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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이방원과 정몽주와 이성계
chickens 조회수 8,514 작성일2007.06.18

이방원 이성계 정몽주에 대하여 알려주세요.

출생지와 출생일 매우 구체적으로 이일을 전문으로하는 분이나 관심 많아서 정확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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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

자 유덕(). 휘 방원(). 태조의 5남.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 비는 민제()의 딸 원경왕후().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이 되고, 후에 아버지 이성계() 휘하에서 신진정객()들을 포섭하여 구세력의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다.

1388년 정조사(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392년(공양왕 4) 정몽주()를 제거하여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혔으며, 같은 해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서 등극()하자 정안군()에 봉해졌다. 태조가 이모제()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398년(태조 7) 중신() 정도전() ·남은() 등을 살해하고, 이어 강씨 소생의 방석 ·방번()을 귀양보내기로 하고, 도중에 죽여 버렸다. 이것을 제1차 왕자의난이라 하며 방원은 이때 세자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동복형()인 방과(:)에게 사양하였다.

1400년(정종 2) 넷째 형인 방간()이 박포()와 공모하여 방원 일당을 제거하려 하자, 이를 즉시 평정하고 세제()에 책봉되었다. 방간 ·박포의 난을 제2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제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된 후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 사병을 혁파()하고 1402년(태종 2) 문하부()를 폐지하였으며 의정부()를 설치하였다. 또 낭사()는 사간원()으로 분립시켰으며, 삼사()는 사평부()로 개칭하고 삼군도총제부()를 신설하였으며, 1405년 1월에는 의정부의 서무()를 육조()에서 분장()하게 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한편 억불숭유()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많은 사찰()을 폐쇄한 후, 그 사찰에 소속되었던 토지 ·노비를 몰수하였으며, 또 비기() ·도참()의 사상을 엄금하여 미신타파에 힘썼다. 한편 호패법()을 실시하여 양반 ·관리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가 이를 소지하게 함으로써 인적 자원()을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며, 개가()한 자의 자손은 등용을 금지하여 적서()의 차별을 강요하였다.

국방정책으로서 10년 여진족의 일파인 모련위() 파아손()의 무리를 죽였고, 노략질이 심한 야인(:여진인)들을 회유하여 변방의 안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 문화정책으로서 주자소()를 세워 1403년(태종 3) 동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었으며, 하륜() 등에게 《동국사략()》 《고려사()》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경제정책으로서 호포()를 폐지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저화()를 발행하여 경제유통이 잘 되도록 유의하였다. 1402년(태종 2) 상하 국민의 남소() ·월소()를 엄금하였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기 위하여 신문고()를 설치하였는데, 그 뜻은 매우 좋은 것이었으나 뚜렷한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다. 고려 말기의 순군제도()를 여러 차례 개편하여 최고의 법사()인 의금부()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국왕 직속의 근위대()로서 역모()를 방지하는 기관이었다.

1404년 송도()에서 한성()으로 천도하였으며, 1418년 세자(:)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서 국정을 감독하였다.
태종의 능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이며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몽주

본관 연일(). 자 달가(). 호 포은(). 초명 몽란()·몽룡(). 시호 문충(). 영천()에서 태어났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수찬·위위시승()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예조정랑 겸 성균박사()·성균사예()를 지냈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 등을 거쳐 성균사성()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使) 홍사범()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으로 이인임()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진현관제학()·예의판서()·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가 되어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에 올라 성절사(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수문하시중()·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使)·경영전영사(殿)·우문관대제학()·익양군충의백()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을 참작, 《신율()》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이 있다.

 

