그랬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 엄마 말에 의하면 교회에 갔을 때 그 엄숙한 분위기에 몸부림을 쳤다고 한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어서 고개만 살짝 돌리고 땅바닥을 보고 있었다. 휴, 언제까지나 키 큰 뱀파이어들을 올려다 볼 수도 없잖아. 빨리 키가 커야지, 원. 서러워서 살겠나. 그렇게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누군가 뒤에서 거세게 날 붙잡는 힘이 느껴졌다. 동시에, 목에 얇고도 서늘한 게 들어왔다. …칼?

이봐, 이건 반칙이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겨우 1mm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단도의 칼날에 정말 겁에 질려버렸다. 그나마 권총이나 그 ‘폭발물’이라는 종류의 무기가 아니라서 다행이군. 무서움에 덜덜 떨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생각했다.

 

“순순히 항복해.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그 아이를 죽인다는 말인가?”

 

날 인질삼아 잡은 뱀파이어가 말했는데, 목소리로 봐서는 아까 그 쌍둥이 같은 뱀파이어 중 한명인 것 같았다. 그 남자가 비웃으며 말하는 걸 듣는 순간 팔짱이라도 끼고 싶었지만 나를 붙잡은 힘에 의해, 또 날 억누르고 있는 무서움에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예상외의 반응이었는지 날 붙잡은 뱀파이어는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 남자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내뱉었다.

 

“하.”

 

어라? 당신, 지금 웃었어? 그 남자는 분명 웃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되어 있는데도. 겨우 요만큼 밖에 안 떨어져 있는 칼날에도 불구하고! 그래.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분명 저 남자는 미친 거라고.

 

“너에게 이 애가 중요하단 사실을 알고 있어.”

“…….”

 

그의 표정이 다시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오는가 싶더니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거만함, 가소로움이 뒤섞인 표정이랄까. 반면 옆에 서 있는 에밀리는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죽여.”

“뭐?”

날 잡은 여자 뱀파이어와 동시에 나도 놀라버렸다. 놀라기보다는 경악했다. 옆의 에밀리도 눈이 커진 채로 날 보고 있었다. 뒤에서 놀라는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죽여. 죽여도 된다고. 어차피 죽을 애니까.”

“…….”

 

어차피 죽을 애니까? 지금 뭐라고요? 내가 왜? 아니 그건 그렇고, 나 진짜 죽으면 어떡하지. 정말로 무서워졌다. 칼날이 조금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저 상태에서 내리쳐지면 안 되는데. 어, 내려…온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너무 무서웠다. 날카롭게 내려오는 칼날을 보며 질끈 눈을 감아버린 그 순간,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안 돼!!”

 

그 소리에 칼날이 멈칫했고-고작 1mm정도 떨어진 채 멈췄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정말로 죽을 뻔 했다-그만 긴장이 풀려버린 나는 꽉 붙잡은 힘이 아니었다면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 했다. 지금도 난 간신히 그 힘에 아등바등 매달린 채로 흐늘거리는 내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살그머니 눈을 뜨니 아직도 칼은 완벽하게 내 주위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난 <Safe Zone>을 원한다고……. 이런, 눈에도 힘이 풀려 버렸나보다. 다시 똑바로 눈을 뜨니 단도는 정확히 내 목이 아닌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아, 뱀파이어에게 갈비뼈쯤은 아무 문제도 아닌가보지?

“그 칼 내려 놔.”

 

단호한 목소리로 봐서는 아까 그 우두머리인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아줌마, 대장이 명령하면 듣는 거예요. 빨리 칼 저리 치워요.

 

“하지만 죽여도…”

“칼부터 내려 놔.”

“하지만…”

“당장.”

“…….”

 

이런 대화 속에서 초조한 건 나였다. 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이고 말겠다는 뱀파이어 아줌마와 안 된다는 뱀파이어 아저씨.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영화라도 보듯 재밌게 보고 있는 그 남자. 확 팝콘에다 꽂아버릴까 보다. 그렇게 조금 건방진 생각을 하자 마치 동의라도 하듯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반갑다. 그런데 나 죽게 생겼어.

 

“그 아이, 죽으면 안 돼.”

 

그 말에 여자가 의아하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게 느껴졌고 곧이어 못마땅한 중얼거림과 함께 내 눈앞에서 칼이 사라지는 게 보였다. 하아…다행이다. 아직 날 잡은 팔을 완전히 풀지는 않았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누그러져서 훨씬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었다.

긴장이 완전히 풀어지면서 흐느적거리던 나는 그 여자가 날 완전히 놓아주는 바람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 바람에 놀랐는지 그 여자가 흠칫했다. 아…지금은 체면이고 뭐고 다 없어. 진짜 죽을 것 같다. 아까 그 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정말로 무서웠는데.

“눈치는 여전하군.”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 남자가 말하자 쓰러져 있는 나로부터 뱀파이어들의 시선이 옮겨갔다. 하지만 끝까지 그 진한 보랏빛 눈의 여자는 날 불쌍히 여기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동정이 아니라 사과라고. 죽일 뻔해서 미안해. 아니, 이건 좀 이상한데. 어쨌든 죽여서 미안해, 보다는 낫겠지.

“안 그래?”

“입 닥쳐.”

“뭐…여전하네.”

 

그 남자가 쿡쿡, 하며 웃었는데 뱀파이어들은 기분 나쁜 눈치가 역력했다. 특히 그 남자와 말을 주고받고 있는 대장처럼 보이는 뱀파이어. 아까 날 죽이지 말라고 했던 뱀파이어다. 어, 그러면 생명의 은인이 되시는 건가.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스스로 너무 웃겨서 소리 죽여 웃었다.

 

“…저 애, 카스올리, 라고 했나?”

“그래. 왜, 자네가 관심이라도 있나?”

“…내 예상이 맞는다면…….”

“아마 맞을 거야.”

 

그 남자가 다시 쿡쿡, 소리죽여 웃었는데 그에 반해 옆의 에밀리는 정말 잔뜩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자네가 죽이라고 한 이유도 알 것 같군.”

“물론. 그러시겠지.”

“…이제야 열쇠를 찾았군.”

“글쎄.”

 

열쇠? 내가 열쇠라고? 무슨 열쇠? 난 열쇠 고리도 걸 수 없고 자물쇠를 따는 발 따위는 없단 말이야.

 

“글쎄? 글쎄 라니?”

“내가 그리 쉽게 내줄 리가 있겠나?”

 

상대의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는 건지, 그가 이번엔 조금 큰 소리로 웃었다.

 

“안 돼!!”

“이미 늦었어.”

 

그 남자의 말과 동시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허공에 떠 있는 느낌.

 

“잡아!!!”

“…다음에 볼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군. 이미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가 살짝 손을 흔들었고-작별 인사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작동’하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시야가 지우개로 박박 지우듯이 까맣게 없어지는 것과 함께 그 남자가 친절하게도 날려주는 마지막 멘트가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주위에서 뜨거운 열이 느껴졌고, 마지막으로…

충격을 받은 것 같은 에밀리가 보였다.

 

 

-

 

 

오랫동안 암흑이 지속되었다. 침묵 속의 암흑이지만 나는 직감으로 그 남자와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물론 그리 편안한 이동은 아니라는 사실도. 보통 ‘암흑’, ‘고요’, ‘침묵’ 등의 단어를 떠올린다면 차갑고 냉정한 느낌을 먼저 받을 텐데, 지금 나는 그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체험 학습을 하고 있었다.

더워서 죽을 것 같았다! 마치 천천히 오븐에 구워지는 느낌이랄까, 바싹 구워질 만큼 높은 온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온도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더위를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잘 타는 편인 나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시원함을 전달해 줄 어느 매체도 없는 상황에서 혼자서 더위를 참아야만 했다.

마침내 이 끔찍한 온도를 무시하기로 결정하고 1, 2분쯤이 흘렀다. 이제는 분명 어딘가에 그 남자가 나와 같이 이 공간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냉기. 오오, 이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 냉기가 반갑기는 처음이다. 에밀리도 같이 왔으면 두 배로 시원할…아니, 이게 아닌데. 뱀파이어들은 냉장고나 에어컨이 아니잖아.

“카스올리.”

“…….”

 

어디선가 불쑥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깜짝 놀랐지만 일부러 내색하지 않으려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 남자는 알아차렸을 테지만. 평소 같으면 소리 좀 내고 다니라고 면박을 줄 텐데.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어서 조금은 아쉬웠다.

 

“네 운명을 원망해라.”

“그게 무슨 뜻인데요?”

 

무척 화가 나 있어서 좀 삐딱하게 대꾸했다. 미안, 어쩔 수 없었어, 라는 말이 먼저 나와야 하는 거 아니야? 솔직히 그가 배신자라고는 생각되었지만, 그래도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온 사람-아니 뱀파이어라고 해야 하나-이었기에 한 구석에 기대는 걸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씩 웃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은 설마 텔레파시인가. 순간 엉뚱한 생각이 들어 속으로만 킥킥거리고 있는데 문득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보았던 채셔 고양이가 생각났다. 그 남자와 채셔 고양이라… 묘하게 어울리네. 그 남자가 채셔 고양이처럼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는 모습을 상상해 봤는데 괜한 상상이었다. 저 남자가 그렇게 웃을 리가 없잖아.

 

“…너 죽어도 괜찮아?”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죽어도 괜찮아? 죽이기 전에 양해를 구하는 사람도 있나? 잘도 괜찮겠다.

 

“말이라고 해요? 죽어도 괜찮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나 여기서 나가기 전엔 절대 안 죽을 거라고요. 당신이 운명이니 어쩌니 하면서 주절대도 난 절대, 절대로 죽을 생각 요만큼도 없거든요? 더군다나 당신한테는 절대로 안 죽을 거야.”

 

갑자기 짜증과 스트레스가 폭발하는 바람에 그 남자에게 쏘아붙였다. 정말로 난…여기서 절대 죽을 생각 없다고……. 남의 목숨 가지고 그렇게 장난하지 마.

 

“…그래, 알았어.”

 

뜻밖의 체념하는 투의 대답에 조금 의외여서 놀랐지만, 그래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저 남자가 하는 말에는 도무지 믿음이 안 가!

 

“엇.”

 

갑자기 무언가 얼굴에 정면으로 불어 닥쳤다. 부드럽지만 동시에 거칠었다. 뭐야……. 바람인 것 같은데? 설마 독가스? 머리가 띵 하고 어지러웠다. 이것 봐. 이런 식으로 치사하게 죽이면 안 되는 거야. 그리고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줄 알아? …라고 생각했지만 그 공기는 내 의지로 어쩔 수 없는 것이었기에 내 몸 속으로 침투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마침내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도로 올리려고 노력했지만 돌덩이라도 올렸는지 천근만근 무거운 탓에 올리지 못하고 축 내려뜨렸다. 동시에 온몸에 힘이 빠진 것처럼 몸이 축 늘어졌다.

편하다. 편한 걸 보니 죽는 건 아닌가보다. 정말 편하다. 마치 자는 것 같다. 아니, 자고 있는 걸까? 의식의 잔재가 점점 바람에 쓸려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무의식에 가까워진 내 정신세계에 무언가 들려왔다. 카스올리, 라고 부르는 키아크라의 소리일까. 아니면 그저 웅웅거리는 용의 소리일까. 어쩌면 그 남자가 미안해, 라고 하는 소리일지도. 하지만 기대는 하지 않았다.

 

-

 

 

덥다. 뜨겁다. 덥다. 뜨겁다. 덥다. 뜨겁……. 후끈거리는 뜨거운 공기가 목으로, 코로 넘어가며 폐를 덥혔다. 뜨거운 공기가 채 식지 않은 채 온몸을 돌자 정신이 조금 들었다. 여긴 어디지? 조금 가벼워진 눈꺼풀을 살짝 들어올렸다. 에밀리가 준 진통제의 효과가 다 되어 가는지, 아사츠유에게 얻어맞은 고통이 슬쩍 되살아나 아프게 몸을 찔렀다.

그런데 반쯤 열린 눈으로 보이는 풍경은…우리 집도, 기숙사처럼 생긴 그 건물도, 그 건물의 식당도, 강당도, 뒷마당도, 어느 무엇도 아니었다. 적어도 익숙한 풍경은 아니었다. 눈을 완전히 뜨자 내가 있는 곳이 완벽하게 눈에 들어왔다.

…사막? 놀란 나머지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내가 앉아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조금 더 정신을 차리자 나는 내가 무언가 딱딱하고 거친 것에 결박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뭐야, 이 사막에 도망칠 곳이 어디 있다고.

그나저나 죽지는 않았네. 하하.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웃음이 나올까. 나도 내가 신기하다. 그럼 그 바람은 독가스가 아니라 수면제였나 보다. 자꾸만 나오는 헛웃음을 그치고 내 상태를 체크해 보았다. 별로 좋은 것도, 좋을 것도 없지만.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웠다. 목도 조금 마른 것 같고. 물은 있으려나. 에밀리가 뱀파이어는 물 못 만든 댔는데. 배도 고프잖아. 그러면 내가 지금 어디 묶여 있는 거지? 고개를 들자 바위가 보였다. 아하, 버섯 바위에 잘도 묶어 놨구나. 뒤로 묶인 손목이 아파왔다. 이거 어떻게 푸는 거지? 그 남자는 정말로 멍청한 것 같다. 젠장. 이 사막에 도망칠 데가 어디 있다고 이리 묶어 놓은 거야.

한참을 낑낑거리던 나는 결박을 푸는 것을 금세 포기해버리고는 묶이지 않은 발로-참 친절도 하군-모래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매듭을 푸는 것 보다는 오래 갔지만, 곧이어 모래장난도 끝이 났다. 아, 심심해. 더워. 짜증나. 그럼 그 남자는 도대체 어디에서 뭘 하는 거야? 여기에 날 내버려두고 알아서 나와라, 아님 죽든가. 이러고 있는 거 아냐?

주위를 둘러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검은색 실루엣이 보였다. 저 남자…검은색 옷을 입고 덥지도 않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제야 난 내 옷차림을 살펴보고 옷차림이 조금 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헐렁한 흰색 티와 바지…흰색은 여전한데 긴소매로 변해있었다. 하긴, 길게 바뀐 게 오히려 다행이겠다. 이런 데서 반소매면 타 죽을 테니까.

