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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이 법전은 무엇입니까?
akxl**** 조회수 9,009 작성일2004.03.07
현대 법체계의 큰 영향을 끼친 세계3대 법전은
나폴레옹법전.함무라비법전.그리고 이것이다.
비잔틴제국의 황제였던 이 사람의 이름을
딴것으로 로마법대전 이라고도 불리는
이 법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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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di****
영웅
외국전통문화 5위, 국어 어원, 어휘 100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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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법전은 나폴레옹 법전과 로마법 대전, 함무라비 법전

요약

유스티니아누스제(帝)가 편찬·발포한 모든 법령을 통틀어 일컫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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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33년부터 황제가 사망할 때까지의 칙령을 집성한 것의 총칭이며, 전(全) 로마법의 총결산이자 로마법 계수(繼受)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종래 법학자의 저작물 2,000여 권 중 15만 행을 골라 50권으로 엮은 《학설휘찬(學說彙纂) Digesta》, 초학자를 위한 《법학제요(法學提要) Institutiones》, 구래(舊來)의 칙령에서 골라 12권으로 집성한 《칙법휘찬(勅法彙纂) Codex》, 534년부터 158가지의 칙령을 모은 《신칙법(新勅法) Novellae》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들이 로마법대전으로 불리게 된 것은 17세기 《교회법대전(敎會法大全):Corpus Juris Canonici》의 예를 본떠서 명명(命名)하였기 때문이다



역대 비잔티움 황제(Byzantine Emperor) 연대기


디오클레티아누스 Diocletianus, Gaius Aurelius. (재위 284-305)

달마티아의 디오클레아에서 출생, 본래의 이름은 Diocles, 아버지는 노예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천한 신분의 출신이지만, 사병에서부터 승진하여 누메리아누스 황제의 근위대 장관이 되었다가, 누메리아누스가 암살되면서 동방군의 추대로 제위에 올랐다. 무장으로서 갈리아 내란을 평정하였고 페르시아에게서 아르메니아를 탈환하는 등 눈부신 실적을 올리면서 천성(天成)의 통치자 모습을 보였다. 제정기의 대표적인 황제 중 한 사람으로, 유일한 치적상의 결점은 통치만년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최후의 대 박해를 가한 것이다. 그의 통치상 최대의 사업은 한편으로는 강력한 전제군주제(dominatus)를 만들어 군주의 존엄성을 높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의 분할통치라는 새체제(4분체제, tetrarchy)를 성립시킨 일이다. 즉, 종전에도 공치제(共治帝) 형태로 보아온 바 동서제국의 양분을 제도적으로 확립한 것이다. 우선 286년에는 일리리쿰 출신의 동료인 막시미아누스를 부제(Caesar)에서 서방정제(Augustus)로 하고, 자기자신은 동방정제로서 그의 상위에 있게 하였다. 이윽고 막시미아누스에게는 콘스탄티우스 부제를, 자신에게는 갈레리우스 부제를 선임하였다. 제국영토의 광대성이 좀처럼 단독정제에 의한 통치에는 너무 벅차다는 것을 알게 되자 현실적 고려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다만 이것은 사실상 4황제에 의한 분담통치 형태로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같은 걸출한 최고통치자가 있을 때에는 그런대로 원만하게 다스려 나갈 수 있지만, 그의 퇴위나 사망 후에는 제국혼란의 화근을 만드는 것으로 되었다. 퇴위하여 고향에 은퇴하였고 316년에 사망하였다.


막시미아누스 Maximianus, Marcus Aurelius. (재위 286-305, 306-308)

이탈리아의 비천한 집안의 출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일찍부터 군대 내에서 동료였고 또 그런 인연으로 부제로 선임(285년)되었고 이어서 서방정제가 되었다(286년). 무장으로서는 그의 실력을 십분 발휘하여 갈리아 북부와 아프리카에서 크게 무훈을 세웠으나 통치자로서는 무교양, 무능성을 보였다. 305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하자 본의 아니지만 그도 퇴위하였다. 이윽고 아들인 막센티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기병하자 정제로 재 추대되는 동시에 이들을 도와 정제가 되게 했으나 그 아들과도 반목하게 되어 갈리아 지방으로 추방되는가 하면, 사위인 콘스탄티누스(대제) 하고도 적대관계가 되어 결국 모두에게 패배함으로써 자살(310년).


갈레리우스 Galerias, Varelius Maximianus. (재위 305-311)

모에시아 속주의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군대에 입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게 중용되어 부제 (293년)로 임명되었고, 다뉴브 강변의 이민족을 격퇴하여 실지를 회복하였고 페르시아와도 싸워서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퇴위 후 동방정제(東方正帝)로 즉위했으나 통치자로서는 무능력했다. 유명한 것은 303-311년에 걸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 대 박해의 실질적인 장본인이 바로 갈레리우스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박해도 마지막에는 실패로 끝나 죽기 직전에는 반공인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Constantius Chlorus. (재위 293-306)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버지. 그러나 출신은 미천했고 일리리쿰에서 출생. 군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게 중용되었고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사위로서 부제로 임명되었다. 성격이 온후하고도 매사에 사려가 깊었으며 통치자로서의 능력도 있었고 또 전공도 많았다. 특서대필할 것은 배반이탈하였던 브리타니아를 탈환한 것.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 교도 박해시대에도 남 몰래 그리스도 교도 들에게 호의적인 관용을 베풀었다. 막시미아누스의 퇴위로 서방정제가 되었으나 다음해에 병사하였다. 그의 유지는 큰아들(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하여 훌륭하게 결실을 맺었다.


세베루스 Severus, Flavius Valerius. (재위 306-307)

일리리쿰 속주태생의 군인출신. 거듭 승진하여 서방부제(西方副帝)가 되었으나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병사로 정제에 취임. 그러나 한편에서는 콘스탄티우스의 맏아들 콘스탄티누스가 군에 의해서 정제로 추대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막시미아누스 선제의 아들인 막센티우스가 이탈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등 곤란한 일들이 일어난 결과, 얼마 후에 싸움에 패배하면서 모살되었다.


막센티우스 Maxentius, Marcus Aurelius Valerius. (재위 306-312)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아들. 특권박탈을 불만으로 하는 근위병과 로마시민에 추대되어 부제가 되었다(306년). 정제인 세베루스를 반대하여 이미 은퇴한 아버지(막시미아누스)의 지원하에 싸워서 그를 죽게 함으로써 정제에 취임하였다. 후에 아버지와 불화관계에 빠지자 아버지를 갈리아 지방으로 추방하였다(308년). 스페인, 이탈리아, 아프리카를 통치하였으나 레티아(Raetia) 지역까지 통치하려고 하자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대립하게 되었고, 티베르 강에 놓인 밀비우스 다리에서의 전투에 패배하여 강물에 빠져 죽었다. 통상 참제로 규정된다.


리키니우스 Licinius, Varelius Licinianus. (재위 308-324)

디카아 속주의 농민출신. 군인으로 출세하여 갈레리우스와 동료라는 인연으로 중용되어 세베루스 황제가 몰락한 후 동방정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갈리아에는 콘스탄티누스가 정제로 선임되어 있었고 이탈리아에 황제를 참칭하는 막센티우스의 반란군이 있었으므로 실질적인 세력은 거의 없었다. 야심가인 그는 여기서 콘스탄티누스의 여동생(Constantia)과 정략결혼(312년)을 함으로써 콘스탄티누스와 결탁하였다.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를 격파한 후 리키니우스는 동방정제인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격파(313년)하고 제국동방을 통일함으로써 위세를 떨쳤다.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콘스탄티누스, 갈레리우스, 막시미누스와 더불어 조건부 관용령을 내렸고, 밀라노 칙령으로 완전히 공인하였다(313년). 그 후 그 칙령을 무시했고 또 콘스탄티누스와도 사이가 벌어져 대립하게 되었는데, 끝내는 패배하여 제위에서 추방된 후 처형되었다.


막시미누스 다이아 Maximinus Daia, Gaius Galerius Valerius. (재위 308-313)

다이아(Daia) 또는 다자(Daza)라고도 한다. 원 출신은 비천하나, 갈레리우스 황제의 조카로서 군대에 있었을 때 갈레리우스(백부)의 보살핌으로 승진했고 끝내는 그의 밑에서 동방부제로 임명되었다. 시리아, 이집트, 소아시아 남부를 지배했으나 리키니우스가 정제로 등극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도 정제(正帝)라고 칭했다. 그간 동서 두 황제간에 복잡한 권모술수적인 이합이 반복되면서 그도 막센티우스와 연합했으나 결국은 콘스탄티누스-리키니우스 연합세력에 패배하여 타르소스에서 전사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대제) Constantinus I, Gaius Flavius Valerius. (재위 306-337)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어머니 헬레나(Helena) 사이에서 맏아들로 상 모에시아의 나잇수스에서 출생했고 군영에서 성장하면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를 따라 갈레리우스의 페르시아 원정에 참가하였고, 306년에 아버지가 죽자 황제에 추대되었다. 당시 제위를 다투던 사람이 무려 6명이나 되었는데 이들을 순차적으로 격파하였다. 특히 로마시 북쪽에 위치한 밀비우스 다리 위에서 강적인 막센티우스와 싸울 때(312년)는 하늘에서 빛나는 십자가와 "이것으로 이기라"는 글자가 나타난 것을 보고 싸워서 승리했다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313년에는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연명으로 밀라노 칙령(勅令)을 발포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공인하면서 당시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그리스도교 박해를 중지시키고 교회의 사법권·재산권 등을 우대하였다. 324년에는 동맹자였던 리니키우스까지 추방, 처형함으로써 독재군주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고문회의의 권한을 강화하여 중요한 정치에 관여시켰으며, 황제를 정상으로 하는 계급적 관료제도를 완비하였다. 또한 상비군 제도와 변경의 둔전병(屯田兵) 제도에 의거하여 군제를 정비하였으며, 사르마티아인(人)과 게르만인을 변경지방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야만족의 침입에 대처하였다. 그리고 이교적 전통이 강한 로마를 떠나(330년)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겨 그리스도교적인 도시로 크게 건설하여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는 군인 ·통치자·입법자로서 제1급의 인물로 꼽히며, 대 내외적으로 크게 치적을 남겨 대제(大帝)로 불린다.

그가 행한 제국체제의 재편성과 여러 가지 개혁사업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의도한 사업의 계승 그리고 완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문.무 관의 차이를 엄격히 구별한 점이다. 다만 신교정책에 관해서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교 공인이라는 밀라노 칙령 선을 관철하여 제국의 통일과 신교의 통일을 일치시킨 것이 그의 궁극의도였던 것 같다. 그 상징이 325년의 이른바 니케아 공의회 였다. 동시에 이 무렵에는 그리스도교에서도 이미 정통과 이단과의 항쟁이 매우 치열해지기 시작한 시기였고, 그 중에서도 특히 아리우스파 논쟁이 중대한 정치문제로까지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위대한 현실주의자였던 대제는 그 어느 한쪽에도 별로 치우침이 없이 전적으로 현실적 견지에 입각함으로써 파국에 이르는 것을 방지해 왔다. 대제 자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점이 많아서 단언하기 어렵지만, 그가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은 사실만은 명백한 바, 하여간 최초의 그리스도교 로마황제로서 생애를 마감하였다. 30년 간의 장기 독재 정권을 유지한 것은 초대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이래, 그가 최초였다. 시정 전반에 대해서는 크게 재정을 투입하여 의의있는 개혁사업도 수없이 수행했지만, 그렇게 한 만큼 또 재정도 고갈시켜, 만년에는 혹세(酷稅)의 신설 등과 같은 실정(失政)도 적지 않았으며, 관료정치의 비대화와 더불어 그의 통치의 커다란 실점으로 되었다. 단일 독재군주에 의한 통치의 장래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이미 자신을 가질 수 없었던지, 사전에 그의 세 아들을 부제로 임명하였고, 자기가 죽은 뒤에는 또다시 분치제국(分治帝國)에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끝으로 자신의 사생활에서도 그는 유능한 장남 크리스푸스의 살해, 황후 파우스타의 사실상의 처형 등 몇 가지의 오점을 남겼다.


콘스탄티누스 2세 Constantinus II, Flavius Claudius. (재위 337-340)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2남. 태어난 바로 그 해에 부제로 임명되어 부황의 사망과 더불어 정제로 등극하여 브리타니아, 갈리아, 스페인이 그의 영유지로 주어졌다. 340년 말, 동생 콘스탄스 황제의 소유령을 빼앗고자 북부 이탈리아에 침공하였으나 패배하여 죽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 Contantius II, Flavius Julius. (재위 337-361)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3남. 그도 역시 부황의 죽음과 동시에 예정대로 신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포함한 동방령 부제로부터 정제로 등극해했으나 20여년 간에 걸친 치세는, 차라리 정정 불안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351년에 동생인 콘스탄스 정제를 패사(敗死)케 한 참제 마그넨티우스를 격파하고 일단 통일제국의 정제 지위를 확보했으나, 동방에서는 페르시아 황제 샤푸르의 침공과,서방에서는 게르만인의 갈리아 침범으로 끊임없이 복배(腹背)로부터의 위협에 시달리는 실태였다. 성격이 지극히 음습(陰濕)하고, 게다가 시의심이 깊어서 책모하기를 즐겼기 때문에, 허다한 오점을 생애에 남겼다.



그 첫번째 오점은, 정제로 즉위한 직후 사촌형제 이하 혈족들을 대량 학살시킨 혐의, 둘째로 이런 비극에서 겨우 모면되었던 사촌동생 갈루스를 그후 갑자기 부제로 기용하여 동방의 대리통치를 맡겼다가, 비록 갈루스 자신의 부덕한 난행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곧 그를 체포하여 모살했고(354년), 셋째로 갈루스의 이복동생인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기용하여 갈리아에 대한 게르만 민족들의 침구를 제압시켰지만, 이 청년 부제가 빛나는 전공을 세운 후, 360년에 파리에서 군대에 의하여 정제로 추대되자 그를 폐위시키려 한 것 등등이다. 율리아누스가 건곤일척의 대결을 위해 곧장 신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향하여 원정길에 올랐을 때 동방에서 페르시아 군과 싸우던 콘스탄티우스가 급거 회군하여 율리아누스를 토벌하기 위해 진군했으나, 도중에 소아시아에서 병사하였다. 부황의 교육을 받은 그리스도 교도였지만, 신교문제에서도 쓸데없이 특정 종파에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혼란을 확대시켰다. 그의 궁정에 동양 풍의 허식을 즐겨 도입함으로써 사치풍조를 조성하였고, 특히 최대의 오점은 환관정치에 질질 끌려 다니면서 농락당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음우한 군주였다고 볼 수 있다.