이성계

조선 제1대 왕(1392∼1398). 성은 이(李), 이름은 성계(成桂),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 본관은 전주(全州). 즉위 후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자춘(子春)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대담하고 궁술에 뛰어났다. 선조들이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에서 원(元)나라 벼슬을 하였고, 아버지 자춘도 원나라 쌍성총관부의 천호(千戶)로 있었다. 자춘은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내응(內應)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1361년 금오위상장군·동북면상만호(金吾衛上將軍 東北面上萬戶)가 되어 독로강만호(禿禿江萬戶) 박의(朴儀)의 반란군을 토벌하고, 홍건적에게 유린된 개경(開京)을 1362년 적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전공을 세웠다. 그해 원나라 나하추[納哈出(납합출)]의 침입을 함흥평야에서 격퇴시켰고, 1364년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을 추대하여 원병(元兵) 1만 명으로 평안도에 침입하자 최영(崔瑩)과 함께 수주(隋州) 달천에서 모두 물리쳤다. 이어 여진족 삼선(三善)·삼개(三介)의 침입을 격퇴, 동북면의 평온을 회복하였다. 그해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1368년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화령부윤 등의 벼슬을 지냈다. 1377년(우왕 3) 경상도·지리산 일대에 창궐하던 왜구를 크게 물리쳤고, 1380년 양광도(楊廣道)·전라도·경상도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바투[阿基拔都(아기발도);阿只拔都(아지발도)]가 이끌던 왜구를 운봉(雲峰)에서 격파하였다. 1382년 동북면 일대를 노략질하던 여진인 호바투[胡拔都(호발도)]를, 1384년 함주(咸州;지금의 咸興)에 쳐들어 온 왜구를 소탕하였다. 13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고, 명(明)나라 철령위 설치문제로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우군도통사가 되어 정벌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 정치적·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듬해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 1390년 8도의 병권을 장악하였으며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1391년 다시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 신흥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1392년 마지막 반대세력인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한 뒤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남은(南誾) 등의 급진개혁파 사대부들과 결탁하여 공양왕을 원주(原州)로 내쫓고, 수창궁(壽昌宮)에서 선위(禪位)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하여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의장과 법제도 고려의 것을 따랐으나, 1393년(태조 2) 3월 15일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바꾸었다. 또한 건국이념으로 사대교린정책·숭유배불정책·농본민생정책 등 3대정책을 내세웠다. 1393년 9월 왕사(王師) 무학(無學)의 의견에 따라 한양(漢陽)에 새 왕성 건설을 시작, 1394년 10월 천도하였고 1396년 9월에 4대문(肅靖門·興仁門·崇禮門·敦義門)과 4소문(光熙門·昭德門·彰義門·弘化門)을 갖춘 궁성의 규모를 완성하였다. 법제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경제육전(經濟六典)》 등 각종 법전을 편찬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자 사이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태조 즉위 뒤 계비 강씨 소생인 방석(芳碩)을 세자로 결정하였으나 정비 소생 방원(芳遠)이 불만을 품어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원의 요청대로 방과(芳果;定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00년(정조 2) 방원이 세자로 책립되고 이어 왕위에 오르자 정종이 상왕으로 되고 태조는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태조는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에 대한 증오심으로 함주로 가 지내다가 태종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한양에 돌아왔다. 태조가 함주에 있을 때 태종이 문안(問安) 차사(差使)를 보내면 그때마다 그 차사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함흥차사>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였고, 1408년 5월 24일 창덕궁에서 죽었다. 묘호는 태조, 능호은 건원릉(健元陵). 시호는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2007.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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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

자 유덕(). 휘 방원(). 태조의 5남.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 비는 민제()의 딸 원경왕후().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이 되고, 후에 아버지 이성계() 휘하에서 신진정객()들을 포섭하여 구세력의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다.

1388년 정조사(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392년(공양왕 4) 정몽주()를 제거하여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혔으며, 같은 해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서 등극()하자 정안군()에 봉해졌다. 태조가 이모제()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398년(태조 7) 중신() 정도전() ·남은() 등을 살해하고, 이어 강씨 소생의 방석 ·방번()을 귀양보내기로 하고, 도중에 죽여 버렸다. 이것을 제1차 왕자의난이라 하며 방원은 이때 세자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동복형()인 방과(:)에게 사양하였다.

1400년(정종 2) 넷째 형인 방간()이 박포()와 공모하여 방원 일당을 제거하려 하자, 이를 즉시 평정하고 세제()에 책봉되었다. 방간 ·박포의 난을 제2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제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된 후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 사병을 혁파()하고 1402년(태종 2) 문하부()를 폐지하였으며 의정부()를 설치하였다. 또 낭사()는 사간원()으로 분립시켰으며, 삼사()는 사평부()로 개칭하고 삼군도총제부()를 신설하였으며, 1405년 1월에는 의정부의 서무()를 육조()에서 분장()하게 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한편 억불숭유()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많은 사찰()을 폐쇄한 후, 그 사찰에 소속되었던 토지 ·노비를 몰수하였으며, 또 비기() ·도참()의 사상을 엄금하여 미신타파에 힘썼다. 한편 호패법()을 실시하여 양반 ·관리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가 이를 소지하게 함으로써 인적 자원()을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며, 개가()한 자의 자손은 등용을 금지하여 적서()의 차별을 강요하였다.

