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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진주강씨 어사공파 질문입니다 아버지포...
bkej**** 조회수 1,013 작성일2018.07.03
진주강씨 어사공파 질문입니다
아버지포함형제들이 강0백 백자 돌림이고요
저를포함 형제들은 강0욱. 욱자돌림입니다
저의 강씨족보위치는 어디입니까? 찾기가너무 어렵습니다
그리고 어사공파가 박사공파입니까?
어떻게 같지요??
아시는분 답변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강씨 어사공파 강0묵 묵자돌림 하는 분하고는 어떤관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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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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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에 답변을 드립니다.

 

진주강씨 어사공파 질문입니다
아버지포함형제들이 강0백 백자 돌림이고요
저를포함 형제들은 강0욱. 욱자돌림입니다
저의 강씨족보위치는 어디입니까? 찾기가너무 어렵습니다
그리고 어사공파가 박사공파입니까?
어떻게 같지요??
아시는분 답변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강씨 어사공파 강0묵 묵자돌림 하는 분하고는 어떤관계입니까??

 

답변 : 님은 진주 강씨 박사공파(博士公派)로 박사공파에서 어사공에서 진원군(晉原君) 대장공파 또는 창귀파(昌貴派) 내려갑니다. 이렇게 선조님들이 출세한 분들이 많아 역사가 깊습니다. 님도 박사공파라 하셔야합니다. 그분도 어사공파이시면 일가 친척입니다.

 

조부님 : ?세 ?자 돌림이시고,

부친님 : ?세 ○백자 돌림이라 하셨며,

님은 : ?세 ○욱자 돌림이라 하셨습니다.

 

님의 직계는 항렬표 돌림자를 쓰지지 않고 성함을 지으신 듯 합니다.

 

님은 진주 강씨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시니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한글과 한문을 병행합니다. 이유는 한문이는 깊은 뜻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이점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아래는 진주강씨에 대한 정보입니다.

  

비조 : 강문성

 

시조 : 강이식(姜以式)

2 : 강운기

3 : 강수손

4 : 강박

5 : 강극용

6 : 강택인

7 : 강진

10 : 강구만

13 : 강종일

14 : 강극술

15 : 강보능

 

(1) 박사공 휘 계용(啓庸)

 

시조 탄생 이후 700년여 고려 23대 임금 고종 때 이 땅에 동방(東方) 대성(大姓) 진산 화주의 대파조(大派祖)가 탄생하니 박사공 휘 啓庸(계용) 선조님이다. 오늘날 130만여 강씨 중 90만에 가까운 후손이 이 선조님의 피를 이어 받아 오늘에 이르렀다.

 

고려말 대학자 양촌 권근(權近) 선생이 지은 박사공의 6세손 공목공(휘 시)의 묘지명에 5세조 啓庸(계용)이 국자박사(國子博士)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일찍이 보책에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적고 있다. 국자박사란 오늘날 국립 서울대학의 교수로 문과에 급제하지 않고는 오를 수 없는 지위이다.

  더구나 박사공이 통신사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사적이 있기 때문에 문과에 급제한 사실은 더욱 분명하다. 서장관은 외국에 나아가 때로는 외국 사신과 필담(筆談 붓으로 글을 써 대화를 나누는 일)으로 외교 문제를 다뤄야 하고 서장관의 주된 임무가 통신사 일행을 감시하고 돌아와서는 그간의 일정을 세세히 임금에게 보고하는 지위이기 때문에 문과에 급제하지 않고는 수행할 수 없는 자리이다. 또한 통신사는 당대의 내노라하는 학덕을 갖춘 사람이 담당하기 때문에 서장관 또한 젊고 벼슬은 낮지만 통신사 못지 않은 학문을 닦는 사람을 선발하는 것이 통례였다.

  

1274(고려 원종 15) 10월 원나라가 동정정책으로 일본을 정복할려고 할 때 박사공 선조님은 고려군 중장군(中將軍) 김방경(金方慶)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 정벌에 참전하게 되었다. 이때 아드님 인문(引文)은 함께 일본 정벌에 참가할 것을 아버지에 간청하였다.   

  "아버님, 소자도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아니다. 내가 바라서 가는 것도 아니오, 또한 임금이 바라서 가는 것도 아니다. 나라의 힘이 없기 때문에 마지못해 가는 길이니 너는 어머니를 모시고 또 어린 자식들을 잘 돌보고 있거라."