내가 깨어났다는 걸 느꼈는지, 아니면 심심해, 더워, 짜증나, 라고 투덜거리는 내 소리를 들었는지 그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떨어진 거리가 꽤 되는지, 그 남자가 작게 보였다.

 

“뭐에요.”

 

묵묵부답. 작아서 못 들은 걸까? 아님 그냥 모른 척? 전자든 후자든 짜증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딴 짓 하지 말라고요! 짜증난다고! 이것 좀 풀어요! 아파 죽겠네.”

그래도 묵묵부답. 속으로부터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어떻게든 혼자 화를 참아보려고 이를 악물고 화를 식히고 있는데, 별안간 그 남자의 목소리가 앞에서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놀라버리고 말았다.

 

“카스올리.”

 

왜요, 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그가 피식 웃었는데 생각했던 만큼 기분 나쁘지 않았다.

 

“속여서 미안해.”

“뭘 속여요?”

“나 원래부터 너 죽이려고 데려온 거야.”

“…….”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듣는 거랑은 달랐다. 직접 듣는 게 훨씬 더 충격적이고, 잔인하게 들려왔다. 참혹하게 살해당한 이름 모를 뱀파이어의 시체가 이유 없이 다시 떠올랐다. 기분 나빠.

 

“어느 한 사람이 죽어야 전쟁이 끝난다면, 그 사람은 희생해야만 하는 거야.”

 

언뜻 들으면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실은 이제 그만 죽어줘, 를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나라고요? 그래서 죽이려고요?”

“…응.”

 

치사한 놈. 비열한 놈. 파렴치한 놈. 잔인한 놈……생각나는 말이란 말은 죄다 속으로 퍼붓고 있었다.

 

“근데 에밀리는 왜 놓고 왔어요?”

“에밀리?”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문득 생각나서 물어본 건데, 덕분에 시간을 끌 수 있게 되었다.

 

“걔는 내가 너 죽이려는 거 몰라. 넨시도 마찬가지고.”

아 그러세요, 원망을 어찌 들으려고? 아니다. 원망도 안 하겠구나, 걔는.

 

툭.

 

갑자기 무언가 붉은 것이 눈앞에서 툭 떨어졌다. 다시 한 번 툭. 내 앞에-내 다리가 절대 닿지 못할 만큼의 안전거리를 확보하고-앉은 그 남자의 왼쪽 팔에서 붉은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남자가 아픈지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왜 갑자기 피가 난대? 놀라서 입을 다물고 있는 나와 아파서인지 입을 다물고 있는 그 남자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역시 너무…과했나.”

“뭐가요?”

“…….”

 

침묵으로 답하는 그 남자에게 답답한 심정이 들었다. 아오, 답답해. 무슨 말을 해야 될 거 아냐! 잠깐. 왼쪽 팔? 왼쪽? 뭔가 생각날 것 같기도 하고…….

아, 맞다. 흉터. 그 남자가 따라오라고 한 그 때, 왼쪽 팔에 무시무시한 흉터가 보였었는데. 흉터에서 왜 피가 나지?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는데. 딱지를 떼서 피가 나는 경우는 흔히 봤지만-대부분 내 무릎에서-그저 자국일 뿐인 흉터에서 피가 다시 나는 경우는 한 번도 못 봤다.

“으윽…….”

 

그 남자가 신음소리와 함께 왼쪽 팔을 오른손으로 쥐자 검은 소매 사이로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아, 치료는 내 앞에서 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이런 방대한 양의 피를 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고. 장래희망이 의사라면 모를까.

“너무…많이 썼어. 항상 그게 문제지.”

 

거의 독백에 가깝다시피 그가 중얼거렸는데 그 와중에도 피는 끊임없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엄청 아플 텐데. 칼에 요만큼 베여도 장난 아닌데…아니면 내가 아픔을 과하게 느끼는 건가? 마침내 그는 죽기 전에 치료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는지 일어서서 어디론가 비틀거리며 사라졌다. 그 전에, 나에게 허튼 생각 따위는 하지 말라고 하는 친절한 경고도 물론 잊지 않았다. (정확히 그는 나에게 “허튼 생각 따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널 묶어 놓은 건 그냥 줄이 아니니까. 그리고 난 네가 네 신체 중 일부를 잃어버려도 치료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어쨌든 한동안은.” 이라고 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선명한 발자국 대신 선명한 혈흔이 남았다.

 

“…….”

 

혹시 뱀파이어의 피는 색깔이 점점 변하지 않을까, 하고 엉뚱한 호기심을 품은 채 내 앞에 떨어진 핏자국을 보고 있는데 문득 모래 색깔이 황금색 계열이 아닌 초록색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 초록색이라고? 와, 모래가 초록색이니까 모래보다는 풀 같다, 풀.

신기해서 만져보고 싶어서 손을 내밀려는 순간 손목이 욱신거렸다. 아 맞아. 나 결박당해 있었지. 그것도 엄청 세게. 아쉽지만 난 초록색 모래를 발로 건드리며 노는 것으로 대리 만족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거 정말 풀 같다? 살랑살랑.

잠깐. 이거 풀 같은 모래가 아니라 풀이잖아. 그냥 완전한 식물이라고! 어느 새 5cm정도 자란 풀에 조금 묻혀있는 내 신발을 보고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도 풀, 저기도 풀. 내 주위 반경 1m까지는 전부 풀이었다. 그리고 그 밖은 여전히 노랗게, 하얗게 빛나고 있는 뜨거운 사막.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려보다 내 오른쪽으로 풀이 길게 줄을 선 것처럼 어딘가를 향해 나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초록색 길-이번엔 <오즈의 마법사>의 ‘황금 길’이 생각나 버린 바람에 혼자서 쿡쿡 웃었다-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았다.

 

“!!”

 

사람이다. 그것도 내 또래의 남자애. 보는 순간 눈이 마주쳐버린 나는 이도 저도 못하고 침묵을 지키며 묶인 채로 그 애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금 긴 머리에 특이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입었다고 하기엔 좀 그렇고, 차라리 두르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았다. 엄청나게 커다란 스카프를 둘둘 감으면 저런 옷이 나올까나.

손에는 투명한 무언가 들려 있었는데-그 남자애는 날 보고 있는 채로 뚜껑을 닫고 있었다-아마도 그게 풀을 자라나게 한 원인인 것 같았다.

그렇게 서로를 빤히 쳐다보는 동안-그 남자애는 한마디도 안하고 날 무덤덤하게 쳐다봤고 나도 마찬가지였다-나는 내가 얼마나 웃기게 보일지 깨달았다. 젠장. 이런 모습으로 앉아 있어야 하다니. 마침내 나는 용기를 내어 그 남자애에게 말을 걸었다.

 

“이것 좀 풀어봐.”

 

에? 이것 좀 풀어봐? 간신히 건넨 첫 마디가 이것 좀 풀어봐, 라니. 좀 멍청하다고도 생각되었지만, 어쨌든 불쌍한 내 손목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므로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

 

왜 대답이 없지? 내 말이 너무 작았나? 아니면 못 알아들은 걸까? 어이, 이봐. 그렇게 멍 때리고 있지만 말고 이 불쌍한 아이를 구제해 달란 말이다!

 

“…내 말, 들려?”

“…….”

 

분명 눈은 똑바로 뜨고 있으니 내 입이 움직이는 걸 보았을 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남자애는 조금 고개를 끄덕일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아오, 확 소리 질러 버릴까보다. 그 남자가 내 입을 막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해 버릴 테다.

 

“들리면 와서 이것 좀 풀어줘-.”

 

그 남자애는 잠시 망설이는 듯 멈칫하다가 조금씩 내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어이, 빨리 와. 그 남자가 자기를 치료하기 전에 튀어야 된다고. 난 날 죽일 사람이랑 같이 있고 싶은 생각은 겨자씨만큼도 없어. 누군 속이 타서 기다리는데, 왜 저렇게 여유 있게 걸어오는 건지. 이봐, 난 맹수가 아니라고. 널 잡아먹지 않아. 조심할 필요 따윈 없다고!

그렇게 속으로 온갖 말을 다 하고 있는데 어느 새 그 남자애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엇, 깜짝이야. 너 굉장히 조용하구나, 말도 안하고.

 

“너 이름이 뭐야?”

“…….”

 

잠시 조용히 있다가 살짝 고개를 젓는 그 남자애의 모습에 답답해졌다. 말을 못하는 거야, 뭐야.

 

“이름 없어?”

“…….”

 

그 남자애가 침울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난 이름 묻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구조를 요청했다.

 

“이것 좀 풀어줘.”

“…….”

 

애원하다시피 말하자 그 남자애가 내 뒤로 조금씩 이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옳지, 잘한다. 빨리 좀 풀어봐. 초조하게 모래 언덕 너머를 보고 있는 나와 달리, 그 남자애는 날 결박한 밧줄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나고, 드디어 그 남자애가 밧줄에 손을 대는 게 느껴졌다.

 

“…빨리 풀어 줘.”

 

내가 만약 저 남자애라면, 진짜로 성질 급한 애다,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핫핫. 밧줄이 점점 느슨해지면서 손목의 통증도 줄어들었다. 오오, 조금만 더 빨리 해 봐.

 

쉭-

 

순식간에 밧줄이 풀리면서 동시에 콜라캔에서 김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옆으로 무언가 스쳐지나갔다. 차가운 무언가.

 

“……!”

 

밧줄이 풀렸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남자애가 쥐고 있는 건,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날 묶고 있던 축 늘어진 밧줄이 아니라 온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발악을 하는 뱀 한 마리였다.

아, 그럼 아까 날 스쳐지나가던 것이… 바로 저 뱀? 나 같으면 벌써 뱀 따위는 손에서 놓고 전력질주 했을 텐데, 그 남자애는 침착하게 뱀이 자신이나 나를 물지 않도록 꼭 쥐고서는 나와 뱀을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마치 너 이런 거 알고 있었어? 라는 듯이. 물론 나야 몰랐지. 그 남자가 <보통 밧줄>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그게 그런 뜻인지는 몰랐어. 미안, 내가 머리가 좀 안돌아가.

툭.

그 남자애의 손에서 죽어버린 뱀이 떨어져 나왔다. 순간 오싹하며 몸이 떨렸다. 그 남자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셈이었다. 내가 직접 밧줄을 풀었더라면, 침착할 줄 모르고 덜렁대는 바람에 이미 물렸을지도 모르니까. 앞으로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군. 이 세계를 어떻게든 빠져나가는 게 관건이지만.

“고마워.”

“…….”

 

물론 이번에도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 남자애가 기분 좋게 씩 웃는 것을 보고 조금 마음이 놓였다. 마침내 나는 오랫동안 굳어있었던 몸을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손목과 팔이 조금 뻐근하긴 했지만, 이 정도 쯤이야.

 

“…너 이름이 뭐야?”

 

일어선 나는 그 남자애를 마주보며 물었다.

 

“…….”

 

그 남자애는 대답 대신 내게 무언가 내밀었다. 작은 병…삼각뿔 모양으로 생긴 그 병에는 분홍빛 액체가 찰랑거리며 반쯤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병위에는 작은 고리가 달려있었는데, 그 고리로 마치 목걸이같이 줄이 달려 있었다. 음, 그러면 이게 바로 풀을 자라나게 한 마법인가?

한 번 시험해 보려고 뚜껑을 열려고 하는데, 그 남자애가 내 손을 막으며 도로 뚜껑을 꽉 닫았다. 마치 열지 말라는 듯이 손사래까지 살짝 치면서. 무슨 뜻이지?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데, 그 남자애가 그 병을 내 목에 걸어주었다. 씽긋 웃으면서.

 

“…야!”

 

어이, 이봐. 이게 무슨 짓이야. 몹시 당황스러워진 나는 그 남자애로부터 본능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

“응?”

 

그 남자애가 손짓을 했다. 가까이 오라는 건가? 조금씩 가까이 다가갔더니 마침내 그 남자애와 나 사이의 거리가 한 발짝 쯤 될 때 그 남자애의 손짓이 멈췄다. 그 남자애가 손을 뻗어 내 목에 걸린 작은 병을 들어서 내 눈앞에 가져가 댔다. 처음엔 무슨 짓이야, 라는 눈빛으로 그 남자애를 쏘아보다가 결국 그 작은 삼각뿔 모양의 병을 받아들고 자세히 살폈다.

무언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글씨…같은데.

 

아우리스.

 

“…이게 네 이름이야?”

 

병 표면에서 아우리스, 라고 새겨진 이름을 보고 내가 묻자 그 남자에는 웃음으로 답했다. 그리고 그 병을 가리키며 무언가 열심히 설명을 했다. 손짓으로. 그 남자애가 똑같은 손짓을 서너 번쯤 반복한 것 같았지만, 여전히 나는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 남자애는 전혀 답답한 표정을 짓지 않은 채 설명하고, 또 손짓했다. 마침내 그 손짓이 열 네댓 번이나 반복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어렴풋이 그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거 쓰지 말라고?”

 

그 남자애는 고개를 끄덕이는 듯하다 다시 흔들었다. 아, 정확히 그 뜻이 아닌가보다.

 

“글씨로 써 주면 안 돼?”

 

그 남자애, 그러니깐 아우리스가 다시 손짓을 하려 하자 내가 제지하듯이 물었다. 그러자 잠깐 고개를 젓더니, 슬픈 표정으로 다가와서 내 귀에다 대고 작은, 엄청 작은 소리로 무언가 얘기했다.

 

“네가 정말로 그걸 쓸 수 있을 때까지, 쓰지 마.”

 

…순간적으로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애가 말을 할 거라고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들으니 전혀 달랐다. 아우리스. 그의 목소리……. 막 생겨난 작은 이파리에 목소리가 있다면 바로 이런 목소리일 것만 같았다. 슬프지만 맑게 울리는 목소리. 왜 슬픈 거지?

잠깐……뭐야, 말 할 수 있잖아.

 

“너, 왜 말 안 해? 할 수 있잖아.”

