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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안동의 민속놀이
chlt**** 조회수 1,510 작성일2013.08.23
안동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민속놀이를 자세하게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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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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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민속놀이)

 

1.안동차전놀이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제24호 
지 정 일 1969.01.07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운안동 132-21 
기능보유자  안동차전놀이보존회


안동 차전놀이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안동지방에서 행해지던 민속놀이의 하나로 동채싸움이라고도 부른다. 유래에 대하여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의 싸움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 놀이를 위해 연말이면 안동 근처에서 적당한 나무를 미리 골라 두었다가 산신에게 고사를 지내고 나무를 베어 운반한다. 동채의 크기나 견고성이 싸움의 승패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주기 때문에 동채를 만들 때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대문을 잠그고 만든다. 마을을 동서로 나누어 편을 가르는데 거주지가 아닌 태어난 곳을 위주로 편을 나누기 때문에 때로는 부부간에도 편이 다를 수 있다. 대보름날이 되면 동서 양편이 대치하고 서서 농악으로 흥을 돋우고, 동채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기세를 올린다. 동채 위에는 대장이 올라 타고 떨어지지 않도록 왼손으로는 끈을 쥐고 오른손으로는 동채를 멘 사람들을 지휘한다. 동채 앞에서 힘센 장정들이 무리를 이루어 팔짱을 끼고 적과 부딪쳐 서로 어깨로 밀어 길을 낸 뒤, 동채가 밀고 들어가 상대방의 동채를 눌러 땅에 닿게 하면 이기게 된다. 하지만 싸움 도중에 자기 편이 유리한 순간이라도 적의 머리꾼이 쓰러져 위기에 처하게 되면 즉시 후퇴하여 구출하고 다시 승부겨루기를 한다.


안동 차전놀이는 남자들의 집단놀이를 한층 세련되게 향상시킨 모의전투놀이이며, 우리민족의 흥겨운 민속놀이로 안동지방 특유의 상무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동부가 이기면 동부에 풍년이 들고, 서부가 이기면 서부에 풍년이 든다고 믿어 농경민의 풍년기원을 바탕으로 한 농경의례놀이라 할 수 있다.
 

 

2.하회별신굿탈놀이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지 정 일 1980.11.17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844-1  
기능보유자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


별신굿이란 3·5년 혹은 10년마다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서낭)님에게 마을의 평화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굿을 말한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서는 약 500년 전부터 10년에 한번 섣달 보름날(12월 15일)이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무진생 성황님에게 별신굿을 해왔으며 굿과 더불어 성황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탈놀이를 하였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각시의 무동마당·주지마당·백정마당·할미마당·파계승마당·양반과 선비마당·혼례마당·신방마당의 8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놀이를 시작하기 전 대내림을 하는데, 정월 초이튿날 아침 성황당에 올라가 당방울이 달린 내림대를 잡고 성황신을 내리면 당방울을 성황대에 옮겨 달고 산에서 내려온다. 성황대와 내림대를 동사 처마에 기대어 세우면 비로소 놀이가 시작된다. 등장인물로는 주지승·각시·중·양반·선비·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 등이 있다. 파계승에 대한 비웃음과 양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해학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제사의식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각시탈은 성황신을 대신한다고 믿어 별신굿 외에는 볼 수 없고, 부득이 꺼내볼 때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한다. 놀이에 사용되는 탈은 주지탈 등을 포함하여 모두 10종 11개로 오리나무로 만들었으며 옻칠과 안료를 두세겹 칠하여 색조의 강도를 높였는데, 원본은 1964년 하회탈 및 병산탈(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탈놀이의 반주는 꽹과리가 중심이 되는 풍물꾼이 하며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춤사위로 이루어진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탈을 태우며 즐기는 뒷풀이가 없는 것이 특징이며, 우리나라 가면극의 발생이나 기원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3.안동저전동농요


종 목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지 정 일 1980.12.30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서후면 저전리 446  
기능보유자  조차기


농요는 토속민요의 한 종류로 개인 또는 집단적으로 불린다. 농사터에서 농사를 지으며 부르거나 농사일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부르기도 하며, 호미나 낫 같은 농기구를 만들면서 부르기도 한다. 지방에 따라서 종류나 노랫말의 내용, 노래부르는 방법 등이 다르다.