  "아니옵니다. 어머님은 마땅히 소자가 돌보아야 하나 며느리가 있고 자식은 그 에미가 있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아버님은 지금 바다 멀리 이역 만리에 그것도 전쟁터에 가시는 길입니다 어떻게 자식된 도리로 따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자를 불효자로 만들지 마십시오."

  박사공은 아들의 애원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하고 함께 부자가 일본 정벌에 참여하게 되었다. 고려, 원나라(몽고) 연합군  2 5  병사가 대마도를 친 다음 일본 본토를 향하던 중 심한 풍랑을 만나 일본 정벌에 실패하고 본국으로 되돌아 왔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 아니겠는가. 이때 어느 한 분이라도 불귀의 객이 되었더라면 오늘날 동방의 대성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것은 필시 아들의 효심에 하늘이 감동해 이들 부자를 무사히 귀국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위기는 7년 후에 다시 찾아오게 된다.

  1281(고려 충렬왕 7) 5월 원나라가 2차 일본 정벌할 때 내급사공(內給事公)  引文(인문) 1차 정벌 때 아버지와 함께 일본에 다녀왔기 때문에 길을 잘 안다하여 다시 고려군 도원수 김방경(金方慶)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기용되어 동정(東征)에 나서게 되었다. 10만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은 일본 하까다(博多)에 상륙하려다 또다시 폭풍우를 만나 싸우지도 못하고 수차 죽을 고비를 겪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300년여 후인 1598년 임란 때 경위는 다르지만 일본에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 갔던 수은공 ()이 지은 조부의 행장에 박사공은 본국에 돌아와 진원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지고 더 이상 벼슬은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이야기는 고려 말엽으로 되돌아 간다.

  내급사공 선조님이 일본에 다녀온 후 아들 사첨(師瞻)과 손자 창부(昌富), 창귀(昌貴), 창수(昌壽)를 불러 놓고  

  "내가 학자가 아니었더라면 그처럼 위험한 일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조상의 음덕이 있어 이렇게 살아 왔다만 너희들은 선비의 재주를 나타내지 말아라. 우리 집안이 간신히 조상님의 제사를 올리는 것만으로도 고마우니라."

   이제부터는 후손들에게 벼슬을 그만 두라는 선조님의 말소리는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럴 수밖에 영남 큰 고을 진주의 명망 있는 사대부 집안에서 과거를 보아 관직에 나아가지 말라는 선언은 마치 헤엄치는 법을 배우지 않고 큰 강을 건너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급사공 선조님은 가계의 계승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덧붙일 말은 내급사공 선조님의 유훈은 벼슬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보아 높은 벼슬길에 들어서지 말라는 것이었다.

  두 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것도 오랑캐 원나라의 강요에 의해서 마지못해 참전했던 선조님의 비애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사적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이 사실이 실려 있다.

   1996년 간행된 <중학 국사 상 130> "원과의 관계"에 보면 "원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군함의 건조, 군량의 공급, 군사의 동원을 고려에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두 차례에 걸친 여·원 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단행되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자습서에는 실패 원인이 태풍이었다고 적고 있다. 위의 교과서의 내용이 1685년에 발간된 남한보(족보) 박사공에 관한 기록과 일치한다.

  

(2) 박사공의 손자 어사공 탄생

 

박사공의 손자되는 師瞻(사첨) 선조님은 고려 충렬왕 때 전중(殿中)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역임했다.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더 이상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문하좌사중을 지낸 손자 군보(君寶)의 공적으로 판내의령참리부사(判內議令理副使)에 증직되었다.

  

묘는 경남 합천군 율곡면 갑산리 마을 뒤 용덕산 임좌에 있었으나 숱한 병란으로 실전하였다. 합천군지에 사적이 실려있다. 이곳은 영남 최상의 명당으로 알려져 몰래 묘를 쓰는 경우가 많아 잃버렸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배위(配位)는 금성군부인(錦城郡夫人) 나주정씨(羅州鄭氏)이며, 아버지는 삼한삼중대광 수사공 금성부원군 문정공 정가신(鄭可臣), 할아버지는 증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상장군 정송수(鄭松壽)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증중봉대부 예빈경 정종산(鄭宗産), 외할아버지는 대부(大府) 소경(少卿) 죽산 안홍우(安洪祐)이다. 옛날 보책에는 배위의 기록이 전해지지 않았으나 나주정씨(羅州鄭氏) 병진, 계묘 양보책에 실려 있어 대동보편찬위원회의 결의에 의거 실었다.