 

솔직히 난 걔가 몇 살인지조차 몰랐지만, 아무튼 내 또래로 보여서 편한 대로 말 놓기로 했다. 내가 묻자, 아우리스가 정말로, 진심으로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젓더니 어서 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손끝이 살짝 희미해진 것도 같다. 환상인가?

 

“알았어. 갈게. 고마워.”

 

일단 여기에서 벗어나야 하기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충분히 그곳에서 멀어졌다고 생각되는 순간,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

 

저 멀리 거의 점으로 찍혀있는 바위 밑에는, 자라나있던 풀과 함께 아우리스도 사라져 있었다. 흔적도 없이.

 

 

15.

 

 

 

그 애는 환영이었던가. 고개를 갸웃, 하고 흔들고 뒤를 보고 있었던 시선을 다시 앞으로 끌어당겼다.

 

예전부터 사하라 같은 곳은 한 번쯤 와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갑작스럽게 이런 곳으로 떨어질 줄은, 정말 꿈도 꾸지 않았다. 만약 사하라 사막으로 간다고 해도 준비는 하고 갔을 게 뻔하다. 당연하지. 아무리 그렇게 안 보인다고 해도, 나 은근히 준비성 있는 여자다.

 

허튼 생각 하지 말라고? 그러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심리지.

 

친구들이 말하던 ‘남자 같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발을 내딛었다. 사박사박 거리는 소리와 함께 모래가 주위로 흩어졌다. 사실 자신 같은 거 없었다. 자신을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기는, 내가 전혀 모르는 곳이다. 차라리 그 남자가 내게 ‘여긴 사하라니까 섣부른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라거나 ‘여기는 그레이트샌디 사막이니까 허튼 생각하지 마.’ 라고 말해줬다면, 그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

 

사박사박사박사박사박사박사박사박.

 

이 세계에서는 이제 이 소리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잠이라도 든 듯 용은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걷고 걷고 걷고. 계속 걸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남는 건 사박거리는 발소리가 전부. 연한 황토색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푸욱 푸욱 내뱉었다.

 

계속 이렇게 걷다보면, 모래가 되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런데 뭐가 나오기는 할까? 그렇게 생각하자 픽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러다가 그 남자가 먼저 내 앞에 나타나서 나를 죽일지도 모르겠다. 그 남자 정말로 나를 죽일 것 같았는데, 말이다. 내 손목을 묶어 놓았던 것이 뱀이었다면, 그건 정말로 나를 죽이려고 한 게 아니었을까.

 

“…에이씨.”

 

왜 갑자기 이런 처지가 됐는지 잘 모르겠다.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 자체를 하고 싶지가 않다. 배신이라는 거. 친구들한테도 한 당해 봤는데. 이름도 모르는 사람한테. 그것도 남자한테 배신이나 당하고 있으니. 아 너 조금 한심해. 너무 자연스럽게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혼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보니, 꼭 내가 미친 것 같아서 조금은 씁쓸해졌다. 하지만 이런 걸로 포기하면 카스올리가 아니지. 내가 누군데!! 괜히 화가 나는 바람에 발로 모래를 휙 걷어찼다. 신발 안으로 모래가 들어올까 봐 세게 걷어차지는 못하고, 그냥 휙 찼다. 훅 하고 연기처럼 흩어지는 모래에 한숨이 새어나왔다.

 

“…넨시랑 에밀리는 뭐하려나.”

 

그 사람들은 그 남자가 나 여기로 보낸 거 모르고 있을 텐데. 이제 막 알았을 텐데. …에밀리는 화를 냈을까? 그 남자한테? 넨시는, 울었을까? 그 남자를 보면서? 그 남자는, 뭐라고 했을까? 그 사람들한테. 왠지 이런 생각들밖에 할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 그냥 화를 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없어진 것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은 그 남자한테 어떠한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잘 했어, 이런 거 말고.

 

황금색 지평선은 점점 붉어지는 것 같았다. 분명 더웠는데, 목이 마르지는 않았다. 아까 아우리스를 만난 곳에서는 물기가 너무 가득해서, 오히려 축축했는데.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걸까.

 

더 이상 할 수 있는 혼잣말들도 줄어들게 되었다. 기억나는 노래 가사도 없다. 노래 가사가 떠올라도 그 음정이 생각나지 않는다. 여기에 온 후로 내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기분이다. 이런 느낌은 언제나 들었었는데, 그 곳에서는 맨날 어떤 일에 휘말리다 보니까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 사막에서 내 동반자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

 

또 한참동안 아무런 생각 없이 이 모래 사이를 걷고 있을 때, 뭔가 바스락 거리는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멈춰있는 이 순간에도 사박사박 거리는 그 발소리와, 옷이 스치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그 소리를 알아채자마자 귓속에서 용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조금 더 걸어보라는 것 같아서 좀 더 걸어보기로 했다.

 

혹시 그 남자인가?

 

그냥 휙 하고 스쳐버리는 생각이었지만 발걸음은 멈춘 지 오래였다. …에이 설마. 생각하지 말자. 고개를 휘휘 젓고서는 계속 계속 걸어갔다.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용이 말한 것처럼, 좀 걸어봐야 될 것 같았다.

 

한참동안 걸으니, 역시, 힘든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목이 마른 것은 아니었다. 아까의 축축함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견뎌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다리가 아픈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꼭 성장통이라도 온 듯이 다리가 아릿하게 아파왔다. 내가 애도 아니고 무슨 성장통이람. 머리도 뱅글뱅글 도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아우 진짜…”

중얼거리듯 내뱉은 목소리가 끓는 것처럼 뜨거웠다. 헐 말하지 말 걸. 말하고 나니까 목이 말라오는데? 헐 망했어… 엉엉엉 소리 내서 울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목이 찢어질지도 몰라서 그냥 침만 삼키며 사막을 걸어갔다.

 

후우, 후우, 하고 숨이 내뱉어졌다. 들이키는 숨보다 내뱉어지는 숨이 훨씬 더 많아서 더 힘들었다. 심호흡. 심호흡. 우하우하.

 

저 멀리에서 초록빛…무언가 보이는 듯 했다. 아우리스가 있는 곳일까? 사막보다는, 차라리 그곳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칠 듯이 축축하고, 미쳐버릴 것처럼 습기가 많은 곳이었지만, 습기 하나 없이 건조하고, 생명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이런 곳보다는 그런 곳이 훨씬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계속 계속 계속. 적어도 ‘내’ 세계에만 가득한 사박 소리가 끝난 건, 내가 풀에 발을 디뎠을 때다. 발목에 닿아오는 축축함에 엉? 이라고 중얼거리며 아래를 보았는데, 발목을 감싸고 있는 것이 풀들이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어어? 라고 다시 내뱉었다. 자신의 발목에 느껴지는 이 풀이. 어쩌면 이 감각 전부가 신기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주저앉아 그 풀을 손으로 뜯기까지 했다.

 

“…진짜로, 풀이다.”

 

모래가 아닌, 다른 것을 보아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얼마나, 환희에 가득 차있었던지. 우와, 우와, 라고 계속 내뱉으며 그 풀을 계속 만져보았다. 세상에, 이게 꿈이라니?! 몇 십분. 어쩌면 몇 시간일지도 모르는 그 시간동안 나는, 저 사막을 걷고 있었던 거다. 혹시? 라고 생각하며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연두색 풀꽃 하나를 경계선으로, 초록색이 이 세계의 전부였다. 뒤만 보면, 아직도 해가 쬐이고 있는 사막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여긴 또 어디야.”

 

환희에 약 5분 동안 들떠 있다가 그 기분이 가라앉았을 때에 든 의문은 저거, 였다. 여긴 또 어디 다냐. 확실히, 아우리스와 만났던 곳과는 다른 곳이었다. 습기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축축한 것도 아니었으며, 훨씬 생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주변에 있는 큰 나무들은 마치 요정들이 나와서 랄랄라 거리며 노래를 부를 것 같았다.

 

“……….”

 

허허. 나보고 뭐 어쩌라는 거지. 매일이 RPG(Role Playing Game) 같았다. 아싸, 드디어 새로운 맵을 발견했어!!!! 라며 룰루랄라 날뛰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면 여기는 어디? 이런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막 돌아다니다보면 다시 막히고, 결국은 공략 법을 찾아 나서겠지…예전에 친했던 남자아이와 내기를 하는 바람에 하루에 6시간 게임기를 붙잡고 있던 게 떠올라서 웃음이 터졌다.

 

“으아악!!!”

 

아니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임?!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엎어진 나는 에이 씨, 라고 중얼거리며 바지를 털었다. 물방울이 툭툭 거리며 풀에 떨어지는 소리가 예뻐서 잠시 멍을 때리는데, 마치 자기 존재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다시 비명이 들려왔다. 분명 높긴 하지만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낮은 목소리가, 남자였다.

 

그 비명소리는 그 후로도 3번 정도 반복 되었고, 그 시간동안 나는 도대체 이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지 이리저리 찾아다녔다. 한참 후에 찾은 그 비명의 주인공은, 갈색이 미묘하게 섞인 짙은 노란색의 어깨까지 오는 머리의 남자아이였다. 꼴사납게 엎어진 포즈를 한 그 남자아이는 내 발 아래에서 부서진 풀들을 눈치 챈 건지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너 누…으아악!!”

 

내 신원을 마저 묻기도 전에 그 남자아이는 갑자기 더 뒤로 물러섰다. 엉? 뭐지? 혼자서 원맨쇼 하는 것 같은 그 남자아이를 바라보다가 남자아이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이건 뱀인가? 연한 노란색의 파충류…라고 하기에도 뭐한 어떤 생물이 그르릉 거리는 소리를 내며 남자아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 눈이 있는지 조차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뭐야 이게?”

“뭐, 뭐, 뭐, 뭐긴, 용이잖아.”

 

이게 용이라고? 말도 안 돼! 도대체 얘가 뭔데 이렇게 벌벌 떠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남자아이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용…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용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손을 뻗었다. 뭔가 꼭 눈치를 보는 것처럼 그 용은 그르릉 거리다가 내 손으로 기어왔고, 그 남자아이는 헐? 이라는 표정으로 나와 그 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 뭐야?”

“너랑 똑같은 나이로 보이는 여자앤데 뭐.”

너 좀 이상하다. 이제 처음 만난 사람인데, 세 번째로 하는 말이 저거라니. 뭔가 처음 만난 사람치고는 굉장히 낯익다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미묘했다. 그 남자아이는 굉장히 멍한 표정을 짓고만 있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지를 탈탈 털고 나를 보는데, 나보다 한 1.5cm 커 보였다. 생긴 건 나보다 더 예쁘게 생겨놓고…아 괜히 우울해지네.

 

“…너 이름 뭐야?”

“…우와 이렇게 뜬금없이 통성명을 하게 되는 거야?”

“그렇지 않겠어?”

 

어색함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우리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뭐냐고 이 어색하지 않은 거리는. 보통 이런 상황에서라면. 특히 여자와 남자라면 어색한 게 정상 아니던가. 아 역시 뱀파이어란…이라며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 나는, 그 남자아이가 먼저 이름을 밝히자 얼떨결에 같이 이름을 말해버리고 말았다.

 

“아이스츠메라?”

“응. 아이스츠메라. 좀 길지?”

“…좀 기네. 난 짧잖아. 얼마나 좋냐고. 카스올리.”

“음. 좋긴 하다.”

 

그 남자아이는 나보다 더 예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또 괜히 우울해지네…흑흑. 이라고 생각한 나는 내 손에서 꾸물꾸물 대고 있는 용을 바라보았다. 아우 얜 또 왜 이렇게 귀엽대. 눈은 거의 보이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품을 하는 듯 입을 벌린 용에 뻑 가버린 나는 허어…하고 멍하니 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드는 생각에 아이스츠메라, 라는 그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난 사람한테 이런 말해서 미안한데.”

“응?”

“혹시 노란색 빛 띄는 보석 이름 알아?”

“엉?”

 

난 빨리 이 용의 이름을 지어버리고 싶어. 덧붙이자 아이스츠메라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왜 쟤는 계속 우울해지게 시리 웃고 난리야? 나도 예쁜 주제에…아 나보다 예쁘니까 저렇게 웃겠다는 건가. 정작 본인한테는 얘기하지 못한 채 끙끙거리고만 있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던 아이스츠메라는 아 이름 지어주라고? 라고 중얼거렸다.

 

“글쎄. 노란색이라. 호박? 금?”

“…아무리 그래도 용 이름에 금을 붙일 수는 없잖아.”

“호박은?”

“되겠냐?”

 

안 되겠지. 그건 나도 알아. 쿡쿡 웃으면서 아이스츠메라는 다시 생각에 들어갔다. 으음, 으음, 만 중얼거리던 아이스츠메라는 아아! 라며 딱하고 손가락을 맞부딪혔다. 어, 난 저거 안 되던데 쟤는 저거 되나보네. 온 숲을 울리는 맑은 소리를 나는 조금 부럽다고 생각했다.

 

“토파즈는 어때?”

“…그게 노란색이던가?”

“노란색이지! 토파즈. 괜찮지 않아?”

“…나쁘지는 않은데?”

 

야, 토파즈. 중얼거리듯 그 용을 톡 치자 금세 그릉, 하고 대답을 해왔다. 귓속에서도 용이 그릉, 하고 똑같이 말을 해서 누가 그렇게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상관이야 없었다. 토파즈. 토파즈. 중얼거리듯 3번을 내뱉자 용은 또 귀찮다는 듯 그릉, 하고 대답을 해왔다. 귀여워라. 작게 말하며 그 용의. 그러니까 토파즈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너 어디 가던 참이야?”

“아, 나? 나는 여기서 살거든.”

 

토파즈와 친하게 지내고 있던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아이스츠메라는 내가 묻자 금세 대답을 해왔다. 이런 숲에서 산다는 게 분명 부럽기는 했지만 그렇게 자랑할 건 아니었는데, 아이스츠메라는 자신이 이곳에서 산다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오오, 라고 중얼거리자 아이스츠메라는 금세 또 웃음을 터뜨렸다. 참 웃음이 많은 아이구나, 라고 나는 새삼 느꼈다.

“같이 갈래?”

