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4장 21-26절


있는 모습 그대로– 두근 두근 내 인생

‘두근두근 내 인생’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김애란 씨가 쓴 장편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17살 대수와 미라가 자식을 낳아 부모가 되는데, 태어난 아이가 남들보다 빨리 늙어버리는 조로증을 앓게 됩니다.

실제 나이는 열여섯인데, 신체 나이는 80세인 아들 아름이는 서서히 죽음의 문턱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영화에 보면 죽음을 앞두고 늙어가는 아들이 ‘아버지’라는 시를 지어 아빠에게 들려줍니다.

“아버지가 묻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나는 아버지로 태어나, 다시 나를 낳은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아버지가 묻는다. 더 나은 것이 많은데, 왜 당신이냐고 나는 수줍어 조그맣게 말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로 태어나, 다시 나를 낳은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아버지가 운다 ”

아름이는 신체 나이만 80세라고 하기엔, 정신 나이도 너무 성숙합니다. 다른 아이처럼 떼쓰고 울지 않습니다.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에 속 한 번 안 썩이는 아들입니다. 애가 애처럼 굴어야 하는데, 아이는 너무 성숙하고 담담합니다. 그래서 아름이 엄마 미라는 아름이에게는 네 나이에 맞게끔 애처럼 굴라고 혼을 내기도 합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참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아이가 아이같지 않은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어떨까요? 만일 저 아이가 내 자녀라면 나의 마음이 어떨까를 생각해 보니, 그냥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부모가 원하는 자식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아이이면 아이처럼 노는 것이 부모가 원하는 모습입니다.

엄마 앞에 나오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한다

정채봉 시인이 쓴 ‘엄마가 휴가 나온다면’이라는 시를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이 다음에 이 시는 세 행이 더 있습니다. 정채봉 시인은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또 뭐라고 말하고 싶었을 까요? 여러분이 만약에 이 상황이라면 엄마에게 뭐라고 말하고 싶으신가요? ‘사랑합니다. 보고 싶었어요. 죄송해요’, 흔히 이런 말을 생각하지 않을 까요?

그런데 이 시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숨겨 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조금은 낯선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잔잔한 감동이 됩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억울했던 일, 그것을 어머니 앞에 일러바치고 어머니 품에 안겨서 엉엉 울겠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때로 아내조차, 남편조차, 자식조차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엄마’입니다. 그 만큼 편하고, 기대고 싶고, 따뜻하고, 나의 모든 것을 품어 줄 수 있는 존재가 ‘엄마’입니다.

‘억울했던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는 말 속에는 엄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과 죄송함과 따뜻함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엄마에게 억울했던 일을 일러바치고 그 품에 안겨 우는 그 모습으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화려한 치장을 하고 하나님 앞에 오는 것이 아니라 발가벗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내려가시기 위해 사마리아를 통과하시게 됩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요단강을 건너 요단 동쪽에서 쭉 올라가서 다시 요단강을 건너가 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곧바로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를 통과해 갈릴리 지역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면서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요구하면서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에 대한 말씀을 전해줍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여인은 그런 물을 내게도 주셔서 목마르지도 않고 또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오지 않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 때 난데없이 예수님은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십니다. 이 여인이 남편이 없다고 하자 예수님은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맞다고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을 들은 이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식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정말 궁금했던 것을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이 여인은 예배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섬기고 사마리아인들도 하나님을 섬기는데 어디에서 예배하는 것이 맞느냐고 이 여인은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마리아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시면서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데, 하나님께 예배하는 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예배는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든 사마리아 성전이든,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적인 의미로 좀 말씀을 드리자면, 내가 교회에서 와서 예배를 드렸으니 하나님께서 받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와서 하나님께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다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의 예배만을 받으신 다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은 발가벗고 예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하시는데,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주석을 찾아보면요 참 어렵게 풀이를 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반드시 그의 거듭난 심령 안에서 거짓이나 허상에 따르지 않고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목사도 이렇게 예배하는 것이 어떤 예배인지를 잘 모르는데 여러분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주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좀 여쭈어 보았습니다. “하나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제 마음 가운데 들려주시는 음성이 ‘발가벗는 것이다’는 음성이었습니다. 또 다시 한 번 물어보았습니다. ‘발가벗는 것이 무엇입니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오는 것이다’ 라는 음성을 제 마음 가운데 들려주셨습니다.