 

(3) 박사공의 증손자들

 

 어사공의 세 아들 모두가 선대의 유훈에 따라 과거를 보지는 않았지만 음덕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맏아들 昌富(창부) 선조님은 정용위(精勇衛)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어떤 보책에는 진양군(晉陽君)에 책봉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昌富(창부) 선조님의 관직명을 따라서 이 분의 후손들을 대장군공파라 하고 동생 昌貴(창귀) 선조님의 후손들을 진원군공파라 한다.

 

(4) 박사공의 현손들

 

  아들 두 분을 두었는데 맏아들 璜寶(황보) 선조님은 음직으로 재신(宰臣)에 올라 이병부사 판밀직사(吏兵部事判密直事)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내고 1381년에 별세했다.

  둘째 아들 (전보) 선조님은 낭장(郎將)을 지내고 봉성군(鳳城君)에 책봉되었다. 이 분들은 진주 개경리(開慶里)에 살았으며 이 곳은 은렬공(휘 민첨)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전녹생(田綠生)의 야은집에 보면 전녹생이 璜寶(황보) 선조님에게서 많은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서 상당한 재력을 가진 토호세력인 듯 싶다.

  진원군(휘 창귀)의 외아들 문경공 君寶(군보)의 사적은 아래 제6편에 계속됩니다.

  고려 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원(몽고)나라는 1307년 이후 26년간 무려 8명의 황제가 교체되는 등 국력이 점차 쇠퇴하여 가고 급기야는 남북으로 갈라지고 망할 징조가 서서히 나타났다.

 

박사공 세계도를 본다면,

 

1 : 강계용(姜啓庸) : 박사, 진산부원군 고려 원종 甲戌  이통신사 서장관 도일 (1274) 박사공 파 조

 

2 : 강인문(姜引文) : 내급사

3 : 강사첨(姜師瞻) : 감찰어사, 아들-창부(昌富), 창귀(昌貴), 창수(昌壽)

4- 강창귀(姜昌貴) : 판도정랑

5 : 강군보(姜君寶) : 정당문학, 봉사군, 문경공, 아들 (), ()

6 : 강시(姜蓍) : 문하좌찬성), 진산군. 회백(淮佰), 회중(淮仲), 회순(淮順), 회숙(淮叔), 회계(淮季)

7 : 강회백(姜淮佰) : 동북면도순무사 겸 병마절도사, 아들 종덕(宗德), 우덕(友德), 진덕(進德), 석덕(碩德), 순덕(順德)

8 : 강우덕(姜友德) : 아들 맹경(孟卿), 숙경(叔卿)

 

9 : 강맹경(姜孟卿) : 영의정, 문경공 아들 윤범(允範) 숙경(叔卿)

10 : 강윤범(姜允範) : 경상도관찰사

 

9 : 강숙경(姜叔卿) : 집의

10 : 강인범(姜仁範) :

11 : 강혼(姜渾) : 대제학, 판중추부사, 진천군, 문간공

 

8 : 강석덕(姜碩德) : 지돈령부사, 진양부원군, 영의정 심온의 사위로 세종과 동서지간 아들 : 희맹(希孟) 희중(希曾)

 

9 : 강희안(姜希顔) : 집의원부사, 화가

9 : 강희맹(姜希孟) : 좌찬성, 진산부원군, 문량군

10 : 강구손(姜龜孫) : 우의정, 진원군, 숙헌공

11 : 강태수(姜台壽) : 부사, 생부 : 학손(學孫)으로 백부출계

12 : 강복(姜復) : 사용

13 : 강성덕(강성덕) : 장단도호부사

 

7 : 강회중(姜淮仲) : 보문각대제학

8 : 강안수(姜安壽) : 예비시소윤

9 : 강휘(姜徽) : 대호군, 아들 자평(子平), 자정(子正), 자순(子順), 문종의 부마(경숙옹주)

10 : 강자평(姜子平) : 관찰사, 공조팜의

11 : 강형(姜泂) : 대사간

12 : 강영숙(姜永叔) : 별제

 

13 : 강호(姜滸) :

14 : 강사안(姜士安) : 병조정랑, 생부 온()