국방정책으로서 10년 여진족의 일파인 모련위() 파아손()의 무리를 죽였고, 노략질이 심한 야인(:여진인)들을 회유하여 변방의 안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 문화정책으로서 주자소()를 세워 1403년(태종 3) 동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었으며, 하륜() 등에게 《동국사략()》 《고려사()》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경제정책으로서 호포()를 폐지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저화()를 발행하여 경제유통이 잘 되도록 유의하였다. 1402년(태종 2) 상하 국민의 남소() ·월소()를 엄금하였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기 위하여 신문고()를 설치하였는데, 그 뜻은 매우 좋은 것이었으나 뚜렷한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다. 고려 말기의 순군제도()를 여러 차례 개편하여 최고의 법사()인 의금부()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국왕 직속의 근위대()로서 역모()를 방지하는 기관이었다.

1404년 송도()에서 한성()으로 천도하였으며, 1418년 세자(:)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서 국정을 감독하였다.
태종의 능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이며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몽주

본관 연일(). 자 달가(). 호 포은(). 초명 몽란()·몽룡(). 시호 문충(). 영천()에서 태어났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수찬·위위시승()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예조정랑 겸 성균박사()·성균사예()를 지냈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 등을 거쳐 성균사성()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使) 홍사범()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으로 이인임()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진현관제학()·예의판서()·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가 되어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에 올라 성절사(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수문하시중()·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使)·경영전영사(殿)·우문관대제학()·익양군충의백()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을 참작, 《신율()》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이 있다.

 

이성계

조선 제1대 왕(1392∼1398). 성은 이(李), 이름은 성계(成桂),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 본관은 전주(全州). 즉위 후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자춘(子春)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대담하고 궁술에 뛰어났다. 선조들이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에서 원(元)나라 벼슬을 하였고, 아버지 자춘도 원나라 쌍성총관부의 천호(千戶)로 있었다. 자춘은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내응(內應)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1361년 금오위상장군·동북면상만호(金吾衛上將軍 東北面上萬戶)가 되어 독로강만호(禿禿江萬戶) 박의(朴儀)의 반란군을 토벌하고, 홍건적에게 유린된 개경(開京)을 1362년 적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전공을 세웠다. 그해 원나라 나하추[納哈出(납합출)]의 침입을 함흥평야에서 격퇴시켰고, 1364년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을 추대하여 원병(元兵) 1만 명으로 평안도에 침입하자 최영(崔瑩)과 함께 수주(隋州) 달천에서 모두 물리쳤다. 이어 여진족 삼선(三善)·삼개(三介)의 침입을 격퇴, 동북면의 평온을 회복하였다. 그해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1368년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화령부윤 등의 벼슬을 지냈다. 1377년(우왕 3) 경상도·지리산 일대에 창궐하던 왜구를 크게 물리쳤고, 1380년 양광도(楊廣道)·전라도·경상도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바투[阿基拔都(아기발도);阿只拔都(아지발도)]가 이끌던 왜구를 운봉(雲峰)에서 격파하였다. 1382년 동북면 일대를 노략질하던 여진인 호바투[胡拔都(호발도)]를, 1384년 함주(咸州;지금의 咸興)에 쳐들어 온 왜구를 소탕하였다. 13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고, 명(明)나라 철령위 설치문제로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우군도통사가 되어 정벌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 정치적·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듬해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 1390년 8도의 병권을 장악하였으며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1391년 다시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 신흥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1392년 마지막 반대세력인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한 뒤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남은(南誾) 등의 급진개혁파 사대부들과 결탁하여 공양왕을 원주(原州)로 내쫓고, 수창궁(壽昌宮)에서 선위(禪位)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하여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의장과 법제도 고려의 것을 따랐으나, 1393년(태조 2) 3월 15일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바꾸었다. 또한 건국이념으로 사대교린정책·숭유배불정책·농본민생정책 등 3대정책을 내세웠다. 1393년 9월 왕사(王師) 무학(無學)의 의견에 따라 한양(漢陽)에 새 왕성 건설을 시작, 1394년 10월 천도하였고 1396년 9월에 4대문(肅靖門·興仁門·崇禮門·敦義門)과 4소문(光熙門·昭德門·彰義門·弘化門)을 갖춘 궁성의 규모를 완성하였다. 법제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경제육전(經濟六典)》 등 각종 법전을 편찬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자 사이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태조 즉위 뒤 계비 강씨 소생인 방석(芳碩)을 세자로 결정하였으나 정비 소생 방원(芳遠)이 불만을 품어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원의 요청대로 방과(芳果;定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00년(정조 2) 방원이 세자로 책립되고 이어 왕위에 오르자 정종이 상왕으로 되고 태조는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태조는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에 대한 증오심으로 함주로 가 지내다가 태종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한양에 돌아왔다. 태조가 함주에 있을 때 태종이 문안(問安) 차사(差使)를 보내면 그때마다 그 차사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함흥차사>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였고, 1408년 5월 24일 창덕궁에서 죽었다. 묘호는 태조, 능호은 건원릉(健元陵). 시호는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200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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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본관 연일(). 자 달가(). 호 포은(). 초명 몽란()·몽룡(). 시호 문충(). 영천()에서 태어났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수찬·위위시승()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예조정랑 겸 성균박사()·성균사예()를 지냈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 등을 거쳐 성균사성()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使) 홍사범()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으로 이인임()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진현관제학()·예의판서()·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가 되어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에 올라 성절사(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수문하시중()·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使)·경영전영사(殿)·우문관대제학()·익양군충의백()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을 참작, 《신율()》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이 있다.