나는 너의 예배를 원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제 마음 가운데 주시는 또 하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야, 나는 너의 예배를 받기를 원한다’.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는데,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참 죄송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단지 예배인도자였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주일 낮예배 시작 20분 전쯤 강대상에 올라와 하나님께 예배를 위해,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눈을 뜨고 제가 하는 것은 성도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누가 안 오셨나를 확인합니다. ‘왜 집사님이 늦으시지, 왜 권사님이 오늘은 안 오셨지 무슨 일이 있으신가?’

저는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서는 것이 아니라, 예배인도자로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게 예배인도자가 아닌, 목사가 아닌 하나님을 믿는 한 사람의 자녀로써 예배드리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발가벗은 상태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예배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앉는 자리에만 방석을 하나 갖다 놓았습니다. 예배 전에 성도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예배자로 서기 위해 기도하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중심으로 예배하는 자의 예배를 받으신다

고린도전서 1장 9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 근본적인 목적은 주님과 교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로 하나님께 예배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와 교제하기 위해서입니다.

교제하기 위해서는 벽이 없어야 합니다. 가식이라는 옷을 벗어야 합니다.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분명히 때로는 가면을 써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만큼은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발가벗은 모습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이라 아니라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은 예배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중요한 예배에 대한 말씀을 누구에게 하고 있습니까?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유대인들이 개 취급하며 상종도 하지 않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겉모습을 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껍데기를 보시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많이 배웠느냐 적게 배웠느냐, 많이 가졌느냐, 적게 가졌느냐, 남자냐 여자냐, 목사냐 성도냐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중심으로 예배하는 자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발가벗는 것은 진심을 전달하는 것이다

구글이라는 회사에서 일하는 35세 김태원 씨가 ‘생각을 선물하는 남자’라는 책을 썼습니다. 제목도 참 신선하고, 내용도 참신했습니다. 김태원 씨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강의를 통해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분입니다.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강의를 잘하니까 김태원씨에게 가끔씩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강의나 발표를 잘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김태원 씨는 이렇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청중들 앞에서 발가벗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강의하는 사람이 꾸밈 없이 진실되게 자신의 생각을 담아서 강의를 마치면, 청중들이 저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혀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즉 옷을 벗은 채 강의를 하고 나면 청중이 당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선물합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 앞에서 멋있게 보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멋진 옷을 입고 싶죠. 하지만 적어도 강의를 한다면 어떤 옷을 입고 싶은 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나의 힘이란 내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내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의 진짜 힘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강의를 하는 사람도 강의를 잘하기 위해서는 청중들 앞에서 발가벗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곧 강의를 듣는 사람에게 진심을 전달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입 발린 강의가 아니라, 지식적인 강의가 마음으로 하는 강의가 되어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의를 잘하기 위해서도 발가벗어야 한다면, 하나님께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우리가 발가벗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좋아하는 찬양 가운데 ‘주를 위한 이곳에’ 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주를 위한 이곳에 예배하는 자들 중에 그가 찾는 이 없어 주님께서 슬퍼하시네.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사람 그 예배자 내가 그 사람 되길 간절히 주께 예배하네. 주 은혜로 이곳에 서있네 주 임재에 엎드려 절하네. 그 어느 것도 난 필요 없네 주님만 경배해”.

저는 우리 아름다운교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기를 정말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이 이곳에 와 계시는데, 이곳에 주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폼 잡으려고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목사에게 출석 도장 찍기 위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정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만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배우와 같은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키에르케고어는 철학자이면서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그는 예배는 연극배우와 비슷하다고 하면서, 연극배우의 예를 들어 참된 예배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정의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을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키에르케고어가 예배와 연극배우를 비유해서 하는 말입니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이 여러분에게 상처가 아니라 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배우는 늦지 않습니다. 배우가 늦는 연극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예배에 늦으면 이미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관객처럼 보는 입장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예배 시간에 늦는 사람들은 이제부터 ‘나는 예배를 드리는 자가 아니라 예배를 보는 자다’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배우는 연극이 끝나기 전에는 집에 돌아가지 않습니다. 배우가 일찍 가버리면 연극이 될 수 없습니다. 배우가 연극을 다 끝낸 후에야 숙소로 돌아가듯이, 성도는 목사님의 축도가 완전히 다 끝난 후에야 집에 돌아갑니다. 말씀만 듣고 가는 자는 예배를 제대로 드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배우는 졸지 않습니다. 배우가 졸면 연극이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시간에 졸면서 예배를 드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 시절 신앙의 절개를 지킨 것으로 알려진 쿰란 공동체에서는 예배시간에 조는 사람에게 한 달 간 예배 출석 금지령을 내리는 규정이 있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배우는 연극의 내용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배우는 대사를 암기합니다. 그리고 연극의 흐름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배드리는 사람은 예배 때 말씀을 제대로 들은 다음, 집에 돌아가서도 설교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설교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예배를 드린 사람이 아니라 예배를 ‘본’ 사람입니다.”