콘스탄스 Constans, Flavius Julius. (재위 337-350)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4남. 마찬가지로 부황의 사망과 함께 정제로 등극하여 이탈리아, 일리리쿰, 아프리카 등이 그의 통치령으로 주어졌지만, 340년에 큰형인 콘스탄티누스 2세 황제의 침공을 격퇴하면서 패사시켰다. 이후 전 서방영토를 통치하는 정제가 되었으나 350년에 게르만족 출신 장군인 마그넨티우스의 반란군을 토벌하려고 출전했으나 패배하여 살해되었다.


율리아누스 Julianus, Flavius Claudius. (재위 361-363)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 337년, 사촌형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한 혈족숙청에서는 이복형 갈루스와 함께 갓난아기였던 탓으로 겨우 생명을 건졌으나 그 후로 장기간에 걸쳐 사실상의 연금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동안 그는 고대 그리스의 고전과 이교에 몹시 친숙해졌고, 동양의 신비종교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355년, 갑자기 부제로 중용되어 갈리아에서 게르만족 토벌에 종사하여 5년 동안에 눈부신 전과를 올렸고 치안을 회복했으나, 이를 시기한 정제 콘스탄티우스 2세와의 사이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 즉, 콘스탄티우스 2세는 동방의 페르시아에 대비하기 위하여 갈리아 주둔군의 과반수를 진용하고자 했으나, 군대가 이에 불응, 거부하면서 360년 파리에서 율리아누스를 정제로 추대하였다. 신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향하여 진군하는 도중, 콘스탄티우스가 급사함으로써 국민의 환호하에 신수도에 무혈입성하여 다시 즉위하였다.

수도에 입성한 후, 그의 치세는 20개월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교로의 귀의(때문에 그리스도교로부터는 소위 배교자로 비난되고 있다)와 군사.행정면에서의 치적에 대해서는 이 율리아누스 황제만큼 진폭이 큰 황제도 드물다. 이교신앙에 대해서는 이미 공개성명으로 밝히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유.평등의 신교 관용령을 발포하여 전 국민에게 관용의 의태를 보여주었고, 또 한편에서는 유대교 신자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그리스도 교도들로부터 부와 지식, 그리고 권력 등의 우위성을 모두 빼앗으려고 의도했지만, 그에 앞서 숙적인 페르시아 토벌을 서둘러 363년 봄이 되자, 스스로 6만5 천의 대군을 이끌고 동방정토의 길에 올랐다. 갈리아 지방에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의조식(粗衣粗食)에 만족하면서 언제나 진두에 나서 용감히 싸워 파죽지세로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적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지척에 바라보는 지점까지 육박했으나, 적의 모략공작에 넘어가 오히려 불리해지자 총퇴각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적의 추격을 막으면서 철퇴하는 도중, 적병에 투창에 치명상을 입은 후 진중에서 낙명하였다. 363년 6월 26일의 일인데, 이것은 그의 자신과다증이 자초한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철학자.문인.황제이기도 하여 8편의 연설집, 2편의 풍자문, 80통의 서한문과 그리스도교 비난의 단편을 오늘날에까지 남겼다.


요비아누스 Jovianus, Flavius (Claudius). (재위 363-364)

율리아누스 황제의 페르시아 정벌 군에 친위대 부사령관으로 종군하고 있었는데, 율리아누스 황제의 갑작스러운 전사가 있은지 몇 시간 뒤에 전군의 추대를 받아 진중에서 제위에 올랐다. 첫번째로 한 일은 전군을 이끌고 무난히 귀국하는 문제였지만, 장병들의 피로와 식량부족, 적군의 급한 추격 등으로 말미암아 철수작전이 지극히 곤란하였다. 적의 추격전에도 로마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페르시아 황제 샤푸르로부터의 화의 제의가 있자, 광대한 동방영토의 할양이라는 굴욕적인 조건을 수락하고, 겨우 로마 군을 위급한 처지에서 구해냈다. 그리스도 교도임을 선언했지만 우유부단한 황제로 평가되었는데, 콘스탄티노플로 귀환도중에 급사하였다.


발렌티아누스 1세 Valentinianus I. (재위 364-375) 西.

요비아누스 황제의 급서 후, 10일 간의 공백기간을 거쳐 근위대 보병대 사령관에 선입되어 등극하였다. 독군(督軍)이던 아버지 그라티우스의 명성과 공적에 더하여, 본인도 현명성과 정한성(精悍性)의 인상을 주는 용모를 가졌고, 또 43세라는 남자의 한창 때라는 조건도 작용하여 황제로 선입되는 행운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황제가문이 아니라는 것은 전제(前帝)와 마찬가지였다. 즉위한지 30일 후에 평범한 동생인 발렌스를 공치정제(共治正帝)로 지명하고, 제국을 양분해서 동방통치를 동생에게 맡긴다고 선언하였다(364년 6월-7월 경). 발렌티아누스 1세의 치정(治政)은 그리스도교 각 파 간에 있었던 유혈사태에 수반된 격심한 대립항쟁 속에서 신교의 완전자유를 공인하고, 시종 온건.공정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다만 성직자들의 만족할 줄 모르는 화식욕(貨殖欲)을 억제하기 위하여 기진에 관한 금령을 내렸고, 이교에 대해서도 관용했지만, 마법 죄에 관한 심문은 엄격했다. 황제 자신이 간소.절제 생활에 힘씀으로써 콘스탄티우스 2세시대 이래의 악폐를 점차 개선했고, 궁중에서의 방탕열락행위도 대략 일소했는가 하면, 청소년에 대한 교육에도 열의를 보였다.



다만 극심한 뼛성쟁이로서, 그것이 때로는 재판할 때 엉터리 판결까지 내리게 하였다. 한편 용맹하기로 이름이 높았던 율리아누스 황제의 사후, 변경지역의 이민족들이 브리타니아 속주, 상 다뉴브 지역, 아프리카 등지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황제 자신도 라인강변에서 게르만족을 격파하는 등 출정을 거듭하였는데, 다행하게도 독군인 테오도시우스(후일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버지)의 동분서주에 의한 맹활약으로 이민족들을 억누를 수 있었다. 후일 게르만족과의 분쟁이 일어났을 때, 그들의 사절을 접하던 중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급사하였다.


발렌스 Valans, Flavius. (재위 364-378) 東.

발렌티아누스 1세의 친 동생. 과거의 공적도, 또 재능도 전혀 없지만 형의 지명으로 동방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지나칠 정도로 소심하고 박지약행(薄志弱行)한 위인으로서, 즉위한 다음 해에는 율리아누스 황제와 이종사촌간이라고 알려진 장군 프로코피우스가 죽지 않기 위하여 반란을 일으켜, 한 때는 이민족의 응원으로,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 등 지위도 위태로웠지만 겨우 이것을 진압할 수 있었다.(365-366년 간). 종교적으로는 형과는 달리 아리우스 파에 속하여 가톨릭 파를 박해했지만, 기타 다른 면에서는 형인 발렌티아누스 1세를 잘 섬기어 그의 충고와 응원으로 그럭저럭 황제자리를 지켜나갔다. 페르시아 및 이민족의 공세에는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한 바, 아르메니아와 이베리아의 두 속국을 페르시아 황제에게 빼앗겼고, 서고트족 군의 교묘한 화전 양면작전에 휘말려 들어 황제 자신이 출정했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로마군의 2/3이상을 잃은 일대회전의 와중에 아드리아노플 부근에서 전사했는데, 심지어 유체조차도 찾지 못할 만큼 비참한 패배를 당하였다.


그라티아누스 Gratianus, Flavius Augustus. (재위 375-383) 西.

발렌티아누스 1세의 장남으로 부황 치세 중인 367년에 이미 정제(正帝) 칭호를 받았는데, 이때 그의 선입은 전 갈리아 군단의 동의를 얻었다. 부황이 급사했을 때 불과 17세였지만, 이미 온갖 미덕을 갖추었음을 과시함으로써 군대와 국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군의 일부에서는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이복동생인 겨우 4살된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옹립하고, 그를 제위에서 추방하려는 강한 움직임이 있었다.



이때 조금이라도 잘못했다간 내란으로 치달을 상황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라티아누스가 현명하고 온당하게 나갔으므로 내란만은 피할 수 있었다. 즉, 동생이 제위에 오르는 것을 쾌히 승낙하고 그를 그의 모후와 함께 평화로운 밀라노 궁전에 살게 함으로써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통치케 하고, 자신은 좀더 곤란한 알프스 산맥 이북의 각 속주 통치에 임하기로 하면서, 책모의 주모자들에 대한 처벌이나 해임은 사태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보류시키는 방침을 취한 것이다.



그리하여 얼마 동안은 전 로마제국의 통치가 동방의 발렌스 황제와 서방의 그라티아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 황제, 이 3명의 연서(連署)로 행해지게 되었다. 그의 치세의 태반은 갈리아에서, 라인강 대안에서 침구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이민족들과의 대치에 쫓겨 다니는 군사작전으로 메꾸어졌는데, 이 때문에 동방황제인 숙부 발렌스가 패사했을 때도, 구원 차 달려가기에는 너무도 원격한 지역에 머물러 있었다. 숙부인 발렌스 황제가 사망한지 5개월 간이나 공위로 남아 있던 동방황제자리에, 일찍이 황제인 자기보다 인기가 더 높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했던 선제(先帝)대의 최대의 국가공훈자인 테오도시우스 장군,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를 지명함으로써 동 가문에 보상하고 또 속죄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동서 로마를 통치할 체제를 갖추었다(379년 1월).



그라티우스 황제는 만20세를 맞이할 때까지는 최고의 명성으로 찬양된 왕고(往古)의 여러 황제에 못지 않을 정도로 인망이 높았었다. 타인에게 호감을 주는 그의 인품, 우아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행동거지가 모두 국민의 마음을 크게 매료했던 것이다. 열심히 신을 믿는 가톨릭교도라 하여 교회측의 신망도 두터웠고, 문학에 대한 깊은 조예는 문인들 속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20세 이후의 그는 아부만을 일삼는 주변의 아첨꾼들이 잘못 유도한 탓으로, 정무는 내팽개치고 수렵에만 몰두하는 등 차차 사람들의 빈축을 사게 되었고, 군대로부터도 지지도를 잃어갔다. 때마침 브리타니아 속주의 군사령관이던 막시무스가 그라티아누스 황제에게 불만을 품은 브리타니아 주둔군 장병들에 의해 추대되어 황제를 참칭한 다음, 곧 갈리아 지방에 상륙 침입하였다(383년). 그라티아누스는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 급히 파리로 향했으나 휘하 장병이 도망치자 황제도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리용에서 자객의 손에 걸려서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 24였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 Valentinianus II. (재위 375-392) 西.

불과 4세의 나이로 이복형제 간인 그라티아누스 황제와 공치제 형태로 이탈리아.아프리카 통치를 담당했었다. 그리고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횡사했을 때,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12세에 불과했다.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의 감은(感恩)의 애정과 또 야심이 없는 그의 커다란 포용력에 지탱되어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서로마 황제의 지위를 보존할 수 있었다. 그간 참제인 막시무스와의 전쟁이 있었는데, 이때는 수도에서 쫓겨나 외지로 망명한 신세가 되었는데,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도움으로 막시무스가 처형된 뒤에는 다시 서방황제로 복위될 수 있었다.



이때 아르보가스트(아르보가스테스)라는 프랑크족 출신 용장이 있었는데, 그는 그라티우스 황제 치세부터 황제를 도와 기병대 총사령관의 지위에 올랐고, 막시무스의 반란으로 황제가 횡사한 뒤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 휘하로 넘어가 막시무스를 쓰러뜨리는 전쟁에 크게 공헌했고, 전후에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 휘하의 갈리아군 총사령관 겸 정무총감에 임명되어 전권을 휘둘렀다. 그가 남 몰래 서방제국을 지배하려는 야망을 품고 점차 독수를 뻗쳐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의 측근에서 충직한 신하들을 모두 멀리하게 하는 등 야망달성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시킨 후, 드디어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그의 방안에서 목 졸라 죽이고, 에우게니우스라는 수사학자를 괴뢰로서 제위에 앉힌 후 배후 실력자가 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교살당했을 때의 나이는 21세였고, 날짜는 392년 5월15일이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대제) Theodosius I. (재위 379-395) 東.

그라티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처형된 테오도시우스 장군의 아들로서, 야인 생활 4개월만에 그라티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동방황제로 선임되었다. 스페인 출신으로서 그의 아버지 테오도시우스는 발렌티아누스 1세 치세 시, 브리타니아 속주.상 다뉴브 지방.아프리카 등지에서 독군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움으로써 명성이 갑자기 올랐지만, 이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실각당한 후 사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도, 군대 사령관으로서 여러 번 공훈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강제전역 당한 후 고향인 에스파냐 벽지에서 아무런 야심이나 불만도 없이 유유자적한 은거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숙부인 발렌스 황제가 전사한 후 그 후계자를 누구로 지명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 끝에, 이 은거 중이던 테오도시우스를 지명한 것은 위와 같은 경위가 있었던 만큼 얼마간 기이한 감도 있지만, 워낙 국가가 다사다난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만큼, 그를 지명한 것은 테오도시우스 부자 2대가 세운 공훈과 명성, 그리고 그의 인물됨됨이에 모든 것을 기탁할 생각 외에도 어떤 면에서는 속죄 보상하려는 심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당시 그의 나이 33세로서 국민이나 군도 놀랐지만 일제히 환호로서 그를 맞이하였다. 제위에 오른 그는 용기와 지략으로 고트군의 침구에 대항함으로써 한때 거의 완전하게 상실했던 자신감을 로마 장병들 사이에서 부활시켰다.



뿐만 아니라 끝내는 고트족의 왕인 아나타리쿠스(아나타릭)의 환심을 얻었고, 또 그를 성대하게 장사 지내 주는(381년) 등으로 그들의 신용을 얻음으로써 기적적으로 전면적인 항복을 받은 바, 이것은 발렌스 황제가 패사한지 불과 4년 후에 올린 성과이다.