“…같이 가도 괜찮아?”

 

난 너한테 적일지도 몰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저 웃음이 많고 착해 보이는 아이에게서 정색한 표정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말을 하지는 않았다. 쟤는 그냥 영원히 웃으라지. 아이스츠메라는 내가 저렇게 말하자 괜찮아, 라며 다시 웃었다. 저것 봐. 쟤는 그냥 영원히 웃으라지. 저런 사람의 정색한 표정은 보고 싶지 않았다. …넨시도 마찬가지였는데.

 

“같이 가자. 스승님도 좋아하실 거야.”

“…스승님이 계셔?”

“응. 계셔. 굉장히 미인이시지.”

 

미인이라고? 스승님 = 노인 이 아니었단 말이야? 어쩌면 조금 나이가 있으신 할머님에게 콩깍지가 쓰여서 미인이라고 말하는 건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할머님이면 어떻고 어린 여자아이면 어떨까 싶어서 그냥 넘어가도록 했다. 아이스츠메라는 우리 스승님이 얼마나 미인인데, 라고 말하며 다시 흐뭇하다는 듯 웃었다. 이런 곳에서 살다 보면, 저런 생각들로도 행복할 수 있을까? 괜히 기분이 묘해져버렸다.

 

“그럼 사양 않고 같이 가주지.”

“진짜? 고마워.”

“…고마워는 내 쪽에서 해야 하는 말이잖아.”

 

아 그런가? 무안하다는 듯이 뒤통수를 긁적이는 아이스츠메라를 보고 나 역시 웃어버렸다. 나랑 비슷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사용하는 어휘, 라거나 행동이 굉장히 어린아이 같았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애늙은이인가…나오려는 한숨을 참아내고 아이스츠메라를 바라보았다.

 

“가자.”

응.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스츠메라의 뒤를 따랐다. 결 좋은 노란 머리가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렸다. 한 번 만져보고 싶기는 했지만, 여자아이가 자기보다 키가 1.5cm 큰 남자아이의 머리를 만지고 있으면 그건 또 무슨 꼴인가 해서 그냥 만지지 않았다. 꼭 인형 머리 같아.

 

아이스츠메라를 따라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주변에 있는 요정 나무들은 훨씬 더 많아졌다. 우와 우와를 내뱉는 나를 흘끗 보고 편하게 웃은 그 남자아이는 신기해? 라고 물어왔다. 응, 이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어깨에 올려놓았던 용이 금세 그르릉, 하며 대답했다. 그 소리를 아이스츠메라 역시 들은 건지, 먼저 웃음을 터뜨린 건 그 아이였다.

 

“아직 멀었나?”

“좀만 더 가면…저기 있다!”

 

와아, 라며 즐거운 듯 웃는 아이스츠메라의 시선을 잘 따라가 보니, 마치 동화 빨간 모자에서 나오는 할머니의 오두막 같은, 그런 집이 보였다. 저런 집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저런 집이 진짜로 있단 말이야? 문을 열면 끼익, 하고 소리가 나는 나무집이 진짜로 있다고?

 

“…여기서 살아?”

“응. 아마 지금 스승님은 안 오셨을 거야.”

 

그렇게 대답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아이스츠메라는 그 집 앞으로 달려갔다.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빨리 들어와.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는 아이스츠메라의 친절을 무시할 수는 없어서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두 명이 같이 살아?”

“응. 나랑 스승님이랑.”

 

꽤 아기자기 한데? 하긴 좀 여성스러울 것 같기도 해.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계단이 눈에 띄었다. 여기 2층이었어? 분명 아이스츠메라에게 물었는데 돌아오는 건 저 안에서의 우당탕 소리였다.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그 쪽을 바라보는데 아이스츠메라는 아무 일도 아니야, 라며 담담하게 말해왔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야?

 

한참 후에 우당탕 소리의 괴성이 난 방에서 비실비실하게 기어 나온 아이스츠메라는 맨날 있는 일이니까 걱정할 것 없어, 라며 또 웃었다. 아니 얘는 웃어야 할 때랑 안 웃어야 할 때랑 구별을 못 하나 봐. 머리 한 쪽이 모자란가? 아이스츠메라는 뭐 마실래? 라며 찬장을 열었다. 찬장을 열었을 때 그릇이 우르르 떨어지지를 않아서 굉장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스승님은 어떠신 분이야?”

“아까 얘기했잖아. 미인이시라니까.”

 

…네 말은 왠지 믿을 수가 없어. 덧붙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저 애가 굉장히 충격을 받을 것 같아서 말하지는 않았다. 스승님이라는 사람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려나. 으음, 으음, 이라고 중얼거리며 아이스츠메라가 내 앞에 놓아준 잔을 집어 들었다. 스승님이란 사람도 곧 오는 것 같던데 이렇게 나한테 잔을 건네줘도 되는 건가.

 

“이 컵 나한테 그냥 줘도 돼?”

“걱정하지 마. 내가 이런 거 많이 깨는 바람에 스승님이 많이 사놓으셨거든.”

 

난 굉장히 네가 걱정 돼. 이를 어쩌면 좋니. 오늘 처음 본 사람한테 이런 생각하면 안 되는데. 뒷머리를 긁적이고 아이스츠메라가 내 반대편에 앉아서 차를 마시는 걸 멍하니 보고 있었다. 아이스츠메라가 왜 안 마셔? 라고 먼저 물어와서, 얼떨결에 한 모금을 마시고 말았다. 레모네이드인가.

 

“손님이니?”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높은 미성의 여자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뒤에서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벌떡 일어난 내 반응에 놀란 아이스츠메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셨어요 스승님?”

“그래 왔다. 미리 와 있었구나.”

 

어머 저 언니 분은 누구시지? 저 언니가 스승님이야? 뱀파이어는 늙지도 않나봐? …아 안 늙는구나. 600살까지 사는데 늙으면 큰일 나겠구나… 혼자서 아아, 라며 이해하고 있는데, 잠시 정신을 차려보니 그 언니가…그 여자가 나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요, 나 이상한 사람 아니거든요. 저 이상한 뱀파이어도 아니에요.

 

“얘, 아이스츠메라. 얘 인간이니?”

“아, 깜빡 잊고 그걸 안 물어봤네요.”

“너 지금 나랑 장난해?”

“죄송해요, 스승님.”

 

저거 조금 살벌한 문장이기는 한데, 저런 문장에도 놀라지 않는 아이스츠메라가 조금은 존경스럽다…고까지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아무렇지도 않게 죄송해요 스승님, 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수가 있지. 아이스츠메라가 대답하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 아이를 바라보던 여자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저 사람들 스승과 제자라기보다는 누나와 남동생인데? 나이차이도 별로 안 나 보이는 게 확실한 누나와 남동생이었다.

 

“너 뱀파이어야?”

“네. 네? 네?! 네. 에?”

“너 뭐야. 너 정체가 뭐냐고. 너 뱀파이어야?”

 

아니 이 분 좀 이상한데?? 어이가 없다고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뭔가 아니라고 했다가는 나를 죽일 기세였기 때문에 잠시 고민해보았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한테 용의 노래…라는 그런 윙윙 소리가 들리는 걸 알려주는 건 조금 그렇겠지. 그냥 뱀파이어라고 하는 게 차라리 더 나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다시 그 여자가 속사포 질문을 내뱉을 것 같기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네, 뱀파이어예요.”

“뭐?”

 

뱀파이어라고 하면 아 그래? 라며 얘기할 줄 알았는데 도대체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오히려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 여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어!! 내가 지금 이 여자한테 ‘사실 저는 용의 노래가 들리는 아주아주 소중한 뱀파이어라고 어떤 남자가 말하더라고요.’ 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뭐 어쩌라는 거야!

“…아직도 살아있었니?”

“네?”

“…얘 좀 이상한 애네. 어디서 데려온 거야?”

 

아니 그럼 내가 죽어있어야 됐어? 내 어이가 없어서…라는 표정으로 그 여자를 바라보았건만, 그 여자는 이미 아이스츠메라에게 시선을 돌린 뒤였다. 내 눈치와 제 스승의 눈치를 보던 아이스츠메라도 그 여자가 말을 걸어오자 아, 라며 시선을 돌렸다. 어 나 완전…소외 당했어…헐.

 

“아까 여기로 오다가 마주쳤어요. 괜찮은 애 같아서요.”

“…그래.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뱀파이어라잖아.”

“저도 뱀파이어잖아요.”

“아가, 그거랑은 다르지.”

 

저것 봐. 저 사람들 좀 살벌해. 좀이 아니지. 심각하게 살벌하잖아. 그들의 옆에 어정쩡하게 서서 바라보고 있는데, 그 여자가 훑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뭐, 괜찮기는 해. 덧붙이듯이 중얼거린 말이 끝내주게 소름끼치는 거다. 아이스츠메라는 그 여자의 말에 별로 놀라지도 않은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이다. 난 네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

 

“…그래. 그래서 너는 여기에 뭐하러 온 건데?”

“…굉장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죄송한 말씀이면 안 해도 돼.”

 

아 진심 그러지 마요. 키아크라에게 했다면 이미 한 대 얻어맞고도 남았을 징징거림을 섞어 말하자 아이스츠메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 웃음이 저렇게 얄미워 보이는 건 또 처음이네. 아니 오늘 처음 만났으니까 무리도 아니지만. 어이없다는 듯 웃고 있던 그 여자는 흐음. 이라고 중얼거리며 말해 봐, 라는 말을 덧붙였다. 어이고 황송해라. 그 남자였으면 진작 딴죽을 걸고도 남았을 말투였지만 한심하게도 나는 지금 저 여자에게 부탁을 하는 상황이었다.

 

“제가 지금 갈 데가 없거든요.”

“……….”

“제 말 들으셨어요?”

“그래서?”

“여기서 좀만 살면 안 될까요.”

 

허 참 내가 어이가 없어서.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은 그 여자를 잠시 멍청하게 바라보던 아이스츠메라는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여자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입모양으로 뭐, 라고 물었건만 돌아오는 건 역시 바보 같은 웃음이었다. 보면 볼수록 그 아이가 한심해서, 조금 미안해지려 하고 있었다.

 

“아이스츠메라. 어떻게 생각하니?”

“내보내요. 라고 말해도 어차피 들이실 거잖아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스승님 맘에 드시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들이시잖아요. 괜찮으시다면서요.”

 

응, 뭐 그렇기는 해. 아니 저건 오히려 아이스츠메라가 실세 같은데? 별의 별 생각을 다 하며 아이스츠메라가 놀랍다는 결론을 내리려는데, 그 여자가 갑자기 이쪽을 보더니 전에 본 적 없는 웃음을 지었다. 아니 오늘 처음 봤으니까 무리도 아니지만. 나 왜 계속 이런 생각만 하고 있는 거지 도대체.

 

“그러면 여기서 지내도 되는데 말이야.”

“……네.”

“여기서 사는 것 좀 도와줄 수 있겠니?”

“……네?”

 

당신들이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거면서 사는 것 좀 도와줄 수 있겠냐는 게 말 이예요, 밥 이예요, 그것도 아님 스프예요? 나야말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 여자를 바라보고 있는데 아이스츠메라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고 뭐 어쩌라는 거야 도대체…이 사람들 좀 이상해…

 

“아직 여기에 우리가 완벽하게 장착한 게 아니라서 조금 힘들거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쟤가 조금 필요가 없어. 장본인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저렇게 당당할 수 있다니 존경스럽기까지 하군. 아이스츠메라가 조금 신경 쓰여서 시선을 그 쪽으로 돌려보았건만, 정작 아이스츠메라의 표정은 담담했다. …저것 봐. 난 쟤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 나였으면 이미 크로스 라인 끝내고 초크 슬램 하고 있겠네. 그렇게 생각하자 괜히 웃음이 나와서 헛기침을 했다.

 

“그러니까, 우리 좀만 도와 줘. 너 일도 잘 할 것 같은데.”

“…그거 칭찬이예요? 전혀 칭찬같이 않은데?”

“아무래도 칭찬이야. 도와주기만 하면 밥도 줄게.”

“그건 당연한 거 아니었어요?”

“……나가.”

“잘못했습니다.”

 

아까까지의 담담한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쿡쿡 소리가 나게 웃고 있는 아이스츠메라가 끝내주게 얄미워서 잠시 노려보았다. 그제야 조금 눈치가 보이는지 아까의 나처럼 헛기침을 한 아이스츠메라는 입모양으로 작게 미안, 이라고 중얼거렸다. 확 때려버리려니까, 진짜…니미.

 

“아무튼 그러면 들어주는 거지?”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제가 해야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너 되게 쿨한 여자애구나! 맘에 든다!”

 

호탕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데,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서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흐뭇하다는 듯 웃고 있는 아이스츠메라가 심각하게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차, 라며 손가락을 부딪친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내가 너한테 내 이름을 가르쳐줬었니?”

“…아직. 이요.”

“그래? 일단 알려줄게. 나 쿠이키, 라고 해.”

“…쿠키?”

“쿠이키. 아이스츠메라랑 똑같은 말을 하는 구나.”

 

쿠이키요? 다시 한 번 되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쿠이키. 쿠이키. 쿠키보다 조금 더 발음하기가 쉬워서 계속 중얼거리자 그 여자가 왜 계속 말 하냐며 내 머리를 때려왔다. 아니 내 맘대로 부르는 것도 죄야? 라고 별 생각 없이 내뱉으려는데, 그랬다가는 이곳에서 쫓겨날 것 같아 그냥 말하지는 않았다. 아쉽게도 난 지금 저 여자에게 부탁하는 처지이니까.

 

“자 그럼, 일단 네가 지낼 곳을 정해줘야 하는데. 아이스츠메라, 남는 데가 있니?”

“위층이요. 방이 작긴 하지만 지낼 수는 있잖아요. 침대도 있고.”

“네가 간만에 좋은 말을 했구나. 그런데 거기 깨끗하니?”

“얼마 전에 유리창 깨고 난 다음부터 안 들어가서 잘 모르겠는데요.”

“…그게 언제 적 얘기인데?”

