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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우리나라의 한 복&전통문화&음식&민속놀이(내공드림!!)
lsy9**** 조회수 4,451 작성일2007.08.01

방학숙제임돠,,ㅠ

 

홍보책을 만들거에요,

 

 

*우리나라의 한복

*우리나라의 전통문화

*우리나라의 고유음식

*우리나라의 민속놀이

 

사진과 간단한 글   부탁해요'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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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안동 저전동농요

 

종 목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지 정 일 1980.12.30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서후면 저전리

 

농요는 토속민요의 한 종류로 개인 또는 집단적으로 불린다. 농사터에서 농사를 지으며 부르거나 농사일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부르기도 하며, 호미나 낫 같은 농기구를 만들면서 부르기도 한다. 지방에 따라서 종류나 노랫말의 내용, 노래부르는 방법 등이 다르다.

 

안동 저전동농요는 저전동 농민들이 오래 전부터 불러오던 것으로 농사일의 피로를 덜고 능률을 올리기 위하여 부르던 이 지방 특유의 구전민요이다. 농요의 내용이나 가락이 독특하고 고유성이 있다고 평가된다.

 

2.안동 놋다리밟기

 

종 목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7호

지 정 일 1984.12.29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용상동 1109-4

 

안동놋다리밟기는 안동지방에서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여성들만의 민속놀이로 ‘놋다리놀이’ 또는 ‘기와밟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놀이에 대하여는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공주를 데리고 안동으로 피난을 와 개울을 건널 때 마을의 부녀자들이 허리를 굽혀 다리를 놓았다는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놋다리밟기는 동부와 서부로 패를 나누어 서로 겨루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길을 비켜서 놀이를 해나간다. 맨 앞에 창립(創立)이라고 부르는 5, 60대 할머니가 서고, 다음에 장년(壯年)이라 해서 30대 부인들이 뒤를 따른다. 장년 뒤에 놋다리의 역할을 하는 수십명의 여자들이 모두 허리를 굽혀 앞사람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 머리는 앞사람의 궁둥이 왼편에 대는데 마치 생선을 꿰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시녀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공주가 다리 위를 밟고 지나가면 밑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행렬 맨 앞에 구부려 다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안동놋다리밟기는 모든 여성이 한데 모여서 노래를 부르며 즐기는 규모가 큰 향토오락으로, 다른 민속놀이와 달리 놀이로만 이어지며 승부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3.금소동 지애밟기

 

강강술래와 더불어 몇 안되는 여성들만의 놀이로 안동지방에 잘 알려진 [놋다리 밟기]가 있다. 여러 가지 유래가 있으나 가장 잘 알려진 설은 다음과 같다.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왕후와 공주를 데리고 안동에 왔을 때 소야천 나무를 건너게 되었다. 피난길이라고 하나 왕의 행차가 너무 초라하고 또한 나루를 건너게 되자 부녀자들이 허리를 굽혀 인다리를 놓았다고 하는 것이 그 유래다.

 

이와 같이 [놋달리 밟기]에 관하여는 많은 유래설이 증명하듯 여러사람의 입에 오르나 [놋달리 밟기]를 포함한 민속놀이인 [금소동 지애 밟기]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심이 적다. 그래서 여자들만이 꼬깨를 만들어 싸움의 승패를 가려 여 성대장군의 위력을 과시하는 용감무쌍한 정신, 여성들의 자신감이 잘 나타난 [금소동 지애밟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먼저 [지애]란 기왓장의 옛말로서 부녀자들의 상체를 구부려 앞사람의 허리를 잡고 일렬로 늘어 선 모습이 기와처럼 보여서 그렇게 부른 것이며 그 위를 밟고 지나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지 애밟기]라 이른 것이다. 놀이의 발상지는 안동군 임하면 금소 1,2동으로 놀이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음력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부녀자들은 2,3명씩 한조가 되어 [어하루여 놋다리야]라는 놋다리 밟기 노래를 부르며 동리를 주행하면서 점차 2동의 마을 안까지 간다. 14~15세의 소녀로부터 50여 세의 노부에 이르기까지 참가를 하게 되는데 한 동리의 부녀자가 200명 가량 모이게 된다. 계속 온 동리를 주행하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야심하면 귀가한다. 이튿날 16일 월야에 다시 부녀자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동리 골목을 주행하다가 마침내 [터논] 에 접근하면 2동의 부녀자들도 다가와 흥겹게 놀면서 다시 골목을 누비다가 마침내 1동의 경계에 서로 접근하게 되면서 격렬한 꼬깨싸움을 시작한다.