383년에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비운으로 갔을 때에는, 사태가 너무도 급박했기 때문에 은인의 구원에 달려가지 못했고, 그후의 정세도 참제 막시무스의 세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부득이 하게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참가시켜 3제 공치의 형태로 로마제국을 분담통치하되, 다만 참제 막시무스에게는 알프스 이북 영토만으로 만족한다는 내용의 서약을 받아내어 타협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일시 평화를 유지하게 된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전 영역을 통하여 완전히 우상숭배를 폐지시키고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탄압하는 등 국내의 종교문제 개혁에 열의를 보였다. 그런데 막시무스가 자기에게 주어진 영역만으로 만족했더라면 오랬동안 3제 정립(鼎立)형태가 계속되었을지 모르나, 원래 야심 만만한 그였던 만큼 387년에 이르러 알프스 산맥의 험한 고개를 속여서 넘은 다음, 약체였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이탈리아에 침공해 들어갔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테오도시우스 황제도 궐기하지 얺을 수 없어, 양자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었는데 사태는 어이없이 끝났다(388년). 민심이 이미 참제에게서 떠나가 있었는데, 붙들린 막시무스는 격분한 병사들의 손에 참수되었다. 황제치하에서는 불행하게도 또 한번 내전이 있었다. 그것은 아르보가스트(아르보가스테스)가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시해했을 때인데, 이의 뒤처리로서 아르보가스트 장군은 프랑크족인 자기 자신이 제위에 오르는 데에는 저항감이 많다고 생각하여 에우게니우스라는 로마인 수사학자에게 자의(紫衣)를 주고, 자기는 배후에서 실권을 장악하여 괴뢰인 에우게니우스를 조종했던 것이다.



이탈리아로 재차 침공해 들어가는 데에는 상당히 주저했지만, 결국 테오도시우스는 2년 간의 준비 끝에 감연히 군을 진발시켜 악전고투 끝에 신풍(神風)의 도움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괴뢰참제인 에우게니우스는 참수로, 괴수 아르보가스트는 자진케 함으로써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이어서 황제는 밀라노에 입성하여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지만, 국사다망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침식되어 있던 황제의 건강은 전쟁의 피로가 겹쳐, 전승 후 불과 4개월만에 국민의 통석 속에 일생을 마쳤다. 당시의 나이 48세. 일찍이 이미 정제(正帝)칭호를 받고 있던 그의 두 황자들인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각각 동과 서의 제국을 승계하게 된다.


아르카디우스 Arcadius. (재위 395-408) 東. & 호노리우스 Honorius. (재위 395-423) 西.

두 사람 모두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장남과 차남으로서, 다 함께 어릴 때에 정제(正帝) 칭호를 받았고, 395년 1월, 부황(父皇)의 사망과 더불어 동.서 로마 제국의 통치자 지위에 올랐다. 두 제국 사이는 점차 서먹서먹해졌고, 끝내는 아주 타국처럼 되어 버렸지만, 두 황제는 다 함께 시대를 같이 하였고, 또 공통의 외적에게 시달림을 받았으므로, 여기서는 편의상 일괄하여 취급한다.

즉위 당시 형인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17세, 동생인 호노리우스 황제는 10세였는데, 부제(父帝)의 유지에 의하여, 루피누스(Rufinus, 東)와 스틸리코(Stilicho, Flavius. 西)를 각각 사부와 보좌 역으로 삼았다. 루피누스는 전형적인 간신으로서, 전적으로 자기권세의 확대와 치부에 노력하였는가 하면, 자기 딸을 황후로 들여 보내어, 막강한 절대권력을 휘두르고자 기도했지만, 그를 좋게 보지 않은 환관 에우트로피우스(Eutropius)의 교묘한 술책으로, 황제는 다른 여성인 에우독시아(Eudocia/Eudoxia)를 황후로 맞아들였다. 이것이 그가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전락하는 시작으로서, 이후 황제는 미모에 재기발랄한 새 황후와 환관 에우트로피우스의 뜻대로 움직이게 된다. 어떻게 해서든지 실권을 회복하고자 몸부림치던 루피누스는, 결국 395년 서로마 제국 황제의 후견인격인 스틸리코의 뜻을 받든 고트족 출신 장군 가이나스(Gainas)의 손에, 황제 면전에서 살해되고 만다.

스틸리코는 루피우스와는 달리 지용을 겸비한 충직한 장군으로서, 충성스럽게 유고(遺孤)인 호노리우스 황제를 보호하였다. 선제인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조카딸이며, 대제의 양녀가 된 세레나(Serena)를 384년 이래 아내로 맞아들인 것도, 그가 충성을 다한 커다란 이유였을 것이다. 선제사후에 동서 두 제국은 차례차례로 이민족들의 반란과 침구에 고민하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아프리카에서 무어인 길도(Gildo)가 일으킨 반란이다. 길도는 선제에 의하여 아프리카의 독군으로 등용되었던 자로서, 397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스틸리코는 다음해 길도에 강한 원한을 가졌던 그의 실제(實弟) 마스케젤(Mascezel)을 토벌군 사령관으로 임명 파견하여 급속히 이를 진압하였다. 그런데 이 마스케젤도 이탈리아로 개선 후 강물에 빠져 죽었는데, 이것은 스틸리코의 모략에 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번의 전승은 우연하게도 호노리우스 황제의 결혼식과 시기를 같이 핝다. 황후가 된 것은 다름아닌 스틸리코의 딸 마리아(Maria)로서, 황제는 이때 14세이고 황후는 이보다 좀더 나이가 어렸던 모양으로, 황후가 된지 약 10년 후에 그녀는 아이도 낳아보지 못하고 죽었다. 황제는 허약 체였을 뿐만 아니라 통상적인 남자로서의 생식능력도 결여되어 있어서. 죽을 때까지 동정(童貞) 그대로 였다고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다. 선조들과는 달리 호노리우스 황제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궁정 안에서 붙들린 죄수와도 같은 생애를 게으른 잠으로 보내면서 국민들과도 친숙하지 못한 채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끈기있게, 아니 거의 무관심으로 쳐다 본 방관자였다. 그의 치세 28년이라는 다사다난한 역사 속에서, 황제 호노리우스의 이름을 들출 필요가 거의 없을 정도로 그는 무능했다."라는 말이 그에 대하여 모든 것을 이야기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연이은 외환으로 시달렸다.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건재할 때는 감히 소리도 내지 못하고 조용히 있던 이민족들은, 마치 그가 죽기를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고트족 대군이 걸출한 인물 알라리크(Alaric/Alaricus I)의 지휘하에 북방으로부터 침입하여 동방제국의 여러 속주들을 휩쓸었고, 마케도니아에서 테살리아에 걸친 그리스 땅을 무인지경을 달리는 기세로 석권하였다. 동방제국이 배치하고 있던 속주의 총독이나 군대가 저항다운 저항을 거의 보이지 않고 있는 사이에, 알라리크의 군대는 금세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각 도시를 유린했는데, 이들을 쫓고 이 지역을 구출한 것은 서로마 제국에서 온 스틸리코와 그의 군대였다(397년).



이 때는 알라리크도 북쪽 에피루스로 도망가 동방제국과의 사이에서 타협을 성립시켰기 때문에, 스틸리코도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지만, 5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서고트족의 왕으로 추대된 알라리크는 401년, 이탈리아로 침입하였다. 알라리크는 궁정이 있던 밀라노를 위협함으로써 전체도시가 금세 혼란에 빠졌지만, 이때도 스틸리코의 지모와 분투로 간신히 호노리우스 황제의 위급한 국면을 건져내었다. 황제는 404년, 궁정을 위험한 밀라노에서 아드리아해에 면한 라벤나로 옮겼는데, 이후에는 대략 이 안온한 곳에서 나날을 보냈다. 다시 라다가이수스(Radagaisus)가 이끄는 동고트족의 침구도 있었지만, 그처럼 막강했던 스틸리코도 점차 인기를 잃고 408년 실의 속에 참살되어 생애를 마쳤다.



이해는 마침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도 사망하였는데, 같은 해 알라리크의 두 번째 이탈리아 침구가 시작되고, 410년에는 제3회 침구로 로마까지 점령 약탈당하는 한편, 로마의 수도장관이던 아탈루스(Attalus)가 일시 참제로 옹립되었다. 알라리크는 이윽고 로마에서 철퇴하여 이탈리아 남부지방으로 약탈행각을 계속했고, 다시 아프리카를 정복하고자 시칠리아로 향하려고 할 때, 폭풍우의 방해로 머뭇거리던 중, 병환으로 급사하였다(410년). 고트족은 그의 후계자로 선출된 아돌푸스(Adolphus)에게 통솔되어 갈리아 방면으로 철퇴했지만, 서로마 제국은 알라리크의 약탈이 있은 이후,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 게다가 아프리카로의 반달족의 내습, 훈족의 왕 아틸라(Attila)의 침구로 이어져 줄곧 쇠망의 길을 걷게 된다.


테오도시우스 2세 Theodosius II. (재위 408-450) 東.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아들. 부황이 3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기 때문에, 이 황제는 겨우 7세에 제위에 올랐다. 아르카디우스 황제도 무능한 점에서는 서방황제인 동생 호노리우스와 큰 차이가 없어서, 그의 치적을 개략적으로나마 기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역사적 자료가 엄청나게 많은 그런 시기인데도,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정당한 이 맏 아드님의 업적이란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임종시 나이 어린 자기 아들의 신상문제를 걱정한 바, 궁정 안에 신뢰할 수 있는 신하가 없고(황후 에우독시아는 이미 사망하고 없었다), 서방황제는 약체인데다가 벌써 타인과 마찬가지였으므로 고민하며 망설이던 끝에, 굳이 이웃나라인 페르시아 황제 야즈데게르드 1세(Yazdegerd/Jazdegerd I)에게 후견인이 되어줄 것을 대담하게 부탁하는 수단을 썼다. 상대방도 이런 영예로운 신뢰에 보답하여 그가 생존하는 동안에는 일찍이 적국이던 동로마 제국을 침공하려 하지 않았다. 궁정 안에서 이처럼 나이 어린 황제를 성실하게 수호하고 훌륭하게 선정을 베푼 것은 405년에 집정관 겸 민정총독으로 임명되었던 안테미우스(Anthemius. 훗날인 467년에 서로마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는 동명인의 조부되는 사람)이고, 이 시대에 로마제국을 지탱한 또 사람은 황제의 누님인 풀케리아(Pulcheria)였다.



불과 2살의 연장자였지만, 16세로 여제(Augusta)의 칭호를 받았고, 동생인 테오도시우스 2세의 긴 미성년기와 그리고 테오도시우스 2세가 죽은 뒤에는 그녀 자신의 이름과 또 명목상의 남편인 마르키아누스(Marcianus)의 이름으로, 결국 40년 가까이 되는 오랜 기간동안, 그녀는 동방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생애를 처녀의 몸으로, 경건한 신앙생활로 보냈으며, 오랜 세월의 시정은 그녀의 강력성을 찬양할 정도는 아니었다 해도, 그녀의 온건성과 번영을 가져오게 한 치적은 상당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동생인 테오도시우스 2세가 "굳이 무능력의 정도에 차등을 두는 것이 허용된다면 부황과 숙부황제의 약체성보다 더 밑돌았다고 할 수 있다."고 혹평되는데 반하여, 누나인 풀케리아는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자손들 중, 대제의 웅대한 기상이나 능력을 얼마간이나마 이어받은 것은 그녀뿐인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나이 어린 테오도시우스 2세의 후견인 역할을 맡았던 페르시아 황제 야즈데게르드 1세는 그가 죽을 때(420년)까지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신뢰에 충실시 부응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바흐람 5세(Varanes/Vahram V)는 422년이 되자 동로마 제국과 분쟁을 일으켰다.



이때는 격전도 별로 없이 완만한 형태에서 오랬동안 계속되던 중, 428년에 이르러 양국의 중간에 껴있는 아르메니아를 양국이 분할소유함으로써 결말이 났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이 분쟁에 거의 무관심했던 것 같지만, 쇠퇴일로를 걷던 동방제국에 대해 이 분쟁은 얼마 간의 광휘를 던져 준 사건이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 Valentinianus III, Flavius Placdius. (재위 425-455) 西

동.서 로마에서는 호노리우스 황제 만년에 그의 이복누이 동생인 플라키디아(Placidia. 그녀의 생애는 고트군의 포로가 된 후 고트족 왕 알라리크의 후계자인 아돌푸스의 왕비가 되는 등 기구한 운명을 거쳤다)의 새 남편이 된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가, 야망에 사로잡혀서 황제칭호를 탈취(421년 2월에 제위에 올라, 동년 9월에 사망)하는 등의 사건이 있었고, 다시 남매간의 불화로 플라키디아가 두 어린 자식을 데리고 동로마 황제를 의지하여 망명 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녀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지 몇 달 뒤에, 호노리우스 황제 자신이 수종 증으로 급서하였다(423년).



플라키디아는 유아(당시 4세. 훗날의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데리고 동로마 군의 호위하에 서로마 수도 라벤나에로의 귀환 길에 올랐다. 그 사이에 요안네스(Joannes/John)가 서방황제를 참칭하였으나 그가 동로마 제국 기병대의 손에 처형되자, 플라키디아 모자는 행운을 얻어 라벤나에 돌아왔고, 이어서 동방황제의 승인으로 425년 플라키디아와 어린 아들이 서로마 황제로 정식 등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황제도 아직 유약하였으므로, 그를 대신하여 사실상의 통치권을 행사한 것은 모후인 플라키디아였다(450년 그녀가 죽을 때까지 25년간). 그녀의 군수통치권을 맡아서 지휘에 임했던 사람들은 아에티우스(Aetius)와 보니파티우스(Bonifatius)라는 두 장군이었는데, 두 장군이 협력했더라면, 서로마 제국의 여명(餘命)은 어쩌면 좀더 연장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불화가, 아에티우스의 모략공작으로 모후인 플라키디아와 보니파티우스를 이간시키는 것으로 표면화되었고, 나아가서는 아프리카의 상실이라는 중대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아프리카의 독군(督軍)이었던 보니파티우스는 모후가 유랑하던 시절부터 그녀를 지지원조하고 있었지만, 아에티우스의 이간책으로 모후로부터 소외시 당함에 이르자, 자위상 반달족의 아프리카 내원을 요청하자, 반달족의 지도자인 게이세릭(Gaiseric/Genserich)이 에스파냐로부터 아프리카로 건너 온 것이다(429년). 다음해에 보니파티우스와 모후가 모두 자기들의 잘못을 통절히 후회하였지만, 그것은 이미 과유불급(過猶不及) 격이 되고 말았다.

또 하나의 가공할 외적인 훈족의 왕 아틸라도 430년대부터 침구하기 시작하여 먼저 페르시아, 뒤이어 동로마 제국에 마수를 뻗쳤는데,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아틸라와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고, 몇 번이고 사절을 교환하는 등 그와 교섭을 가지던 중, 콘스탄티노플 교외에서 낙마 사고가 원인이 되어 역시 급서하였다.


마르키아누스 Marcianus. (재위 450-457) 東.