“글쎄요. 한 2달?”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당장이라도 아이스츠메라 멱살을 붙잡고 무슨 소리야!! 라고 묻고 싶었지만 역시 그랬다가는 또 욕을 엄청 처먹고 쫓겨날 것 같아서 손만 부르르 떨었다. 한 2달? 이라고 말을 휙 꺼낸 아이스츠메라는 아차, 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봐도 미안하다는 표정 + 어떻게 봐도 눈치 보는 표정의 아이스츠메라를 보던 나는 저런 애한테 겁을 주면 안 되지, 라는 아주 대인배스러운 생각을 하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일단…근데 얘. 너 이름 뭐니?”

“…카스올리 라고 합니다.”

“카스올리? 발음하기 되게 힘들구나. 카스올리.”

“…제 아버지를 탓하세요.”

 

아빠 미안. 아빠가 지은 이름 때문에 내가 지금 나이도 잘 모르겠는 어떤 여자에게 내 이름 탓을 듣고 있어. 아빠 미안. 절대 아빠 탓이 아니지? 어디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곳’에서 잘 살고 있을 아빠에게 안부를 조금 전해보고 아이스츠메라, 얘 위로 데리고 올라가 봐, 라는 말을 어렴풋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이스츠메라가 예쁘게 웃으며 빨리 와, 라고 했던 것도 어렴풋이…아, 아니지. 그건 확실하게 기억한다. 아이스츠메라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는데, 계단이 좀 심하게 끼익 거려서 이러다가 부서지는 건 아닌가 조금 걱정을 해보았다.

 

“…무슨 마법의 문이냐?”

“안 들어온지 꽤 돼서. 사실 지금 이 안 꼴이 어떤지는 스승님도 모르셔.”

“…유리창만 깨진 게 아니란 말이야?”

“……미안해.”

 

철컥철컥 거리며 문고리를 돌리던 아이스츠메라는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철컥, 하는 좀 더 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려서 조금 놀라버렸다.…얘한테 또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네. 조금 의외라는 표정으로 아이스츠메라를 바라보는데, 나에게 보이지 않을 만큼 문을 열고 방을 흘끗 본 아이스츠메라가 멋쩍다는 듯 웃자마자 그런 생각 따위…

 

“그렇게 엉망은 아닌 것 같아.”

“다 필요 없으니까 문이나 좀 열어봐.”

“……화내지 마.”

“엉망은 아니라며.”

“……화내면 안 돼.”

 

어이, 이 봐. 입을 막 열려고 할 때 아이스츠메라가 문을 나에게 훤히 보일 만큼 열어버렸다. 그런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건 역시 나였지만, 일단 급한 건 저 방의 꼴이 어떤가, 였다. 으음, 이라고 낮게 내뱉으며 방 안을 흘끗 바라보았다. …저게 지금 그렇게 엉망은 아니라고. 차마 방이라고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그 안을 바라보고, 아이스츠메라를 바라보았다. 일부러인지,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그랬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아이는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해?”

“……화내지 말라니까.”

“네가 여기서 살아보도록 해봐. 화가 안 나? 어휴 참 화가 안 나겠다. 그렇지?”

“……내가 잘못 했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아이스츠메라는 내, 내, 내가 청소 도와줄게!! 라며 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저걸 지금 청소를 하겠다고? 청소가 가능하기는 해? 넌지시 묻자 걱정하지 마, 가능할 거야! 라며 마치 제가 초등학생이라도 된 듯 눈을 반짝거리던 아이스츠메라는, 조금 고민을 하는 듯 하더니, 그 특유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도 도와줄 거지?”

…오늘 처음 본 사람한테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지만. 저 새끼 도대체 뭐야?

 

-

 

아이스츠메라와 어림잡아 1시간 정도를 청소하다가 도대체 뭐하길래 안 내려오냐고 먼저 올라와준 쿠이키라는 그 여자와 함께 2시간 동안 그 방을 붙잡고 있던 결과, 그 방은 다행히도 꽤나 깨끗한 방이 되고 말았다. 생각보다 넓었던 그 방을 바라보며, 나는 새삼스럽게도 ‘뿌듯함’ 이라는 감정을 깨달았다. 음, 그렇지. 이게 뿌듯한 거였지.

 

“그런데, 저기요.”

“응?”

“제가 그 쪽을 뭐라고 불렀으면 좋겠어요?”

 

이왕이면, ‘그 남자’처럼 어떠한 호칭도 붙이지 않는 건, 역시 싫어요. 차라리, 그런 건. 넨시가 오히려 더 좋았는데. 차라리 그 남자를, 선생님. 이라고 불렀다면. 어땠을까?

 

“글쎄. 나는…어떻게 불러도 상관없는데.”

 

아이스츠메라는 재미없게 맨날 나를 스승님, 이라고 부르기만 하니까. 너도 스승님이라고 부를래? 어린 아이처럼 키득키득 웃으며 그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에이 그래도 호칭을 붙이는 게 재미있죠. 어떤 게 좋아요? 똑같이 웃으며 그렇게 묻자 쿠이키는, 으음, 이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언니 어때?”

“…나이가 몇 살이신데요?”

“여자한테 그런 질문은 실례야. 나 나이 많아.”

“왜요? 150살?”

“그것보단 어리다, 야. 143살.”

 

…헐.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 여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쿠이키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런 얼굴에는 담배가 들려있어야 딱인데. 조금 아깝다고 생각하며 쿠이키를 바라보고 있는데 나보다 키가 큰 그 여자는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검은색 머리를 거칠게 헝클이며 그 여자는 한껏 웃었다.

 

“언니라고 불러. 한 번도 나를 언니라고 부른 사람은 없거든.”

 

왠지 그 문장이 굉장히 슬퍼서, 조금 씁쓸하다고 생각하며 쿠이키를 바라보았다. 알았어요, 언니. 입모양으로 중얼거리듯, 그 여자를 올려다보며 말하자 금세 쿠이키는 웃었다. 웃는 그 순간, 저 안 쪽에서 난 유리 깨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그 쪽을 바라보았다.

 

“…스승님.”

“왜 그래?!”

“……죄송합니다.”

 

저 안에서 개미 목소리만큼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확실한 아이스츠메라였다. 죄송합니다, 라며 그 아이가 모습을 드러내고, 쿠이키가 아이스츠메라가 방금까지 있었던 그 방을 훑어보고, 아이스츠메라의 머리를 후려치고. 우습게도 굉장히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16.

 

 

 

아이스츠메라 덕에 청소 시간이 연장되어서 3시간 만에 겨우 청소를 끝낼 수 있었다. (물론 그 동안 아이스츠메라는 꽤 많이 얻어맞았다. 청소 도중에 그가 또 다시 책장을 쓰러트려서 내가 깔릴 뻔 했는데 다행이 쿠이키가 도와주었다. 그 때 아이스츠메라는 등짝을 얻어맞았다.)

그 동안 먼지 때문인지 어깨 위에 올려놓았던 토파즈가 자꾸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아, 아가 용은 무척 여리구나-토파즈는 잠시 거실-만약에 그 곳을 거실이라 부를 수 있다면-의 흔들의자에 잠시 올려놓았었다.

“…자 이제 좀 쉬자. 아이스츠메라 덕에 무리 좀 했더니만…….”

 

쿠이키…아니 쿠이키 언니가-솔직히 쿠이키의 이미지엔 ‘언니’라는 단어보다는 ‘누님’이 어울렸다. 그녀가 허락만 한다면 누나라고 불러보고 싶기도 하다-유연한 동작으로 몸을 풀며 아이스츠메라를 가볍게 흘겨봤다. 아이스츠메라는 일부러 딴청을 피우며 쿠이키의 매서운 눈길을 피했다. 그 모습이 정말로 누나와 동생 같아서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어디보자, 140살 정도의 누나와 남동생. 그럼 남동생은 도대체 몇 살인 거지. 그나저나 뱀파이어도 성장을 하긴 할까?

 

“자, 이름이…뭐라고 했더라?”

 

혹시 뱀파이어들은 건망증이 있는 걸까. 뭐 나도 그렇게 기억력이 비상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딱 네 음절밖에 안 되는 이름을 왜 못 기억하는거지? 아이스츠메라라는 엄청나게 길고 긴 이름도 잘도 기억하면서.

 

“카스올리요.”

“아, 그래! 카스올리!”

 

갑자기 쿠이키가 오버액션을 보이는 바람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정말 변덕에다가 쾌활한 언니로군요. 속으로 중얼거린 나는 쿠이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치 이제야 본 얼굴처럼. 전혀 <흡혈 포유류> 같이 보이지 않는 얼굴. 하기야 지금까지 만났던 뱀파이어들 중에서는 진짜 뱀파이어처럼 보이는 뱀파이어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미성년자>의 눈앞에서 잔혹한 살해장면을 보여준 그 누군가는 빼고.

어쨌든 하얀 얼굴에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낮지도 않은 코. 갈색에 황동색이 섞인 듯한 말아 올린 스타일의 머리카락. 그리고 선명한 호박빛의 눈동자. 쿠이키의 눈동자에도 역시 무늬가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곡선 위주의 부드러운 무늬가 눈에 띄었다. 그렇다면 아이스츠메라의 눈에도 저런 똑같은 무늬가 있다는 뜻이네.

너무 빤히 바라봤다 싶어 쿠이키의 얼굴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찰나,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쿠이키가 입을 다무는 것이 보였고 동시에 그녀가 내게 팔을 뻗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느껴지는 어깨의 강한 통증. 쿠이키가 내 어깨를 순식간에 잡아 돌렸다.

 

“아!”

 

너무나 순식간이어서 나는 쿠이키, 왜 그래요 라고 말도 못했고 아픈 어깨로 손을 뻗지도 못했다. 내 쇄골을 짓누르고 있는 쿠이키의 손을 당장이라도 떼고 싶었다. 오늘 피도 보고, 울퉁불퉁한 바위에 묶여 있기도 했는데 도대체 어디까지 내가 수난을 당해야 하는 거지.

“너…….”

 

갑작스런 쿠이키의 태도에 아이스츠메라도 놀랐는지 멍 하게 나와 그의 스승을 쳐다보고 있었다. 난 너무나 아파서 오만상을 찌푸리며 쿠이키의 손을 떼어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마 아사츠유만큼 강할 것 같은 단단한 쿠이키의 두 팔을 내 두 손으로 떼어내는 건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아, 아파. 쿠이키의 호박색 눈이 놀람과 경악이 뒤섞인 표정으로 가늘어지는 게 보였다.

 

“너…그림자 뱀파이어들과 같이 있었어? 당장 말해!! 네 진짜 정체가 뭐야?”

 

그림자…뭐? 뱀파이어가 왜 그림자야? 섀도우(Shadow)? 그림자? 그거 말하는 거야? 나는 그 말에 잠시 통증도 잊고 어리둥절한 채 <그림자>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그림자 뱀파이어가 뭔데요?”

 

나는 되살아난 통증 때문에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며 외치다시피 물었다. 내 말에 쿠이키가 잠시 당황하더니 다시 냉정한 표정으로 되돌아와 다시 나를 다그쳤다.

 

“카스올리. 네 진짜 정체가 뭐야? 누가 널 보낸 거지?”

 

내 진짜 정체? 굳이 말하자면 <용의 노래>라는 몹쓸 것을 알고 있는 비정상적인 뱀파이어라고나 할까요. 보낸 사람은 굳이 말하자면 아우리스라고나 할까요. 발송인 아우리스. 수신자 쿠이키. 하하하. 순간 내 책과 mp3와 함께 학원 가방에 고이 모셔져 있을 핸드폰이 생각났다. 꽤 낡았지만 쓸 만했는데…….

잠시 딴 생각에 몰두하던 나는 쿠이키가 매섭게 어깨를 잡고 흔드는 바람에 다시 깨어났다. 그래요, 발송인 아우리스, 수신자 쿠이키. 말해봤자 이야기만 더 길어지고 그 시간만큼 내 어깨가 아플 것 같아서 말하는 걸 포기하고 대신 천진난만한 눈으로 쿠이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아니 그러려고 최대한 노력은 했다-.

 

“날 보낸 사람은 없어요. 난 단지…….”

“그럼 이 옷은 뭐야! 나랑 지금 장난해? 너 이 옷은 어디서 난 거지? 어?”

 

난 흘끔 시선을 내려 내가 뭘 입고 있는지 확인했다. 좀 더러워진 흰색의 옷. 거미줄…이었나. 쿠이키도 이 옷이 마음에 안 드나 보네요? 하지만 지금은 농담할 때가 아니었다. 아이스츠메라는 이미 파랗게 질린 것을 뛰어넘어 얼굴에서 색이란 색은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오직 짙은 회갈색 눈만이 반짝이고 있었는데, 그 눈동자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쿠이키는 구석에 몸을 구겨 넣다시피 한 아이스츠메라를 한 번 흘끗 무섭게 째려봤는데, 지금은 그를 야단칠 때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는지 다시 그 호박색 눈을 내게로 돌렸다. 아, 이거…아무래도 잘못 걸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직감이랄까.

그렇다고 지금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벌써 해가 졌는지 사방이 어둑어둑했고 집을 둘러싼 숲에 어떤 동물이 살지도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최후의 방법-만약 내가 놀랍게도 이 손을 떨쳐버릴 수 있다면-도 잃어버린 나는 낙심한 채로 그저 쿠이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 옷…이요?”

 

쿠이키가 갑자기 손에 더 힘을 주는 바람에-지금 중간 정도 힘을 준 것 같은데 다 주면 어떻게 되려나. 어깨뼈가 부러지려나-신음소리와 함께 내뱉었다. 그 남자가 나한테 준 거예요. 빌어먹을 배신자가 나에게 줬던 거라고요. 죽기 전 마지막 선물이랄까요.

시간이 매우 빠르게 흘렀던 것만 같았다. 벌써 그 일이 오래 전 같이 느껴졌다. 쿠이키가 날 벽으로 좀 더 몰아붙이자 아까 아우리스가 줬던 삼각뿔 모양의 병이 조금 아프게 몸을 찔렀다.

 

“그래. 어디서 났어? 빨리 말하지 못해?”

“…….”