안동 저전동농요는 저전동 농민들이 오래 전부터 불러오던 것으로 농사일의 피로를 덜고 능률을 올리기 위하여 부르던 이 지방 특유의 구전민요이다. 농요의 내용이나 가락이 독특하고 고유성이 있다고 평가된다.
 

 

4.안동놋다리밟기


종 목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7호 
지 정 일 1984.12.29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용상동 1109-4 
기능보유자  김순임


안동놋다리밟기는 안동지방에서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여성들만의 민속놀이로 ‘놋다리놀이’ 또는 ‘기와밟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놀이에 대하여는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공주를 데리고 안동으로 피난을 와 개울을 건널 때 마을의 부녀자들이 허리를 굽혀 다리를 놓았다는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놋다리밟기는 동부와 서부로 패를 나누어 서로 겨루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길을 비켜서 놀이를 해나간다. 맨 앞에 창립(創立)이라고 부르는 5, 60대 할머니가 서고, 다음에 장년(壯年)이라 해서 30대 부인들이 뒤를 따른다. 장년 뒤에 놋다리의 역할을 하는 수십명의 여자들이 모두 허리를 굽혀 앞사람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 머리는 앞사람의 궁둥이 왼편에 대는데 마치 생선을 꿰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시녀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공주가 다리 위를 밟고 지나가면 밑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행렬 맨 앞에 구부려 다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안동놋다리밟기는 모든 여성이 한데 모여서 노래를 부르며 즐기는 규모가 큰 향토오락으로, 다른 민속놀이와 달리 놀이로만 이어지며 승부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5.화전놀이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용상동 1154-2번지 (용상로 138번지) 
기능보유자  안동내방가사전승보존회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음력 3월에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음식을 먹고 꽃을 보며 노는 놀이이다.


화전놀이는 부녀자들이 춘삼월 날씨가 좋은 날을 가려 산이나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 진달래꽃으로 전을 부쳐 먹으며 놀던 놀이이다. 즉 진달래꽃으로 화전을 지져 먹고 가무를 즐기는 여성놀이이다. 화전놀이는 마을 또는 문중의 여성들이 뜻을 모아 시어른들의 승낙을 얻어 3월 삼짇날 전후에 날을 잡고 화전 재료와 과일, 감주, 육류 등 놀이에 필요한 준비를 시작한다. 참여 인원은 대략 30~60명 내외이다. 집안이나 마을에서 인정받는 중년 여성들이 주도하며,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따라가지 않는다. 경비는 화전계가 있으면 그 기금으로 충당하고 그렇지 않으면 일정하게 갹출한다.


화전놀이라는 것은 진달래꽃이 피는 때에 진달래를 따 부쳐 먹으면서 여럿이 모여 놀았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화전놀이는 19세기 이후 영남 지역 동족부락의 여성들이 한식 청명을 전후한 봄철에 가까운 산이나 들로 나가 하루 동안 풍류를 즐기는 놀이로서, 화전을 만들어 식사 등을 하는 여흥이면서 여성 풍류이다.


기본적인 풍물을 가지고 가서 놀기도 했다. 놀이장소는 매년 일정한 장소가 정해져 있으나 때로는 문중의 재실이나 묘소, 서원 등을 택하기도 한다.


화전놀이를 가서 부녀자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고 또 짓기도 하였는데, 이 노래를 「화전가」라고 한다.


화전놀이는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며 가사를 짓기도 하면서 하루를 즐겼는데 가사는 즉흥작이 많았으나 미리 집에서 지어온 가사를 낭송하기도 하였다. 화전놀이를 통해 지난 시절 여성들은 집 안에만 있던 답답함에서 잠시 벗어나 홀가분해질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화전놀이는 여성들의 해방구 구실을 톡톡히 했던 셈이다.