테오도시우스 2세가 죽은 뒤, 얼마동안은 그의 누님인 풀케리아가 로마제국 건국이래 최초의 실질적 여제(女帝)로 군림하면서 어느 정도의 인기도 있었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편견과 불만의 대상이 될 것을 염려하여, 급히 명목상의 결혼만을 통하여 형식상의 부군으로 맞았고 또 공치제로 삼은 인물이 바로 마르키아누스 황제이다. 마르키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것은 나이 50세를 넘긴 뒤로 선제(先帝)보다 연장자였다. 군인출신 원로원 의원이며, 온후한 성격과 유용한 재능 등이 모든 사람들의 신망을 모았다. 훈족의 왕인 아틸라의 침구로부터 제국을 보호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단성론에 의해 야기된 종교분쟁을 해결하는데는 실패하였다. 457년 마르키아누스 황제가 죽으면서 테오도시우스 가계의 혈통은 완전히 단절되고 만다.


막시무스 Maximus, Petronus. (재위 455) 西.

재위기간은 즉위한 그 해의 3개월 뿐이다. 동로마 제국은 찬탈자로 규정하여 그의 제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발탁되어 원로원 의원, 집정관으로 임명되지만, 자기 처가 황제에 의하여 폭력으로 정조를 빼앗긴 것을 원한으로 품고 복수할 것을 맹세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친위대들을 교사하여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살해하였고, 뒤이어 미망인이 된 황후 에우독시아(Eudoxia/Eudocia)를 스스로 빼앗아 아내로 맞이하여 제위에 올랐으나, 이윽고 반달족 군대의 로마침입을 맞아 피아 쌍방으로부터 증오의 대상으로 지목되어 학살된 후, 그 시체는 토막 처져 티베르 강에 던져졌다. 동로마 제국이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후인 에우독시아가 테오도시우스2세(Theodosius II. 재위 408-450)의 딸이었기 때문인데, 막시무스는 확실히 전형적인 찬탈자로서의 운명을 겪은 것이다.


아비투스 Avitus, Maecilius. (재위 455-456) 西

갈리아의 명문가 출신.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치세기간을 통하여 오랫동안 아에티우스(Aetius. Flavius. 390년경-454. 서로마의 장군)휘하에서 군에 복무하여 갈리아군의 사령관으로 승진하였다. 그러자 전제 막시무스 참제의 참살과 반달족의 로마 침구소식을 듣고, 서고트족 왕 테오도릭(Theodoric)에게 지지되어 제위에 올랐지만, 혼잡한 틈을 탔고 또 외지의 이민족 왕의 지지를 받아서 제위에 오른 갈리아 시골뜨기 찬탈자라는 인상은, 그를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극히 인기없는 황제로 만들었다. 이탈리아 수비대의 이민족 출신 사령관 리키메르는 이윽고 자신의 대 반달군 최초 전승기회를 포착하여 아비투스의 퇴위를 강요하였다.


마요리아누스 Majorianus, Julius. (재위 457-461) 西.

5세기를 통하여 나타난 무력한 허수아비 황제들 중에서, 인격과 사적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송된 유일한 예외적인 인물이다. 그는 군인으로서 전제인 아비투스와 마찬가지로 아에티우스 휘하에서 전공을 세움으로써 독군 리키메르와 친한 관계를 맺었다. 아비투스가 퇴위당한 후, 이 국왕 메이커인 리키메르는 로마 시민들의 압도적인 요망에 동의하여 마요리아누스의 등극을 승인하였다. 고대 로마법과 자유관념을 국민에게 심어주었으며, 재정을 재정립하고, 로마시 건조물의 파괴를 처벌하는 시책을 강력히 밀고 나갔으나, 제국 내에서의 기득권 폐지를 은근히 겁내던 리키메르 등의 반감과 원한을 사게 되자, 마침 황제의 대 반달족 정벌작전상 조그마한 실패를 이유로 리키메르가 사주하는 이민족 호위병의 강요된 퇴위로 물러난 뒤 살해되었다.


세베루스 Severus, Libius. (재위 461-465) 西

유능한 황제에 의하여 자기의 전제적 권력행사를 방해 받았던 리키메르가, 선제에 이어서 옹립한 괴뢰황제. 마요리아누스 황제의 사망으로부터 다음 안테미우스 황제의 등극까지의 사실상의 공위(空位) 6년간을 이 세베루스의 치정(治政)으로 특정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과 같다. 이 기간의 정권은 전적으로 이 이민족 출신의 국왕 메이커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 황제는 사실 생애를 통하여 이름없는 사인(私人)이었고, 그의 사후 2년간은, 제위는 문자 그대로 공위로 비어 있었다.


안테미우스 Anthemius. (재위 467-472) 西.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오 1세가 서로마의 국왕 메이커인 리키메르의 요청을 받아 들여, 서로마 제국의 황제자리에 앉힌, 말하자면 동로마로부터의 수입황제. 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있는 반달족 왕 게이세릭의 위협에 겁을 먹은 리키메르가, 자신의 보신(保身)을 위하여 더 이상 제위를 비워 놓을 수 없게 되자, 동로마 제국과 공동으로 로마제국의 방위를 도모하고자, 동방으로부터의 황제파견을 받아들여서 앉게 된 서로마 황제이다. 안테미우스는 동로마 제국의 전 황제인 마르키아누스(Marcianus. 재위 450-457. 풀케리아 여제의 명목상의 부군)의 사위로서, 동로마 제국의 집정관과 명예현관(patriocius)을 역임하였는데, 원래대로 라면 동로마 제국의 제위를 계승할 후보자였던 것이 정략적으로 서로마의 제위로 미끄러진 것인데, 여기서 안테미우스는 자기의 집권체제를 굳히고자 정략적으로 자신의 딸을 리키메르에게 출가시켜 그와 장인과 사위관계까지 맺었다.



그는 그리스 인이며 철학자라 하여 종교상 카톨릭 교도들로부터 경계되었지만, 그 당시로서는 정치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각한 정치문제로는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로마군의 반달족 원정이 실패하자, 리키메르가 게이세릭의 협박에 굴복하여 말을 올리브리우스 쪽으로 바꾸어 타고, 올리브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한 리키메르 군이 로마 시가전을 벌인 끝에 안테미우스를 타도하였다. 여기서 안테미우스는 일단 도망쳐 거지로 변장했지만 결국에는 이 악랄한 자기 사위에게 발각되어 참살되었다.


올리브리우스 Olybrius. (재위 472) 西.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 플라키디아(Pulacidia)의 남편이라는 배경으로 말미암아, 안테미우스에 대항하고 리키메르에 떠받들어 지면서 동로마의 집정관이며 원로원 의원의 신분으로부터 일약 황제가 되었다. 안테미우스가 살해된 직후에 리키메르도 사망하였는데, 그러자 올리브리우스도 불과 재위 7개월만에 수종 증으로 로마에서 사망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올리브리우스 역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통황제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글리케리우스 Glycerius. (재위 473-474) 西.

서로마 제국에 일어난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리키메르의 조카이며 그의 후계자가 된 부르군드 족의 공자 군도발트(Gundobald)에 의해 옹립된 무명의 군인출신 황제. 얼마 후 군도발트의 신임과 비호를 잃게 되자 퇴위당하여 달마티아 교구의 주교로 은퇴하였다. 그도 전형적인 괴뢰이며 찬탈자로 규정되고 있다.


네포스 Nepos, Julius. (재위 474-475) 西.

서로마의 제위가 공석인 기회를 이용하여 동로마 제국의 레오 1세가 또다시 파견한 황제로서, 동로마 제국으로서는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정통황제로서 인정하고 있는 황제이다. 네포스는 레오 1세의 황후인 베리나(Verina)의 조카사위이다. 베리나 황후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서로마 제국의 행정수도 라벤나에 들어가서, 글리케리우스를 폐위시키고 제위에 올랐지만, 얼마 후 휘하에 거느린 이민족 연합군의 이반(離反)에 부딪혀, 판노니아 출신이며 로마군 총사령관인 오레스테스의 진격 앞에 수도를 탈출하여 도망쳐서, 그전에 자기가 군 총사령관으로 있던 달마티아 지방으로 내려가 숨어 살면서 굴욕적으로 퇴위당한 덕분으로 그 후 5년동안 더 연명하였지만, 결국은 그에 의해 축출되어 그 당시 달마티아의 카톨릭교 주교로 있던 전임 찬탈자이며 숙적인 글리케리우스에게 발각되어, 480년에 암살되었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Romulus Augustulus. (재위 475-476) 西.

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 이후 서로마 제국은 멸망한 것으로 된다. 그는 로마군 총사령관 오레스테스의 아들이다. 오레스테스는 쿠데타로 대권을 잡은 후, 스스로 제위에 오르지 않고, 나이어린 자기 자식을 명목상 황제로 앉혔다. 오레스테스는 훈족의 왕 아틸라에게 봉사한 후에 이탈리아로 돌아왔지만, 용병대장인 오도아케르의 반란에 의해 체포 처형되었고, 황제자리에 앉아있던 의지할 곳이 없어진 이 유아는 퇴위당하여 캄파니아의 루쿨루스로 유배되었다. 한편 오도아케르는 동로마 황제 제논(Zenon/Zeno. 재위 474-475, 476-491)에게, 서로마 제국에서의 제위계승의 최종적인 정지를 통보하였다. 그런데 동로마 제국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네포스를 최후의 황제로 규정하고 있다. 부언한다면, 이 비운의 황제 Augustulus라는 이름의 어미인 lus는 지소사(指小辭, diminutive)이고, 또 Augustulus라고 이름지은 것은 초대 로마황제인 Augustus(재위 BD 27- AD 14)와 대비하여 최후의 서로마 황제에게 붙인 암시적인 호칭이라고도 한다.


레오 1세 Leo I. (재위 457-474) 東.

트라키아 지방 출신이며 아스파르(Aspar)가의 집사였다. 마르키아누스 황제의 사망으로 새 황제의 옹립문제가 제기되자, 당시 비잔티움 궁정의 실력자이던 아스파르의 적극 지지로, 당초에는 허수아비 황제로서 제위가 주어졌으나, 이 게르만 출신 친위대장의 구속으로부터 독립하고자 게르만군에 대항하는 이사우리아인을 포섭한 끝에, 아스파르 일족을 궁중 쿠데타로 모살 제거하였다. 이에 자신을 얻자 원수인 반달족의 정벌을 시도했으나, 이것은 황후 베리나의 남동생인 바실리스쿠스(Basiliscus)에게 지휘를 맡겼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한편 서로마 제국에 대해서는 마요리아누스 황제가 죽은 후, 리키메르가 기용한 세베루스 황제의 승인을 거부하고, 최종적으로 안테미우스를 서로마에 파견하였으나,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가져오게 했고, 다시 황후의 조카사위인 네포스를 서로마의 황제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레오 2세 Leo II. (재위 474) 東.

레오 1세의 딸인 아드리오네(Adrione)의 아들이며, 따라서 레오 1세의 외손자지만, 불과 재위 수개월만에 7살로 요절하였다. 공치제였던 실부 제논(전의 이름은 Tarasicodissa. 이사우리아 민병대의 대장)에게로 왕관이 돌아갔다.


제논 Zenon. (재위 474-475, 476-491) 東.

레오 1세가 아스파르에 대항하여 등용한 이사우리아 출신이며, 황제의 딸 아드리오네를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에 그는 처음에는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레오 2세의 부황제로, 그리고 그의 사후에는 정제가 된 것이다. 우유부단하여 선제의 황후 베리나가 사주한 바실리스쿠스에 의하여 한때 제위에서 추방되었으나 얼마 후 복위하였다. 황후 아드리아네의 인망의 도움을 받았지만, 반란과 종교상의 분쟁으로 교란된 치정(治政)이었다. 복위 후 오도아케르로부터 서로마 황제제도의 폐지를 통고받자, 명목상으로는 서로마의 황제를 겸한 생각으로 기분이 좋았으나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릭의 이탈리아 진격을 승인함으로써 오도아케르를 정벌하는데 성공하였다.


아나스타시우스 Anastasius I. (재위 491-518) 東.

제논 황제의 호위병으로부터 입신출세하여 수기밀관(守機密官)까지 올랐으며, 황제 사망 후에는 미망인이 된 황후 아드리오네와 결혼함으로써 61세의 나이에 제위에 올랐으며, 제논을 추종하던 이사우리아인들을 배제하는데 성공하였다. 흑해연안에 장성을 구축하여 국내정치에 볼만한 실적을 올렸고, 특히 재정을 정비 확립하여 훗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마구 뿌린 낭비의 재원을 축적했다. 본래는 가톨릭 신자였으나 후에 그리스도 단성론(單性論)에 심취 귀의함으로써 동방교회 및 정통파 신자인 콘스탄티노플 시민들과 여러 가지로 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것도 후에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한 정통파 신앙에 입각한 제국통합에의 복선이 되었다.


유스티누스 1세 Justinus I. (재위 518-527)

일리리쿰 지방의 농촌출신으로서, 유년시절에는 돼지치기 목동이었다고 한다. 20세 무렵에 콘스탄티노플로 상경하여 황제 아타나시우스 1세의 경호대에 입대한 후, 무공에 의하여 순차적으로 승진하여 명예현관, 궁정 경호대장이 되었다. 황제가 죽자 60대 중반의 나이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문맹상태 그대로 제위에 올랐다. 전임 황제와는 대조적으로 정통파 가톨릭을 신봉하여 519년에는 선제 치세하에서의 아카키우스(Acacius. 아리우스파의 한 분파인 아카키우스파의 창시자. 그리스도는 신과 본질을 같이하지 않으며, 양자는 의지에서만 서로 닮았다고 주장)분리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로마교황과 화해하였고, 523년에는 아리우스파의 교리를 금압함으로써 당시의 이탈리아 지배자인 동고트족 출신 이탈리아 왕 테오도릭과 대립하였다. 동방에서는 페르시아 황제 카바드 1세(Kavad I)세에 대항하여 라지카 전쟁을 수행하였다. 친자식이 없어 재위 중에는 줄곧 조카인 유스티니아누스의 강력한 보필을 받았고, 죽기 수개월 전에 그를 정식으로 공치제로 세워 후계자로 삼았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대제) Justinianus I. (재위 527-565)

일리리쿰의 농촌출신으로서 유스티누스 1세의 조카이자 양자였다. 아나스타시우스 황제가 죽은 뒤 제위에 오른 백부 유스티누스 1세에 의하여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불리어 가서, 제국 통치의 숨은 실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백부의 죽음과 동시에 명실상부한 황제가 되어, 로마 제국의 역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측근들의 통솔에 뛰어났으며 원형경기장의 무희 출신이었던 황후 테오도라의 뛰어난 조언은 황제의 정책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황후 테오도라는, 이집트, 시리아 등의 주민들이 믿고 있던 그리스도교에서의 이단인 ‘단성론(單性論)’에 대하여 깊은 이해심을 가지고, 황제의 종교정책이 로마에 치우치는 일이 없도록 배려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게르만 민족 대이동 결과 5세기에 잃은 옛 로마 서방의 영토 재 정복의 꿈을 실현시킬 명장 벨리사리우스와 환관 나르세스를 기용하여, 반달 전쟁(533∼534) 및 동고트 전쟁(535∼540, 541∼552)을 일으키고, 또한 552년에는 서고트 왕국에도 군대를 파견하여, 카르타고, 이탈리아 및 에스파냐 남부를 탈환, 지중해를 다시 ‘그들의 바다’로 할 수 있었다. 그 막대한 전비를 처리하기 위해 황제가 국가 재정을 맡긴 사람이 카파도키아의 요하네스였고, 국가 행정의 운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로마법 정비의 임무를 맡긴 사람이 법조가인 토리보니아누스였다.

