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이성계와 이방원의 관계?
hjh6**** 조회수 80,591 작성일2005.04.24

이성계와 이방원의 관계에 대해 알려주세요.

 

정몽주와 이방원의 '하여가', '단심가',

그리고 함흥차사의 유래..

 

제가 알기로는 이성계와 이방원이 그리 사이가

좋지는 않다고 알고 있는데요.

 

이렇게 이성계와 이방원의 관계를 연극 또는 노래로

꾸미기로 했거든요.

 

여러 유명한 사례를 부드럽게(응?)이어서

알려주세요. 연극이나 노래로 쉽게 꾸밀수있게;

 

부탁드립니다!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3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탈퇴한 사용자 답변

 

 

 

 

 

 

 

이성계와 이방원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입니다

 

이성계가 아버지이고, 이방원은 이성계의 아들입니다

 

이성계가 이방원을 싫어한 이유는 동생을 죽였기때문이죠

 

이방원은 이성계가 왕이 될수있게 해준 공을 앉고있는 인물중의 한명입니다

 

그러면 세자의 자리는 이방원에게 와야할텐데 이성계는 이방원의 성격이 너무 과격하여

 

임금감이 못된다고 생각하여 막내왕자인 방석을 세자로 삼았습니다

 

그걸 못 마땅하게 여긴 이방원은 어머니의 배가 다른 방번과 방석을 살해하였습니다

 

그 시기에 방번과 방석의 어머니인 신덕왕후 강씨도 세상을 떴으니

 

이성계는 충격이 컸던거죠

 

이성계가 이방원을 싫어했던 이유를 알수있는 일이 있습니다

 

이방원이 왕위에 올라와서 이성계를 모시려고 신하들을 시켰지만

 

돌아오는 사람이 없었다고합니다

 

그리고 함흥 차사에 대해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둘째왕자인 방과가 왕위에 오른 뒤 도읍을 개경으로 옮기자 태조 이성계는

 

마지못해 따라갔으나 세상이 귀찮아졌다

 

둘째 부인 강씨가 죽었을 때 부터 슬픔에 빠져 기운을 잃었던 태조였다

 

이후, 강씨가 낳은 두 왕자마저 잃은 난을 겪은 뒤로부터 병석에서 누워지내다시피했으며

 

'방원'이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떨며 미워했다

 

그런 태조가 온다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개경을 훌쩍 떠나버렸다

 

태조는 이름난 절을 찾아 오대산과 금강산을 거처 고향인 함흥에 닿았으며

 

그곳의 별궁에 거처를 정했다

 

태조는 함흥 별궁에서 옛 친구들과 바둑을 두며 세월을 보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한편, 방원은 태종이 되어 정종을 상왕으로 올리고 태조를 태상왕으로 높였으나

 

자신을 저버리고 떠난 아버지가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태종(이방원)은 태상왕이 함흥에 머문다는 소식을 듣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모셔오기로 마음먹었다. '차사(주요임무를 맡은사신)를 보내야지'

 

태종은 함흥으로 차사를 보내었다.한데, 보낸 사신이 돌아오지않았다.

 

여러 차례 보내도 마찬가지로 소식이 없었다.

 

태조의 어릴때 친구인 박순도 차사로 갔다가 그만 죽음을 당하고말았다.

 

요즘도 어디에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으면

'함흥차사'라고 하는데, 바로 여기서 그 유래가 생긴 것이다.

 

그럼 전 이만..

 

 

2005.04.24.

  • 채택

    질문자⋅지식인이 채택한 답변입니다.