화전놀이는 안동의 영남내방가사보존회에서 매년 화전굽기 시연과 화전가 낭송 대회를 겸하여 열고 있다. 2009년 화전놀이에는 50여 명의 안동내방가사보존회 회원을 비롯하여 관련 전문가와 위덕대학교 학생 등 100여 명이 참여하였다.

 

 

6.화상놀이 (화상싸움)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서후면 저전리


음력 5월 4일, 즉 단오 전날 밤 이 마을의 중간을 흐르는 내를 중심으로 동쪽의 양지마을이 한패가 되고 서쪽의 음지마을이 한 패가 되어 겨루는 남성집단놀이이다.


마을에 전하는 유래담에 의하면, 이 마을은 예로부터 계절에 관계없이 불이 자주 일어났다. 마을사람들은 서북쪽 멀리에 솟아 있는 학가산 마루가 앞의 두 산 사이를 통하여 마을을 목 넘어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 화기를 누르기 위하여 이 놀이를 꾸며 매년 놀아왔는데 이 싸움을 놀고 부터는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 하며, 6·25 이듬해까지 놀았다고 한다.


놀이방법은 다음과 같다. 날이 어두워지면 각 패가 정한 곳에 모여 “재미있게 놀자.”고 의논한 뒤 진세를 펴고 밤이 깊도록 놀게 된다. 25세 내외로부터 50여세에 이르기까지 힘이 센 자는 모두 참가하는데, 각 패가 30명 정도이다. 무명옷을 입고 머리에는 석자 머리띠를 매는데, 장군과 부장은 머리띠에 한 움큼의 풀을 꽂아 표시한다.


도구는 화상 뿐인데, 묵은 뽕나무 뿌리를 캐어다가 말려서 등걸에 흠을 낸 것이다. 화상이라는 명칭은 아마 이 뽕나무 뿌리의 한자 표기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다. 이 뽕나무 뿌리에 한발 가량의 새끼줄을 맨다. 그 새끼는 세 가닥으로 꼰 것으로 나무뿌리로부터 반발 정도는 삼을 두드려서 질기게 꼬아 만든 것이다.


싸울 때는 뽕나무 뿌리에 불을 붙여 머리 위로 휘두르면서 공격하며, 상대편의 화상을 감아서 잡아당겨 빼앗는다. 화상을 많이 빼앗는 편이 승리하는 것이다. 양패가 진세를 펴면 “와아 ─” 하며 함성을 지르고 화상에 불을 붙인다. 먼저 부장이 나와서 기량과 힘을 겨루고, 승부가 나지 않으면 전체의 싸움으로 번지게 된다.


서로 상대편을 포위하려고 밀고 밀리는데 캄캄한 허공에 휘황한 불꽃 원이 어지럽게 난무하게 되고, 간혹 격렬한 당기기싸움이 벌어지면 옆에 있던 자들이 합세하기도 한다. 싸움이 한창일 때면 “음지야!”, “양지야!” 하며 아군의 기세를 돋우기도 하고, “꺽, 꺽” 하며 아군의 위치를 알리기도 한다.


화상을 빼앗긴 자는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하고, 피곤한 자는 간혹 농주로 목을 축여가며 싸우는데, 때로는 머리가 터지고 발이 삐는 등 상하는 자가 나오기도 한다. 어느 정도 판세가 기울어지면 양패의 장군이 나와서 마지막 결전을 벌인다. 이 장군싸움으로 승패가 나는데, 이때에는 마을의 원로가 큰 소리로 승리를 알림으로써 싸움이 끝난다.


때로는 심한 부상자가 생김으로써 끝나는 수도 있다. 승리한 쪽은 “월사, 덜사” 하면서 만세를 부르며 개선한다. 이튿날은 단옷날이라 양 패가 자연스럽게 한자리에 모여 서로 사과도 하고 위로도 하며 하루를 즐긴다.


화기를 누르기 위하여 베푸는 놀음놀이는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의 ‘청단놀음’의 유래담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이나, 불로써 불을 누르는 화상싸움은 풍수지리설을 믿는, 다분히 주술적 행위전승의 하나로 보인다. 저전리는 한양조씨의 동성마을로, 이 놀이는 마을의 안녕과 질서를 위한 협동·단결의 의의도 엿보인다. 1982년이래 다시 복원, 전승되고 있다.
 