200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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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

자 유덕(). 휘 방원(). 태조의 5남.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 비는 민제()의 딸 원경왕후().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이 되고, 후에 아버지 이성계() 휘하에서 신진정객()들을 포섭하여 구세력의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다.

1388년 정조사(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392년(공양왕 4) 정몽주()를 제거하여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혔으며, 같은 해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서 등극()하자 정안군()에 봉해졌다. 태조가 이모제()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398년(태조 7) 중신() 정도전() ·남은() 등을 살해하고, 이어 강씨 소생의 방석 ·방번()을 귀양보내기로 하고, 도중에 죽여 버렸다. 이것을 제1차 왕자의난이라 하며 방원은 이때 세자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동복형()인 방과(:)에게 사양하였다.

1400년(정종 2) 넷째 형인 방간()이 박포()와 공모하여 방원 일당을 제거하려 하자, 이를 즉시 평정하고 세제()에 책봉되었다. 방간 ·박포의 난을 제2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제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된 후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 사병을 혁파()하고 1402년(태종 2) 문하부()를 폐지하였으며 의정부()를 설치하였다. 또 낭사()는 사간원()으로 분립시켰으며, 삼사()는 사평부()로 개칭하고 삼군도총제부()를 신설하였으며, 1405년 1월에는 의정부의 서무()를 육조()에서 분장()하게 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한편 억불숭유()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많은 사찰()을 폐쇄한 후, 그 사찰에 소속되었던 토지 ·노비를 몰수하였으며, 또 비기() ·도참()의 사상을 엄금하여 미신타파에 힘썼다. 한편 호패법()을 실시하여 양반 ·관리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가 이를 소지하게 함으로써 인적 자원()을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며, 개가()한 자의 자손은 등용을 금지하여 적서()의 차별을 강요하였다.

국방정책으로서 10년 여진족의 일파인 모련위() 파아손()의 무리를 죽였고, 노략질이 심한 야인(:여진인)들을 회유하여 변방의 안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 문화정책으로서 주자소()를 세워 1403년(태종 3) 동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었으며, 하륜() 등에게 《동국사략()》 《고려사()》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경제정책으로서 호포()를 폐지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저화()를 발행하여 경제유통이 잘 되도록 유의하였다. 1402년(태종 2) 상하 국민의 남소() ·월소()를 엄금하였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기 위하여 신문고()를 설치하였는데, 그 뜻은 매우 좋은 것이었으나 뚜렷한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다. 고려 말기의 순군제도()를 여러 차례 개편하여 최고의 법사()인 의금부()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국왕 직속의 근위대()로서 역모()를 방지하는 기관이었다.