이리하여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고대 로마 법학자들의 ‘학설집’, ‘법학 입문’ 및 법전 편찬 이후에 유스티니아누스가 반포한 ‘신법’으로 이루어진 《로마법 대전》이 완성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또한 위대한 건축 활동가로서, 특히 이시도로스나 안티미오스 등 당대의 으뜸가는 건축가를 발탁하여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세웠다. 이런 일체의 활동에서 유스티니아누스를 인도한 것은, 신으로부터 지상의 모든 일을 위탁받아 최고의 권력자로서 행동한다고 하는 그리스도교적 은총황제로서의 이념이었다.

하지만, 그의 치세는 결국 옛 로마제국의 위세(盛世)를 되찾지 못하고 종말을 고했다. 그가 벌인 정복사업과 토목, 건축사업들은 제국에 심각한 재정난을 초래하였고, 541에서 543년 사이에는 페스트가 유행하여 막대한 인구의 손실을 입었으며, 곧 이어 561년 아바르 족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마저 받게 되었다. 그의 사후 헤라클리우스 왕조가 등장하였고, 이 때부터 비잔티움 제국은 독자적인 행로를 걸어가 완전히 그리스화하게 되었다.

그의 통산 38년 간에 걸친 통치사적을 살펴볼 때, 고대의 전통적인 로마제국의 재흥을 시종일관 겨냥한 그의 이런 사업들은 지금까지는 주로 유스티니아누스 개인의 고립된 야심적 기도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일면에서는 이것이 로마법대전 편찬과 같이 고대로마의 지적유산(知的遺産)의 획기적인 집성으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전형적으로 그가 비극으로 끝낸 시대 착오적인 외정면(外征面)과 더불어 여러 가지로 역사적 평가를 받아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틀림없이 변경지방의 이름없는 가문출신의 이 대제가 원대한 야심과 웅대한 시야 그리고 강인한 지력과, 또한 명장 벨리사리우스를 비롯하여 뛰어난 문무양면의 인재를 발굴하여 국 내외 정책에 등용한 높은 안목과 식견에 입각하여 이 시기의 역사 상황에 직면하여 시정한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후 역대 비잔티움 제국 황제들의 선천적이며 숙명적인 정책의 장대(壯大)한 규모에서의 발동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유스티누스 2세 Justinus II. (재위 565-578)

동로마 중흥의 영주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조카. 장기간에 걸친 선제(先帝)치세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기도하여, 독자적인 정책을 수립 추진시켰으나 종교상 단성론자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였고, 페르시아 황제 호스로 1세와 대결하려고 한 여러 정책들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롬바르드 족의 이탈리아 침입을 허용했는가 하면, 동부에서의 요충지인 다라(Dara)의 함락보고를 듣고 난 후에 발광해 버렸다.


티베리우스 2세 Tiberius II. (재위 578-582)

황제 유스티누스 2세 밑에서 발칸 방면 군 사령관으로 있던 중, 황제가 발광(574)후에 그의 양자가 되었고, 이어서 제위에 올랐다. 페르시아 전선에서는 일단 성공하였지만, 북부의 아바르 족의 침공을 받았고, 다시 이 무렵에 트라키아와 그리스에의 슬라브족의 남하가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 자신이 중대한 병환에 걸렸음을 깨닫고 마우리키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제위에 오르게 한 바로 다음날 사망하였다. 덧붙여 말한다면 로마제국 제 2대 황제 티베리우스(재위 14-34)를 계산에 넣지 않으면 이 동로마 제국의 티베리우스는 2세가 아니라 통상 1세로 호칭된다.


마우리키우스 Mauricius. (재위 582-602)

페르시아 전선에서의 공적이 인정되어 티베리우스 황제의 딸과 결혼한 후에 제위에 올랐다. 페르시아 황제 호스로 2세(Chosroes/Khusru II. Parvez. 재위 590-628)의 간청을 받아들여서 그의 복위를 도와 준 후에, 북부의 아바르족 회유에도 성공하였다. 이탈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의 방위를 위하여 그가 창설한 라벤나(584년)와 카르타고(591년) 총독령에 대한 군정(軍政)은, 훗날 소아시아 반도 내에서 시행된 테마제도의 선구로 일컬어진 것으로서, 제국 중흥에서 상당한 효과를 올렸다. 그러나 도나우강 대안에서 동계야영하라는 명령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포카스 휘하의 군대가 수도에 침공함으로써 황제와 황제일족이 모두 학살되었다.


포카스 Phocas. (재위 602-610)

트라키아 군단의 100인 대장(centurion)에서 반란으로 제위에 오른 전형적인 찬탈자형 황제. 로마교회의 수위(首位)를 인정함으로써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Magnus. 재위 590-604. 성인)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오늘날까지도 그를 칭송하는 원주(圓柱)가 로마의 포룸에 있다.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걸은 페르시아 황제 호스로 2세의 침공을 받았고, 다른 한편으로 제국 내의 단성론자 적 유대교도에 대한 박해 등 공포정치를 실시함으로써 제국을 해체위기로까지 몰아넣었는데, 결국에는 카르타고 총독 헤라클리우스의 아들인 헤라클리우스의 수도공략으로 체포, 처형되었다.


헤라클리우스 Heraclius. (재위 610-641)

카르타고 총독인 헤라클리우스의 아들로, 함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 공포정치를 행한 포카스 황제를 폐위하고 황제가 되었다. 최초의 십자군으로 평가되는 페르시아 원정을 감행하여 호스로 2세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고, 예루살렘을 수복하고 성 유물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조각을 되찾음으로써 중세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경건한 그리스도 교도인 동시에 뛰어난 현실적 통치감각을 가졌던 그는 해묵은 그리스도 교리논쟁에서 정통파로부터 분리되어 나간 동방교회들을 붙들어 놓고자, 일신교리(단의론)의 제창으로 제국 내의 종교적인 화해에 노력하였지만, 이미 때가 늦었던 것이다. 이슬람교의 신앙으로 통합된 신흥 아랍군대가 사회적으로 피폐하고 신앙으로 분열되어 있던 시리아에 침공하여, 야르무크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을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몇 년 후에는 페르시아로부터 반환받은 팔레스티나,시리아,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이집트를 잇달아 상실하였는데, 이러한 여러 지역들이 영원히 그리스도 교권으로부터 벗어나 버림으로써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페르시아 원정의 영광도 일장춘몽으로 끝나버렸지만, 그가 대 페르시아 방어책으로 소아시아에 창시한 테마제도는 이후 4세기 동안, 제국의 사회적인 생명력의 지주가 되어, 이 지역이 제국멸망의 마지막 시기까지 이슬람 세계의 서방진출을 저지시키는 중핵적인 판도로 계속 남아있게 하였다.


콘스탄티누스 3세 Constantinus III. (재위 641)

헤라클리우스와 그의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부황(父皇)사망 후 3개월간만 재위.


헤라클로나스 Heraclonas. (재위 641)

헤라클리우스와 그의 후처 마르티나(Martina)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형인 콘스탄티누스 3세가 죽은 후, 짧은 기간동안 단독황제가 되었으나 민중의 반란으로 로도스섬으로 추방되었다. 그가 생모와 공모하여 콘스탄티누스 3세를 독살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는 설이 유력하다.


콘스탄스 2세 Constans II. (재위 641-668)

콘스탄티누스 3세의 아들로 11세에 즉위했는데, 즉위한 직후 이집트와 아르메니아를 연이어 아랍군에게 빼앗겼지만,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직접적 위협은 칼리프 오스만(Othman b. 'Affan. 3대 칼리프. 재위 644-656)의 피살에 의한 이슬람권의 내분으로 겨우 회피되었다. 국내에서의 그리스도교 교리논쟁을 공식적으로 금지하는 교서 티포스(Typos)가 교황에 의하여 반대되자 교황 마르티누스 1세(Martinus I.)를 강제로 체포추방함으로써 서방교회들과 충돌하였다. 그후 이탈리아에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아랍에 대한 서방지역 방위 근거지로 삼을 목적으로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지만, 얼마 후 암살되었다.


콘스탄티누스 4세 Constantinus IV. (재위 668-685)

포고나투스(Pogonatus:수염있는 사나이)가 별명. 콘스탄스 2세의 장남. 그의 치적은 674년부터 5년 동안에 모두 4회에 걸친 아랍군의 콘스탄티노플 공위(攻圍)를 막아냄으로써, 비잔티움의 위신을 높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서유럽에서의 카를 마르텔(Karl Martell. 689-741. 프랑크 왕국의 궁재. 피핀 2세의 서자)이 732년 투르.푸와티에 전투에서 사라센 군을 격파한 영광을 능가하는 공훈으로 평가받고 있다.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 칼케돈 신경을 승인함으로써 로마와 화해했지만, 발칸반도에 대한 불가르 족 침공저지에는 실패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 Justinianus II. (재위 685-695, 705-711)

별명이 리노트메투스(Rhinotmetus:코 베인 황제). 전제자였지만, 기략에 뛰어난 유능한 황제로서 대외적으로는 마케도니아를 회복하고 그 지역의 슬라브족들을 소아시아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그는 한번 추방되었으나, 천신만고 끝에 10년 후에 복수귀가 되어 불가르 족의 칸인 테르벨의 원조로 권토중래하여 복위했지만, 너무나 보복적인 압제를 강화했기 때문에 결국 민중봉기로 살해되었다. 이로써 헤라클리우스 왕조는 단절되었다.


레온티우스 Leontius. (재위 695-698)

헬라스 군관구 사령관으로부터 군대에 의하여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지만, 또한 군대의 반란으로 실각하였다.


티베리우스 3세 Tiberius III. (재위 698-705)

실명은 압시마르(Apsimar)이고 고트인인이라는 설이 있지만,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바르다네스(필립피쿠스) Bardanes(Philppicus). (재위 711-713)

바르다네스가 본명이고 필립피쿠스가 별명이지만, 필립피쿠스 바르다네스라고 표기 사용하기도 한다. 복위한 유스티니아누스 2세로부터 케르손 진압을 명령받았지만, 이에 반역하고 오히려 수도에 침입하여 제위를 찬탈하였다. 단성론을 부활시킴으로써 로마 교황과 대립하였다. 불가르 족 군대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플이 포위된 곤란한 상황 속에서 음모에 의해 퇴위당했다.


아나스타시우스 2세 Anastasius II. (재위 713-715)

본명은 아르테미우스(Artemius). 바르다네스 황제의 재무대신이었으나 원로원의 지명으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도 옵시키온 군단의 반란으로 퇴위를 강요당한 후, 복위를 기도하던 중 레오 3세의 손에 체포 처형되었다. 그는 선제인 바르다네스의 단성론을 금지시킴으로써 로마 교황과 화해하였다.


테오도시우스 3세 Theodsius III. (재위 715-717)

소아시아 남부지역의 징세관이었다. 옵시키온(Opsikian) 군단 경리장교로 원정 중 군대반란으로 황제에 추대되었다. 자기의사에 반한 추대였으므로 본의 아니게 제위에 올랐으나, 얼마 후 보다 유능한 아나톨리콘 군단 사령관 레오에 의하여 퇴위를 강요당하자, 물러나 수도원에 들어갔다.


레오 3세 Leo III. (재위 717-741)

이사우리아(Isauria)의 레오라고 불리는 것처럼 의심할 바 없이 북시리아 지방 태생. 본명은 코논(Conon). 이사우리아 왕조를 창시하였고, 아랍 침입군을 격퇴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성상파괴정책으로 그후 1세기에 걸쳐 제국 내에 심각한 불협화음을 조성함으로써, 훗날 서로마 제국 성립의 기운을 낳게 하였다.



그는 당초에 유스티니아누스 2세에게 발탁되어 유능한 군인으로서의 실력을 발휘하였고, 후계황제인 아나스타시우스 2세에 의하여 소아시아의 최대의 군관구인 아나톨리콘 테마의 사령관으로 승진하였으며, 아르메니아콘 테마의 사령관인 아르타바스데스(Artavasdes/Artavasdus)와 제휴하여 아랍 군을 기만해서 그의 협럭을 얻음으로써 콘스탄티노플에의 입성성공으로 제위에 올랐다. 이런 배신행위에 분노한 아랍 군이 레오를 공위(攻圍)했지만, 그는 군대와 시민들의 일치협력에 힘입어, 콘스탄티누스 4세 이후 제국 최대 위기라는 이 아랍 군의 공격을 극복하였다. 법전 에클로가(Ecloga)를 발포했고, 대군관구를 세분화하였으며,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보수하였고, 아르타바스데스와 하자르 칸(Chozar Khan)과의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정책적으로 자기가문의 안태를 실현시키면서 아랍에 대한 로마제국의 위신을 유지해 나갔지만, 그의 종교정책에 입각한 제국내외의 혼란은, 그의 역사적 공적에 대한 여러 가지의 분열된 평가를 낳게 하였다.