 

7.선유줄불놀이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줄불놀이는 밤하늘에 흩어지는 불꽃을 감상하는 운치있는 놀이로, 옛 사람들이 즐기던 불꽃놀이라고 할 수 있다. 하회마을의 줄불놀이는 마을주민들이 여름철부터 만든 것인데 이채롭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하회리 앞 부용대 절벽과 그 앞의 낙동강에서 음력 7월 16일 달밝은 밤에 행해졌던 놀이로 줄불놀이, 달걀불놀이, 낙화놀이와 뱃놀이 등 네가지 내용으로 나누어진다.

 

음력 7월 열엿새 날 밤에 달이 떠오르면 6~7명의 선비들이 나룻배를 타고 강물 위로 나간다. 여기에 모인 선비들은 하회에 사는 지체 높은 학자와 가까운 곳에서 초청된 시인 묵객들이다. 배에는 네 기둥을 세워 차일을 치고, 주위가 밝게 초롱을 단다. 서로 술잔을 권해서 흥이 돋으면 「적벽부」를 외면서 시창을 시작으로 놀이가 전개된다.


시회와 함께 가을바람과 밝은 달을 즐기다보면 하늘에서 ‘줄불’로부터 이채롭고 화려한 불꽃이 강물 위로 끊임없이 떨어진다. 한편 부용대 위의 형제암 부근에서 한 번에 200~300개씩 달걀불을 띄워 보내면 많은 불꽃들이 서서히 옥연정 앞 소(沼)를 향하여 떠내려가서 맴돌아 선유에 한층 흥취를 더한다. 이 무렵에 이따금 낙화가 행하여진다.


미리 부용대 절벽 위에 서너 명이 올라가 있다가 강물 위의 배 안에서 시 한 수를 지었다는 발표가 나면 강가에 모여 있던 관중들이 “낙화야!”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부용대 위에서 솔가지를 묶은 단에 불을 붙여 강 위를 향하여 힘껏 내던진다. 이 낙화는 시뻘건 불덩이가 되어 떨어지다가 절벽 밑 바위에 부딪히며 산산이 부서져 장관을 이룬다.


뽕나무숯 봉지는 불을 붙여 축귀하던 ‘귀신줄불’ 달기 때에 흔히 만들던 것이다. 보름날 밤 밝은 달빛을 이용하여 집안으로 들어오려는 잡귀를 쫓기 위해 대문밖에 긴 장대를 세워 이 숯가루 봉지를 매달았다. 한편 달걀불은 원래 빈 달걀껍질에 종이나 솜으로 심지를 만들어 꽂고 기름을 부어 불을 켜던 것인데, 요즘은 백여 개의 바가지 쪽을 마련하여 기름을 먹인 솜뭉치를 놓고 불을 붙인다.


선유줄불놀이는 1933년경에 전승이 중단되었다. 그 후 광복 경축행사로 한 차례 행해졌으며, 약 30년 전에는 주한 외국인 사절단이 방문하자 하회마을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또 한 차례 연행되었다. 현재는 복원되어 해마다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기간에 벌어진다.

 

8.안동석전  
 

종 몯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편을 나누어 돌팔매질을 하며 싸우는 놀이이다.


안동석전은 매년 정월 16일에 주로 마을과 마을이 개천이나 강을 사이에 두거나 수백 보 거리를 두고 마을 단위로 편을 갈라 서로 돌을 던져 누가 먼저 쫓겨 달아나느냐의 여부에 따라 승부를 가리는 전통사회의 집단놀이이다. 돌싸움 또는 팔매싸움이라고도 한다. 안동석전, 즉 팔매싸움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던 놀이였지만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안동석전은 『지봉유설』에 “투석은 돌을 사람에게 던지는 것이다. …… 그 놀이 또한 오래된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안동에서는 1월 16일에, 김해에서는 4월 8일(초파일)과 단오에 장정들이 모두 모여 좌우로 편을 가른 다음 돌을 던져 승부를 겨루다가 죽거나 중상을 입어도 후회하지 않는데 이것을 석전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안동 지방지인 『영가지』의 「풍속조」에 의하면 “매년 정월 16일에 부(府) 안에 사는 사람들이 부의 가운데로 흐르는 시내를 경계로 나뉘어 오른쪽과 왼쪽으로 하고, 돌을 던져 서로 싸워 승부를 결정하는데 한해의 풍년을 점친다. 경오년에 적을 토벌할 때에 모집하여 선봉을 삼았더니 적이 감히 나아오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안동석전이 전국적인 명성을 갖고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다른 편싸움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때에 소멸되고 말았다.