키에르케고어가 이 비유에서 강조한 것은 예배를 드릴 때 관객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배의 관객으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보는 자가 아니라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예배를 통해, 하나님 한 분 만이 높임을 받고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지금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 23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 이때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경험하시고 부활하시는 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미 2,000년 전에 부활하셨습니다. 그 때를 기점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저는 여러분이 지금까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했는 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지금 이 시간에 나에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 나는 예배시간 시간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에게 나와 중심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예배할 때는 지금입니다. 현재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예배했던 자가 아니라 지금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방 신에게 하는 헌신만큼이라도…

저랑 같이 공부하셨던 신암교회 곽숭기 목사님께서 2014년 여름 발리 신암교회를 다녀오신 말씀을 해주셨는데,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발리 신암교회는 대구 신암교회가 개척한 교회라고 합니다. 인도네시아에 있는 크고 작은 섬들 중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섬이 바로 발리섬입니다. 발리는 휴식과 관광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신혼여행지 ‘베스트 5’에 들어가는 곳입니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교가 85% 이상인데, 유독 발리섬은 힌두교가 90% 이상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발리섬 안에서는 2만여개의 사원에서 각종 신들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힌두교 신자들은 집집마다 집 앞에 재단이 있는데 하루 세 번씩 가족을 위한 기도를 올리며, 나무 쟁반 같은 곳에 꽃과 음식을 매번 드린다는 것입니다. 신에게 꽃과 음식을 바치는 이 관습은 사당이 없는 가게에서도, 심지어 쇼핑몰, 공항 내 면세점에서도 행해진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그 음식을 자신들이 먹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짐승들도 신으로 여기니까 짐승들이 먹어치워야 신이 제사를 받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루 세 번씩 꽃과 음식을 드리려면 그 돈도 만만치가 않을 것입니다.

발리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게 살아간다고 합니다. 호텔과 고급 빌라, 게스트하우스는 대부분 외국 사람들의 소유이고, 정작 발리 사람들은 호텔이나 게스트 하우스에 종업원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선교사님께 ‘저렇게 어렵게 사는데 어떻게 하루 세 번씩 재단에 꽃과 음식을 드릴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선교사님께서는 저들은 10의 5조를 신에게 헌신하는데 사용한다고 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참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이방 신을 섬기는 저 사람들도 저렇게 정성을 다하고 물질로 헌신하며 신을 섬기는데, 나는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얼마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하고 헌신하고 있는지… 참 하나님께 죄송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내가 잘못된 이방신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음에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삶의 예배로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성전 안에서 예배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바울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예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리는 제물은 산 채로 드려지는 것은 없습니다. 다 죽여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런데 바울은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곧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하는 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삶의 예배를 드리고 또 하나님의 성전에 와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발가벗은 채로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 앞에서 그 삶 자체가 예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이 늘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늘 있는 그대로 모습으로 나가셔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쏟아 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시선이 하나님께로만 향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 예배가운데 임재해 주시는 것입니다.

미국 베들레헴 침례교회 담임목사이자 유명한 작가이기도 한 존파이퍼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우주에는 두 가지 위대한 열정이 있다. 영광을 받으시려는 하나님의 열정과 만족케 되려는 인간의 열정이 그것이다. 이 두가지는 상충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예배를 통해서 동시적으로 만족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때, 내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열정과 인간의 열정이 만나 만족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예배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삶의 현장에서나 언제나 발가벗은 모습으로, 중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서재에서 만난 이재영 목사는 “설교를 만들어내기 힘들어 자괴감도 들고 목회를 그만둘까 고민도 했다”고 고백했다. 지금은 아트설교연구원 대표 김도인 목사를 대신해 목회자들에게 강의도 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희망도 습관이다’ ‘동행의 행복’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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