 

14~15세 가량의 소녀를 힘쎈 부녀자의 어깨 위에 앉히고 그 앞에 억센 머리꾼 30명 가량이 둘러 써서 호위도 하며 공격도 한다. 적진을 뚫고 들어가 상대편의 소녀를 끌어내리면 이기게 되는데 싸움은 대단히 격렬하였으며 전체 인원이 꼬깨를 호위하는 형식으로써 그 진지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때 [동부(1동)야 이겨라][서부(2동)야 이겨라]하고 함성을 지르면서 사기를 돋구고 흥이 있는 사 람들은 꽹과리, 북, 징등을 가지고 나와서 농악을 울려 기세를 돋구기도 한다. 동부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믿는 이마을 사람들은 격렬한 싸음으로 결국은 동부가 이기곤 하였다. 패한 쪽은 물러가서 곧 마을 경계인 [구무다리]에 가서 20명 가량이 긴 막대기를 들고 상대편 의 통과를 저지하려 진을 치고, 승리한 쪽은 즐겁고 풍요로움을 만끽하면서 신나게 놀다가 10여 명씩 어깨동무를 짜서 상대편의 막대기를 격렬하게 밀어젖히고 싸움한 후에 뚫고 나아간다. 그리고 자기 부락에 도착하면 춤과 환호성이 울리며 [농자는 천하지대본야]라는 푯말아래 농악을 울리면서 즐겁게 논다. 이렇게 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데 마지막 꼬깨싸움까지의 놀이를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얼얼이 청청

원을 지어앉아 서로 손을 잡고 제일 앞사람이 옆사람을 타넘으며 한 바퀴 돌면, 다음 사람이 잡고 있던 손을 타넘으면서 계속 줄을 이어가면 마침내 큰 하나의 원을 이루게된다.

 

- 실감기

각기 손을 잡고 달팽이 모양으로 흥겹게 뛰면서 선두로부터 겹겹이 감아들어가면서 노래를 부른다.

 

- 실풀기

달팽이 모양으로 계속 노래 부르고 흥겨운 모습으로 실을 풀게 되는데 대단히 혼란스 러워 보이지만 실지로는 질서정연하다.

 

- 지달배기

모두 풀린 실이 일렬로 늘어서면 선두가 뒤에 있는 꼬리를 잡으러 뛰어간다. 줄 앞사 람은 뒷꼬리가 붙들리지 않도록 막아주고 꼬리는 피하는데, 구불한 모습은 용모양을 이룬다. 이때 잡힌 사람의 수가 많고 적음을 가지고 승부를 낸다.

 

- 꿀집짓기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높이 치켜들고 이른바 동대문을 만든다. 여러사람이 허리를 잡고 일렬로 그 문을 통과한다. 통과하다 잡힌 자는 뒤에가서 서며, 되풀이하여 꼬리를 다따게 된다.

 

- 지애 밟기

한줄로 엎드려 다리를 만들고 그 위에 한사람이 지나가면 밟던 사람은 다시 다리를 만들어 준다. 두 팀이 만나는 곳에서 싸움이 시작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 꼬깨 싸움

전위대가 부채꼴 모양으로 앉고 서서 꼬깨를 보호해 주기도 하며 상대편의 꼬깨를 넘어뜨리기 위해 공격도 한다. 먼저 꼬깨가 넘어지면 패한게 되며, 패한 조 한 조에 보조꼬깨 세 조가 서고, 싸움에서 이긴 팀은 계속 지애를 밟으면서 지나간다. 패한 팀은 뛰어가서 자기마을 경 계에서 20명씩 막대를 잡고 서서 적을 막는다. 이긴 팀은 10여명씩 어깨동무를 하며 전진하는데 이것을 [구무다리 싸움]이라고 한다. 패한 팀은 맥없이 뿔뿔이 흩어지고 승리한 팀은 농악이 선두가 되어 풍악을 울리면서 흥겹게 놀고 밤이 깊으면 귀가한다.

 

이상을 살펴보았을 때 지애밟기의 의의는 격렬한 꼬깨싸움장소가 마을의 경계지역인 구무다리로 써 이는 동과 서, 양과 음을 충돌시켜 화합한다는 뜻이라는 점, 또한 지애 밟기가 겨욹과 싸워 생산의 곡영을 환대하여 풍년을 소원하려는 상원이라는 점, 남자들이 놀이에 참가는 물론 구경도 못하게 한 것은 남서의존의 세계에서 탈피, 여성의 힘만으로도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자신 감을 보여준 점이라 할 수 있다.