콘스탄티누스 5세 Constantinus V. (재위 741-775)

별명이 코프로니무스(Copronymus:똥). 레오 3세의 장남. 매제되는 아르타바스데스(Artavasdes)와의 격렬한 항쟁 끝에 이 찬탈자로부터 제위를 빼앗아 등극하였다. 부황이 시작했던 성상파괴운동을 한층 더 강력히 추진함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커다란 반감을 샀는데, 여기서 그에 대한 별명(코프로니무스)이 붙어진 바, 이 말은 배설물, 똥을 뜻하는 욕설이다. 그는 아랍과 불가르족 군대에 대해서는 효과적으로 방위전을 전개했지만, 롬바르드족에게 라벤나 총독령을 빼앗김으로써 이탈리아에 대한 비잔티움의 영향력을 잃었는데, 이것은 그의 성상파괴정책과 더불어서 교황과 프랑크 왕국의 제휴를 성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레오 4세 Leo IV. (재위 775-780)

하자르 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그것은 그의 어머니가 하자르족 칸(汗)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치적은 성상파괴로부터 그의 부활에의 과도기적 정책을 쓴 것. 그가 부황의 종교정책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그의 아내인 이레네의 영향으로 믿어지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6세 Constantinus VI. (재위 780-797)

10세 때 모후 이레네를 섭정으로 즉위했지만, 790년에 성인이 되자 권력장악에 집착하는 이레네를 배제하고 단독황제가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어리석게도 어머니의 죄를 용서하였는데, 797년에 그가 재혼함으로써 민중과 성직자들의 불만을 사게 되자, 기회를 엿보던 이레네가 황제이자 자신의 아들인 그의 눈알을 도려내어 장님으로 만들어 추방한 후 스스로 지배자가 되었다. 이로써 이사우리아 왕조는 단절되었다.


이레네 Irene. (재위 792-802)

성상재흥(聖象再興)의 공로자로서 그리스 정교회에서 성인반열에 올린 여제. 그녀는 자신의 심복인 총대주교 타라시우스(Tarasius)와 도모하여, 당초 786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한 주교회의에서 실패한 후에, 다음 해 니케아 종교회의(제7회)에서 성상배례제도 부활에 성공하였다.


니케포루스 1세 Nicephorus I. (재위 802-811)

여제 이레네의 재무대신이었으나, 그녀가 추방된 후에 제위에 올랐다. 외정실패로 인한 가혹한 조세부과로 민심을 잃었으며, 바그다드의 칼리프인 하룬 알 라시드(Harunu'r Rashid. 아라비아의 압바스 왕조 제5대 칼리프. 재위 786-809)에의 굴욕적인 공납을 강요당한 끝에 809년 불가르 족의 칸인 크룸을 정토하기 위하여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출전했으나 적의 함정에 빠져 섬멸되고 그 자신은 패배 후 전사하였다. 그의 두개골은 크룸을 위해 술잔으로 만들어졌다.


스타우라키우스 Stauracius. (재위 811)

니케포루스 1세의 아들. 불가르 족과의 전쟁에서 중상을 입고 돌아와 있던 중 매제인 궁내부 대신 미카엘 1세 랑가베에게 제위를 빼앗겼다.


미카엘 1세 랑가베 Michael I. Rhangabe. (재위 811-813)

성상부활을 도모하였고 아울러 베네치아와 기타 아드리아 해안지대 제 도시의 비잔티움에로의 귀속과의 교환으로 샤를마뉴(Charlemague. I. Magunus. 프랑크 왕으로서는 재위 768-814. 서로마 황제로서는 Karl I 로서 재위 800-814)의 황제칭호를 승인하였다. 불가르족과의 전쟁에서 로마군의 부장인 아르메니아인 레오에게 배신당하여 패배하고 은퇴. 수도승이 되어 그후에도 32년간 생존했다.


레오 5세 Leo V. (재위 813-820)

카멜레온, 아르메니아 인의 별명이 붙여졌다. 니케포루스 1세와 미카엘 1세 밑에서 군공을 세우고 아나톨리콘 테마 사령관이 되었으며, 이어서 미카엘 1세 랑가베를 폐위하고 제위에 올랐다. 이전에 콘스탄티누스 5세가 소집한 성상파괴를 위한 히에리아 주교회의를 부활시켰지만, 군대동료인 미카엘 2세의 음모로 교회 안에서 암살되었다.


미카엘 2세 Michael II. (재위 820-829)

말더듬이의 별명이 있다. 프리지아 속주 아모리움의 비천한 가정출신이자만, 음모로써 선황을 암살하고 아모리움 왕조를 창설하였다. 성상파괴운동을 완화하였지만, 제위를 둘러싼 항쟁으로 국력이 피폐해졌고, 크레타섬과 시칠리아섬을 아랍군에게 빼앗겼다.


테오필루스 Theophilus. (재위 829-842)

불운한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미카엘 2세의 아들. 9세기 비잔티움 학예부흥과 최후의 강력한 성상파괴운동 추진자로서 후세의 훼예포폄(毁譽褒貶)이 많은, 지극히 개성이 강한 인물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튼튼히 보수하고, 대학을 부흥시켰으며, 문헌필경소의 수를 늘렸지만, 그의 종교정책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그의 생전에 이미 그리스 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의 대세는 성상의 옹호방향으로 굳어져 갔던 것이다.


미카엘 3세 Michael III. (재위 842-867)

별명은 술주정뱅이. 아모리움 왕조의 마지막 황제. 5세 때 모후 테오도라(Theodora)와 민정총독 테오크티스투스의 후견하에 즉위하였다. 점차 성장하면서 섭정인 모후와 불화상태에 들어갔다. 먼저 외삼촌(모후의 남동생)인 바르다스(Bardas. 866 사망)가 민정총독 테오크티스투스를 암살한 것을 묵인함으로써 그를 통하여 18세 때에 모후로부터 실권을 빼앗고, 또 이 외삼촌의 도움을 빌려서, 총대주교 포티우스(Photios/Photius. 820 경-891 경. 교회정책상 로마교황과 싸워 서로 상대방을 파문처분함으로써 동서 양 교회 분열의 단서를 만들었다.)를 기용하여 로마 교황에 대항하여 비잔티움의 학술적 위신을 높였으나, 얼마 후 시종장인 바실리우스의 강한 영향력에 지배되기에 이르러, 공치자 바르다스를 시의하여 바실리우스로 하여금 바르다스를 모살케 하였지만, 그 다음해에는 그 자신이 바실리우스에게 암살당하였다.



그는 부황 테오필루스로부터 물려받은 바, 변덕스럽고도 잔혹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술주정뱅이의 별명으로 상징되듯이 그에 대한 악평은, 그를 모살한 다음 마케도니아 왕조를 창시한 바실리우스의 직계후손인 콘스탄티누스 7세를 비롯한 비잔티움 사가들이 편견으로, 혹은 악의적으로 퍼뜨린 것인데, 그것은 그런 사가들이 이 범행의 정상(情狀)을 완화 내지 정당화시키려는 동기에 입각하여, 일방적으로 과장 및 왜곡했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이다.


바실리우스 1세 Basilius I. (재위 867-886)

마케도니아인. 2세기 간이나 존속하게 되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창시자로서, 후에 바실리카(Basilica)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비잔티움 법규의 제정자. 원래 아르메니아 출신으로서 아드리아노플에 살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선천적인 미모와 강인한 체력을 무기로 수도의 젊은이들의 비공식적인 유예당파(遊藝黨派)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마침 미카엘 3세의 총애를 받게 되어 생애의 대부분을 궁정의 마부로 지낸 뒤에 갑자기 황제의 시종장에 발탁되었고, 또 황제의 공치자이자 외삼촌인 바르다스(Bardas)를 암살함으로써 공을 세우는 동시에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의 비호자까지 암살하고 새 왕조를 수립하기에 이르는 그의 경력은, 비잔티움 제국 내의 사회적 유동성을 예증하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가히 소설만큼 기이하고 역사적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발칸반도에서의 슬라브족 통어에 성공하여, 불가리아 왕으로 하여금 그리스 정교의 관할권을 인정케 함으로써, 로마에 대하여 위신을 과시하였고, 이그나티우스(Ignatius. 799 경-878)와 포티우스 사이의 총대주교의 지위와 교리를 둘러싼 항쟁에 대해서도 로마 교황의 간섭을 봉쇄하고 교회의 분열을 미연에 예방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남이탈리아에서는 프리아 지방의 중심인 바리를 영유(領有)하고, 아랍인으로부터 실지(失地)를 회복하기 위해 대함대(大艦隊)를 파견하여 칼라브리아 지방을 소탕하였다. 소아시아에서도 이슬람의 후원하에 있던 이단(異端) 파울리키우파 교도의 본거지인 테프리크를 점령하여, 동부전선에서 계획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레오 6세 Leo VI. (재위 886-912)

소포타토스(sophotatos:최고의 현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호학적인 황제. 바실리우스 1세의 2남. 일설에는 미카엘 3세의 아들이라는 풍설도 있다. 유년시절에 박학의 총대주교 포티우스(Photius)의 교육을 받았고, 정치가라기 보다도 학자로서의 적성을 발휘하였기 때문에 현군(賢君)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실 그는 부친의 유업을 계승하여 그리스어로 쓰여진 법전 바실리카(Basilica) 60권을 888년경에 완성 공포하였다. 황태자를 얻기 위하여 네 번씩이나 결혼함으로써 총대주교 니콜라우스(Nicolaus)의 견책을 받았다.


알렉산드로스 Alexandros. (재위 912-913)

레오 6세의 동생. 형과 공치제였으나 실권이 없었다. 레오 6세의 사후에 잠깐동안 레오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7세와 공치제 겸 후견인으로 있었으나, 배덕(背德)과 우행(愚行)이 많았다.


콘스탄티누스 7세 Constantinus VII. (재위 913-959)

별명이 포르피로게니투스(porphyrogenitus:태어나면서부터 황태자)이다. 7세 때 등극하여, 처음에는 외교정책상 불가리아 왕 시메온(Simeon I. 재위 913-927)의 딸과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궁중쿠데타로 중지된 후에, 사태를 수습한 해군사령관 로마누스 레카페누스(Romanus Lecapenus. 재위 920-944)를 공치제로 하고, 그의 딸 헬레네(Helene)와 결혼하였다. 그는 이 장인에게 정치와 전쟁에 관한 권한을 모두 이양하고, 그의 반대급부로서, 그로부터 황제로서의 위엄과 의례를 인정받았다. 40세에 로마누스와 그의 형제 공치제들의 몰락으로 단독황제가 되었지만, 그렇게 된 후에도 아버지의 대물림 성격으로 학술에의 편애를 버리지 않았다. 제국행정론과 비잔티움 의전서는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중세 비잔티움 제국과 그 주변지역의 역사연구에 가장 기초적인 문헌의 하나로 되어 있다.


로마누스 1세 레카페누스 Romanus I. Recapenus. (재위 920-944)

사위인 콘스탄티누스 7세와 공동 통치를 했으며 920-944년에는 모든 실권을 혼자 행사했다. 원래 도나우 지방의 비잔티움 함대 사령관이었으나 917년 아켈루스에서 비잔티움 군이 크게 졌다는 소식을 듣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으며 딸 헬레네(Helene)를 콘스탄티누스와 결혼시킨 직후 사위와 공동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친아들인 스테파누스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폐위당했고 그들의 강요로 944년 수도승이 되었다.


로마누스 2세 Romanus II. (재위 959-963)

콘스탄티누스 7세의 아들이지만, 정치적 능력이 없어서 환관인 바실리우스, 요세푸스 브링가스에게 국정을, 니케포루스 포카스에게 군사업무를 위임하고 유타생활에만 빠져 있었다. 황후인 테오파노(Theophano)에게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당시의 정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사실이 아니라는 설이 유력하다.


니케포루스 2세 포카스 Nicephorus II. Phocas. (재위 963-969)

이슬람-아랍군에 대한 군사작전의 성공으로 10세기의 이른바 마케도니아 황금시대를 열었던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에 의해 당초에는 서부전선으로부터 동부전선 사령관으로 전출되었고, 다시 로마누스 2세로부터 크레타 섬 해방작전을 위임받고, 동 지중해 제해권 탈취라는 비잔티움 궁정의 꿈을 300년만에 실현시켰다.



그는 '여성을 제외하고 세계의 모든 것을 정복하였다'라고 평가된 것처럼 군사적전에서는 귀재임을 입증하였으나, 용모만은 미모하고는 거리가 멀었던 것과, 아토스 산의 수도원장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감화로 금욕적인 성품의 소유자라는 특질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젊고 아름다운 과부인 황후를 유혹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테오파노의 정치적 야심이 그와 동배(同輩)이며, 친구인 요한네스 치미스케스를 중개인으로 해서 그에게 제위를 넘겨주는 대신에, 자신의 넘치는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기회를 만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수도에 입성하여 대관(戴冠)한 다음 달에 테오파노와 결혼하였다. 명장이긴 했지만 정치적 수완이 부족한 일개 무변이었던 그는, 제국 국민의 민심을 수람(收欖)하는데 실패하여 점차 주위의 불만을 조성하던 중, 테오파노의 배후조정에 의하여 이전의 맹우인 요한네스 치미스케스에 의하여 모살되었다. 내정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 시리아까지 국경을 확대하였고, 서쪽에서도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1세(Otto I . 독일 왕으로서의 재위는 936-973,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는 재위 962-973)에 대항하여 이탈리아에서의 비잔티움 제국의 권익을 확보함으로써 위신을 높였다.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 Johannes I. Zimisces. (재위 969-976)

니케포루스 2세와는 친척관계에 있는 군인동료. 안티오키아와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여 시리아와 발칸에서의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권을 확대하고 불가리아 군의 진출을 억제하며, 러시아의 키예프 공국을 신종(臣從)시켜서 북방방위를 튼튼히 하였다. 총대주교 폴리에욱투스(Polyeuctes)의 조언에 입각하여 정부 테오파노 황후를 추방하고, 콘스탄티누스 7세의 딸인 테오도라를 황후로 삼았다. 그의 돌연한 사망은 환관들에 의한 독살이 아니라 기실 장티푸스에 의한 것임이 정설이다.


바실리우스 2세 Basilius II. (재위 976-1025)

불가록토누스(Bulgaroctonus:불가르인의 학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마케도니아 왕조 최성기를 이룩해 낸 황제. 로마누스 2세의 장남. 부황의 사망으로 등극하였으나, 나이가 어렸던 탓에 당초에는 계부인 니케포루스 2세 포카스, 고모부인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와 공치제로 있었으며, 요한네스 1세가 죽은 뒤에도 외종조부인 환관 바실리우스가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985년 외종조부를 추방하였다. 친정(親政)에 나서면서 소아시아의 호족반란을 진압함으로써 대토지 귀족의 세력제거를 실현시켜, 제국국민의 사기를 높였고, 도나우 강 이남의 발칸반도 전역,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나아가서는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아를 병합하였다. 남이탈리아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의 권위를 확립한 다음, 시칠리아의 아랍인 원정을 꾀하였으나 중간에 사망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가 그리스 정교의 수용을 조건으로 누이동생 안나(Anna/Anne)를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Vladimir)와 결혼시킨 것은, 러시아의 비잔티움화를 실현시켜, 후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콘스탄티누스 8세 Constantinus VIII. (재위 1025-1028)

바실리우스 2세의 동생으로서 어릴 때부터 그와 마찬가지로 제위에 올려져 있었지만, 형과는 달리 정무(政務)는 포기한 채 쾌락만을 탐닉하였다. 짧은 기간동안 주권자로 행세한 후에 발병하게 되자, 딸 조에(Zoe)를 수도장관 로마누스 3세와 결혼할 것을 승낙케 한 다음, 그를 후계자로 정하고 죽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이 콘스탄티누스 8세의 치세로부터 해체와 쇠망의 직선적인 행정(行程)에 들어갔다.