1404년 송도()에서 한성()으로 천도하였으며, 1418년 세자(:)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서 국정을 감독하였다.
태종의 능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이며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몽주

본관 연일(). 자 달가(). 호 포은(). 초명 몽란()·몽룡(). 시호 문충(). 영천()에서 태어났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수찬·위위시승()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예조정랑 겸 성균박사()·성균사예()를 지냈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 등을 거쳐 성균사성()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使) 홍사범()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으로 이인임()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진현관제학()·예의판서()·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가 되어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에 올라 성절사(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수문하시중()·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使)·경영전영사(殿)·우문관대제학()·익양군충의백()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을 참작, 《신율()》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이 있다.

 

이성계

조선 제1대 왕(1392∼1398). 성은 이(李), 이름은 성계(成桂),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 본관은 전주(全州). 즉위 후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자춘(子春)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대담하고 궁술에 뛰어났다. 선조들이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에서 원(元)나라 벼슬을 하였고, 아버지 자춘도 원나라 쌍성총관부의 천호(千戶)로 있었다. 자춘은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내응(內應)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1361년 금오위상장군·동북면상만호(金吾衛上將軍 東北面上萬戶)가 되어 독로강만호(禿禿江萬戶) 박의(朴儀)의 반란군을 토벌하고, 홍건적에게 유린된 개경(開京)을 1362년 적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전공을 세웠다. 그해 원나라 나하추[納哈出(납합출)]의 침입을 함흥평야에서 격퇴시켰고, 1364년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을 추대하여 원병(元兵) 1만 명으로 평안도에 침입하자 최영(崔瑩)과 함께 수주(隋州) 달천에서 모두 물리쳤다. 이어 여진족 삼선(三善)·삼개(三介)의 침입을 격퇴, 동북면의 평온을 회복하였다. 그해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1368년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화령부윤 등의 벼슬을 지냈다. 1377년(우왕 3) 경상도·지리산 일대에 창궐하던 왜구를 크게 물리쳤고, 1380년 양광도(楊廣道)·전라도·경상도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바투[阿基拔都(아기발도);阿只拔都(아지발도)]가 이끌던 왜구를 운봉(雲峰)에서 격파하였다. 1382년 동북면 일대를 노략질하던 여진인 호바투[胡拔都(호발도)]를, 1384년 함주(咸州;지금의 咸興)에 쳐들어 온 왜구를 소탕하였다. 13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고, 명(明)나라 철령위 설치문제로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우군도통사가 되어 정벌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 정치적·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듬해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 1390년 8도의 병권을 장악하였으며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1391년 다시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 신흥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1392년 마지막 반대세력인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한 뒤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남은(南誾) 등의 급진개혁파 사대부들과 결탁하여 공양왕을 원주(原州)로 내쫓고, 수창궁(壽昌宮)에서 선위(禪位)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하여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의장과 법제도 고려의 것을 따랐으나, 1393년(태조 2) 3월 15일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바꾸었다. 또한 건국이념으로 사대교린정책·숭유배불정책·농본민생정책 등 3대정책을 내세웠다. 1393년 9월 왕사(王師) 무학(無學)의 의견에 따라 한양(漢陽)에 새 왕성 건설을 시작, 1394년 10월 천도하였고 1396년 9월에 4대문(肅靖門·興仁門·崇禮門·敦義門)과 4소문(光熙門·昭德門·彰義門·弘化門)을 갖춘 궁성의 규모를 완성하였다. 법제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경제육전(經濟六典)》 등 각종 법전을 편찬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자 사이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태조 즉위 뒤 계비 강씨 소생인 방석(芳碩)을 세자로 결정하였으나 정비 소생 방원(芳遠)이 불만을 품어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원의 요청대로 방과(芳果;定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00년(정조 2) 방원이 세자로 책립되고 이어 왕위에 오르자 정종이 상왕으로 되고 태조는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태조는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에 대한 증오심으로 함주로 가 지내다가 태종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한양에 돌아왔다. 태조가 함주에 있을 때 태종이 문안(問安) 차사(差使)를 보내면 그때마다 그 차사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함흥차사>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였고, 1408년 5월 24일 창덕궁에서 죽었다. 묘호는 태조, 능호은 건원릉(健元陵). 시호는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2007.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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