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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평양성 전투의 전투 내용
비공개 조회수 12,220 작성일2011.10.23

제가 방과후때 선생님께서 <평양성>이라는 영화를 보여주셔서 봤는데요,, 쌤이 감상문을 써오래서..ㅠㅠ정말 쓰기 싫지만 그래도 써야 해요...

감상문 작성 요령(질문)

질문 1. 영화'평양성'의 시대적 배경

질문 2. "평양성"에 대한 조사

질문 3. 나 ·당 연합군 vs 백제 ·고구려와의 전투 내용 서술

위에 질문 1,2는 대충 썼는데... 질문 3은 진짜루 모르겠어요...

되도록이면 질문 3에 대해 답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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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 영화'평양성'의 시대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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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668년 9월(음력) 신라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락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사건.

 

 

 

질문 2. "평양성"에 대한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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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은 대성산성과 안학궁성(安鶴宮城)을 가리키는데, 586년까지 고구려의 도성으로 사용했습니다.

대성산성은 평양 중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12㎞ 지점에 위치한 묘향산의 지맥인 을지봉(해발 274m)을 비롯한 6개의 봉우리를 연결한 포곡식 산성으로 알려졌고, 성벽의 둘레는 9.2㎞로 동서가 긴 타원형의 대규모 성곽이죠(북한산성의 규모와 비슷).

성벽의 구조는 바깥쪽에 돌을 쌓고 안에는 흙을 채우는 전형적인 고구려식 방법으로 축조했습니다.

성문마다 주변에 돌출된 치(雉)를 설치하여 방어력을 높였고 정문인 남문을 비롯하여 성벽을 따라 문터가 19개소나 확인되었죠.

성 안에는 큰 계곡이 2개 있으며 170여 개소의 연못이 확인되고 있어 고립되더라도 충분한 식수가 있는 구조였습니;다.

대성산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안학궁성은 국왕이 상주하는 궁성으로 발굴결과 52개소의 건물이 확인되었는데 안학궁은 대성산 기슭에 위치한 궁궐로 남북 및 동서 길이가 약 620m의 네모난 평면구조의 작은 성이었죠.

이곳에 궁성을 쌓고 그 안에 남북 방향의 3개 축을 기준으로 건물을 배치해 산성인 대성산성과 평지성인 안학궁성이 한개의 평양성으로 기능했다고합니다.

 

 

 

질문 3. 나 ·당 연합군 vs 백제 ·고구려와의 전투 내용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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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5년 당시 고구려의 실질적인 정치지도자 (지금의 수상(국무총리))였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죽자 집권층 내부에서 심각한 정권쟁탈전이 전개됩니다.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 그리고 그의 동생인 남건과 남산의 3형제간 내분이 전개된것이죠.

이 같은 고구려 내부의 약점이 노출되자 당 고종은 이때야말로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라 하며 667년 제3차 여당전쟁을 일으키게 되죠.

당나라군은 군사적 요충지 신성을 목표로 향하게 되고 신城의 성주는 항전을 결심하지만 매국노 사부구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 성주를 붙잡고 항복을 하였습니다. 신성이 함락되자 주변 16개의 성이 항복하고, 연남건은 신성을 탈환하기 위해 5만의 정예군을 파견하였으나 전멸하고, 남소성, 목저성, 창암성 등 3개의 성이 추가로 함락되지만, 안시성을 공격하던 당나라 공격부대가 안시성주 양만춘의 3만 군사의 기습으로 인해 궤멸되고, 압록강으로 진격하던 이세적의 당나라군 역시 고구려는 뛰어난 정보전을 이용하여 격파당합니다.

이듬해 668년, 당나라군이 부여성을 함락시키자 주위 40성이 항복하였고 이에 연남건은 또 5만의 정예군을 투입해 당나라군으로부터 1차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결국에 설인귀에게 대패해 5만중 3만의 군사를 잃게됩니다. 한편, 신라군 역시 문무왕이 27만 대군을 파견하여 668년 6월 22일, 당시 고구려의 부수도였던 한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의 성을 대부분 함락하자 그대로 평양성으로 진격하게 됩니다.이에 연개소문의 뒤를 이어 대막리지가 되었던 연남건은 장기전으로 끌고가려 하였으나 대부분의 성이 함락당해 작전은 수포로 돌아간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었습니다.

668년 7월 말 당의 선발대가 먼저 평양성 외곽에 도착했고, 신라군도 평양 근교의 사천벌판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하고 평양성까지 이르게 되었죠.

 

평양성 전투는 한달 여가량 지속되었는데, 패배를 확신한 보장왕이 연남산을 보내 항복하였지만, 연남건은 이에 반대하여 평양성의 문을 굳게 닫고 항거해 668년 9월의 마지막 평양성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당연합군은 평양성이 바라다보이는 사수(蛇水)에 집결했고 성이 포위된 상태에서 급박해진 남건이 한 번의 결전으로 승부를 결판내기 위해 성문을 열고 고구려군을 내보냈지만 기병의 규모가 약해 고구려군이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신라군이 사수의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 진격하여 고구려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이로인해 고구려군의 군영은 의외로 쉽게 무너지면서, 패잔병들이 성문 안으로 몰려들어갔고, 평양성 안에 있던 백성들과 군가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습니다.

9월 21일 나당연합군이 평양을 에워산 상태로 신라군의 공격은 계속 이어졌고 5일 동안 맹렬한 공격을 받는 가운데 고구려 저항군 수뇌부에서 변절자가 나왔습니다.

저항군의 최고지휘자인 남건의 심복인 승려 신성, 오묘등이 이세적과 내통하여 평양성의 성문을 열었죠.

신라군 기병 500명이 먼저 평양성 안으로 들어와 침공로를 열어놓자 당나라군대가 한꺼번에 몰려들어 평양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 후 보장왕이 이세적에게 무릎 꿇고 절을 올리며 항복을 함으로써 고구려는 완전히 멸망하였고, 당나라 군은 보장왕과 남건을 사로잡아 돌아갔죠.

2011.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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