로마누스 3세 아르기루스 Romanus III. Argyrus. (재위 1028-1034)

평범한 귀족이었으나 임종 전의 콘스탄티누스 8세 황제로부터 그의 딸 조에와 결혼해 후계자가 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위에 오른 뒤에는 통치를 잘 하기 위해 애썼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무거운 세금을 내리려다 오히려 국가재정을 혼란에 빠뜨렸고, 아랍인들이 제국의 동쪽 국경지대에 쳐들어온 데 대한 응징을 하려고 1030년 대군을 이끌고 시리아의 알레포에 출격하여 아랍군과 싸웠으나 아자즈에서 대패한 후에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황후 조에에게 독살되었다는 설이 결정적이다.


미카엘 4세 Michael IV. (재위 1034-1041)

친 동생인 환관 요한네스를 중개로 황후 조에의 총애를 받아들이고, 선제가 급사함에 따라 그녀와 결혼하면서 등극하였다. 그는 간질병을 앓았으며,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기지 못했으나, 다만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와의 30년 기한의 휴전을 성립시킴으로써 제국에 소강상태를 가져오게 하였다.


미카엘 5세 Michael V. (재위 1041-1042)

별명이 칼라파테스(Calaphates:땜장이)이고, 미카엘 4세의 조카. 조에 황후의 양자가 되어서 등극했지만, 자신의 은인인 이 여자 비호자와 자기 삼촌되는 환관 요한네스를 배신하고 이들을 모두 추방하였는데, 조에의 추방으로 반란을 자초하여 퇴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에 Zoe (재위 1042) & 테오도라 Theodora (재위 1042, 1055-1056)

자매로써 콘스탄티누스 8세의 딸. 조에가 미카엘 5세로부터 추방되었을 때, 민중이 그녀를 옹호하였기 때문에 미카엘이 추방된 후 두 자매가 여제로서 공동통치했지만, 양인의 불화가 조에의 세 번 째 결혼을 성립시킴으로써 당분간 세 황제의 공치제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테오도라는 콘스탄티누스 9세가 죽은 뒤 1055년-1056년 간 재차 단독제위에 올라있었다.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쿠스 Constantinus IX. Monomachus. (재위 1042-1055)

조에 여제의 세 번 째 남편. 군인에 대항한 문치황제로써 재정재건을 위하여 군비를 삭감함으로써 제국을 약체화시켰다. 노르만 군의 침입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외교적으로 대처코자, 로마 교황과의 화해 및 동맹체결을 획책했으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케룰라리우스(Cerularius, Michael. 로마 교황으로부터 파문됨으로써 동서교회를 전면적으로 분열시켰다)가 로마 교황에 대하여 졸렬하게 대처함으로써 동서 두 교회가 이 시기에 결정적으로 분열하게 되어 목적달성을 단념해야 하였다.


미카엘 6세 Michael VI. (재위 1056-1057)

별명이 스트라티우티쿠스(Stratioticus)이다. 여제인 테오도라의 지명에 따라 제위에 올라, 계속하여 문치정책을 취했으나 군인귀족을 통어하는데 실패하였고, 이사키우스 1세의 수도진입으로 퇴위하였다. 그의 치세하에서 테오도라가 사망함으로써 마케도니아 왕조는 단절되었다.


이사키우스 1세 콤네누스 Isaacius I. Comnenus. (재위 1057-1059)

바실리우스 2세 밑에서 군공을 세우고, 소아시아의 대토지 소유자가 되었다. 환관의 수중에 있던 미카엘 6세에 대한 군인귀족의 대표로서 제위에 추대되고 케룰라리우스(Cerularius) 총대주교의 책모로 황제가 되었지만, 얼마 후 두 사람은 불화관계에 빠졌는데, 그러다가 자신의 병환의 중대성을 자각하고 얼마 후 퇴위하여 수도사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 Constantinus X. Ducas. (재위 1059-1067)

문치파의 귀족대표로서 전임자인 이사키우스의 정책을 전환시켰지만, 이 무렵부터 소아시아와 발칸에서의 헝가리와 셀주크 투르크 군의 침입으로 제국의 쇠망은 한층 현저해졌다. 그는 문인 프셀루스(Psellus, Michael Constantine, 1018-1078)의 친구이고, 또 황후는 케룰라리우스의 조카딸 에우도키아 마클렌보리티사이다.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뒤의 제국의 쇠퇴경향은 강력한 군인의 등장을 필요로 하였으므로, 에우도키아는 1년간의 섭정(여제로 보는 견해도 있다) 끝에 카파도키아군 사령관 로마누스와의 재혼에 동의하였다.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 Romanus IV. Diogenes. (재위 1067-1071)

카파도키아 지방의 무인 귀족 출신이다. 군인귀족의 대표로서 북방에서 세운 전공이 인정되어 1068년 선제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의 미망인 에우도키아 마클렌보리티사와 재혼한 후 황제로 등극하였고, 셀주크 투르크족에게 맞서 소아시아 지역에 출병했지만 1071년, 만지케르트에서 아군측 부장(部將)의 배신으로 대패하여 투르크 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그 뒤 풀려 났을 때는 이미 콘스탄티누스 10세의 아들인 미카엘 7세 두카스가 제위에 올라 단독 통치 황제가 되어 있었다. 그는 두 눈을 잃고 마르마라 해의 프로테 섬으로 추방당해 그곳에서 죽었다.


미카엘 7세 Michael VII. (재위 1071-1078)

파라피나케스(Parapinaces: 4분의 1)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콘스탄티누스 10세의 아들. 그가 어렸을 때 모친인 에우도키아가 로마누스 4세와 결혼하였지만, 황제가 투르크군의 포로가 되었으므로 그의 부재 중에 등극하게 되었다. 소아시아 각지에서 기병하여 황제를 참칭한 자들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투르크족의 무력을 원군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에, 제국의 쇠퇴는 한층 더 현저하게 되었다. 그는 국내에서 민정총독 니케포리체스의 곡물독점과 전매제도를 인가함으로써 곡물가격의 폭등을 가져오게 하자, 민중봉기에 의하여 퇴위당하였다. 파라피나케스라는 별명은 4분의 1이라는 뜻으로서, 동일화폐에 의한 곡물 구입량이 종래보다 4분의 1이 감소되었다는 데서 붙여진 것이다.


니케포루스 3세 보타니아테스 Nicephorus III. Botaniates. (재위 1078-1081)

아나톨리콘 테마의 사령관이었다. 등극 후에 전제(前帝) 미카엘 7세의 약혼녀이던 시칠리아의 기스카르(Guiscard, Robert. 1015경-1085. 노르만의 정복자. 남부 이탈리아, 시칠리아를 정복하여 노르만 왕국을 건설하였고, 알렉시우스 1세도 격파하였다)의 딸을 추방함으로써, 이 노르만 왕을 격분시켰지만, 셀주크 투르크의 도움을 빌어서 자기의 제위를 유지하였다.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 Alexius I. Comnenus. (재위 1081-1118)

이사키우스 1세의 조카로 콤네누스 왕조의 창시자. 노르만과 투르크 양 군의 침공을 받음으로써 심히 쇠약해진 제국의 방위를 위하여 소아시아 소재 군인 대 귀족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랐다. 새로 발생한 제1회 십자군의 내공(來攻)이라는 난국 속에서 부분적인 국력회복에 성공하였다. 베네치아에게 무역독점권을 부여한 대가로, 베네치아의 해군력을 얻게 된 것은 후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또한 소아시아 지역의 대지주를 억제시켜 국가통합을 실현시키려던 기도를 단념하고 이들 토지귀족과 협조하였다.


요한네스 2세 콤네누스 Johannes II. Comnenus. (재위 1118-1143)

별명은 칼로얀네스(Kaloiannis: 아름다운 요한네스). 알렉시우스 1세의 아들. 형세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제국의 구 영토 회복을 시도하여 소아시아의 흑해 연안지역을 회복하였고, 서방에서도 로타르(Lothar III.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재위 1125-1137) 황제와 동맹을 맻고 노르만의 시칠리아왕 로제르 2세(Roger II. 재위 1130-1154)와 싸워서 베네치아의 특권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 600년 역사에 등장한 60명의 황제들 중에서는 가장 현명하고 순수한 통치자로 평가된다.


마누엘 1세 콤네누스 Manuel I. Comnenus. (재위 1143-1180)

요한네스 2세의 막내아들. 서유럽 중세 궁정기풍을 동경하여 로마부흥의 꿈을 뒤쫓은 나머지 동방 셀주크 투르크의 위협을 경시하였기 때문에, 그리스인의 반감을 사서 국력을 한층 더 저하시켰다. 처음에 서방에서 십자군과 제휴하여 노르만과 싸워 발칸의 일부지역을 회복함으로써 헝가리와의 동맹을 확립하였지만, 만년에 소아시아 회복작전에 실패하여 이 땅의 제국세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알렉시우스 2세 콤네누스 Alexius II. Comnenus. (재위 1180-1183)

마누엘 1세의 아들. 어릴 때 즉위하여 모친인 마리아가 섭정으로 있었으나 정치의 실권을 조카되는 알렉시우스 콤네누스에게 일임하였기 때문에 콤네누스 일족의 반감을 샀고, 다시 라틴인 중용에 대한 그리스인의 증오심으로부터 민중의 반란이 일어나자, 마누엘 1세의 사촌동생되는 안드로니쿠스가 황제의 비호자임을 구실로 실권을 장악한 다음, 얼마 후 안드로니쿠스가 황제 모자를 살해하고 직접 제위에 올랐다.


안드로니쿠스 1세 콤네누스 Andronicus I. Comnenus. (재위 1183-1185)

마누엘 1세의 사촌동생. 60세가 지날 때까지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바, 그의 무용담은 당시 수도의 화제로 되어 있었다. 그는 마누엘 1세의 개인적인 경쟁자에 그치지 않고, 그의 라틴인 우대와 봉건귀족 지배정책에 대한 열렬한 반대자였다. 그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입성과 더불어 그리스인의 반(反)라틴 폭동이 일어났는데, 그는 이런 상황 속에서 제위를 찬탈하였지만, 그의 폭정이 봉건귀족의 반감을 사게 되자, 얼마 후 노르만군의 수도접근 위기 속에서 민중의 손에 학살되었다.


이사키우스 2세 앙겔루스 Isaacius II. Angelus. (재위 1185-1195 및 1203-1204)

사촌형제되는 안드로니쿠스 1세(Andronicus I. Comnenus. 재위 1183-1185)의 실각으로 콘스탄티노플 폭도들에 의하여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다. 당초에는 테살로니카에 침입한 노르만인을 격퇴하였지만, 불가리아인과 왈라키아인의 침공으로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수립을 강요당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Friedrich 1. Barbarossa. 신성로마황제. 재위 1152-1190)도 참가한 제3회 십자군의 소아시아 지역 진격시는 살라후-딘(Salshu'd-Din Yuruf.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의 시조)과의 제휴로 이에 대처코자 기도한 결과, 라틴인의 불신감을 증폭시켰다. 1195년에 재차 불가리아 전선에 출진 중에 동생의 손으로 추방되어 양 눈을 뽑히고 장님이 되었다. 1201년에 그의 아들인 알렉시우스 4세가 독일로 망명하여, 제4회 십자군의 진격방향을 콘스탄티노플로 전환시킨 결과, 그는 8년간의 감금생활에서 해방되어 자식과 공동으로 제위에 다시 올랐지만, 십자군과의 협정을 이행할 능력이 없게 되자, 반년 후에 아들 알렉시우스 4세가 암살된 데 뒤이어 사망하였다.


알렉시우스 3세 앙겔루스 Alexius III. Angelus. (재위 1195-1203)

형인 이사키우스 2세가 수도를 비운 사이에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군대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오르자 곧 선제(형)를 추격 체포하여 감금 후, 그의 눈을 뽑아 장님으로 만들어 토굴 속에 가두었다. 이 쿠데타에서 나타난 것처럼 그의 성격은 탐욕적이면서도 심약하며 또 비열하였는데, 그는 그 후에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공격하자 곧장 재보를 싸가지고 트라키아 지방으로 일단 도망 피산한 끝에 그리스 지방을 방황하던 중, 보니파치오 디 몬페라트(Bonifacio di Montferrat)와 에피루스 전제군주의 비호를 받고자 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소아시아로 건너가 자기 사위인 니케아 황제 테오도루스 1세 라스카리스로부터 제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이코니움의 셀주크 투르크 술탄과 동맹을 맺고 침공했으나, 오히려 사위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붙잡힌 후 니케아에서 사망했다.


알렉시우스 4세 앙겔루스 Alexius IV. Angelus. (재위 1203-1204)

이사키우스 2세의 아들. 1195년 부친이 추방된 후에 얼마동안 알렉시우스 3세를 따랐지만, 1201년에 매형인 슈바벤의 필립(Philipp Von SchWaben. 독일왕, 신성로마황제. 재위 1198-1208) 밑으로 도망친 후, 제4회 십자군을 콘스탄티노플로 방향전환시켜 진군케하여, 부친을 복위시키는 동시에 그와 공치제로서 자기도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십자군에의 약속을 이행할 수 없게 되면서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증오심을 불러 일으켜 등극 후 반년도 못되어 실각 모살되었다.


알렉시우스 5세 두카스 무르주플 Alexius V. Ducas. Mourzoufle. (재위 1204)

라틴인의 괴뢰인 이사키우스 2세와 알렉시우스 4세의 부자 통치제에 대한 콘스탄티노플 시민의 봉기 당시, 그리스인 측 지도자로서 황제로 추대되어 얼마동안 수도공위전을 버티어 냈지만, 이윽고 패퇴하자 수도를 탈출한 후 장인인 알렉시우스 3세와 합류하였지만, 그에게 배신당하여 양 눈이 뽑혀 장님화된 다음, 십자군의 포로가 되어 수도의 원주(圓柱)꼭대기로부터 추락당하여 죽었다.