놀이도구는 손아귀에 들어올 정도의 지천으로 깔려 있는 작은 돌멩이이다. 놀이장소로는 예전에 읍치의 가운데로 흐르는 시내를 경계로 동서부에 위치한 양편 언덕이라 할 수 있다.


안동석전은 많은 문헌에 등장할 정도로 안동 지역에서 널리 행해졌다. 편의 구성은 읍치를 가로지르는 개울을 중심으로 동서부로 나뉘어졌다. 석전은 들판이나 강을 사이에 두고 처음에는 아이들에서 시작하여 점차 어른 싸움으로 바뀌어 규모가 커지면서 본격적인 싸움이 펼쳐졌다. 처음에는 돌만 던지다가 나중에는 서로 접전이 벌어져 다치거나 불상사까지 발생하는 격렬한 놀이였다. 안동석전은 그 놀이방식이 동채싸움과 같다고 하여 두 가지가 짝을 이뤄서 행해졌다고 할 수 있다.


안동석전은 정초에 펼쳐 승패를 가렸는데, 이를 통하여 한 해의 풍년을 점치는 행위로 활용되었다. 이 놀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은 우환을 떨칠 수 있었고, 한 해의 안녕과 풍년 그리고 질병이 없기를 기원하였다.
 

 

9.빈상여놀이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장례를 행하기에 앞서 상가에서 빈 상여를 둘러매고 장례식 흉내를 내면서 노는 놀이이다.


빈상여놀이는 출상 시에 무사히 운구할 수 있도록 전날 밤 상여 앞소리꾼과 상두꾼들이 미리 모여 빈상여를 메고 발을 맞추어 보는 놀이판이다. 빈소가 마련되고 성복제가 끝나면 아침과 저녁으로 밥상을 차려 올리고, 곡을 하며 문상객을 받는다. 장례일은 3일장, 5일장, 7일장이 있으나 도시에서는 3일장, 안동 지역에서는 5일장을 가장 많이 한다. 장례일 전날을 ‘드는 날’이라 하여 조문객이 분향재배하고 상주를 위로한다. 이때 호상인 경우에는 전날 저녁에 ‘대돋움’이라 하여 상두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상여 소리」에 맞추어 빈상여놀이를 즐긴다.


호상인 경우 마을의 청장년 남자들은 상가에서 빈상여놀이를 한다. 장례 때 운구할 목적으로 마련된 빈 상여를 메고 놀이에 활용한다. 빈상여놀이는 상가의 마당이나 골목길에서 상두꾼들이 모두 모여서 행한다.


상두꾼들이 빈 상여를 매고 상여 앞소리꾼이 앞소리를 부르면 상두꾼들이 후렴을 받으며 운구를 한다. 상두꾼들이 상가의 마당에서 빈 상여를 매고 「상여 소리」를 하면 상가에서는 술과 음식을 대접한다.


빈상여놀이는 상여를 메고 간다는 노동에 앞서 몸을 풀고 준비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동시에 상가의 슬픔과 어려움을 놀이라는 것을 통해 위로하고 이기게끔 도와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상주들은 죽음을 생각하며 엄숙하고 경건한 의례를 행하고자 한다.