 

내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생각하는 동안 쿠이키는 내가 망설인다고 생각했는지 손에 힘을 조금 풀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지? 그림자 뱀파이어라는 건 또 뭐야?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 때, 아래쪽에서 가르랑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 토파즈를 잠시 잊고 있었네. 그리고 끼익,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뭐지? 토파즈가 뭔가를 발톱-또는 이빨-으로 긁은 것 같은데. 아이스츠메라도 역시 토파즈를 잊고 있었는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더 들어갈 데도 없는 구석에 몸을 찰싹 붙였다. 쯧쯧.

토파즈 때문인지 잠시 고개를 돌렸던 쿠이키는 아이스츠메라보다 훨씬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아니면 토파즈에게 관심이 없는 걸지도.

 

“널 섣불리 받아들인 내가 잘못이었어. 네 정체가 뭐야? 누가 널 보냈지?”

“…일단 이것 좀 놔요. 제발 좀.”

 

가까스로 나는 쿠이키의 눈빛을 이기고 부탁을 할 수 있었다. 쿠이키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가 다시 동그랗게 돌아왔다. 어깨가 순식간에 압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쿠이키가 도망치지 못할 속셈인지 내 양 옆으로 양 팔을 뻗어 날 가뒀다.

뭐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괜찮아. 내 뇌리를 스치는 건방진 생각에 조금 웃었다. 다시 거실에서 끼익, 하고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들려오자 쿠이키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 제발, 토파즈. 좀 조용히 있어줘. 적어도 지금은.

조금 있다가 이 누나가 재밌게 놀아줄 테니까 그 때 난리치고 놀자. 지금은…그냥 조용히.

 

“카스올리. 빨리 말해.”

“일단…난 진짜로 그림자 뱀파이어가 뭔지 몰라요.”

“거짓말.”

“진짜라고요!”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쿠이키가 흠칫하더니 다시 이게 어디서 큰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옷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도 몰라요. 결정적으로 난…뱀파이어가 아닐지도 몰라요.”

 

내가 한꺼번에 말을 쏟아내자 쿠이키의 엄격한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뱀파이어가 아니라니? 무슨 말이야?”

 

나는 넨시가 내게 해 줬던 말을 생각했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다르다는 걸.>…눈. 그래 눈이지.

 

“내 눈을 봐요.”

 

…언니, 라고 덧붙이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매우 진지했기 때문에-<진지한 분위기 알레르기>라도 있는 건지 아이스츠메라는 구석에서 온 몸을 비틀고 있었다-차마 그러지 못하고 속으로 조용하게 덧붙였다.

잠시 동안 얘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라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던 쿠이키는 마침내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가까이 다가온 호박색 눈의 무늬가 선명하게 보였다. 이상하게도, 그 무늬는 조금씩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일렁거리며…호흡을 뱉어내고…….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는 거지. 정신을 차리자 어느 새 쿠이키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서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스츠메라.”

 

쿠이키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아이스츠메라를 부르자, 구석에 처박혀 온몸을 뒤틀고 있던 아이스츠메라는 깜짝 놀라 순식간에 <차려>자세로 되돌아와 대답했다.

 

“네,네?”

“이 애…어디서 데려왔다고 했지?”

“정확히 쟤가 절 찾았어요.”

“…그래?”

 

쿠이키가 날 돌아봤다. (동시에 거실에서는 다시 끼긱거리는 소리가 났다.)

 

“카스올리.”

“네?”

“넌 얘를 만나기 전에 어디 있었지?”

“사막이요.”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난 미치도록 내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그걸 말하면 어떡해, 멍청아! 속사포처럼 쏟아질 질문을 기대하고 있는데…의외로 쿠이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넌 뱀파이어가 아니야.”

 

넨시와 똑같은 말을 하는 쿠이키를 보면서 조금 놀랐다. 와, 다중인격이잖아? 욱신거리는 어깨만이 지금은 놀랍도록 침착한 그녀가 날 거칠게 <심문>했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그렇다고 인간도 아니야.”

 

더욱 더 놀라버린 나는 얼빠진 아이스츠메라의 표정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똑같이 말할 수 있는 거지? 나는 순간 이게 꿈이라고 생각했다. 일어나면, 그대로 엄마가 늦었다고 날 때리고 있는 거지. 차라리 그게 좋아. 현실. 여기는 꿈.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뒤바뀌어 있었다. 이제는 여기가 현실. 내가 살았던 곳은 잊어버려야 할 꿈. 슬프네.

 

“카스올리.”

“네?”

“솔직히 말해줘.”

“…….”

“일단 그림자 뱀파이어는, 어둠의 뱀파이어라고도 불리는데, 쉽게 말하면 <마법>을 사용하는 뱀파이어라고 볼 수 있지.”

“……!!”

“네가 입고 있는 옷은 그들이 유일하게 제작할 수 있는 옷이야. 너…그들과 같이 있었던 거야?”

“…….”

 

너무나도 명쾌한 그녀의 지적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카스올리.”

 

그런 내가 답답했는지 그녀가 조용히 내 이름을 재촉하듯이 불렀다.

 

“네?”

“솔직히 말해줘. 널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넌 뱀파이어가 아니니까.”

“……맞아요. <그림자 뱀파이어>라는 게 마법을 사용하는 뱀파이어를 뜻하는 게 맞다면요.”

“…역시 그랬네. 그런데 왜 거기 있었던 거야?”

“…….”

 

아까 그 남자의 배신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기억되었는지 난 아직 이 ‘언니’를 완벽하게 신뢰해도 되는지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 다는 말 못 해.

 

“그건….”

“나중에 말해도 돼. 그런데 혹시 몰라서 묻는 건데, 그들로부터 마법…을 배운 적이 있니?”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말해도 될 지에 대해서 잠시 고민하고, 솔직하게 말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잘 하지도 못하잖아.

 

“…네.”

“한 번 해 봐.”

“네?”

“한 번 해 보라고.”

“하지만…….”

“솔직히 한 번 보고 싶거든. 효과가 어떤지.”

 

그녀가 살짝 웃으며 말하자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무시무시하게 날 죽일 듯이 달려들던 이 언니가 왜 갑자기 내 정체를 캐내는 것을 포기한 거지? 뱀파이어인지, 아닌지가 그렇게 중요해? 뱀파이어면, 고문을 해서라도 왜 그들하고 같이 있었는지 이유를 캐내야 하고 아니면 그냥 설렁설렁 넘어가도 되는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를 짐작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더없이 복잡해진 내 머리를 풀어주려는 듯 갑자기 또 머릿속에서 부드러운 선율이 들려왔다. 아니, 느껴졌다고 하는 게 더 낫겠지. 보이지 않는 용에게 그래, 고마워, 라고 머릿속으로 말하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웅웅거림이 높아졌다가 다시 내려왔다.

“빨리 해 봐.”

 

쿠이키가 그 눈을 반짝이며 재촉하자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하, 하지만…스승님…그,그건 엄청나게 위,위험…….”

“알아. 난 그냥 궁금할 뿐이야. 뱀파이어가 아닌데 그렇게 큰 마법은 발휘할 수 없을 거니까 걱정 마.”

 

아이스츠메라가 말을 더듬으며 덜덜 떨면서 말하자 쿠이키가 말을 단번에 잘라버리고 내게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아니, 솔직히 너무 빨라서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아…네. 그냥…내려가는 것만.”

 

이번엔 사실대로 말했다. 와, 전쟁판도 이런 판이 다 있나. 아군하고 적군이 누군지 분별이 잘 안될뿐더러 난 어느 편인지도 잘 몰랐다. 그저 이런 곳에서 나오는 답은 단 하나. 빠져나가면 된다. 단지…나는 빠져나가는 방법을 모를 뿐.

어쩌면 쿠이키가 가르쳐주지 않을까? 아니면 여기서 평생 살려나? 다시 생각에 빠진 나를 두고 쿠이키는 그녀의 제자와 대화-실은 일방적인 명령-를 하고 있었다.

 

“거 봐, 아이스츠메라. 걱정 없을 거라고 했지?”

“전…잘 모르겠는데요.”

“이제 지붕 위로 올라가서 내가 잠시 동안 ‘실험’을 할 테니까 그 때 동안만 참아달라고 전해 봐.”

 

…실험? 나를 가지고 해부라도 하려는 건가. 문득 내 피를 뽑는 쿠이키의 영상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의외로 여기 와서 <뱀파이어>가 피를 먹는 모습은 보지 못한 것 같다. 조만간 보게 될 지도 모르지만…쿠이키는 몰라도 아이스츠메라가 그 불쌍한 표정으로 피를 먹는 장면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아…저…제가요?”

 

아이스츠메라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당연하지. 그럼 너 말고 누가 있어? 후딱 올라가지 못해?”

“아, 네, 네!!”

 

아이스츠메라가 허둥지둥 집 밖으로 나가자-그동안 아이스츠메라는 두 번이나 넘어졌다-쿠이키가 미소를 띠며 날 바라봤다.

“아이스츠메라가 지붕 위에서 설득하는 동안 네 <마법>을 구경해 볼까? 엄청 궁금하거든. 보다시피 우리는 그런 상당히 외교적인 일과는 거리가 멀어서…그림자 뱀파이어들과 접촉한 적이 없어.”

 

쿠이키가 지식욕이 넘치는 투로 말했다.

 

“아이스츠메라가…누굴 설득해요?”

“아 그거?”

 

내가 묻자 쿠이키가 당황한 듯 머리를 살짝 매만졌다.

 

“음…어차피 나중에 차차 배우게 될 거야.”

“네? 제가요?”

쿠이키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글쎄, 나도 이런 상황은 보지 못해서. 어쨌든 넌 뱀파이어가 아니니까 아이스츠메라와 같이 배울 수 있을 거야.”

 

음…글쎄요. 난 걔랑 같이 수업을 들을 자신은 없는데.

 

 

-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래, 아래로 내려가 보자고. 그 남자가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아, 이거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그 남자가 가르쳐 준 그대로 했다. (그 남자는 눈은 감을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어쩔 수 없다. 난 도저히 눈 뜨고는 못 하겠으니까.)

콰앙-

 

느닷없이 위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정신을 집중하느라 감았던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어지럽게 흔들리고 휘몰아쳤다. 쿠이키는 위에 있겠지? 아마. 여긴…1층인가?

쿵-

후두두둑-

 

다시 위쪽 부근에서 쾅, 소리와 함께 벽돌 조각이 바스라져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아야!”

 

아이스츠메라가 그 <설득>이라는 것을 잘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워 질 무렵, 뒤쪽에서 쿠이키의 외침이 들렸다.

 

“카스올리!”

 

머리를 흔들어 어지러운 시야를 떨궈낸 뒤, 쿠이키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쿠이키가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내리는 파편들을 유연하게 피하면서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괜찮아?”

“…아니요.”

 

내가 신음소리와 함께 대답하자 쿠이키가 잽싸게 다가와 손으로 쏟아지는 파편을 막아주었다. 놀랍게도, 날카로운 조각들이 그녀의 손에 의해 튕겨져 나갔다.

 

“오, 이런. 카스올리 내가 정말 미안해.”

 

아니, 뭘요, 라고 답하기도 전에 쿠이키는 놀라운 수다실력을 구사했다.

 

“하지만 정말 굉장했어! 카스올리, 정말 고마워. 무언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실험이 최고지! 안 그래?”

 

우르르, 우르르 거리며 떨어지는 파편들을 보며 걱정하느라 난 그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아무래도 이 집 지붕이 걱정되는데. 그러고 보니 여긴…거실이잖아! 토파즈는 어디 있지? 용의 비늘이 얼마나 강할까? (…라고 나는 쿠이키의 손을 용케도 피한 조각 하나를 맞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계속 맞다간 혹이 생기겠군.)

 

“토파즈!”

 

마침내 구석에서 천장을 걱정스레 올려다보고 있는 노란색 용-이라기보다는 뱀에 가까웠지만-을 발견한 내가 소리치자 동시에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하나는 토파즈가 왜 이제 왔냐는 투로 대답을 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천장에서 울리던 굉음이 갑자기 멈춘 것이었다. 마치 TV나 전등의 스위치를 끄듯, 갑작스럽게 뚝 하고 굉음이 끊겼다. 그 덕에 내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 파편들도 멈춰서 내 심장은 더 이상 조마조마하게 움츠러들 필요가 없어졌다.

글쎄, 시끄럽게 울리던 음악이 순식간에 사라진 기분. 그 기분을 안다면 그 뒤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썰렁한 공기도 알 것이라고 믿는다. 쿠이키도 놀랐는지 입을 다물었고-그녀는 “놀라워, 카스올리! 아시다시피 나는 말이야…”라고 하던 참이었다-방 안은 토파즈가 짜증난다는 표시인지 방바닥을 찍찍 긁는 소리 외에는 침묵이 흘렀다.

 

“무슨 일이지?”

“그러게요.”

 

난 다행이라는 투로 맞장구쳤지만 쿠이키는 오히려 나와는 정 반대인 것 같았다.

 

“벌써 그칠 리가 없는데? 카스올리, 너도 알겠지만 식물들은 꽤 끈질긴 면이…….”

 

무언가 강의 비슷한 것을 시작하려던 쿠이키는 내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헛기침.

 

“미안, 카스올리. 네가 배워야 할 게 많다는 것을 깜박했어.”

“괜찮아요. 그런데 아이스츠라는 괜찮을까요?”

“아이스츠메라야. 아, 저기 오네.”

 

쿠이키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며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아이스츠메라가 거의 쓰러질 듯한 빈약한 몸을 이끌고 들어섰다.

 

“스승님…고,고맙…습니다.”

 

고맙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이스츠메라의 말에 쿠이키와 나는 표정이 일치해버렸다. 그렇게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내뱉고선, 아이스츠메라는 그대로 풀썩 쓰러져버렸다. 그런 아이스츠메라를 보며 쿠이키는 쯧쯧, 하고 혀를 차고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맙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스승님이, 나무를, 멈춰, 주신 거, 아니에요?”

 

아이스츠메라가 누운 채로 숨을 고르며 한 마디 한 마디 끊어 말할 때마다 그의 얄팍한 몸이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헐떡였다. 와, 너 오늘 운동 제대로 했구나! 내일이면 근육이 생길지도 몰라…음, 내 말은…조금 건강해질 지도 모르는 거지. 나는 아이스츠메라의 마른 몸을 보고 말을 바꿨다.