15 : 강신(姜紳) : 좌참찬, 진흥군, 의간공, 생부 사상(士尙)

16 : 강홍립(강홍립) : 5도도원수

13 : 강온(姜溫) : 사인, 아들 사상(士尙), 사안(士安), 백부 호()에게 출계

14 : 강사상(姜士尙) : 우의정

 

6 : 강서(姜筮) : 의정부찬성사

 

4 : 창부

5 : 황보

6 : 손기, 손수, 손교, 손명,

7 : , 예순, , 윤무

8 : 경의, 말동, 몽동, 승경 상의, 상희, 상제, 겨좌, 계무, 이인, 이의, 이례, 이지,

9 : , 산수, , , 증산,수정, 우복, 우상, 언방, 언장, 안륜,

10 : 응두, 응규, 응숙, 호지, 호인, 만의, 구연, 억수, 희보, 희찬, 희철, 창서, 우창, , 희문,

11 : 몽석, 몽인, , 희신, , 우문, , 귀춘, , 순검, , , 응곤,

12 : , 이성, , 응곤, 사환, 사일, 문성, , , 응부,

13 : 계동, , 계윤, 응황, 복흥, 복진,

14 : 문길, 기남, , , 상주, 상문,

15 : 언양, 거창,

 

운기

10 : 보능

1 : 민첩(현조)

2 :

3 :

4 : 보문, 정협, 정길

5 : 운익, 여익, 중익, 복민

6 : 원길(밀직), 원감(첨사), 원함, 원익(진사), 창서

7 : 천명

 

13 : 계용(啓庸)

1 : 계용

2 : 인문

3 : 사첨

4 : 창부

5 : 황보

6 : 손기

 

12 : 손명

13 : 문우

14 : 귀령

15 : 위용

16 :

17 : 효정

18 : 자원

19 :

20 : 응주

 

아래는 진주 강씨 박사공파 세계도

 

1)강계용(姜啓庸) : 박사, 진산부원군

2)강인문(姜引文) : 내급사

3)강사첨(姜師瞻) : 감찰어사, 아들 - 창부(昌富) 창귀(昌貴) 창수(昌壽)

4  

5  

6  

7  

8  

9  

대장군파

창부(昌富)

재신공파

황보(璜寶)

여은공

손기(孫奇)

대사간공

()

경의(敬義)

 

절도사공

말동(末同)

상호군

빈부사과

산수

현령공

손수(孫壽)

부사공

()

승경(承敬)

 

봉훈랑

()

상의

상희

상재

 

판관공

()

계좌, 계무

 

봉성군파 

전보()

직장공

손교(孫喬)

상호군공

윤무(允武)

이인(以仁)

이의(以義)

이예(以禮)

이지(以智)

 

첨사

손명(孫命)

참의공문우

참의공

귀령(龜令)

참의공

위봉(渭逢)

 

부원군파 

창귀(昌貴)

문경공파

군보(君寶)

봉산군

  

공목공

()

찬성사

양진당

통정공파

회백(淮伯)

장령공파

종덕(宗德)

군수공파

자신(子愼)

현감공파

자의(子儀)

사직공파

자보(子保)

부사직공파

자검(子儉)

창령공파

우덕(友德)

문경공파

맹경(孟卿)

집의공파

숙경(叔卿)

승지공파

진덕(進德)

()

()

()

대민공파

석덕(碩德)

인재공

희안(希顔)

문량공파

희맹(希孟)

감찰공

희증(希曾)

감찰공파

순덕(順德)

희명(希明)

풍헌(豊獻)

통계공파 

회중(淮仲)

소윤공파

(安壽)

대호군파

()

정낭공파

()

청풍공파

()

참판공파

안복(安福)

영선군파

이찬(利纘)

사직공파

이인(利仁)

별좌공파

이성(利誠)

군위공파

이경(利敬)

주부공파

이순(利順)

판서공파

이행(利行)

생원공파

이흥(利興)

진천군파

이온(利溫)

판관공파

이공(利恭)

효자공파

안명(安命)

사성공

()

소감공파

회순(淮順)

(

응형

응정

재신공파 

회숙(淮叔)

효손

효곤

중덕 

 

진원군파

회계(淮季)

()

서우(胥祐)

()

()

 

 

양희공파

()

좌랑공

()

 

 

첨정공파

()

집의공

신덕(信德)

현령질()

도사 구()

참판공파

()

사정공

대생(帶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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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공

서생(瑞生)

계종(繼宗)

계산(繼山)

인옥(麟玉)

대호군파

()

헌납공

명덕(明德)

직장공

의경(宜卿)

채경(寀卿)

 

 대장군파(大將軍派) 창부(昌富) 항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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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공파 진원군공( 昌貴)파 항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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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5, 26, 27세 상단은 주로 통정공파에서 하단은 통계공파에서 항렬자로 사용하고 있음.