 

4.내방가사

 

조선시대 중기부터 영남지방의 양반가문 부녀자들 사이에서 지어지고 불리워 왔는 내방가사는 ′영남대가내방가사′의 준말이며 ′규중가도′ 또는 ′규방가사′라고도 한다. 이러한 가사는 영남지방의 문헌에 많이 남아 있는데 대부분 작자와 연대가 미상이다.

 

노래의 내용은 봉건사회에서 집안에만 박혀 일생을 보내는 부녀자들이 시집가는 딸에게 시댁에 가서 해야 한 행실, 예절 등을 가사체로 적어준 것이다. 이것이 여러 부녀자들에게 전해지면서 모방도 하고 그 범위도 확대되어 놀이, 여러 가지 일거리, 자연풍물, 설화, 제문, 편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사로 표현되었다.

 

조선말기 이후로는 산문조를 도입,전통적 가사와 구전민요와의 중간에 처하면서 독특한 가사의 한 분파를 이루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계녀가′, ′화전가′, ′석별가′, ′춘유가′ 등이있다.이러한 내용을 지닌 가사는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북부지방에서 가장 성행되어 사대부집 아씨들의 반짇그릇에는 거의 가사 두루마기가 따라 다닐 만큼 성행했다. 우리의 부녀자들은 봉건사회에서 무한한 인내와 복종으로 삶에 적응하고 도리를 지키며 다소곳이 생애를 바쳐왔다. 이러한 생활에서 얽힌 온갖 애환과 애틋한 정한을 표출한 것이 내방가사이다.

 

5.선유줄불놀이

 

줄불놀이는 밤하늘에 흩어지는 불꽃을 감상하는 운치있는 놀이로, 옛 사람들이 즐기던 불꽃놀이라고 할 수 있다. 하회마을의 줄불놀이는 마을주민들이 여름철부터 만든 것인데 이채롭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 유래

하회리 앞 부용대 절벽과 그 앞의 낙동강에서 음력 7월 16일 달밝은 밤에 행해졌던 놀이로 줄불놀이, 달걀불놀이, 낙화놀이와 뱃놀이 등 네가지 내용으로 나누어진다.

 

6.안동 차전놀이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제24호

지 정 일 1969.01.07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운암동 132-21

 

안동 차전놀이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안동지방에서 행해지던 민속놀이의 하나로 동채싸움이라고도 부른다. 유래에 대하여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의 싸움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 놀이를 위해 연말이면 안동 근처에서 적당한 나무를 미리 골라 두었다가 산신에게 고사를 지내고 나무를 베어 운반한다. 동채의 크기나 견고성이 싸움의 승패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주기 때문에 동채를 만들 때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대문을 잠그고 만든다. 마을을 동서로 나누어 편을 가르는데 거주지가 아닌 태어난 곳을 위주로 편을 나누기 때문에 때로는 부부간에도 편이 다를 수 있다. 대보름날이 되면 동서 양편이 대치하고 서서 농악으로 흥을 돋우고, 동채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기세를 올린다. 동채 위에는 대장이 올라 타고 떨어지지 않도록 왼손으로는 끈을 쥐고 오른손으로는 동채를 멘 사람들을 지휘한다. 동채 앞에서 힘센 장정들이 무리를 이루어 팔짱을 끼고 적과 부딪쳐 서로 어깨로 밀어 길을 낸 뒤, 동채가 밀고 들어가 상대방의 동채를 눌러 땅에 닿게 하면 이기게 된다. 하지만 싸움 도중에 자기 편이 유리한 순간이라도 적의 머리꾼이 쓰러져 위기에 처하게 되면 즉시 후퇴하여 구출하고 다시 승부겨루기를 한다.

 

안동 차전놀이는 남자들의 집단놀이를 한층 세련되게 향상시킨 모의전투놀이이며, 우리민족의 흥겨운 민속놀이로 안동지방 특유의 상무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동부가 이기면 동부에 풍년이 들고, 서부가 이기면 서부에 풍년이 든다고 믿어 농경민의 풍년기원을 바탕으로 한 농경의례놀이라 할 수 있다.