테오도루스 1세 라스카리스 Theodorus I. Lascaris. (재위 1204-1222)

알렉시우스 3세 앙겔루스의 사위로서 최초의 니케아 망명정부의 황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당시 지휘권을 행사한 후에, 수도가 함락되는 것을 본 다음 얼마간의 부하병력을 이끌고 소아시아에 있는 니케아 요새지에 의거하여 십자군 병사와 대항하는 동시에, 흑해의 트레비존드로 도망친 콤네누스 지족(支族)들과도 싸워서 지배영토를 확보하였다. 1208년에는 스스로 황제임을 정식 선포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장인되는 알렉시우스 3세 앙겔루스가 셀주크 투르크 술탄의 도움으로 자기에게 제위를 넘겨 주도록 요구하여 침공해 오자 이것을 격파하는 동시에 포로로 잡아 투옥하였고, 한편 라틴황제 앙리 1세와의 사이에서 국경을 확정함으로써 다음의 요한네스 3세 시대의 번영을 준비하였다.


요한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 Joanness III. Ducas. Vatatzes. (재위 1222-1254)

테오도루스 1세 라스카리스의 사위로서 원래는 디티모티카 출신의 귀족. 장인의 사망으로 29세의 젊은 나이에 제위에 올랐다. 제위계승권을 주장하는 처남들과 또 십자군과 싸워서 승리하였으며, 에피루스의 전제군주 테오도루스(Theodorus)에게도 자기의 종주권을 승인케 함으로써 소아시아에서 발칸반도를 제압하여 콘스탄티노플의 라틴제국을 완전히 고립시켰다.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나폴리-시칠리아왕으로서는 Friedrich I. 재위 1197-1212, 독일왕으로서는 1215-1250, 신성로마황제로서는 1222부터 재위)의 딸과의 결혼은, 그가 신성로마제국의 봉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는데, 이것은 라틴제국의 종교적 체면을 구겨 버리기 위한 의도에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가장 위대한 동로마 제국 황제 중 한 사람으로서 동방교회에서는 성인반열에 올려놓았다.


테오도루스 2세 라스카리스 Theodorus II. Lascaris. (재위 1254-1258)

짧은 치세였으나 콘스탄티노플 이동(以東)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끝내 지켜냄으로써 콘스탄티노플 탈환을 위한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에피루스의 전제군주와의 전투에서 사망.


요한네스 4세 라스카리스 Joannes IV. Lascaris. (재위 1258-1261)

테오도루스 2세 라스카리스와 불가리아왕의 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8세에 제위에 올랐고, 섭정으로서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구스가 취임하였으나, 얼마 후 공치제가 된 미카엘 8세는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고 라틴제국을 멸한 기회에 요한네스 4세를 배제하고 단독황제가 되면서, 이 나이 어린 황제를 장님으로 만들어 폐위시키고 감시하였다.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구스 Michael VIII. Palaiologus. (재위 1259-1282)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이며 가장 긴 팔라이올로구스 왕조의 시조. 여러 귀족들의 혈통을 잇는 호족가문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부터 군대에 복무했는데 라스카리스 왕가의 역대 황제치하에서는 사건이 있을 때마다 반란과 찬탈기도에 대한 의심을 받았다. 테오도루스 2세 라스카리스가 젊은 나이에 죽자, 상속권자인 요한네스 4세 라스카리스의 후견인인 무잘론(Muzalon)을 모살하고 스스로 섭정자리를 차지한 다음, 얼마 후 공치제가 되었다.



그로부터 2년후에 그의 부장(部將)이며 부황제가 콘스탄티노플을 라틴제국의 지배로부터 탈환하면서 그의 성망이 높아지자, 단독으로 콘스탄티노플 황제로 정식즉위하였고,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공치제인 요한네스 4세를 장님의 불구자로 만들어 감금함으로써, 결국 죽게 하였다. 콘스탄티노플 탈환 그 자체가 어느 정도 그의 음모의 성과로 보는 설도 있다. 그는 취약한 재건제국과 자기 왕조의 존속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외교적인 모략공작에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는 라틴제국의 망명황제인 보두앵 2세가 나폴리-시칠리아왕인 앙주의 사를의 원조를 얻게 된 데 대항하여, 동서 두 교회의 통합을 미끼로 로마교황에게 접근하여 리용공회의에서 처음으로 일시적이나마 동서 양교회의 통합을 성립 및 선언케 하는 한편, 아라곤왕과 밀약을 맺고 공작금을 제공하여 시칠리아의 만종사건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샤를의 본국 침공위협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그의 이런 외교정책이 라틴인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재 정복을 방지한 이래, 2세기 동안의 여명(餘命)을 비잔티움 제국과 팔라이올로구스 왕조에게 가져다 준 것만은 확실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의 탈환으로 제국의 중심이 유럽지역으로 옮아갔기 때문에 소아시아 지역을 결국 투르크족에게 명도하는 결과가 되었다. 여기서 오스만 투르크의 융흥 앞에 이윽고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동서 유럽 간의 세력의 우열이 결정적으로 변화된 이 시기에, 전형적으로는 교회통합에서 보여준 그의 권모술수가 서방세계에서 르네상스 이후 비잔틴(Byzantine)이라는 형용사가 음험한,모략적인이라는 의미를 가져오게 하는 소지가 되었다.


안드로니쿠스 2세 팔라이올로구스 Andronicus II. Palaiologus. (재위 1282-1328)

비잔티움 제국 역사에서 세 번째로 긴 그의 치세에서, 제국은 결정적으로 아주 조그마한 일개 공국으로 전락 변질되었다. 그리고 그가 제위에 오른지 얼마 안되어 보스포루스 해협 맞은편 대륙에서 일어난 신흥 오스만 투르크족은 결정적인 지반을 구축하였다.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구스의 아들로서, 일찍부터 그의 부황제로 있었지만, 그의 성격은 정치가이기보다도 신학자가 적성이었다. 재정압박으로 말미암아 해군력을 거의 전폐시키고, 지상군도 근위병을 중심으로 하는 극히 한정된 병력으로 대폭 감군시키고, 이의 보완책으로 카탈루냐 동지회를 끌어 들이거나 우세한 베네치아인을 적으로 돌린 다음, 대항책으로 제네바 해군력에 전면적으로 의존한 그의 국방정책은 치명적인 화근을 남겼다. 한편, 그는 그리스 정교회의 독립과 학술을 비호하는데 크게 배려하였는데, 이리하여 아토스산의 수도원은 그의 치세하에서 최성기를 맞이했다.


미카엘 9세 팔라이올로구스 Michael IX. Palaiologus. (재위 1295-1320)

안드로니쿠스 2세 팔라이올로구스의 장남으로써 그의 치세 중에 공치제로 있었지만, 부친의 46년간에 이르는 장기치세하에서 결국 단독통치권은 행사하지 못하고 병사했다. 부황과는 반대로 과감한 군인이었지만, 불가리아인과의 전투에서 얼마간의 성과를 올린 이외에는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카탈루냐 동지회의 수령 로제르 데 플로르(Roger de Flor)를 암살시킨 것은 그의 모략에 의한 것인데, 그후 그는 복수심에 불타는 카탈루냐 동지회에게 결정적으로 패퇴한 바 있다.


안드로니쿠스 3세 팔라이올로구스 Andronicus III. Palaiologus. (재위 1328-1341)

미카엘 9세 팔라이올로구스의 장남. 불상사에 의하여 친 동생을 죽게 함으로써 조부인 안드로니쿠스 2세 팔라이올로구스로부터 제위계승권을 박탈당하였다. 이로 인해 그와 조부간의 사투(死鬪)에 입각한 7년간의 내전에서, 그의 친구이며 정계의 실력자인 요한네스 칸타쿠제누스가 전면적으로 지원하여 조부를 축출하고 그 손자가 승리를 거두게 함으로써, 그의 야심이 실현되어 그는 드디어 제위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전과정 중에서 양 파는 경쟁 적으로 서로 외세를 자기측 원군으로 끌어 들였기 때문에 비잔티움 제국은 사실상 자립국가로서의 체면을 잃고 말았다.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구스 Yoannes V. Palaiologus. (재위 1341-1391)

안드로니쿠스 3세 팔라이올로구스의 아들로서 그의 재위기간은 실로 반세기에 이르지만, 그 옛날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I. 재위 527-565)를 능가하는 그의 오랜 치세는, 모후인 안느 드 사보아(Anne de Savoi)를 배경으로 한 섭정 요한네스 칸타쿠제누스와의 항쟁과 내전, 그리고 섭정과의 공치(1347-1354)라는 혼란기였다. 또한 그가 이 공치제를 내동댕이치고 단독으로 제위에 앉아 있던 후반기의 약 30년은, 팔라이올로구스 왕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골육상쟁으로 시종하여 두 번씩이나 장남 안드로니쿠스 4세와 그의 아들 요한네스 7세에게 짧은 기간이나마 제위를 빼앗겼는가 하면, 세르비아와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투로 제국의 국력은 극도로 피폐해지고, 1371년에는 드디어 그 자신이 오스만 투르크의 종주권을 승인함에 이르러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콘스탄티노플 성벽 안으로 국한시켰다. 그는 서유럽으로부터의 군사원조를 요청할 목적으로, 동서교회의 통합을 실현시키고자 서방세계를 방문한 비잔티움 제국의 첫 번째 황제가 되었지만, 그 자신은 귀국 길에 베네치아에서 채무의 저당으로 신병이 구속되었다.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누스 Joaanes VI. Cantacuzenus. (재위 1347-1355)

칸타쿠제누스 가문은 트라키아 지방의 대호족으로서 지금까지도 팔라이올로구스 가문과 대항하리만치 명문세가였다. 대략 같은 연배인 안드로니쿠스 3세 팔라이올로구스와 젊은 시절부터 의기투합하여, 안드로니쿠스 3세의 조부와의 항쟁을 지지하였고, 이리하여 내전 끝에 그를 제위에 오르게 했는데, 그가 치세하는 동안은 그 자신이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이 황제가 임종의 침상에서 유언을 남길 때, 그는 아홉 살되는 아들 요한네스 5세를 지지하는 모후 안느, 총대주교 요한네스 카레카스 및 대공 아포카우쿠스의 반대에 부딪치지만, 고향인 데모티카에서 황제를 참칭하여 내란을 일으킨 바, 처음에는 세르비아의, 뒤에는 투르크군의 원조로 요한네스 5세의 세력을 격파하고, 자기 딸을 정통황제에게 출가시키면서 10년간의 기한부 공치제가 되었지만, 이윽고 자기자식을 공치제로 삼음에 따라 인기와 명분을 잃게 되자, 퇴위하여 수도사가 된 후,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고, 정당화시키는 역사를 저술하였다.


안드로니쿠스 4세 팔라이올로구스 Andronicus IV. Palaiologus. (재위 1376-1379)

요한네스 5세의 장남이며, 그의 후계자였으나 부황과 싸워, 1373년에는 오스만 투르크의 무라트 1세의 아들인 사우제스(Sauzes/SauziBay)와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함으로써, 차남인 마누엘이 후계자로 인정되었다. 그러자 그는 1376년에 탈옥하여 제노바인의 도움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다음해에 정식으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1379년에 요한네스 5세가 다시 권력을 탈환하고, 그를 셀림브리아로 옮기면서, 이런 대가로 그는 후계자의 지위를 약속받았지만,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요한네스 7세 팔라이올로구스 Joannes VII. Palaiologus. (재위 1390)

안드로니쿠스 4세의 장남. 자기의 눈알이 뽑혀 장님이 된 원한을 조부인 요한네스 5세에 대하여 품었고, 숙부인 마누엘 2세를 찬탈자로 간주하였다. 1390년 제노바인의 원조로 몇 달동안 황제자리에 올라가 앉았으나, 얼마 후 새 황제인 마누엘 2세와 화해하고, 1399년부터 1402년까지 황제의 서유럽 방문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부재기간 동안 그의 섭정으로서 직무를 수행하였다.


마누엘 2세 팔라이올로구스 Manuel II. Palaiologus. (재위 1391-1425)

요한네스 5세의 차남. 1373년에 형인 안드로니쿠스가 반란 음모사건으로 황제계승권을 박탈당하자, 후계자인 동시에 공치제가 되었다. 어려서는 오스만 투르크의 봉신(封臣)으로서 아나톨리아에로 종군하였고, 1399년에는 서유럽에 대하여 군사원조를 요청할 목적으로 3년동안 서방국가들을 역방하였으나, 이런 정치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천성이 문인기질이던 그의, 이처럼 장기간에 걸친 서방체류가 비잔티움과 라틴 두 세계의 문화교류에 적지 않은 의의를 부여하였다. 그의 치세하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인 바예지드(Bayazit I.)가 티무르(Timour)와 싸워서 패했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의 멸망은 약 반세기 동안 연기되었다.


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로구스 Joannes VIII. Palaiologus. (재위 1425-1448)

마누엘 2세의 장남. 1408년부터 아버지와 공치하였고, 1421년부터 아버지의 은퇴로 사실상 단독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앙카라 전투에 의한 오스만 투르크의 일시적인 해체로 제국부활의 좋은 기회를, 바예지드 1세의 아들들과의 교섭에서 졸렬하게 행동함으로써 그만 놓쳐 버리고, 그 뒤는 서방의 군사원조로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을 회피하고자 페라라-피렌체 공회의에서 정식으로 동서교회 통합조약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그가 귀국한 후에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이 통합결의에 한층 더 불만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서방측 십자군이 그 직후에 바루나에서 오스만 투르크군에게 격파되었기 때문에 그의 정책은 모두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콘스탄티누스 11세 팔라이올로구스 Constantinus XI. Palaiologus. (재위 1448-1453)

마누엘 2세의 4남이며 요한네스 8세의 동생. 그는 동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라는 비극적인 역할을 담당하도록 운명 지어짐으로써 역사상, 또 문학상으로 비잔티움 제국사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이지만, 실제로 그는 제국의 최후를 장식함에 어울리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영웅이었다. 이것은 그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두 동생인 데메트리우스(Demetrius)와 토마스(Tomas)의 지조없고 타락방종했던 생애와 대조할 때, 특히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강한 느낌을 받는다. 1448년 모레아의 미스트라에서, 수도로부터 온 사자의 손으로 왕관을 씌워 받았는데, 이것은 동서교회의 통합문제로 광란상태에 빠져있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정식대관할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주의자인 그는 서방국가들의 무력원조를 붙들어 두기 위하여 1452년 말에, 정식으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동서 양 교회의 통합을 선언하였으며, 다음해 1453년 4월에 시작된 콘스탄티노플 공위전에서는, 몸소 방위전에 대하여 총지휘를 맡아 진두지휘했고, 도성함락에서는 수도와 운명을 같이 하였다.




출 처 : [인터넷] http://members.tripod.lycos.co.kr/darkedda/li

200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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