이때 상두꾼이나 이웃들은 상주의 삶을 염두에 두고 지나치게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기 위해 빈상여놀이를 행한다. 또한 상두꾼들이 상여를 멜 때 호흡이 맞도록 미리 연습하는 효과도 있다. 따라서 실제 상여를 메고 운구를 하는 것처럼 놀이를 한다. 한편 상여를 처음 구입하고서 부품이나 조립이 안전한지 점검해 보는 차원에서 빈상여놀이를 하기도 했다.
 

 

10.춘향이놀이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아이들이 춘향이의 넋을 받아 점을 치는 민속놀이이다.


춘향이놀이는 특히 무언가를 잊어버렸을 때, 또는 이것이나 저것을 선택해야 할 때 많이 했는데, 그 연원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이를 ‘방망이점’이라고도 했다. 방망이나 홍두깨를 잡고 한다.


춘향이놀이를 하는 방법은 술래를 정해 눈을 가리거나 감게 한 다음에 가운데 앉혀 놓고 나머지 아이들이 빙 둘러 않아서 함께 노래를 부른다. 노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춘향아 춘향아/ 남원땅 성춘향아/ 나이는 십팔세/ 생일은 사월 초파일/ 용마루에 어깨짚고/ 설설히 내려주세요/ 설설히 내려주세요”


춘향이 노래를 부르면 춘향의 신(神)이 놀이를 하는 아이 몸에 내린다. 가운데 앉은 술래에게 신이 다가와서 그 뒤에 있는 아이의 궁금한 것을 물으면 알려준다. 없어진 물건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 신이 내려 문을 열고 나가 있는 곳을 가리키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신내림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놀이노래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춘향이놀이는 전승이 완전히 중단된 상태이다.

11.금소 동채싸움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에서 음력 정월 대보름날에 하던 편싸움 형식의 대동놀이이다.


금소동채싸움은 동서로 편을 갈라 동채에 탄 장수(대장)의 지휘 아래 수백 명의 장정이 상대편의 ‘동채’를 서로 밀어 붙여 상대의 동채를 먼저 땅에 닿게 하여 승패를 겨루는 놀이이다.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여 넓은 들판에서 놀이판을 벌이며, 승부가 쉽게 결정되지 않으면 밤늦게까지 계속하기도 한다. 이 놀이의 승부는 동채가 땅에 닿거나 대장이 떨어지면 결정되는데, 이긴 편은 짚신을 높이 던지고 마을을 돌면서 승리를 자축한다.


금소동채싸움은 대보름 명절 중에 행해지지만 그 준비는 동채를 제작하는 데 쓸 노란 참나무를 구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양편의 합의에 의해서 싸움 날이 정해지면 미리 점찍어 둔 나무를 베러 간다. 베어온 나무는 미리 약속된 ‘깨끗한 집’에 보관한다. 적당한 날(보통 싸움 전날)을 잡아 마당이 넓은 집이나 빈 논에서 동채를 만든다. 동채의 크기는 일정한 범위 안에서 기동성과 튼튼함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야 하므로 대개 양편이 동채 크기를 비슷하게 만든다.


금소동채의 가장 큰 특징은 ‘물부리’의 형태에 있다. 안동읍 내(현 안동시 내)의 본동채는 앞부분이 터져 있고 째기동채는 동채의 앞부분이 교차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서로 걸고 공중전을 펼치는 것이 용이하다. 이에 비하여 금소동채는 좌측 체목의 끝부분에 물부리가 형성되어 있고 그 측면에 우측 체목이 박혀 있다.


특히 물부리 부분은 끝으로 갈수록 점점 날카롭게 깎여 있어서 전투적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상대편 머리꾼이 쉽사리 동채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한다. 금소동채싸움은 마을 앞 ‘텃논’에서 한다. 텃논은 마을의 배꼽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이곳의 지신을 눌러야 농사가 잘 되고 마을에 탈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하는 것이다.


동채가 다 만들어지면 동채를 메고 매미시골 당으로 향한다. 당에 먼저 가서 고하면 싸움에 이긴다고 하여 서두르기도 한다. 고할 때는 간단하게 주포를 차리며 싸움에서 이기게 해달라고 동신에게 기원한다. 당고사가 끝나면 동채에 적당한 사람을 태우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위용을 과시하는데, 이때 각 마을의 풍물패가 뒤따른다.