 

7.지신밟기

 

조사자가 지신밟기를 해보자고 했다. 풍물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했으나, 풍물을 보관하고 있는 담당자가 마을에 없어서 풍물을 준비할 수가 없었다. 해마다 정월 보름에 집집마다 돌면서 지신밟기를 해왔으나 최근에는 새로 이사온 집이나 새로 집을 지은 집 외에는 하지 않을 정도로 축소되었다. 소리꾼이 사설을 부르고 뒷소리꾼이 후렴을 받는 점에서는 일반적이나, 뒷소리꾼이 후렴귀와 함께 앞소리꾼이 부른 사설을 그대로 따라서 부르는 접은 특이하다. 그래서 뒷소리꾼이 여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앞소리를 다 받아서 부를 수 없다. 이 노래도 보다 길게 부를 수 있었는데, 뒷소리꾼들이 제대로 앞 소리를 받지 못해서 중도에 끝이 났다.

 

아허라지신아 성주의지신을 눌리세 어허러지신아 성주지신을 눌리세 붇구세붇구세 다래 기다래기 붇구세 어허라지신아 다래기다래기 붇구세 한마지기를 붇구까 두말지기를 붇구까 어허라지신아 한말지기를 붇구나 두말지기를 붇구나 앞노적을 붇구까 뒷노적을 붇구까 어허라지신아 앞노적을 붇구까 뒷노적을 붇구까 이집가정의 대주님은 아들애기를 접지하소 어허라지신아 이집가정의 대주님은 아들애기를 점지하소 아들이나그던 효자가나고 딸이나 그던 열녀가나소 어허라지신아 아들이나그던 효자가나고 딸이나그던 열녀가나소 닭이나그던 봉이나고 개가나그던 삽살이나소 어허라지신아 개가나그던 삽살이나고 닭이나그던 봉이나소 에이이집가정의대주님은 삼백이라육십일에 재수소망을 점지하소 어허라지신아 이집가정 의대주님은 일년이라열두달에 삼백이라육십일에 재수소망 을점지하소

 

8.하회 별신굿 탈놀이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지 정 일 1980.11.17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천면 844-1

 

별신굿이란 3·5년 혹은 10년마다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서낭)님에게 마을의 평화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굿을 말한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서는 약 500년 전부터 10년에 한번 섣달 보름날(12월 15일) 내지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무진생(戊辰生) 성황님에게 별신굿을 해왔으며 굿과 더불어 성황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탈놀이를 하였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각시의 무동마당·주지마당·백정마당·할미마당·파계승마당·양반과 선비마당·혼례마당·신방마당의 8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놀이를 시작하기 전 대내림을 하는데, 정월 초이튿날 아침 성황당에 올라가 당방울이 달린 내림대를 잡고 성황신을 내리면 당방울을 성황대에 옮겨 달고 산에서 내려온다. 성황대와 내림대를 동사 처마에 기대어 세우고 비로소 놀이가 시작된다. 등장인물로는 주지승·각시·중·양반·선비·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 등이 있다. 파계승에 대한 비웃음과 양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해학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제사의식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각시탈은 성황신을 대신한다고 믿어 별신굿 외에는 볼 수 없고, 부득이 꺼내볼 때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한다. 또한 탈을 태우며 즐기는 뒷풀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놀이에 사용되는 탈은 주지탈 등을 포함하여 모두 10종 11개로 오리나무로 만들었으며 옻칠과 안료를 두세겹 칠하여 색조의 강도를 높였는데, 원본은 1964년 하회탈 및 병산탈(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탈놀이의 반주는 꽹과리가 중심이 되는 풍물꾼이 하며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춤사위로 이루어진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우리나라 가면극의 발생이나 기원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0.한두실행상소리

 

안동시 서후면 대두서리(일명 ′한두실′)에서 초상이 났을 때 옛부터 행해 온 ′상여멕이 소리′이다.

 

11.화상놀이

 

화상놀이는 서후면 저전동에서 행해져 내려온 놀이로서, 이 마을은 옛날부터 화재가 자주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침으로 이 놀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 서북부쪽의 산간에서 학가산의 산정이 뾰족하게 보이는 나쁜 풍수 때문에 화재가 자주 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놀이는 매년 음력 5월 4일 밤, 즉 단오전날 밤에, 원마을이 서부가 되고, 다른 마을이 동부가 되어, 양쪽에서 청장년 30명 가량이 어울려 벌리는 횃불싸움의 한 종류이다.