 

“아닌데? 우리도 조금 놀랐어.”

 

쿠이키가 아이스츠메라의 곁으로 한 발짝 다가서며 말하자 아이스츠메라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정말요?”

“그래. 그나저나 너 지붕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 뭔가 둘만의 대화다. 나 왕따 된 기분인데? 나는 둘이 대화할 동안이라도 좀 쉬려고 옆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으려다 포기했다. 흔들의자 다리 하나가 곧 부러질 것처럼 얄팍하게 두께가 줄어 있었다. 이거 뭐야. …설마, 토파즈 네가 한 짓이더냐!!

어느 새 토파즈는 내 근처에 와 있었다. 내가 토파즈에게 손을 내밀자 토파즈가 타고 올라와 어깨로 올라갔다. 기분이 좋아진 듯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끼긱거리는 소리는 네가 낸 소리였구나. 나는 쿠이키가 가급적 그 흔들의자 다리를 늦게 보았으면 해서 내 다리로 슬쩍 가렸다.

 

“아이스츠메라, 널 괜히 보낸 것 같구나.”

 

쿠이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해요.”

“아니 뭐 죄송할 건 없어. 난 그냥 네가 다치지 않으면 좋겠어.”

“…….”

 

뭐지,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 훈훈한 분위기는 뭐야. 쿠이키와 아이스츠메라 뒤에 커다랗게 후광이라도 그려줘야겠군.

 

“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얘기해 봐.”

“…어, 그러니까, 지붕위로 빠르게 올라가는 도중에 조금 미끄러졌어요-쿠이키가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결국 올라가긴 했는데 하필이면 제가 말하고 있는 도중에 그…마법이 발동했는지 공격을 받았어요. 하필이면 타드나무여서 죽을 뻔 했는데-쿠이키가 이 부분에서 경악의 탄성을 짧게 내질렀다-다행히 지붕에서 추락하는 걸로 끝났어요.

저는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나무가 공격을 멈춘 거예요. 정말…갑자기. 정말 놀랐어요.”

 

아이스츠메라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쿠이키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타드나무라고? 메어루스가 아니라?”

“네.”

“이런! 이사 온 지 한참 되었는데도 깜박했어. 아이스츠메라, 내가 정말 미안하다. 메어루스로 착각했어.”

메어루스? 타드나무? 무슨 소리지, 저게. 그 둘은 마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듯한 얼굴로 이 세계에 무지한 나를 깔끔히 무시한 채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부러질 것 같은 얄팍한 흔들의자 다리를 가리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동안 둘 사이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대화가 오고 갔다.

마법이 어쩌고 타드나무가 어쩌고 메어루스가 어쩌고…….

 

똑똑-

 

그 때, 문간에서 경쾌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아이스츠메라와 쿠이키의 대화가 잠시 중지되었고, 나는 메어루스가 무엇일지-나는 그게 음식 이름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쓸데없는 추측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 아이스츠메라, 분명 정령일 거야. 내 생각엔 좀 더 정확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구나.”

 

아이스츠메라가 쿠이키의 말에 약간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언제 문에 갔는지 쿠이키가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노크를 한 손님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부인.”

 

쿠이키가 미소를 띤 얼굴로 문지방을 밟고 선 방문자를 맞이하며 말했다. …글쎄, 그 <손님>이 정확히 밟고 섰는지 아니면 떠 있는 건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마치 유령처럼 반투명한 몸 때문에 몸 뒤로 숲의 풍경이 그대로 비쳤다.

그 손님이 한 발짝 더 들어오자 난 그제야 그녀의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약간 통통한 몸집에, 머리를 위로 올린 모습의 아줌마였다. 그런데 무색투명이라면 모를까, 그녀는 ‘유색반투명’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화려하고 튀는 것을 좋아하는지 강한 원색의 옷을 입고 있었고-반투명한데도 그 색이 얼마나 튀는지 잘 알 수 있었다-몸집에 걸맞게 넉넉한 숄을 걸치고 있었다. 나름 고풍적이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내겐 그저 ‘반투명하고 통통한 유령 부인’으로 보일 뿐이었다. 만약 쿠이키가 조금 격식을 차려 대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에게 무례하게 굴었을지도 모르겠다.

쿠이키가 ‘정령’이라고 칭한 그녀는 구석에 앉아있는 아이스츠메라를 흘끗 보더니 정말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 미안해요. 내가 너무…흥분했나 봐요.”

“아, 예…….”

 

쿠이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 아이한테 필요할 것 같은데, 사과의 뜻이니까 이거 받아요.”

 

그녀는 다짜고짜 사과를 하더니 마치 작은 술병처럼 보이는 갈색 병 하나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저…그런데…왜 갑자기 멈추셨는지…….”

쿠이키는 그 병을 보자마자 반짝이는 눈으로 덥석 받아들더니 말끝을 흐리며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그 통통한 ‘부인’이 약간 둥실둥실 뜨면서 팔짱을 끼고 나를 흘끗 바라보자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친 나는 당황해서 허겁지겁 시선을 돌렸다. 아이고, 놀래라.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있는데 토파즈가 꼬리로 어깨를 토닥였다. 진정하라는 뜻인가?

아무튼 난 그 ‘부인’이 내게 눈을 돌린 것을 쿠이키가 모른 척 해주길 바랐다. 난 또 벽에 몰아붙여져서 심문을 당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무튼, 잘 있어요.”

“아, 예…….”

 

그 아줌마는 반투명한 통통한 손을 흔들며 다른 한 손으로는 문고리를 잡았다.

 

“아, 그리고 내 이름은 ‘니트라’ 에요.”

그녀가 문이 닫히기 직전 덧붙였다. 나는 창문을 통해-청소가 잘 안 되어 있는지 먼지가 끼어 유리창이 뿌옇게 되어 있었다-그녀가 마치 연기처럼 스르륵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와, 정말 유령이잖아? 그렇게 신기해하며 생각하고 있는데 쿠이키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 니트라라는 아줌마가 준 병은 어느 새 아이스츠메라의 손에 꼬옥 쥐어져 있었다. 저게 뭐지? 냠냠, 맛있는 것이라도 되려나.

잠깐 동안의 방문에 집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우리 셋-아니, 토파즈까지 넷-은 <일시정지>된 상태로 잠시 서 있었다. 그런 침묵을 처음으로 깬 사람은 쿠이키였다.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네. 조금 쉬어…….”

 

쿠이키가 그렇게 말하며 내 쪽으로 다가와 내 옆의 흔들의자에 앉으려는 찰나, 나는 정신이 퍼뜩 들어서 외쳤다.

 

“안 돼요!”

 

그러나 한 발 늦었다…와우! 내 외침과 더불어 와장창, 하는 소리와 쿵, 하는 소리가 났다. 토파즈가 쿠이키가 아이스츠메라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쯧쯧, 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토파즈, 너 정말 이러면 안 돼, 라고 토파즈를 나무라자 토파즈가 발톱을 가볍게 어깨에 찍었다.

마침내 소란이 가라앉고 보기 좋게 넘어진 쿠이키가 일어났을 땐…음, 뭐랄까. 쿠이키의 눈에서 마치 레이저가 쏘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아니면 칼…이라도.

쿠이키가 형편없이 부서진 흔들의자의 잔해들을 보고선 짜증의 신음을 내며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풀어헤쳤다.

 

“아이스츠메라!”

쿠이키가 다시 머리를 단정하게 올려 묶으며 아이스츠메라를 부르자 아이스츠메라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예, 예?”

“이리 와서 이것 좀 치워 봐.”

 

저렇게 종 부리듯이 제자를 시켜도 되는 건가, 아니, 그 이전에 저렇게 약한 아이에게 시켜도 되는 걸까. 그나저나 나 지금 무시당한 거야?

 

“예.”

 

아이스츠메라가 잽싸게 일어서서-일어서는 도중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이 쪽으로 오는 동안 쿠이키는 다시 단정한 스타일로 돌아왔고, 그가 잔해들을 모조리 치웠을 때는 쿠이키가 다른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정말 빠르긴 빠르구나. 아니, 쿠이키만…내 말은.

아이스츠메라는 민첩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흔들의자의 부서진 조각들을 옮기는 도중 두 번이나 떨어뜨렸고, 조그만 양탄자를 털 때에는 오히려 펄럭이는 양탄자의 힘에 의해 자기 자신이 쓰러지기도 했다.

 

“다 치웠는데요, 스승님.”

“잘 했어.(별로 칭찬 같지 않았는데도, 그 한 마디에 아이스츠메라는 무척 기뻐했다.) 이제 저녁을 먹을 수 있겠네.”

어? 정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안 그래도 오늘은 에너지 소모가 좀 많았다. 폐허가 다 된 다락방을 청소한데다가…글쎄, 머리도 만만치 않게 쓴 것 같은데. 그 남자로부터 탈출하고 아우리스를 만난 것이 마치 어제 일 같았다.

 

“용은 뭘 먹으려나?”

 

쿠이키가 던진 질문에 나는 토파즈를 흘끗 쳐다봤다. 얘, 넌 뭘 먹고 사니?

 

“잘 모르겠네요. 아무거나 먹여 보죠, 뭐.”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농담 삼아 말하자 쿠이키가 흔들의자에서 자빠진 것은 다 잊어버렸는지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스츠메라, 이리 와서 식사 준비 좀 도와.”

“네, 네!”

 

저렇게 비쩍 마른 애한테 저렇게 많이 시켜도 될까. 솔직히 아이스츠메라가 무척 걱정되었다. 나는 아이스츠메라의 주머니에 꽂혀 있는 갈색 병을 주시했다. 저게 도대체 뭘까? 아이스츠메라에게 도움이 될 만한 약은 체력증진제…라거나 청심환이 필요할 것 같은데?

우당탕퉁탕. 흔들의자가 부러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다시 들려오는 우당탕, 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유리가 두꺼운지 다행히 깨지지 않은 물병이 보였다. 쿠이키에게 머리를 쥐어 박히는 아이스츠메라. 저거 진짜 걱정된다.

 

“저, 언니?”

언니, 라고 부르자 쿠이키가 기분 좋은지 씩 웃으면서 뒤를 돌아봤다. 어깨의 통증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왜?”

“저도…도울게요.”

 

 

-

 

 

얼마 뒤, 나는 의자와 식탁을 구석에서 꺼내 배치하고 있었다. 뭐야, 이거. 이거 원래 남자가 해야 되는 일 아니야? 아이스츠메라를 보니-그는 오늘 접시 하나와 컵 손잡이 하나를 깨트렸다. 흔들의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접시에 음식을 담고 있었다.

이거 어째 뭔가 일이 바뀐 것 같은데? 이상하다는 생각을 품으며 식탁을 양탄자 위로 끌어다 놓자 아이스츠메라가 입을 헤 벌리고 경탄의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핫핫, 내가 한 힘 하지…아니 잠깐만. 이게 아닌데?

 

“아이스츠메라, 내가 딴 데 보지 말라고 그랬지!”

 

쿠이키의 호통과 함께 들려오는 쨍그랑, 소리. 파편이 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다행이 깨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죄송해요!”

 

토파즈가 다시 어깨 위에서 조그맣게 쯧쯧, 소리를 냈다. 야, 토파즈, 그런 거 좀 배워오지 마. 심히 걱정된다.

 

“카스올리, 다 됐어?”

“거의요.”

 

거의 내 말이 끝나자마자 쿠이키가 식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식탁 표면을 손톱으로 톡톡, 치더니 말을 걸었다.

 

“널 만난 건 정말 행운일지도 몰라.”

“어…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좋을 대로. 과거가 좀…불분명하긴 하지만?”

쿠이키가 말끝을 살짝 올리며 물었다. 과거라…글쎄요, 제 자신도 잘 모르겠네요.

 

“뭐,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쿠이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으아악! 비키세요!”

 

돌연 뒤에서 들려오는 아이스츠메라의 고음의 고함에 화들짝 놀라서 펄쩍 뛰듯이 달려오는 그를 피했다. 저…저 두 손에 들린 건 접시? 왠지 오늘 저녁은 한물갔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타고 올라왔다.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군.

아이스츠메라의 손에서 떨어진 접시들이 순식간에 식탁 위에 위태위태하게 굴러지다시피 놓였다. 그런데 그 중 한 접시가 아슬아슬하게 식탁의 끝에 걸쳐지더니…휘청 휘청 흔들리다가…아래로…떨어진다! 내가 헉, 하고 놀라고 있는 동안 쿠이키가 침착하게 팔을 뻗어 그 접시를 받아냈다.

모든 게 슬로모션(slow motion)같았다. (아이스츠메라는 입을 헤 벌리고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그의 스승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떨어져서 박살이 날 뻔한 접시는 무척 다행스럽게도 안정적으로 쿠이키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아이스츠메라, 내가 접시를 옮길 땐!”

 

쿠이키가 접시를 탁, 하고 식탁에 놓으면서 말했다.

 

“한 번에 하나씩, 두 손으로 옮기라고 했지!”

“아 저…그게…죄송해요.”

 

아이스츠메라가 잔뜩 움츠러든 채로 말하자 조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쟤 정말 매일 혼나기만 하는 애 같잖아…아니, 이게 사실인가?

 

“가서 나머지 접시들 조심스럽게 들고 와.”

“네, 스승님.”

 

아이스츠메라가 접시들이 있는 쪽으로 가더니 정말로 ‘조심스럽게’ 한 번에 하나씩 들고 왔다. 덕분에 모든 접시들이 식탁에 놓이기 까지는 조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식기도구까지 모두 놓여 졌을 때, 비로소 쿠이키가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자, 먹자!”

“잘 먹겠습니다!”

 

쿠이키의 말이 끝나자마자 잘 먹겠습니다,를 힘차게 외치며 자기 접시에 음식을 덜고 있는 아이스츠메라와 달리, 나는 파격적인 식단을 보면서 경악하고 말았다. 나는 오늘 뱀파이어가 초식동물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갈색 버섯을 빼고, 온통 초록색으로 뒤덮인 식탁에 나는 뭘 먼저 먹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냥 먹지 말까. 그래도 그건 성의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나는 배가 고팠다. 옆을 보니 어느 새 내 어깨에서 내려온 토파즈가 그 작은 이빨으로 노란색 과일을 우적우적 씹고 있었다.