머리꾼은 동채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서 기골이 장대하고 강기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대개 20대 초반~30대 중반의 연령층에서 자원하며, 숫자는 30~40명 정도이나 제한은 없다. 동채가 일단 텃논에 들어가면 대장을 태운 동채를 뒤로 하고 먼저 머리꾼들의 싸움이 시작된다. 양편은 모든 역량을 머리꾼 싸움에 집중시킨다. 이 싸움에서 양편의 전력이 엇비슷해서 앞머리가 거의 동시에 터지면 싸움은 동채 간의 공중전으로 양상이 바뀐다.

 

양편의 대장은 서로 상대방의 물부리를 자기편 물부리 밑에 넣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금소동채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은 대장이다. 경험이 풍부한 대장은 수신호와 음성 신호를 통해 민첩하게 동채를 움직여 승리를 실현한다. 승부가 결정되면 이긴 편은 진 편의 동채를 빼앗아 부숴버린다.


금소동채싸움은 대개 정월 대보름 명절 기간에 행해졌는데 사정에 따라서는 뒤로 미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동채싸움이 해마다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줄당기기가 행해지는 해에는 동채싸움을 하지 않고, 동채싸움을 하는 해에는 줄당기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놀이의 준비 과정이 줄당기기가 훨씬 더 복잡하고 경비도 만만치 않았으므로 줄당기기에 비해서 동채싸움이 보다 자주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금소동채싸움은 1940년대까지 행해지다가 현재는 중단되었다.

12.금소동 지애밟기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에서 전승되고 있는 여성들만의 전통놀이이다.


금소동 지애밟기는 부녀자들만이 꼬깨를 만들어 싸움의 승패를 가려서 여성대장군의 위력을 과시하는 여성들의 용감무쌍한 정신과 자신감이 잘 나타나 있는 놀이이다. 지애란 기왓장의 옛말로서, 부녀자들이 상체를 구부려 앞사람의 허리를 잡고 일렬로 늘어 선 모습이 마치 기와처럼 보여 부르는 말이다. 또한 그 위를 밟고 지나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지애밟기라고 하였다.


놀이의 발상지는 안동군 임하면 금소1, 2리로 놀이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4~15세 가량의 소녀를 힘센 부녀자의 어깨 위에 앉히고 그 앞에 억센 머리꾼 30명 정도가 둘러싸 호위도 하며 공격도 한다. 적진을 뚫고 들어가 상대편의 소녀를 끌어내리면 이기게 되는데 싸움은 대단히 격렬하였다. 전체 인원이 꼬깨를 호위하는 형식으로써 그 진지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때 “동부(1동)야 이겨라! 서부(2동)야 이겨라!” 하고 함성을 지르면서 사기를 돋우고, 흥이 있는 사람들은 꽹과리·북·징 등을 가지고 나와서 풍물을 울려 기세를 돋우기도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동부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믿었으며, 격렬한 싸움 끝에 결국은 동부가 이기곤 하였다. 패한 쪽은 곧바로 마을의 경계인 구무다리로 물러가서 20여 명 가량이 긴 막대기를 들고 상대편 통과를 저지하려고 진을 친다. 승리한 쪽은 즐겁게 풍요로움을 만끽하면서 신나게 놀다가 10여 명씩 어깨동무를 짜서 상대편의 막대기를 격렬하게 밀어젖히고 싸움한 후에 뚫고 나아간다. 그리고 자기 부락에 도착하면 춤과 환호성이 울리며 ‘농자천하지대본야’라는 푯말 아래 풍악을 울리면서 즐겁게 논다. 이렇게 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강강술래와 더불어 몇 안 되는 여성들만의 놀이로 잘 알려진 안동놋다리밟기는 여러 가지 유래가 있으나 가장 잘 알려진 설은 다음과 같다. 고려 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왕후와 공주를 데리고 안동에 왔을 때 소야천 나무를 건너게 되었다. 피난길이라고는 하나 왕의 행차가 너무 초라하여 부녀자들이 허리를 굽혀 사람으로 다리를 놓았다고 하는 것이 그 유래다.