 

 

진주 강씨(晉州 姜氏)에 대()하여

 

1. 진주 강씨(晉州 姜氏) 시조(始祖) : 강이식(姜以式)

2. 진주 강씨(晉州 姜氏) 유래(由來) :

 

진주 강씨(晉州 姜氏)는 모두 고구려(高句麗)의 구국공신 병마도원수공 강이식(姜以式) 장군(將軍)을 단일(單一) 시조(始祖)로 하고 있으나 당시(當時)에는 족보(族譜) 제도(制度)가 없어서 그 계통(系統)을 기록(記錄)으로 남기지 못하여 시조(始祖) 이후(以後)의 계통(系統)을 정확(正確)히 파악(把握)하지 못하고 있다.

 

은열공파(殷烈公派)는 강이식(姜以式) 장군(將軍)을 시조(始祖)로 하고 고려(高麗)시대(時代)의 명장(名將)이신 강민첨(姜民瞻) 장군(將軍)을 현조(顯祖)로 하여 오랜 세월(歲月)동안 대대로 번성(繁盛)해 내려온 동방(東方)의 대성으로서 지난날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과 약동(躍動)해온 혈통(血統)의 맥박을 역력히 느낄 수가 있다.

 

이 곳은 현재 은열공(휘 민첨) - 충정공(휘 호례)파의 세보(世譜) 자료(資料)를 중심(中心)으로 구성(構成)이 되어 있으며 추후 자료(資料)의 보완(補完)을 통()하여 은열공파 이외의 다른 계통(系統)에 대()하여서도 구축(構築)하여 명실(名實)공히 진주강씨(晉州 姜氏)의 인터넷 대동보(大同譜)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합니다.

 

3. 진주강씨(晉州姜氏) 계파(系派) 분파(分派)

 

- 박사공파(博士公派) : 강계용(姜啓庸)을 파조(派祖)로함.

- 어사공파(御史公派) : 박사공(博士公) 강계용(姜啓庸)의 손자(孫子) 강사첨(姜師瞻)이 어사로 지냄. 관서대장군파(關西大將軍派)라고도함.

- 소감공파(少監公派) : 강위용(姜渭庸)을 파조(派祖)로함.

- 시중공파(侍中公派) : 강원용(姜遠庸)의 손자(孫子) 강원로(姜元老)로 관서대장군을 지냄.

- 은열공파(殷烈公派) : 강민첨(姜民瞻) 시호(諡號)는 은열공(殷烈派) 장군(將軍)을 파조(派祖).

- 인헌공파(仁憲公派) : 귀주대첩 강감찬(姜邯贊) 장군(將軍) 시호(諡號) 인헌공(仁憲公) 派祖로함.

- 통정공파(通亭公派) : 강회백(姜淮伯) 통정(通亭), 고려(高麗) ()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조선(朝鮮)개국(開國) ()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에 올랐고, 성리학(性理學)에도 밝음.

- 통계공파(通溪公派) : 강사상(姜士尙) 선조(宣祖) 때에 우의정(右議政)으로 지냄.

- 관서공파(關西公派) : 강국흥(姜國興)은 이조판서로 지냄.

 

4. 진주강씨(晉州姜氏) 대표적(代表的) 인물(人物)

 

중시조(中始祖) 국자박사(國子博士) 강계용(姜啓庸) 1274(고려 원종 15) 통신사서상관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손자 강사첨(姜師瞻) 5세손 중

첫째 아들 강회백(姜淮伯)의 후손을 통정공파(通亭公派),

둘째 아들 강회중(姜淮仲)의 후손을 통계공파(通溪公派)로 구분하는데, 이들의 후손에서 가장 많은 인물이 나왔다.

통정공파의 통정 강회백은 고려 말에 대사헌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에 올랐으며, 성리학에도 밝았다.