  • 출처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3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daak****
지존
한국사 90위, 번역, 통역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이방원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입니다. 고려말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정권을 잡자 그를 지지했던 신진사대부들은 두파로 나뉘어 지는데 하나는 정도전 중심으로 한 급진파로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했고 다른 하나는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로 우왕의 아들인 창을 왕으로 추대했읍니다. 결국 창이 왕이 되어 창왕에 등극하지만 이성계 일파에게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폐위당하고 공양왕이 즉위하는데 그는 과단성이 없어 모든 실권이 이성계에게 넘어 갑니다. 그러나 정몽주 등 온건파들은 여전히 고려에 대한 충성을 다하고 있었는데 정몽주의 인품과 재능을 무척이나 아꼈던 이성계와 이방원은 그를 자기쪽에 끌어 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고자 하여가라는 시조를 지어 보냅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그러자 정몽주는 단심가로 화답하여 자신의 마음을 밝힙니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것을 본 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음을 깨닫고 선죽교에세 자신의 부하인 조영규를 시켜 정몽주를 살해합니다. 이 이야기를 보고받은 이성계는 크게 노하여 이방원을 꾸짖었다고 합니다. 아마 이때부터 이성계와 이방원은 사이가 안 좋았졌던 것 같습니다. 그후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은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합니다. 그리하여 조선이 건국되고 이성계는 조선 태조가 되는데 세월이 흘러 세자문제로 대신들의 의견이 갈립니다. 이성계에게는 두명의 부인에게서 여덟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인 방우는 고려를 배신한 아버지가 싫다 하며 산속으로 숨어 버렸고 다른 아들 중 세자를 골라야 하는데 모두들 조선건국에 가장 공이 많은 방원을 생각했으나 정도전과 이성계의 둘째 왕비인 강씨의 압력으로 막내인 방석이 세자가 됩니다. 이것은 방원의 거칠고 과격한 성질을 염려한 이성계와 공신 정도전의 의도와 자신의 아들중에서 보위를 잇게 하려는 강씨의 정치적 야심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에 방원과 그의 형인 네째 방간은 불만을 품고 있다가 1398년 태조가 병석에 눕자 그틈을 이용하여 정도전과 남은 등이 이성계의 첫째 부인인 한씨의 아들들 즉 자신과 형제들을 죽이려 했다고 그들을 잡아 죽이고 그 책임을 모두 세자에게 돌리고 일곱째인 방번과 귀양보낸 뒤 살해합니다. 그리고 세자의 자리는 둘째인 방과에게 넘깁니다.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입니다. 한편 형제들이 서로 죽이는 사건을 본 태조는 상왕으로 물러나고 방과는 2대 임금인 정종이 됩니다. 그러나  권력은 모두 방원에게 있었는데 이에 방간은 불만을 품게 되고 제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자신의 공이 과소평가됐다고 생각하던 박포는 이런 방간을 찾아가 충동질을 하여 난을 일으키게 하여 방원과 대적하지만 방원의 승리로 끝나고 박포는 사형당하고 방간은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정종은 서둘러 왕위를 방원에게 넘기고 방원은 3대 임금 태종이 됩니다. 이 사건이 제2차 왕자의 난입니다. 그렇게 정종은 상왕이 되고 자동적으로 태조는 태상왕이 되었는데 두차례에 걸친 자식들의 싸움에 염증을 느낀 태조는 고향인 함흥으로 낙향하여 은거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자 태종은 아버님을 모시기 위해 여러 차례 차사(중요한 임무를 맡겨 파견하는 신하)를 보내 태조를 청하지만 그때마다 태조는 활로 그들을 쏘아 죽여 자신의 노여움을 표현합니다. 그 다음부터 심부름을 시켜 보냈는데 아무 소식이 없는 경우를 함흥차사라 부릅니다. 그러나 평소부터 친분이 있었던 박순의 간청과 억울한 죽음 그리고 오랜 벗인 무학대사의 권고로 마침내 태조는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어 태종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다가 생을 마칩니다.  

2005.04.24.

  • 채택

    질문자가 채택한 답변입니다.

  • 출처

    그냥 여기 저기에서...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2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탈퇴한 사용자 답변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은 부자관계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태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는대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 일 중 하나가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를 죽이는 일이였죠.

 

그 당시 많은 관료들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정몽주는 새 세상을 열되 고려라는 나라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이성계와 정몽주는 뜻이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방원이 생각했습니다. 정몽주를 끌여드려야겠다고 말입니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리고는 시조 하여가를 읊었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 시조의 풀이는 조선인던 고려이던 힘을 합쳐 새롭운 나라를 열자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시조를 듣고 정몽주가 답시조 단심가를 읊었습니다.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이 시조의 풀이는 자신이 죽어 뼈가 흩날려도 고려에게 충성하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방원이 이 시조를 듣고 정몽주는 조선개국에 방해가 될 인물이므로 없애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몽주가 이방원집을 떠나 선죽교에 이르렀을때 철퇴로 정몽주를 살해합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였다는 말을 들은 이성계는 이방원을 크게 꾸짖습니다.

 

비록 조선개국에 도움이 안될 인물이지만 죽이기에는 그 충성이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쨌든 이성계가 조선을 세워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인인 계비 강씨사이에 낳은 막내아들 의안대군(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그러자 이성계의 정비인 한씨시에 낳은 왕자들이 노발대발합니다.

 

건장한 8명의 왕자가 아닌 그것도 둘째 부인사이에 나온 코흘리개 막내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고 말입니다.

 

조선개국에 가장 공을 많이 들은 이방원은 당연히 자신이 세자로 책봉될줄 알았지만 방석이 세자로 책봉됐다는 소리를 듣자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세자 방석과 그의 동복형 이방과는 이방원의 손에 죽게 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두 왕자가 죽자 태조 이성계는 왕위를 둘째아들(정종)에게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나버립니다.

 

이 다음에도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지만 그 일은 생략하겠습니다.

 

어쨋든 방원이 다시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정종에게 양위를 받아 임금이됩니다.

 

같은 피를 이은 자신의 형제끼리 싸웠다는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다시 한양으로 내려가 옥쇄를 가지고 함흥으로 다시 떠납니다.

 

옥쇄는 임금의 상징입니다. 그런 물건을 태조가 가지고 가자 이방원은 함흥으로 차사를 보내 이성계를 설득하여 한양으로 오게 합니다.

 

하지만 함흥에 있는 태조 이성계는 이방원이 보내는 차사를 모두 죽여버립니다.

 

여기서 함흥차사라는 말이 유래됩니다.

 

함흥차사란 심부름을 가서 돌아오지 않거나 아무 소식이 없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2005.04.24.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