“카스올리, 안 먹어?”

“아, 저…….”

 

쿠이키가 내가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자 샐러드처럼 보이는 것을 내 앞으로 가져다 놓았다.

 

“미안. 이 근처에 동물이 없더라고.”

 

그렇게 말하고선 쿠이키는 다시 콩처럼 보이는 것을 씹기 시작했다. 아마 저건 단백질 대용이겠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고 내 앞에 놓인 접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이스츠메라와 쿠이키는 여기 온 지 두 달이 넘었을 텐데. 아이스츠메라가 다락방 창문을 깬 게 두 달 전이라고 했으니까…아니 그럼 지금 이 뱀파이어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식물만 우적우적 씹었던 거야?

오, 놀라워라. 나는 속으로 온갖 경탄의 말을 중얼중얼 거리며 샐러드를 뒤적였다. 조금 묽은 것 같은 소스가 흘러나왔다. 입에 넣자, 일부러 그런 건지 고기와 비슷한 맛이 났다. 그래도 다행이다. 소스라도 고기 맛이 나긴 나네.

디저트가 있으려나? 설마 피가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 솔직히 뱀파이어라면 <피>가 첫 번째로 연상되는 것인데 여기 와서 흡혈하는 뱀파이어는 전혀 보지 못한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이상하군.

“카스올리, 더 먹을래?”

 

무의식중에 음식을 우적우적 입에다 넣고 있었나보다. 어느새 텅 비어버린 접시에 식기도구-정확한 명칭을 알 수 없는-가 시끄럽게 긁히고 있었다. 쿠이키가 신경을 쓸 만도 하지.

 

“더 있어요?”

“조금. 먹을 거야?”

“네.”

 

쿠이키가 아까 먹었던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담긴 접시를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나 이외에 아이스츠메라, 쿠이키, 또 토파즈까지도 식사를 마친 것 같아서 빨리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스츠메라?”

 

한동안 내가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쿠이키가 별안간 아이스츠메라에게 말하자 둘만의 암호라도 있는 듯 아이스츠메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럽게-의자가 넘어지거나 접시가 깨지는 일이 없도록-일어서서 선반 쪽으로 갔다.

음? 뭘 꺼내는 거지? 접시에서 가장 큰 조각을 입에 쑤셔 넣고-독특한 향신료 맛 때문에 얼굴을 찌푸렸다-아이스츠메라가 선반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선반 내의 구조나 배치를 보아 쿠이키가 깨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아이스츠메라가 선반 속에서 꺼낸 건 투명한 병이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피? 조금이었지만, 붉은 액체가 병 바닥에서 찰랑거렸다. 오, 저걸 누가 먹을까? 쿠이키? 아니면 아이스츠메라? 쿠이키는 몰라도 아이스츠메라가 냠냠거리며 피를 먹는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병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포크 비슷한 것으로 내 접시에 남은마지막 남은 한 조각을 쿡 찔렀다.

 

“오늘로 끝이겠구나.”

 

쿠이키가 한숨과 함께 말하자 아이스츠메라가 대꾸했다.

 

“그러게요.”

 

나는 아직 덜 씹힌 그 큰 조각-아무래도 버섯 같았다-을 그대로 입에 물고 아이스츠메라가 무얼 하는지 지켜보았다. 그가 어느 새 쿠이키가 꺼내온 불투명한 컵에 붉은 액체를 따라 넣었다. 쪼르륵, 하며 액체가 따라지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양이 적네. 내일부터 당장 동물을 찾아봐야겠다.”

 

쿠이키가 양을 가늠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에 컵을 가져다댔다. 붉은 액체가 그녀의 눈앞에서 출렁였다.

 

“서쪽으로는 사막만 있어요. 서쪽으로 가봤자 경계선밖에 나오지 않을 걸요.”

아이스츠메라가 약간 우쭐해하는 투로 말하자-그에게는 조그마한 지식도 자랑스러운 걸까-쿠이키가 컵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럼 다른 쪽은?”

“남쪽으로는 못 가겠어요. 거기를 갈려면 갑옷 정도는 필수로 준비해야 할 걸요. 길 잃을 확률도 높고. 동쪽과 북쪽은 잘 모르겠어요.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알았어. 일단 이거나 마셔.”

 

다시 찾아온 <둘만의 정겨운 대화>에 나는 포크로 계속 찍고만 있어서 구멍이 숭숭 난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고 씹기만 했다. 뭐 다른 거 할 수 있기나 하나. 쿠이키로부터 컵을 받아 든 아이스츠메라가 메스꺼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무언가 굉장히 쓴 약을 집어든 아이처럼. 문제는 그 뒤에 받을 사탕이 없다는 것이다.

 

“어서. 빨리 마시고 치워야지. 잘 시간 넘었어.”

 

쿠이키가 우물쭈물하는 아이스츠메라에게 엄격한 어투로 말하자 아이스츠메라가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지었다.

 

“못 먹겠어요.”

“징징거리지 말고! 맞고 마실래, 그냥 마실래?”

 

아이스츠메라가 그 예쁘장한 얼굴로 징징대는 게 얼마나 웃기던지. 뱀파이어는 원래 피 마시는 거 아니었어?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괜히 나의 정체성에 대한 오해만 늘어날까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약 1분간 스승과 제자간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쯧쯧, 그냥 후딱 마시고 말지. 왜 저렇게 징징대는 거야.

마침내 아이스츠메라는 지금 당장 마시지 않으면 니트라 부인-아까 그 반투명한 유령 아줌마-이 준 약을 빼앗겠다는 쿠이키의 협박에 굴복하고 컵을 입에다 댔다. 순식간에 마셔버리면 될 양인데도, 홀짝홀짝 마시는 아이스츠메라가 답답해 보였다.

30초쯤 뒤, 아이스츠메라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컵을 내려놨는데, 끔찍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쿠이키는 쯧, 하고 짧게 혀를 차며 그녀의 제자를 바라보더니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순식간에 그녀의 호박색 눈과 마주치자 나는 그만 얼어버렸다.

 

“카스올리, 넌 안 마셔도 돼?”

“네?”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나는, 어쩔 줄 모른 채 쿠이키만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이 자리, 불편해 죽겠네.

 

“아! 넌 뱀파이어가 아니라고 했지.”

 

쿠이키가 손가락을 튕기며 거의 혼잣말처럼 말하자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솔직히 아이스츠메라가 답답해 보이긴 했지만, 쿠이키가 나에게 피를 먹인다면 정말 토할지도 몰라. 키아크라가 손을 베였을 때…그 때 맛보긴 했지만…그 땐 정말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정말 이상하네. 이런 경우는 본 적이 없는데. 하기야, 예외는 있긴 하지만.”

 

쿠이키가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그렇게 말하자-그녀는 분명 내 눈에서 조금이라도 뱀파이어의 특징이 있는지 찾아보고 있을 것이다-나는 <예외>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다.

 

“아이스츠메라?”

“…네.”

쿠이키가 거의 반강제로 자신에게 피를 먹인 것에 대해 불만이 있는지 아이스츠메라가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일부터, 카스올리와 같이 수업해도 괜찮지?”

“네?”

 

아이스츠메라와 내가 동시에 소리지르다시피 대답하자 쿠이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뭘 그렇게 놀래?”

“하지만…”

“아니, 그보다 무슨 수업이요?”

 

아이스츠메라와 내가 동시에 말을 해대자 쿠이키가 정신없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우리 둘의 말을 중지시켰다.

 

“아이스츠메라. 카스올리는 뱀파이어가 아니고, 또 배신자도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었지?”

“…….”

“설마 너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아, 아니요!”

“그럼 됐네. 법에 어긋나는 게 아니니까. 또 너랑 같이 가르치면-특히 검술, 이라고 쿠이키가 덧붙였다-좋을 점도 많을 것 같으니까.”

“…….”

“왜, 내 말이 틀려?”

“아뇨!”

아이스츠메라 얼굴에 불만이 가득 드러나 보였지만 쿠이키가 조목조목 따지는 것에 대해서는 반발할 게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내일부터 당장 같이 하는 거다.”

“…네.”

 

아이스츠메라에게 거의 반강제로 대답을 얻어 낸 쿠이키가 이번에는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카스올리.”

“네?”

“넌 갈 데가 없지, 그렇지?”

“아, 뭐, 그렇죠.”

“그러면 여기서 당분간 지내야 하잖니? 어쩌면 계속일지도-아이스츠메라가 끙,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모르고.”

“그런 셈이죠.”

“그런데 나중에 차차 알겠지만 넌 뱀파이어가 아니라서 우리와 같이 있어도 돼.”

“음…그래요?”

“아무튼. 그건 나중에 배우면 알 수 있는 거고. 어쨌든 너는 이 세계에 거의 무지(無知)하기 때문에 배워야 할 필요가 있어. 아니면 여기서 생존하지 못하겠지.”

“그런가요?”

“그러면, 너도 내일부터 같이 수업을 들어.”

“아, 잠깐만요. 무슨 수업인데요?”

내 질문에 쿠이키가 잠시 숨을 들이쉬더니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대답했다.

 

“기본적으로 검술, 방어술, 역사, 집 짓는 법, 식물과 협상하는 법, 상업, 동식물에 대한 지식, 다른 종족들, 그리고 의술 등을 배우고 추가적으로 지리, 정치 등을 조금 배워. 한마디로 난 가르칠 게 많다는 얘기지. 의술은 내가 못 가르치기 때문에 에오브 부인-마녀라고 보면 되지만 마녀라고 하면 안 돼, 라고 쿠이키가 덧붙였다-이 가르쳐 줄 거야.”

“좀…많네요.”

“괜찮아. 우리에겐 시간이 많으니깐.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 자세한 얘기는 내일 하자. 일단 들어가서 자고. 내일 좀 먼 거리를 가야 될지도 몰라. 푹 자둬. 아, 그리고 카스올리?”

“네?”

“다락방에는 욕실이 없어. 씻으려면 2층 말고-아이스츠메라가 좀 어지럽혀 놨거든-1층에 있는 욕실을 쓰면 돼.”

“음, 알겠어요.”

 

쿠이키가 만족스런 표정으로 손뼉을 짝, 하고 치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자, 이제 정리해야지? 오늘은 아이스츠메라가 하고, 내일은 카스올리가 하도록 해.”

“저 혼자 다 정리하라고요?”

 

아이스츠메라가 멍한 표정으로 묻자 쿠이키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를 쏘아보며 대꾸했다.

 

“당연하지. 접시 깨지 않도록 조심해.”

 

 

-

 

토파즈를 데리고 천장이 약간 낮은 감이 있는 다락방에 들어가서 침대를 찾았다. 아, 저기 있군. 침대에 눕자-그 남자가 제공한 침대보다 푹신한 게 좋았다-밑에서 아이스츠메라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새 내 손을 벗어난 토파즈는 머리맡에 몸을 웅크리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용들도 은근히 귀여운 면이 없잖아 있구나.

오늘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나서 그런지 온몸이 쑤셨다. 그 남자가 날 배신하고 속내를 드러낸 일, 버섯바위에 묶여있었던 일, 아우리스로부터 병을 받은 일, 토파즈와 아이스츠메라, 쿠이키를 만난 일 등등. 그러고 보니 나 아우리스가 준 그 병을 어디에다 뒀더라.

목을 더듬자 목에 안전하게 걸려있는 끈이 만져졌다. 끈을 당겨 삼각뿔 모양의 병을 꺼내자 분홍빛 액체가 찰랑이는 소리를 냈다. 어, 이거 야광인가? 희미하지만, 조금씩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뭐에 쓰는 물건인거지?

그것보다, 내일부터 수업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아이스츠메라와 같이 수업을 한다고? 검술? 걔랑 이얏, 이얏 하면서 싸우는 건가? 걔가 전혀 이길 것 같지 않은데. 혹시 알아? 걔가 의외로 운동을 잘할지도.

그렇게 내일에 대한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품고 나는 눈을 감았다. 내 정체성, 내가 왜 여기 와 있는지, 이게 정말 꿈일지 아닐지에 대한 생각은 버리고서 잠이 들었다. 잠이 들기 전, 웅웅거리는 소리가 다시 찾아온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자장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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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저는 소설같은걸 많이 쓰는 편은 아니지만! 제가 소설을 쓸때는

말하는 부분만 엔터를 써가면서 해요^^

그러면 내용과 말하는 것을 쉽게 구분을 할 수 있어서,

읽기에도 편리했던걸로 기억해요!

나머지는 다 완벽해요!

제가 보기로는요^^

201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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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인 채택 답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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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좋고 재미있네요 소설을 좋아하시나봐요 저도 좋아하는데

201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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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인가 본데요 (소설 마니 보셨나보내요 ㅋ) 님 이런거 이런곳에 올려노으면 마냑 니미 소설작가 된다면 사람들이 안사요ㅜ.ㅜ 그러니깐 친하고 믿을마난 사람들을 보고 평가 부탁 해달라고 하세요 보니깐 마춤법은 뭐 출판사에낸다면 그쪽에서 알아서 하겠쪼? 흠.... 저의 감상평은 RPG가 마니 들어간다면

달빛 조각사 아시조? 그 작품을 선배님! 이라고 불러도 될듯 ㄷㄷ 옴마나 그리고

쓸대없는 말: "이얏 이얏" 등등 소리내는 말은 쫌 자제 하는게 조을듯 걍 길게 말하는것 예를들어

"안뇽! 나눈 네티준 이라고 해 ㅎㅎ 우와 이 칼 완전 멋지구나 우왕 나주라" (내가 그냥 생각나는데로쓴것)

이런 글을 써 놓고  가운데에 쓸대없는 말을 써노으면 조을듯

어쨋 든 RPG점 너어주세요ㅠ 아니면 장르를 정해노으셈

201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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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껀데 ㅈㄴ 재밌게 봤습니다❤️

2020.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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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9년전 질문인데 답변이 가능하네요..? 홀홀홀

202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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