그의 아들 강석덕(姜碩德)은 세종의 둘째 부인 영빈강씨의 아버지로서 개성유수, 지돈령부지사(知敦寧府事) 등을 지냈으며, 시와 글씨에 능했다.

강석덕의 아들 강희안(姜希顔),

강희맹(姜希孟) 형제는 통정공파의 대표적 인물로 꼽는데,

강희안은 세종 23년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직제학이 되어 정인지, 성삼문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뒤에 단종복위에 연루되었으나 "참으로 현사(賢士)이니 죽이지 말고 중용하라"는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뒤에 호조참의를 지냈다. 그는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이라 불려질 정도로 이 방면에 있어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강구손(姜龜孫)은 그의 아들이고,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강맹경(姜孟卿)은 강희안의 4촌 형이다.

강희안의 동생 강희맹 또한 당대의 문장가이자 서화가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世子賓客)이 되고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에 올랐다.

통계공파에서는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강사상(姜士尙)과 역시 선조 때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오르고 이조, 병조판서를 거쳐 중추원판사를 지낸 진흥군(眞興君) 강신(姜紳)과 왕자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임진왜란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오르고,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진 강인(姜絪) 형제가 빼어났다. 정묘호란의 주역으로 불리는 강홍립(姜弘立)도 강신의 아들이다.

특히 강인의 후손은 고종 때에 와서 강준흠(姜浚欽), 강시영(姜時永), 강문형(姜文馨), 강난형(姜蘭馨), 강우형(姜友馨), 강국형(國馨) 등 판서급 인물을 배출해서 명가로 꼽힌다.

 

이 밖에 인조 때 화포술(火砲術)을 전한 강홍중(姜弘重)이 있다.

 

5. 진주강씨 대표적 인물(국가의 공로가 많은 분들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 강이식 : 고구려 병마도원수

- 강사진 : 고려 태조조 판문하평장사

- 강기장 : 고려 태조조 판문하평장사

- 강구만 : 고려 광종조 영상서문하도성사

- 강감찬 : 고려 현종조 문하시중동평장사

- 강민첨 : 고려 현종조 문하시중평장사

- 강 홍 : 고려 현종조 문하시중평장사

- 강희경 : 고려 선종조 판문하시중

- 강 융 : 고려 충숙조 문하우정승

- 강 서 : 고려 검교좌정승

- 강사덕 : 고려 공양조 검교좌정승

- 강맹경 : 조선 세조조 영의정

- 강귀손 : 조선 연산조 우의정

- 강사상 : 조선 선조조 우의정

- 강석기 : 조선 인조조 우의정

- 강 로 : 조선 고종조 우의정

- 강영훈 : 대한민국 국무총리

- 강경식 : 대한민국 부총리

- 강운기 : 신라 검교대장군, 병마도원수, 안동도호부병진무사중병마도원수

- 강 박 : 신라 정동대장군, 요동도도호총병중병마도원수

- 강기장 : 고려 병마도원수

- 강홍립 : 조선 5도도원수

- 강만석 : 조선 효종조 수아장

- 강오성 : 조선 영조조 수아장 등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2018.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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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강씨의 1세 도시조는 고구려인 강이식 장군입니다. 진주 강씨 대종회 소종회 모두 다 그리 말합니다.

어디서 대만 화교가 역사 끄적이는 블로그에서 무슨 수나라 쫑궈런 강문성인가 기록도 없고 족보도 없는 쫑궈런 강문성을 강이식 장군의 부모네 뭐네 1세네 날조를 하고 나서부터 아직도 강문성이라는 족보도 없는 기록도 없는 사람을 진주강씨 1세라고 쓰는 사람들이 있네요. 이런 것만 봐도 얼마나 옛날부터 쫑궈런들이 역사왜곡을 했을지 안 봐도 뻔합니다.

위키백과만 봐도 한국 성씨를 검색하면 쫑궈런 성씨부터 나옵니다. 대만 화교가 얼마나 득실거리는지 쫑궈런 위키인지 대한민국 위키인지 분간이 안 됩니다. 화이동근이라고 쫑궈런들을 지배한 이민족들도 쫑궈화 시키는 옛 쫑궈들이 얼마나 역사 왜곡을 했는지 한국인들이 쫑궈 한족 성씨를 빌려썼지만 정약용도 그건 한반도 토착민이 모화사상으로 쫑궈 성씨를 빌려 쓴거라고 주장하였죠. 역사 왜곡 쩌네요.

2019.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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