화상이란 횃불과 같은 것으로 버드나무나 소나무의 썩은 뿌리를 캐어 말려, 단단하게 두드려서 꼬은 살줄을 묶고 그 살줄에 세발 정도의 질길 새끼줄을 이은 것을 말한다. 살줄의 길이가 반발 정도로서 화상의 총 길이는 대략 세발반 정도라고 한다. 4일낮에 양쪽의 청장년들이 함께 모여 심한 싸움으로 번지지 않도록 싸우는 방식을 조절한 다음, 밤이 되면 청장년들은 화상을 들고 넓은 마당으로 모여 갈라서고 양쪽의 지휘자들은 높은 곳에 올라 지휘를 한다. 각각 화상 끝에 불을 붙여 새끼줄을 잡고 공중에서 돌리면 불꽃이 흩어지며 둥근 불꽃선을 그린다. 싸움이 시작되면 함성을 지르며, 양쪽이 서서히 접근하면서 화상을 돌려 상대방의 화상줄을 휘감아 빼앗는다. 팔힘이 약하여 화상을 빼앗기면 도망가고, 빼앗은 사람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과 싸우며, 나중에 빼앗은 화상의 수로써 승부를 가린다. 싸우는 시간은 한편이 화상을 많이 빼앗겨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될 때까지이나 도중에 심한 부상자가 났을때에는 일단 중지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보통 새벽녘까지 싸우게 된다.

지휘자들은 자기편 사람들에게 싸우는데 유리한 방향을 알려준다. 마을을 위한 놀이나 싸움이라는 점에서 온 마을이 적극 협조하며 노인들도 싸우는 도중에 안전한 위치에서 적극 응원하기도 한다. 싸움이 끝나면 일단 흩어졌다가 날이 밝은 다음에 한자리에 모여 술을 마시고 즐기며 싸우는 도중에, 벌어진 일에 대해 사과도 하며, 부상자를 위안하기도 한다. 이놀이가 행해진 뒤부터 이 마을에서 화재사건이 없어졌다고 한다. 6.25사변 직후까지 행해졌다고 하나 지금은 놀이가 너무 위험하기도 하며, 또 화재사건이 일어나지도 않기 때문에 그쳤다고 한다. 남자들의 팔힘 세기를 겨루기도 하지만 위험한 불꽃똥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과감성과 모험심을 아울러 나타내고 있는 놀이로서, 또한 개인끼리의 승부를 합해서 집단의 승부를 가리도록하여 집단에 대한 개인의 소속감을 협동심으로 이끌도록 하는 놀이로서도 좋은 점을 가진다고 하겠다.

 

12.화전놀이

 

화전놀이는 부녀자들이 춘삼월 날씨가 좋은 날을 가려 산이나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 진달래꽃으로 전을 부쳐먹으며 놀던 놀이이다. 안동에서는 마을 혹은 같은 문중의 부녀자들이 3월 삼진날 전후에 날을 잡고 화전 재료와 과일, 감주, 육류를 준비한다. 놀이장소는 매년 일정한 장소가 정해져 있으나 때로는 문중의 재실이나 묘소, 서원 등을 택하기도 한다. 이 놀이는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며 가사짓기도 하면서 하루를 즐겼는데 가사는 즉흥작이 많았으나 미리집에서 지어온 가사를 낭송하기도 하였다

2007.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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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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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의 장점


1. 한복은 아름다운 옷이다.

   한복의 아름다움은 세계인이 인정한다.

   사선과 직선의 아름다움 - 동정, 버선코처럼 살짝 들어올린 아름다움 - 섶코,

   처마의 곡선을 보는 듯한 도련과 배래, 오방색을 사용하여

   화려하면서도 품위있는 아름다움


2. 한복은 건강을 지켜주는 옷이다.

   한복은 평면재단으로 넉넉하게 만들어 몸을 조이지 않음으로 건강에 아주 좋다.

   “가슴 위는 차게, 배꼽 아래는 따뜻하게 하여야 건강하다”는 한방의 이론에 잘 맞는다.

   목 부위는 시원하게 터주고, 허리끈과 대님으로 겨울의 찬바람을 막아준다.

   또 “삼음교”라는 경혈자리에 대님을 묶어 비뇨기과 계통의 건강을 돕는다. 


3. 한복은 더불어 사는 옷이다.

   넉넉한 품과 허리로 키만 비슷하면 내옷 네가 입고, 네옷 내가 입을 수 있는 옷이다.


4. 한복은 몸을 감춰준다.

   한복은 넉넉한 옷으로 뚱뚱하거나 마른 체형을 감춰주어 신체의 부끄러움을 감춰준다.

   

5. 한복은 자신이 살찌거나 마르거나 상관이 없다.

   입는 사람이 마르거나 뚱뚱해져도 아무 문제없이 입을 수 있다.

2008.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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