놀이도구는 특별히 없고 음력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부녀자들은 2, 3명씩 한 조가 되어 「어하루여 놋다리야」라는 놋다리밟기 노래를 부르며 동리를 돌면서 점차 2동의 마을 안까지 간다. 14~15세의 소녀로부터 50여 세의 노부에 이르기까지 참가를 하게 되는데, 대략 한 동리의 부녀자가 200명 정도 모이게 된다. 계속 온 동리를 주행하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밤이 깊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이튿날 16일 월야에 다시 부녀자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동리 골목을 주행하다가 마침내 터논에 다가서면 2동의 부녀자들도 다가와 흥겹게 놀면서 다시 골목을 누비다가 마침내 1동의 경계에 서로 접근하게 되면서 격렬한 꼬깨 싸움을 시작한다.


놀이방법


1. 얼얼이 청청: 원을 지어 앉아 서로 손을 잡고 제일 앞 사람이 옆 사람을 타넘으며 한 바퀴 돌면, 다음 사람이 잡고 있던 손을 타넘으면서 계속 줄을 이어가며 마침내 큰 하나의 원을 만든다.


2. 실감기: 각기 손을 잡고 달팽이 모양으로 흥겹게 뛰면서 선두로부터 겹겹이 감아 들어가면서 노래를 부른다.


3. 실풀기: 달팽이 모양으로 계속 노래 부르며 흥겨운 모습으로 실을 풀게 되는데 대단히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질서정연하다.


4. 지달배기: 모두 풀린 실이 일렬로 늘어서면 선두가 뒤에 있는 꼬리를 잡으러 뛰어간다. 줄 앞 사람은 뒷꼬리가 붙들리지 않도록 막아주고 꼬리는 피하는데, 구불구불한 모습은 마치 용 모양을 이룬다. 이때 잡힌 사람의 수가 많고 적음을 가지고 승부를 낸다.

5. 꿀집짓기: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높이 치켜들어 이른바 동대문을 만든다. 여러 사람이 허리를 잡고 일렬로 그 문을 통과한다. 통과하다 잡힌 자는 뒤에 가서 서며, 되풀이하여 꼬리를 다 따게 된다.

6. 지애밟기: 한 줄로 엎드려 다리를 만들고 그 위에 한 사람이 지나가면 밟던 사람은 다시 다리를 만들어 준다. 두 팀이 만나는 곳에서 싸움이 시작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7. 꼬깨 싸움: 전위대가 부채꼴 모양으로 앉고 서서 꼬깨를 보호해 주기도 하며, 상대편의 꼬깨를 넘어뜨리기 위해 공격도 한다. 먼저 꼬깨가 넘어지면 패하게 된다. 패한 조 한 조에 보조 꼬깨 세 조가 서고, 싸움에서 이긴 팀은 계속 지애를 밟으면서 지나간다. 패한 팀은 뛰어가서 자기 마을 경계에서 20명씩 막대를 잡고 서서 적을 막는다. 이긴 팀은 10여 명씩 어깨동무를 하며 전진하는데 이것을 ‘구무다리 싸움’이라고 한다. 패한 팀은 맥없이 뿔뿔이 흩어지고 승리한 팀은 농악이 선두가 되어 풍악을 울리면서 흥겹게 놀고 밤이 깊으면 귀가한다.


금소동 지애밟기의 의의는 격렬한 꼬깨 싸움의 장소가 마을 경계 지역인 구무다리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는 동과 서, 양과 음을 충돌시켜 화합한다는 뜻이다. 지애밟기는 겨울과 싸워 생산의 곡령신을 환대하여 풍년을 희망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놀이가 남자만 참여하고 여성은 구경도 하지 못하게 하는 남성 의존의 세계에서 탈피하여, 여성의 힘만으로도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준 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금소동 지애밟기 놀이를 되살리고자 현재 안동 지역에서는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201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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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j****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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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서 옛부터 내려오는 민속놀이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차전놀이 공민왕 때부터 내려온 놋다리 밟기 도산서원에서 내려온 투후 등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201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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